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진보사상 조류
토니 네그리, 맥락 속에서 보기 *
이 글은 《제국이라는 유령 ―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론 비판》(이매진, 2007)에 수록된 ‘토니 네그리를 올바로 보기’와는 다른 글이다. 이 글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92호에 실린 축약되지 않은 원문을 번역한 것으로, 《제국이라는 유령》에 수록된 글과는 분량에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이 글이 1.5 곱절 가량 길다.)
축약되지 않은 이 글에서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내용을 누락하지 않고 볼 수 있다. 네그리가 마르크스의 핵심 명제들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고쳐 썼는지에 대한 사례와 비판, 《제국》의 초세계화론 수용이나 ‘제국’의 역사적 위상과 노동계급의 처지 분석에서 드러나는 문제점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제국》이 제국주의 간 갈등을 더는 현대 자본주의의 특징이 아니라고 보는 오류의 문제점 등등.
축약되지 않은 원문 독해를 통해 우리가 캘리니코스의 촘촘한 논의를 더 잘 쫓아가며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이 《마르크스21》 편집팀이 그 원문을 새로 번역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은 이유다. 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더 세심한 번역을 제공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도 특별히 강조하고 싶다.
따라서 전에 ‘토니 네그리를 올바로 보기’를 읽은 독자들이라도 장담컨대 이 글을 읽을 가치가 충분히 있을 것이다.
1 경찰이 끔찍한 폭력을 행사했음에도, 약 30만 명 ─ 그들 중 압도 다수는 이탈리아인들이었다 ─ 이 시위에 참가했다. 젊고 대담하고 전투적인 시위대는 이탈리아 좌파 ─ 거의 4반세기 동안 패배와 사기저하를 겪은 ─ 가 부활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반자본주의 운동은 좌파의 세계적 부활을 뜻한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2001년 7월 21일 제노바 G8 정상회담 반대 시위는 그 의심을 씻어버렸다.2 그러나 새로운 투쟁들은 언제나 과거와의 단절뿐 아니라 연속성의 요소도 포함한다. 다른 상황에서 발전했고 최근까지 주변으로 밀려나 있던 사상 체계들이 다시 등장해 새로운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부활에는 복잡한 문제가 따른다. 새 좌파는 반드시 새로운 사상에 근거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반자본주의 운동의 일부 지도적 인사들의 미사여구는 종종 이런 새로운 사상을 표현한다. 예컨대, 나오미 클라인이 “운동의 탈집중적·비非위계적 구조”와 “거미줄 같은 구조”를 강조하는 것은 기업 세계화에 반대하는 현대 운동의 독창성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다.3 환기시키면서 끝을 맺는다. 제노바 시위 직전에 〈뉴욕타임스〉는 《제국》을 “차세대 거대 담론”이라고 선언했고, 〈타임〉은 “강렬하고 멋진 중요한 책”이라고 말했다. 4 에드 벌리아미는 〈옵서버〉에 다음과 같이 하트에 대한 인물평을 썼다.
《제국》이 정확히 그런 경우다.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와 미국의 문학 비평가 마이클 하트가 쓴 이 책은 지난해[2000년 ― 옮긴이] 출판된 이래 하버드대학교 출판부가 발간한 난해한 양장본 이론서라는 이유로 언론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 책은 “코뮤니스트가 지닌 억누를 수 없는 밝음과 기쁨”을뉴욕에서 어떤 책이 재고가 바닥날 만큼 잘 팔려 도저히 구할 수 없는 경우가 어디 흔한 일인가? 중앙도서관 소장본은 가까운 장래를 대비해 따로 보관한다. ‘보통 24시간 안에 배달된다’는 아마존의 약속은 우스꽝스럽게 됐다. 출판사의 여유분도 없어 재판 인쇄에 들어갔고, 문고판을 준비 중이다. … 하트는 공저자[네그리 ― 옮긴이]와 함께 … 시애틀·프라하·예테보리 시위에서 분출한 운동의 뜻밖의 현인(이자 비평가)이 됐고, 우리와 우리가 읽는 신문 헤드라인을 지배하는 주제, 즉 세계화에 관한 책을 썼다.
미국의 고상한 급진 아카데미는 유행에 민감한 것으로 악명 높다. 그러나 《제국》의 사상은 실질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반자본주의 운동의 주요 경향들 중 하나가 자율주의다. 자율주의의 중요한 정치적 특징은 다음 두 가지다. (1) 레닌주의적 조직관을 거부한다는 것과 (2) 정치적으로 각성한 엘리트가 대중을 위해 행동하는 대리주의적 행동 양식을 채택한다는 것이다. 사실, 자율주의의 정치적 형태는 다양하다. 아나키스트인 ‘블랙 블록’이 가장 악명 높은 형태다. 국가와의 폭력적인 대결을 추구하는 ‘블랙 블록’은 제노바에서 경찰에게 이용당했다.
6 투테비앙케의 주장은 《제국》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투테비앙케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인 루카 카사리니는 제노바 투쟁 뒤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좀더 매력적인 그룹은 이탈리아 자율주의 연합체인 야바스타Ya Basta!다. 이들은 기성 정치 ─ 개혁주의적 좌파 정당을 포함해 ─ 를 거부하는 한편, 독창적인 비폭력 직접행동 양식을 채택한다. 다른 한편, 지방선거에도 출마해 가끔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야바스타는 그 자체로 다양한 입장과 강조점을 지닌 우산 조직으로 행동하고 있고, 시위 때 ─ 가장 유명하게는 2000년 9월 프라하 저항(S26)에서 ─ 하얀 우주복을 입는 것으로 유명한 투테비앙케Tute Bianche와 [인적 구성에서 ― 옮긴이] 겹친다. 나오미 클라인은 야바스타 활동의 주요 기반인 사교 센터들을 ‘창窓’이라고 부른다. 국가로부터 벗어난 다른 생활 방식이나 새로운 참여 정치로 통하는 창 말이다.우리는 제국에 대해, 더 정확히는 세계의 통치에서 제국의 논리에 대해 말했다. 이것은 국민 주권의 침식이다. [국민 주권의 ― 옮긴이] 종말이 아니라 침식이며, 세계적·제국적 구조 내에서 국민 주권을 새롭게 정의하는 것이다. 우리는 제노바에서 이것이 작동하는 것을 보았고, 그 내부에 전쟁 시나리오가 숨어 있는 것도 보았다. 우리는 이런 제국의 논리에 어떻게 대항할 것인지에 대해 여전히 거의 준비돼 있지 않다.
《제국》의 정치적 영향력을 보여 주는 이런 증거는 그리 놀랍지 않다. 토니 네그리는 가장 중요한 이탈리아 자율주의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1936년에 태어났고, 1970년대 후반에 ‘붉은 여단’의 무장 테러 활동에 참가했다는 혐의로 20년 형을 선고받아 현재 이탈리아에서 복역 중이다.[네그리는 2001년 6월에 석방된 후 가택연금에 처해졌다가 2003년 4월에 가택연금이 풀렸다 ─ 옮긴이] 그의 고난은 이탈리아 사회가 심각한 위기를 겪은 1970년대에 자율주의가 처음으로 형성됐다는 역사적 맥락을 보여 주는 지표다. 따라서 《제국》에 대한 평가는 모두 그런 맥락과 네그리 사상의 발전에 대한 이해가 전제돼야 한다.
이탈리아의 정치적 지진과 자율주의의 등장
8 1967~68년 학생 반란과 1969년 ‘뜨거운 가을’의 폭발적인 파업들은 대규모 노동자 투쟁 물결의 서곡이었다. 이것은 광범한 사회적 급진화로 이어졌고, 그 결과 1974년 이혼에 관한 국민투표에서 여당인 기독민주당DC의 과두통치가 패배하는 등의 일이 벌어졌다. 이렇게 유리한 분위기에서 1960년대 말 세 주요 단체들 ─ ‘노동자전위’, ‘계속투쟁’, ‘공산주의를 위한 프롤레타리아 단결당’ ─ 이 주도하는 상당 규모의 극좌파가 등장할 수 있었다. 극좌파는 가장 전투적인 노동계급 부문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중반 그들은 밀라노에서만 2~3만 명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는 심각한 경제·사회·정치 위기에 빠져 있었다. 미국과 서독 정부는 이탈리아를 서구 자본주의의 환자로 여겼다. 부패하고 권위주의적인 기독민주당 정부는 분명히 썩을 대로 썩은 상태였다. 1975년 6월 각급 지방선거에서 좌파는 47퍼센트를 얻은 반면, 기독민주당의 득표율은 35퍼센트로 떨어졌다. 그러나 5년 만에 이탈리아 노동자 운동은 일련의 심각한 패배를 겪었고,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회복하고 있다.
포르투갈 혁명이라는 중요한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전반기에 서유럽을 휩쓸었던 노동자 투쟁 물결은 바로 이탈리아에서 절정에 이르렀다.9 첫째이자 더 중요한 것은, 이탈리아공산당PCI이 기독민주당을 구해 주었다는 점이다. 터바이어스 앱스가 썼듯이, “이탈리아공산당이 1967~69년 노동자·학생 반란에 반대하고 1974년 이혼 관련 국민투표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했는데도 이탈리아공산당이 그 두 사안으로부터 선거적 이득을 챙겼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10 동시에, 이탈리아공산당이 주도하는 이탈리아노동조합총연맹CGIL은 1960년대 말에 공장평의회를 설립하는 식으로 폭발한 현장의 전투성을 상당히 약화시켜 버렸다. 11 1970년대 중반에 실업이 증가하자 작업장 투쟁이 ‘뜨거운 가을’ 시기보다 훨씬 더 파편적이고 수세적으로 진행됐는데 이것도 공산당의 통제력 회복에 일조했다.
그런 재앙의 주요 원인은 두 가지였다.1976년 총선에서 이탈리아공산당의 득표율은 34.4퍼센트였다. 그러나 이탈리아공산당 지도자 엔리코 베를링궤르Enrinco Berlinguer는 이탈리아 자본주의를 구출해 주는 것으로 화답했다. 1973년 9월 칠레 쿠데타 뒤에 베를링궤르는 기독민주당에 ‘역사적 타협’을 제안했다. 미국이 개입하는 바람에 실제로 집권할 수는 없었지만, 이탈리아공산당은 1976~79년에 극단적인 마키아벨리적 기독민주당 정치인이자 바티칸의 협력자인 줄리오 안드레오티가 이끄는 일련의 ‘국민연합 정부들’을 지지했다. 이탈리아공산당은 노동자 운동에 대한 지배력을 이용해 정부의 긴축 프로그램 반대 투쟁을 이탈리아 자본주의의 안정화에 협조하는 쪽으로 돌렸다.
이런 위기의 둘째 요인은 혁명적 좌파의 취약성이었다. 1960년대 이탈리아 극좌파에서 유력한 형태의 마르크스주의는 마오쩌둥주의였다. 중국에서 농민 게릴라들이 자본주의를 전복했다는 생각은, 노동계급 다수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한 지난하고 어려운 과제를 회피할 수 있는 혁명의 지름길이 있다는 발상을 굳히게 했다. 1960년대 말 강렬한 급진화 분위기에서 이것은 노동조합 밖에서 공장기지위원회CUBs를 건설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1970년대 중반 세 주요 극좌파 단체들은 급격하게 우경화했다. 그들의 전략은 1976년 선거를 통해 극좌파도 참가하는 좌파 정부가 등장해 광범한 개혁 강령을 실행할 것이라는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독민주당의 득표율이 증가했고, 혁명적 좌파는 고작 1.5퍼센트만을 얻었고, 이탈리아공산당은 다른 좌파들이 아니라 우파와 연정을 구성했다. 그 결과, ‘노동자전위’, ‘계속투쟁’, ‘공산주의를 위한 프롤레타리아 단결당’은 위기에 빠졌고 매우 급속하게 붕괴했다.
