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위기의 한국사회, 대안은 지역이다》
지역 대안론의 의미와 한계
학술단체협의회(이하 학단협)가 기획하고 여러 교수·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이 쓴 이 책은 책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메시지가 비교적 분명한 책이다. 신자유주의에 맞선 대안을 지역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필자의 글이 이런 메시지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1부는 주로 학단협 소속 교수·연구자들이 쓴 논문들로 이뤄져 있는데, 대체로 한국 사회가 겪는 위기가 신자유주의 경험에서 비롯했다는 점 정도를 공유하는 수준이고 필자마다 각기 다른 쟁점을 다루고 있다. 2부는 주로 지역 운동의 경험을 다루며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필자마다 제시하는 대안은 각기 상이하다. 따라서 개별 논문들을 각각 다루면 자칫 초점이 흐려질 수 있으므로, 이 책의 전체적 메시지를 중심으로 평하려고 한다.
이 책의 핵심 문제의식은 학단협 조돈문 상임대표가 쓴 서문에 잘 나와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한국 사회는 신자유주의를 경험하면서 경제적 민주주의가 퇴행하게 됐고, 정치적 민주주의도 후퇴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대동맹 구축을 막지 못한 것은 지역에서 “반신자유주의 주체 형성”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 차원의 저항은 있었지만 “시민들의 보수화” 때문에 고립됐다.
시장에 맞선 대안은 국가 강화일 수 없다. 국가 강화는 민주주의를 진전시키지 못할 수 있고 오히려 민주주의의 역행마저 초래할 수 있다. “사회”의 복원이 필요하다. 따라서 집권 프로젝트에만 매달리는 진보진영의 전략은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 “반신자유주의 주체 형성”을 위해서는 “집권 이전 변혁 프로젝트”가 중요하다. “집권 이전 변혁 프로젝트”는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아래로부터의” 주체 형성을 추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참여”가 필수적이므로 시민들의 “일상적 삶”의 공간에서 시작돼야 한다. 그럴 수 있는 공간은 지역이다. 주민들은 지역의 공동체 운동에 참여하면서 “대안적 가치를 내면화”하게 된다.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
이 책의 문제의식에는 몇 가지 공감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가령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 즉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는 점은 이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널리 공감하는 바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에 따르면, 신자유주의에서는 정치와 경제가 극단적으로 분리돼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와 현실은 다르다.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중반 이후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하면서 수익성을 만회하고자 벌이는 자본가 계급의 착취 강화 정책을 표현한 것이다. 노동시장 유연화, 민영화, 구조조정 등은 모두 국가의 직접·간접적 지원을 받으며 추진됐고, 이런 정책에 맞서 저항운동이 분출하면 어김없이 국가가 나서서 저항운동을 물리적·이데올로기적으로 무력화하려 했다. 즉, 신자유주의는 정치와 경제가 분리된 체제가 아니라 서로 융합된 체제였고, 신자유주의 하에서 경제적 민주주의의 후퇴는 동시에 정치적 민주주의의 후퇴도 수반했다.
우리는 이명박 정부 하에서 경제적·정치적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이 책의 필자들도 그 점에 주목한다. 그러나 이 책의 필자들은 보수파 정권의 등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전임 두 자유주의 정부를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한국에서도 1990년대 중반 이래 신자유주의가 점차 강화됐고, 1997년 IMF 경제 공황 전후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이 책의 필자들이 보기에 문제는 전임 두 자유주의 정부가 신자유주의를 수용했다는 데에 있다. 이는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의제가 협소해지고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오히려 후퇴하는 조건을 만들어 놓았다.”(김용복, ‘5·18과 민주화 그리고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위기의 한국사회, 대안은 지역이다》, 45쪽. 이하 필자와 쪽수만 표기) 그 결과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절차적 민주주의는 정착”됐지만, 사회경제적 권리뿐 아니라 “정치적 민주주의”도 “퇴보”하게 됐다.(김용복, 52)
따라서 이 책의 필자들은 대체로 한국 사회가 겪는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을 이명박 정부에서만 찾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전임 자유주의 정부들에게도 책임이 있고, 민주주의 위기를 해결하려면 정치적 민주주의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진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들은 공감할 만하다.
