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오늘의 위기와 저항
계속되는 혁명 — 무바라크 몰락 이후의 이집트 *
사메 나기브는 이집트 혁명적 사회주의자단체RS의 지도적 활동가이고, 카이로아메리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다.
이 글을 이집트 혁명의 순교자들에게 바친다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이 아랍에서 일어나고 있다. 튀니지에서 시작해 이집트, 예멘, 리비아, 바레인, 시리아로 번진 혁명의 물결은 지난 40년간 미국 제국주의와 세계 자본주의가 맞이한 가장 심각한 도전임이 분명하다. 이 사건들을 2008년에 발생해서 지금도 계속되는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나 유럽 전역에서 일어나는 긴축 반대 대중 저항의 확산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지금은 분명히 국제적으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 특별한 기회와 도전의 시대다.
2011년 1월 25일 시작해서 18일 만에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를 타도한 이집트 혁명은 지금까지 벌어진 아랍 혁명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혁명이다. 이집트는 아랍 나라들 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을 뿐 아니라 노동계급이 가장 많고 가장 전투적이며 투쟁 경험이 풍부한 나라이기도 하다. 이집트 혁명의 진로는 더 광범한 아랍 혁명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중대한 구실을 할 뿐 아니라 미국 제국주의와 세계 자본주의가 이 전례 없는 도전을 봉쇄할 수 있느냐 없느냐도 좌우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2011년 6월 초) 이집트 혁명의 전투는 계속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장기간의 혁명적 과정을 겪고 있다. 즉, 반동의 공격에 이어 대중 파업과 시위가 벌어지고 그러면 다시 반동의 공세와 대중의 저항이 뒤따르는 일이 되풀이 되고 있다. 국제적 반동 세력(미국, 유럽연합,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과 국내의 반동 세력(이집트 지배계급, 군 장성, 아직 남아 있는 보안 기구들)은 힘을 합쳐 혁명을 되돌리거나 적어도 봉쇄하려 한다.
전 세계 혁명가들의 임무는 이집트·아랍 혁명에 연대하는 가장 전투적인 운동을 최대한 크게 건설하는 것만이 아니다. 자국 지배계급에 맞서 싸울 혁명적 운동과 조직을 건설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이 글은 이집트 혁명의 초기 몇 달을 되돌아보며 혁명의 원인, 전개 과정, 전망을 요약·정리하려 한다.
혼란으로 점철된 무바라크의 마지막 10년
이집트 혁명은 난데없이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아무도 혁명의 발생 자체를 예측할 수는 없었지만, 호스니 무바라크의 임기 마지막 10년 동안 이집트의 사회적·경제적·정치적 긴장은 너무 고조돼서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없었다.
무바라크의 통치는 세 가지 서로 연관된 정책들에 달려 있었다. 첫째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 이 때문에 이집트 경제는 세계 자본주의 경제에 불균등하게 통합됐으며 국민 대다수는 빈곤해졌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목표는 다국적기업의 금고와 소수의 이집트 자본가들 수중에 막대한 이윤을 갖다 바치는 것이었다.
둘째 정책은 무바라크 정권과 그 군대를 미국 제국주의와 이스라엘에 봉사하는 전략적 동맹으로, 더 정확히 말하면 위성국가로 굳건히 다지는 것이었다. 셋째는 권력을 독점한 정권과 부를 독점한 자본가들에 대한 정치적·사회적 도전을 무자비하게 짓밟을 수 있는 경찰 국가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이었다.
중동 지역에서 미국 정책의 골자는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중동의 시장을 개방해 다국적기업의 투자와 착취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중동 경제의 자유화는 이 중요한 석유 생산지에 대한 군사적·전략적 통제와 함께 추진됐다. 이것은 중동 지배계급들의 이익과 일치했으므로 중동의 정권들도 이를 쉽사리 받아들였다. 중동의 지배계급들은 신자유주의를 수용하고 미국과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을 옹호함으로써 세계시장에 진입하고 주요 다국적기업의 파트너가 됐다. 또 그들은 무바라크 정권처럼 야만적이고 반민주적인 정권들을 후원하는 미국의 지지도 받았다.
탁월한 이탈리아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지배계급이 권력을 유지하려면 강제뿐 아니라 동의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끄는 소장파 군 장교들이 왕정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았을 때는 강제를 이용했다. 그러나 나세르 정권은 많은 노동자와 농민에게 경제적·사회적 양보도 했다. 나세르는 반제국주의의 대변자 구실도 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의 대의를 옹호한 덕분에 1967년 중동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정치 권력을 계속 독점하고 좌파와 정치적 이슬람주의 세력의 도전을 무력화할 수 있었다.
나세르의 후임자인 안와르 사다트와 1981년 사다트가 암살된 후 권력을 차지한 무바라크의 정책은 나세르식 사회계약으로 형성된 상대적 동의를 점차 허물어뜨렸다. 특히 무바라크가 지배한 30년 동안 정권은 점차 야만적 탄압에 의존해서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농민과 노동계급을 겨냥한 신자유주의적 공격
비록 사다트가 1970년대 중반에 이집트 경제를 자유화하고 규제를 완화하는 ‘인피타(개방)’ 정책을 실행하기 시작했지만 그 조처들은 무역을 자유화하고 국내외 사적 자본의 투자를 촉진하는 데 그쳤다. 1980년대까지는 여전히 국가와 공공부문이 경제를 좌우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야 노동계급, 도시 빈민, 빈농에 대한 전면 공격이 시작됐다. 이후 20여 년이 지나자 국가와 유착된 신흥 억만장자 계급이 이집트 경제와 사회를 지배하게 됐다.
1991년 이집트 정권은 국제통화기금과 협력해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자유시장의 폐해에서 빈농들을 어느 정도 보호해 주던 나세르주의 법률들은 유명무실해졌다. 농산물 가격이 자유화되고 종자, 비료, 농기계에 대한 보조금이 폐지됐다. 1992년에는 농지 임대료 인상을 허용하고 5년간의 과도기를 거치면 소작인들을 쫓아낼 수 있는 법이 제정됐다. 그래서 1997년이 지나자 수많은 소작인과 그 가족이 대대로 경작하던 토지에서 쫓겨났다. 토지는 대개 부재 지주인 옛 소유자들에게 돌아갔다.
1996년에 대규모 사유화가 시작됐다. 2005년이 되면 주요 공공부문의 제조업체와 서비스업체 3백14곳 중 2백 곳이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사유화됐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5년까지 공공부문의 노동자 수는 거의 절반이나 감소했다. 은행 부문의 약 20퍼센트는 공적 은행에서 사적 은행으로 전환됐다. 결국 이러한 정책 탓에 노동조건은 전례 없이 악화하고 실업률은 급상승하고 대다수 이집트 국민들은 더 빈곤해졌다. 반대로 이 과정에서 공적 기관들을 사고팔거나 투기를 벌인 군 장성, 관료, 기업인 등은 부를 막대하게 축적했다.
무바라크 정권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한 이후 하루 2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빈곤층 비율이 국민의 20퍼센트에서 44퍼센트까지 늘어났다. 국내총생산 성장률이 최고에 달한 지난 10년간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절대빈곤층은 약 16퍼센트에서 거의 20퍼센트까지 늘어났다.
신자유주의 학설은 이론적으로는 공공부문 축소를 요구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작용하는’ 신자유주의는 공공 자원을 극소수의 이익에 종속시켰다. 연줄이 좋은 자들은(억만장자들은 항상 연줄이 좋기 마련이다) 국가 소유의 자산을 시장 가격보다 형편없이 싼 헐값에 사들일 수 있었다. 철과 시멘트 같은 필수 건축 자재들을 공급하는 기업들은 정부와 계약을 맺고 막대한 이윤을 얻었다. 알아흐람 정치·전략 연구센터의 경제 분과 책임자인 아흐메드 나가르는 정부 관료들이 정계에 연줄이 있는 가문들한테 국유지를 헐값에 넘겼다고 말한다. 정부 관료들은 외국 재벌들이 국영기업을 싸게 살 수 있도록 해 주고 그 대가로 뇌물을 받기도 했다.
2004년 무바라크는 대기업가들과 이른바 “박사 학위를 소지한 기술 관료들”로 내각을 개편했는데, 이들은 주로 영국에서 교육받은 대처주의자나 미국에서 교육받은 레이건주의자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자들이었다. 새 내각의 선택은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의 가속화였다. 공장, 황무지, 농지, 공항, 대중교통 등 모든 것이 판매 대상이 됐다. 새 내각은 최고 세율을 42퍼센트에서 20퍼센트까지 낮췄는데, 그 결과 억만장자와 다국적기업들의 소득세율이 소형 점포의 주인들과 똑같아졌다.
2005~08년에 이집트 정부는 국제 금융기관들, 특히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찬사를 받았다. 국내총생산 증가율이 연평균 7퍼센트나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 경제성장의 주요 특징은 성장률이 높더라도 성장의 과실이 불평등하게 분배된다는 것이다. 대개, 성장률이 높아지면 낙수효과 때문에 결국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도 개선된다고들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집트에서도 성장률은 높아졌지만 극소수만이 엄청난 부를 차지할 뿐 다수는 빈민과 실업자로 빠르게 전락했다.
무바라크의 몰락 이후에 벌어진 조사에서 무바라크 일가, 장관들, 그 밖의 고위 국가 관료들과 당 관료들이 축적한 재산이 엄청나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집트와 서구의 일부 부르주아 언론이 내린 결론은 이런 일이 신자유주의 정책이나 자유시장 자본주의 때문이 아니라 ‘정실 자본주의’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유화 정책이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개선하지 못한 것은 국가를 운영하는 자들이 부패하고 정치·경제 권력을 독차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주장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의 밀접한 관계는 자본주의 자체만큼이나 오래됐다. 둘째, 신자유주의 정책의 목표는 국가의 경제적 구실을 폐기하는 것도, 심지어 약화시키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노동계급을 희생시켜 자본가의 이윤 창출을 도와주는 국가의 구실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국가와 자본의 관계는 훨씬 더 밀접해졌다. 바로 이 밀접한 관계 때문에 부패와 정실주의가 판을 치는 것이다. 진부한 표현을 빌리면, 자본주의는 부패하기 마련이고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는 무조건 부패한다.
