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Ⅰ:진보, 금융, 발전국가
발전국가론과 한국의 산업화
이 글은 <시리즈 기획 한국 경제>의 마지막 편에 해당하는 글이다. <시리즈 기획 한국 경제> (1)~(3)은 본지 5, 6, 7호에 실렸다.
장하준은 신자유주의 비판으로 유명하다. 그는 신자유주의가 경제성장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자유무역, 금융 자유화, 다국적기업 유치, 지적재산권 보호 등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그를 뒷받침하는 여러 나라의 역사적 경험을 보여 주는데, 이는 진보진영에게 유용한 무기를 제공한다.
그런데 그의 신자유주의 비판은 적절한 국가 개입으로 경제성장을 이루고 복지를 향상시킬 수 있다는 발전국가론으로 나아간다. 그의 발전국가론은 최근의 세계경제 위기로 큰 관심을 끌고 있을 뿐 아니라 복지국가를 주장하는 이병천과 유철규 같은 진보적 지식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글은 장하준의 주장을 중심으로 발전국가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특히 발전국가론이 한국과 타이완을 발전국가의 주요한 사례로 제시하고 있으므로 한국과 타이완이 어떻게 고도 경제성장을 이뤘는지, 그 경험이 과연 발전국가론의 설명에 들어맞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또, 한국·타이완과 좋은 비교가 될 수 있는 브라질·멕시코의 사례도 함께 살펴보고, 발전국가론이 오늘의 위기의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보여 줄 것이다.
발전국가론의 등장
제2차세계대전 이후 1970년대까지는 국가 개입주의의 시대였다. 선진국과 후진국을 막론하고 국가는 경제에 개입했다. 세계 각국의 정부들은 외환·금리·대출 등에 대한 금융 규제를 실시했을 뿐 아니라 특정 산업을 새로 창출·육성하고자 민간 기업을 후원하거나 공기업을 세웠다.
1 국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해 국내에 튼튼한 산업 기반을 창출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었다. 게다가 케인스주의 경제학과 여러 종류의 개발 경제학,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좌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 종속이론과 나머지 제3세계의 그 다양한 변형들은 국가 개입주의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북한과 중국 등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뿐 아니라 한국, 타이완, 인도 등 제3세계 국가의 경제개발계획도 분명 1930년대 소련 경제개발계획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물론 인도의 개발 계획처럼 이론(경제학)적으로 좀더 치밀한 것들도 있고 한국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처럼 엉성한 것들도 있었지만,그러나 세계경제 위기가 엄습한 1970년대 중엽부터는 국가 개입이 의도한 경제 발전을 더는 달성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동아시아 4인방’이라 불린 한국·타이완·홍콩·싱가포르는 눈부신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의 경제성장률은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1980년대 들어 저발전국들이 대부분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것은 주요 선진국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요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발전국들의 지배계급도 저성장에서 벗어날 새로운 정책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1970년대까지 높은 성장률을 기록한 브라질과 멕시코 같은 나라들은 1980년대 외환 위기를 겪고 성장률이 떨어지면서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1970년대 말부터 중국도 기존 국가 통제주의 정책을 폐기하고 개혁·개방 정책으로 전환했다.
한국과 타이완 등이 다른 나라들과 달리 급속하게 성장하자 이 나라들의 성장 원인에 모든 이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동아시아의 급속한 경제성장 요인 분석을 두고 다양한 발전 이론들이 각축을 벌였다.
2 또, 신자유주의자들은 동아시아의 수출 지향 산업화 정책이 경제성장에서 결정적인 구실을 했음을 인정한다. 3 국가가 국내 경쟁은 억제했다 하더라도 국제 시장으로 기업들을 내몰아 경쟁력을 높이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먼저, 신자유주의자들의 설명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았다. 원래 신자유주의는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면 비생산적인 지대 추구 활동이 조장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정부가 수입 규제 정책을 도입하면 기업들은 수입 인허가를 얻으려고 경쟁을 벌이게 되는데, 그러면 생산적 경제 활동보다 로비나 부패를 낳는 경쟁이 조장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 4인방’은(홍콩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므로 제쳐 두기로 하더라도) 경제에 적극 개입했고, 한국은 국가 개입이 매우 강력해서 기업 활동을 세세하게 규제할 정도였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자들은 동아시아에서 국가 개입이 일정한 구실을 했다는 점은 대체로 인정하면서도, 그 개입이 주로 자유무역 도입, 수출 촉진, 외부 지향, 중립적 유인 정책과 같이 시장 경쟁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방식의 개입이었다고 주장한다. “노동시장과 자본시장에서 정책적 강요에 의한 왜곡은 거의 없었고, 민간 기업에 대해서는 고도의 신뢰가 부여되었다”는 것이다.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신자유주의자들이 약속한 성과가 달성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추종했던 상당수 개발도상국들은 난관에 처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에서도 대처주의 실험은 영국 경제의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데 확연하게 실패했다.
4 기각하고 “국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국가는 제도들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이 같은 제도들의 매트릭스를 운영하는 경영자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5
발전국가론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흐름으로 등장했다. 국가가 경제에서 손을 떼고 시장 메커니즘에 맡기면 급속한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에 맞서 발전국가론은 경제성장에서 국가의 구실이 매우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장하준의 지적처럼 발전국가론은 “신자유주의의 사상적 기반인 시장의 제도적 우선성”을6 결국 발전국가론은 국가 주도 하에 국가와 시장이 함께 작용해야 시너지 효과를 낸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7
그러나 1990년대 초 일본 경제 침체에 직면하고부터 발전국가론은 국가의 개입이 반드시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설명해야 했다. 따라서 발전국가론은 단순히 국가 개입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개입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집중한다. 이 점에서 신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발전국가론은 국가 관료나 이익집단들한테 국가가 ‘포획’돼 국가 개입이 바람직한 성과를 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8 에반스는 아프리카의 자이레를 약탈국가로, 한국과 타이완을 발전국가로, 그리고 인도와 브라질을 중간국가로 유형화한다.
