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와 생태학
많은 생태론자들은 마르크스주의가 반생태적이라고 주장한다. 다양한 종류의 생태론자들이 있지만, 격월간 잡지 《녹색평론》을 발행하는 김종철의 글은 생태론자들이 공통으로 하는 주장을 집약적으로 보여 준다.
동시에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이라는 명분으로 나온 사회주의가 또 하나의 산업화의 효과적인 이데올로기로 될 때 그 결과는 훨씬 더 비참한 것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 소련 영토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지역, 그것도 생태학적으로 가장 예민한 지역이 주거불능지역으로 변하였다. 이 면적은 전부 합쳐 서부 유럽보다 더 큰 넓이라고 한다. 이런 사실은 소련이나 동구의 생태학적 재난을 두고, 그것이 자본주의 체제와의 경쟁에서 빚어진 불가피한 부산물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안이하고 무책임한 태도가 될 수 있는가를 말해준다. 마르크스 이래 정통 사회주의자들에 있어서 사회주의 성립의 기초는 생산력의 증대, 그리고 그것을 보장하는 과학기술의 고도의 발달이었다. 소련 공산당관료 독재 체제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에른스트 만델 같은 맑시스트에게도 사회주의란 무엇보다 점증하는 인민의 물질적·문화적 욕구를 충분히 효과적으로 보장하는 체제였다. 그가 말하는 문화적 욕구에는 인민이 누구나 개인 승용차를 소유하는 것도 들어 있었다. 전통적으로 사회주의자들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자연 정복이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요구라고 생각해 왔다. 여기에서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도 역사적으로 회피할 수 없는 악이라는 생각으로 연결되고, 그 결과 자본주의적 착취 관계가 인간 해방을 위한 역사적 전제 조건으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 [사회주의자들에게] 자연이란 단지 인간의 필요에 종속된 대상물이며 유용한 물건일 뿐이다.
2 “[전 지구적 환경 파괴라는] 21세기의 새로운 현실에 맞게 재구성돼야” 한다거나(장석준), 3 “계급 모순 환원론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사노위) 4 주장한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생태 문제에 전혀 체계적으로 접근하지 못하므로 자연의 한계를 무시하고, 자연을 도구로만 여기고, 오로지 생산력 증대만을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김종철보다는 마르크스주의에 더 우호적인 국내의 많은 좌파들도 고전 마르크스주의가 이른바 ‘생태적 감수성’이 결여됐다는 류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들은 고전 마르크스주의가 새로운 맥락에서 ‘일반화’되어야 한다거나(윤소영),하지만 마르크스의 저작을 더 꼼꼼히 읽은 사람들은 마르크스가 이미 《경제학·철학 수고》와 《자본론》 등에서 인간과 자연의 상호 작용을 상세히 다뤘다는 점을 마냥 못 본 척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자본론》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은 마르크스주의가 반생태적이라는 비판이 근거가 없음을 보여 준다.
더 높은 형태의 경제에 도달한 사회의 관점에서 봤을 때, 한 개인이 지구를 소유하는 것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사적 소유하는 것만큼이나 불합리하다. 심지어 한 사회 전체, 한 국가 전체, 나아가 지금 존재하는 사회들을 모두 다 포함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지구의 소유주가 아니다. 그들은 단지 지구를 점유하고 있을 뿐이며 일시적으로 수혜를 누리고 있는 것뿐이며, 마치 집안의 가장처럼 자신의 후손들에게 더 개선된 상태로 물려줘야 하는 것이다.
6 마르크스가 제시했던 생태학적 논의들의 의미를 축소시킨다.
마르크스주의가 반생태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생태적 통찰이 발견된다는 사실을 회피하려고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서 일어나는 환경 파괴 문제를 알았지만 생산력이 발전하면 자연스레 해소되리라고 믿었다고 주장하거나, 마르크스가 생태 문제 분석을 일부 발전시켰지만 그것은 그의 전체 사상에서 일탈에 가까운 “계몽적인 여담”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해7 이 나라들에서 자행된 생태계 파괴를 마르크스주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오해다.