미국 제국주의와 무바라크 정권
1979년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은 이래 미국·이집트 동맹은 중동 지역에서 미국의 전략적 헤게모니를 뒷받침하는 중심축이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중동 지역에서 전쟁과 침략 행위를 할 때마다 이집트 정권은 전략적 동맹국들의 충실한 하인 노릇을 했다. 1982년 이스라엘이 벌인 레바논 전쟁과 살인적인 베이루트 봉쇄, 사브라와 샤틸라의 팔레스타인 난민촌 대학살부터 2008~09년 가자 지구에서 벌인 무자비한 전쟁까지 무바라크 정권은 중동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조력자이자 중재자로서 중요한 구실을 계속 했다.
노엄 촘스키가 지적했듯이, 미국과 맺은 동맹 덕분에 “결정적으로 이집트 군대는 아랍과 이스라엘의 충돌에서 빠질 수 있었고, 그래서 이스라엘은 전략적 관심과 군사력을 점령지와 북부 국경 지대에 집중할 수 있었다.”
1991년 제1차 걸프전에서 이집트 군은 ‘쿠웨이트 해방’을 명분 삼은 미국 주도의 대규모 이라크 침공 작전에 참여했다. 당시 이집트 군 총사령관이 바로 무함마드 후세인 탄타위 장군이었는데, 탄타위는 그때부터 무바라크의 국방부 장관을 지냈고 현재 자신의 주인이 몰락한 뒤에는 사실상 이집트의 통치자가 됐다.
2006년 이스라엘이 벌인 레바논 전쟁에서 이집트 정권은 헤즈볼라를 무너뜨리려는 이스라엘을 확고히 지지했으며, 시아파를 악마화하면서 수니파·시아파 사이의 종파적 갈등을 부추기는 선전 공세를 강력하게 펼쳤다. 무바라크는 2008~09년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을 전폭 지지했고 폭격이 시작되기 몇 시간 전에 이스라엘의 고위 관리를 만나기도 했다. 이집트는 가자 봉쇄에서 큰 구실을 했고 가자와 이집트를 잇는 라파 검문소를 봉쇄해 팔레스타인인 1백50만 명의 생필품이 전달되지 못하게 가로막기까지 했다.
물론 역대 미국 정부는 무바라크의 이러한 협조에 크게 보상했다. 무바라크 정권은 해마다 거의 20억 달러의 원조를 받았고, 그래서 이집트는 이스라엘 다음으로 미국의 해외 원조를 많이 받는 나라가 됐다. 2009년 9월 미국 의회에 제출된 의회 연구 보고서를 보면, 미국은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이 발효된 이래 4백 억 달러의 군사 물자와 방위 장비를 비롯해 6백40억 달러가 넘는 원조를 이집트 정권에 제공했다. 또, 1991년 4월 미국은 그해 초의 걸프전에서 이집트 정권의 지원을 받은 대가로 이집트의 부채 70억 달러를 탕감해 줬다. 더욱이 미국은 파리클럽[OECD 회원국을 중심으로 결성된 채권국 모임 — M21]에 개입해서 이집트가 서방 정부들한테 진 부채 2백억 달러의 절반을 탕감받게 해 줬다.
심지어 혁명이 시작되고 이집트 정권이 국민 수천 명을 폭행·구속·살해했을 때에도 미국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판단하기에 이집트 정부는 안정적이고 이집트 국민의 정당한 요구와 염원에 부응하는 방법을 여러모로 강구하고 있습니다.” 백악관 대변인 로버트 기브스는 이집트 정권이 안정적이라고 미국 정부는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주저없이 “예” 하고 대답했다.
반격: 제2차 팔레스타인 인티파다와 이라크 침공
2000년 9월 일어난 제2차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는 이집트에 두 가지 큰 영향을 미쳤다. 첫째는 이집트 정권이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 미국 주도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 옮긴이] 평화 협상이 파탄났다는 것이다. 이 협상은 1993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오슬로 협정에서 시작됐지만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친미 지도부가 이스라엘의 거의 모든 요구에 굴복하면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팔레스타인인들의 땅을 점령하고 영토를 확대하면서도 1948년 이후 고향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 예루살렘의 최종 지위, 미래의 팔레스타인 국가의 주권 같은 핵심 문제에서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이 협상에서 이집트 정권은 팔레스타인 측을 극도로 압박해 점점 더 양보하게 만들었고 이 때문에 미국과 이스라엘의 지배자들은 무바라크의 “현명한 리더십”을 크게 칭찬하기도 했다.
제2차 인티파다의 발발로 평화 협상은 이스라엘의 점령과 지배를 더 확대하는 가면임이 폭로됐을 뿐 아니라 이집트 정권은 팔레스타인 민중과 그 열망을 배신한 적이고 이스라엘과 완벽하게 공모한 동맹임이 폭로됐다.
인티파다가 이집트에 미친 영향은 열광적이었다. 이집트 정권이 한 추악한 구실과 팔레스타인인들의 용기와 저항의 부활은 수많은 이집트 청년들에게 급진적 영향을 줬다. 이집트 전국에서 대중 집회가 열렸다. 대학생과 중고학생들이 시위를 조직했는데 이는 그들이 난생처음 참여한 정치 집회였다. 나세르주의자, 이슬람주의자, 사회주의자 들이 협력해 시위를 조직했고 봉쇄당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전달할 기부 금품, 식량, 의약품을 모았다.
이러한 정치적 각성은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더욱 확산되고 심화됐다. 2003년 3월 20일 활동가들은 타흐리르 광장에서 반전 시위를 조직했는데 여기에 4만 명이 참가했다. 시위대는 무바라크의 사진을 불태우고 24시간 동안 광장을 점거했다. 이는 2011년 1월의 예행연습이었던 것이다.
민주화 운동
이집트 정부가 이러한 저항의 물결을 폭압적으로 탄압하자 민주주의 문제가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정권의 숨막힐 듯한 권위주의(경찰의 만행, 고문, 대량 구속, 민간인에 대한 군사재판)와 함께 무바라크가 아들 가말을 대통령 후계자로 세우려 한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비상사태 해제, 민주 선거, 무바라크의 사임을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이 성장했다.
2004년 12월 12일 나세르주의자, 사회주의자, 이슬람주의자,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를 포괄하는 야당 연합 세력은 ‘키파야(충분하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첫 번째 시위를 조직했다. 계속된 시위들은 최대 몇 천 명이 참가했을 정도로 규모는 작았다. 그러나 그 정치적 영향은 참가자 수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전까지와는 달리 사람들은 무바라크의 사임을 요구하거나 고문과 불법 연행을 일삼는 경찰을 처벌하라고 공공연하게 외쳤다. 무바라크 일가와 고위 국가 관리들의 부패를 폭로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크게 공감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더 많은 대중을 끌어들이지 못했고 물밑에서 끓고 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경제적·사회적 요구들과 정치적 요구들을 결합하는 데 실패했다. 2005년 무바라크의 다섯 번째 임기가 새로 시작되고 정권이 억압적인 계엄령을 2년 더 연장하자 민주화 운동은 소강상태에 놓였다.
노동자 운동
정권을 위협하는 가장 큰 도전은 2006년에 시작된 전례 없는 파업 물결이었고 그 도전은 무바라크가 실각한 후에도 더 확대·심화되고 있다.
2004년부터 시작된 파업과 항의 시위 들은 서서히 늘어나다 그해 7월 아흐메드 나지프 내각이 출범하면서 급격히 늘어났다. 노동자들의 단체 행동은 2005년에 2백2건이었고 2006년에는 2백22건, 2007년에는 가장 많은 6백14건이었다.
2006년 12월 마할라 알 쿠브라(이집트 공공부문 섬유 노동자의 4분의 1 이상이 이곳에서 일한다)의 미스르 방직공장 노동자들은 노동자 운동의 전환점이 될 파업을 시작했다. 그 전에 정부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에게 연간 보너스를 상당히 인상해 주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다. 12월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마할라의 노동자들은 분노를 터뜨리며 곧장 파업을 준비했다. 지도적인 노동자들은 리플릿을 배포하고 파업을 호소하는 연설을 시작했다.
12월 7일 노동자 수천 명이 공장 정문에 모였다. 옷 만드는 여성 노동자 3천 명은 방직 부문이 있는 공장들을 행진하면서 노동자들에게 파업에 동참하라고 선동했다. 거대한 섬유 공장의 모든 부문에서 생산이 중단됐다. 약 2만 4천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고 공장을 점거하고 사흘 동안 농성했다. 파업 노동자들은 3월에 정부가 약속한 보너스를 원래대로 지급하라고 요구하면서 교통비, 의료보험, 탁아소, 노동조건, 경영 부실을 개선하라고도 요구했다. 나흘째 되는 날 정부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대부분 받아들였고 노동자들은 나머지 요구안이 마저 수용되지 않는다면 파업을 재개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파업을 끝마쳤다.
2006년 12월 마할라에서 시작된 파업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된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 물결은 공공부문에서 민간 부문을 거쳐 공무원 부문으로, 전통적인 공업 지역에서 새로운 도시들로, 지방 전체로 번졌다. 섬유 부문에서 시작된 파업은 금속, 화학, 건설·건축, 교통·서비스 부문까지 번졌다. 저항의 전통이 없는 부문, 즉 교사, 의사, 공무원 들까지 파업을 벌였다. 심지어 빈민가 주민들도 파업을 벌였다. 이 파업 물결로 ‘저항 문화’가 일반화됐다.
특별법으로 파업이 금지된 부문에서도 노동자들은 특별법과 이를 강요하는 당국에 저항하는 대중 파업을 조직할 수 있었다. 이러한 파업은 철도, 카이로 지하철, 병원, 구급차, 우편 서비스, 대중교통 분야에서 일어났고, 특히 군대가 소유한 산업에서도 일어났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2007년 9월 마할라 섬유 노동자들은 두 번째 대규모 파업을 조직하고 공장을 다시 점거했다. 정부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에는 파업이 더욱 전투적이었다. 6일간의 파업과 점거로 노동자들은 보너스를 쟁취하고 가장 증오하던 최고 경영자를 사임시킬 수 있었다. 노동자들은 이 승리를 경제적 승리이자 정치적 승리로 이해했다. 법, 억압, 위협,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노동자들은 단체 행동으로 무자비한 정부에 맞서 싸워 승리했다. 이 승리는 민주주의 운동의 승리, 특히 노동자 민주주의 운동의 승리였다. 노동자들은 기존의 민주주의 운동 진영에 노동자만이 독재에 항거할 진정한 집단적 힘이 있음을 보여 줬다.