그러나 필자들의 분석에는 약점이나 모호함도 있다. 첫째, 전임 두 자유주의 정부에서 경제적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비판은 옳지만, 필자들은 대체로 노무현 정부에서 정치적 민주주의 측면도 위기를 겪었다는 점에는 주목하지 않는 듯하다. 돌이켜보면,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국가보안법 폐지는커녕 개정조차 되지 못하는 등 정치적 민주주의는 진전되지 못했다. 심지어 임기 말에 노무현 정부는 한미FTA 반대 투쟁 등에 직면해서 경찰 탄압을 대폭 강화하고 ‘일심회’ 사건 등을 터뜨리는 등 국가보안법을 이용한 탄압도 강화했다. 따라서 정치적 민주주의의 후퇴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노무현 정부 말기부터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
둘째, 필자들은 전임 두 자유주의 정부 때의 민주주의가 근본적 한계가 있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부 필자들은 “개혁적, 진보적 사회운동세력들과 정치세력들의 연대와 연합의 정치”(정태석, 112-113)가 필요하다고 보는 등 일관성이 부족하다. 이런 일관성 부족은 전임 두 자유주의 정부 시절에 정치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진전됐다고 보기 때문일 수도 있고, 필자들이 말하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상이 급진적이지 않거나 서로 상이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국가에 대한 태도
이 책은 시장에 맞선 대안을 국가 강화로 보는 견해에 올바르게도 비판적이다. 장하준처럼 국가의 구실을 강조하는 견해가 진보진영에서도 널리 인기를 얻는 상황에서 이런 주장은 그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다. 이 책의 필자들이 국가 강화론에 비판적인 이유는 두 가지인 듯하다.
첫째, 국가 강화가 신자유주의 극복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국가 강화론에 기반해 있던 보수파들도 얼마든지 신자유주의를 수용하여 자신들의 정책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신자유주의란 과거의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의 대표 격인 박정희 체제의 논리와는 구별되는, 한국 우파(보수주의)의 새로운 대안이라는 것”이다.(안현효·류동민, 157) 이명박 정부가 바로 그 실례다.
둘째, 자칫 국가 강화론이 민주주의의 약화를 불러올 수 있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국가 강화 주장은 보수파들의 견해였기 때문이다. 사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이 당선한 것이나 박근혜가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떠오르는 상황은 많은 사람들이 시장에 반대해 국가 강화를 지지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이런 정부가 과연 민주주의를 가져다 주겠는가 하는 점을 묻자면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한국은 “정치적 자유주의 부재 내지는 취약성”이라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어서 “사회민주주의적 개입주의”의 토대가 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시장-국가의 쟁점 속에 파묻혀서 국가주의가 나타날 위험이 높다.” 따라서 “진보주의는 기존의 ‘시장-국가’의 대립점 대신 ‘시장-사회’라는 대립점을 제기”해야 한다.(안현효·류동민, 195)
물론 이 책의 필자들이 국가의 구실을 전면 부정하는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필자들은 대체로 복지국가 대안을 지지하는 듯하다. 안현효·류동민은 이 점을 분명히 표현하는데, “한국 진보주의진영은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분열을 극복하고 새로운 민주주의, 즉 사회민주주의로 수렴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158) 다만, 민주주의가 약화된 국가 강화론을 피하고, “국가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것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95)
지역 운동에 주목하는 이유
이제 이 책이 대안을 지역에서 찾는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국가의 민주화”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아래로부터의”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 자신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대중의 삶의 영역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앙 권력의 변혁보다 지역 차원의 변화가 쉽다고 생각해서 지역에 주목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지역에서 보수파들의 헤게모니가 강하게 작용하므로 “설령 중앙 권력을 장악한다고 하더라도 각 생활 현장이나 지역 단위에서 작동하는 기득권이나 불의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국민들의 일상생활에는 별다른 차이를 만들지 못한다.”(강현수, 359)