이를 좀더 명확히 이해하려면 발전국가론자인 에반스가 제시한 약탈국가와 발전국가의 차이점을 살펴보는 것이 유용하다. 약탈국가는 국민복지와 국민경제의 성장을 저해하는 약탈적 행위를 일삼고, 사회로부터 거대한 잉여를 추출하는데도 그것을 경제 혁신에 사용하지 않는 국가를 일컫는다. 반대로, 발전국가는 혁신적 투자의 유인을 제공하고 투자의 위험을 낮춤으로써 민간자본이 장기적인 기업가적 시각을 갖도록 유도하며, 사회적 잉여를 특정 이해집단이 아니라 전체 국민을 위해 사용해 높은 성장을 달성하는 국가다.국가 개입과 발전국가
9 제공하는 “기업가 정신”이 있다. 10 예를 들어, 박정희 정권은 수출 주도 공업화나 중공업화와 같은 비전을 제시해, 민간 기업들이 이를 따라 자신들의 능력을 집중시킬 수 있도록 “초점”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발전국가론에 따르면, 약탈국가와 달리 경제성장의 견인차 구실을 하는 발전국가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발전국가의 국가기구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11 발전국가가 도입한 제도의 핵심으로 흔히 “선별적 산업 정책”이 거론되는데, 수출보조금 지급, 세제 감면, 관세 등을 이용한 국내 시장 보호, 기업의 진입과 퇴출 금지, 재정·금융 지원 등 일련의 보호 조처를 도입해 새로운 산업을 창출·육성하면서 경제 발전을 촉진했다는 것이다. 12
둘째, 발전국가는 자신이 제시한 “기업가적 비전”을 실행에 옮기는 새로운 제도 수립에 성공했다고 한다. 상업어음 할인율(A) | 수출용 대출금리(B) | 도매물가 상승률(C) | 금리차 (A-B) | 실질금리 (A-C) | 실질 수출금리(B-C) | |
1961년 | 13.87 | 13.87 | 13.2 | 0 | 0.67 | 0.67 |
1962년 | 13.87 | 9.13 | 9.4 | 4.74 | 4.47 | -0.27 |
1963년 | 13.87 | 9.13 | 20.6 | 4.74 | -6.73 | -11.47 |
1964년 | 14 | 8 | 35.1 | 6 | -21.1 | -27.1 |
1965년 | 24 | 6.5 | 9.9 | 17.5 | 14.1 | -3.4 |
1966년 | 24 | 6.5 | 8.6 | 17.5 | 15.4 | -2.1 |
1967년 | 24 | 6 | 6.5 | 18 | 17.5 | -0.5 |
1968년 | 26 | 6 | 8.1 | 20 | 17.9 | -2.1 |
1969년 | 24.6 | 6 | 6.9 | 18.6 | 17.7 | -0.9 |
1970년 | 24 | 6 | 9.4 | 18 | 14.6 | -3.4 |
13 금융 규제의 단연 압권은 1972년의 ‘8·3 사채 동결 조치’였다. 14 1960년대 말부터 외채 상환액이 커지면서 환율이 상승하자 박정희 정권은 통화량 줄이기로 대응하는데, 이 때문에 기업들은 사채 시장에서 고금리 자금을 끌어쓰기 시작한다. 국가의 구실을 애써 평가절하하는 신자유주의자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기업들이 높은 사채 금리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박정희 정권은 사채 채권 행사를 초법적으로 정지시켜 버리고 사채를 저금리의 대출이나 기업 주식 등으로 바꾸도록 만들었다. 이 덕분에 “기업의 금융 비용 감소 규모는 1천28억 원에 이르렀다.” 15
실제로 한국의 박정희 정권은 기업들, 특히 수출 기업이나 중화학공업 기업을 어마어마하게 지원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표1에서 보듯이 실질 수출금리는 실질금리와 대조적으로 1960년대 내내 물가상승률을 밑돌아 마이너스 금리였다. 커밍스의 말대로, “누군가 이자를 물어가면서 자기 돈을 써달라고 하니 괜찮지 않은가.” 또, 1970년에 한국의 수출 기업들이 받은 조세 감면 혜택은 총 6백24억 4천만 원에 이르렀다. “같은 해의 총수출액이 8억 8,220만 달러였으므로 수출에 대한 조세 감면 규모는 1달러당 69.7원인 셈이었는데, 당시 명목 수출환율은 1달러당 397.2원, 실질 수출환율은 307.2원이었으므로 수출업자들은 수출 가격의 4분의 1 가까운 금액을 환불받은 것이나 다름없다.”커밍스는 한국에서 선별적 산업 정책이 실행되는 과정을 재치 있게 묘사했다.
이를테면 일본의 한 은행이 12인치 흑백 텔레비전을 만드는 자금으로 당신한테 시세보다 낮은 금리로 1천만 달러를 빌려 주도록 내가 주선을 하고 은행에 대여금 상환을 보장한다. 나는 우리의 자유무역지대의 한 부지를 당신한테 떼어 주고, 당신 공장까지 이르는 도로를 건설해 주고, 우대금리로 에너지와 전기를 공급하고, 당신이 건물을 짓도록 미국의 잉여 시멘트를 챙겨 준다. 나는 시장과 기술과 유통 채널을 확보하고 있는 외국 회사를 찾아서, 당신의 텔레비전을 미국의 어느 곳에서나 심지어 식료품 가게에서도 팔 수 있게 해준다. 나는 교육과 훈련을 받은 노동력을 정해진 가격(역시 시세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지속적으로 공급할 것을 보장하고 노동조합을 불법화하고 노동 현장에서 위험스런 결사체들이 출현할 때는 언제나 군대를 보내준다. 나는 당신이 몇 개의 기업과 경쟁해야 할지를 결정하며, 당신의 연간 생산 목표액을 정해 주고(초과 달성 시에 보너스를 주겠다는 약속과 아울러), 당신들 모두가 성장할 수 있는 여지가 있도록 확실히 배려한다.(당신이 내 처남이다 뭐다 하는 사실은 거론할 필요도 없다.)
18 발생한다는 것이다.
국가 개입주의에서 국가가 나름의 정책을 세우고, 특정 분야에 자원을 집중하고, 기업들을 추동하지 않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세세한 부분에서 차이는 있을 테지만 말이다. 그런데 발전국가론은 국가가 경제에 개입한다고 해서 모두 발전국가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경제적 성과와 무관하게 ‘발전’을 지향하는 정치적 의지, 개입주의에 초점을 두고서 인도, 필리핀, 아프리카 지역에까지 발전국가 개념을 확대 적용할 경우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오류”가19 국가 관료들이 유능할 뿐 아니라 자율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만약 자율성이 없다면 선별적 산업·무역 정책과 금융 지원의 혜택을 받는 기업들의 영향력 때문에 비효율적인 기업들을 제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20 따라서 국가 관료들의 유능함은 정치적·사회적 압력으로부터의 자율성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만약 국가 관료가 자율적이지 않고 유능하지 못하다면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그랬듯이 기껏해야 영원히 자라지 않는 ‘유치’ 산업이나, 아니면 평생 ‘골골하는’ 산업을 일구는 수준에 머물게 되기 십상이다.” 21
바로 이 점에서 발전국가의 셋째 특징으로 연결되는데, 발전국가에는 뛰어난 경제 성과를 낼 능력이 있는 자율적이면서도 유능한 국가 관료 기구가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발전국가론은 유능한 국가기구의 조건으로 사회로부터의 분리·자율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와의 연계성도 강조하는데, 그것이 바로 발전국가론이 나중에 들고나온 ‘배태된 자율성embedded autonomy’ 개념이다. 즉, 다른 사회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자율성이 아니라 특정 세력, 즉 주요 자본가들과 긴밀한 정책 네트워크를 구축해 정보를 공유하고 정책을 조정하는 자율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희연 교수가 지적하듯이 “국가가 사회로부터 분리되는 것과 국가가 사회에 대해 연계되는 것”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은 분명 모순이다.23 그러나 장하준의 주장에서도 봤듯이, 발전국가론자들은 국가라는 제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므로 국가의 구실에 강조점을 두고 경제성장에 성공한 국가기구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집중한다. 24 결국 발전국가론은 “국가중심적 접근법”이라고 할 수 있다. 25 그러나 발전국가론이 국가 관료의 자율성과 능력을 경제성장의 핵심으로 보는 것은 주의주의적主意主義的이다. 특정 국가의 역사·사회적 조건이나 국제 관계처럼 국가 관료가 완전 통제할 수 없는 요인들이 경제성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때문이다.(이 점은 나중에 한국의 공업화에서 미국의 시장과 미국·일본의 자본이 한 구실을 다룰 때 좀더 자세히 논의할 것이다.)
물론 발전국가론이 역사·사회적 조건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암스덴은 한국의 경제개발에서 일제의 식민 지배나 1950년대 토지개혁이 끼친 영향 등을 언급한다.26 하고 주장한다. 즉, 다른 저발전국들도 발전국가의 특성을 배우고 따라한다면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한국처럼 발전국가에서 신자유주의로 전환한 국가에서도 발전국가를 부활시키면 다시 고성장을 달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복지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다.
발전국가론이 이처럼 국가기구의 특성에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하준은 “선별적 산업·무역 정책을 위한 제도적 기초[발전국가]를 논의하면서 우리가 직면한 궁극적인 의문은 ‘복제 가능성’이다”그러나 다른 국가들도 ‘쉽게’ 따라할 수 있는 국가기구의 특성은 고도 성장의 핵심 조건이 아니었다. 지금부터 왜 그런지를 좀더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발전국가론이 신자유주의의 대안이 되기 힘들다는 점을 보여 주려 한다.