2007년 말 세무 노동자 약 5만 5천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노동자들은 재무부 청사 출입문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재무부에 직접 고용된 세무 노동자들과 임금 수준을 똑같이 해 달라는 것이었다. 파업이 세 달 동안 계속되자 재산세 징수율이 90퍼센트나 감소했다. 카이로 도심의 재무부 앞에서 11일 동안 농성을 벌인 끝에 노동자들은 승리를 쟁취했다. 임금은 3백25퍼센트나 올랐고 더 중요하게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파업 위원회가 1957년 이후 이집트 최초의 독립 노조 집행부가 됐다.
대중 파업과 사회적 저항은 계속 전국으로 확산됐고, 그 물결은 몇 달 후 잠잠해지는 듯하더니 곧이어 더 강력하게 치솟았다. 노동계급은 정권을 상대로 전투에 들어갔다. 신자유주의와 독재에 맞선 반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세계경제의 위기
2008년 세계를 뒤흔든 대불황으로 이집트의 경제 위기가 더욱 깊어지고 불안정한 상황이 계속됐다. 세 가지 주요 요인이 있었다.
첫째, 이집트는 유럽 수출 의존도가 높은데 경기 위축에 따른 수요 감소로 유럽 수출이 폭락했다. 세계은행 자료를 보면, 유럽연합에 대한 이집트의 상품 수출 증가율은 2008년에 전년 대비 33퍼센트에서 2009년 7월까지 마이너스 15퍼센트로 감소했다.
둘째, 유럽에서 가혹한 긴축 정책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악화했다. 이민자들의 국내 송금이 2008년보다 17퍼센트 하락했고 관광 수입 증가율도 2008년 24퍼센트에서 2009년 마이너스 1.1퍼센트로 떨어졌다. 수에즈 운하 통관 수입도 2008년보다 7.2퍼센트 하락했다.
셋째 요인은 생필품 가격 급등이었다. 이집트는 특히 밀 같은 수입 식량에 의존하기 때문에 국제 식량 가격이 상승하면 정부의 대응이 더 어려워진다. 이집트에서 연간 식량 가격 인상률은 2010년 12월 17.2퍼센트에서 2011년 1월 18.9퍼센트로 증가했다.
신자유주의 때문에 이집트는 경제 위기에 더 취약해졌다. 빈부 격차가 확대되는 동시에 사회부조를 가능케 하는 메커니즘이 더 취약해졌다. 따라서 경제 위기의 여파는 사회적 취약 계층에 집중됐다.
정부의 골칫거리는 세계경제 위기만이 아니었다. 노동자 운동이 고양되고 2010년 총선·대선이 가까워지면서 민주화 운동도 서서히 회복되자 정권은 갈수록 강력해지는 도전에 대처할 분명한 전략을 마련해야 했다.
혁명을 향해
지배 분파들 사이에 분열과 다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가속화하고 노동자의 저항을 분쇄할 것인가? 아니면 그 정책의 속도를 늦추고 운동을 봉쇄해야 하는가? 계획대로 가말의 승계를 밀어붙일 것인가? 아니면 (아마 군부 출신일) 더 신망 있는 인물을 차기 대통령으로 선택해서 무바라크 일가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달랠 것인가?
대대적인 강압 정책을 쓸 것인가? 아니면 봉쇄 정책을 쓸 것인가? 봉쇄 정책은 아래로부터 성장하는 운동에 양보하는 것처럼 보여서 정권 반대 운동에 더 힘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강경책은 걷잡을 수 없는 폭발을 부를 수 있었다. 지배 분파의 어느 쪽도 체제를 구원할 전략을 확신하지 못했다.
지배계급 상층부는 3단계로 실시된 2005년 총선에서 혼란에 빠진 듯했다. 첫 단계에서는 봉쇄파가 주도하는 듯했다. 부정선거는 미미했고 최대 야당인 무슬림형제단이 88석(의석의 20퍼센트)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자 강경파는 경악했다. 다음 두 단계에서는 부정선거가 판을 쳤고 여당인 국민민주당NDP이 다수당을 유지했다.
2010년에는 강경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대중 파업과 저항 운동이 벌어지고 무슬림형제단의 신망이 높아지면서, 특히 2007년 팔레스타인 선거에서 하마스가 승리하자, 가말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2010년 총선에서 야당을 의회에서 쫓아내려는 계획이 마련됐다. 이 전략을 미국이 승인했다는 분명한 징후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전략을 추진한 자들은 자신감이 없었고, 군부와 국민민주당 지도부와 대기업가들 사이의 불화는 심각했다.
이렇게 이집트에는 혁명의 고전적 전제 조건들이 모두 갖추어졌다. 지배계급은 더는 옛 방식으로 지배할 수 없었고 노동계급도 더는 과거와 같은 조건들을 견딜 수 없었다.
전 세계에서 자본주의의 전례 없는 위기 때문에 체제 자체가 의심을 받았고, 그래서 국가, 은행, 다국적기업 내부와 그들 상호 간에 분열과 혼란이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그리고 경제 위기의 여파로, 미국 제국주의 헤게모니의 장기적 쇠퇴가 수렁에 빠진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밝히 드러났다. 이러한 국내외 상황이 이집트 혁명의 배경이 됐다.
18일
수십 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고, 수십 년 동안 일어날 일이 단 몇 주 만에 일어나기도 한다.
─ 블라디미르 레닌
몇 년 동안 이집트의 블로거, 정치 활동가, 최근의 페이스북 활동가들이 집회·시위를 조직하는 방식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시위 일정을 잡고 수천 명한테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가상 공간에서 수만 명의 지지를 얻는다. 그러면 시위 당일 ‘유력 용의자’ 수백 명이 시위 장소에 나타난다. 때로는 그 수가 기적처럼 1천 명을 헤아리기도 한다. 그들은 시위 진압 경찰 3천~4천 명에게 에워싸인 채 구호를 외치고 연설을 하고 경찰과 몇 차례 충돌하다가 시위를 끝낸다.
1월 25일에는 시위에 대한 활동가들의 기대가 더 컸다. 전에 없이 많은 사람들이 시위 참가를 희망했을 뿐 아니라 튀니지의 폭발적인 저항(1월 초 몇 주 동안 일어난 대중 항쟁으로 튀니지의 독재자 진 알 아비딘 벤 알리가 축출됐다)이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는 물론 나머지 주요 도시와 노동계급 거주지를 열광시켰기 때문이다. 소규모의 민주주의 청년 단체들, 자유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나세르주의자들은 고무됐다. 이번에는 적어도 주요 도심 두세 군데에서 수천 명이 모일 듯했다. 어쩌면 1만 명이 모일 수도 있을 듯했다. 그러나 가장 낙관적으로 예측한 활동가들도 당일 실제로 일어날 일은 짐작조차 못했다.
무슬림형제단 지도부는 그날 시위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수많은 시위대가 각각 노동계급 거주지에서 출발해 주요 도심(카이로의 경우 타흐리르 광장)에서 한데 모이자는 아이디어는 그럴듯해 보였다. 특히 그날은 ‘경찰의 날’이기도 했다(1952년 1월 영국군이 [무기를 반납하고 경찰서를 떠나라는 명령을 거부한 — 옮긴이] 이집트 경찰[50명 — 옮긴이]을 학살하자 소요 사태가 일어나고 카이로 일부가 불에 탔던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수십 년 동안 자행된 경찰의 만행, 고문, 인권 침해를 보며 누적된 대중의 증오와 분노가 튀니지의 기적과 겹쳐져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터였다. 물론 그중 일부만이 실제로 시위에 참가하겠지만 말이다.
시위에서는 몇 가지 주요 요구를 내걸 계획이었다. 즉, 사회정의, 최저임금, 비상사태 해제, 사법부 독립 유지, 고문과 인권 탄압으로 악명 높은 내무장관 하빕 알아들리 장군 해임 등이었다. 또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다시 실시하는 등 정치 개혁도 요구할 계획이었다. 2010년 11월 총선은 심각한 부정선거였고 야당 국회의원들은 거의 모두 낙선했기 때문이다.
1월 25일 아침 활동가들은 노동계급 거주지별로 주요 출발 지점들에 모여들었다. 이날은 경찰의 날을 기념하는 공휴일이었지만 정작 경찰한테는 휴일이 아니었다. 시위 진압 경찰 수만 명이 도처에서 시위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위 진압 경찰과 총을 소지하고 선글라스를 쓴 사복 경찰 수백 명은 긴장하고 있었다. 활동가들보다 경찰이 대중의 분위기를 더 잘 이해하고 예측한 듯했다. 경찰력이 총동원돼 전국 곳곳에 배치됐다.
시위대는 여느 때처럼 알아들리, 무바라크, 국민민주당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했다. 부패 척결과 가말 무바라크 반대도 외쳤다. 철강 재벌이자 국민민주당 실력자인 아흐메드 에즈 반대도 외쳤다. 그러나 이제는 유명해진 튀니지 혁명의 구호 “민중은 정권의 몰락을 원한다”가 외쳐지는 순간 뭔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듯했다. 활동가들의 분위기도 변하고 시위 행진 참가자의 수도 크게 늘기 시작했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 나와 시위 대열에 합류하고 열정적으로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남녀노소, 기독교도와 무슬림을 가리지 않고 참가했지만, 시위대의 압도 다수는 가난한 이집트인들이었다. 이 마술적인 구호를 더 크게 외칠수록 더 많은 빈민가에서 그 구호가 울려 퍼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대열에 합류했다. 활동가 수백 명으로 출발한 시위대가 수만 명의 대규모 시위 행렬이 됐다.
경찰의 혼란과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경찰이 시위대를 공격할 때도 있었지만 대중의 반격에 물러서야 했다. 이러한 대중의 힘, 자신감, 단결이 선글라스를 쓴 사복 경찰이나 말단 경찰들을 당혹감에 빠뜨렸다. 말단 경찰들은 모두 빈농 출신의 젊은이들로 이집트 지배계급을 보호하는 더러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3년 동안 징집된 사람들이었다.
경찰은 주요 거점으로 후퇴해서 시위대가 도심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바로 그곳에서 그 역사적인 날의 주요 전투들이 벌어졌다. 시위대를 물리치려고 물대포, 고무탄, 수많은 최루탄이 사용됐다. 단연 가장 괴로운 것은 최루가스 때문에 숨을 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 노련한 시위대 일부가 의료용 마스크, 캔 콜라, 양파(주부나 약국 노동자들이, 또 커피숍에서 공짜로 나눠 준) 등을 조직적으로 나눠 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시위대는 최루가스의 하얀 연기를 견딜 수 있었다.