이런 오해나 왜곡이 득세하게 된 결정적 요인은, 앞서 인용한 김종철의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소련과 중국 같은 국가자본주의 국가들이 저지른 끔찍한 생태적 범죄다. 이 국가들은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한 사회주의 국가를 참칭했는데,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소련 등지에서 일어난 환경 파괴의 원흉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지목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과 중국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이므로 이 글의 목적은 두 가지다. 첫째,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자연관을 살펴보면서 그것이 반생태적이라는 오해에 반론을 제시하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자연관이 역사와 자본주의에 대한 그들의 유물론적 분석과 긴밀히 연관돼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이 중 많은 부분은 존 벨라미 포스터의 작업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둘째, 오늘날 반자본주의 생태학 내에서 매우 흔하게 부정되는 노동계급 중심성을 옹호하고, 노동계급 중심성을 제거한 반자본주의 생태학이 제시하는 잘못된 대안들을 비판할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김종철, 윤소영, 사노위를 포함해 오늘날 많은 급진적 생태론자들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생태계 파괴를 낳는다고 옳게 지적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고전 마르크스주의가 자체적으로는 생태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며 노동계급 중심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아니면 고전 마르크스주의 밖에 있는 무언가(예컨대 ‘생태적 감수성’, ‘생산력주의 극복’)와 타협하며 노동계급 중심성을 희석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글에서는 특히 평범한 노동자들이 ‘지구와 후손을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식의 잘못된 주장을 비판하면서 오늘날 생태 문제를 해결하려면 노동계급 중심성이 오히려 중요함을 주장할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자연관
9 그의 역사관과 마찬가지로 유물론과 변증법을 결합한 것이다. 유물론자로서 마르크스는 자연을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또, 마르크스는 변증법에 근거해 인간 사회와 마찬가지로 자연도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가 있다고 본다. 지금부터 마르크스 자연관을 네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려 한다.
마르크스의 자연관은첫째, 자연의 역사에서 필연적이거나 미리 정해진 미래는 없다.
10 다윈의 이론은, 현존 사회질서가 신의 섭리에 따르는 최상의 것이라는 자본주의 변호론자들의 주장을 반박할 기회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우연적 과정에 기초한 자연선택을 제시함으로써 인간이 자연과 역사에 개입할 수 있다는 비결정론적 유물론의 자연과학적 기초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자연이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직접 도출되는 결론은, 자연에는 태초부터 프로그램된 신의 섭리나 목적 따위가 없다는 것이다. 자연의 역사(자연사)에도 특정한 섭리나 목적 또는 방향성 따위는 없다. 인류의 출현도 자연사에서 결코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했을 때 마르크스는 “다윈의 연구는 대단히 중요하며, 역사 속의 계급투쟁을 위한 자연과학적 기초를 제공해 줬다”고 평가했다.둘째,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연을 변화시키고 자연사에 능동적으로 개입한다.
11 따라서 인간이 자연을 변화시킨다는 말은 내부 요인으로 말미암아 자연이 변한다는 뜻이다.
변증법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을 단순히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외부 충격이 아니라 내부 모순을 변화의 원동력으로 지목한다. 따라서 자연을 변화시키는 요인도 자연 안에서 찾아야 한다. 마르크스가 다윈의 진화론에 그토록 매력을 느낀 또 다른 이유는 ‘신의 선택’이 아니라 자연선택, 즉 자연 내부의 원리만으로 종의 진화를 설명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가 헤겔의 관념론에 반대해서 주장했듯이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은 인간의 비유기적 신체다.12 하고 설명한다. 이처럼 인간은 의식의 산물인 노동을 통해 자연의 변화에 개입한다. 일찍이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의 관조적 유물론을 비판하면서 썼듯이, 인간이 자연의 변화에 수동적으로 적응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13
인간은 생존 수단이나 생산도구를 생산하면서 자연과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다른 무생물이나 동식물과 달리 인간의 실천은 의식적이라고 봤다. 마르크스는 “꿀벌의 집은 많은 인간 건축가를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가장 서투른 건축가라도 가장 훌륭한 꿀벌보다 뛰어난 점은, 집을 짓기 전에 이미 머리 속에 집을 짓고 있다는 것이다”14 인간의 두뇌와 정교한 손은 노동의 도구일 뿐 아니라 노동의 결과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후대에 화석의 발견으로 엥겔스가 옳았음이 입증됐고 20세기의 위대한 생물학자였던 스티븐 제이 굴드는 엥겔스의 주장을 “유전자-문화 공진화를 19세기에 가장 잘 적용한 사례”라고 평가했다. 15
그러나 이런 정신 활동(의식)조차도 신의 선물이 아니라 자연사의 결과물이다. 엥겔스는 직립보행에 따른 손의 사용이 두뇌 발달을 자극했고, 따라서 두뇌가 아니라 손의 발달이 진화의 과정에서 먼저 나타났을 것이라고 주장했다.인간은 이처럼 노동의 결과물로 의식을 발전시켰고, 다시 의식의 결과물인 노동을 통해 자연과 사회를 변화시켰다. 단적으로, 농경의 시작은 인간 사회뿐 아니라 자연도 변화시켰다. 인간이 진화의 결과물인 것처럼, 인간 출현 이후의 자연은 인간 노동의 결과물이기도 한 것이다.