그래서 이 책의 2부에서는 다양한 지역 운동의 실험들을 다룬다. 런던광역시정부의 경험을 소개한 서영표는 이 경험이 “21세기 사회주의 전략”으로서 “급진민주주의+녹색사회주의”의 비전을 보여 준 사례라고 평가한다. 서영표는 급진적 지방정부와 지역 대중운동의 결합을 강조하고 있다. 1980년대 초 런던광역시정부는 노동당 좌파 주도로 결성됐는데, 이 정부는 지역의 각종 운동들이 노동운동과 결합되면서 등장했다. 그 결과 노동운동은 “지역사회 전체의 이해를 내세우는 새로운 노동운동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가령 노조는 “대안적 생산계획을 제시하고 이윤만을 추구하는 생산이 아닌 ‘사회적으로 유용한 생산’을 기치로 내세웠다.”(320-321) 이런 계획은 지배자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그러나 “미래의 사회주의 정부가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를 예시적으로 보여 줄 수” 있었고 “지방수준에서 정치제도의 민주화와 시장의 사회화”의 필요성을 보여 줬다는 것이다.(325)
한편, 협동조합 운동을 다룬 논문이 네 편이나 된다. 협동조합 운동은 시장 영역과 국가 영역에서 벗어난 “사회적 경제” 영역으로 불린다. 필자들은 과거의 협동조합 운동에 문제가 없지는 않았지만, “신자유주의의 비사회적인 시장경제에 대한 다른 선택지로서 사회적 경제는 충분히 대안적”이라고 본다.(장원봉, 377) 특히 유럽의 협동조합 운동은 대안적 비전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한다. 스위스 생협은 세계 2위의 유통자본인 까르푸 매장 12개를 인수한 뒤에도 노동자들의 고용과 물가를 안정시켰다. 스페인의 몬드라곤 협동조합도 2008년 경제 위기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이탈리아 볼로냐에서는 협동조합 파산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스웨덴 생협은 기후변화에 대처하고자 탄소 소비를 줄이고 있다.(정원각, 380-385) 한국의 노동자생협운동은 아직 초보적 단계이지만, “노동자 의식 또는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고 “노동조합운동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현정길, 393-395)
약점
필자들은 분명히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경제 운영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참여”를 강조한다는 점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필자들이 제시하는 대안은 신자유주의에 맞선 대안으로서는 근본적으로 미흡하다.
1 그래서 서영표 자신이 《런던코뮌》에서 인정하듯이, 런던광역시정부는 세계시장은 말할 것도 없고 국내의 대기업들도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 근본적으로, 런던광역시정부를 이끌었던 노동당 좌파는 체제의 근본적 변혁을 지향하지 않았다.
먼저, 런던광역시정부의 경험을 살펴보자. 서영표는 이 책에서 런던광역시정부의 실험의 긍정적 측면만 소개한다. 그러나 런던광역시정부의 실험이 겪은 모순은 서영표 자신이 다른 책 《런던코뮌》에서 잘 밝히고 있다. 초기에는 런던광역시정부의 시도가 사람들에게 급진적으로 느껴졌을지 몰라도 시간이 갈수록 시장과 중앙 정부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래서 런던광역시 기업위원회GLEB는 “대중의 힘에 의한 경제의 사회주의적 재편이라는 거창한 목표와 동떨어진 채, 도산의 위기에 몰린 기업들을 도와주는 투자은행 정도의 위상으로 쪼그라들고 있었다.” “GLEB가 시장력의 압박 아래 ‘사회적 유용성’의 원칙을 포기하고 ‘상업적 생존 능력’”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결국 서영표가 말하는 “21세기 사회주의 전략”은 자본주의 국가를 그대로 둔 채 급진적 지방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가 말하는 “국가의 민주화”와 “시장의 사회화”가 이런 방식으로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서영표 자신도 급진적 지방정부 수립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긴다. 기업들이 그런 비전에 순순히 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잘 안다. 그래서 그는 지역의 운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지역의 운동을 그저 급진적 지방정부를 보조하는 구실에 머물도록 하고 있고, 국가와 대기업들에 맞선 투쟁으로 이끌 필요성을 회피한다. 서영표는 이 문제를 회피하는 대신에 미래 사회의 비전을 “예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공세적”인 접근법이라고 포장한다. 그러나 비전 보여 주기로는 기업들의 경제 권력과 억압적 국가에 제대로 도전할 수 없다. 이런 ‘예시적 사회주의’ 관점은 급진적 개혁주의자들이 근본적 변혁 과제를 회피할 때 종종 아나키즘(혹은 자율주의)의 논리를 차용하는 대표적 사례다.