수많은 시위대가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고 타흐리르 광장을 비롯한 도심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해방의 날, 이집트 혁명이 시작된 그날 밤늦게까지 수십 명의 순교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 뒤 이틀 동안 시위와 전투가 계속됐지만 목표는 1월 28일 ‘분노의 금요일’을 조직하는 데 모아졌다. 집회와 시위를 조직하는 사람들은 더는 정치 활동가, 페이스북과 블로그 활동가 등의 ‘유력 용의자들’만이 아니었다. 대개 노동계급인 청년 수천 명이 몇 년간의 정치교육보다 더 나은 며칠간의 실제 혁명으로 교육받고 새로운 지도자로 나선 것이다.
이번에는 무슬림형제단이 분노의 금요일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수에즈, 마할라에서 격전이 벌어진 지역들에서는 오후 6시부터 오전 6시까지 통금이 선포되고 무슬림형제단 지도부와 활동가 수백 명이 체포됐다.
이집트 정권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다. 대중이 미쳤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대중은 정의와 자유를 요구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정의와 자유를 위해 죽을 태세가 돼 있었다. 고문, 투옥 심지어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이집트 거리를 가득 메운 최루가스 연기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사실, 대중은 미친 것이 아니라 자유, 사회정의, 존엄을 위해 최대한 이성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미친 것은 정권이었으며 혼란에 빠져 갈수록 현실을 외면하려는 듯했다. 정권은 인터넷과 이동통신망을 전면 차단하기로 결정했다. 이른바 조직자들이 이 결정적 통신수단을 사용하지 못하면 금요일 시위를 조직하기 힘들어질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것은 정말이지 크나큰 오판이었다. 정권은 이 혁명이 중간계급의 “페이스북 혁명”일 뿐이라는 자신들의 선전을 스스로 믿는 듯했다. 통신망 차단은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그때쯤 지도자와 조직자 대다수는 페이스북과 아무 관련이 없었고 전통적 통신수단을 쉽게 활용할 수 있었다. 사실 그 조처로 정권의 절망적 상황과 취약성이 드러나자 시위대는 훨씬 더 대담해졌다.
금요일 기도회가 끝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모든 주요 모스크와 광장에서 출발해 도심으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이 끝없는 대열을 분쇄해 사람들의 광장 집결을 막으려고 다시 한 번 경찰력을 주요 거점에 집중 배치하는 등 마지막 몸부림을 쳤다.
카이로에서는 타흐리르 광장으로 가는 모든 주요 도로와 교량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수에즈, 마할라, 알렉산드리아, 그 밖의 도시와 마을 들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시위대의 용기와 단호한 결의는 이후 유튜브, 개인 홈페이지, 블로그 등에 올라온 수많은 동영상으로 남아 이집트 혁명을 연구하는 역사가들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전 세계의 미래 혁명가들에게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경찰은 최루탄, 고무탄, 물대포뿐 아니라 상황이 악화하자 실탄을 사용하고 저격수를 투입하고 심지어 장갑차로 시위대를 깔아뭉개기도 했다. 수백 명이 목숨을 잃고 수천 명이 다쳤다. 그러나 결국 경찰은 모든 곳에서 패배했고 서둘러 물러났다. 수많은 경찰차, 장갑차, 경찰서가 불타고 한때 거리에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경찰관들은 목숨을 걸고 도망쳤다. 국민민주당 건물들은 불에 탔고 혐오스런 독재자의 상징, 초상화, 사진도 불탔다.
수많은 사람들이 타흐리르 광장에 도착했고, 결국 2월 11일 무바라크가 몰락한 뒤에야 끝나게 되는 그 유명한 광장 점거가 시작됐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광장에 몰려들었다. 대부분은 가난한 노동계급 출신이었지만 많은 중간계급 청년들도 함께했다. 니캅을 두른 여성들이 청바지를 입은 여성과 함께, 수염을 기른 이슬람주의자들이 기독교인들과 함께 행진했다. 모두 정권을 무너뜨리겠다는 단호한 결의가 강력했다.
해가 질 무렵이 되자 경찰은 거의 사라졌고, 수십 년 동안 고문의 본산이었던 악명 높은 내무부 경비 경찰력만이 남아 있었다. 당연히 많은 시위대는 내무부 건물을 점거하려 했다. 숨어 있던 저격수의 사격으로 사망자가 발생했다. 시위대 수십 명이 목숨을 잃고 수백 명이 다쳤다.
거리에서 철수한 경찰들은 감옥을 열고 흉악범 수천 명을 풀어 줘 국민들 사이에서 공포와 혼란을 조장하려 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패했다. 전국 곳곳에서 민중위원회들이 등장해 지역을 방어하고 교통을 조직하고 심지어 거리 청소까지 했다. 대통령은 군대에 명령을 내려, 경찰력이 붕괴된 도시로 들어가 항쟁을 분쇄하고 ‘질서’를 다시 회복하게 했다.
분노의 금요일 밤이 되자 무바라크는 처음으로 정부의 서투른 조처를 탓하면서 새 내각을 구성하겠다고 연설했다. 사망자와 부상자에게 사과하는 말은 일언반구도 없었으며 국민의 요구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 차분해서 마치 다른 나라 국민에게 얘기하는 듯했다. 무바라크 이전의 많은 독재자들이 그랬듯이 그는 사태를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는 국민을 멸시했고 이미 과거의 인물이 돼 있었다.
대중은 분노했다. 또, 무바라크의 속내를 꿰뚫어보는 듯했다. 그의 말과 행동은 마치 고대 유물처럼 보이고 들렸다. 다음 날 그는 정보국 책임자인 오마르 술레이만 장군을 첫 부통령으로, 아흐마드 샤피크 장군을 총리로 임명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무바라크 측근으로 대중이 증오하던 자들이었다. 술레이만은 별명이 고문 박사였는데 미국이 주도한 ‘변칙 인도’ 프로그램, 즉 미국이 체포한 테러 용의자들을 이집트와 그 밖의 아랍 국가들로 보내 고문을 받게 하는 데서 주도적 구실을 했다. 또, 그는 이스라엘이 가자를 공격했을 때 이스라엘의 각별한 협력자였다.
월요일에 새 내각이 들어섰지만 전 내각의 혐오스런 장관들은 대부분 유임됐다. 그중에는 요직인 국방, 통신, 법무, 석유, 외무부의 장관들이 포함됐다.
증오의 대상이던 하빕 알아들리는 밀려났고, 무바라크의 아들 가말 주위의 골수 신자유주의자 사기꾼들인 경제 부처 장관들 몇몇도 밀려났다. 이 표면적인 양보는 대중을 조롱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대중의 분노와 투지에 기름을 부었을 뿐이다.
군대의 탱크가 주요 거리, 타흐리르 광장의 입구들, 다른 도시 중심부에 배치되자 처음에 대중은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곧 놀랍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병사들한테 다가가 그들을 포옹하고 탱크 위에 올라가 이집트 국기를 흔들고 “군대와 국민은 하나다” 하고 소리 높여 외쳤다. 젊은이들은 탱크 곳곳에 무바라크 반대 구호를 써넣었다. 많은 사람들의 말과 달리, 이는 대중이 군대의 실제 구실을 착각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물론 그러한 착각이 없지는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광장과 거리에 있는 군대를 재빨리 무력화하는 탁월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병사와 하급 장교들이 민중한테 총을 쏘기가 거의 불가능해졌다. 설사 그들이 그런 명령을 받았더라도 발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과거의 혁명들에서도 대중이 병사와 하급 장교 들과 친해지기 위해 비슷한 전술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시위대는 2월 1일 화요일에 모든 대도시에서 1백만 명이 참가하는 행진을 하자고 호소했다. 군 장성들의 대응은 혁명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군 대변인 이스마일 오스만 소장은 국영 텔레비전에서 군은 국민의 정당한 요구를 인정하며 총을 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군 장성들은 군대에 진압 명령을 내렸다가는 군이 분열돼 병사와 하급 장교 수천 명이 민중의 편에 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군대의 최고 지휘관들은 체제를 살리기 위해 무바라크를 희생시킬 각오가 돼 있었다. 체제의 운명은 자신들이 군대를 계속 통제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1월 31일 월요일 새 부통령 술레이만은 담화문을 발표해, 무바라크의 요청에 따라 모든 야당 세력과 대화를 시작하고, 지난해 11월 선거 결과를 번복하도록 사법부에 요청하겠다고 했다. 이것은 시간을 벌고 시위대의 진을 빼려는 정권의 전술적 후퇴였다.
2월 1일 화요일
정권의 책략은 먹히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화요일 시위에 참가했다.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 2백만 명, 알렉산드리아 순교자 광장에 1백만 명, 만수라에 75만 명, 수에즈에 25만 명이 참여했다. 그것은 전례 없는 세력 과시였다. 이번에 시위대는 무바라크의 즉각 사임뿐 아니라 정권 자체의 퇴진도 요구했다.
타흐리르 광장은 저항과 “피억압자의 축제”가 벌어지는 초대형 코뮌이 됐다. 사람들은 역사에 남을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느꼈다. 개인과 집단의 창조성이 분출하기 시작했다. 민중의 요구를 시와 익살, 개인의 체험담으로 표현한 수많은 배너와 플래카드가 광장을 메웠다. 벽마다 그라피티, 벽화, 슬로건이 가득했다.
타흐리르 광장은 물리적으로 점거된 것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정신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여성 비하가 사라지고 콥트교도와 무슬림 사이의 갈등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음식, 물, 담배를 서로 나눴다. 노래, 연주, 시, 구호가 가득했다. 새로운 이집트가 태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적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지배계급은 주도 면밀한 음모와 계략으로 이 새로운 이집트를 파묻으려 했다. 화요일 밤 무바라크는 그날 낮의 대규모 시위에 대응하는 두 번째 연설을 했다. 그는 압력 때문에 사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남은 임기를 마저 마치겠다고 선언했다. 이번에 그는 잘 준비한 듯했다. 그는 자신이 60년 넘게 조국에 봉사했으며 주요 개혁들이 잘 이루어지도록 감시하겠다고 맹세했다. 또, 재선거는 없을 것이고 자신은 9월에 사임하고 이집트에서 죽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충분히 정치적이지 못한 적지 않은 사람들은 무바라크의 연설을 듣고 혼란에 빠졌다. 일부는 시위를 그만둘 때가 됐다고 주장했다. 무바라크는 늙었고 그만둘 날이 몇 달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권은 강력한 언론 공세를 퍼부으면서 양동 전술을 구사했다. 즉, 식량이 바닥나고, 경제가 무너지고, 은행 금고가 텅 비고, 간첩이 시위대를 사주하고, 타흐리르 광장은 섹스, 마약, 알코올이 난무하는 난장판이 됐다는 둥 온갖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혼란을 조장하려 했다. 역사상 지배계급들이 혁명가들을 중상모략 할 때 퍼붓는 온갖 비난이 텔레비전과 관영 신문을 도배하고 정부의 끄나풀 수천 명이 이를 퍼뜨리고 다녔다. 그러나 대중의 분열과 혼란은 잠시뿐이었다. 정권이 다음 날 사악하고 폭력적인 반혁명을 획책했기 때문이다.