16 마르크스는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이 자연과 사회의 관계와 사회 내부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인간 노동의 능동적 구실을 보지 못하고 인간을 “작은 날파리나 지푸라기나 돌멩이 같은 존재로 전락시킨다”고 17 비판했다.
이런 관점에서 마르크스는 당시에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을 자처한 칼 그륀이나 루돌프 마타이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했다. 이른바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은 자연사나 인간 발전의 역사에 대한 분석은 전혀 시도하지 않은 채 그저 추상적으로 ‘진정한 인간성’과 ‘진정한 자연’이 만나야 하고, 자연의 모습을 본따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자연 숭배자들이었다.셋째,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역사에 따라 달라진다.
18 마르크스의 말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인간은 의식적 행위인 노동을 통해 자연사에 개입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뭐든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노동은 의식만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 대상과 노동 수단도 필요한데, 이 둘은 모두 자연에서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지만, 그들이 원하는 모습 그대로 만들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들이 선택한 환경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물려받고 현재 직면하고 있는 환경 속에서 역사를 만든다”는따라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논할 때에는 인간 노동의 두 결과물인 사회의 역사와 자연사를 접목하는 방식으로 다뤄야 한다. 예를 들어, 구석기 시대의 무계급 사회와 농경이 시작된 이후의 계급 사회를 구분하지 않고 몰역사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루는 것은 오류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사회적 관계는 보지 않은 채 초역사적인 불변의 자연법칙을 들이대면서 인간과 나머지 자연의 관계를 다루는 것도 오류다. 이런 관점에서 마르크스는 영국에서 신빈민법이 제정될 때 빈곤을 정당화한 맬서스의 《인구론》을 비판했다.
맬서스는 식량 생산이 2→3→4배로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인구는 2→4→8배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다른 자연과학적 발견과 마찬가지로 이는 신의 섭리에 따라 고정불변한 것이므로, 제약이 없으면 인구는 무한히 늘어날 것이고, 따라서 노동계급이 빈곤하게 사는 것은 필요악인 동시에 신의 섭리라고도 했다.
19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연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고정불변이자 절대적 존재로 보는 오류 뒤에 맬서스가 숨어서 노동계급을 공격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맬서스의 《인구론》은 토양의 비옥도를 고정불변으로 가정하면서 농사짓기 비옥한 땅이 가장 먼저 개간되므로 갈수록 척박한 땅만 남게 된다는 비과학적 근거에 바탕을 뒀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당시 태동하고 있던 근대 토양화학을 근거로 토양 비옥도는 인간 노동으로 얼마든지 개선될 수 있다고 반박했다.
이를 두고 마르크스는, “인구 과잉은 … 역사적으로 결정되는 관계이지, 추상적 숫자나 필수품 생산력의 절대적 한계로 결정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한계는 생산의 구체적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 아테네인들에게는 인구 과잉을 의미했을 숫자가 우리에게는 얼마나 작게 보이는가!” 하고 말했다.20 따라서 식량 부족의 진정한 원인은 인구가 식량 생산량보다 많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구가 자본주의가 고용할 수 있는 수보다 많은 데 있고, 자연의 한계가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식량 부족을 낳는 것임을 맬서스가 은폐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21
엥겔스도 당시 기준으로 보더라도 경작지가 미경작지보다 더 넓고, 기존의 농지에서조차 농산물 수확량이 몇 배나 증가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넷째, 자본주의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에 균열을 일으켜 지속 가능성을 훼손한다.
22 따라서 인간이 살아남으려면 이런 물질교환을 원활하고도 적절하게 통제해야 하는데, 마르크스는 이를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 23 라고 불렀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이런 신진대사를 망가뜨리고, 이는 다시 인간 자신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한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노동은 인간이 생존 수단을 만들어 내는 방법이고, 자연과 인간 사이의 물질교환을 통해 이뤄진다.마르크스는 독일의 토양화학자 리비히의 연구 성과를 접하면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환경과 노동자를 둘 다 망가뜨리는지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켰다. 리비히는 비료의 화학적 구실을 밝힌 자연과학자였는데 그는 당시 유럽을 괴롭히던 토지 비옥도 저하 문제가 근본적으로 도시와 농촌 간의 분리와 지속 가능하지 않은 영농 형태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예전에는 인분이나 옷감 등의 형태로 다시 토양으로 돌아갔을 많은 물질들이 자본주의에서는 농촌과 분리된 도시로 이전되면서 그 순환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리비히는 그런 소중한 영양분들이 막상 도시에서는 강물을 오염시키거나 노동자들을 병들게 할 뿐이라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천연·인공 비료를 생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대안이 될 수 없고, 도시와 농촌의 분리를 극복하고 물질의 순환 구조를 합리적으로 바꾸는 새로운 형태의 농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24 이를 자본주의가 자연과 맺고 있는 파괴적 관계를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하나의 사례이자, 더 넓은 지속 가능성 문제의 일부로 봤다. “어떤 곡물의 재배가 시장가격 변동에 종속되고 이런 가격 변동에 따라 재배가 끊임없이 바뀌는 방식, 즉 가장 즉각적인 금전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생산방식은 인간 세대가 계속 이어지는 데 필요한 영구적 조건을 농업이 충족시켜야 한다는 사실과 모순을 빚는다.” 25
마르크스는 리비히의 연구를 열정적으로 지지하면서,마르크스는 특정 기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신진대사적 상호 작용을 방해하는 것이 문제라고 봤다. 따라서 마르크스에게 생태 문제는, 더 많은 기술 발전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폐지하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를 합리적으로 통제할 때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생산력주의인가?