‘자율적인 국가기구’
발전국가론은 동아시아 나라들의 경제가 급성장하기 시작한 1960년대에 자율적이면서도 유능한 국가 관료 체제가 형성됐다고 본다. 장하준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50년대 대만의 관료 조직은 능력주의와 효율성이 부족하다고 간주되었는데, 동일 기관들이 1949년 이전 중국 본토에서 보여 준 무능과 악명 높은 부패를 감안하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라 할 것이다. 이 모두가 2500년에 걸친 유교 전통에도 불구하고 벌어진 일임에도 말이다. 한국 역시 1000여 년에 걸친 유교적 관료 전통을 보유했음에도 1950년대에는 능력주의와는 동떨어진, 무능한 관료를 보유한 국가로 여겨졌다. … 한국이 수준 높은 관료 조직을 보유하게 된 것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광범위한 공무원 제도 개혁을 끝마친 이후였다.
발전국가론이 지적하듯이, 1960~70년대 한국과 타이완의 급속한 경제성장에서 국가는 중요한 구실을 했다. 국가가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된 데는 다음 세 가지가 초석으로 작용했다. 첫째, 한국과 타이완 모두 분단과 전쟁으로 노동자 운동과 저항 세력이 파괴됐다. 해방 직후 강력했던 한국의 노동자·농민 운동과 좌파 세력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집요한 물리적 탄압으로 기반이 점차 파괴됐고, 한국전쟁을 계기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28 이라 불리는 대규모 민중운동을 군대를 동원해 잔인하게 진압했는데, 이때 사상자는 1~2만 명에 이르고 타이완의 토착 지식인과 지도자들 상당수가 체포·구금·처형되면서 국가에 맞설 수 있는 사회 세력은 완전히 거세돼 버렸다.
장제스 국민당 정권은 당·관료 조직과 60만의 군대 등 약 2백만 명을 이끌고 1949년 타이완에 진주했는데, 당시 타이완 인구가 6백만 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국가기구가 타이완 사회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국민당은 ‘2·28사건’29 한국에서 토지개혁은 1949~53년에 시행됐다. 중국 혁명과 북한 토지개혁의 압력을 받아 미군정이 기안했고 이승만 정부가 실시했다. 여러 문제점이 있었지만 3정보(약 3만 제곱미터) 이상의 토지 소유를 금지해서 전통적인 대지주 계급의 경제적 기반이 해체됐다.
둘째, 한국과 타이완 모두 토지개혁을 실시해 산업화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지주계급의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을 제거했다.타이완 국민당 정권은 본토에서 공산당에게 패배한 이유 중 하나를 토지개혁 실패라고 봤고, 타이완의 토착 지주계급과 연고도 없었으므로 토지개혁을 철저하게 실시했다. 한국과 타이완에서 상당수 지주가 파산함으로써 급속히 몰락하고 말았다.
셋째, 해방 이후 자본가 계급은 국가의 후원 아래 형성됐으므로 국가에 도전하기에 미약했다. 한국과 타이완은 모두 일제 식민 통치를 받았으므로 산업 시설의 대부분은 적산敵産으로서 해방 이후 국가가 모두 접수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이 적산의 상당 부문을 민간에 불하했고, 후자는 미국한테서 받은 원조 물자와 외환을 특혜의 조건으로 민간 기업에 대여·융자함으로써 재벌의 맹아에 해당하는 민간 자본을 창출하고 육성하게 된다.
30 국민당을 따라 주로 상해에서 타이완으로 옮겨온 방직산업 위주의 본토 출신 자본가들이나 타이완 토착 지주들에게 토지개혁의 보상으로 넘겨준 공영기업이 일부 있었지만, 이들도 국가가 철저히 통제했다. 31
타이완 국민당 정권은 일제의 적산을 대부분 국영·당영 기업으로 편성했다. ‘외래 정권’답게 국민당 정부는 토착 타이완인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32 5·16쿠데타 이후 발전국가로 변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한국과 타이완에서 ‘국가의 자율성’은 특별한 정치·사회적 결과로 형성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전국가론은 국가중심적 접근법 때문에 국가의 자율성을 계급 세력 관계 등과 연관된 정치·사회적 차원보다는 “기술행정적 차원” 33 으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장하준은 자율적이고 유능한 관료 엘리트들의 존재를 식민지 경험과 같은 민족적 굴욕, 적과의 대결, 계급투쟁, 국제적 세력 관계에 따른 국가적 위기의식 등과 같은 정치·사회적 조건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율적이고 유능한 국가 관료의 존재를 계급투쟁이나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적 조건보다는 특정 국가 엘리트들의 우월한 능력에서 찾는다. 곧,
그러나 발전국가론이 이승만 정부 시절 한국은 약탈국가였지만이런 엘리트들의 출현을 오직 역사적 경험과 국제 환경 덕택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이 국가들과 비슷한 조건을 갖춘 나라들은 많지만 그 국가들에서 모두 헌신적 엘리트들이 나타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때문에 필자는 일부 엘리트 집단의 경우 다른 나라의 엘리트 집단보다 더욱 기꺼이 자국 역사와 다른 나라의 경험에서 배우고자 하고, 또 배울 수 있다는 정도까지만 말하려 한다.
35 강조하는 것은 우파들의 영웅 사관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자율적이고 유능한 국가의 능력을 엘리트 관료의 특별한 구실에서 찾다 보면 결국 최고 지도자의 리더십을 강조하는 주장으로 나아가기 십상이다. 그러나 1960~70년대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의 중요 요인으로 “최고 권력자인 박정희 개인의 가치관과 리더십”을36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장하준도 발전국가 해체를 정치·사회적 세력 관계 변화로 설명하는데, 37 이는 관료의 능력 위주로 설명하는 것의 한계를 시인하는 셈이다.
‘국가의 자율성’을 기술행정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계급적·사회적 조건 자체의 변화”에 따라 “국가 개입 양식 자체가 새롭게 변화”될 요컨대 동아시아에서 ‘국가의 자율성’은 “계급적·사회적 조건을 배경으로 가능했던 국가 행위상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국가의 본질적 특징으로, 동아시아 성장의 ‘비법’처럼 제시하는 것은 본말을 전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특히, 한국에서는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의 여파가 박정희 정권을 경제 개발에 매달리도록 만들었다. 4·19혁명이 독재 타도뿐 아니라 부정축재자 처벌·재산몰수를 포함한 ‘자립 경제 건설’을 요구한 것은 이승만 정권처럼 미국의 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소수의 자본가들만 살찌우는 현실에 반대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노동자들의 민주적 권리를 파괴했지만, ‘자립 경제 건설’이라는 대중의 바람을 흡수하면서 자율적인 자본축적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부르주아적 방식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수출 주도 공업화 동아시아의 4인방은 1960년대부터 수출 주도 공업화를 추진함으로써 대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1980년대 들어 브라질과 멕시코 등이 외채 위기에 빠져 저성장을 거듭할 때, 동아시아 국가들은 비교적 쉽게 위기에서 벗어나면서 수출 주도 공업화의 장점을 보여 줬다. 그렇다면 동아시아 4인방이 어떻게 가장 먼저 수출 주도 공업화에 나섰고, “사다리의 윗부분을 잡을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나 수출 주도 공업화에 대한 발전국가론의 평가는 모호하다. 발전국가론자들은 선별적 산업 정책을 강조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수출 주도 공업화여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핵심은 국가가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합리적으로 추진해 경제적 성과를 내면 된다는 것이다. “주의할 것은 수출 주도 공업화 전략이 발전국가의 전제 조건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계획 합리성으로부터 산출된 경제적 업적의 정도이다.”
이제 한국과 타이완의 수출 주도 공업화를 살펴보자. 1960년대 한국과 타이완의 수출 주도 공업화는 1950년대에 산업 기반이 어느 정도 구축된 덕분에 가능했고, 이런 기반은 상당 부분 미국의 원조 덕분에 다져졌다.