그러나 이것이 대중 투쟁의 끝은 아니었다. 1977년 초에 학생운동이 새로 성장했고, 이 운동은 청년 실업자들에게로 확대됐다. 혁명적 단체들의 느슨한 연합체인 ‘노동자자율’(아우토노미아 오페라야)은 새로운 학생운동에 점점 영향력을 넓혀갔다. 이 학생운동은 1977년 2월 학생들이 로마대학교를 점거하면서 시작됐다. 폴 긴스버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페미니스트들이 몹시 싫어한 단체 ‘노동자자율’(아우토노미아 오페라야)이 점거를 주도했고 사람들의 발언을 통제했다. 2월 19일 이탈리아노동조합총연맹CGIL의 지도자 루치아노 라마가 노동조합과 공산당 간부들의 삼엄한 보호를 받으며 점거 현장에서 연설했다. …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는 비극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라마는 거센 야유를 받으며 연단에서 내려왔고, 자율주의자들과 공산당 간부들 사이에서 폭력 충돌이 벌어졌다. 2주 뒤 약 6만 명의 청년들이 수도에서 벌인 시위는 네 시간 동안 벌어진 경찰과의 게릴라식 전투로 바뀌었다. 양측에서 총을 쐈고, 일부 시위대는 자율주의자들이 선택한 무기인 P38 권총을 찬양하는 섬뜩한 슬로건을 되풀이해 외쳤다.
14 앱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운동은 국가 권력과의 폭력 대결 양상을 띠며 급속하게 확대됐다. 그 와중에 두 명의 젊은 활동가 프란체스코 로루소와 죠르지나 마지가 각각 볼로냐와 로마에서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1977년 초 최초 학생 소요는 뒤죽박죽이긴 해도 대다수 이탈리아 청년들의 소외와 절망을 진정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것은 국민연합 정권의 특징이던 경제 위기와 정치적 순응주의 분위기에 반대하는 저항이었다. 그것의 최초 표현은 훗날 영국 펑크 문화의 많은 요소들을 미리 보여 줬다 ─ ‘인디언’(인도가 아니라 미국의)과의 몽환적인 동일시 양상을 띠는 고의적이지만 악의적이지는 않은 엽기적 경향.
16 네그리의 지적 배경은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의 독특한 이론적 경향인 ‘노동자주의’(오페라이스모)인데, 그 경향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마리오 트론티였다. 노동자주의적 마르크스주의는 목전의 생산과정에서 벌어지는 자본과 노동의 직접적 충돌에 초점을 맞췄다. 트론티는 자본가의 전략과 프롤레타리아의 전략의 상호작용을 탐구했다. 그래서 그는 미국의 뉴딜 정책 하에서 발전한 케인스적 복지국가를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제2차 산업혁명 시기에 형성된 ‘대중 노동자’에 대한 대응이자 그들을 통합시키려는 시도라고 봤다. 17
그러나 1977년 운동의 매력적인 특징과 그 운동에서 표출된 분노에도 불구하고 특히 청년 실업이 크게 증가하는 상황에서 발전한 그 운동은 애초부터 조직 노동계급과 갈등을 빚기 쉬웠다. 그런 가능성은 자율주의의 정치적 영향력 강화라는 현실로 나타났다. 1973년 3월에 처음 등장한 ‘노동자자율’은 내부적으로 이질적인 조직이었지만, 특히 네그리의 저작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18 그러나 1970년대 후반에 경제 위기와 ‘역사적 타협’ 때문에 현장 노동자의 전투성이 와해되자, 그는 ‘노동자주의’의 이론적 개념들을 유지하는 한편, 앱스가 지적하듯이 “사실상 이전의 이데올로기적 특징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19 이론적인 변화의 핵심은 ‘대중 노동자’ 개념을 ‘사회적 노동자’ 개념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노동자주의’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이른바 자본주의적 노동과정에 주목한 다양한 마르크스주의 이론 경향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독일의 ‘자본 논리’ 학파는 또 다른 예였다. 이런 편향은 강력한 작업장 조직이 사용자와 노동조합 관료를 모두 거부했던 격렬한 산업 쟁의 시기에는 일리가 있었다. 1974년에 여전히 네그리는 공장이 “노동 거부와 이윤율 공격 모두에서 특권적인 장소”라고 썼다.네그리는 이제 자본주의 착취 과정이 사회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고, 따라서 학생, 실업자, 임시직 노동자 같은 사회적·경제적으로 주변화된 집단들을 프롤레타리아의 핵심 부문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런 집단들에 비해 이탈리아 북부 대공장의 옛 ‘대중 노동자’는 특권적인 노동귀족처럼 보였다. 네그리의 다음 문구를 보면, 노동자는 임금을 받는다는 사실만으로도 경영자와 똑같은 착취자가 된다.
일부 노동자 집단, 일부 노동계급 부문은 높은 임금 수준과 기만적인 조건에 여전히 매여 있다. 달리 말해, 그들은 수익에 해당하는 소득에 의지해 살고 있다. 그러는 한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경영주와 동일한 처지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잉여가치를 훔치고 빼앗는다. 그들은 사회적 노동이라는 부정한 거래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입장에 ─ 그리고 그런 입장을 뒷받침하는 노동조합 관행에 ─ 맞서 필요하다면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싸워야 한다. 봉급 소득자의 오만을 꺾어 버리기 위해 실업자들이 대공장 진입 투쟁을 벌이는 일이 빈발할 것이다!
21 취업 노동자를 공격하라는 선동은 좀더 일반적인 폭력 예찬의 일부였다. 네그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런 궤변이 그저 이론적 허튼소리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율주의자와 노동조합원 사이에서 벌어지던 폭력적 충돌을 겉보기에 ‘마르크스주의’로 정당화하는 것이었다.프롤레타리아의 폭력이 공산주의에 대한 적극적 암시인 한 그것은 공산주의의 역동성이 지닌 필수 요소다. 이 과정의 폭력을 억제하는 것은 단지 그 역동성을 자본에게 ─ 손발을 묶인 채 ─ 넘겨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폭력은 공산주의의 필요성에 대한 최초의, 즉각적인, 활력 있는 긍정이다. 폭력은 해결책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근본적인 것이다.
한편, 다른 이들은 이런 폭력 예찬론을 그 논리적 결론으로까지 밀고나갔다. ‘붉은 여단’은 1970년대 초에 결성됐지만, 이탈리아 국가에 맞서 무장 테러 활동을 강화하도록 그들을 부추긴 것은 1977~78년의 폭력과 절망의 분위기였다. ‘붉은 여단’의 가장 극적인 행동은 1978년 봄에 기독민주당의 지도자이자 전前 총리 알도 모로를 납치·살해한 일이었다. ‘붉은 여단’은 국가 관료들만 표적으로 삼은 게 아니라, 국가에 협조하고 있다고 ‘붉은 여단’이 간주한 노동조합원들까지도 표적으로 삼았다. 이런 전술들은 공산당이 시민적 자유를 대폭 제한하는 정부 조처를 적극 지지한 것 때문에 그럴싸하게 정당화됐다. 그러나 그 결과 극좌파 전체가 고립됐고, 혹독한 탄압 물결이 몰아쳐 ‘붉은 여단’을 궤멸시켰고 그 조직원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수감됐다.
23 이런 목표를 달성한 것은 1980년대에 이탈리아 자본주의가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이 됐고, 그 가장 대표적인 상징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등장일 것이다.
좌파가 분열하고 약화된 데다 이탈리아공산당과 공모해 득을 본 사용자들이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1979년 10월에 피아트는 토리노의 미라피오리 공장 활동가 61명을 폭력 행사 혐의로 고소·고발하고 해고했다. 이듬해 9월 피아트는 가장 전투적인 작업장 소속의 노동자 1만 4천 명을 해고할 계획을 발표했다. 공산당 지도부조차 이 공격이 나머지 노동자 운동뿐 아니라 자신들도 약화시킬 것임을 알았다. 베를링궤르는 공장 출입문으로 가 공장 점거 지지를 선언했다. 그러나 그는 [자본가들에게 ― 옮긴이] 이미 용도 폐기돼 버린 상태였다. 피아트는 토리노 노동자들의 분열을 이용해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모두 2만 3천 명의 조합원들이 ─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투사였다 ─ 해고당했다. 앱스는 이 전투와 1984~85년 영국 광원 대파업을 비교했다. “피아트의 진정한 목적은 공장의 전체적 세력 균형을 뒤집어, 자신들이 1969년에 빼앗긴 노동자와 생산과정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는 것이었다.”네그리가 마르크스를 푸코로 고쳐 쓰다
24 그 해에 아마도 네그리의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할 수 있는 《맑스를 넘어선 맑스》[국역: 윤수종 옮김, 중원문화 출판, 2010 ― 옮긴이]가 영어로 출간됐다. 이 책은 1978년에 네그리가 루이 알튀세르의 초청을 받아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한 세미나들에 바탕을 둔 것인데, 이탈리아 좌파가 재앙을 겪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쓴 것이었다.
네그리는 이런 패배의 피해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79년 4월에 ‘붉은 여단’과 모로 납치를 배후 조종했다는 날조된 혐의로 파도바에서 체포됐다. 그는 재판도 받지 못한 채 4년 동안 감금당했다가, 1983년에 자유지상주의적인 급진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한 뒤에야 석방됐고, 그 뒤 프랑스로 망명했다. 1984년 네그리는 궐석재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25 이런 열렬한 찬사는 적어도 그 책의 포부에 매료됐다는 것이다. 네그리가 실제로 하고자 하는 일은 마르크스주의를 역사 변화의 원동력에 대한 포괄적 이론이 아닌 단순한 권력 이론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그는 ‘그룬트리세’, 즉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독해를 바탕으로 그렇게 한다. 마르크스가 1857~58년에 쓴 《요강》은 일련의 방대한 초고인데, 10년 뒤 《자본론》 제1권으로 완성된다.