26 또,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주의보다 더 높은 생산력을 누릴 것이라고도 봤다. 27
분명히 마르크스주의는 생산력 발전을 역사 전개의 주요한 특징으로 본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지가 “과거의 모든 세대가 만들어 낸 것을 다 합한 것보다 더 엄청나고 더 거대한 생산력을 만들어 냈다”며 부르주아지가 가져온 역사적 진보를 인정했다.그러나 마르크스를 생산력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별개 문제이고, 부적절한 비판이다. 왜냐하면 생산력주의는 생산력이 발전하면 생산관계가 자동으로 바뀌리라고 보는 기계론적 관점이지만, 마르크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상호 작용을 보는 변증법적 관점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과 경제 공황이 등장한 것에 주목했던 이유도, 이것들이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긴장을 보여 주기 때문이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상호 작용을 보는 연장선에서 마르크스는 오히려 생산력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예를 들어, 프루동 사상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기계에 대한 분석을 보면, 마르크스가 기계론적인 생산력주의와 얼마나 거리가 먼지 알 수 있다. 서두에서 인용한, “정통 사회주의자들에 있어서 사회주의 성립의 기초는 생산력의 증대”라는 김종철의 비판은 외관상 옳아 보이지만, 마르크스주의를 기계론적 관점으로 보는 함의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틀렸다. 김종철의 비판은 그가 “정통 사회주의자”라고 보는 스탈린주의에나 적용할 수 있지, 카우츠키나 스탈린의 기계론과 환원론을 배격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19세기 프랑스 사회주의자 프루동은 《경제적 모순의 체계, 혹은 빈곤의 철학》에서 인간 사회는 노동시간이 가장 덜 드는, 즉 가장 값싸고 필수적인 생존 수단을 만든 다음에 더 값비싼 (즉, 더 많은 노동시간이 소요되는) 사치품을 생산하고, 점차 더 발전된 생산 수단을 만드는 방향으로 발전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최초의 문명은 비용이 가장 적게 드는 채집, 목축, 사냥, 어업에서 시작해서 농경으로 나아갔고, 그 뒤 공장들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또, 프루동은 노동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키는, 진보의 상징인 기계가 계급 간 갈등을 해소하고 조화로운 사회를 만든다고 봤다. 생산력 발전의 결과물인 기계가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 것이라는 프루동의 사상은 가장 노골적인 형태의 ‘생산력주의’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프루동이 생산력 발전만 보고, 생산이 일어나는 사회적 관계를 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생산이 사회적 관계에 의해 구체화되고, 그 사회적 관계(생산관계가 핵심을 이루는)는 계급 지배를 바탕으로 한다고 본다. 프루동은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전에는 비싸서 소수만 누리던 것들을 모두가 누리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생산 수단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가들이 노동력 재생산 비용인 임금을 낮추려고 경쟁하므로 중세 때보다 공산품 가격은 내렸지만 농산물 가격은 올랐다고 반박했다. “어째서 [더 나은 대체품이 있는데도] 면화, 감자, 증류주가 부르주아 사회의 중심이 됐는가? 그것들을 생산하는 데 가장 적은 노동이 필요하므로, 결과적으로 가장 값싸기 때문이다. …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의 원리에 따라 만들어진 사회에서는 가장 나쁜 생산물이 가장 널리 쓰이게 된다는 치명적 특권을 갖게 된다.”
