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고전 읽기
V I 레닌, 《국가와 혁명》
국가와 혁명
레닌은 러시아 혁명이 결정적 시기에 있던 1917년 8월과 9월에 걸쳐 《국가와 혁명》을 썼다. 그래서 그는 시급하고 실천적인 주제를 다뤘다. 당시 러시아는 ‘이원권력’ 상황이었다. 즉, 한편에는 1917년 2월 혁명으로 차르가 타도된 뒤에 들어선 자유주의자들과 자본가들의 임시정부가, 다른 한편에는 혁명 초기부터 노동자와 병사 들이 자주적으로 건설한 노동자·병사 평의회(러시아어로 소비에트)가 있었다. 비록 초기에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대부분 임시정부에 호의적이었을지라도 이 둘은 본질이 서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적대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두 권력이 공존하는 상황은 오래갈 수가 없다. 결국에는 둘 중 하나가 나머지 하나를 파괴하고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1905년 혁명 때는 차르 정권이 소비에트를 파괴했고, 1917년 10월 혁명에서는 소비에트가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래서 이원권력 상황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떠오른다. 혁명의 진행 과정에서 둘 중 누가 승리할 것인가? 노동계급이 승리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국가 권력 문제는 러시아 혁명의 성공과 직결된 문제였다.
1 같은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자도 의회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며 사실상 기존 국가를 방어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것도 ‘마르크스주의’를 이용해서 말이다. 그래서 레닌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을 인용하는 데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며 카우츠키를 비판했다. 자구에 대한 집착 때문이 아니었다. 카우츠키와 개혁주의자들이 뒤틀어 놓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사상의 혁명적 정신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국가와 혁명》은 단순히 혁명기의 러시아에만 국한되는 내용을 다룬 책이 아니다. 노동계급의 대중정당이 공개적으로 활동하면서 의회나 지방정부에도 대표를 파견한, 의회민주주의가 발달한 유럽 국가들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개혁주의 정치와 관련이 깊기 때문이다. 레닌이 이 책을 썼을 때는 국제적으로는 1914년에 시작된 제1차세계대전 와중이었다. 제1차세계대전은 당시 사회주의자들에게 결정적 시험대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시험에서 탈락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세계의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국제주의 원칙을 저버리고 자국 정부를 지지해 서로 분열했다. ‘마르크스주의의 교황’이라고 불리던 칼 카우츠키레닌은 서문에서 집필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부르주아지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노동 대중의 투쟁은 ‘국가’에 관한 기회주의적 편견에 대항하는 투쟁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 먼저 국가에 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을, 특히 기회주의자들이 왜곡·폐기한 측면을 상세하게 살펴보겠다. …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과 국가의 관계 문제는 실천 정치에서뿐 아니라, 이 시대의 가장 긴박한 문제인 자본주의의 폭정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대중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준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레닌 1988, 14쪽. 이하 쪽수만 표기)
마르크스주의의 사회관
레닌은 사회가 계급으로 분할돼 있다는 관점에서 국가를 논한다. 사회가 계급으로 분할됐다는 것은 한 인간 집단이 다른 집단을 착취한다는 뜻이다. 이는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는 비교적 분명히 드러났다. 착취 과정이 눈에 빤히 보였고, 인신적 예속이 제도화됐거나 관행화돼 있었다. 노예 소유주는 노예가 게으름을 피우면 태형을 가했고, 심지어는 노예를 죽일 권리도 있었다. 봉건 영주들은 기사들을 이용해 농민들을 수탈했다.