《맑스를 넘어선 맑스》의 영어판 편집자는 이 책을 “단연코 … 유럽 마르크스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문헌들 중 하나”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네그리는 《자본론》을 결함투성이 저작으로 본다. “비판을 경제 이론으로 환원하고, 주체를 객관적 실재성 속으로 소멸시키고, 프롤레타리아의 전복 능력을 자본주의 권력의 재편과 억압적 지성에 종속되게 만든” 책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 단어는 “주체”다. 네그리는 역사를 서로 경쟁하는 계급 주체들 ─ 자본과 노동 ─ 간의 충돌인 “집단적 세력 관계로 환원”한다. 곧, “《요강》의 목표는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가 주체의 이론에 반대하는 노동계급 주체의 이론이다.”27 가장 탁월한 해석들은 《요강》을 마르크스가 후기 저작들에서 정교화하고 수정한 경제 개념들을 위한 실험실 비슷한 것으로 여긴다. 28 네그리는 이런 해석들을 모르지는 않지만, 무감각하기 이를 데 없는 방식으로 기각한다. 그래서 네그리는 《요강》에 대한 우크라이나 트로츠키주의자 로만 로스돌스키의 “선구적 작업”을 인정하면서도 [로스돌스키의 작업은 ― 옮긴이] “양차 대전 사이 공산주의 좌파의 이데올로기, 즉 한편으로 극단적 객관주의와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정설을 되찾아 그 객관주의의 기초로 삼을 필요성”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간단히 처리하고 넘어간다. 29
네그리가 《요강》과 《자본론》의 차이점들에 주목한 최초의 논평가는 결코 아니다. 일부 논평가들은 네그리와는 정반대되는 《요강》 독해를 제시했다. 즉, 《요강》은 자본을 자율적이고 자기 재생산하는 존재로 취급하는 지나치게 ‘객관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를 드러낸다는 것이다.네그리의 마르크스 독해는 사실상 마르크스의 핵심 명제 일부를 체계적으로 고쳐 쓰는 것이다. 다음의 세 가지 예면 충분할 것이다. (1)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 당연하게도, 이 이론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위기론의 토대다. 그러나 과거에 ‘노동자주의자’일 때도 그랬지만 네그리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전개를 자본과 노동의 직접적 충돌로 환원한다. 그래서 그는 “이윤율 저하 경향은 산 노동이 이윤의 권력에 맞서 일으키는 반란을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 네그리는 마르크스가 《자본론》 3권에서 그러한 경향[이윤율 저하 경향 ― 옮긴이]을 경쟁적 축적의 결과로 이해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경쟁적 축적 때문에 자본가들은 노동력보다 생산수단에 더 많이 투자하게 되고, 그 결과 (노동이 잉여가치의 원천이므로) 이윤율이 하락한다. 그러나 네그리는 이런 식으로 개념화된다면 “모든 관계는 경제주의적 수준으로 어그러질 것이고 부적절하게 객관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31 이런 종류의 설명은 임금을 자율적 요인으로 다뤄야 한다는 생각을 함축한다. 그래서 네그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요강》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여러 주제들을 이어받아 임금이 《자본론》 1권에 실제로 등장할 때, 임금은 ‘독립 변수’로 등장한다. 임금 법칙은 자본주의 발전에 포함된 노동에 대한 반란이 주체로 응축되는 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32
(2) 임금 이론: 위기를 자본과 노동의 직접적 충돌의 결과로 직결시키는 이론은 모두 임금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하기 쉽다. 예컨대, 이런 이론은 1970년대에 발생한 전후 첫 주요 위기를 이른바 임금 인상에 의한 이윤 압박으로 설명한다. 잘 조직된 노동자들이 완전 고용의 이점을 이용해 임금을 인상한 결과 이윤율이 감소해 위기가 발생했다는 것이다.33 자본가들이 투자율을 지배함으로써 실업률도 결정하므로 임금은 자본 축적의 종속 변수다. 자본가들은 전투적 노동자들에 맞서 투자 파업을 일으켜 실업을 늘려, 계급 세력 균형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바꿀 수 있다. 실업의 위협에 직면한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과 더 일반적으로는 착취율 증대를 받아들이라는 압력을 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1970년대 중반 이래 이탈리아에서(그리고 유럽 자본주의의 또 다른 약한 고리인 영국에서도) 일어났던 일이다.
이것은 놀라운 구절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 1권에서 실제로 말한 것은 정확히 그 반대다. 곧, “수학적으로 말하면, 축적률은 종속 변수가 아니라 독립 변수다. 그리고 임금률은 독립 변수가 아니라 종속 변수다.”34 이것은 다시 한번 마르크스의 견해들과 정면으로 모순되는데, 마르크스는 특히 〈고타 강령 비판〉에서 노동이 모든 부의 원천이라는 생각을 비판한다. 곧, “노동은 모든 부의 원천이 아니다. 자연도 노동과 마찬가지로 사용가치(확실히 물질적 부는 사용가치로 이루어진다)의 원천이며, 노동 자체는 하나의 자연력인 인간 노동력의 발현일 뿐이다.” 35
(3) 절대적 주체로서의 노동계급: 마르크스의 임금론에 대한 네그리의 명백한 오독은 더 심각한 개념 수정을 보여 주는 징후다. 네그리는 자본주의를 노동과 자본의 적대 관계로 규정하지만, 그 관계에서 “모든 부의 원천이자 잠재력으로서 노동, 즉 주체로서의 노동”에 우위를 부여한다. 네그리가 노동을 일종의 절대적 주체로 둔갑시킨 것은 그의 위기 이론에도 나타난다. 그는 “이윤율 하락 법칙은 필요노동이 고정된 양이라는 사실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한다. 즉, 자본가들이 노동일에서 필요노동의 몫(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을 줄여 착취율을 높이려 할 때 그들은 “종속되는 것을 점점 더 꺼리고, 쥐어짜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세력”과 대면한다. 이런 완강한 저항은 “자본의 발전으로부터의 노동계급의 자율”을 뜻한다. 물론 마르크스는 신이 아니다. 마르크스 이론은 신성불가침이 아니므로, 그의 이론을 수정하는 것이 죄는 아니다. 우리를 염려하게 하는 문제는 네그리의 수정 방향이고, 그런 수정 덕분에 우리가 현대 세계와 더 효과적으로 대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결정적인 점은, 네그리가 마르크스주의를 권력 이론으로 탈바꿈시키려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의 관계는 직접적으로 권력 관계”라고 주장한다. 네그리는 《요강》이 화폐에 관한 장황한 논의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에 각별한 중요성을 부여한다. 거기에서 마르크스는 “화폐에 대한 비판에서 권력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즉, 마르크스가 화폐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자본을 곧장 일종의 권력 형태로 보고 그것과 씨름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화폐 발전 ─ 그 절정은 신용 제도(요즘 말로 금융 시장)이다 ─ 은 생산의 사회화를 매우 왜곡되고 적대적인 형태로 나타낸다. 마르크스는 《요강》을 화폐 논의로 시작하면서 “사회적 자본의 경향적 제도”를 다룬다.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가 이후 “점점 더 사회적인 생산 형태로 발전하고, 그런 생산 형태에서는 가치의 현대적 기능이 필요노동과 축적의 사회적 부분에 대한 명령·지배·개입 기능으로 탈바꿈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여기에서 국가는 “시민사회의 종합”이다.따라서 네그리는 마르크스가 《요강》에서 케인스적 복지국가의 등장을 예측한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매우 빈번하게, 특히 《요강》에서, 국가를 말하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자본을 말하는 것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생산양식의 발전을 고찰하게 되면 국가를 말하는 것이 자본을 말하는 유일한 방식임을 알게 된다. 예컨대 사회화된 자본, 즉 권력이 증대되면서 축적이 이뤄지는 자본, 그리고 명령 이론의 변화, 또한 유통의 시작과 다국적기업들의 국가가 발전하는 것.
여기에서 네그리는 ‘집합적 자본가’가 추구하는 전략에 대한 노동자주의(오페라이스모)의 전통적 집착으로 되돌아간다. 그 전략은 점점 더 국가를 통해 포드주의 생산 조립라인의 ‘대중 노동자’를 억제하고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네그리는 ‘대중 노동자’를 ‘사회적 노동자’로 대체함으로써 이 분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곧,
가치 형태의 자본주의적 대체 ─ 마르크스가 실질적 포섭 과정이라고 불렀던 것 ─ 는 생산관계 전체를 혼란에 빠뜨려 버린다. 그것은 착취를 세계적인 사회 관계로 탈바꿈시킨다. 감옥은 공장과 똑같다. … 사실, 실질적 포섭 작용은 [계급] 적대를 없애기는커녕 오히려 사회적 수준으로 옮겨놓는다. 계급투쟁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계급투쟁은 일상 생활의 모든 계기들로 변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일상 생활 전체가 자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따라서 계급투쟁은 도처에 존재하며, 프롤레타리아트도 마찬가지다. 자본의 지배를 삶의 조건에서 경험하는 사람은 모두 노동계급의 일부다. 생산과정 자체 내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의 논리는 ‘노동 거부’를 함축한다. 노동자들이 임금 관계 자체를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키는 것 말이다. 이것은 암묵적으로 공산주의적이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단지 ‘노동의 폐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생산과정 자체 내에서 자신들의 힘을 강력하게 보여 주는 노동자들은 자기들이 지배하는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네그리는 그 노동자들이 “자기 가치를 증식”하게 되는 것이어서, 자신들의 욕구 실현과 임금 노동 사이의 연결 고리를 끊어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노동 거부와 ‘사회적 자본’의 대결은 점점 세력 관계로 환원된다. 곧, “자본과 세계적 노동력이 완전히 사회적 계급들 ─ 각각 독립적이고 자기 가치 증식 활동을 할 수 있는 ─ 이 되면, 가치 법칙은 그 세력 관계의 역량(포텐차)과 폭력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 가치 법칙은 세력 관계의 종합인 것이다.”
42 그리하여 역설이게도, 원래 생산 현장의 투쟁에 집착하던 형태의 마르크스주의가 홱 뒤집혀 그 정반대로 바뀌어, 권력 관계와 사회운동의 다양성에 집착하는 포스트마르크스주의와 훨씬 더 가깝게 됐다.
점점 폭력적인 이런 대결이 도처에서 벌어진다. 곧, “생산, 직업 시장, 노동 시간, 에너지 구조조정, 가정 생활 등의 자본주의적 편제에 반대하는 투쟁, 이 모든 것은 대중, 공동체, 생활 방식의 선택을 포함한다. 오늘날 공산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공산주의자로서 산다는 것을 뜻한다.”43 1970년대 중반 바로 미셸 푸코가 일련의 핵심 저술들에서, 지배는 다수의 권력 관계 속에 있고 그런 다수의 권력 관계는 모종의 포괄적 사회 변혁으로는 없앨 수 없고(그런 변혁은 스탈린 치하 소련에서처럼 단지 새로운 지배 기구를 복귀시킬 것이다) 오로지 지역별로 분권화된 지역 기반 위에서만 저항할 수 있다는 사상에 근거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을 발전시켰다. 44 여기에서 네그리가 한 일은 사회적 총체성을 다수의 미시적 실천으로 분해한 이 푸코를 계승해, 그것이야말로 마르크스 자신이 한 일이라고, 적어도 《요강》에서 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실제로, 네그리는 자기식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를 매우 분명하게 연결한다. 그는 이렇게 선언한다. “잉여가치 이론은 [계급] 적대를 권력의 미시물리학으로 분해한다.”푸코를 이런 식으로 원용하는 것을 보면 네그리가 역사유물론을 권력과 주체의 이론으로 탈바꿈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이론 덕분에 네그리는 1970년대 후반 이탈리아 계급투쟁의 재앙적 진로를 무덤덤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77년에 네그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세력 균형은 역전됐다. … 노동계급과 노동계급의 사보타주가 더 강력한 권력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합리성과 가치의 유일한 원천이다. 앞으로는 투쟁이 낳은 다음과 같은 역설을 망각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도 불가능하게 됐다. 지배 형태는 향상돼 최상의 것에 가까워질수록 더욱더 공허해진다. 또, 노동계급이 더욱 저항할수록 합리성과 가치는 더욱 충만해진다. … 우리는 다 왔고, 꺾이지 않을 것이고, 다수다.
46 클리프가 네그리보다 상황을 더 정확하게 평가했음이 입증됐다. 사실들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네그리의 태도는 당시에 이탈리아 자율주의 운동 내부에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받았다. 이를테면 세르지오 볼로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저항적 낙관주의는 참으로 감명 깊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정치적 지침과 책임감 있는 지도력을 제공하려 한다면, 계급투쟁의 변동을 정확히 나타내려 노력해야 한다. 같은 시기에 영국에서 토니 클리프는 자본에 유리해지고 있는 계급 세력 균형 변동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키고 있었다.많은 소규모(또는 커다란) 전투들이 벌어졌지만, 그 과정에서 계급의 정치적 구성은 공장 내에서 상당히 변했고, 네그리가 가리킨 방향은 분명히 아니었다. … 요컨대, 개혁주의자들은 공장에 대한 헤게모니를 되찾아,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계급 좌파를 해체하고 공장에서 쫓아냈다.