마르크스는 기계에 대해서도 그것이 실제로 사용되는 생산관계를 봐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자본주의에서 기계의 발달은 오히려 노동자 착취를 강화하고 노동자의 지위를 하락시킬 뿐이라고 강조했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사회적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방법들은 모두 개별 노동자를 희생시키면서 실행된다. 즉, 생산을 발전시키는 수단들은 모두 변증법적 전도轉倒를 겪어 생산자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수단이 되고, 노동자를 조각내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시키고, 노동의 실제 내용을 파괴해 고역으로 바꿔 버리고, 과학이 독립적인 힘으로서 노동 과정에 도입되는 정도에 정비례해서 노동 과정의 지적 잠재력을 노동자로부터 소외시키고,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뒤틀고, 노동 과정에서 노동자를 전제專制(그 야비함 때문에 그만큼 더 혐오스러운)에 굴복시키고, 노동자의 인생을 노동시간으로 전환시키며, 그의 처자를 자본이라는 거대하고 막강한 힘에 종속시킨다.
따라서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생산관계를 변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생산력이 발전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모든 사람들이 더 나은 생산물을 이용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마르크스의 지적은,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과 그에 따른 기술 개발의 결과로 저질의 저가 농산물과 반생태적인 공장형 축산이 우리의 먹거리를 위협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을 잘 설명해 준다. 또한 기계와 생산력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에 이를 것이라고 본 스탈린주의의 사회주의론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생태 문제 해결을 위해 생산력 발전을 멈춰야 하는가?
오늘날 전 지구적인 문제인 오존층 파괴, 기후변화 등을 보면서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자본주의 분석을 수용하지 않는 사람들도 종종 생태 문제의 원인이 자본주의 체제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본주의를 폐지해야 한다고 올바르게 지적한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생태 문제를 해결하려면 노동계급이 생활수준 하락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1 말하는 김종철은 가장 극단적인 사례다. 적극적으로 가난을 주장하지는 않더라도, 물질적으로 더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려는 생각 자체가 어느 정도 반생태적이므로 비물질적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보는 견해도 마찬가지로 생산력을 죄악시하는 관점이다. 이런 관점은 첨단 기술 개발만으로 생태 위기를 해결하려는 기술주의적 시도와 지배계급의 맹목적 축적을 비타협적으로 비판한다는 점 때문에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게다가 그들의 일부는 생산력 발전 자체를 문제로 본다. “사람다운 사람 살이의 기본 전제로서, 이삼일이나 일주일 간격으로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가난’이 필요하다”고그럼에도 생산력을 죄악시하는 관점은 치명적인 오류를 안고 있다. 생태계 파괴를 막기 위해서라도 생산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온실가스를 내뿜지 않고도 에너지를 만들 수 있는 태양광, 태양열 집중 발전, 풍력과 같은 재생 가능 에너지 기술은 기후변화를 막으려면 적극적으로 보급하고 더 많이 개발해야 할 기술이다.
32 이 계획은 송전선과 태양발전 설비 투자 비용만 4천억 유로에 이를 만큼 굉장히 큰 규모의 계획인데, (자본주의가 이뤄낸) 세계적이고도 거대한 생산력 없이는 결코 실현할 수가 없다. 게다가 과학자들이 경고하는 수준으로 이산화탄소 배출을 낮추려면 이런 계획을 미국 남서부와 멕시코 북부 사막, 중국 서부와 티베트 등지의 건조 지역에까지 확산시켜야 한다. 그러나 “자기충족적인 소농촌 공동체”를 지향하거나(김종철) “거대화와 기계화”를 맹목적으로 반대하는 견해(장석준)는 이런 가능성을 보지 않는다.
독일 항공우주센터의 과학자들이 제안한 계획에 기반을 둔 데저텍DESERTEC은 북아프리카와 아라비아의 사막에 태양열 집중 발전 설비를 세워 에너지를 생산한 뒤, 최근에 개발된 장거리 고압 직류 케이블을 사용해 북아프리카와 중동 국가들의 전력 수요를 상당 부분 충당하고 유럽 에너지 수요의 15퍼센트를 공급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야심 찬 계획이다.물론 유럽 자본가들이 데저텍 같은 대규모 재생 가능 에너지 생산 계획을 제안했다고 해서 그들이 미국 자본가들보다 생태계를 유별나게 더 걱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유럽 자본가들은 기후변화 문제가 국제적 문제로 부상할 때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싶어할 뿐이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막대한 온실가스를 배출함으로써 기후변화를 일으켰지만, 그와 동시에 온실가스를 내뿜지 않고도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과 그런 기술을 대규모로 적용할 수 있는 생산력을 발전시켰다. 요컨대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셈인데, 이런 모순은 생산력 발전이 자본주의 생산관계와 결합돼 있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누가 생산력을 통제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지, 생산력 자체를 죄악시해버리면 생산력이 갖고 있는 생태적 잠재력을 보지 못할 수 있다.