3 그리고 노동자는 누군가에게 고용되는 순간 자신이 받는 임금보다 훨씬 더 많은 가치를 고용주를 위해 생산한다. 이것이 자본가 이윤의 원천이고 은폐된 자본주의 착취의 본질이다. 이는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일을 멈췄을 때, 즉 파업할 때 극명히 드러난다. 2010년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을 벌였을 때 사측은 파업으로 말미암은 손실액이 1천억 원이라고 아우성쳤다. 4 뒤집어 말하면 손실액 1천억 원은 그동안 노동자들에게 대가를 주지 않고 기업주가 가로챈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들은 개인의 자유 의지로 고용계약서를 쓰고 고용되고, 특히 잉여 노동시간(자본가를 위해 일하는 시간)이 필요 노동시간(자기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일하는 시간)과 가시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래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착취는 은폐돼 있다. 그러나 노동자는 누군가에게 고용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므로 고용관계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관계가 아니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제적 관계라는 무언의 강제가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지배를 보증한다. 물론 직접적인 경제 외적 강제가 아직 사용되지만 단지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서다.”5 마르크스주의 국가관은 사회가 계급으로 나뉘어 있다고 보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도 노예제·봉건제와 마찬가지로 계급 사회라고 주장했다. “봉건 사회의 폐허에서 발아한 현대 부르주아 사회는 이 계급 적대를 폐기하지 못했다. 낡은 계급, 낡은 억압 조건, 낡은 투쟁 형태 대신 새로운 계급, 새로운 억압 조건, 새로운 투쟁 형태를 수립했을 뿐이다.”국가 - 계급 사회의 산물이자 계급 지배의 수단
계급이나 국가는 인류 역사의 대부분 동안 존재하지 않았다. 약 20만년 전 지구상에 출현한 이래 인류는 그 97퍼센트에 해당하는 기간을 협동과 호혜를 원칙으로 살았다. 신석기 혁명과 제1차 농업혁명이 일어난 약 1만 년 전부터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결과 약 6천 년 전부터 사회적 잉여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노동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져 사회적 잉여를 관리하는 소수 전문가 계층이 생겨났다. 이들은 국가를 통해 다른 인간 집단을 간접적·집합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문명’의 시작은 최초의 계급 사회를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6 계급 분화와 함께 “소수의 사회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병사와 보안경찰로 이루어진 무장한 사람들의 집단(즉, 국가기구)이 설립됐다.” 7 즉, 국가는 처음부터 계급 지배를 위한 기관으로서 등장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1892~1957)는 이 시기를 연구한 결과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당시의 생산력으로 인해 잉여의 집중이 필연적으로 존재했지만, 사회적 잉여의 대부분을 손에 넣었던 적은 지배계층과 겨우 생존을 유지하면서 문명의 정신적 혜택으로부터 사실상 배제됐던 대다수 사람들 사이에는 경제적 이해관계에 관한 심각한 갈등이 존재했던 것처럼 보인다.”고고학이 아직 발전하지 않았던 시기에 엥겔스는 국가의 기원에 관해 날카로운 통찰을 제시했다.
그러므로 국가는 외부에서 사회에 강요된 권력이 아니며, 헤겔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윤리적 이데아의 현실태現實態’도, ‘이성의 형상화나 현실태’도 결코 아니다. 도리어 국가는 특정 발전 단계에 이른 사회의 산물이다. 국가는 사회가 해소할 수 없는 자기 모순에 빠져 있다는 점, 사회가 도저히 해소할 수 없는 화해 불가능한 적대로 분열됐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경제적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계급들 사이의 적대로 말미암아 계급들 자체와 사회가 무익한 투쟁으로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사회 위에 존재하면서 갈등을 조절하고 사회를 ‘질서’의 테두리 안에 유지시킬 수 있는 권력이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이 권력, 즉 사회에서 생겨났지만 사회보다 상부에 위치하며 사회로부터 자신을 점점 소외시키는 권력이 국가다.(17-18)
이 주장을 수용하며 레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국가는 화해 불가능한 계급 적대의 산물이자 발현이다. 국가는 계급 적대가 객관적으로 화해될 수 없을 때, 그리고 화해될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다. 거꾸로 말해서 국가라는 존재는 계급 적대가 화해 불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한다.”(18) 쉽게 말해 국가는 계급 사회의 산물이고,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사회가 계급으로 나뉘어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국가가 상충하는 계급 이해관계 사이에서 중립적인 중재자 구실을 하는 것은 아니다. 레닌은 개혁주의자들이 “국가가 계급 간 화해를 이루기 위한 기관으로 등장했다고 말하는 식으로 마르크스를 ‘수정’하려 한다”고 비판하며(18) 국가는 명백히 지배계급을 위한 기구라고 주장한 엥겔스를 인용한다.
