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민경우의 《민족주의 그리고 우리들의 대한민국》
강경한 민족주의, 온건한 대안
1990년대 초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한 뒤 한국 좌파는 커다란 이데올로기적 혼란에 빠졌다. 많은 좌파 학자들이 체제 변혁이라는 거대 담론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고 선언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 탈근대 담론으로 회피했다. 1987년 이후 자유화의 점진적 진전도 이런 흐름을 뒷받침했다. 특히 민족주의는 이들의 주된 거부의 대상이었다.
일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퇴행은 극단적이었다. 이들은 뉴라이트와 합작해 급진 민족주의와 민중주의를 공격하기도 했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출간이 이를 상징한다.
2007년 7월 30일치 〈통일뉴스〉 칼럼에서 민경우는 이런 세태에 대한 자주파의 대응이 없음을 한탄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현 시점에서 조국통일을 둘러싼 쟁점은 주한미군철수, 6·15 공동선언과 같은 정치강령에 있다기보다는 민족, 민족주의, 세계화, 자유주의 등 철학적인 문제, 현 세계사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와 연관되어 있다.”
이 점에서 민경우의 책 《민족주의 그리고 우리들의 대한민국》은 ‘민족 허무주의’에 대한 이론적·철학적 대응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고 이 책이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이론 차원의 논쟁만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실천적 논의가 더 많다. 게다가 다루는 쟁점도 박노자·권혁범·박세일·도진순·김동춘 등의 민족주의관에서 장하준, 사회민주주의, 새사연의 국민주권 운동, 한미FTA 등 한국사회 대안 논의와 혼혈, 이주자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방대하다.
이 책은 〈통일뉴스〉에 연재했던 저자 칼럼의 연장에 있기 때문에 압축이 많다. 이런 압축은 기본적으로 이 책이 자주파를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사상을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그의 다른 책 《민경우가 쓴 통일운동사》와 〈통일뉴스〉에 연재중인 한국경제의 구조변화에 대한 칼럼, 그의 논문인 ‘21세기 진보운동의 재구성’을 함께 보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민족은 언제나 존재했는가
다음은 민경우의 민족 개념을 잘 드러내 주는 말이다.
“근대 시민사회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학자들은 민족의 바람직한 유형을 ‘자유로운 시민들의’ 공동체, 즉 일종의 계약공동체로 보고 혈연과 언어를 같이 하는 민족 집단을 패쇄적이고 배타적이라며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민족=계약공동체’와 같은 주장은 부모자식 관계가 계약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기이한 주장이다. 누군가가 시민적 의식을 갖고 있건 전근대적 생각을 갖고 있건 동일한 언어와 유전적 특질을 갖고 있으면 같은 민족이라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사실, 시민적 민족주의와 종족적 민족주의를 기계적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 둘 다 어느 정도 양자의 요소를 공유하고 있고, 둘 모두 단일한 정체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또, 흔히 시민적 민족주의의 계기라고 생각하는 프랑스 혁명에서 민족 형성 과정이 부르주아 혁명이 없었던 비서구 세계의 그것(흔히 국가의 중앙집중성, 국가에 의한 가혹한 국민통합 과정 등을 예로 드는)과 질적으로 다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민경우의 주장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에 따르면 “민족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면면히 이어져 왔던 사회역사적인 존재다.” 즉, “씨족, 종족 사회가 정치사회적 통일성을 이루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혈연과 언어, 문화와 풍습의 동질성이 생겨났을 때 발생한다.” 여기서 민족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힘은 “국가권력”이다. 그는 유럽은 “민족적 토대가 약했던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일찍부터 중앙집권적 제국이 지역 주민을 강력하게 통제”해 “민족 형성이 유럽보다 빨랐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민족과 민족주의의 발생을 자본주의의 발전과 연관시키는 마르크스주의와 완전히 다른 접근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민족과 민족주의는 근대 자본주의 산물인데 반해 민경우의 규정에 따르면 고조선부터 민족이 실재한 셈이 된다.