33 이미 필요한 기술들이 완성돼 있는데도 말이다. 데저텍이 이렇게 더디게 진행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보장되는 이윤은 불투명하지만 투자는 막대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더 큰 돈을 갖고서도 기꺼이 ‘묻지마 투자’를 감행한다. 2008년 리먼브라더스 파산 직후 한 달 동안 미국 정부가 악성 자산을 사들이려고 쏟아 부은 금액(7천 억 달러)이 34 2050년까지 데저텍 계획에 필요한 투자 금액 전체보다 더 크다는 사실이 이를 보여 준다.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지금까지 미국과 유럽 지배자들은 은행을 구하려고 수조 달러를 지출했는데, 기후변화를 막는 데 돈 쓰는 것은 아까워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모순을 보기 때문에 생산력 발전을 죄악시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본다. 반대로 생산력 자체를 죄악시하는 관점은, 생산관계는 보지 못하고 생산력만 보면서 기계를 칭송한 프루동의 거울 이미지인 셈이다.
물론 지금 내가 비판하는 반자본주의 생태론자들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인 맹목적 축적과 노동자 착취도 비판한다. 그러나 “목욕물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리는” 격으로 자본주의 비판이 생산력의 잠재력을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갈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앞서 소개한 데저텍은 2050년까지 목표한 재생 가능 에너지 생산 설비를 갖춘다는 계획으로 매우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과학자들은 우리에게 그만한 시간적 여유가 남아 있지 않다고 경고하고 있고,반자본주의 생태학 내에는 생산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지구의 수용 능력이 한계에 도달했으므로 경제성장이라는 꿈을 버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주장은 추상적인 도덕 원칙을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자연의 한계를 근거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생산력 자체를 죄악시하는 주장과는 구별된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도 실천에서는 같은 효과를 낸다.
35 즉, 제한된 식량을 선진국 노동자들이 너무 많이 소비해서 제3세계 빈민들이 기아로 고통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시장 논리에 따른 식량 다국적기업들의 횡포 탓에 식량이 제대로 분배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2백 년 전에 엥겔스가 맬서스에게 한 비판, 즉 ‘자연의 한계’가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진정한 문제라는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는 정말로 한계에 도달했는가? 당연히 현실을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식량 문제를 보면, 이미 세계의 식량 총생산량은 전 세계 인구를 대부분 비만으로 만들 수 있을 만큼 충분하다.온실가스 배출 문제는 조금 더 복잡한데, 현재의 배출 수준을 유지한다면 파국적인 기후변화를 막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여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특히 이 문제에서는 최근에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온실가스 배출량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인도와 중국 같은 나라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36 만약 인도와 중국을 포함한 전 세계 모든 나라가 현재의 유럽 식으로 유럽만큼 발전한다면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8.0톤이 돼서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은 지금의 갑절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방식으로 경제를 성장시킬 것이냐 하는 것이다. 2004년 기준으로, 세계 전체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4.2톤이고 중국과 인도는 그 이하다.37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온실가스 배출이 발전, 건물, 운송, 공업 분야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유럽뿐 아니라 인도와 중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들이 이런 조처를 도입하면서 경제 발전을 이루면, 전 세계가 유럽만큼 부유해져도 온실가스 배출량을 현재의 40퍼센트 수준으로 줄일 수 있다. 즉, 현재 배출량을 60퍼센트 줄일 수 있는 것이다. 60퍼센트는 중요한 숫자인데, 배출량을 60퍼센트 줄이면 인류가 배출하는 온실가스의 양이 바다와 숲이 자연적으로 흡수하는 양과 평형을 이뤄 대기 중 온실가스 농도가 더는 높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38
그러나 오늘날 유럽에서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내뿜는 화력발전소의 90퍼센트를 재생 가능 에너지로 대체하고, 비효율적인 냉난방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건물을 법으로 규제하고, 단열재를 무상으로 보급하고, 대도시에서 승용차 이용을 금지하는 대신 대중교통을 전면화하고, 운송수단에서 비행기와 트럭이 차지하는 비중을 줄이는 대신 철도를 늘리고, 생산과정에서 온실가스가 많이 배출되는 철강·석유·시멘트의 소비를 정부가 통제하고, 에너지 효율이 낮은 공장을 폐쇄하고, 공장들의 에너지 효율을 현재 수준에서 최상으로 끌어올리도록 법으로 강제한다면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을 현재의 20퍼센트 수준으로 줄일 수 있다.문제는 과연 이런 조처를 도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제시한 방법 중 기술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화력발전소를 재생 가능 에너지로 대체했을 때 풍력과 태양력이 일정하지 않다는 것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지금 당장이라도 시행할 수 있다. 재생 가능 에너지 문제조차도 앞서 소개한 데저텍의 사례에서처럼 일국적 차원이 아니라 국제적 수준에서 발전 설비와 송전망을 갖추면 극복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극복할 수 없는 자연의 한계가 아니라 생산 방식을 둘러싼 사회적 합의인 것이다.