1953년 | 1954년 | 1955년 | 1956년 | 1957년 | 1958년 | 1959년 | |
한국 | 11.2 | 8.4 | 12.5 | 17.1 | 18.5 | 15.5 | 9.5 |
타이완 | 5.7 | 6.1 | 7.1 | 4.7 | 3.6 | 6.5 | 6.8 |
40 1946∼62년에 미국이 한국과 타이완에 제공한 원조는 각각 54억 3천4백만 달러와 44억 2천8백만 달러로 국가별 원조 규모에서 1위와 2위였다. 41 또 다른 연구 결과를 보면, 1945~76년에 한국이 받은 미국 원조는 81억 3천만 달러로 추산되는데, 이는 1인당 6백 달러에 해당한다. 1950년대 말 한국의 1인당 GNP가 1백 달러 정도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액수다. 같은 기간 타이완은 56억 달러의 원조를 받았고 이는 1인당 5백24달러에 이른다. 42
표2에서 보듯이 미국의 원조는 막대했다. 1957년 한국이 받은 원조액은 국민총생산GNP의 18.5퍼센트에 이르렀다.43 이런 막대한 규모의 원조가 미친 영향을 정확히 추산하기는 힘들다. 계량경제학적 분석을 참조해 보면, 1960∼70년 한국의 경제성장률 중 평균 4퍼센트는 원조 덕분이었다고 한다. 44 마찬가지로 미국의 타이완 원조는 1인당 GNP를 네 곱절 가량 증대시켰으며 1964년의 생활수준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30년 정도 단축했다고 평가된다. 45 물론 이런 원조의 가장 큰 수혜자는 원조품과 달러를 배정받은 삼성의 이병철과 같은 대자본가들이었다. “이병철은 기억력이 흐리지 않은 사람이어서 나중에 이승만의 자유당에 6,400만 환을 주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46 그러나 1950년대 말 미국의 원조가 중단될 것이 분명해졌을 때, 47 한국의 지배자들은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했다.
따라서 이승만의 경제 정책이 “미국의 젖을 최대한 빨아먹는 데 있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박정희 정권이 집권 직후부터 수출 주도 공업화를 의식적으로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경제기획원이 계획안을 작성해 196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장면 정권의 계획을 답습해 수입대체산업화와 일차산품 수출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수출은 국제수지를 개선하는 정도의 수단으로만 언급됐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을 위해 국내외 자본을 총동원하려고 했는데, 제1차 경제개발계획에서는 투자 재원의 72.2퍼센트를 내자로, 27.8퍼센트를 외자로 조달하도록 했다. 미국의 원조가 끊길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주로 국내 자금을 동원해 ‘자립적’ 산업 기반을 건설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내자 조달을 위해 구권 10환을 신권 1원으로 교환하도록 하고 일정액 이상은 모두 금융기관에 예치시켜 강제적으로 저축을 늘리는 ‘화폐개혁’을 1962년 6월에 단행했다. 그러나 미국이 화폐개혁에 반대하면서 원조를 중단하고, 국내 자본가들도 반발해 물가 상승과 외환 부족 등이 나타나자, 박정희 정권은 결국 예금 동결을 풀고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주요 투자 재원인 내자 동원이 어려워지고 미국의 지원도 거의 없자, 결국 제1차 경제개발계획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1963년부터 경제개발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양상을 보면, 발전국가론의 주장과 달리 국가가 처음부터 ‘기업가적 비전’을 제시했다기보다는 실용주의적으로 사태에 대응하는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국 지배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후진국의 공업 생산물이 세계시장에서 통할 리 없다는 통념을 깨고 한국의 제조업 수출이 호조를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경향이 분명해지자 한국의 국가 지배자들은 수출제일주의를 표방하며 수출 지원 정책을 체계화하기 시작한다.
1964년 2월에 확정 발표된 수정안에서는 수출지상주의의 맹아는 보이지만, 명확한 수출제일주의의 입장이 나타나지 않는 데 비해, 1964년 후반기에 가면 ‘수출입국’, ‘수출제일주의’ 등의 표현이 등장하고, 1965년에 가서는 ‘수출이 아니면 죽음’, ‘수출만이 살 길’ 등의 사생결단적 구호가 등장하고 있다.1960년대 초부터 한국의 일부 자본가들은 제조업 수출이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1963∼64년 당시 상공부장관 박충훈은 천우사 사장 전택보를 “보세가공의 시조라 불러도 무방하리만큼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전택보는 제조업 수출이라는 아이디어를 홍콩의 경험에서 얻었다고 한다.
51 홍콩은 마치 신자유주의자들이 내세울 수 있는 표본처럼 보이지만, 52 사실은 홍콩의 산업화에서도 국가는 다른 3국보다 정도는 덜했어도 상당한 구실을 했다. 나이젤 해리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대체로 타이완이 1961년부터, 한국이 1962∼63년부터, 싱가포르가 1965년부터 공산품 수출을 증대시킨 것과 달리, 홍콩은 1950년대 말부터 이미 먼저 수출 주도 공업화로 나아갔다.그러나 정부가 인정하는 바 이상으로, 그리고 관리들이 “우리들 손바닥 위에 있다”고 표현하는 것 이상으로, 정부는 활동하고 있다. 수출과 서비스를 촉진시키고, 해외에 진출해 있는 자국 기업의 이익을 보호한다. 정부는 이제 공업용 부동산, 신시가지, 도시재개발 형태, 토지 간척, 도로와 주요 수송사업을 포함하는 사회간접자본을 제공할 뿐 아니라 공장을 건설하고 임대해 준다. 수출 신용, 기술 지원 그리고 일부 노동조건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정부는 50년대 초반부터 많은 경제적 연관 효과를 갖는 주요 주택 사업을 후원해 왔다. 또한 정부는 열성적으로 교육을 장려하였다. 현재 15세까지는 의무교육(국민학교 수준은 무상교육)이며, 1981년에는 16~17세의 61퍼센트와 18~20세의 23퍼센트가 다른 일을 하지 않고 교육만을 받고 있었다.(영국의 46퍼센트, 16퍼센트와 비교되는 수치이다.) 특히 70년대에는 (남한 및 대만과 마찬가지로) 공공지출이 급속하게(1971년과 1980년 사이에 매년 16.7퍼센트씩) 증대되었다. 공공지출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60년의 7퍼센트, 1970년의 13퍼센트로부터 점차 증가하여 1982년에는 거의 4분의 1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남한이나 대만과는 달리, 이 팽창은 공적으로 강제된 중공업의 성장과 관계있다기보다는 건설 및 건축과 관련된 것이었다.(1983년의 경우 이 부문에 대한 투자의 거의 절반이 공공부문에 의해 이루어졌다.) 1974~75년과 1981~82년의 예산긴축 상황에서 정부는 차입을 증대시키기보다는 지출을 빠르게 축소시켰다.
54 당시에 서유럽에서 노동력 부족이 심각해지자, 저렴한 의류의 새로운 공급원을 찾아 영국 수입상들이 홍콩을 찾아왔고 곧이어 미국 수입상들이 들어왔다. 홍콩에는, 1940년대까지 중국의 직물생산 중심지였던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의 점령을 피해 몰려든 자본가들과 숙련 노동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특화된 세계 자유무역지대였다는 점 덕분에 홍콩은 세계시장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조건에 놓여 있었다. 그 변화란 바로 세계적인 생산·무역 체계의 변화였다. 1950년대 말부터 선진국들은 무역과 통화 관계를 계속 자유화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공산품 수출 능력을 갖춘 소수의 저개발 국가들도 우연한 수혜자가 될 수 있었다.55 한국도 타이완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주도와 감독하에 이 길을 따라갔다. 물론 한국과 타이완이 수출 주도 정책으로 성공하는 데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주요 동맹국이라는 지위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미국의 후한 조처 덕분에 한국과 타이완은 세계 최대 시장에 용이하게 진출하고 수출을 급격히 늘릴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이 후하게 시장을 열어 준 것은 그 지배자들이 착해서가 아니라 냉전 하에서 대소 전초기지 구실을 하던 한국과 타이완의 국가 권력을 뒷받침해 주려면 이 나라들의 자본축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나중에 좀더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
“일단 홍콩이 길잡이 역할을 하자, 대만에 있는 친척들(때로는 같은 사람들)도 동일한 과정을 되풀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강력한 국가의 주도와 감독하에 이루어졌다.”라틴아메리카와의 비교
앞서 살펴봤듯이,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은 새로 형성되기 시작한 세계적인 생산·무역 체계에 편입되면서 수출을 증대시켰다. 국가가 의식적으로 경제 전체를 수출 쪽으로 밀어붙임으로써 수출 주도 공업화로 나아가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다른 지역의 신흥공업국들은 수출 주도 공업화로 나아가지 않았는가? 1977년 세계 공업 생산 중 브라질과 멕시코가 차지하는 비중은 한국이나 타이완보다 훨씬 컸다. 이 나라들은 한국이나 타이완보다 공업화를 추진한 지 더 오래됐고 인구와 자연 자원도 훨씬 풍부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세계 공업 수출에서 이들 나라가 차지하는 비중은 경제 규모가 작은 한국보다 더 작았다. 이것은 1970년대를 경과하면서 생긴 현상이었다. 표3에서 보듯이, 1960년대 이후 한국과 타이완의 무역 성장률과 수출 중 공업 제품 비중의 증가율은 브라질과 멕시코를 크게 앞섰다.