48 그러나 이 비판은 바로 네그리의 마르크스 고쳐 쓰기에 적용될 수 있다. 역사를 서로 다투는 계급들의 의지의 충돌 ─ ‘집합적 자본가’ 대 ‘사회적 노동자’ ─ 로 환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객관적인 맥락을 재구성해야 비로소 투쟁의 성격과 전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볼로냐는 네그리가 “착취로부터의 해방 과정을 통해 형성될 다른 사회의 모습을 지어내” 이탈리아 노동계급이 겪고 있던 실제 패배 과정을 그저 회피했다고 비판했다. 이런 오판은 사실 더 중대한 이론적 결함의 징후들이었다. 네그리는 근대 초기의 위대한 철학자 스피노자의 찬양자여서, 1970년대 말 첫 구속 때 스피노자에 대한 중요한 책인 《야만적 별종》[국역: 윤수종 옮김, 푸른숲 출판, 1997 ― 옮긴이]을 썼다. 스피노자는 사건을 의지 행사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 의지가 신의 의지이든 인간의 의지이든 상관 없이 말이다. 스피노자는 이런 접근 방식은 “무지의 피난처로 … 도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계급투쟁 ─ 목전의 생산과정 내부에서뿐 아니라 더 넓게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 에 대한 설명을 자본주의 생산양식 전체에 대한 이론에 통합시켰다. 서로 다투는 계급들의 충돌은 더 폭넓은 생산양식을 배경으로 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네그리는 자본가들이 추상적인 지배욕만을 동기로 갖고 있다고 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지를 서로 경쟁에 휘말려 내부적으로 분열돼 있는 계급으로 개념화한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다수 자본들’이라고 불렀던 ─ 바로 《요강》에서(네그리는 이 구절을 무시하지만) ─ 영역이다. 이윤율 하락 경향은 그저 목전의 생산과정에서 벌어지는 노동과 자본의 충돌 때문이 아니라 자본가들에게 노동 절약 설비에 투자하도록 추동하는 경쟁 때문에 일어난다.50 어쨌든 네그리의 이론은 노동계급의 전투성이 여전히 비교적 저조한 상황에서 발생한 지금의 세계적인 경제 침체를 설명하지 못한다.
네그리의 주의주의적 위기 이론은 노동자 투쟁이 고양되던 상황에서 전후 첫 주요 불황이 발전한 1970년대에는 피상적인 매력을 주었다. 그러나 그때조차 네그리의 위기 이론은 매우 부적절하게 위기를 설명했다. 당시 위기는 해당 사회의 투쟁 수준과 무관하게 일반적인 이윤율 하락을 반영했다. 서독과 미국도 이탈리아나 영국 못지 않게 경제 위기의 제물이 됐다. 전자의 나라들이 후자의 나라들보다 계급투쟁 수준이 훨씬 더 낮았는데도 그랬다.게다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존속하는 한 자본가들이 우월한 지위를 유지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에 그랬듯이 자본가들은 생산수단에 대한 지배력을 이용해 공장을 폐쇄하고 노동자를 해고하는 식으로 노동자들을 약화시킬 수 있다. 그 때문에 생산 현장의 반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노동자들에게는 사회 전체 수준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자본을 몰수할 수 있는 일반화된 정치 운동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개진한 주장을, 바로 네그리가 거듭 비난하는 ‘객관주의’ 혐의를 스스로 입증하는 것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 마르크스주의는 객관과 주관의 변증법을 기본 원칙으로 삼지, 그 중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로 환원하지 않는다. “주체 없는 과정”을 말하는 알튀세르의 역사 개념처럼 주체를 객체로 환원하지 않는 한편, 마르크스주의를 주의주의적으로 고쳐 쓰는 네그리 이론처럼 객체를 주체로 환원하지도 않는다. 사회 구조는 ─ 결정적으로 생산력과 생산관계 ─ 인간 행위자가 성취할 수 있는 것에 한계를 부과하지만, 또한 인간 행위자가 세계를 개조하려 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잠재력을 제공한다.
구성권력에서 제국으로
《맑스를 넘어선 맑스》는 네그리의 사상이 교착 상태에 빠졌음을 드러냈다. 그 저작은 1970년대 말에 완패한 정치 운동의 지도적 원리를 이론적으로 분명하게 표현하려 했던 것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저작들에서 네그리는 《맑스를 넘어선 맑스》에서 다뤘던 주제들을 새로운 맥락 속에 자리 잡게 해 발전시키려 했는데, 이 시도는 《제국》에서 정점에 이른다. 이 시기의 저술들은 많은 것들이 근대 정치사상사에 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이론상으로만 보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 문헌들은 또한 네그리의 체계를 재구성하는 데 기여한다. 이런 성격을 간략하게 개관하면 몇 가지 요점들이 분명히 부각된다.
52 네그리는 그 뒤 저술들에서 이런 사상을 더한층 발전시킨다. 그는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에서 시작해 초기 근대 정치사상(가장 중요하게는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을 거쳐 혁명의 시대에 점차 분명하게 표현되고 마르크스에서 정점에 이른 ‘구성권력’ 개념 ─ 특정 구성 형식의 토대가 되고 사회·정치 구조를 만들고 개조하는 집단적 능력 ─ 의 발전을 추적한다. 사회·정치 구조의 형성과 개조에는 두 종류의 힘인 ‘포텐차’(프랑스어의 ‘puissance’에 해당함)와 ‘포테레’(프랑스어의 ‘pouvoir’에 해당함) 사이의 충돌이 수반되는데, 각각 대중(네그리가 점점 ‘다중’이라고 부른)의 창조적 역량 대 자본의 지배 간의 충돌이 그것이다. 53
네그리는 이미 《맑스를 넘어선 맑스》에서 이른바 ‘구성 원리’를 강조한 바 있는데, 네그리에게 ‘구성 원리’는 투쟁이 질적으로 새로운 구조 ─ 이것 자체도 더한층의 변혁을 일으키는 새로운 투쟁의 대상이 된다 ─ 를 창출할 수 있음을 가리킨다.네그리는 매우 추상적인 구성권력 개념을 제시한다. 구성권력은 “존재의, 달리 말해 구체적인 사람, 가치, 현실의 제도와 질서가 지닌 창조적 역량[포텐차 ― 옮긴이]이다. 구성권력[포테레 ― 옮긴이]은 사회적·정치적인 것을 인식해 그 둘을 존재론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사회를 구성한다.” 네그리는 마르크스가 자본이 본원적 축적의 시기에 폭력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사회를 창조했을 뿐 아니라 그 뒤 다중에 본질로 내재하는 창조적 협동 능력을 활용하는 식으로 자본 속에서 구성권력이 작용함을 간파했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협동은 사실 다중의 활기차고 생산적인 맥박이다. … 협동은 혁신이고 재산이다. 따라서 다중의 표현을 규정하는 창조적 잉여의 토대다. 다중의 분리 위에서, 다중의 소외 위에서, 다중에 대한 생산적 수탈 위에서 명령이 구성된다.마르크스 이론에서 자본이 전유하고 착취하는 협동 노동은 말할 나위 없이 노동계급의 노동이다. 네그리는 마르크스의 주제들을 더 추상적인 철학 용어로 다시 구성함으로써 그 주제들이 일으키는 반향을 이용할 수 있는 한편(예컨대 자본이 남의 창조력에 기생한다는 생각), 이해하기 쉬운 계급 분석을 퇴장시킨다. 그러나 네그리의 1970년대 저작들에서 나타났던 경향, 즉 대중의 주체성을 절대화하는 경향은 여기에서도 나타난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위기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기원에서도 구성권력의 실천은 모두 스스로 자기 역량[포텐차] 과정의 절대적 주체가 되고자 하는 다중의 긴장을 드러낸다.” 그러나 네그리는 초기 저작에서 나타나는 주관주의를 넘어 구성권력의 “온전한 행위 방식에 적합한 주체”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 네그리가 생각하기에 그 대답은 ‘제2의 푸코’에게서, 특히 푸코의 《성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네그리는 이렇게 말한다. “푸코가 묘사했듯이, 인간은 절대적 해방의 능력을 가져다 주는 저항의 총체로 등장하며, 이는 삶 자체와 삶의 재생산을 표현하지 못하는 그 어떤 목적론으로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삶은 스스로 해방되는 것이며, 삶을 제한하고 구속하는 모든 것에 저항한다.”
57 들뢰즈는 특히 펠릭스 가타리와 함께한 주요 이론 작업인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하권인 《천 개의 고원》에서 욕망을 삶의 표현으로 이해했다. 비록 역사적으로 특정한 권력군群 속에 끊임없이 한정되고 계층화되지만, 욕망은 역시 끊임없이 그 권력군群을 전복하고 선수를 친다.
역사의 온전한 주체가 되려고 분투하는 다중이 바로 삶의 표현이다. 이처럼 네그리는 일종의 생기론 ─ 즉, 모든 물리적·사회적 세계 전체를 근원적 생명력의 표현으로 여기는 형이상학적 이론 ─ 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관주의를 주창하려 한다. 사실, 네그리는 이 대목에서 푸코보다는 프랑스 포스트구조주의의 또 다른 핵심 인물인 질 들뢰즈에게 더 많이 빚을 지고 있다. 푸코는 자신의 권력 이론의 철학적 함의와 맞닥뜨렸을 때 혼란에 빠지지는 않았어도 얼버무려 회피했기 때문일 것이다. 들뢰즈는 20세기 초 프랑스 생기론 철학자인 앙리 베르크손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들뢰즈의 생기론은 ‘물질 생기론’이다. 들뢰즈의 물질 생기론에 따르면, ‘물질에 고유한 생명’이 있고 그 속에서 물질이 액화돼 흐르는 것이다. 사실, 물질은 욕망과 구조가 같다. 욕망은 권력의 위계를 구획한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든다. 그래서 들뢰즈는 유목민을 권력에 대한 저항의 본보기로 여긴다. 국가의 추진력은 ‘영토화’다. 영토화는 욕망을 권력군群 안에 가두고 특정 영토 안에 얽매는 것이다. 유목민의 추진력은 ‘탈영토화’하는 것, 즉 경계를 넘고, 위계 구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사실, 유목민의 기본적 투지는 매끄러운 공간을 차지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특징도 바로 탈영토화 경향이다. 곧, “세계는 또다시 매끄러운 공간(바다, 하늘, 공기)이 된다.”59 더 일반적으로 말해, 네그리는 들뢰즈의 생기론을 이용해 전에는 자기 나름의 마르크스주의에 없었던 철학적 토대를 놓는다. 그러나 그 대가는 비싸다. 왜냐하면 들뢰즈가 제공한 것은 매우 사변적인 형태의 형이상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그리의 후기 저작들에는 다니엘 벤사이드가 “초월이 없는 이상한 신비주의”라고 일컬은 것이 엿보인다. 60 이 점은 네그리의 최근 저작인 《제국》에 가장 잘 들어맞는다. 《제국》은 나름으로 괜찮은 책이다. 문체도 아름답고, 서정적 문구와 흥미로운 통찰도 가득하다. 그러나 《제국》에는 심각한 결함이 있다.
이 매끄러운 공간이 제국의 공간이다. 하트와 네그리는 자신들이 《천 개의 고원》에 빚을 지고 있음을 분명히 인정한다.《제국》의 범위와 복잡성 때문에 나는 주요 주제들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다. 특히 세 가지가 눈에 띤다. 첫째, 하트와 네그리는 경제의 세계화 때문에 국민국가가 세계 자본의 도구로 전락했다는 이른바 초세계화론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하트와 네그리는 다국적기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다.