한편, 시장 영역과 국가 영역을 벗어난 제3의 영역에서의 경제를 지향하는 사회적 경제 운동도 실제로는 시장과 국가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물론 협동조합 운동에 동참하는 많은 활동가들은 분명히 신자유주의에 반감이 있고, 대안적 경제 운영 원리를 추구하면서 이 운동에 동참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 중 한 명인 장원봉 자신도 협동조합 운동이 처한 딜레마를 인정하고 있다. 협동조합 운동이 보존하고자 하는 “독특한 문화”와 “시장경쟁력” 사이의 모순이 그것이다.(366-367) 그러나 장원봉과 정원각의 글 어디에서도 이런 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는 없다. 정원각의 글을 읽어 보면, 한국 생협운동 내에 첨예한 논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생협운동 내의 논점을 “가격, 자본과의 경쟁력 그리고 이윤 등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재)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에서 활동하는 그는 한국의 생협운동이 친환경 농산물 중심으로 펼쳐지다 보니 가격이 높아서 경제적 약자들이 참여하기 어려워 대중운동이 되지 못한다고 평가한다. 그는 한 토론회 발표문에서 한살림 생협 등 기존의 생협 운동이 “생산자 농민의 입장에서 보고 있”고 소비자(“노동자”)의 입장에서는 비싼 가격을 감내할 수 있어야 하므로 “결국 소수 엘리트 운동, 어느 정도 정신 수준을 갖추어야 가입하는 운동”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정원각은 소비자들을 생협운동에 동참시키려면 결국 생협이 가격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생필품 영역도 취급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가 유럽의 협동조합 운동 사례들을 평가하면서, 해고가 없었던 점뿐 아니라 “자본과의 경쟁력”을 높이 평가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앞서 언급한 토론회 발표문에서 몬드라곤 협동조합기업의 고용 유지 비결을 다음과 같이 썼다.
몬드라곤 협동조합 기업인 경우엔 1980년대 후반부터 유럽 단일 시장과 유럽 통합에 대비하여 노선을 국제화로 전환하고 유럽 전역 및 세계 수출 시장에서 중요한 거점들을 형성함으로써 다국적기업에 뒤지지 않은 경쟁력을 확보한 것이 본거지 바스크 자치주에서의 고용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즉, 소비자인 노동자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물품을 제공하고, 생산자인 노동자나 농민의 고용이나 보수를 적정 수준에서 보장하려면, 다른 자본주의 기업과 경쟁에서 우위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기업과의 경쟁에서 우위에 서게 되는 협동조합기업의 고용은 보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쟁력에서 도태된 기업들의 노동자들의 고용에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즉, 자본 간의 경쟁에 적극 편입되는 것은 노동자들 간 경쟁을 조장하는 효과를 내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4 를 확대하는 수단으로 협동조합 운동을 높이 평가했다. 이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일찍이 20세기 초반 독일의 여성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 사민당 내의 수정주의(오늘날의 용어로 개혁주의) 주창자 베른슈타인을 비판한 책에서 협동조합 운동이 처한 모순과 한계를 다룬 바 있다. 협동조합 운동은 아나키스트들의 운동에 기원을 두고 있었지만, 당시 개혁주의자들은 근본적 사회 변혁을 회피하면서 “경제적 민주주의”협동조합, 특히 생산 협동조합의 경우 그 본질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중간적 존재이다. … 생산 협동조합의 경우, 노동자들은 틀림없이 모순에 빠지게 된다. 즉 노동자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완전한 시장의 절대권력으로 통제해야 하는 상황에 빠지며, 자기 자신에 대립해서 자본주의 기업의 역할을 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모순으로 인해 생산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기업으로 전환되든지 노동자들의 이익이 좀더 큰 경우에는 해체되는 식으로 소멸한다. … 생산 협동조합은 가장 유리한 경우일지라도 지역적인 소규모 판매와 직접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소수의 생산물, 특히 생필품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생산의 모든 결정적인 영역, 즉 섬유, 석탄, 금속, 석유 그리고 기계, 철도, 조선 산업 등은 소비자 연맹에서, 따라서 생산 협동조합에서 처음부터 배제된다. … 협동조합을 통한 전체 사회주의 개혁은, 자본주의 경제의 주류인 생산 자본에 대한 투쟁에서 상업 자본, 특히 소매 자본과 중개업 자본에 대항하는, 오로지 자본주의 줄기에서 나온 작은 가지들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축소된다.