2월 2일 수요일의 낙타 전쟁
가말 무바라크를 따르는 저명한 억만장자들, 국민민주당 지도자들, 보안경찰 등은 시위대를 겨냥한 철저한 반격을 준비했다. 기업인들은 각자의 기업과 분야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으기로 했다. 아랍어로 ‘발타기야’라고 부르는 깡패, 룸펜프롤레타리아도 고용하기로 했다. 이들은 돈만 준다면 무슨 짓도 마다하지 않을 자들이었다. 내무부 장관은 가장 악랄한 보안경찰 일부를 일반 시민들처럼 위장해서 수요일의 반혁명적 시위에 동원하고 그 시위를 이용해 민주화 시위대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또, 현장을 지휘·감독할 보안경찰 10여 명은 그 전 주 토요일 감옥에서 나온 흉악범들한테 돈과 사면을 약속하면서 이들을 고용했다. 이 계획은 카이로뿐 아니라 알렉산드리아, 수에즈, 포트사이드, 다만후르, 아시우트와 그 밖의 도시들에서도 실행하기로 했다.
이처럼 반혁명에서 룸펜프롤레타리아가 동원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프랑스에서도 1848년 혁명 이후 루이 보나파르트가 똑같은 책략을 썼다고 칼 마르크스는 지적했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 옮긴이] 자선단체를 설립한다는 구실로 파리의 룸펜프롤레타리아를 끌어모아 비밀 지부들을 만들었다. 각 지부는 보나파르트파 요원들이 이끌었고 전체 책임자는 보나파르트파 장군 한 명이었다. 생계 수단도 모호하고 출신 성분도 수상한 타락한 탕아들과 파산한 부르주아 모험가들과 더불어 떠돌이, 퇴역 군인, 옥살이를 마친 범죄꾼, 갤리선을 탈출한 노예, 사기꾼, 엉터리 약장수, 건달, 소매치기, 협잡꾼, 도박꾼, 포주, 뚜쟁이, 짐꾼, 삼류 글쟁이, 떠돌이 악사, 넝마주이, 칼갈이, 땜장이, 거지, 다시 말해 모호하고 뿔뿔이 흩어져 여기저기 떠도는 불확실한 대중, 프랑스어로 라 보엠la bohème이라고 부르는 이 무리들이 보나파르트의 ‘12월 10일 회’의 중핵이었다.
이집트에서도 이런 자들은 이미 여러 번 동원됐다. 즉,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유권자들을 위협하고 시위와 파업을 공격하는 데 동원됐다. 무바라크 집권 말기의 마지막 10년은 특히 심했다.
2월 2일 수요일 오후 2시쯤 공격 계획이 실행됐다. 타흐리르 광장의 입구 두 군데서 3천 명이 넘는 발타기야들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광장에 모여 있던 평화적 시위대 수만 명에게 마구 돌을 던졌다. 그 깡패들은 대부분 방패를 지녀 시위대가 되던지는 돌을 막을 수 있었다. 총으로 무장한 자들은 소수였지만, 모두 곤봉이나 길고 짧은 칼, 면도칼 등의 흉기를 갖고 있었다.
한 시간 남짓 투석전을 벌이다 공격자들은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말과 낙타 수십 마리가 시위대를 향해 돌진했다. 마치 중세 시대의 전투를 보는 듯했다. 처음에 혼란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하던 시위대는 맨손으로 반격에 나섰다. 말과 낙타를 모는 깡패들에게 맨몸으로 달려들었다.
광장의 모든 입구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재빨리 두터운 방어선을 치고 반격을 위해 돌과 벽돌을 닥치는 대로 모았다. 도처에서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선두에서 싸우다 부상을 입은 사람들은 즉시 뒤로 보내져, 임시 야전병원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치료를 받았다.
깡패들은 물러났지만 다시 공격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순식간에 광장 입구마다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더 조직적인 단체들, 특히 무슬림형제단의 청년들은 깡패들에 맞서 싸우고, 준비하고, 조직하는 데 중심적인 구실을 했다.
예상대로 밤에 공격이 시작됐다. 깡패, 사복 경찰, 저격수 수천 명이 모이기 시작했다. 특히 이집트 박물관과 가까운 쪽의 광장 입구와 몇몇 건물 옥상에 집결했다. 가까이 있는 다리가 더 높았기 때문에 깡패들은 광장 입구에서 벌어질 전투에서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바리케이드들은 불탄 경찰차와 트럭들로 보강되고 투사 수천 명이 전투를 준비했다.
타흐리르의 시위대는 효과적으로 분업을 했다. 젊고 건강한 사람들, 특히 노동계급 청년들은 선두에 서서 돌을 던졌다. 다른 사람들은 보도블록을 깨서 돌을 만들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그 돌을 전선으로 운반했다. 젊은 여성들은 그 끔찍했지만 영웅적이었던 밤에 투사들한테 물을 날랐다.
깡패들은 돌, 빈 병, 화염병을 던지며 강력한 공세에 나섰다. 국립 박물관에 불을 지르는 것도 이 공격의 일부인 듯했다. 박물관을 불태운 뒤 그 책임을 시위대한테 떠넘기려는 것이 분명했다. 지배계급이 위협을 받으면 얼마나 야만적인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사례였다. 고대의 파라오를 불태워서 현대의 파라오를 살리겠다는 것이다! 박물관을 보호할 사람들이 조직된 덕분에 불이 나자마자 진화됐다.
전선에서는 투사 수백 명이 무바라크의 깡패들을 향해 돌격했다. 바리케이드를 넘어서 몸을 완전히 노출시킨 채 사력을 다해 돌폭탄을 퍼부었다. 수십 명이 부상당해 재빨리 뒤로 빠지면 다음 투석조가 곧바로 뛰어나갔다. 바리케이드를 넘어서 일시에 기습하는 전술은 집단적 천재성의 발현이었다(비록 몸이 노출되고 깡패들의 유리한 전술적 위치라는 약점은 있었지만 말이다). 그 전술은 깡패들의 사기를 꺾어 놓는 심리적 효과가 있었다. 이 기습의 의도는 혁명가들이 대의를 위해 죽을 각오가 돼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고용된 폭력배들이 그런 반격을 끝까지 당해 낼 수는 없는 법이다.
저격수들이 시위대를 레이저 불빛으로 조준하기 시작했다. 수십 명의 젊은이가 바리케이드 위로 올라가 자신의 가슴을 레이저 불빛에 드러냈다. 이들은 두려움을 모르는 투사들이었다. 그들의 목표와 메시지는 분명했다. 죽음이 아니면 승리를!
그날 밤 청년 투사 수십 명이 순교했다. 그들의 시신을 임시 병원으로 후송하는 동지들은 자부심과 투지를 느꼈다. 부상자가 수천 명이었고 의사와 간호사 들은 밤새 상처를 꿰매고 환자들을 돌봤다. 부상자 수백 명은 곧 전선으로 돌아가 전투를 계속했다.
여러 건물 옥상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일부 건물은 깡패들이, 나머지는 혁명가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곳곳에서 화재가 났다. 바리케이드 안쪽에 작지만 효과적인 화염병 공장이 세워졌다. 불에는 불로 맞서야 했기 때문이다. 일부는 가솔린을 가져오고 일부는 빈 병이 담긴 상자를 나르고 나머지는 화염병을 만들어 차곡차곡 상자에 담았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이 상자들을 지상의 전투 현장이나 혁명가들이 차지한 건물 옥상으로 운반했다.
새벽녘에 전투는 시위대의 승리로 끝났다. 깡패와 경찰 들은 필사적으로 도주했다. 혁명가들은 광장 외곽의 다리와 교차로들을 점령하고 깡패들을 추격해 수백 명을 사로잡았다. 광장으로 끌려온 살인자들은 두들겨 맞기는 했지만, 이들을 당장 처형하기를 원하는 많은 시위대로부터 보호받았다. 임시 감옥이 세워졌다. 잡혀온 살인자들의 다수는 경찰 신분증이나 국민민주당 당원증을 지니고 있었다.
전투에서 승리하자 혁명 진영은 엄청나게 고무됐다. 전날 밤에 혼란을 느꼈던 사람들은 격분했다. 대통령의 연설은 다음 날의 살인 공격을 준비하기 위한 책략이었음이 드러났다.
군대의 구실 또한 폭로됐다. 많은 사람들이 군대의 위선을 알게 됐다. 혁명을 보호하겠다는 말은 완전히 빈말이었음이 드러났다. 공격이 시작되기 한 시간 전에 군대는 국영방송에 나와서 정부가 시위대의 “요구를 접수”했으니 이제 시위를 중단하고 “귀가”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야만적인 공격이 계속된 16시간 동안 시위대가 군대의 개입을 간청했을 때 군대는 중립을 선언하고 일부 광장 입구에서 철수하기까지 했다. 평화적인 비무장 시위대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해 놓고도 말이다.
날이 밝자 수많은 이집트인들이 동료 시위대를 찾아와 지지와 연대를 표명했다. 시위 지도자들은 이미 금요일 예배 후 전국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자고 호소했다. 금요일을 “하야의 날”로 정한 것은 무바라크에게 퇴진이나 외국 망명을 압박하려는 것이었다.
그 전에 오마르 술레이만은 야당과 대화를 요청했다. 놀랍게도 2월 6일 일요일 실제로 회담이 성사됐다. 그 회담에는 이른바 좌파 정당이라는 타감무당과 자유주의 정당인 와프드당 같은 고분고분한 야당의 믿을 수 없는 자들뿐 아니라 무슬림형제단의 몇몇 핵심 지도자들, 이집트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의 수장인 나기브 사위리스, 청년 단체들의 일부 회원들이 참석했다. 청년 단체들의 회원은 대부분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이었지만, 술레이만의 술책에 넘어간 인정받는 청년 활동가도 몇 명 있었다.