국가는 계급 적대를 억제할 필요가 있어서 생겨났지만, 동시에 계급 갈등의 한가운데에서 생겨났으므로, 가장 강력하고 경제적으로 지배적인 계급, 즉 국가를 매개로 정치적으로도 지배적인 계급이 돼서 피억압 계급을 착취하고 억압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획득하게 되는 계급의 국가가 된다. … 고대와 중세의 국가가 노예와 농노를 착취하기 위한 기관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근대 대의제 국가는 자본의 임금노동 착취를 위한 수단이다.(24)
특정 계급의 지배를 지키려면 국가는 그에 걸맞은 수단이 필요하다. 첫째는 언론이나 교육기관 같은 이데올로기 기구다. 이데올로기 기구들은 현존 체제를 방어하는 온갖 사상을 유포한다. 그것은 지금 사회가 최선이므로 사회를 바꾸려는 시도는 소용없거나 해롭다는 주장일 수도 있고, 여성·성소수자·인종 차별 이데올로기처럼 피지배계급을 분열시키는 주장일 수도 있다.
8 레닌은 엥겔스의 다음 말을 인용한다.
그러나 종종 이런 이데올로기는 대중의 실제 경험, 특히 투쟁의 경험으로 깨진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주먹’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국가는 폭력 수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국가는 폭력 수단을 독점한다. “계급이 발생하기 이전의 사회에서는 인민 대중과 구분되는 어떤 형태의 전투요원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계급 적대가 출현함에 따라 … 폭력의 사용은 전문화된 소수의 몫이 되고 그들의 구실은 적과 싸우는 것과 함께 인민 대중을 억압하는 것이 됐다.”국가의 둘째 특징은 스스로 무장한 대중과 더는 직접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공권력의 성립이다. … 이런 공권력은 모든 국가에 존재한다. 공권력은 무장한 사람들과 함께 씨족[부족 — 레닌] 사회에서는 없던 물질적 부속물, 즉 감옥과 온갖 종류의 억압 기구로 구성된다.(20)
레닌은 경찰·군대·감옥 같은 폭력 수단들을 “특별한 무장조직체”라고 불렀다. “모든 국가의 속성인 공권력은 무장한 대중이나 ‘자발적 무장 조직’과 ‘직접적으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21) “특별한” 것이다. “특별한 무장 조직체”는 두 가지 기능을 한다. 첫째는 다른 국가와의 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기능이다. 둘째는 자국 안에서 계급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기능이다.
대중과 괴리된 폭력 수단들을 포함해 현대 국가기구는 철저히 위계적인 관료제로 운영된다. 그리고 레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기구가 “일반적으로 점점 강해진다”고 지적하며(22) 엥겔스를 인용한다. “국가 내 계급 적대가 더 첨예해지는 것에 비례해서, 그리고 인접국이 더 커지고 그 인구가 늘어나는 것에 비례해서 공권력은 강해진다. 현재 유럽만 보더라도 계급투쟁과 [식민지] 정복 경쟁으로 말미암아 공권력이 커져서 사회 전체와 심지어는 국가까지 집어삼킬 정도가 됐다.”(22) 레닌은 “관료제와 상비군”을 자본주의 국가의 특징으로 지목했다.
정치/경제의 분리와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
9 등이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들이 국가를 직접 운영하지는 않는다. 이로 말미암아 자본주의 이전 사회와 달리 정치적 통치자와 경제적 지배자가 비교적 불일치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래서 국가가 자본가 계급의 지배를 위한 기구라는 점이 가시적이지 않을 때가 흔하다. 대표적으로 의회민주주의의 발달 문제가 있다. 보통선거권 확립으로 국민이 정치적 통치자를 직접 선출하게 되면서 노동계급에 기반을 둔 정당(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집권하기도 하고 국가가 노동계급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기도 한다. 심지어 때로는 국가가 사적 자본가들과 충돌하기도 하는데, 나치가 티센(티센크루프의 전신)의 재산을 몰수해 헤르만 괴링 베르케를 설립한 사례나 이집트의 나세르가 국내외 자본을 몰수해 국유화한 사례정치적 통치자와 경제적 지배자의 상대적 불일치는 이른바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 논의의 바탕이 된다. 즉, 국가는 그저 자본의 이익을 따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이 말 자체는 옳지만 국가의 자율성을 너무 크게(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보면 문제가 생긴다. 기존 국가를 ‘장악’해 노동계급의 이익에 맞게 바꿔 이용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국가를 ‘장악’하려면 선거에서 승리해야 하고, 그 결과 선거에서의 승리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가 되고, 선거에서 승리하는 통로인 의회민주주의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제도가 돼 버린다.