생태 문제와 노동계급
자본주의에서 생산 수단은 자본가들과 자본주의 국가가 지배하고 있고 노동자들은 주요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철저하게 배제돼 있다. 수적으로 소수임에도 자본가들이 지배계급으로 군림할 수 있는 이유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합의’란 자본가들 사이의 합의일 뿐이다. 2009년 코펜하겐 기후변화 정사회담에서 각국 정상들이 회담장 밖 시위대 수만 명의 요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조처를 마련하지 않은 것은 이를 잘 보여 준다.
노동자들이 주요한 결정 과정에서 배제돼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많은 생태론자들은 노동자들, 특히 부국(한국 포함) 노동자들의 소비문화나 라이프스타일이 생태계 파괴를 일으킨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제시한 식량 문제와 온실가스 문제만 살펴보더라도 문제의 원인은 노동자들의 소비문화가 아니다. 제3세계에서 곡물을 재배할지 환금작물인 커피를 재배할지, 옥수수를 사람들의 식량으로 사용할지 바이오 연료나 가축사료로 사용할지, 화력발전소를 지을지 풍력발전소를 지을지, 더 많은 승용차가 다니도록 도로를 확충할지 아니면 전면적이고도 값싼 대중교통을 도입할지 등을 결정할 기회를 노동자들은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 이런 결정은 모두 개별 기업이나 자본가 계급을 대변하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내린다. 게다가 이런 결정들 때문에 일어나는 식료품 가격 상승과 기후변화 등으로 더 큰 피해를 입는 것은 노동자들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소비자로서 현 체제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는 것이고, 더 중요하게는 자본가들에게 진정한 책임을 묻지 않는 정치적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주요 결정 과정에 배제돼 있고 생태계 파괴로 말미암은 피해를 더 많이 받는다는 사실은, 노동자들에게 생태 문제 해결을 반대할 근본적인 이해관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각종 이데올로기를 동원해 생태적 요구가 노동자들의 이익을 침해한다고 거짓말한다. 2005년 미국 정부가 교토의정서를 준수하면 일자리 5백만 개가 사라지므로 교토의정서를 계속 거부할 것이라고 선언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40 당시 생태 운동이 국유림 벌목을 허용하는 정부와 목재 기업에 맞서 싸우며 노동자들과 연대했다면 훨씬 나은 결과를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태 운동가들은 노동자들이 숲을 파괴하면서 경제적 이득을 누린다는 점에서 자본가들과 똑같다며, 자동화 설비에 따른 일자리 축소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외면했다. 목재·건축 기업들이 아니라 노동자들과 지역 공동체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목재의 투기적 구매를 금지하라는 등의 공동 요구를 내놓고 생태 운동과 노동운동이 함께 투쟁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러기는커녕 생태 운동은 정부와 기업들이 만들어 놓은 “생태계냐 일자리냐”는 식의 대결 구도에 갇혀 노동운동과 함께 투쟁할 가능성을 보지 못했다. 결국 정부는 각종 위원회와 보고서와 제도 개편에 대해 떠들며 마치 자신이 중재자인 양 행세하면서 생태계와 일자리를 둘 다 파괴할 수 있었고, 목재 산업 자본가들이 최종 승리를 거머줬다.
이런 거짓말을 반박하지 못하고 도리어 노동자들을 적으로 돌린다면 생태 운동은 성공할 수 없다. 199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국유림 생태계 보존 운동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노동자들에게 생태계 보호를 위해 지금보다 열악한 생활수준을 감내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제대로 된 접근이 아니다. 오히려 생태 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이 더 많은 일자리와 더 나은 사회를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는 것을 납득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려면 풍력·태양광·태양열 집중 발전 시설 구축, 효과적인 냉난방을 위한 건물 보수, 대중교통 확충에 투자해야 하는데, 이런 투자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 영국의 공무원노조와 통신노조 등이 소속된 ‘기후변화에 맞선 캠페인Campaign Against Climate Change’이라는 단체가 연구한 결과를 보면, 친환경 경제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사라지는 일자리를 상쇄하더라도 향후 10년 동안 영국에서만 신규 일자리 1백25만 개가 생겨난다.생태 문제와 별개로 시작되는 노동자 투쟁 역시, 그것이 근본적으로 자본가들의 생산 수단에 대한 독점적 결정권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생태적 대안을 실현시킬 잠재력이 있다. 예컨대, 에너지 효율을 높이기 위해 작업장에 태양전지판을 설치하고 무료 셔틀버스를 운행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 고층 유리 건물들은 승강기와 냉난방에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고 통풍 구조도 열악해 노동자들이 병들기 쉬우므로, 건물을 더 낮고 인체공학적으로 지으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자본가들은 ‘추가 비용’ 운운하며 이런 일들을 결코 자발적으로 시행하려 들지 않는다.