… 그들[다국적기업들 ― 옮긴이]은 영토와 주민을 직접 배치하고 통합한다. 그들은 국민국가들을 자신들이 움직이는 상품·화폐·주민의 이동을 기록하는 단순한 도구로 전락시키는 경향이 있다. 초국적 기업들은 노동력을 다양한 시장에 직접 배분하며, 자원을 기능적으로 할당하고, 세계적 생산의 다양한 부문을 위계적으로 조직한다. 투자를 선별하고 금융·통화의 흐름을 좌우하는 복잡한 기구가 세계 시장의 새로운 지도, 즉 세계의 새로운 생물학적·정치적 구조를 사실상 결정한다.
그러나 국민국가가 쇠퇴한다고 해서 정치 권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하트와 네그리가 제국이라고 부른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주권이 출현한다. 곧,
제국주의와 달리 제국은 영토적인 권력 중심을 결코 만들지 않고, 고정된 경계나 장벽들에 의지하지도 않는다. 제국은 개방적이고 팽창하는 자신의 권력 안에 세계 전체를 점차 통합하는, 탈중심적·탈영토적 지배 기구다. 제국은 명령 네크워크를 조율함으로써 혼종적 정체성, 유연한 위계 질서, 다양한 교환을 관리한다. 제국주의적 세계 지도의 뚜렷한 국민적 색깔들은 제국의 전 세계적 무지개 속에서 뒤섞일 것이다.
63 하트와 네그리는 그런 말을 살짝 비틀어 비판적으로 사용하는데, 그런 말이 자본주의적 지배의 새 국면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 지배는 (현대 자유주의적 사회들의 특징이라고 흔히 예찬되는) 혼종성과 다문화주의에도 불구하고 작동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런 특징들을 통해 작동한다. 곧, “근대성의 변증법이 끝났다고 해서 착취의 변증법도 끝난 것은 아니다. 오늘날 인류는 거의 다 어느 정도 자본주의적 착취의 네트워크 안에 흡수되거나 그 네트워크에 종속된다.” 64
하트와 네그리가 이 책에서 사용하는 언어 ─ ‘혼종성’, ‘다양성’, ‘유연성’ 등 ─ 는 우리가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이의 양극화가 뚜렷하게 존재하는 자본주의를 넘어섰다는 생각을 전파하고자 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의 용어다. 네트워크라는 은유는 거의 변호조로 현대 자본주의를 설명할 때 널리 사용된다. 그 은유가 권력의 위계와 집중이 없어졌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65 이렇게 보면, 채널4의 〈빅 브라더〉가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보다 더 위험하다. 상동 행동[같은 동작을 일정 기간 반복하는 것 ― 옮긴이]과 조종되는 행동에 참여하는 것을, 자발적으로 하는 진짜 즐거운 활동이라고 믿게 해 주기 때문이다.
하트와 네그리는 ‘삶정치’라는 푸코의 용어를 빌려, 개인들을 주체로 만들고 그들에게 적절한 동기를 부여하는 식으로 내부로부터 작동하는 지배 형태들을 언급한다. 곧, “이제 권력은 생명 의식과 창조 욕망으로부터 자동 소외 상태가 되게끔 두뇌(소통 체계, 정보 네크워크 등에서의)와 신체(복지 체계, 감시 활동 등에서의)를 직접 조직하는 기구들을 통해 행사된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더 오래된 개념과 모델이 필요하다. 인권 같은 보편적 가치를 앞세워 국민 주권을 무시하며 점점 더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제국 주권이 등장 ─ 더 정확히 말하면 재등장 ─ 했다는 징후다.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이 이해했듯이, 제국에는 한이 없다. 제국은 어느 한 국가의 소유물이 아니다. 심지어 미국의 소유물도 아니다. 걸프 전쟁 때[1991년 1월 ─ 옮긴이] 미국은 “자국의 국가적 이유를 앞세운 것이 아니라 세계적 권리의 이름으로” 개입했다. 3중의 새로운 초국가적 권력 구조는 로마 제국을 군주정·귀족정·민주주의의 결합으로 묘사한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우스의 묘사와 일치한다. 꼭대기에는 ‘군주제’ 기구들로 미국, 주요 7개국(G7), 나토·IMF(국제통화기금)·세계은행 같은 국제 기구들이 있다. 그 밑에는 ‘귀족’ 엘리트들에 해당하는 다국적기업들과 국민국가들이 있다. 끝으로, 인민을 대표한다는 ‘민주적’ 기구들로 유엔 총회와 NGO 등등이 있다. 둘째, 하트와 네그리는 이 지나치게 복잡한 구조의 역사적 위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들은 이렇게 단언하며 강조한다. “제국은 제국에 선행했던 권력 구조에 대한 향수를 근절하기 위해, 그리고 세계적 자본으로부터 국민국가를 지키거나 부활시키려 하는 등의 낡은 합의로 복귀하는 것을 수반하는 정치 전략 일체를 거부하기 위해 필요한 일보 전진이다.” 하트와 네그리는 이 입장을 자본주의 자체의 역사적 진보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강조와 비교하지만, 그들은 그 이상의 것을 연관시키고 있다. 곧, “다중이 제국을 생기게 했다.” 하트와 네그리가 (또다시 푸코를 본따) ‘훈육사회’라고 부른, 뉴딜로 만들어진 사회에서는 자본과 국가가 규칙으로 사회 전체를 지배한다. 그런데 이 훈육사회는 1960년대 후반에 “국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적·반자본주의적 공격들이 합류하고 누적된 결과”로 위기에 빠졌다. 제국의 기원에 대한 이런 주장은, 앞서 봤듯이 네그리가 1970년대에 옹호했던 주의주의적 위기론의 강화판이다. 곧,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은 자본에 한계를 부과할 뿐 아니라 변혁의 조건과 성격을 좌우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이 미래에 채택해야만 할 사회적·생산적 형태들을 실제로 만들어낸다.” 제국의 경우, 미국 노동계급이 전위 구실을 했다고 한다. 곧, “이제 국제 자본주의 명령의 패러다임 변화에 관해서는 미국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국제 또는 다국적 노동자들의 욕망과 필요를 가장 충실하게 표현하는 주체로 등장한다.”69 그러나 트론티가 뉴딜 시기에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창출한 것으로 본 케인스적 복지 자본주의는 하트와 네그리가 보기에 1960년대와 1970년대 노동계급의 반란 때문에 붕괴해 제국에 자리를 내주었다.
이 일반적 테제는 이탈리아 노동자주의 운동 내부에서 오래 계속된 강조점을 반영한다. 가령 《제국》이 출판되기 30년 전에 트론티는 이렇게 주장했다. 노동의 주도권 덕분에 자본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됐고, “유럽 노동자들은 현재의 요구를 성취하기 위한 가장 선진적인 행동 모델을 그들에 앞서 1930년대 미국 노동자들이 채택한 승리 비결, 즉 적을 패퇴시키는 방법에서 찾는다.” 셋째, 자본주의 발전의 이 새 국면에서 노동계급의 처지는 어떠한가? 하트와 네그리는 자본주의의 새 국면에서 착취와 억압이 끝났다는 생각은 거부하지만, 훈육사회가 ‘통제사회’로 대체됐다고 본다. 개인들은 학교와 공장 같은 특정 제도들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압력을 받아 스스로 훈육된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정보 기술 때문에 노동은 “비물질적”이 된다. 따라서 노동계급은 매우 모호한 용어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사실, 네그리는 이미 1970년대에 그런 용어들로 노동계급을 이해했었다. 곧,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자신의 노동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과 재생산 양식에 의해 착취되고 그에 종속되는 사람을 모두 포함하는 광범한 범주라고 이해한다.”71 그러나 하트와 네그리는 제국의 모순들을 분석하려 할 때 대체로 스피노자의 다중 개념을 더 애용한다.
이처럼 《제국》은 네그리식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범주들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그 범주들의 내용은 바뀌었지만 말이다. 예컨대, 1970년대에 네그리는 사회적 노동자가 케인스적 복지 자본주의의 특징인 국가 통제 ─ 요즘이라면 그가 ‘훈육사회’라고 부를 ─ 때문에 생겨났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사회적 노동자는 새로운 ‘정보 자본주의’의 산물이 됐다. 곧, “오늘날 포스트포드주의적이고 정보화된 생산 체제와 부합하는 노동자 전투성의 국면에서 사회적 노동자라는 인물상이 등장한다.” 자본이 진정으로 세계적인 경우에 (로자 룩셈부르크가 예측했듯이) 자본은 한계에 봉착한다. 제국에서 “노동의 힘은 과학·소통·언어의 힘에 의해 채워지고”, “생명은 모든 생산을 채우고 지배한다.” 보통 말하는 그런 사회적 활동이 이제 경제적 잉여의 원천이다. 곧, “착취는 협동의 징발이고, 언어 생산의 의미들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다중으로 표현되는 “존재의 근본적 생산성”에 비해 제국은 긍정적 실재가 전혀 없는 기생적 사회 구성체이자 부패 형태다.73 《제국》은 구체적 역사 분석서인 것 못지 않게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을 응용한 저작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네그리는 또다시 마르크스주의 개념들을 느슨하고 은유적인 용어 ─ 들뢰즈의 형이상학과 융합될 여지가 충분한 ─ 로 재해석한다. 그리하여 하트와 네그리는 제국의 부정적·기생적 성격을 들춰낸다. 곧, “제국의 행위가 효과적일 때 그것은 제국 자신의 세력 때문이 아니라, 제국의 권력에 대한 다중의 저항에서 비롯한 반향에 의해 제국이 움직인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실은 저항이 권력에 앞선다고 말할 수 있다.” 하트와 네그리가 인정하듯이, ‘저항이 권력보다 선차적’이라는 테제는 들뢰즈한테서 직접 끌어낸 것인데, 들뢰즈는 그 선차성을 생명의 “근본적 생산성”의 결과로 보았다.제국의 한계
74 그 책이 제시하는 현대 자본주의 분석은 대개 분명치 못하며, 어떤 특정 사항들에서는 크게 잘못된 생각을 내놓고 있다. 하트와 네그리는 자신들이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따라 제국주의를 논의하고 있음을 표방한다. 그들은 노동자들이 다 구매할 수 없는 상품들을 구매할 비자본주의적 ‘외부’가 자본주의에 필요하다는 룩셈부르크의 주장을 원용한다. 75 그러나 하트와 네그리는 제국이 이런 외부를 없애고 전 세계를 자본의 지배 하에 통합시킨다고만 말할 뿐, 자본주의 발전의 이 국면 특유의 위기 경향들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철학적 일반론을 그런 위기 경향들에 대한 설명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말이다. 물론 네그리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 사이의 대논쟁을 ‘객관주의’라고 일축할 것이다. 그 대논쟁은 제2차세계대전 후의 자본주의 역사에 대한 로버트 브레너의 해석으로 유발됐다. 그러나 《제국》은 자본주의 위기의 메커니즘들이 오늘날에도 도대체 어느 정도로 작동하는지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76