10 앞에서 설명했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누군가에게 고용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이런 경제적 조건이 노동자들에게 착취를 받아들이게 하는 일차적 요인이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정치권력을 직접 통제하지 않고도 자신의 경제적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다.(물론 정치권력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물적·인적 수단을 유지하려 무던히 애쓴다.) 이를 두고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공화국에서 부富는 자기 권력을 간접적으로 행사하지만 가장 확실하게 행사한다. 첫째, 관리들을 직접 매수해서(미국), 둘째, 정부와 주식시장의 동맹 관계를 이용해서(프랑스와 미국) 그리한다.”(25)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지적했듯이, “지배계급이 실제로 국가기구를 장악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직접 통치하지 않는, 이러한 명백히 역설적인 상황은 자본주의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자본주의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의 또 다른 이유로 자본가들은 서로 경쟁한다는 점이 있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를 착취한다는 면에서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지만 특정 자본가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이 다른 자본가에게는 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본가가 직접 국가를 운영하는 것이 비효율적일 수도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공통적으로 경제와 정치가 확연히 분리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로 말미암아 자본가 계급은 직접 통치하지 않으면서 지배할 수 있는 동시에, “자본가 계급이 국가기구를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자율성에는 명백히 한계가 있다. 국가의 성쇠는 자본 축적의 성공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자본 축적이 원활하지 않으면 국가를 운영하는 물자를 제대로 얻을 수 없고 ‘국력’과 ‘국격’이 약해진다. 그래서 국가는 자본 축적의 조건을 마련하는 데도 이해관계가 있다. 앞에서 말한 이집트 나세르와 독일 나치는 국내 사적 자본을 탄압했지만 그 결과로 국가가 주도하는 다른 유형의 자본주의적 질서를 확립했다. 즉, “국가의 자율성은 국내 자본의 축적 요구를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 하는 제한된 수준의 자유일 뿐이지, 그 요구를 실행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아니다.”13 관계라고 정의했다. 즉, 국가가 자본가 계급의 단순한 도구는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자본과 이해관계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사회가 위기에 빠졌을 때, 즉 경제 불황이나 계급투쟁이 격화하는 시기에 매우 잘 드러난다.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는 자본주의 질서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 노릇을 한다.
크리스 하먼(1942~2009)은 국가와 자본의 관계를 “구조적 상호의존”다른 한편, 국가기구 자체도 선출된 부문과 비선출된 부문으로 나뉜다는 점을 봐야 한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선출되지만 정부 요직에 있는 정책담당자들, 사법기관, 군대 등은 막대한 권력을 갖고 있음에도 대중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는다. 이 부문은 자본과 더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선출된 부문이 기존 계급 질서에 반하는 개혁을 시행하려 하면 이 부문이 반발하고 저항에 나선다. 선출된 부문은 이 저항에 부딪혀 개혁에 실패하고 좌초하거나 기존 질서에 순응하게 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레닌의 지적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민주공화국에서 ‘부富’의 힘이 더욱 확고해지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정치 기구의 결함이나 정치적 외피의 흠결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민주공화국은 자본주의에서 가능한 최상의 정치적 외피”,(26) “극소수를 위한 민주주의, 부자들을 위한 민주주의,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민주주의”이다.(109)