그가 취하는 입장에는 북한 정권의 민족 개념 규정 변화가 반영된 듯하다. 처음에 북한 정권은 스탈린주의로부터 공식 민족 개념을 도입했다. 1949년 북조선로동당이 펴낸 《민족과 민족문제》에는 민족의 발생에 대해 이렇게 쓰여 있다. “로씨아[러시아]인들이 민족을 형성하게 된 것은 최근이다. … 조선인 등에 관하여도 역시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다. … 노예사회와 봉건시대에 있어서 민족이 발생될 수 있는가? 물론 발생할 수 없다. … 민족은 자본주의가 발생될 때에 발생된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북한은 혈연을 매우 강조하는 단일민족 신화를 부추기고 고조선-고구려를 민족 정통성의 기원으로 부각시켰다. 급기야 최근에는 역사 날조를 통해 단군릉을 만들고, 평양이 세계 최초의 고대문명 발상지라는 ‘대동강 문화론’을 주창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래서 여러 학자들은 북한이 민족을 초역사적 존재로 만들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이 점에서 고조선-고구려를 정통으로 삼는다는 북한 당국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공개 항의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민경우는 《민경우가 쓴 통일운동사》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남한측의 반대론이 남한의 탈미 친중 흐름을 견제하려는 친미보수 세력의 기획이라고 암시한다).
전통 시대에 인간 집단을 구분한 것은 ‘민족’이 아니었다. 예컨대, 조선 시대 지배계급에게 중요한 인간 집단 구분은 문명과 야만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흔히 자신의 정체성을 중국 문명에서 찾았다. 지리적으로 고립돼 있는 농촌 공동체의 일상적 정체성은 가족·친족을 넘지 않았고, 만약 누군가 ‘혈연’을 말한다면 그것은 귀하신 분과 천한 놈을 가르는 신분제의 의미였다. 따라서 한국에서도 ‘민족의 형성’은 제국주의의 침략과 억압에 맞서 근대 국민국가를 만들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다고 봐야 한다. 심지어 이때조차 민족주의는 범아시아주의, 사회주의 등 다른 반제국주의 정체성과 경쟁해야만 했다.
저자가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자유주의자들의 민족주의, 특히 저항적 민족주의마저 파시즘인양 매도하는 데 맞서 이를 방어하려는 시도는 이해할 만하다. 임지현 등 푸코의 권력 담론에 입각한 듯한 학자들의 담론들이 주로 현실을 변혁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임지현은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에서 한총련 출범식을 사수하려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상 파괴적이기보다는 우상 숭배적인 이들의 고답적 권위주의, 봉건적 가부장주의, 폐쇄적 민족주의 등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 유감스럽게도 자네들은 좌파가 아니다. 자네들보다는 차라리 황신혜 밴드가 더 진보적이라고.”
그런데 이와 같은 이들의 공격은 민족주의 전략의 약점을 부분적으로 반영하기도 한다. 2차대전 이후 많은 식민지 국가들이 민족국가를 건설했지만, 그것이 약속한 인간 해방약속은 어디에서도 실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것은 또 다른 억압국가였고, 서방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한 자본축적의 도구였다.
저자는 이런 제3세계 민족주의자들의 배신, 그들의 파산에 대해 아무런 진지한 성찰을 시도하지 않고 있다. ‘민족과 국가가 있어야 개인이 존재한다’는 그의 논리가 설득력을 얻기 힘든 이유다.
게다가 그가 좌파임에도 민족주의와 개인의 관계는 나름의 설명을 시도하면서도 정작, 민족주의와 계급이 맺는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 않는다는 점은 놀랍다. 그런데 그가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박하는 방식을 봤을 때 민족이 있어야 계급도 있다고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저항의 주체는 국가?
저자의 민족관·국가관은 전략과도 연관이 있다.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는 변화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저자에게 반제국주의 저항의 최상의 형태는 국가다. 민중의 의지를 정부 형태로 집중해 강력한 힘(궁극적으로는 정규군을 뜻한다)을 발휘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과 신자유주의에 맞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비정부적인 형태의 대응으로는 어렵다”거나 차베스·이란·북한 등이 “정부와 국가 권력을 활용한 강력한 반제운동의 위력을 잘 보여 주고 있다”는 주장이 그 예다. 반면, ‘이라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나라의 힘이 없으면 어떤 국제기구나 국제적인 반전운동의 지원도 소용없다’는 냉엄한 현실이다.