무역 성장률 | 수출 중 공업 제품의 비율 | |||||
수출 | 수입 | |||||
1960∼70년 | 1970∼80년 | 1960∼70년 | 1970∼80년 | 1960∼70년 | 1970∼80년 | |
한국 | 34.1 | 23 | 20.5 | 11.8 | 14 | 89 |
타이완 | 23.7 | 9.3* | 17.9 | 9.1* | 14 | 91 |
브라질 | 5.1 | 7.5 | 4.9 | 4.2 | 3 | 39 |
멕시코 | 2.8 | 13.4 | 6.4 | 7 | 12 | 39 |
중소득국평균 | 5.4 | 3.9 | 6.4 | 4.2 | 11 | 32 |
이런 차이는 단지 국가 관료의 ‘기업가적 비전’이나 실행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1960년대 초반 세계적인 생산·무역 구조 변화가 시작될 당시 이미 형성돼 있던 각국 산업 기반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이다. 멕시코와 브라질 등은 이미 수입대체산업화의 기반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56 이 과정은 1930년대 대불황기에 더욱 가속됐다. 대불황으로 선진국들의 식량·원료 시장이 급속히 줄어들고, 그 정부들이 보호무역주의를 가속화하자 농산물 등 일차산품 수출에 주로 의존하던 브라질과 멕시코 같은 제3세계 나라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57 “거대한 사회적 소용돌이의 위험에 직면하여 수지를 맞출 수 없었던 — 특히 라틴아메리카의 — 몇몇 정부들은, 불안정을 야기시키는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키려는 실용주의적 시도로써 이에 대응했다. 그들은 수입에 매우 엄격한 규제를 가했고 대외부채의 상환을 거부하고 몇몇 산업으로부터 다른 산업으로 자원을 재분배하기 위하여 국가권력을 사용하였다.” 58
농산물·광물 생산 같은 일차산업에 주로 의존하던 멕시코와 브라질 등에서 최초로 산업 발전이 급속히 진행된 것은 제1차세계대전 동안이었다. 세계대전 와중에 외국 무역 회사들이 파산하자 토착 산업들이 선진 자본과의 경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59 국가의 개입이 세계경제의 상황과 상관없이 국내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외부와 단절해 성장하려는 전략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브라질에서는 1932년부터 공업 성장이 빨라져 1939년까지 매년 10퍼센트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섬유, 식품가공 등 소비재 공업뿐 아니라 철강, 시멘트 등 생산재 공업도 1930년대에 상당한 기세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멕시코에서도 페소 인하, 관세 인상, 공공투자 확대 등이 효과를 내 1930년대 말부터 공업이 급속하게 발전했다.60 성장률은 하락했다. 1963년과 1964년에 브라질의 성장률은 1.5퍼센트와 2.4퍼센트까지 급락했다. 미국의 원조가 줄어들면서 한국과 타이완이 새로운 활로가 필요했던 것처럼 브라질 지배자들도 새로운 성장 동력이 필요했다. “몇몇 국가들이 — 특정한 판단에 의해서라기보다는 행운에 의해 — 또 다른 개발 전략을 발견하게 된 것이 바로 이때였다. 그것은 자원을 수출용 상품생산에 적합한 특정 산업 분야에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61
성공은 새로운 야망을 키웠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수입통제를 완화하면서 수입이 급속히 늘어나 상당한 국제수지 적자를 기록하자, 이제는 국내 제조업 성장을 자극하겠다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다시 수입통제를 강화했다. 1950년대에는 이 전략이 잘 작동하는 듯했다. 게다가 당시에 농산물 등 일차산품의 가격이 비교적 높아 공업 성장에 필요한 수입이 방해받지도 않았다. 그러나 국내 제조업 시장에 대한 수입대체화가 완료되고, 주요 수출품인 일차산품의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1960년대 중후반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은 제조업 수출 촉진 정책을 도입해 수출과 소득에서 급속한 성장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대표적 예가 바로 브라질인데, 1969∼73년은 흔히 ‘브라질의 기적’으로 불리는 시기로 1969년에 9.9퍼센트, 1971∼73년에 각각 12.0퍼센트, 11.1퍼센트, 13.6퍼센트의 실질 GDP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와 같은 고도 성장을 이끈 것은 바로 수출의 급신장이었다. 1969∼73년 브라질의 수출은 46.1퍼센트 성장했는데, 같은 기간 타이완과 한국의 수출 증가율은 각각 47.5퍼센트와 73.7퍼센트였다.63 수입대체화에 몰두하던 기업들의 처지에서 보면, 수출 촉진 정책은 더 작은 시장에서 확실한 이윤을 획득하던 방식으로부터 더 큰 시장에서 불확실한 소량의 이윤을 획득하는 경쟁으로 내모는 것이었다. 게다가 1930년대처럼 선진국들이 또다시 무역에 빗장을 걸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수출 촉진 정책이 경제 전체에 효과를 미친 것은 아니다. 한국과 타이완의 수입대체화 기간은 길어야 10년 정도였지만 브라질과 멕시코 같은 나라들은 1930년대를 전후해 수입대체산업화를 시작해서, 수입대체산업 관련 이해집단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훨씬 컸다.64 개발도상국 대부분이 제조업 부문 전체를 수출 지향적으로 바꾸기보다는 수입대체 부문을 유지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곤란 때문이었다. 결국 브라질과 멕시코의 수출 촉진 정책은 어디까지나 수입제한 체제 위에 수출 유인 체제를 올려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65
수입대체화 기간도 짧고 자본들이 국가에 완전히 의존하던 한국과 타이완에서조차 수출 주도 정책 채택을 둘러싸고 사회 집단들과 정부 내에서 적지 않은 갈등과 대립을 겪었다. 따라서 수입대체산업화를 오래 지속한 국가가 경제 전체를 수출 지향적으로 개혁하려면 수입대체 부문의 기업인들뿐 아니라 관료들, 그리고 통화 평가절하(제조업 수출에 유리한)에 반대하는 일차산품 생산자들의 강력한 저항을 극복해야 했다.브라질과 멕시코 모두 개념상 세 개의 경제 영역으로 구분될 수 있다. 수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전통적인 천연자원 수출 경제, 국내시장에 생산물을 공급하는 강력하게 보호되는 공업 경제, 그리고 세계적인 분업 체계의 일부분인 새로운 국제경제 영역이 바로 그것이다. 세 경제 영역 사이의 관련성은 불안정하며, 셋째 영역은 채무불이행 사태에 거의 근접하고 있고, 정부의 주된 관심은 둘째 영역으로 모아지고 있다.
67 수입대체적 성격이 강한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했다. 반대로 박정희 정권은 수입대체를 염두에 두었지만, 외채에 의존해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수출 시장의 틈새를 찾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중화학공업화 슬로건은 “수출 1백억 달러”였다. 1970년대에 한국은 여전히 철강을 어마어마하게 수입하고 있었지만 포항제철은 생산량의 40퍼센트를 수출했고, 현대차 같은 자동차 기업들은 국내 판매를 늘리는 것뿐 아니라 미국 시장에 진출하려고 애썼다.