《제국》처럼 복잡하고 암시적인 책에 대해서는 당연히 많은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그 책의 핵심적 약점이라고 생각되는 세 가지 논지에 집중하겠다. 게다가 《제국》은 한 가지 핵심적 사항에서 명백히 틀렸다. 하트와 네그리는 제국주의 간 갈등이 더는 현대 자본주의의 커다란 특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곧, “몇몇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의 갈등이나 경쟁이었던 것이 이제는 그들 모두를 과잉 결정하고, 그들을 통일된 방식으로 조직하고, 권리에 대한 명백히 탈식민지적·탈제국주의적인 통념에 따라 그들을 다루는 단일한 권력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됐다.” 서로 경쟁하는 권력 중심들이 있는 제국주의 대신에 들뢰즈가 “매끄러운 공간”이라고 부른 비인격적·분권적 권력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곧, “제국의 이 매끄러운 공간 속에 권력이 들어설 장소는 없다. 권력은 도처에 있지만 또한 아무 데도 없다.”78 주권 문제는 권력 행사를 도덕과 법률 면에서 정당화하는 문제다. 따라서 주권은 이데올로기 현상이다. 물론 모든 경우의 이데올로기가 그렇듯이 이데올로기는 실질적 효과를 낸다. 확실히 이데올로기 면에서 변화가 있다. 그래서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개념은 [자국의 ― 옮긴이] 국익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타국 국민의 인권과 인도주의적 필요를 옹호해 그 국가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허용된다고 단언한다. 더 폭넓게 말하면, G7·나토·유럽연합·WTO 같은 이른바 ‘지구적 거버넌스 형태들’의 발전은 주권의 혼종화를 뜻하며, 따라서 흔히 국가의 행위는 그 국가의 헌법 절차가 아니라 모종의 국제 기구의 권위에 따라 정당화된다고 한다. 79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형이상학의 구름이라고 불렀던 것에는 일말의 진실이 숨어 있다. 하트와 네그리는 제국을 주권의 한 형태로 정의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변화가 지정학적 권력의 실제 분포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주도적인 서방 자본주의 열강들이 기존 국제 기구를 지배한다는 점에서 국제 기구는 지구적 권력의 위계적 성격을 반영할 뿐 아니라 그런 열강들을 분열시키는 갈등의 영향으로 형성된다. 특히 미국이 일본과 유럽연합(그 자체가 전혀 동질적이지 않은 존재)의 이익을 거스르는 행동을 종종 한다. 주로 경제적·정치적 형태의 이런 경쟁은 미국과 중국·러시아가 서로 갈등을 빚도록 전개되는 지정학적 갈등 구조와 얽혀 있다. 서로 경쟁하는 자본주의 권력 중심들 간의 이런 심원한 적대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현대 세계의 성격을 크게 오해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것은 하마터면 이 세계에 대한 변호론을 내놓을 뻔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경향이 《제국》의 두번째 커다란 약점이다. “매끄러운 공간”, 즉 권력이 “도처에 있지만 또한 아무 데도 없”는 분권적 네트워크인 제국이라는 개념은 앤서니 기든스 같은 제3의 길 이론가들이 장려하는 사상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 기든스는 ‘정치적 세계화’가 경제적 세계화와 동반하고 세계 시장을 민주적 형태의 “글로벌 거버넌스”에 종속시킨다고 주장한다. 물론 하트와 네그리는 그런 생각을 비판하지만, 그들의 일부 공식들은 사뭇 다른 정치적 목적에 적합하다. 그래서 특히 무신경한 친親블레어 이데올로그인 마크 레너드는 네그리와의 인터뷰를 열의를 갖고 발표했다. 레너드는 네그리가 “세계화는 집단 간의 환원주의적인 평등 추구의 기회라기보다는 자유와 삶의 질에 관심 있는 좌파 정치에” 기회라고 주장한 것을 들어 네그리를 칭찬했다. 사실, 그 말은 토니 네그리보다는 토니 블레어의 말처럼 들린다.82 분명 전쟁이 서방 자본주의 블록 내부에서 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 그 이유들은 너무 복잡해 지금 여기서 다룰 수는 없다. 그러나 2001년 4월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미국의 충돌을 초래한 정찰기(첩보기) 위기는 동아시아의 군비 증강과 지정학적 긴장 고조의 징후이고, 이 긴장은 장차 무력 충돌로 발전할 수도 있다. 최근 미국 안보 분석가 두 명은 대만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긴장을 두고 이렇게 썼다. “아마도 지구상 어느 곳도 상황이 [남중국해만큼 ― 옮긴이] 다루기 힘든 곳은 없으며, 미국이 참가하는 주요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그 지역만큼 ― 옮긴이] 매우 현실적인 곳도 없다.” 83 만일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난다면 그것은 네그리가 ‘문명국들’이라고 부른 국가들(네그리가 이 용어를 비꼬는 뜻으로 썼기를 바라자) 간의 전쟁일 것이다. 선진 자본주의 세계 밖에서는 전쟁이 사라질 조짐이 안 보인다. 콩고민주공화국의 전쟁에서만 1998년 이래 지금까지 2백5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84
네그리가 자신의 말을 다른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보는 것까지 책임질 수야 없겠지만, 그 자신이 레너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비판받을 수 있다. “문명국들끼리 전쟁을 벌일 수 없다는 것이 엄청난 변화다. 그러나 이것은 기업인들이 가져온 변화가 아니다. 더는 기꺼이 전쟁터로 가지 않으려는 노동계급이 이탈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틀림없이 하트와 네그리는 이런 종류의 끔찍한 고통을 알고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요지는 지금까지 일어난 것과 같은 그런 전개가 ‘다중’의 승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지조차 네그리의 개인사와 직접 관련돼 있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변호론적인 함축이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자본주의가 대규모 구조조정을 겪었고, 그 주요 측면 중 하나가 자본의 더 큰 세계적 통합이었다는 점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변화들을 어떤 의미에서든 ‘다중’의 승리로 보는 것이 정말 옳을까? 그렇게 보는 것은 자본주의의 재편을 가능케 한 진정한 패배들 ─ 1979~80년 이탈리아 피아트 자동차 노동자들과 1984~85년 영국 광원 대파업의 패배, 그리고 자본이 기존 형태의 노동계급 조직들을 파괴하고 활동가들을 색출·퇴출하고 전에 도전받던 영역들에서 지배력을 재확립한 다른 투쟁들 일체 ─ 을 역사에서 삭제하는 것이다.
85 이라는 것을 우리가 부정할 필요는 없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사실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이다. 자본주의의 현재 형태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전개되는 맥락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1980년대와 1990년대에 ― 옮긴이] 자본주의의 자체 개혁 과정이 노동계급의 심각한 패배를 수반했다는 사실을 잊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패배들을 역사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네그리에게는 편리할지 모른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이론과 정치가 1970년대 말의 결정적 시험이 요구한 것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었는지를 직면하지 않고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고 싶지 않은 건 보지 않는 그런 선별적 시력을 용인할 수 없다.
이런 역사를 인정한다고 해서 하트와 네그리가 주장하듯이 “세계화가 이전의 착취와 통제 구조의 진정한 탈영토화를 작동시키는 한에서는 세계화는 실제로 다중 해방의 조건”86 이 요구들의 가치를 논의할 수 있겠다. 첫째와 셋째 요구는 표현이 아주 불분명하고, 둘째 요구는 전혀 독창적인 것이 아니고 오늘날 좌경 자유주의 정치에서 흔한 것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이 강령을 실행할 수 있는 운동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과거 투쟁의 역사를 탐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지금 어떤 전략을 추구해야 할지를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국》의 셋째 주요 약점은 이 책이 독자들에게 아무런 전략적 조언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국》은 “전 세계 다중을 위한 정치 강령”으로 세 가지 요구를 제시하며 끝맺는다. “세계적 시민권”, “모든 사람을 위한 사회적 임금과 [기본 ― 옮긴이]소득 보장”, “재전유권”이 그것이다.87 그러나 다른 투쟁들은 어떤지 몰라도 사파티스타 반란과 1995년 11~12월 프랑스 운동은 공통의 정치 언어 요소들이 있었고, 두 경우 모두 신자유주의를 적으로 규정했다. 그래서 두 운동은 시애틀에서 가시화된 반자본주의 의식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제국》의 전략적 공백은 단지 세부사항의 누락이 아니라 하트와 네그리의 심오한 가정들을 일부 반영한다. 약간 기묘한 한 구절에서 두 사람은 “20세기 마지막 몇 년 새 벌어진 가장 급진적이고 가장 강력한 투쟁들”, 가령 톈안먼 사건, 제1차 인티파다, 로스엔젤레스 소요, 치아파스, 1995년 프랑스와 1996~97년 한국의 파업 등이 “공통의 적에 대한 인식”이나 “공통의 투쟁 언어”를 공유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명백히 시애틀 시위 전에 《제국》을 쓴) 하트와 네그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아마도 투쟁의 소통 불가능성, 잘 짜여진 소통 통로의 결여는 사실상 약점이라기보다는 강점일 것이다. 즉, 모든 운동이 즉각적 전복을 추구하고, 효과를 내기 위해 외부 도움이나 확장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강점이다. … 제국의 건설, 그리고 경제적·문화적 관계의 세계화는 어디서든 제국의 가상적 중심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낡은 혁명 학파의 전술 집착은 완전히 구제불능이다. 그 투쟁들에 적용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은 제국 내부로부터 생겨나는 구성적 대항 권력의 전략이다.
89 그런데 이 말이 정말로 옳다면, 곧 현대 자본주의가 진짜로 동질적인 “매끄러운 공간”으로 그 속에서 권력이 균등하게 분포돼 있다면 전략이라는 개념은 별로 쓸모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참말이 아니다. 지구의 상이한 부분들은 자본에게 상이한 중요성을 지닌다. 공정한 수단이든 더러운 수단이든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의 천연자원이 계속 추출되는 한, 아프리카 대륙의 대부분은 〈요한의 묵시록〉에 나오는 네 사자使者들[전쟁·기아·질병·죽음 ― 옮긴이]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자본주의의 막대한 생산적 부가 집중돼 있는 지구상의 훨씬 더 작은 부분 ─ 여전히 주로 북미·서유럽·일본 그리고 몇몇 아시아와 남미 나라들 ─ 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트로츠키가 ‘불균등 결합 발전’이라고 부른 과정들이 현대 자본주의에서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으며, 체제의 특정 지점들에 부와 권력을 대규모로 집중시킨다. 이런 불균등성 때문에 적의 약점과 우리의 잠재적 강점을 인식하기 위한 전략적인 분석과 논쟁이 필요하다.
네그리는 다른 글에서 오래된 레닌의 격언을 거꾸로 뒤집어, “자본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는 자본주의의 가장 강한 고리”라고 선언한다.전략적 사고는 레닌이 “역사상의 급격한 전환”이라고 불렀던 것, 즉 재빨리 깨닫기만 한다면 혁명적 운동에 뜻밖의 기회를 제공할 갑작스러운 위기들에 대처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러나 네그리의 역사관 전체가 별나게 추상적이다. 곧, 다중은 특정 조건들, 누적된 모순들, 세력 균형의 미묘한 변화들 ─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위대한 정치적 저작들이 매우 훌륭하게 설명하고 있는 ─ 에 관계 없이 영원히 자본에 맞선다. 여기에는 다니엘 벤사이드가 “전략적 이성”이라고 부른 것이 빠져 있다. 벤사이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결정의 기예, 타이밍의 기예, 희망을 품게 하는 대안의 기예가 가능성의 전략적 기예다. 불가능하지 않은 것은 모두 가능할 것이라는 식의 몽상적인 추상적 가능성이 아니라, 구체적 상황에 의해 규정되는 가능성의 기예다. 즉, 각각의 상황은 저마다 고유하고, 결정의 순간은 언제나 그런 상황과 관련돼 있어, 달성해야 할 목표에 맞게 조정된다.이런 종류의 전략적 분석은 변혁의 주체를 찾는 시도와 분리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하트와 네그리는 도움이 될 만한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아마 다중 개념의 장점 중 하나는 천대받고 착취받는 사람들을 뚜렷한 사회적 위치도 없고 뚜렷한 형태도 없는 익명의 대중으로 식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탈주, 탈출, 유목주의”를 민주적 힘이라고 선언하면서 이렇게 이주자와 난민을 찬양한다. “하나의 유령이 세상에 출몰하는데, 그것은 이주라는 유령이다.” 넘쳐나듯이 국가 경계를 넘고 확고한 정체성을 모두 혼란시킴으로써 다중은 부패한 제국의 도시에 대항해 “지상의 도시”를 이룬다.
