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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피드백
《마르크스21》 8호에 실린 강동훈의 ‘금융세계화론 비판’은 뒤메닐·레비와 윤소영의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어서 그들이 말하는 금융세계화론의 허점을 풍부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런데 기술 혁신에 관한 뒤메닐·레비의 주장을 비판하는 데서 한 가지 사소한 오류가 있는 듯하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뒤메닐·레비는 마르크스의 이윤율 개념과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 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이런 사실은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가 마르크스주의적 용어와 그 의미가 같지 않다는 점 때문에 중요하다.
뒤메닐·레비는 이윤율을 고정자본 대비 이윤으로, 축적률을 고정자본 증가율로 이해한다. 그런데 이윤율을 이렇게 정의하면, 유동자본(물류비용이나 각종 금융비용 등) 비용이 이윤율 계산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뒤메닐·레비가 추계한 이윤율이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의 이윤율보다 더 높게 나타날 수 있다는 문제가 생긴다.
또, 뒤메닐·레비의 정의를 따르면, 축적률과 이윤율 사이에 인과 관계가 성립한다고 보기 어렵다. 그래서 뒤메닐·레비는 1980년대 이후에는 축적률과 이윤율 사이에 연관성이 사라졌다고 주장하고, 그 공백을 금융 문제로 설명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고정자본의 증가만이 아니라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비율(자본의 기술적 구성이나 이를 가치로 표현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고 이 지표는 이윤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뒤메닐·레비가 말하는 자본생산성은 고정자본 대비 순산출액인데, 이는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즉, 뒤메닐·레비가 말한 자본생산성을 마르크스주의적 언어로 표현하면 (c1+c2+v+s)/c1이다(c1은 고정자본, c2는 유동자본, v는 가변자본, s는 잉여가치). (c1+c2+v+s)/c1은 1 + c2/c1 + (v+s)/c1으로 바꿔 쓸 수 있다. 여기서 불변자본 내의 구성비가 일정하고, 착취율이 정해져 있다고 하면 자본생산성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역수를 모호하게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모호함 때문에 자본생산성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이와 같은 문제는 노동생산성의 개념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또, 뒤메닐·레비가 “기술 진보의 명확한 지표는 노동생산성의 변화”(《자본의 반격》 52쪽)라고 지적한 데서 알 수 있듯, 이들은 기술 진보를 노동생산성(“평균 노동산출량의 시간당 변화”)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강동훈은 뒤메닐·레비가 “자본생산성을 기술 진보의 수준으로 보”고 있다고 잘못 지적했다. 뒤메닐·레비는 임금 상승이 이윤율 저하의 원인이 아니라고 훌륭하게 주장하지만, 기술 진보의 지체가 이윤율 하락의 원인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혼란의 극치를 보여 준다.
기술 진보는 대부분 자본절약적 방식보다는 노동절약적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 결과 노동자 한 사람 당 생산수단의 평균량인 자본의 기술적 구성과 그 가치 표현인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상승한다.
그러나 뒤메닐·레비는 불변자본 중 가치 이전되는 몫의 증가(이것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상승으로 나타난다)나 착취율의 증가 등 많은 요소들이 스며들어 있는 산출량의 증가를 노동 단위와 비교함으로써 기술 진보의 의미를 이해하기 힘든 개념으로 바꿔 놓았다. 그래서 이들은 1970년대 이후 서방 경제에서 기술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아 수익성과 자본축적의 하락을 막지 못했고 이어서 실업이 증대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술 진보가 너무 잘 되었던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안 되었던 것이 문제”라고 주장했다.
뒤메닐·레비는 실질임금의 상승 없이도 이윤율이 하락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기술 진보의 지체를 끌어들였지만 그들이 말하는 기술 진보의 변화는 사실상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c와 v의 비율)의 상승을 의미할 수도 있고, 착취율(v와 s의 비율)의 상승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이 둘의 결합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정구
[보는 법]’이 발터 벤야민의 사상을 요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미지 — 시각과 미디어》의 서평인 최윤진의 ‘프레임의 안과 밖을 모두 보는 법’에는 발터 벤야민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사실, 존 버거는 그의 다큐멘터리 ‘Ways of Seeing발터 벤야민은 19세기 말 독일에서 태어난 철학자이자 예술 비평가로 1920년대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조우하며 역사유물론을 공부했고, 모더니즘(브레히트)과 리얼리즘(루카치) 논쟁에서 브레히트를 지지했다. 그는 1940년 파시스트를 피해 도망가다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벤야민 사상의 원천은 유대 메시아주의, 독일 낭만주의, 역사유물론으로 요약된다.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은 그의 가장 중요한 저작은 아니지만, 1970~80년대 ‘문화적 전환’을 주도한 사람들에게 적극 채용됐고, 한국에서도 1990년대 초 《현실과 과학》의 신현준 같이 ‘전환’을 주도한 문화론자들 사이에서 환영받았다. 이 글에서 벤야민은 대량생산 시대의 기술 발전이 예술 복제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그 덕분에 예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가 온전히 가능해졌다 — 보수파와 혁명가들 모두 — 고 말한다. 그는 기술 발전이 파시즘을 낳았다는 생각은 일면적이고, 대중이 이런 기술을 이용해 스스로 교육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어떤 혁명가들은 이 저작을 상부구조에 관한 그람시의 저작들과 함께 문화와 예술 부문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지평을 확장한 것으로 평가한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는 매우 중요한 저작이지만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처럼 주목받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이 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혁명이 필연적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생각은 ‘역사유물론’이 신학을 고용해야만 가능할 것이다. 둘째, 우리는 혁명이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고, 그것은 필수적이다. 셋째, 미래 혁명만이 과거의 전통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일상의 매 순간은 혁명적 잠재성을 갖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의 기계적 유물론이 파시즘의 승리를 방기한 유럽에서 이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강력한 방어였다.
유정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