42 세계 어느 곳에서나 노동자들은 사장들과 맞서 싸우고 있으므로 이들을 중심으로 단결할 때 가장 광범하게 단결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친환경 신규 일자리 창출 같은 요구가 어느 한 나라에서 성취되면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빠르게 확산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노동계급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많은 생태 문제들이 국경을 초월해서 일어나는 만큼 국제적인 해결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온실가스 배출 규제가 구속력 있는 국제적 합의 없이는 유명무실한 까닭이기도 하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노동계급의 성장을 가져오고, 오늘날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은 노동계급이다.심각한 경제 위기 때문에 자본가들이 생산을 지배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의문시되고 있다. 이런 시기일수록 노동자들의 투쟁은 더욱 계급적 성격을 띨 가능성이 높다. 한편, 과학자들은 우리가 기후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경고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반생태적이라는 편견에 빠지지 않고, 생태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도 노동계급의 구실이 핵심적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이다.
주
- 김종철 1999, pp35-36. ↩
- 강동훈 2009. ↩
- 장석준 2011. ↩
- 장혜경 2011. ↩
- Empson 2009, p25에서 재인용. ↩
- 이런 주장들에 대한 소개는 포스터 2010b, pp231-232를 보시오. ↩
-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소개한 글로는 빈즈 2007을 보시오. ↩
- 대표적으로 Foster 2000이 있다. 그러나 국역본인 《마르크스의 생태학 - 유물론과 자연》(인간사랑, 2010)은 심각한 오역이 매우 많으므로 원서의 보조적 참고 자료 정도로만 사용할 것을 권한다. ↩
- 마르크스의 연구 성과가 모두 그렇지만, 특히 자연관에서는 자연과학 지식이 해박한 엥겔스의 도움이 컸다. 이 글에서 마르크스의 자연관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자연관이다. ↩
- Foster 2000, p197에서 재인용. ↩
- Rees 1998, p73에서 재인용. ↩
- Rees 1998, p71에서 재인용. ↩
- Rees 1998, p74. ↩
- 엥겔스 1989, pp161-164. ↩
- 포스터 2010a, pp433-434에서 재인용. ↩
- 포스터 2010a, pp276-282. ↩
- Foster 2000, p124에서 재인용. ↩
- Rees 1998, p72에서 재인용. ↩
- Empson 2009, p20에서 재인용. ↩
- 포스터 2010a, p244에서 재인용. ↩
-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맬서스 비판에 관한 더 자세한 소개는 포스터 2007에서 볼 수 있다. ↩
- Empson 2009, p14에서 재인용. ↩
- 생물학에서 신진대사는 생물체가 생존과 성장을 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 영양분을 섭취하고, 이 영양분을 새로운 물질로 전환하고, 에너지를 생산하는 데서 일어나는 일련의 화학적 반응을 가리킨다. http://ko.wikipedia.org/wiki/신진대사 ↩
- Empson 2009, p15에서 재인용. ↩
- Foster 2000, p164에서 재인용. ↩
- 보일 2005, p52에서 재인용. ↩
- 이에 대한 마르크스의 논의는 캘리니코스 2007, pp242-252를 참조. ↩
- 프루동 사상 요약은 포스터 2010a, pp282-290을 참고했다. ↩
- Foster 2000, p132에서 재인용. ↩
- Marx 1976, p.799. ↩
- 김종철 1999, p36. ↩
- http://en.wikipedia.org/wiki/Desertec ↩
- 닐 2011, pp30-31. ↩
- <저항의 촛불>(2009.2.4). ↩
- 라페 외, 2003, p24. ↩
- 닐 2011, p36. ↩
- 닐 2011, pp78-144. ↩
- 닐 2011, pp28-31. ↩
- http://www.msnbc.msn.com/id/6976284/ns/us_news-environment/t/bush-puts-jobs-ahead-kyoto/ ↩
- 포스터 2007, pp171-219. ↩
- http://www.climate-change-jobs.org/sites/default/files/Jobs%20gained%20%26%20lost%20-%20tech%20note%203.pdf ↩
- 하먼 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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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촛불⟩
⟨레프트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