회담은 대형 무바라크 초상화가 걸린 어느 관공서의 홀에서 열렸다. 회담에 대한 공식 언론의 보도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집트 거리와 광장의 운동은 정권의 새로운 속임수로 달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회담에 참여한 야당 인사들에 대한 분노가 터져 나왔다. 무슬림형제단의 청년들은 올바르게도 회담 참여는 혁명과 순교자를 배신하는 것이라며 지도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회담 말미에 정권은 무바라크에게 감사하고 현 사태에 대한 정권의 견해와 계획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정권은 모든 참석자가 ‘위기’ 해결 방안에 합의했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이른바 위기 해결 방안의 내용은 헌법과 선거제도는 부분적으로 개혁하지만 기만적인 의회를 포함해서 모든 국가기구와 그 운영자들은 유지된다는 것이었다. 계엄령 즉시 해제도 약속하지 않았다. 아이러니이게도, 회담 하루 뒤 술레이만은 국영방송에서 “이집트는 민주주의를 실행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젊은 회원들의 반발에 직면한 무슬림형제단 지도부는 회담은 아무런 성과가 없었으며 술레이만은 어떤 중요한 제안도 한 바 없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지도부의 이미지는 이미 퇴색했고, 무슬림형제단 청년들 사이에서는 지도부에 대한 불신이 훨씬 더 커졌다.
시위대 사이에서 새로운 전술을 써야 한다는 압력이 생겨났다. 2월 8일 화요일 수많은 시위대가 총리의 집무실이 있는 건물을 에워싸고 대규모 집회를 열어 총리의 출근을 가로막았다. 시위대는 또, 의사당도 봉쇄해서 국회의원들의 출입도 가로막았다. 시위대는 조만간 대통령궁도 에워싸겠다고 공언했다. 알렉산드리아의 관공서들에서도 비슷한 대중 봉쇄가 있었다.
항쟁 속의 노동자들
이 중대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동안 평범한 노동자들이 전투 현장에서 두드러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그랬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원이나 작업장 대표로 조직적으로 참가한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 참가했다. 물론 언론이 보도한 사건 주인공들은 사뭇 달랐다. 언론과 인터뷰를 한 스타 ‘혁명가’들은 모두 이런저런 청년 단체 소속의 고등교육을 받은 중간계급이었다. 이들은 모두 인터뷰 내내 혁명의 영웅 대접을 받는 것이 자랑스러워 활짝 웃고 있었다.
항쟁 마지막 주에 주요 경제 부문 노동자들의 대중 파업과 시위가 들불처럼 번졌다. 노동자들은 경제적 요구와 함께 무바라크 퇴진도 내걸었다. 분노의 금요일에 경찰에 맞서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수에즈에서 노동자 투쟁이 가장 먼저 터져 나왔다. 2월 8일 수에즈 운하 노동자 1천 명이 파업에 들어가자 섬유·철강 노동자들이 가세했다. 다음 날 석유 노동자들이 고용 안정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파업은 빠르게 모든 대도시와 중소 도시들로 확산되면서 운송, 섬유, 공무원, 보건 노동자들도 파업에 나섰다. 2월 10일 목요일에는 북부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남부의 아스완까지 파업으로 뒤덮였다. 심지어 노동자들이 가혹한 군사 규율 아래서 일해야 하는 군 장성 소유의 공장들도 파업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작업장 대부분에서 파업 노동자들은 항쟁에 고무되고 대담해져서 오랜 숙원이었던 경제적 요구들을 다시 내걸었다. 그러나 일부 핵심 부문의 노동자들은 한발 더 나아가 독재 정권과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정권 퇴진을 요구했다. 2월 9일 카이로의 대중교통 노동자들은 항쟁의 목표를 지지하고 항쟁에 연대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 성명서를 타흐리르 광장에서 배포했다. 다음 날, 그들은 카이로 시내의 버스 차고들을 모두 봉쇄했다.
심지어 <뉴욕 타임스>조차 노동자들의 이러한 개입이 무바라크 몰락 후의 이집트 상황을 변화시키는 데서 중대한 구실을 한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독재자가 물러난 지 며칠 뒤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이번 주에 섬유 공장, 제약 공장, 화학 산업, 카이로 공항, 운수 부문, 은행 등에서 일어난 노동자 소요는 18일간의 민중 항쟁으로 무바라크의 30년 독재가 종식된 후 군부가 주도하는 과도기를 겪고 있는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원동력의 하나로 떠올랐다.
무바라크의 종말
이제는 군 장성들, 미국 정부, 이집트의 주요 자본가들이 보기에도 무바라크는 제거돼야 했다. 그날 밤 무바라크가 세 번째 연설을 할 것이라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연설이 미뤄지면서 사람들은 예정보다 더 기다려야 했다. 군 장교들, 무슬림형제단 지도부, 미국 정부의 발언들을 보면, 모두 상황은 끝났으며 무바라크가 사임을 발표할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대중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30년에 걸친 속임수와 거짓말 때문에 믿기 힘들었다. 그리고 대중이 옳았다. 그날 밤 무바라크는 짧은 연설에서 몇 달 남지 않은 선거 때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할 것이며 자신의 권한은 술레이만에게 넘기겠다고 말했다. 오만한 연설이 촉발한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수많은 사람들이 투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사 표시로 신발을 공중으로 치켜들었다.
2월 11일 금요일 시위는 사상 최대 규모였다. 전국에서 1천5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시위에 참가했다. 노동자들은 무바라크가 물러나지 않으면 이집트를 마비시키겠다며 작업장마다 조직적으로 시위에 참가했다.
그날 밤 마침내 무바라크 퇴진 요구를 받아들인 술레이만의 20초짜리 짧은 연설이 있었다. 그는 국영방송에 나와 무바라크가 30년 동안 차지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그 권한을 최고군사위원회에 넘겼다고 발표했다.
이집트 혁명의 첫 단계는 성공했다. 1천여 명이 순교하고 수만 명이 부상을 입었지만 무바라크가 물러났다. 혁명의 승리를 축하하는 행사들은 밤새 그리고 이튿날도 하루 종일 계속됐고, 그것은 이집트 현대사에서 가장 큰 축제였다.
권력을 장악한 장군들과 과도기
군대는 항상 사회의 복사판이다. 차이가 있다면, 군대에서는 사회관계가 집약적으로 표현된다는 점이다. 즉, 사회관계의 긍정적 특징이든 부정적 특징이든 모두 극단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 레온 트로츠키, 《러시아혁명사》
모름지기 군 장성들과 원수들은 분명히 지배계급의 핵심적 일부다. 이집트에서도 마찬가지다. 군 지휘관들은 수십 년 동안 이집트를 지배한 억만장자나 국가 관리들과 수천 가닥의 연줄로 얽혀 있다. 무바라크 퇴진 이후 이집트를 지배하는 최고군사위원회의 장군들도 모두 옛 독재자가 직접 선발한 자들이다. 최고군사위원회의 우두머리인 육군 원수 후세인 탄타위는 1991년에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무바라크에 대한 그의 충성심은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고 무바라크에게 조언하고 협력하는 측근들 중에서도 핵심 인물이었다.
이집트 군대는 또 이집트 경제의 거의 20퍼센트를 지배하는 경제적 제국이다. 군대는 대규모 농지, 부동산, 관광 회사, 무역 회사 등을 소유하고 있다. 또, 무기에서 세탁기까지 온갖 것을 생산하는 공업단지도 운영한다. 이 경제적 제국은 무바라크 시절 모든 주요 국가기관의 주된 특징이던 부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 군대의 예산과 재정은 기밀 사항이므로 군대는 주요 국가기관 중에서도 가장 부패한 기관일 것이다.
또, 이집트 군대는 미군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이집트는 해마다 미국한테서 13억 달러의 군사 원조를 받으며 이집트 군대는 미 육군·해군과 정기적으로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한다. 이집트 장교들의 특수훈련은 모두 미국에서 이뤄지며, 이집트 군대가 구매하는 첨단 무기는 모두 미국산이다.
하급 장교와 사병의 대다수는 징집되는데, 주로 노동계급·농민·하층중간계급 출신들이다. 장군들은 이런 군대를 가혹한 처벌과 굴욕 등 혹독하고 야만적인 규율로 통제한다. 직업군인인 장교들과 징집 사병들은 식당, 숙소, 심지어 화장실도 완전히 따로 쓴다.
앞서 말했듯, 혁명이 일어났을 때 군 수뇌부가 시위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은 이유는 혁명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그랬다가는 군대가 분열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체제를 구하려고 무바라크를 희생시킨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무바라크를 제거하고 직접 권력을 잡은 최고군사위원회는 민중에게 양보하는 것과 지배계급(정권의 핵심부는 여전히 건재했다)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 사이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처신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처신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양보, 강제, 아래로부터의 압력
2월 13일 최고군사위원회는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중단시켰지만 무바라크가 임명한 정부는 그대로 뒀다. 최고군사위원회는 민간인에 대한 경찰의 범죄와 구정권의 부패와 음모를 조사하겠다고 약속했다. 2월 17일 내무장관 하빕 알아들리와 그 보좌관들이 구속됐다. 같은 날 억만장자인 장관 세 명, 즉 아흐메드 마그라비, 조헤이르 가라나, 철강 재벌이자 국민민주당 실력자인 아흐메드 에즈도 구속됐다.
그러나 최고군사위원회는 무바라크와 그 일가, 진정한 ‘대통령 측근들’(무바라크가 집권 기간 내내 의지한 각료들과 고위 관리들)에 대해서는 계속 미적거렸다.
2월 18일 금요일 다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무바라크 퇴진이라는 큰 성과를 자축하는 동시에 정권 교체와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사법 처리를 요구하는 시위였다.
최고군사위원회는 법관들로 이루어진 헌법개정위원회를 구성해서 조직적인 총선, 제헌의회, 대선을 준비하게 했다. 여기서 마련된 개헌안은 3월 19일 국민투표에 부칠 예정이었다. 헌법개정위원회 위원장은 무슬림형제단 지지자이며 무슬림형제단의 또 다른 보수적 회원도 위원에 임명됐다.