정부와 국가를 최상의 행위 주체로 보는 저자의 분석은 상식처럼 보인다. 자본주의 체제는 집중된 권력을 가진 국가 간의 경쟁 체제이고, 따라서 이에 맞서 상대적으로 약소한 국가는 그 구성원들의 힘을 더욱 동원하려 하는 게 당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가 이라크에서 얻은 교훈을 일반화하면 결국 부국강병만이 대안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무엇보다, 그렇다면 왜 정부를 통한 ‘반제운동’이 그동안 대부분 실패로 끝났는지 설명해 주지 못한다. 세계사에서 상대적 약소국이 강대국의 군사적 압력에 패배한 사례는 셀 수가 없을 것이다. 1960~70년대 이스라엘에게 굴욕을 당한 아랍 민족주의 국가들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수천 기의 핵으로 무장한 소련 역시 허망하게 붕괴하지 않았던가?
둘째, 저자의 주장은 해당 국민국가의 모순을 보지 못하게 하거나 부차화한다. 이란만 보더라도 민족의 의지를 집중한 정부의 모습이란 것은 신화에 불과하다. 이란 민중은 아마디 네자드 정부의 부패한 지배자들에 맞서 거대한 항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에 맞선 이란 정부’를 위해 이들은 저항을 멈춰야 할까?
수백 만 명의 인민이 굶어 죽는 상황에서 개발한 북한 핵은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위력적 반제운동의 무기일까? 아니면 체제 경쟁에 실패한 국가의 절망적 선택일까? 북한의 요구가 제국주의 체제의 폐지가 아니라 단지 미국에게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라는 것임을 봤을 때 후자가 사실 아닌가? 이 점에서 북한을 ‘국가 권력을 통한 반제투쟁’의 또 다른 실패 사례로 기록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여기서 진정한 교훈을 끌어내자면 국가 강화론이 아닌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나 후진국에서 국가는 다른 사회세력을 압도하는 가장 강력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국가를 통제하는 엘리트들은 자국 경제를 빠르게 발전시키고자 하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임무를 자임한다. 경쟁을 위한 축적, 이를 위한 노동계급의 희생은 민족국가의 번영이라는 목표로 합리화된다.
이것의 결과는 여느 자본주의 국가와 다를 바 없는 국가자본주의의 탄생이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만연한 동안 오히려 국가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주된 행위자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이 점은 국가가 반신자유주의의 보루인 듯 묘사하는 저자의 주장이 일면적인 타당성만 가지고 있음을 말해 준다.
반제국주의 운동이 착취에 기초한 또 다른 민족국가 수립이 아니라 진정한 해방적 프로젝트가 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대중투쟁이 결정적 의의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노동계급이 제국주의에 맞서는 것과 동시에 자국 지배계급에도 맞서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아랍민족주의 전략의 파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래야만 강력한 반제투쟁의 동력도 만들 수 있다.
이런 원리는 트로츠키가 연속혁명으로 정식화한 바 있다. 그리고 연속혁명 전략의 또 다른 측면은 그것의 국제적 성격이다. 저자는 일국적 차원에서도 제국주의에 맞서 승리할 수 있다고 하지만 베트남 전쟁 등 성공적인 반제투쟁은 국제적 차원의 강력한 대중운동을 배경으로 했다.
이렇게 놓고 봤을 때 저자의 분석은 이중의 약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저자가 국가와 정부를 반제 투쟁의 핵심 주체로 놓다보니 제국주의에 맞선 대중운동을 상당히 부차적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저자가 다른 책에서 “터놓고 얘기해서 시민진영이 [북미 핵공방에] 개입할 여지는 별로 없다”고 단언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국제적 차원의 운동 역시 심하게 깎아내린다. 그는 이라크 전쟁에서 국제 반전운동이 심지어 미국을 ‘견제’하는 유엔의 구실보다도 “주변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국제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북한·이란의 국가 차원의 반제운동(?)은 진정한 반제국주의 동력을 갉아 먹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핵이 상대국가의 지배계급만 골라 죽일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상대국 민중과의 분열을 조장하고 연대를 어렵게 만들 것이다.