한국·타이완과 브라질·멕시코의 차이는 1970년대에도 나타났다. 브라질과 멕시코는 막대한 외채를 도입해68 멕시코에서는 대규모 원유 매장량이 새롭게 발견되자 페소화 가치가 상승하면서 제조업 수출이 억제됐다. 69 이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는데, 중화학공업화에 필요한 수입품의 가격을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1975년 멕시코 해외 수입 중 22퍼센트를 차지했던 제조업 수출은 1980년에 오히려 11퍼센트로 떨어졌다. 반대로 원유 판매 수익은 6퍼센트에서 59퍼센트로 치솟았다. 70 자립적 산업 기반을 육성하려다 아이러니이게도 원자재 수출에 의존하는 이전 시대의 무역 형태가 강화된 것이다.
이와 달리, 브라질과 멕시코에서는 1970년대 오일쇼크를 전후해 석유를 비롯한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자, 제조업 수출 비중이 후퇴하는 경향마저 나타났다. 불황으로 제조업 제품 가격이 하락하자 브라질 정부는 수입 제한을 다시 도입하면서 높은 성장률을 지속하기 위해 공공지출을 유지하려 했고, 그동안 방치했던 농업 부문에서 수출을 증대하려 했다.71 선진국 경제가 불황에 빠지고, 석유 등 원자재 가격이 폭락하고, 외채 금리가 급등하자, 브라질과 멕시코의 성장 전략은 파산했다. 1980년대에는 외환 위기도 여러 차례 겪었다. 물론 브라질과 멕시코는 모두 1930년대 대불황기와 달리 자급자족 경제로 후퇴하지는 않았다. 양국 지배자들은 세계가 달라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고(여전히 경제자유화에 격렬히 저항하는 자본가들이 있었지만), 전 세계적인 생산·무역 체계에 편입되는 것이 생존의 절대 조건이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1980년대 브라질과 멕시코의 구조조정은 한국보다 훨씬 더 격렬할 수밖에 없었고, 이 나라들에게 1980년대는 성장이 멈춰 버린 ‘잃어버린 10년’이 됐다. 반대로, 동아시아 4인방은 1980년대 초 세계경제 위기 때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1980년대 중후반에는 다시 세계시장 진출을 늘리면서 유례없이 급성장했다.
1979년 미국이 금리를 대폭 인상하면서미국과의 동맹이 경제 발전에 미친 효과
동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개발도상국들을 비교해 보면 국가는 똑같이 경제성장을 의도했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적극 개입했다. 특정 산업을 육성하고자 국내 시장 보호, 진입과 퇴출 금지, 보조금 지급과 세제 감면, 재정·금융 지원 등 여러 보호 조처를 시행했다. 그러나 앞서 살펴봤듯이, 각국이 처한 정치·사회적 조건은 그들의 정책 선택과 추진 과정,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수출 주도 공업화를 선택했다는 것만으로 경제성장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수출 지향 전략을 가지고 헤쳐나갈 수 있는 기회들은,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의 온갖 찬양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적다. 그 이유는 그들[저발전 국가]이 값싼 노동력을 제외하면 다국적 자본에게 제공할 것이라곤 거의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이에 반해 많은 경쟁자들은 이와 같은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저발전 국가들은 투자금 확보가 매우 중요했다. 1980년대 이후 많은 저발전 국가들은 수출을 늘리려 해도 해외 자본을 끌어들이지 못해 더는 발전하지 못했다. 한국과 타이완에서는 1950년대 미국이 제공한 원조가 산업 기반을 건설하는 데 적지 않은 구실을 했고 이후 도약의 발판이 됐다. 그리고 1960년대 이후 외자를 끌어오는 데서도 미국과의 동맹 관계가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첫째, 한국은 미국의 강력한 요구와 후원 아래 1965년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그 대가로 무상 원조 3억 달러, 차관 2억 달러, 일본 민간 기업 투자 3억 달러를 얻어냈다. 당시 한국의 수출 총액은 고작 2억 달러였다. 자금 부족으로 개발 계획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던 박정희 정권에게 이 자금은 국내의 엄청난 저항을 감수하고라도 얻어내야 할 만큼 중요했다. 이는 이승만 정권이나 장면 정권이 청구한 액수에 견주면 적지만(이승만 정권은 무상 20억 달러를, 장면 정권은 10억 달러를 요구했다고 한다), 당시 박정희 정권한테는 가뭄의 단비 같은 구실을 했다. 둘째, 미국을 도와 베트남 전쟁에 파병함으로써 한국은 막대한 자금을 벌어들였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1965년 2월 의료반 등 비전투부대 파병으로 시작해 그 수는 연간 약 5만 명이었고, 1964∼75년에는 연 31만여 명에 이르렀다. 한국은 베트남 파병 국가로서 파병 군인의 송금과 미군 물자 조달 등으로 연간 2억 달러, 1965∼72년 총 10억 2천2백만 달러에 이르는 특수를 누렸다.
75 개발도상국의 수출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막힐 수도 있었다. 실제로 미국은 1960년 이후 한국 면직물과 의류 수입을 제한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이후 한국에 ‘바이 아메리칸’ 정책을 적용하지 않았다. … 이 때문에 한국은 다른 발전도상국보다 용이하게 미국 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다.” 76
한국은 베트남 전쟁을 기점으로 대미 수출도 급격히 늘릴 수 있었다. 물론 1965년 관세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이 수정되며 일반호혜체계GSP, General System of Preference가 도입돼 개발도상국들의 선진국 수출이 우대받게 된 것도 한몫했다. 그러나 선진국들이 “자국의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위해 이 규칙을 활용”했으므로 타이완과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베트남 파병을 하지는 않았지만, 베트남 전쟁에 쓰이는 물품들을 공급하면서 수출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싱가포르·타이·말레이시아도 전쟁 물자의 제공과 수송을 통해 베트남 전쟁 특수를 누렸다.78 “1970년대 말엽에 이르러서 한국은 브라질을 필두로 한 세계 4대 채무국의 하나가 되었다. 1976∼79년에 한국의 해외차관은 멕시코와 브라질에 이어 3위를 차지하였으나, 1967∼78년 사이에 한국의 외채는 15배로 늘어나 저개발국가 전체 외채율의 2배를 기록했고, 멕시코와 브라질의 외채율을 앞질렀다.” 79
셋째, 한국은 미국의 세계 체제에 적극적으로 편입됨으로써 유리한 조건으로 막대한 외채를 구할 수 있었다. 한국이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해 미국에게 지정학적으로 중요하고 미군 기지를 제공하는 동맹이라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한국은 경제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데도 표4에서 보듯이 1981년에 이미 2백억 달러에 가까운 차관을 들여올 수 있었다. 차관 | 외국인 투자 | 계 | |
한국 | 19,964(94.3) | 1,206(5.7) | 21170 |
타이완 | 1,739(35.8) | 3,114(64.2) | 4853 |
싱가포르 | 1,318(14.9) | 7,520(85.1) | 8838 |
브라질 | 43,999(71.6) | 17,480(28.4) | 61479 |
멕시코 | 42,642(83.4) | 8,459(16.6) | 51101 |
81 덕분에 한국은 외환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1980년대 외환 위기 탓에 라틴아메리카에서 민간 자금이 빠져나가면서 외환 위기가 더한층 심화하고, 82 이 때문에 라틴아메리카의 경제 위기가 더욱 악화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지원은 한국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대단히 큰 구실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멕시코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에서 외환 위기가 일어나면서 1983년 무렵 한국도 외환 위기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레이건 정부의 후원 아래 일본 정부한테서 특혜 조건으로 구제금융 40억 달러를 받을 수 있었다. 40억 달러는 당시 한국 GNP의 5퍼센트였고, 외채의 10퍼센트에 이르렀던 액수였다.맺으며
발전국가론은 국가의 자율성과 능력을 경제성장의 최우선 요인으로 여긴다. 그리고 “국가중심적 접근법”에 따라 국가 관료 기구의 능력을 중시하면서 발전국가의 대표적 사례로 한국과 타이완을 꼽는다.
