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1호를 내며
이번 호는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방한 강연을 〈특집〉으로 묶었다. 캘리니코스는 세계적인 마르크스주의자 석학으로, 런던 킹스칼리지 유럽학 교수이자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중앙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지의 편집 자문이기도 한 캘리니코스는 올해 7월 열흘 정도 한국에 머물면서 다양한 주제로 연설했다. 이번 호는 그의 방한 강연 가운데 네 개를 녹취·번역해 실었다. 특히, 이 가운데 두 개는 캘리니코스가 본지 편집팀과 주요 기고자들을 대상으로 한 비공개 강연록인데, 독자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 수록했다.
먼저, ‘오늘의 정치 전망과 혁명적 전략·전술’에서 캘리니코스는 혁명이 일어나는 조건을 창출하는 강력한 경향들이 오늘의 세계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세계경제 위기가 그런 경향들을 만들어낸다. 물론 위기의 불균등성과 그람시가 말한 ‘시민사회’의 구실 때문에 투쟁 양상은 나라마다 서로 다르다. 따라서 나라마다 사회주의자들이 직면하는 문제도 똑같지는 않다. 여기서 캘리니코스는 노조 관료층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연성 자율주의와는 어떻게 대화·협력 관계를 구축해야 하는지 등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이 직면할 만한 문제들을 다룬다. 또, 상황 변화에 따라 전술을 신속하게 바꾸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이렇게 하기 위해 사회주의자들에게 필요한 자질이 무엇인지 선임 혁명가로서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하고 있다.
두 번째 글인 ‘자본주의의 대안’에서 캘리니코스는 먼저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최근 유행하는 발전국가 모델을 다루면서 그것이 왜 지속 가능하지 않고, 진정한 대안이라고 볼 수 없는지 설명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형태에 대한 대안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의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캘리니코스가 제시하는 것은 민주적 계획경제 모델이다. 또,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단숨에 도약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는 이행기적 조처도 언급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당면 과제는 자본주의부터 끝장내는 것이므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투쟁들에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캘리니코스는 유럽의 긴축 반대 투쟁에 대해 디폴트, 유로존 탈퇴와 함께 은행 국유화, 가격 및 자본 통제, 투자에 대한 국가 통제 등을 과도적 요구로 제시하고 있다.
세 번째 글인 ‘제국주의와 국제 정치경제’는 캘리니코스의 방한에 맞춰 출간된 그의 최신작 《제국주의와 국제 정치경제》의 출판 기념을 겸한 강연으로, 이 책의 핵심을 간명하게 요약하고 있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제국주의론을 오늘의 현실에 맞게 계승·발전시키려고 이 책을 썼다는 캘리니코스는 현대 제국주의는 경제적 경쟁과 지정학적 경쟁의 융합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현대 제국주의를 세 단계로 나눠 구체적으로 그 특징을 조명한다. 특히 그는 1991년에 시작된 현 단계 제국주의의 주요 특징으로 중국이 미국의 경제적·지정학적 라이벌로 떠오르고 있는 것을 꼽는다. 이것의 함의는 중요한데, 언젠가 우리는 제국주의 간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캘리니코스는 오늘날 세계 평화는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것, 국제적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특집의 마지막 글인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의 의미’에서 캘리니코스는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내재한 모순들에 관한 이론일 뿐만 아니라 정치 이론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강조한다. 또, 오늘날 마르크스주의는 계급투쟁의 이론으로서, 그리고 혁명의 이론과 실천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캘리니코스는 이 각각의 의미를 우리 운동 내의 중요 쟁점들, 예를 들어 ‘노동계급은 끝났다’는 주장이나 자발성의 무제한 예찬 등과 연결해 논박하면서 생생하게 설명하고, 혁명적 정치 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쟁점Ⅰ〉에서는 통합진보정당 논의, 금융 위기와 민스키, 발전국가 등 세 가지 쟁점을 다뤘다.
