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0호를 내며
올해 상반기에 임금과 노동조건을 둘러싼 노동자(특히 청소노동자) 투쟁과 학생들의 등록금 투쟁이 다소 활발하게 벌어졌다. 이것은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지배자들이 취한 조처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문젯거리인 인플레가 낳은 효과였다. 물가 인상으로 앉은 자리에서 소득이 줄어든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수준을 지키고자 저항에 나선 것이다.
이것은 2008년에 시작된 경제 위기의 파장이라는 점에서 영국 학생들의 등록금 투쟁, 아랍의 혁명과 격동, 미국 위스콘신 노동자 투쟁, 그리고 최근의 스페인 청년들의 투쟁과 같은 맥락 속에 있다. 물론 구체적 쟁점, 운동의 양상과 수위는 경제 위기의 정도, 정치 체제의 불안정 여부, 안전 장치의 존재, 개혁주의자의 구실 등에 따라 나라마다 다르지만 말이다.
최근의 반값 등록금 촛불시위는 미친 등록금에 대한 대학생들의 높은 불만을 보여 준다. 그것은 일부 대학생들의 연행이 ‘촉발’한 돌연한 투쟁이었다기보다 개강 전부터 여러 대학들에서 벌어진 등록금 투쟁이 누적된 결과였다. 여기에 더해 재보궐선거에서 이명박 정부에 대한 총체적 불신이 입증되면서 한나라당이 반값 등록금 얘기를 다시 꺼내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일부에서는 2008년 촛불과 현재 등록금 촛불을 비교하곤 한다. 그러나 올해 상반기 투쟁은, 인플레와 이명박 정부의 레임덕 위기가 맞물려 폭발적으로 분출할 수 있는 잠재력에 비하자면, 아쉽게도 그보다 못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여기서 결정적인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 진보진영 주류의 개혁주의다. 특히, 모든 것이 내년 선거에 맞춰져 있고, 정권 교체를 위해 민주당과의 전략적 연합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 투쟁이 민주당과 합의할 수 있는 수위를 넘지 못하도록 단속하는 효과를 낸다. 한나라당을 압박할 수 있는 투쟁이 벌어지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내년 선거에 도움이 되는 수준에서 그쳐야지, 행여 ‘역풍’을 부르거나 동맹(민주당)을 겁줘서는 안 된다.
사실, 이 점이 2008년 촛불 투쟁과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 대목이다. 등록금 촛불 초기에 학생들이 든 배너는 “1년 남았다! 대학생의 심판이 다가온다!”였다. 처음부터 한대련은 임시 국회 직전까지만 투쟁 계획을 내놓았다. 수위를 조절하며 국회를 지켜보겠다는 것이다. 6월 10일 이후 〈경향신문〉은 “당장 공을 넘겨받은 정치권을 주목하는 분위기다” 하고 보도했다.
반대로 2008년 촛불은 부르주아 정치권을 완전히 주변화시켰다. 무게중심이 명백히 거리에 있었기에 민주당 국회의원들은 눈치를 보며 국회 등원을 거부하고 거리로 나와야 했다. ‘거리의 정치’를 그만두고 제도권에 맡겨야 한다는 개혁주의자들의 설득은 부르주아 언론의 대대적인 지원 속에서도 상당 기간 씨알이 먹히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로 사기가 떨어져 있던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2008년 촛불이 자생적으로 분출한 초기에 전혀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가까운 시일 내에 ‘선거적 수렴점’이 없다는 사실에 당혹했다. 그들은 의제와 요구를 제한하고 촛불을 진정시키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와 반대로 현재 등록금 촛불에서는 개혁주의 지도부들이 처음부터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들은 사람들이 불만은 높지만 내년 선거에서 심판하자는 만연한 정서를 뛰어넘어 스스로 행동에 나서도록 조직하는 데는 큰 관심이 없다. 한대련 주류 지도부는 ‘동력이 없다’며 학내 등록금 투쟁을 심화시키는 데는 큰 열의를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대정부 투쟁으로 부르주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대중 스스로 싸우도록 돕는 전술이 아니라 거꾸로 대중이 그들을 쳐다보고 의존하도록 만드는 전술을 사용하는 셈이다.