다극화
저자는 미국의 일방주의에 맞서는 다극화 흐름을 긍정적으로 보는 듯하다. 유럽연합은 “영미식 자본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탈근대적 전망을 보여 주고 있”고, “특히 달러화 체제에서 미국의 강도 높은 압박을 받고 있는 이란, 베네수엘라, 북한 등이 유로화를 통해 국제 무역체제에 합류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또, “중국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또는 전통사상, 러시아는 러시아 애국주의 등을 보이며 비자유주의 이념을 고취”하며 “신자유주의 질서에 저항하고 있다.”
그는 이런 열강 구도의 변화가 제3세계 국가들에게 숨쉴 공간을 열어주고 있다고 본다. “중동에서는 미국의 이란 고립 정책에 대해 러시아가 제동을 걸고 있고 동북아시아에서는 미국의 대북 봉쇄가 중국의 의미 있는 견제에 막혀 힘을 못 쓰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분석대로 미국 패권의 상대적 약화가 일부 국가들에게 숨쉴 공간을 열어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면적으로 이것만 보면 곤란하다. 예를 들어 동북아시아에서 미국 패권 쇠퇴가 평화를 가져올지 아니면 지역 열강들 간의 쟁투를 강화하는 불안정을 가져올지는 결정돼 있지 않다.
게다가 러시아의 재등장과 중국의 부상을 반미 흐름으로 마냥 긍정할 수도 없다. 이 점에서 저자는 반제국주의를 ‘반미’로 협소하게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의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하자면 중국의 티벳, 신장위구르 탄압과 러시아의 체첸인 학살 등에 대해서도 비판해야 하는데, 저자의 분석에서는 이런 관점을 발견하기 힘들다.
저자는 오히려 중국의 부상이 제3세계 빈국에 탈미적 근대화의 전망을 열어 주고 있다고 본다. “버려진 땅이었던 아프리카에 중국이 자원을 찾아 몰려들었고 넘치는 외환보유고를 바탕으로 서방보다 너그러운 조건으로 아프리카와 경제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는 아프리카의 입장에서는 탈미·탈서방을 통한 경제 발전의 새로운 활로를 열어 주는 것이다.”
물론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은 서구와 중국이 이 지역에서 벌이는 경쟁을 이용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아프리카를 저주에서 벗어나게 해 줄까? 중국의 차관 제공이 서방과 IMF의 가혹한 조건을 완화시켜 준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첫째, 중국의 아프리카 진출이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이 지역에서 압도적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국가는 미국과 서방 제국들이다. 중국의 경제적 진출의 의의를 과장할 수는 없다.
둘째, 아프리카의 민족경제 발전이라는 차원에서도 중국의 차관 제공과 경제협력이 과연 호혜 평등한 것일까? 남아공 대통령 타보 음베키는 중국과 아프리카의 관계가 과거 유럽 식민지 권력 관계처럼 될까 봐 두렵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즉, 제조업 관련 투자보다는 “천연자원을 채굴해 가서, 우리에게 공산품으로 되팔고 있다”는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 아닌가? 무엇보다 이 지역 ‘경제 성장’의 과실이 아프리카 민중에게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 ‘베이징 컨센서스’의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식의 차관제공이 아프리카의 잔인하고 부패한 엘리트들을 살찌우는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저자가 국제질서의 다극화 경향의 긍정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동북아시아에 미칠 영향 때문이다. 그는 이런 세력균형의 변화를 남과 북, 즉 우리 민족의 새로운 활로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는 한국사회의 대안 문제와 연관돼 있다.
한국사회의 대안과 민족문제
저자는 “남 내부에서 진행된 자본주의 관계의 심화가 통일과 민족 문제를 새로운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것이 한국 사회의 변혁과 맺는 관계는 무엇일까? 이를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저자가 쓴 몇 가지 다른 글을 참고해야 한다.