《마르크스21》 공동편집자 김하영의 ‘통합진보정당과 국민참여당’은 왜 민주노동당과 참여당의 지도부들이 합당을 원하는가(물론 민주노동당 지도부의 소수파는 합당을 썩 내켜 하지 않는 듯하다)에 초점을 맞춰 분석한다. 특히 민주노동당 내의 적극적 합당 추진자들인 NL 계열의 ‘통일전선’(1930년대 중엽 스탈린주의의 노선인 인민전선의 한국판) 전략과 참여당 대표 유시민의 포퓰리즘적 전략이 서로 맞아떨어지는 점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점이 이 글의 특징이다. 김하영은 더 나아가, 참여당이 포함될 경우 통합진보정당의 미래를 간략히 전망하면서,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일부가 왼쪽으로 이탈하지 않는 한 좌파가 그 안에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투쟁을 벌여 당의 우경화를 최대한 막으려 애쓸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 과정에서 미래 변혁을 위한 ‘주체 형성’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노조 지도자들의 일부가 참여당이 포함되는 진보 통합에는 연루되길 거부한다면 더한층 예측불허의 상황이 전개될 것이고, 진보 통합 운동의 좌파는 쉽지 않은 선택을 해야 할 수도 있다.
이정구의 ‘금융 위기와 민스키’는 2008년 경제 위기로 주류 경제학의 위신이 추락하면서 새롭게 부상한 민스키의 이론과 그 한계를 살펴보는 글이다. 민스키는 자본주의가 1970년대 이후 금융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자금 관리자 자본주의로 바뀌었다고 봤고, 은행 재편이나 금융기관 규제·감독 강화, 투자의 사회화 등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이정구는 민스키의 금융불안정성 가설이 경제 위기가 내재적 요인에서 발생한다고 보는 장점이 있다고 사준다. 그러면서도 과거나 현재나 정부 개입이 위기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 투자의 사회화가 자본주의 경제 관계 자체를 뒤엎지 않고 어떻게 가능한지 불분명하다는 점, 금융화 현상이 실물경제의 이윤율 하락과 관계 있음을 보지 못한다는 점 등의 한계를 지적한다. 요컨대 오늘의 경제 위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마르크스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강동훈의 ‘발전국가론과 한국의 산업화’는 박정희에 대한 향수와 신화는 물론 그 시대에 대한 신자유주의자들의 신화도 두들기는 글이다. 박정희·전두환 시대의 산업화와 경제성장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장하준이 주장하듯이 당시의 한국 국가가 질적으로 우수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의 국제적 여건, 특히 미국이 대소 전초기지이던 한국에 비교적 관대하게 시장을 열어 주었던 것이 주효했다. 물론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을 꾹꾹 짓눌러야 한국 자본은 틈새 시장을 위한 국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한국에도 잘 알려진 MIT대학교 앨리스 암스덴 교수는 그 시대에 실질 임금이 꾸준히 증대했음을 지적하지만, 만약 혹심한 국가 탄압이 없었다면 그 증가세가 폭발적이었을 것이라는 점은 간과하는 듯하다.)
이제 세계의 선진국들이 거의 다 세계시장 수출을 지향하고 있으므로 한국과 같은 나라들이 특별한 이점을 누리기도 어렵게 됐다. 게다가 세계경제는 질질 끄는 위기 상황이고, 특히 한국 경제가 새로 의존도를 급속히 높인 중국 경제도 불안하다. 한국 경제의 앞날이 그저 밝지만 않은 것은 확실하다. 이런 상황에서 장하준의 대안이 효과를 낼까? 노동계급이 거세게 저항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해도 말이다. 그러나 또 확실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의 저항을 고무하고 진정한 대안, 장하준이 내놓은 것과는 전혀 다른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자유주의도 발전국가 모델도 아닌, 반자본주의적인 노동자 권력이어야 한다.
〈쟁점Ⅱ〉는 인종차별과 다문화주의 문제를 다뤘다. 노르웨이에서 70여 명을 무차별 학살한 브레이비크 사건은 무슬림 혐오와 반反다문화주의의 심각성을 보여 줬다. 한국 사회에서도 이주자들이 꾸준히 증가하면서 다문화주의에 대한 관심이 늘어 왔다. 이번 호에 실은 두 글은 인종차별의 최근 변모와 다문화주의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크게 도울 것이다.
리처드 시모어는 북아일랜드 출신의 30대 중반 청년 사회주의자로, Lenin’s Tomb이라는 매우 유명한 블로그의 운영자다. 그는 이라크전·아프가니스탄전 등 제국주의적 전쟁을 지지하는 크리스토퍼 히친스 같은 자유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를 낱낱이 폭로한 《살인에 대한 자유주의적 변호》(Verso, 2008)의 지은이로도 유명하다. 이번 호에 실린 그의 ‘변모하는 인종차별’은 이제 제국주의 변호론자들이 단지 피부색으로만 인종을 분류해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와 문화를 근거로 인종을 ‘구성해’ 차별함으로써 제국주의를 방어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인종차별의 양상이 변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이 문제는 한국과 동떨어진 서구적 맥락 속에서 일어나는 일인 듯하다. 하지만 제국주의 체제의 심장부에서 벌어지는 일이 우리와 결코 무관한 일일 수 없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반제국주의자여야 하고, 일관된 반제국주의자이려면 제국주의 변호론자들이 속죄양으로 삼는 인종차별 피해자들을 무조건 방어해야 한다. 그래서 이 저널의 독자들이 꼭 읽어 봐야 하는 글이다.