노동자 권력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먼저, 자본가 계급이 지배력을 유지하는 방식인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끝장내야 한다. 정치적 지배는 반드시 경제적 이익 획득을 수반해야 한다. 이는 어떻게 가능한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처럼 레닌도 파리 코뮌의 역사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14 “노동계급 혁명에 의한 혁명의 첫 걸음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것, 민주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15 했지만, 사실 “프롤레타리트를 지배계급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것”의 구체적 형태를 알지 못했다. 그 해답은 파리의 노동자들이 현실에서 보여 줬다. 1871년 파리의 노동자들은 두 달이 조금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사회를 직접 통제했다. 통제의 직접성은 두 가지 방향으로 표현됐다. 첫째, “특별한 무장 조직체”인 상비군과 경찰이 해체되고, 인민 전체가 무장했다. 둘째, 모든 공직자들은 선출되고 소환됐으며, 노동자 평균 임금을 받았다. 모든 조처는 파리 주민의 능동적인 참여로 계획됐다. 코뮌의 민주주의는 가장 발달했다는 21세기 자본주의 국가의 ‘민주주의’보다 훨씬 민주적이었다. 압도 다수가 ‘정치’에서 배제되지 않았고, 이전에는 극히 소수의 직업적 관심사였던 정치가 광범한 대중이 참여해 스스로 업무를 수행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코뮌이 더 오랫동안 지속됐더라면, 생산까지 통제하는 것으로 나아갔을 지도 모른다. 16
1848년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현대 국가의 집행부는 부르주아지 전체의 공동 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에 불과하”고17 엥겔스도 이렇게 요약했다. “출발부터 코뮌은 한번 권력을 잡은 노동계급은 낡은 국가기구를 가지고는 더는 운영할 수 없다는 점, 획득한 우위를 또다시 상실하지 않으려면 노동계급이 한편으로는 이전까지 자신들을 억압하는 데 사용됐던 낡은 기구를 척결해야 …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했다.”(98)
1871년 파리 코뮌을 경험하면서 얻은 교훈을 마르크스는 이렇게 요약했다. “노동계급은 기존 국가를 쉽사리 장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을 자기 의지대로 휘두를 수도 없다.”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주장을 이어받아 레닌은 기존 국가를 분쇄하고 노동자 국가라고 불리는 새로운 권력 기관을 창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주장은 1917년 10월 혁명의 성공으로 현실화됐다. 당시 러시아 노동자들은 노동자평의회라는 대안 권력 기관을 건설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병사평의회를 건설하고 있었다. 파리 코뮌과 마찬가지로 소비에트는 매우 발전된 형태의 민주주의를 보여 주고 있었고, 더 나아가 기존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자신의 정부를 세웠다.
아나키즘 비판
18 레닌은 “우리는 국가 폐지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결코 아나키스트들과 의견이 다르지 않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의 저항을 분쇄’하는 데 쓰일 무력과 조직된 폭력, 즉 국가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엥겔스의 주장을 인용해 단호히 비판한다.(79)
국가를 ‘폐지’하기 바라지만 그것을 새로운 권력 기구로 대체하는 데에는 반대하는 주장도 있다. 정치적 권위 일체를 부정하는 아나키즘이 그것이다.이 신사분들은 혁명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가? 혁명은 확실히 가장 권위적인 것이다. 혁명은 대중의 한 부류가 고도로 권위적인 수단인 총과 칼과 대포를 이용해 다른 부류에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행위다. … 파리 코뮌이 부르주아지에 대항한 무장 인민의 권위를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하루라도 지속됐을 것 같은가? 반대로 우리는 코뮌이 권위를 너무 적게 사용했음을 탓할 수는 없는가? 그러므로 결론은 둘 중 하나다. 반권위주의자들이 자기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면서 혼란만 일으키는 경우. 아니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으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를 배신하는 경우. 둘 다 오직 반동에 봉사할 뿐이다.(81)