92 ─ 같은 사이비 급진파 교수들이 경배하듯이 찬양한 주제들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 정설의 노쇠 조짐이 완연한 상황에서 《제국》이 포스트모더니즘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위험을 무릅쓰는 대목이 이것만은 아니다.
이주가 오늘날 매우 중요한 사회·정치 현실이라는 점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이주를 찬양하는 것은 오늘날 좌경 자유주의 학계에서 전혀 새롭지 않다. 다문화주의·혼종성·유목주의는 지난 10여 년간 가야트리 스피박과 호미 바바 ─ 네그리와 하트는 두 사람에게 동의하며 인용한다대체로 전략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못한 것 말고도 네그리는 자신의 해묵은 일부 오류들로 되돌아가는 듯한 우려스러운 조짐도 보여 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자본주의적 권력 패러다임의 이러한 변화를 노동계급과 프롤레타리아 운동 덕분으로 보는 것은 인류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부터의 해방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사회주의와 신디컬리즘의 코포라티즘적 합의가 파탄나는 것 때문에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과거의 아름다움을 한탄하며, 피착취자의 분노와 ─ 종종 ─ 유토피아 아래에서 들끓는 질투심을 간직한 채 사회 개혁주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과도 거리를 두는 것이다.
94 이처럼, 조직 노동계급에 대한 적대감이 지난 20년 동안 네그리의 머리 속에 젤리처럼 남아 있었던 듯하다.
이 구절을 부연 설명해 달라는 요청에 네그리는 노동조합원들을 ‘쿨락’ ─ 1920년대 말에 스탈린이 농업 강제집산화를 추진하면서 ‘청산’하려 했던 부농 ─ 으로 묘사하고, 청년 실업자들이 공장 노동자들을 공격했던 1977년이 그리운 듯이 말했다.95 정치사상사 분야에 밝고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음에도 네그리가 이렇게 말하는 까닭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즉, 네그리의 과거를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시도들은 모두 네그리가 ─ 그리고 자율주의 전체가 ─ 어떻게 1970년대에 이탈리아 좌파에게 아무 도움도 못 됐는지 보여 줄 것이다. 그렇게 과거를 직면하기를 회피하는 것은 한 개인의 도덕적 결함이라기보다는 네그리식 마르크스주의에 본질로 내재한 한계를 보여 주는 징후인 것이다.
1981년에 네그리는 이렇게 썼다. “프롤레타리아의 기억은 과거의 소원함에 대한 기억일 뿐이다. …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은 기억을 지우는 것이다.”내가 이 글의 서두에서 보여 주고자 했듯이, 자율주의는 생동하는 정치 세력이다. 다행히도 오늘날 ‘붉은 여단’식 단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블랙 블록’의 거리 폭력 숭배에서든 아니면 ‘투테비앙케’의 좀더 평화적인 전술에서든, 대중을 대리해 본보기적 행동을 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행동들은 대중 동원을 대체하는 구실을 한다. 하트와 네그리의 분석에서 노동계급은 ─ 지난 몇 년 동안 재편되며 변모했지만 여전히 매우 실질적 세력을 지니고 있는데도 ─ 확실한 형태가 없는 다중으로 녹았거나 특권적인 노동귀족이라고 매도당한다. 자율주의자들은 다중의 이름으로 행동하면서 노동계급은 우회하거나 적대하려 든다.
제노바는 자율주의 정치의 한계들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 줬다. 2001년 7월 20일 금요일에 ‘투테비앙케’의 직접행동은 대규모 경찰 병력의 공격을 받아 레드 존(G8 정상회담이 열린 경비가 삼엄한 구 시가지 구역)에 접근하지 못했다. ‘투테비앙케’의 리더 루카 카사리니는 당시 일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완전히 평화적으로 행진했지만 잔인 무도하게 공격당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최루탄으로 그 다음에는 장갑차로 우리를 공격했고, 퇴로를 완전히 차단했다. 금요일 오후에 실로 지옥 같은 상황이 벌어졌고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 탱크를 앞세운 공격이 시작되고, 최초의 총성이 들렸을 때 우리의 대응은 쓰레기통 뒤에 숨어 돌을 던지는 것이었다.
특수 훈련을 받고 방탄복을 착용한 ‘투테비앙케’도 무장한 이탈리아 국가 권력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투테비앙케’의 행진에 참가했던 일부 혁명적 좌파들을 포함해 수천 명의 시위대는 그 전투에서 수동적인 구경꾼이 돼 있음을 깨달았다. 제노바 시위 전에 ‘투테비앙케’는 다음과 같이 전통적 좌파 무용론을 선언했다.
마침내 사파티스트 운동이 20세기를 없애고 있다. 이것은 유럽 좌파의 이미지와 비타협적으로 확실하게 단절하는 것이다. 20세기 정치 전통에서 나타난 고전적 대립을 모두 뛰어넘는다. 개혁 대 혁명, 전위 대 운동, 지식인 대 노동자, 권력 장악 대 탈주, 폭력 대 비폭력 등의 대립 구도를 말이다.
98 카사리니는 ‘투테비앙케’의 경험이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제국의 논리와 맞닥뜨리기에는 부적절한 것 같다”고 인정했고, “시민 불복종”에서 “사회적 불복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99 이것이 노동계급 운동에 참가하는 쪽으로의 변화를 뜻한다면 그것은 일보전진일 것이다. 제노바는 ‘투테비앙케’가 그토록 자만하며 기각했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진실 하나를 밝히 보여 줬다. 즉, 조직 노동계급의 대규모 동원만이 중앙집권적 자본주의 국가 권력에 대항할 수 있다. 자율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국가와의 대결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면서 혁명적 정치의 진정한 과제 ─ 노동계급의 다수를 정치적으로 설득하기 ─ 를 회피했다.
그러나 제노바 시위 뒤에 약간 겸손해진 카사리니는 1970년대식 테러리즘의 부활을 경고했다. 곧, “나는 테러리즘이 실제로 부활할까 봐 두렵다. 무장한 전위가 되고픈 유혹을 느낄 수 있는 개인들과 소집단들이 존재한다. … 지금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몇 달 안에 깊은 수렁에 빠질 수도 있다.”토니 네그리는 여전히 자율주의의 핵심 이론가다. 우리는 이탈리아 국가에 의해 희생자가 된 그에게 연대감을 느끼고 있다. 또, 우리는 지난 40년 동안 혁명적 지식인의 길을 걸어 온 그를 존경해야 한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네그리 사상의 영향력은 세계 자본주의에 맞서는 운동의 성공적 전개에 장애물이 되고 있다. 비록 그가 《제국》에서 세계 자본주의의 구조를 자리매김하려 하지만 말이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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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Alex Callinicos, ‘Tony Negri in Perspective’, International Socialism 92(Autumn 2001), pp31-61.
↩
- 이 글은 애초 2001년 7월에 [런던에서 ― 옮긴이] 열린 ‘맑시즘 2001’ 발표 원고였다. 이 글을 위해 자료를 제공하며 도와 준 크리스 뱀버리, 세바스천 버전, 크리스 하먼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
- 예컨대, N. Klein, ‘Reclaiming the Commons’, New Left Review 2:9 (May-June 2001), p.86. ↩
- M. Hardt & A. Negri, Empire (Cambridge MA, 2000), p.413.[국역: 《제국》, 이학사, 2001. 이하 [ ] 표시는 국역 ― 옮긴이] ↩
- E. Eakin, ‘What Is The Next Big Idea? Buzz Is Growing For Empire’, The New York Times, 7 July 2001; M. Elliott, ‘The Wrong Side Of The Barricades’, Time, 23 July 2001. ↩
- E. Vulliamy, ‘Empire Hits Back’, The Observer, 15 July 2001. ↩
- N. Klein, ‘Squatters In White Overalls’, The Guardian, 8 June 2001. ↩
- Il Manifesto와의 인터뷰, 3 August 2001. 또, 다음을 참조하시오. ‘From The Multitudes Of Europe, Rising Up Against The Empire And Marching On Genoa (19-20 July 2001)’, 29 May 2001, www.qwerg.com/tutebianche/it ↩
- 이에 대한 탁월한 설명은 P. Ginsborg, A History of Contemporary Italy: Society and Politics 1943-1988 (Harmondsworth, 1990). 이 시기 격변에 대한 개괄적인 역사는 C. Harman, The Fire Last Time (London, 1988)[《세계를 뒤흔든 1968》, 책갈피, 2004]을 보시오. ↩
- 이 시기 이탈리아 좌파의 실패를 매우 날카롭게 분석한 글로는 T. Abse, ‘Judging the PCI’, New Left Review 1:153 (9-10, 1985)가 있다. ↩
- 같은 책, p.25. ↩
- P. Ginsborg, 앞의 책, pp.320-332. ↩
- C. Harman, ‘The Crisis of the European Revolutionary Left’, International Socialism 4 (Spring 1979)를 보시오. ↩
- P. Ginsborg, 앞의 책, p.382. ↩
- 이 운동에 대체로 공감하는 당시 기록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는 Red Notes(eds.), Italy 1977-1978: Living with an Earthquake (London, 1978)가 있다. ↩
- T. Abse, 앞의 책, p.30. ↩
- 이 시기 네그리의 저작에 대한 유용한 연구는, S. Wright, ‘Negri’s Class Analysis: Italian Autonomist Theory in the Seventies’, Reconstruction 8 (1996). 네그리는 전에 레닌주의 노선에 따라 건설된 ‘노동자의 힘Potere Operaio’의 지도자였다. 그 조직의 회원들은 대부분 새롭게 등장한 자율주의 운동에 합류했다. ↩
- 예컨대 다음을 보라. M. Tronti, ‘Workers and Capital’, in Conference of Socialist Economists, The Labour Process and Class Strategies (London, 1976). ↩
- S. Wright, 앞의 책. ↩
- T. Abse, 앞의 책, p.30. ↩
- J. Fuller, ‘The New “Workerism”-the Politics of the Italian Autonomists’, International Socialism 8 (Spring 1980)에서 재인용. 이 저널에 재수록됐다. ↩
- 착취와 억압 ― 가령 실업자가 겪는 ― 의 차이에 대한 명쾌한 설명은 다음을 보시오. E. O. Wright, ‘The Class Analysis of Poverty’, in Interrogating Inequality (London, 1994). ↩
- A. Negri, Marx Beyond Marx (South Hadley MA, 1984), p.173.[《맑스를 넘어선 맑스》, 중원문화출판, 2010] ↩
- T. Abse, 앞의 책, p.35. ↩
- 네그리는 1997년에 복역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는 꽤 느슨한 상태에서 형을 살고 있다. 그는 이제 자신의 로마 아파트에서 사는 것이 허용됐지만, 저녁 7시부터 아침 7시까지 야간 외출은 할 수 없다. ↩
- J. Fleming, ‘Editor’s Preface’, in A. Negri, op,. cit., p.vii. ↩
- A. Negri, 앞의 책, pp.19, 56, 94. ↩
- 다른 차이점이 있음에도 E. P. 톰슨과 알튀세르가 이 점에 대해서만큼은 의견을 같이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L. Althusser, Preface to G. Dumézil, Le Concept de loi économique dans ‘Le Capital’ (Paris, 1978)과 E.P. Thompson, The Poverty of Theory and Other Essays (London, 1978), pp.251-255를 보시오. ↩