개리스 젠킨스의 ‘문화와 다문화주의’는 사회주의자들이 다문화주의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잘 보여 준다. 다문화주의 때문에 통합이 아니라 ‘자기 배제’(격리된 공동체)가 강화되고 ‘이슬람 극단주의’가 성장한다는 반反다문화주의 논리는 명백히 문화적 인종차별이다. 비록 그것이 다인종사회를 인정하고 사회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견해를 지지하는 것과 접목될 수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젠킨스는 다문화주의를 옹호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주민 공동체들이 이른바 ‘우월한’ 문화에 순응하라는 압력을 받지 않고 살아갈 권리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다문화주의에는 한계도 있다. 문화를 비교적 고정된 ‘생활양식’으로 보면서 문화들이 끊임없이 서로 섞이고 풍부해진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다문화주의가 정부 정책 수단으로 변질됐다거나, 상대주의라거나, 심지어 세계화 시대 자본주의의 논리, 즉 체제의 공범이라는 등의 비판은 일면적이거나 너무 지나치다.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 관용 노선이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일리가 있긴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려면 다문화주의를 옹호하면서 진정으로 보편적인 계급인 노동계급의 결정적 중요성을 이해해야 한다. 젠킨스는 사회주의자들이 ‘계몽된’ 지배계급과 공모하거나 ‘우월한’ 문화를 장려해서는 안 되며, 문화적 자기 결정권을 옹호하면서도 계급이라는 공통의 요인이 문화 내의 반동적 관행에 맞선 공동 투쟁의 가능성을 창출한다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번 호 〈세계관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에는 김종환의 ‘마르크스와 생태학’을 실었다. 이 글은 많은 생태론자들과 상당수 좌파들이 마르크스주의가 반생태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체계적으로 논박한다. 김종환은 마르크스가 이미 《경제학·철학 수고》와 《자본론》 등에서 인간과 자연의 상호 작용을 상세히 다뤘다며,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자연관을 쉽게 설명한다. 또, 마르크스주의가 생산력주의라는 견해를 비판하는 한편 생산력 자체를 문제로 보는 시각도 비판한다. 문제는 생산력 자체가 아니라 누가 생산력을 통제하는가라는 것이다. 여기서 노동계급의 중요성 문제가 제기된다. 즉, 많은 생태론자들은 노동자들의 소비문화나 라이프스타일이 생태계를 파괴한다고 보지만, 노동자들은 기존 사회에서 어떤 결정권도 갖고 있지 못하다. 김종환은 노동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기보다, 생태 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이 더 많은 일자리도 만들 수 있다고 그들을 설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노동계급은 생태계를 위협하는 자본주의를 분쇄할 잠재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마르크스주의 고전 읽기〉에서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다뤘는데, 차승일은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을 소개하며 자본주의 국가의 계급적 본질,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 문제, 의회 민주주의의 한계 등 논쟁적 쟁점들을 다룬다.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은 2012년 큰 선거들을 앞두고 다양한 버전의 국가 활용론이 제기되는 현재 한국에서 운동이 취해야 할 올바른 전략·전술을 수립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서평〉에는 《위기의 한국사회, 대안은 지역이다》에 대한 정병호의 평이 실렸다. 정병호는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 국가 강화론 등에 대한 필자들의 견해에 공감하면서도 일관성 부족이나 모호함을 지적한다. 또, 필자들이 제시하는 지역 운동의 실험들, 즉 급진적 지방정부와 지역 운동의 결합, 협동조합운동 등을 살펴보면서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미흡한 이유를 설명한다.
〈피드백〉에는 사노위 이탈파인 노혁추((가)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의 이형로 씨가 사노위 실패의 교훈에 대해 보내온 글을 실었다. 본지는 지난호에서 사노위의 실패와 그 교훈을 분석한 글을 실은 바 있다.
벌써 《마르크스21》 열한 번째 호를 내게 됐다. 이를 기념해 표지 디자인을 바꾸고 새 단장을 했다. 새로운 디자인을 해 준 조승진 씨에게 감사드린다.
2011년 9월 16일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