신정부
“혁명 정부의 정책은 어느 누구도 불필요하게 자극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임시정부 전체의 지도 지침이었다. 임시정부는 무엇보다 유산계급 사람들을 자극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 레온 트로츠키, 《러시아혁명사》
민중의 생계라는 가장 절박한 문제에 관한 한, 혁명이 일어난 것은 오로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매주 금요일 시위의 주된 요구는 무바라크가 임명한 아흐메드 샤피크 정부의 퇴진이었다. 3월 3일 최고군사위원회는 이에 굴복해서 에삼 샤라프를 새 총리로 임명하고 과도정부를 꾸리게 했다. 그러나 샤라프는 무바라크가 임명했던 일부 사람들을 유임시켰을 뿐 아니라 이렇게 저렇게 옛 정권과 유착했던 자들이나 대기업가들을 새 정부에 끌어들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중요한 혁명적 선제 행동은 계속됐다. 3월 4일과 5일, 성난 청년 시위대가 증오의 대상이던 국가안보국을 습격했다. 수십 년 동안 고문, 불법 감금, 살인이 자행되던 곳이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된 이 행동은 몇 시간이 채 안 돼 전국으로 확산됐다. 추악하고 피로 얼룩진 국가안보국 건물들에서 시위대가 발견한 것은 충격적인 것들이었다. 산더미 같은 ‘신문’조서, 비디오, 기록물 그리고 수많은 정치 활동가들을 사찰한 문서들이 있었다. 관료들은 이 증거들을 파기하고 불태우려 했지만 이를 끝마칠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다.
시위대 중에 많은 사람들은 전에 이 건물에 와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눈이 가려진 채 끌려와 고문, 인권 유린, 전기 충격, 강간을 당하고 다른 사람들의 무시무시한 비명 소리를 들었었다. 이제는 눈을 가리지 않고 이곳에 왔다. 고문을 일삼던 자들은 달아나 버렸지만 이집트 민중과 인권을 유린했던 범죄의 증거들은 남아 있었다. 3월 15일 최고군사위원회는 국가안보국을 해체하라는 대중의 요구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새 과도정부는 첫 성명에서 옛 정권의 자유시장 경제정책은 변함 없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최고군사위원회는 이미 앞서 발표한 성명에서 정부는 이집트가 맺은 기존의 국제 협약들을 존중하며 미국과의 동맹이나 우호 관계도 변함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3월 23일 정부는 민간 분야든 공공 분야든 각종 기관이나 서비스의 정상적 기능을 방해하는 파업과 시위를 불법화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을 어기면 1년 징역형이나 50만 이집트파운드[약 9천만 원 — 옮긴이]의 벌금이 부과된다.
그러나 파업은 계속 확산되면서, 분명히 그리고 의도적으로 “각종 기관의 정상적 기능을 방해했다.” 그렇지만 정부와 최고군사위원회는 처음에는 이 법을 실제로 집행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최고군사위원회, 정부, 부르주아 언론과 관영 매체, 자유주의·이슬람주의 문필가들과 평론가들은 서로 합세해서 파업 반대 선전 공세를 펼쳤다. 이들은 파업이 국민 전체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는 “집단 이기주의”라고 비난했다. 파업이 경제에 타격을 가하고 새로운 이집트 건설 프로젝트도 방해한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이집트 혁명은 모든 정직한 이집트인들, 즉 자본가와 노동자, 부자와 빈자 모두의 혁명이므로 빈자는 정당한 요구가 있더라도 참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도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부르주아 동맹 사이에서 반反노동계급 합의가 등장하고 있었다. 파업 노동자들이 혼란의 원흉이고 질서 있는 권력 이양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노동자 파업은 당장 중단돼야 할 반혁명적 행동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에삼 샤라프는 어느 연설에서 파업을 깡패들의 행패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런 선전 공세는 그칠 줄 몰랐다. 신문 기사, 텔레비전 프로그램, 군대의 성명, 장관들의 인터뷰는 모두 혁명의 새로운 단계는 “생산의 수레바퀴”를 다시 돌리는 것에 달려 있는데 정신 나간 노동자들이 그 바퀴를 멈추려 한다고 떠들어 댔다. 부르주아지와 그 지식인들은 이집트 노동계급한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듯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여러분 덕택에 무바라크를 쫓아냈습니다. 그러니 이제 작업장으로 돌아가 입 다물고 일이나 하십시오.”
그러나 노동계급과 빈민 대다수는 이런 메시지에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파업, 농성, 철로 봉쇄, 청사 앞 시위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물론 이 메시지는 노동계급을 향한 위협일 뿐 아니라 중간계급을 겨냥한 슬로건이기도 했다. 진정한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혼란과 경제 파탄을 계속 떠들어 대면, 생산물을 판매하기 힘든 중소 상공인, 전통적 쁘띠부르주아지, 장인, 자영농 등은 정말로 겁을 먹는다. 자본주의 위기의 책임을 노동자한테 전가하는 이러한 선전 공세는 쁘띠부르주아지의 반감이 정권과 신자유주의 정책을 비켜가게 하고 장차 노동계급과 대결할 때 꼭 필요한 동맹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4월에는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커지고 최고군사위원회가 중대한 양보들을 하기도 했지만, 경찰 구실을 하는 군대의 탄압도 강화됐다. 무바라크와 그 측근들의 구속과 재판을 미적거리는 최고군사위원회의 행태는 혁명적 대중을 위협하는 것일 뿐 아니라 혁명적 대중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 최고군사위원회의 구실과 혁명에 대한 태도는 의심받게 됐다. 대중의 다수가 군 수뇌부를 혁명의 ‘수호자’로 신뢰한 짧은 ‘밀월’ 기간이 끝난 것이다.
4월 1일 금요일에 새로운 대중 집회가 타흐리르 광장, 알렉산드리아, 수에즈, 그 밖의 주요 도시들에서 열렸는데 집회의 이름은 “혁명을 수호하는 금요일”이었다. 시위대는 국민민주당을 해산하고 부패 조사를 서두르고 무바라크와 그 아들들과 고위 관리들을 기소하라고 요구했다.
4월 8일 “청산과 심판의 금요일”에 수많은 사람들이 타흐리르 광장에 집결했다. 이날 시위대와 군대는 처음으로 대규모 충돌을 벌였다. 군복을 입은 장교 몇 명도 시위에 참가했다. 시위대는 총사령관 탄타위 반대와 군대 내 부패 척결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쳤다. 장교들을 포함한 시위대 수천 명은 광장 중앙에서 농성을 벌이다 야간에도 집회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군 수뇌부는 군복 입은 장교들이 시위대와 친해지고 최고군사위원회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군대는 농성을 해산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발포했다. 적어도 한 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다쳤다. 시위에 참가한 장교들도 모두 구속됐다.
군대는 점차 강압적으로 저항 운동을 봉쇄하려 했다. 그래서 카이로대학교를 점거하고 있던 학생들을 해산시켰다. 전국에서 활동가 수백 명이 투옥·고문을 당했다. 군대 감옥에 갇힌 민간인 수가 1만 명에 달했다.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은 투옥된 여성 활동가들이 강제로 처녀성 검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군 장성들의 사고방식이 국가안보국 수사관들과 똑같이 야만적이라는 끔찍한 사실을 보여 줬다.
그러나 최고군사위원회는 상황 통제력을 잃지 않으려면 크게 양보해야 했다. 그래서 4월 7일 무바라크의 비서실장이자 무바라크가 가장 신뢰하는 보좌관인 자카리야 아즈미를 구속했다. 이어서 4월 10일 무바라크의 마지막 총리였던 아흐메드 나지프도 구속했다. 4월 11일에는 상원의장이자 국민민주당 사무총장인 사프와트 엘셰리프를, 4월 13일에는 하원의장 파트히 소로우르를 구속했다.
이날 무바라크와 두 아들 가말과 알라도 구속됐다. 두 아들은 카이로의 토라교도소에 수감됐고 무바라크는 샤름 엘셰이크[홍해 연안의 휴양지 — 옮긴이]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됐다(심장마비 때문이라고 했다).
반혁명의 위협
모든 혁명에서 그랬듯이, 권력을 상실한 자들은 권력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도 서슴지 않는다. 옛 정권과 연루된 국민민주당 잔당, 보안경찰, 억만장자 기업인 등은 혁명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그치지 않았다. 깡패를 써서 사람들을 위협하고 공포와 불안을 조성한다. 경찰도 사실상 직무를 방기하고(부분적으로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이집트 거리의 치안 부재를 부추겼다. 가장 위험한 상황은 소수파인 기독교도를 공격하기 시작한 살라피 단체들(종교적으로 극단적이고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무슬림들)이 빠르게 성장하는 것이었다. 모스타파 오마르는 이집트 혁명을 다룬 뛰어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처음에는, 3월 초 카이로 남부의 아트피흐 마을에서 살라피 무리가 선거권이 없는 도시 빈민들과 함께 콥트교 교회에 불을 질렀는데, 기독교도 남성과 무슬림 여성이 사귄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4월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이집트 남부 케나 주에서 살라피스트들이 새 주지사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시민 불복종 운동을 조직했다. 사실, 많은 무슬림과 기독교도는 에마드 미카엘이 주지사로 임명되는 것을 반대했다. 그가 무바라크 시절 악명 높은 보안경찰 책임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라피스트들은 미카엘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가 그의 종교적 신념을 향하도록 유도했다. 더 최근에 5월 초 카이로 임바바의 빈민가에서는 또 다른 무슬림 폭도들이 콥트교 교회를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그 전부터 기독교 반대 선동을 해 왔던 살라피스트들은 교회 사제들이 무슬림 남성과 결혼한 기독교 여성을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도 교회에 붙잡아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군대와 경찰은 무슬림과 기독교도가 총격전을 벌이는데도 가만히 지켜 보기만 했다. 몇 시간 동안 계속된 총격전으로 적어도 11명이 사망했다. 다행히도, 상당히 많은 평범한 무슬림과 기독교도가 교회 방화에 반대하며 격렬하게 항의하자 살라피스트들은 잠시 주춤했다.
지금까지 벌어진 반혁명 시도들 때문에 혁명 세력의 사기가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혁명은 반혁명 시도를 경계해야 한다. 혁명을 거꾸러뜨리려는 자들의 시도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2월 3일 낙타와 말을 타고 시도했으나 실패한 자들은 다시 한 번 폭탄, 기관총, 종단 간 폭력으로 혁명을 쓰러뜨리려 할 것이다.
이슬람주의자, 자유주의자 그리고 권력 투쟁
무슬림형제단은 혁명에 참여하면서 동요와 분열을 피할 수 없었다. 무슬림형제단 지도부가 혁명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것은 원칙적으로 혁명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단체 내부의 다양한 경향이 가한 압력 때문이었다. 특히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거리에서 대중과 어우러졌던 청년 단원들의 강력한 압박 때문이었다.