이런 전술이 투쟁의 확대에 근본적 한계가 있다는 것은, 학내 등록금 투쟁에 열의를 보이지 않던 한대련 주류 지도부가 6월 10일 촛불 집회에 정작 자신의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대거 동원하지 못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오히려 학내 등록금 투쟁이 활발했던 대학의 학생들이 많이 참가했다. 또, 한대련 주류 지도부는 쟁점 확대를 원하지 않고, 노동자들의 참여를 부담스러워한다. 파업 중인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6월 10일 집회에서 연설 기회를 끝내 얻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반대로, 쟁점을 확대해 MB 반대의 정치·사회·경제적 측면을 결합하고, 노동자 투쟁과 연결되도록 해야 진정 위협적인 수준으로 운동을 확대하고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이것이 바로 2008년 촛불의 교훈이다. 다행히 지금은 인플레 속에서 노동자 투쟁이 벌어지고 있고 하투가 예상되는 상황이므로 이런 연결 가능성은 실질적이다. 좌파들은 바로 이런 구실을 투쟁 속에서 해야 한다.
위에서 보듯이, 진보진영 주류의 민주대연합 노선은 이미 여러 차례 선거에서 시행됐고 투쟁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각에선 이 노선을 더 일관되게 밀어붙여 2012년 대선에서도 적용하고 연립정부를 집권 전략으로 삼자고 한다. 대선 독자 완주 여부는 ‘진보정치대통합’의 주요 쟁점으로, 최종합의문에서도 열린 문제로 남았다. 《마르크스21》 이번 호 〈특집〉은 진보진영에서 집권 전략으로 부상하고 있는 연립정부론을 다뤘다.
김인식은 ‘연립정부가 “진보정치의 집권 전략”이 돼선 안 되는 이유’에서 주요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색조는 서로 다르지만 대개 연립정부를 집권 전략으로 고려하고 있다며 세계 진보운동의 부르주아 정부 입각 경험을 통해 그 문제점을 짚고 있다.
크리스 하먼의 ‘진보-개혁 연립정부는 지속 가능한가?’는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서 부르주아 정부 입각 문제가 처음 등장했을 때의 논쟁을 다룬다. 하먼은 장 조레스가 사회주의자들의 부르주아 정부 입각을 지지한 것에 로자 룩셈부르크가 왜 반대했는지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크리스 하먼과 팀 포터의 ‘노동자 정당이 집권하면 노동자 정부인가?’는 좌파 정부의 집권이 사회주의로 가는 길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1973년 칠레 아옌데 정부의 좌절 이후 유럽 좌파들이 이 문제를 둘러싸고 혼란에 빠졌는데, 크리스 하먼과 팀 포터는 역사적 경험을 돌아보며 부르주아 국가의 성격, 노동자 정당의 집권에 대한 혁명적 좌파의 전략 등을 예리하게 분석해 나간다.
이번 호는 운동 내 이슈들을 〈쟁점〉으로 묶었다. 먼저 장호종의 ‘일본 핵발전소 사고와 반핵 운동의 과제’는 이번 사고가 도쿄전력과 일본 정부의 거짓·탐욕·무능이 빚어낸 것임을 들춰낸다. 또, 핵발전을 둘러싼 온갖 거짓말과 신화를 반박하며, 핵발전을 폐기하고 재생 가능 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이 기술적으로는 이미 가능함을 지적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경쟁 속에서 이런 과제는 체제에 도전하는 노동계급 운동 건설이라는 과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장호종은 개인들의 에너지 절약을 강조하는 일부 생태주의자들의 운동 방식의 한계와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반핵 운동이 대중운동으로 성장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최근 몇 달 동안 우리는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아랍 혁명에서 한 구실에 대해 귀가 따갑게 들었는데, 조니 존스의 ‘소셜 미디어와 사회운동’은 바로 이런 문제를 균형 있게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사실, 이것은 새롭고 낯선 얘기가 아니다. 2008년 촛불 당시 이미 웹2.0에 대한 얘기가 떠들썩했다. 조니 존스는 한편으로 인터넷이 ‘광장’을 대체할 것이라는 식의 과장을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 그것이 실제 행동을 약화시키는 장애물이라고까지 보는 시각도 경계한다. 