- 다음을 보시오. V.S. Vygodsky, The Story of a Great Discovery (Tunbridge Wells, 1974), R. Rosdolsky, The Making of Marx’s Capital (London, 1977), J. Bidet, Que faire du Capital? (Paris, 1985). ↩
- A. Negri, 앞의 책, p.17. ↩
- 같은 책, pp.91, 101. ↩
- 더 세련된 임금압박설은, P. Armstrong et al., Capitalism Since World War Two (London, 1984). [김수행 옮김, 《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 동아출판사, 1993] ↩
- A. Negri, 앞의 책, p.131. ↩
- K. Marx, Capital, Vol. I (Harmondsworth, 1976), p.770. ↩
- A. Negri, 앞의 책, p.69. ↩
- K. Marx and F. Engels, Collected Works, vol. XXIV (London, 1989), p.81. ↩
- A. Negri, 앞의 책, pp.100-101. ↩
- 같은 책, pp.138, 140. ↩
- 같은 책, pp.27, 25. ↩
- 같은 책, p.188. ↩
- 같은 책, p.xvi. ↩
- 같은 책, p.172. ↩
- 같은 책, p.xvi. ↩
- 같은 책, p.14. ↩
- 다음을 보시오. M. Foucault, Discipline and Punish (London, 1977)[《감시와 처벌》, 나남, 2003], Power/Knowledge (Brighton, 1980). ↩
- S. Wright, 앞의 책. ↩
- T. Cliff, ‘The Balance of Class Forces in Recent Years’, International Socialism 6 (Autumn, 1979). ↩
- S. Wright, 앞의 책 ↩
- Spinoza, Ethics in Works of Spinoza, vol. II (New York, 1955), Appendix I, p.78. ↩
- 나는 다른 책에서 이 논의를 더한층 발전시켰다. A. Callinicos, Is There a Future for Marxism? (London, 1982).[《마르크시즘의 미래는 있는가》, 열음사, 1987]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에 대한 답변으로 쓰여졌고, 네그리의 1970년대 저작은 마르크스주의 위기의 전조였다. ↩
- 로버트 브레너가 ‘공급 측면’의 위기론이라고 부른 것에 대한 비판은, C. Harman, Explaining the Crisis (London, 1984), pp.123-126[《마르크스주의와 공황론》, 풀무질, 1995]과 R. Brenner, ‘Uneven Development and the Long Downturn’, New Left Review 1:229 (5-6, 1998). ↩
- A. Callinicos, Making History (Cambridge, 1987)[《역사와 행위》, 교보문고, 1991]을 보시오. ↩
- A. Negri, 앞의 책, pp.56-57. ↩
- M. Hardt, ‘Translator’s Foreword’, in A. Negri, The Savage Anomaly (Minneapolis, 1991).[《야만적 별종》, 푸른숲, 1997] 네그리는 스피노자의 정치 저작에서 다중 개념을 끌어온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다중은 네그리가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양면적인 구실을 한다. E. Balibar, Spinoza and Politics (London, 1998)을 보시오. ↩
- A. Negri, Le Pouvoir constituant (Paris, 1997), pp.429, 435. ↩
- 같은 책, p.401. ↩
- 같은 책, pp.37, 40. 네그리는 《성의 역사》[나남, 2004]에 의지하면서도 1976년에 출간된 제1권과, 푸코가 죽기 직전에 출간된 제2권 및 제3권의 매우 중요한 차이를 간과한다. ↩
- 네그리가 자신의 푸코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한 들뢰즈의 Foucault (Paris, 1986)[권영숙·조형근 옮김, 《푸코》, 중원문화, 2010]는 사실 들뢰즈가 생명과 욕망에 관한 자신의 독특한 존재론에 근거해 푸코의 사상을 다시 쓴 것이다. 들뢰즈와 푸코의 저항 논의에 대한 비판적 논술로는 A. Callinicos, Against Postmodernism (Cambridge, 1989), pp.80-87을 보시오.[《포스트모더니즘 비판》, 성림, 1994] ↩
- G. Deleuze and F. Guattari, Mille plateaux (Paris, 1980), pp.512, 510, 583.[《천 개의 고원》, 새물결, 2001]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Paris, 1972)[최명관 옮김, 《양띠 오이디푸스》, 민음사, 1994] 제1권에서 영토화와 탈영토화의 사회적·심리적 측면들에 대한 매우 복잡한 이론을 전개한다. 들뢰즈는 또한 스피노자에 대한 중요한 연구서인 Spinoza et le probléme de l’expression(Paris 1968)[이진경 외 옮김,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인간사랑, 2003]을 썼다. 이 책은 《야만적 별종》에서 똑같은 철학자를 다룬 네그리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스피노자는 반反헤겔적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헤겔에 대한 대안적 준거점이 되는 경향이 있다. 이미 알튀세르에게서 분명하게 나타난 이 경향은 알튀세르의 제자 피에르 마슈레Pierre Macherey가 쓴 Hegel ou Spinoza?(Paris, 1979)[진태원 옮김, 《헤겔 또는 스피노자》, 그린비, 2010]에서 극단적으로 발전했다. 네그리는 결코 알튀세르주의자가 아니지만, 헤겔과 변증법에 대해 일관되게 적대적이다. 이것은 네그리가 들뢰즈와 푸코와 공유하는 태도다. ↩
- M. Hardt and A. Negri, 앞의 책, p.423, n.23. ↩
- D. Bensaïd, Résistances (Paris, 2001), p.212.[《저항》, 이후, 2003] ↩
- M. Hardt and A. Negri, 앞의 책, pp.31-32. ‘초超세계화론hyperglobalisation’에 대해서는 D. Held et al., Global Transformations (Cambridge, 1999), ch. 1을 보시오. ↩
- M. Hardt and A. Negri, 앞의 책, pp.xii-xiii. ↩
- 비교적 세련된 견해는 M. Castells, The Rise of the Network Society, 2nd. edn. (Oxford, 2000)을 보시오. L. Boltanski and E. Chapiello, Le Nouvel esprit du capitalisme (Paris, 1999), pp.220-221은 ‘탈중심적[분권화된 ― 옮긴이] 네트워크들’이라는 은유를 홍보하는 데서 들뢰즈가 한 구실을 강조하고 있다. ↩
- M. Hardt and A. Negri, 앞의 책, p.43. ↩
- 같은 책, p.23. 예컨대, ‘야바스타’는 방탄복 착용을 정당화하기 위해 네그리의 삶정치 개념을 받아들였다. “삶정치는 탈훈육적인 통제 패러다임 내부로부터 집단적 행위의 가능성을 복원하는 정치 형태다. 시대를 잘못 이해해서,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집단 행동으로만 돌아가는 것은 위험하다. 직접 대면하는 집단 행동은 낡은 충돌식 훈육의 일부임이 매우 분명한 대결이다. 그보다는 동지에게 방탄복을 입혀 주는 것이 다른 정치적 문법으로 가는 통로를 보여 준다.” J. Revel, ‘Changing The World (One Bridge At A Time)? Ya Basta! After Prague’, www.geocities.com/swervedc/ybasta.html에서 인용. ↩
- M. Hardt and A. Negri, 앞의 책, p.180, ch. 3, 5. ↩
- 같은 책, pp.43, 259. 그리고 훈육사회에 대해서는 같은 책, ch. 3, 2를 보시오. ↩
- 같은 책, pp.268-269. ↩
- M. Tronti, 앞의 책, p.104. ↩
- M. Hardt and A. Negri, 앞의 책, p.52. ↩
- 같은 책, p.409. ↩
- 같은 책, pp.364, 365, 385, 387. 그리고 같은 책, ch. 4, 1과 4, 2를 보시오. ↩
- 같은 책, pp.360, 469, n.13. G. Deleuze, 앞의 책, pp.95, 98과 비교해 보시오. ↩
- J. Chingo and G. Dongo, ‘Empire or Imperialism?’, International Strategy 1 (2001). 이 글은 지나치게 정설 트로츠키주의적인 관점이기는 하지만 그 비판은 유용하다. www.ft.org.ar/estrategia에서도 볼 수 있다. ↩
- M. Hardt and A. Negri, 앞의 책, ch. 3, 1. ↩
- Historical Materialism 4와 5(1999)에 실린 브레너에 관한 심포지엄을 보시오. ↩
- M. Hardt and A. Negri, 앞의 책, pp.9, 190. ↩
- 예컨대 프랑스 급진좌파 이론지 Contretemps(‘뜻밖의 사건’이라는 뜻)에 실린 하트와 네그리의 글에 이런 진술이 있다. “근본적이고 질적인 변화는 오히려 주권이라는 관점에서 인식돼야 한다.” M. Hardt and A. Negri, ‘A Possible Democracy in the Age of Globalisation’, Contretemps.(사본을 제공해 준 다니엘 벤사이드에게 감사한다.) ↩
- M. Hardt and A. Negri, 앞의 책, ch. 1.1. 근대 주권론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논의는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우익 이론가 칼 슈미트의 것이다. 특히 그의 Political Theology (Cambridge MA, 1985)[김향 옮김, 《정치신학》, 그린비, 2010]를 보시오. 네그리의 Le Pouvoir constituent[‘구성권력’이라는 뜻 ― 옮긴이]은 얼마간은 슈미트에 대한 네그리의 대안적인 주권 이론을 다룬 책이다. ↩
- 다음을 보시오. A. Callinicos et al., Marxism and the New Imperialism (London, 1984); G. Achcar, ‘The Strategic Triad: USA, China, Russia’, in T. Ali(ed.), Masters of the Universe? (London, 2000); 그리고 A. Callinicos, Against the Third Way (Cambridge, 2001), ch. 3. ↩
- M. Leonard, ‘The Left Should Love Globalisation’, New Statesman, 28 May 2001, p.36. ↩
- 같은 책, p.37. ↩
- K. M. Campbell and D. J. Mitchell, ‘Crisis In The Taiwan Strait?’, Foreign Affairs, 7-8, 2001, p.15. ↩
- The Guardian, 31 July 2001. ↩
- M. Hardt and A. Negri, 앞의 책, p.52. ↩
- 같은 책, pp.400-406. ↩
- 같은 책, pp.54, 56, 57. ↩
- 같은 책, pp.58-59. ↩
- ‘Towards a Politics of Truth: The Retrieval of Lenin’ (네그리가 참석하지 않은) 컨퍼런스에서 배포된 논문의 제목, Kulturwissenschaftliches Institut NRW, Essen, 3 February 2001. ↩
- D. Bensaïd, Les Irreductibles (Paris, 2001), p.20. ↩
- M. Hardt and A. Negri, 앞의 책, pp.212, 213, 396. 이것은 성聖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성스러운 도시’와 ‘지상의 도시’를 참조한 것이다. 이는 하트와 네그리가 현대의 다중과 초기 기독교나 평등주의적 기독교 사이의 유사성을 끌어내고 있는 여러 구절들 중 하나다. 《제국》은 ‘전투적 공산주의자의 미래의 삶’을 위한 하나의 모델로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St. Francis of Assisi를 제시하면서 끝맺고 있다. ↩
- 같은 책, pp.422, n.17, 143-145. ↩
- A. Negri, ‘L“Empire”, stade supreme de l’impérialisme’, Le Monde diplomatique, January 2001, p.3. ↩
- 주 89에서 인용한 레닌 컨퍼런스에서 전화 토론 중에 한 말이다. ↩
- S. Wright, 앞의 책에서 인용. ↩
- La Repubblica 2001년 8월 3일치에 실린 인터뷰. ↩
- ‘Why are White Overalls Slandered by People who Call Themselves Anarchists?’, 8 July 2001, www.italy.indymedia.org. ↩
- La Repubblica 2001년 8월 3일치에 실린 인터뷰. ↩
- Il Manifesto 2001년 8월 3일치에 실린 인터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