2 “이미 분단 상태가 너무 오래되었고 남북의 경제력 차이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1990년대 이후로 “통일은 제한적 의미”를 갖는다고 결론내린다. 3
전통적으로 NL 진영은 통일과 남한 사회의 변혁을 한 묶음으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뜻밖에 저자는 “통일이 된다고 해서 남에서 제기되는 사회경제적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는 것은 무리한 생각”이라고 본다.4 북한의 경제는 1990년대 중후반 2백만 명 아사설이 나올 정도로 끔찍하게 붕괴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사회주의 경제’의 이니셔티브로 남한 경제를 ‘변혁’하는 것은 남한의 대중에게나 (북한 관료의 입장에서도) 가능한 현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시각에는 소련 블록의 몰락이 반영된 듯하다. “[통일을 통한] 민족자립경제의 국제적 배경이 되는 사회주의 경제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그럼에도 통일이 중요하긴 한데, 그가 보기에 통일이 중요한 이유는 주로 정치적 차원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분단반공 체제의 해체 없이 진보정당의 성장을 논하는 것 자체가 공허한 생각”이라고 한다. 즉, 분단 구조 해체가 친미 보수 정치 세력의 기반을 약화시킬 것이고 따라서 진보세력이 성장할 공간을 열 것이라는 생각이다.
둘째는 한미동맹 문제다. 저자는 이를 주로 중국의 부상과 연관시켜 설명한다. 저자는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중국과 한국의 깊어진 경제관계를 하나의 기회로 주목하는 듯하다. 그런데 이를 방해하는 것이 한미군사동맹이다.
따라서 민족공조와 통일을 통해 미국의 지위를 새로이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할 수단이 북미 핵공방의 성공적 타결이다(사실 북한 핵이 핵심고리라면 남한에서 대중적 통일 운동, 또는 주한미군 철수 운동이 가지는 의의는 상당히 부차화된다). 이런 조건에서 탈미화한 동아시아 지역화 전략이 도모될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 놓고 보면 통일이 지니는 사회경제 차원의 ‘변혁적 성격’은 상당히 온건화된다. 사실, 냉전이 해체되기 전에도 과거 민족경제론의 이론틀 자체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기획은 아니었다. 그러나 남한이 반외세를 통해 수립한 민족경제가 통일을 통해서 북의 ‘사회주의’와 접합한다는 점에서 당시 민족경제론을 주창한 세력들은 체제 변혁적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저자는 과거 민족경제론의 범위가 협소하다고 한다. 이미 “세계화가 많이 진척”됐고 한국 대기업의 생산력이 일국적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민족경제 더하기 지역화’를 대안으로 생각한다. 즉, 중국, 남북한, 일본, 아세안을 포괄하는 동아시아 경제협력체와 러시아를 통한 유라시아 진출이 새로운 시대 민족경제의 대안인 것이다.
저자의 공식에 따르면 남북이 이룰 민족경제는 과거 ‘사회주의’ 대신, 동북아시아 경제 협력체와 접합하게 된다. 여기서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전망 자체가 보이질 않는다는 점에서 상당히 온건화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저자의 이런 구상은 정태인이나 심상정의 동아시아 협력체 구상과 거의 다르지 않다. 저자의 동아시아 지역화 전략이 분명 반신자유주의, 반제국주의라는 좋은 의도에서 나온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이 남북한을 포함한 이 지역 노동계급의 착취 현실을 종식하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좌파에게 선차적 과제는 통일이 될 수 없다.
또, 저자가 기본적으로 민족경제라는 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계급타협이라는 문제를 피할 수 없다. 민족경제론의 ‘이중구조론’(저자의 경우 ‘외국 금융자본, 수출대기업’ 대 ‘중소상공인, 민중’)의 논리상 적어도 중소기업주들은 노동자 계급의 동맹 세력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대부분(2006년 기준으로 1천80만 명)은 중소기업에 고용돼 있다. 이들이 자신의 고용주와 일상적인 동맹을 맺어야 한다면 체제변혁을 위한 그들의 힘은 어디서 어떻게 발휘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이 책은 자유주의적 담론에 맞서 저항적 민족주의를 방어하려는 좋은 뜻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강경한 민족주의적 주장에도 불구하고 매우 온건한 실천 대안을 내놓고 있다. 누군가 이 책에서 민중의 가슴 뛰는 반제투쟁의 역사를 보고자 했다면 실망할 것이다. 다만 진보진영의 다수파인 NL진영의 한 주요한 이데올로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두는 것은 의미가 있다.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