즉, 노동계급은 기존 국가 권력을 파괴하는 데서나, 혁명의 성과를 지키는 데서나 코뮌이나 소비에트 같은 권력이 필요하다. 이를 거부하는 것은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자 필연적으로 일어날 반혁명 움직임을 제압해야 할 필요성을 거부하는 셈이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반동에 봉사”하게 된다. 노동자 혁명은 다수가 소수를 제압하는 과정이므로 단호히 준비돼 있다면 비교적 쉽게 성공할 수 있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당시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봉기 과정의 차이가 이를 잘 보여 준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봉기를 잘 계획했고 신속하게 움직인 결과 공포탄 몇 발로 권력을 장악했다. 반대로 모스크바에서는 봉기를 조직적으로 준비하지 못했고 백색 테러로 말미암은 학살과 처절한 거리 전투를 치른 후에야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당시 러시아 혁명에 참가한 아나키스트 빅토르 세르주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참으로 혁명은 노동자 식으로, 즉 조직적으로 진행됐다. 바로 이 점이 페트로그라드에서 혁명이 그렇게 손쉽고 완벽하게 승리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의 상황을 서로 견줘 보면, 조건이 같을 때도 조직적 활동이 자발성이 지배하는 운동보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우월하다는 점이 명백히 드러난다. 이런 경험에 비춰 볼 때 노동계급의 승리를 위한 전제 조건은 다음과 같은 기본적 군사작전 규칙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싸울 때는 조직과 힘을 극대화하고, 우세한 부대를 결정적 순간에 결정적 장소에 배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국가의 점진적 사멸
혁명 성공 뒤 노동자들이 생산까지 직접 통제하는 데까지 나아가려면 그만한 수단이 필요하다. 그래서 레닌은 혁명이 성공한 뒤에도 초기(레닌은 이를 “공산주의의 첫 번째 국면”이라고 불렀다)에는 국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경우 ‘국가’는 자본가 계급의 국가가 아니라 노동자 국가일 것이다. 무엇보다 옛 질서로 돌아가려는 반혁명 시도를 제압하기 위해서다. 러시아에서 혁명 성공 뒤인 1918년 5월에 일어난 내전처럼 옛 질서를 수복하려는 움직임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21 레닌은 엥겔스의 다음 말을 인용한다.
여기서 ‘국가’라는 용어가 혼란을 줄 수 있는데, 이때의 ‘국가’는 자본주의 국가와 완전히 다른 실체를 가리킨다. 소수의 이익을 지키고자 하며 대중의 통제에서 괴리되고 전문화된 “특별한 무장 조직체”가 아니라 무장한 노동계급 대중이 직접 통제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엥겔스는 “코뮌을 겪은 후에는, 국가에 관한 모든 헛소리는 그만해야 한다. 왜냐하면 코뮌은 더는 진정한 의미의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고 말했다.국가란 투쟁과 혁명에서 상대방을 힘으로 제압하는 데 쓰이는 이행기적 기관일 뿐이므로, ‘자유 인민 국가’ 따위를 운운하는 것은 완전히 어불성설이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아직 국가가 필요하다고 말할 때도, 국가는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해서 필요할 뿐이고, 자유를 말할 수 있게 되자마자 그런 국가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곳에서 국가라는 말을 공동체Gemeinwesen로, 즉 코뮌이라는 프랑스어를 아주 잘 대신할 수 있는 오래된 독일어로 바꾸자고 제안했다.(84)
한편, “공산주의의 첫 번째 국면”에는 아직 정의와 평등이 완전히 실현되지 않는다. 아직은 ‘필요에 따른’ 분배가 아니라 ‘노동의 양에 따른’ 분배가 유지되므로 여전히 부의 차별과 불공평한 분배가 남을 것인데, 레닌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상주의에 빠져있지 않다면, 자본주의를 타도했다고 해서 민중이 어떤 규범도 없이 사회를 위해 일하는 것을 단박에 배우게 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자본주의 폐지가 그런 변화에 필요한 경제적 조건을 즉시 창출하는 것도 아니다.(117)