마치며
6 이 책에서 강조하는 ‘아래로부터의’ 관점은 바로 노동계급의 대중 행동을 통해 자본주의 국가를 분쇄하고 스스로 정치·경제를 운영한다는 마르크스적 의미의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관점과는 차이가 있다. 이 책이 특히 강조하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인 지역 운동은 대체로 의회나 지방정부에 진출하는 과정을 돕거나 진출 후 사회 개혁 프로그램 추진을 보조하는 구실에 머물러 있다.
요컨대 《위기의 한국사회, 대안은 지역이다》의 전반적 비전은 개혁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책이 지역 운동을 강조하는 것은 다른 효과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현재의 불완전한 민주화가 대중의 ‘보수화’에 기초해 있다고 여기고는 지역의 공동체 운동 경험을 통해 대중이 각성해야 한다는 교육적 효과가 그것이다. 실천이 미래 사회의 비전을 보여 줘야 한다는 아나키즘의 논리를 수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개혁주의에서 벗어났다는 뜻은 아니다. 개혁주의의 급진적인 버전들 가운데는 아나키즘이나 자율주의의 논리를 차용하는 것도 적지 않다.대중의 의식이 모순돼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촛불항쟁 경험과 그 이후 주요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주로 패배한 경험, 그리고 희망버스 등 조금씩 살아나는 학생과 노동자들의 투쟁 경험 등을 보면, 대중의 보수화 테제는 일면적이다.
게다가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썼듯이, 교육적 효과는 무엇보다 사회 체제를 변화시키는 혁명적 대중 투쟁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얻을 수 있다.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하지 않은 채 자본주의적 압력에 노출된 상태에서 모순적 실천을 해야만 하는 공동체 운동이 과연 얼마나 지속적으로 교육 효과를 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MARX21
주
- 서영표, 《런던코뮌》, p203, p206. 김인식 2010에서 재인용. ↩
- 정원각. ↩
- 정원각. ↩
- 룩셈부르크 2002, p78. ↩
- 룩셈부르크 2002, pp79-81. ↩
- 물론 필자가 다양해서 모든 필자들의 글이 그렇다고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활동가들이 도움을 얻을 만한 글들도 있다. 가령 김혜진이 쓴 비정규직과 지역 운동의 관계에 대한 글은 중소 영세사업장 비정규직을 조직하려면 지역 차원의 운동과 연대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정규직 노동자들의 연대 중요성을 배격하지 않는다면 김혜진이 제안하는 실천 방안도 결합시킬 수 있을 것이다. ↩
- 하먼 2009. ↩
참고 문헌
김인식 2010, ‘‘지방자치 사회주의’가 국가와 시장을 극복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21》 5호(2010년 봄).
룩셈부르크, 로자 2002,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책세상.
정원각, ‘한국 생협운동의 과제에 대한 토론문’, http://www.co-op.or.kr/uploads/100410058323.hwp
하먼, 크리스 2009, ‘자발성·전략·정치’, 《마르크스21》 2호(2009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