그러나 국가기구의 능력이나 경제성장의 조건은 세계경제의 상태, 그 사회가 처한 계급투쟁 상황, 국가 관료와 대지주·자본가와의 관계 등 역사적으로 형성된 정치·사회적 조건 등에 크게 달려 있다. 한국 기업주들이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노동자들을 쥐어짤 수 있었던 것은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노동자·민중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폭력으로 탄압함으로써 가능했다. 경제 발전에서 국가가 한 구실이나 국제 관계가 미친 영향은 앞에서 자세히 다뤘다.
83 것이라는 비판은 적절하다. 국가기구의 구실과 국가의 선도성을 그저 다른 여러 사회 조건들 중의 하나로만 본다면, 발전국가론 자체가 허물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능력 있는 국가 관료라도 국내의 산업 기반, 계급 세력 관계 등 정치·경제적 조건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고 세계경제 상황이나 국가 간의 관계를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면, 국가 관료의 비전이나 능력으로 저개발국이든 공업국이든 할 것 없이 고도 성장을 이끌어내고 복지를 향상시킬 수 있다는 주장은 힘을 잃게 된다. 특히 최근 미국과 유럽 같은 강대국들의 경제 개입으로도 세계경제 위기는 고사하고 자국 경제 위기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발전국가론의 취약성을 분명히 보여 주는 사례다.
“발전국가론이 안고 있는 상당수의 문제점은 국가관료기구의 역할과 국가의 선도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또 다른 역편향에서 기인”하는물론 지금 같은 세계적인 위기 상황에서 진보진영은 대중의 생활 보호와 관련해 국가의 개입을 요구해야 하지만, 그것은 발전국가론처럼 자본주의 경제의 성장이라는 불가능한 목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반자본주의로 투쟁의 질적 전환을 위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주
- 박정희 정부가 처음 만든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미국의 지원을 더 받아 내려는 “쇼핑 리스트”에 지나지 않았다는 평가가 많았다. 기미야 다다시 2009, p110. 즉, 구체적인 계획이라기보다 한국 정부가 건설하길 희망하는 산업, 공장 목록을 나열한 것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
- 윤상우 2005, p74에서 재인용. ↩
- 박은홍 2008, p23. ↩
- 장하준 2006, p79. ↩
- 장하준 2006, p72. ↩
- 예를 들어, 장하준은 신자유주의 경제학, 특히 하이에크를 비롯한 오스트리아 학파가 국가 개입에 대한 이해를 바꿀 수 있는 근본적인 통찰을 제공했다고 본다. ↩
- 박은홍 2008, p35. ↩
- 윤상우 2005, pp76-77. ↩
- 장하준 2006, p235. ↩
- “발전국가론이 동아시아에서 발견한 ‘성장의 엔진’은 때늦은 산업화 과정에서 ‘시야가 넓은 조타수’ 역할을 한 발전국가였다.” 박은홍 2008, p20. ↩
- “한국 경제 씨스템이란 1961년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창출되고, 이후 수십 년간 한국의 경제 발전을 가속해 온 씨스템을 가리킨다. 이 씨스템은 국가, 은행 그리고 재벌 간의 긴밀한 제휴에 기반한 것이었고, 그 중 국가가 주된 행위자였다. 따라서 그것은 (이 표현이 꼭 맞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주식회사 한국’(Korea Inc.)이라고 알려지기도 했다.” 신장섭·장하준 2004, p17. ↩
- 발전국가론이 제기하는 “규율된 시장” 혹은 “지도된 시장”이라는 개념이 바로 이것이다. ↩
- 커밍스 2001, p446. ↩
- ‘8·3 사채 동결 조치’에 대해서는 김정렴 1995, pp255-287을 참고하시오. 김정렴은 박정희의 핵심 경제 참모 중 하나로 1972년 당시에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다. 그는 ‘8·3 사채 동결 조치’가 재벌(전경련)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추진됐다고 증언한다. ↩
- 조준현 2000, p201. ↩
- 조준현 2000, p150, 각주 18에서 재인용. ↩
- 커밍스 2001, pp444-445. ↩
- 박은홍 2008, p31. ↩
- 발전국가론자들은 유능한 관료 기구 중에서도 “선도 기관”을 중요 요소로 보는데, 일본 통산성, 한국 경제기획원, 타이완 경제 계획 발전위원회 등이 대표적인 예다. 엘리트 관료들로 구성되는 선도 기관들은 정부 안팎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우면서도 그것을 조정하는 막강한 권한을 갖는다는 것이다. ↩
- 암스덴은 한국의 급속한 성장의 핵심 기제로 ‘보조금’과 ‘규율’이라는 이중의 정책을 강조한다. 기업들에게 할당된 목표, 예를 들면 수출 실적을 채우지 못하면 그 기업은 국가가 제공하는 특혜를 잃게 된다. ↩
- 장하준 2006, pp230-231. ↩
- 조희연 2010, p53. ↩
- 암스덴 1990, pp38-64. ↩
- 박은홍 2008, p21. ↩
- 특히 장하준에게 이런 국가중심적 접근법은 그의 제도주의 경제학과 관련이 있다. 이에 대한 논의는 이정구 2011을 참고하시오. ↩
- 장하준 2006, p251. 강조는 인용자. ↩
- 장하준 2006, p234. 이 주장은 유교적 전통이 동아시아 경제성장의 요인이라는 주장을 반박한다는 측면에서는 완전히 정당하다. ↩
- 1947년에 밀수 담배를 단속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소한 마찰이 국민당 관리들의 전횡에 맞선 대규모 민중운동으로 확산된 사건이다. ↩
- “성공적인 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이 지주계급이 없는 도시국가이거나(홍콩과 싱가포르), 군대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급진적 토지개혁을 실행에 옮길 준비가 되어 있는 나라들이었다(남한과 대만)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하먼 1994, p209. ↩
- 국민당 정권은 토착 타이완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 잠재적으로 국민당에 도전할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 한국과 달리 대기업이 성장하는 것을 억제했다. 대신 거대 규모의 핵심 산업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을 때는 국영기업을 활용했다. “1990년 현재 대만의 국영기업이 전체 자본의 47퍼센트를 차지하고 있고, 국내총생산의 22퍼센트를 생산했다. 한국의 경우 1989년 현재 국영기업은 전체 자본의 12.6퍼센트, 국민총생산의 6퍼센트를 차지했다.” 신광영 1999, p39. ↩
- 윤상우 2005, p82. ↩
- “에반스의 지적대로 한국의 이승만 정권은 발전국가라기보다는 약탈국가에 가까운 시기였다.” 윤상우 2005, p50. 마찬가지로 “이승만 체제와 박정희 체제의 차이는, 전자의 경우 민중들로부터 수탈한 부를 흐리멍텅하게 낭비해 버렸다는 겁니다. 남미도 마찬가지고요. 그에 비해 박정희 시대의 국가는 자본이 노동자를 착취해 수탈한 부를 생산적인 방향으로 투자하도록 강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장하준·정승일 2005, p53. ↩
- 박은홍 2008, p29. ↩
- 장하준 2006, p104. 강조는 인용자. ↩
- “이승만 약탈국가에서의 관료 기구가 박정희 발전국가의 관료 조직과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고 볼 수 없다.” 윤상우 2005, p51. ↩
- 조희연 2010, p53. ↩
- 장하준은 “[1987년 투쟁 이후] 군부 통치의 결과로 나타난 정치적 불신으로 발전주의의 정당성이 급속히 약화되었”다거나 “재벌들은 국가가 점차 덜 개입하도록 만들었으며, 국가 개입이 지속되는 데 저항하는 정치적 힘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신장섭·장하준 2004, p118, p53. ↩
- 조희연 2010, p104. ↩
- 박은홍 2008, p25. ↩
- 원조액 추산은 연구마다 약간씩 차이가 나는데, 예를 들어 최상오는 1957년에 GNP의 23퍼센트에 이르렀다고 평가한다. ↩