레닌은 마르크스의 설명도 덧붙인다. “그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막 태동했으므로, 모든 측면에서, 즉 경제적, 도덕적, 지적 측면에서 자신의 자궁이었던 옛 사회의 모반母斑이 여전히 찍혀 있다.”(114)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이제 막 탄생했고, 여전히 산통이 지속되는 동안인 공산주의 사회의 첫 번째 단계에서 이런 결함은 불가피하다. 규범은 그 사회의 경제적 구조, 경제적 구조로 말미암은 문화 발전의 수준보다 결코 높을 수 없는 법이다.”(116-117)
그러나 현재와 다른 점은, 착취의 물질적 조건인 소수의 생산 수단 점유가 사라지므로 착취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즉, 계급 분화의 토대가 사라지기 시작하고, 계급 사회의 산물인 국가가 존재할 토대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사회 구성원 모두, 또는 적어도 대다수가 국가를 스스로 관리하는 법을 배워 그들이 직접 운영하게 되고, 극소수 자본가와 자본주의적 습성을 고수하려는 신사들과 자본주의에 완전히 매수된 노동자들을 제압하게 된 순간, 바로 이 순간부터 어떤 종류의 정부라도 존재해야 할 필요성이 모두 사라지기 시작한다. 민주주의가 더 완전해질수록 국가가 존재할 필요가 없어지는 순간이 더 빨라진다. 무장한 노동자로 구성된 ‘더는 진정한 의미의 국가’가 아닌 ‘국가’가 더 민주적으로 될수록 모든 형태의 국가가 더 빠르게 말라 죽기 시작할 것이다.”(125)
원래 레닌은 러시아의 1905년 혁명과 1917년 2월 혁명 경험을 이 책의 결론으로 쓰려고 했다. 그러나 후기에서 밝혔듯이, 혁명이 10월 봉기를 향해 나아가면서 그의 작업은 “방해”받았다. 레닌은 이렇게 덧붙였다. “이런 ‘방해’를 환영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 ‘혁명을 경험하기’가 쓰기보다 더 즐겁고 유익한 일이다.”(15)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 책을 완성하지 못하게 했던 “방해”, 즉 “혁명을 경험하기”로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중동에서 진행중인 혁명을 보건대 이 책의 “완성”은 그리 먼 미래의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주
- 카우츠키는 엥겔스를 도와 함께 일했고 유럽에서 가장 크고 가장 잘 조직된 ‘마르크스주의’ 정당이었던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지도자로서 국제적으로 신망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
- 가장 최근에 나온 국역본은 돌베개 출판사의 1995년 판이다. 필자는 논장 출판사의 1988년 판을 사용했는데 이 국역본은 20여 년 전에 번역·출판돼 번역이 어색한 부분이 많다. 이 글에서 인용할 때는 맑시스트 아카이브(www.marxists.org)에 있는 영어 원문을 참고해 수정해서 실었음을 밝힌다. ↩
- 캘리니코스 2007, p150에서 재인용. ↩
- <한국경제>(2010.11.22). ↩
- 마르크스·엥겔스 2010, p229. ↩
- 차일드 2009, p175. ↩
- 하먼 2004, p53. 필자가 ‘비밀경찰’을 ‘보안경찰’로 바꿔 국역했다. ↩
- 캘리니코스 2007, p147. ↩
- Harman 1991, p15. ↩
- 캘리니코스 2007, p150. ↩
- 캘리니코스 2007, p150. ↩
- Harman 1991, p18. ↩
- Harman 1991, p13. ↩
- 마르크스·엥겔스 2010, p231. ↩
- 마르크스·엥겔스 2010, p253. ↩
- 파리 코뮌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으면 Marx 1871과 이현주 2011을 참고하시오. ↩
- Marx 1871. ↩
- 아나키즘에 대한 더 자세한 분석은 블랙레지 2011과 Birchall 2011을 참고하시오. ↩
- 세르주 2011, pp89-90. ↩
- 세르주 2011, p104. ↩
- 블랙레지 2011, p284. ↩
참고 문헌
레닌, V I 1988, 《국가와 혁명》, 논장.
마르크스, 칼 & 엥겔스, 프리드리히 2010, 《공산당 선언》, ㈜웅진싱크빅.
블랙레지, 폴 2011, ‘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즘’, 《마르크스21》 11호(2011년 여름).
세르주, 빅토르 2011, 《러시아 혁명의 진실》, 책갈피.
이현주 2011, ‘파리 코뮌, 최초의 노동자 국가’, 《마르크스21》 9호(2011년 봄).
차일드, 고든 2009, 《고든 차일드의 사회고고학》, 사회평론.
캘리니코스, 알렉스 2007, 《칼 맑스의 혁명적 사상》, 책갈피.
하먼, 크리스 2004, 《민중의 세계사》, 책갈피.
Birchall, Ian 2011, ‘Another side of anarchism’, International Socialism 127(Summer 2011).
Harman, Chris 1991, ‘The State and Capitalism Today’, International Socialism 51(Summer 1991).
Marx, Karl 1871, The Civil War in France[국역:《프랑스 내전》, 박종철출판사, 2003.], http://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71/civil-war-france/index.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