그러면서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는 좌파가 전통적으로 참여해 온 활동들을 결코 대체할 수는 없지만 유용한 보조적 수단이라고 지적한다. 페이스북을 정치적 수단이 아니라 말 그대로 친구 관계를 넓힐 (비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일부 활동가들은 소셜 미디어의 활용에 관해 큰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이정구의 ‘장하준과 그의 제도주의 비판’은 장하준에 대해 그동안 여러 관점에서 제기된 비판들과는 좀 다르다. 이 글은 장하준이 속한 ‘신’구제도주의 학파의 기본 논리를 이해하는 속에서 장하준의 주장을 살필 수 있도록 해줘 큰 틀에서 그 주장의 한계를 인식할 수 있게 해 준다. 또,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제도주의의 비판을 소개하고 반비판함으로써 둘 사이의 차이와 마르크스주의 분석의 우월함을 선명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정병호의 ‘오늘날의 학생운동’은 1990년대 말 이후 한국 대학생들의 처지와 학생운동이 왜, 그리고 어떻게 변했는지를 분석하면서, 올해 상반기 학생운동에서 그것이 어떤 양상으로 나타났는지를 다룬다. 정병호는 정치적 급진화의 귀환이라는 호조건 속에서 올해 청소노동자 투쟁 연대와 등록금 투쟁이 활발하게 벌어졌지만, 야권 연대를 최우선시하는 학생운동 주류 지도부의 노선이 등록금 투쟁을 더 전진시키는 데 난관으로 작용했다고 주장한다.
이번 호 〈쟁점〉의 마지막 글은 전지윤의 ‘사노위의 실패가 좌파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이 글은 지난 1년간 사회주의 노동자정당을 건설하려던 사노위의 노력이 왜 실패로 귀결됐는지 그 과정과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전지윤은 원칙과 강령과 전략과 정치문화, 심지어 언어가 서로 다른 급진좌파 단체들이 모여 토론을 통해 강령을 통일시켜 당을 건설하려는 계획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지적한다. 그러면서 강령 통일이 아니라 몇 안 되는 공동의 구체적 과제를 중심으로 느슨한 공동전선 형태를 취하는 급진좌파 결집체가 현재 급진좌파 사이의 협력을 도모하는 데 더 유용한 수단이라고 한다. 비록 사노위라는 한 단체의 경험이지만 좌파들이 그로부터 제대로 된 교훈을 이끌어내고 함께 배우는 게 필요할 것이다.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토니 네그리, 맥락 속에서 보기’는 《제국이라는 유령》(이매진, 2007)에 실린 ‘토니 네그리를 올바로 보기’와 다른 글이다. 번역의 세심함 문제도 있지만 다른 무엇보다, 《마르크스21》이 번역 대본으로 삼은 영어 원문은 축약되지 않은 것이다. 이 저널에 실린 글이 《제국이라는 유령》에 실린 글의 1.5배 가량 된다.
‘토니 네그리, 맥락 속에서 보기’의 영어 원제를 그대로 우리말로 옮기면 ‘원근법으로 토니 네그리 보기’일 것이다. 미술에서 원근법은 하나의 시점視點을 고정시켜 놓고서 그것을 중심으로 대상을 재현하는 방법이다. 시점이 달라지면 대상이 달리 보인다. 그러나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모든 시점이 다 옳은 것은 아니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 캘리니코스가 옳다고 확신하는 시점은 그 자신이 언제나 분명히 밝히듯이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행위라는 점이다. 아무도 ― 외국 군대든, 농민 게릴라든, 노동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사회민주주의 국회의원이든, 좌익 테러리스트이든 ― 노동계급을 대신해 그들을 해방시켜 줄 수 없다. 오직 노동계급 자신이 행동해야 해방된다.
이렇게 보면, 마치 신조信條처럼 ‘자율’을 역설하는 자율주의의 실제 정치적 궤적은 노동계급의 자체적인 대중운동이 아니라 오히려 소수 활동가들이 노동계급을 대행해서 표현한 몸짓(제스처)이었을 뿐이고, 그 운동 조류의 가장 대표적인 이론가 토니 네그리의 이론도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캘리니코스는 네그리의 1970년대 후반 실천과 1980~90년대 이론을 돌아보면서 이 점을 논증하고 있다. 요컨대 자율주의는 엘리트주의의 일종이지,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 운동이 아니다.