- 조준현 2000, p65. ↩
- 신광영 1999, pp57-58. 저발전국에 대한 미국의 전체 원조 가운데 64퍼센트를 동아시아의 반공 국가인 한국, 타이완, 필리핀이 받았다. ↩
- 커밍스 2001, p426. ↩
- 신광영 1999, p57. ↩
- 해밀턴 1986, p275. ↩
- 커밍스 2001, p433. ↩
- “1960년 미국의 달러 채무의 총액은 187억 달러에 이르게 됐다. 그런데 무역수지만을 본다면 비록 흑자폭이 크게 감소하기는 했지만 1960년대 초까지는 아직 미국의 무역수지가 적자로 전락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국제수지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킨 것은 막대한 군사적·비군사적 원조에서 비롯됐던 것이다.” 조준현 2000, p76. ↩
-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수립과 실패, 그리고 수정 과정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기미야 다다시 2009와 이완범 1999를 참고하시오. ↩
- 공제욱·조석곤 2005, p89. ↩
- 공제욱·조석곤 2005, pp91-93. ↩
- 해리스 1989, p81. ↩
- “영국과 미국뿐만 아니라 적어도 일정 기간 동안 국가가 경제 발전에 강력하게 개입하지 않고 산업화에 성공한 나라는 없다고 필자는 단언할 수 있다.(홍콩은 독특한 예외이다.)” 장하준 2006, p133. ↩
- 해리스 1989, pp66-67. ↩
- “어떤 나라들에서는 수입대체 단계에서 국제경쟁을 수행할 능력을 충분히 키우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하먼 1994, pp209-210. ↩
- 해리스 1989, p166. ↩
- 하먼 1994, p207. ↩
- 예를 들어, 브라질의 주요 수출품인 커피는 1929년 공황 발생 후 2년 만에 가격이 60퍼센트나 하락했다. 해리스 1989, p89. ↩
- 하먼 1994, pp207-208. ↩
- 山崎春成 1984, pp278-279. ↩
- 예를 들어 멕시코의 주요 수출품인 “원유의 가격은 1920년대의 1배럴당 12달러 80센트에서 1960년대 초에는 1달러 60센트까지 폭락했다. 이것은 명목가격으로도 1920년대의 8분의 1에 불과할 뿐 아니라 달러의 구매력을 기준으로 하면 40분의 1로 하락한 것이다.” 조준현 2000, p92. ↩
- 하먼 1994, p209. ↩
- 조준현 2000, pp104-105. ↩
- “라틴아메리카는 수입대체화의 대륙이었다. … 보호벽 안쪽에서 국민과 기업 들은 국내시장을 겨냥한 생산에 몰두하여 광범위한 인적·정치적 연계망을 건설하였다. 그러므로 1960년대에 전 세계가 이들 나라에게 무역 장벽을 걷어내고 수출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문제는 기존의 경제 전략을 중심으로 성장한 이해관계의 두꺼운 연계망을 어떻게 무너뜨리는가 하는 것이었다.” 커밍스 2001, p438. ↩
- 조준현 2000, pp39-40. ↩
- 조준현 2000, p36. ↩
- 해리스 1989, p94. ↩
- “이 차관은 거의 조건 없이 외부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손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에 매력적이었다. 은행 입장에서 보자면, 아르헨티나, 멕시코, 브라질 같은 나라들에 차관을 제공하는 것은 자신들의 석유 달러 예금을 빠르게 회전시킬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었다. 또한 이 국가들에서는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차관을 충분히 갚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헬라이너 2010, p219. ↩
- “이 기간 동안 브라질에서 신용 확대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이 전통적인 수입대체산업화 부문과 농업 부문이었다는 사실은 이 시기 브라질의 성장 전략이 기본적으로는 여전히 수입대체인 것이었음을 말해 준다.” 조준현 2000, p110. ↩
- “멕시코에서도 인플레이션과 재정 적자는 수출 특혜 신용이나 수출 보조금 등 수출 유인 제도들의 폐지를 가져왔으며, 기업들은 수출에서보다 국내 판매에서 보다 많은 보호를 제공받았다.” 조준현 2000, p112. ↩
- 해리스 1989, pp93-94. ↩
- “미국 경제정책의 갑작스런 변화로 말미암아 1971∼80년대 동안 평균 0.8퍼센트였던 은행 대부의 실질 이자율은 1982년 11퍼센트로 급등했다.” 헬라이너 2010, p219. 그러나 이런 전환이 ‘금융자본의 쿠데타’이거나 신흥공업국들을 굴복시키려는 ‘선진국의 음모’인 것은 아니다. “1978∼79년 달러 위기 때 다른 나라 정부들과 민간 투자가들은 별안간 미국의 경제정책에 대외적 규율을 부과하려 했다. 이런 새로운 대외적 구속에 직면해, 미국은 정책 자율성과 금융 개방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국제금융의 압력이 부과하는 규율을 따르기로 한 결정은 후자의 선택을 반영한 것이었다.” 헬라이너 2010, p170. ↩
- 하먼 1994, p212. ↩
- 게다가 “미국 CIA 정보에 따르면, 1961년에서 1965년까지 일본 회사들이 한국 집권당 예산의 3분의 2를 제공했는데, 6개 기업들이 6,600만 달러라는 엄청난 액수를 기부했다.” 커밍스 2001, p450. ↩
- 정성진 2005, p113. “한국인들은 몇 달간의 협상 끝에 미국 정부로부터 1개 사단당 750만 달러로 추정되는 거대한 현금 및 원조 약속을 받아냈다. 효력을 보장한 이 문서는 1966년 3월 4일의 이른바 브라운 비망록인데, 이에 따라 미국이 지불한 약 10억 달러가 1965∼70년 사이에 한국에 들어왔다. 학자들은 이 협약에 따른 수입이 1966∼69년 기간 한국의 연간 국내총생산의 7∼8퍼센트, 총 외화수입의 19퍼센트까지 차지한다고 추정했다.” 커밍스 2001, pp452-453. ↩
- 신광영 1999, p62. ↩
- 정성진 2005, p116. ↩
-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오일쇼크로 불황을 닥쳤을 때도 아시아 국가들은 새로운 자금 조달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중동 특수”다. 1975년 이후 중동 국가들이 석유 달러 유입 확대로 이를 대규모 건설 공사에 투자할 때 아시아 각국의 노동자 3백20만 명이 중동으로 갔다. 한국 정부는 노동력 수출 과정을 통제하고, 기업이 중동 지역에서 계약을 수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동시에 인력 수출 정책을 산업 수출 촉진 전략의 하나로 조율했다. 중동으로 일하러 간 노동자들은 1974년 3백95명에서 1982년에는 17만 2천9백68명으로 늘었는데, 이는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1.17퍼센트, 전체 피고용자의 4퍼센트에 해당한다. 이 덕분에 높은 실업의 압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노동자들의 대규모 송금 덕분에 1977년에는 일시적으로 국제수지 흑자를 기록하는 등 무역수지를 개선하는 데도 기여했다. ↩
- “세계 자본의 맥락에서 한국이 누리는 특권적 위치는 1980년대 중반에 3,800만 인구에 200억 달러가 넘는 주요 신흥공업국가 중에서 가장 큰 차관 수령국이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브라질은 1억 1,500만 인구에 550억 달러의 외채, 멕시코는 6,800만 인구에 265억 달러의 외채가 있다.)” 할리데이 1986, p240. ↩
- 커밍스 2001, p445. ↩
- 신광영 1999, p57. ↩
- 커밍스 2001, p467. 한국 정부는 60억 달러를 요청했지만, 일본 정부는 정부차관 18억 5천만 달러와 일본 수출입은행 융자 21억 5천만 달러를 제공했다. 中川信義 1984, p113. 1997년 외환 위기 직전에 미국이 일본의 지원을 차단했던 것과는 차이가 난다. ↩
-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민간 자산은 각국이 진 대외 채무와 거의 동일하거나 몇몇 경우에는 이를 초과했다.” 헬라이너 2010, p227. 따라서 자본 도피를 막을 수 있었다면 외환 위기를 해결하기 쉬웠을 것이다. ↩
- 윤상우 2006, p67.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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