한국에서 자율주의는 1996~97년 연말연시의 이른바 노동법 파업 정국 이후 2002년까지 한국의 반신자유주의 운동이 세계 반자본주의 운동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을 때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그 뒤에도 쇠퇴한 것이 결코 아니다. 2002년 말 촛불 운동이 순식간에 40만 명의 주로 청년이 참가한 거대한 운동으로 성장하던 때 우리는 그 운동 참가자들이 제도권 정당(정치 조직)의 깃발은 물론 급진좌파 정치 조직의 깃발도 내리라고 소리치는 등 자율주의의 부활을 보았다. 물론 복잡하고 난해한 자율주의 이론을 그 집회 참가자들이 수용했다는 뜻은 아니다. 아마 그 청년들의 대다수는 토니 네그리나 존 홀러웨이나 질 들뢰즈의 책을 읽어 보지 못했을 것이다. 2008년 훨씬 더 커다란 촛불 운동이 타올랐을 때도 우리는 ‘자발성’ 예찬론을 귀가 따갑게 들어야 했다. 이때도 촛불 집회 참가자 대다수가 자율주의 이론을 이해해서 그랬던 게 아니었다.
거대한 대중운동이 갑자기 아래로부터 분출할 때 그동안 기성 정치에 무관심했거나 냉담했던 사람들이 대거 그 운동으로 빨려 들어오는 것을 흔히 본다. 이때 기성 주류 정당은 물론 심지어 좌파마저 스탈린주의 유산으로 불신받고 있다면 그 새 세대 운동 참가자 대다수가 아예 정치 자체를 도매금으로 매도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2002년과 2008년 두 경우 모두에서 우리는 자발성 예찬의 효과와 이익이 누구에게 돌아갔는지 알아야 한다. 둘 다 기성 정당과 정치인에게 득이 됐다. 2002년이든 2008년이든 노무현과 민주당 등 자유주의적 포퓰리즘 경향의 기성 정치 세력이 자발성 외침의 과실을 따먹었던 것이다. 정치란 그것을 걷어차 버려 앞문으로 내쫓아 버리면 뒷문으로 슬그머니 들어와 우리의 뒤통수를 때리는 법이다. 정치를 제도권 정치로, 즉 의회 책략이나 선거 경합으로 환원해서 이해하는 대가는 바로 정치를 그런 식으로 하는 자들 ― 주류 정치인들 ― 이 이익을 챙기는 것으로 나타난다.
지금 자율주의가 우리 나라 진보진영에서 득세하는 운동 조류인 것은 아니다. 진보진영 내의 급진 조류들 사이에서도 자율주의는 마치 한물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금 스페인의 거대한 내핍 반대 투쟁에 적극 참가하고 있는 새 세대 청년들 사이에서 자율주의가 대유행이라 한다. 또, 반년 전 5만 명이 보수당사를 에워싸고 격렬한 항의 시위를 벌인 영국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모든 정치 조직들에 적대적인 분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스페인과 영국 청년들 대다수도 네그리와 홀러웨이의 이론을 잘 알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자율주의는 앞으로도 좌파 정치 조직들이 취약하면 거듭 새 세대 활동가들에게 호소력을 지니게 될지 모른다.
아나키즘도 마찬가지다. 사실, 자율주의를 아나키즘의 일종으로 보는 것이 일리가 있다. 마르크스에 대한 태도만 제외하면 말이다. 그래서 이번 호에 아나키즘에 관한 글인 ‘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즘’도 함께 실었다. 아나키즘은 그 옹호자의 숫자만큼 종류가 많다지만, 온갖 아나키즘을 관통하는 공통의 사상과 실천이 있기에 아나키즘이라는 용어를 자타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권위와 강제를 ― 그것이 노동계급 조직의 것이든 그 적대 계급들의 것이든 관계 없이 ― 거부한다는 이 운동이 겉보기와 달리 엘리트적이고 비민주적임을 깨닫기는 쉽지 않다. 혁명적 사회주의 활동가이자 《마르크스21》 편집 자문인 폴 블랙레지가 이 점을 꼼꼼히 논증한다.
《마르크스21》이 벌써 10호까지 오게 됐다.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실천을 고민하는 사람들의 필요에 충실한 저널이 되도록 계속 노력하겠다.
편집자 김하영·최일붕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