이러한 동요와 모순은 무슬림형제단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무슬림형제단을 창립한 이맘 하산 알반나 시절부터 오늘날까지의 역사를 보면 이 점이 드러난다. 1940년대 말 무슬림형제단은 세력이 크고 회원이 50만 명이나 됐지만 이집트 왕정은 무슬림형제단 내부의 첨예한 대립과 정권에 맞서 싸우기를 주저하는 지도부를 이용해 조직의 핵심을 와해시킬 수 있었다. 무슬림형제단은 1952년 7월 혁명이 일어난 첫해에도 비슷한 위기를 겪었다. 내부 분열과 지도부의 동요로 나세르 정권은 무슬림형제단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반대와 타협, 급진화와 망설임 사이의 이 상시적 동요는 무슬림형제단이 대중적 종교 단체이기 때문이다. 무슬림형제단에는 일부 도시 부르주아지뿐 아니라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마친) 전통적·현대적 쁘띠부르주아지의 일부, 실업자들, 많은 빈민들도 있다. 이러한 구성은 정치적·사회적 안정기에는 문제가 없지만, 거대한 격변기에는 시한폭탄처럼 되고 만다. 사회적 격변기에는 다양하고 모순된 사회적 이해관계를 광범하고 모호한 메시지로 봉합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슬림형제단은 군대의 애국심과 군 수뇌부를 믿어라, 군대가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군대는 혁명을 ‘수호’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군대를 반대하는 행동은 모두 혁명을 배신하는 짓이다 따위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끊임없이 반복했다. 무슬림형제단 웹사이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군대는 사병들 사이에서 규율을 유지하려고 하며 그럴 권리가 있다. 규율이 유지되지 않으면 국민을 수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군은 이집트에서 유일하게 조직된 세력이다. 군을 약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뜻이 아니며 우리는 군의 약화를 방치하지도 않을 것이다. 무슬림형제단은 군을 약화시키려는 자들이 누구인지, 또 그 목표와 의도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무슬림형제단은 혁명의 성공을 원한다. 그리고 우리의 위대한 군대가 혁명에 대해 취하는 태도가 혁명의 성공에서 중요한 요인임을 잘 알고 있다. 군은 처음부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은 낮 동안 시위를 벌이고 의사 표현을 할 수 있지만 심야 통금 시간에는 그러면 안 됩니다. 통금 시간도 여러 번 줄어서 이제는 3시간밖에 안 됩니다.”
항쟁이 촉발한 파업 물결과 함께 혁명의 사회적 심화에 대한 무슬림형제단의 태도는 정권이나 최고군사위원회의 태도와 다르지 않았다. 무슬림형제단은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이집트 경제를 살리려면 작업장으로 복귀하십시오. 무슬림형제단은 모든 이집트 국민에게 생산과 발전의 수레바퀴를 멈춰서는 안 된다고 호소합니다. 부문의 요구들이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이를 내건 시위는 생산과 경제에 해롭습니다. 특히 혁명이 경제 엔진을 멈춰 세울 때 그렇습니다. 시민들은 고귀한 삶을 위한 자기 희생이 단지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이집트 국민은 혁명 그 이상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이집트가 경제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이런 주장은 무슬림형제단만의 견해는 아니다. 자유주의 세력도 열정적으로 두 가지 캠페인을 벌였다. 하나는 최고군사위원회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의 수레바퀴를 굴려야 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노동자 파업을 신경질적으로 매도하는 것이었다. 각광받는 자유주의자 아므르 함자위는 청년들과 유명 인사들을 규합해 노동자 파업 반대 선전을 확산시켰다. 다양한 지식인과, 어제만 해도 혁명의 편에 섰던 사람들이 군대와 손잡고 파업 파괴를 선동했다. 이것은 혁명의 두 번째 국면에 반대하는 운동의 일환이었다.
이슬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모두 9월로 예정된 선거를 앞두고 여러 정당을 결성했다. 비록 겉보기에는 세속적 자유주의자들과 이슬람주의자들이 헌법의 세부 조항이나 미래의 민주적 이집트에서 이슬람 법률인 샤리아가 차지하는 지위를 둘러싸고는 비타협적으로 논쟁하는 듯하지만, 계급투쟁과 혁명의 심화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는 가까운 동맹임이 드러난다. 둘 다 최고군사위원회를 전폭 지지하고 군에 대한 비판을 강력하게 반대한다. 둘 다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지지하고 파업 운동을 강력히 반대한다. 자본주의를 구하고 노동자들을 짓밟는 문제에서는 십중팔구 둘이 동맹을 맺게 될 것이다.
노동자들의 반란
혁명이 시작되고 3주쯤부터 시작된 파업 물결은 무바라크 통치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고 독재자를 몰락시켰다. 그러나 그 물결은 멈추지 않았다. 사실 독재자 축출이라는 정치적 승리로 노동자 운동은 크게 고무됐고 전국에서 수많은 경제·정치 파업이 벌어졌다. 무바라크 몰락 이후 두 달 동안 일어난 파업 건수와 파업 참가 노동자 수가 2006~09년 파업 물결 때보다 훨씬 더 많았다. 2006~09년 파업 물결의 규모만 해도 현대 이집트 역사상 최대 규모였는데 말이다.
사실 무바라크 몰락 이후의 파업 물결은 그 이전 물결의 연장이자 심화였다. 투쟁의 열기 속에서 수십 개의 신생 독립 노조가 탄생했고 파업위원회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들이 등장했다. 파업은 한 산업에서 다른 산업으로, 화이트칼라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민간 부문을 휩쓸며 확산됐다. 운동의 요구 중에는 최저임금 같은 전국적 요구뿐 아니라 부패 척결 요구도 있었다. 일반화·급진화 수준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정치적 민주주의에 국한된 질서 있는 혁명,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과 온건한 이슬람주의자들이 주도하고 조종하는 민주화 이행, 노동계급과 빈민들이 수동적으로 지지하는 이행을 바랐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혁명 초기에는 공동의 목표가 주로 무바라크 퇴진과 의회 민주주의 확립이었으므로 이집트 국기가 잘 상징하듯이 초계급적 단결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가장 가난한 실직자든 가장 부유한 기업 경영자든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든 모두 자랑스럽게 국기를 흔들었다. 바리케이드에서 싸운 사람들이든 상황이 완전히 정리된 후 뒤늦게 나타난 사람들이든 이 혁명은 모두가 단결한 혁명, 즉 사회적 계급은 다르더라도 모든 이집트인이 독재에 항거한 혁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단결은 피상적이고 일시적이었다.
자유·사회정의·존엄 같은 언뜻 모호해 보이는 민주적 슬로건들은 계급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랐다. 노동자한테 자유는 투표의 자유, 표현의 자유만이 아니었다. 기아와 불안, 상시적인 실업의 위협에 시달리지 않을 자유도 의미했다. 사회정의는 평등과 부의 재분배, 임금 인상, 의료보험, 주택, 교육, 공공서비스를 의미했다. 존엄은 빈곤과 궁핍을 끝내는 것이어야 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은 당연히 이 슬로건들을 달리 이해했다. 자유는 서구식 의회 민주주의, 사회정의는 빈민의 생활 조건을 미약하나마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조차도 투자자들을 위축시켜서는 안 되고, 요구는 현실적이되 자본주의를 위협해서도 안 됐다. 존엄도 경찰력 남용에 반대하는 것일 뿐 사회문제와는 무관했다.
나머지 계층들은 이 슬로건들을 가면 갈수록 모호하게 해석했다. 무바라크가 퇴진하자 이런 차이들이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와 경제의 관계, 더 구체적으로는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 혁명의 관계라는 문제와 만나게 된다. 노동계급이 중요한 구실을 하는 민주주의 혁명 자체가 이미 암묵적으로 그리고 잠재적으로 사회 혁명이다. 혁명이 시작된 그 순간부터 혁명의 후반 국면이 될 미래의 계급투쟁이 이미 잠재해 있다. 이집트에서는 혁명이 야만적인 독재 정권뿐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도 반대해 일어났고 이미 몇 년 전부터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노동자 투쟁이 계속돼 왔으므로, 혁명이 달리 전개될 수 없었다. 동유럽의 “색깔 혁명”들과 비슷한 결과가 나타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5년 러시아 혁명을 분석하면서 혁명기에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이 상호작용하는 메커니즘을 다음과 같이 탁월하게 묘사했다.
운동은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그 역으로도 진행된다. 모든 중요한 정치적 대중 행동은 절정에 이르고 나면 일련의 경제적 대중 파업으로 귀결된다. … 정치투쟁이 새로 시작되고 새로운 승리를 거둘 때마다 경제투쟁의 외연적 가능성이 확대되고 처지 개선을 원하는 노동자들의 내적 욕구와 투쟁 정신도 강화되는 등 경제투쟁을 강력하게 자극한다. 정치적 행동의 물결이 일 때마다 기름진 퇴적물이 쌓이고 그 위에서 수많은 경제투쟁의 싹이 튼다. 정치투쟁이 일어나지 않을 때에도 노동자들의 투쟁 에너지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자본가들과 끊임없이 경제투쟁을 벌여야 하는 노동자들의 처지 때문이다.
정치적 요구와 경제적 요구의 이러한 상호작용이 이집트 혁명의 핵심 특징이다.
이집트에서 이 상호작용을 강화하는 요인은 국가기관, 국민민주당, 대기업들이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서로 깊이 유착돼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무바라크 퇴진 이후 혁명의 주요 슬로건으로 “체제 청산”이 등장했다. 국민민주당과 부패한 관료들을 모든 기관에서 완전히 추방해야 혁명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혁명 이후 거의 모든 주요 파업에서 등장한 요구가 국민민주당과 연관된 부패한 경영자를 해임하고 기소하라는 것이었다. 명백히 정치적인 이런 요구는 최저임금, 임금과 수당의 인상,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화, 노동조건 개선 등의 경제적 요구와 결합됐다.
1974년 포르투갈 혁명기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토니 클리프는 포르투갈 혁명을 심층 분석한 논문 ‘기로에 선 포르투갈’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네아멘투(청산)는 단지 보안경찰을 구속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청산이 효과적으로 철저하게 이뤄진다면 사실상 부르주아 국가구조가 무너질 것이다. 조합주의 국가는 사회생활의 모든 측면, 즉 은행, 교회, 학교, 대학, 사무실과 공장 경영진을 모두 통제한다. 따라서 완전한 청산은 이사회에서 말단 관리자의 이르는 모든 사회적 위계를 파괴한다.
따라서 1월 25일 시작된 (언뜻 보면 순전히 민주주의 정치혁명에 불과한) 이집트 혁명은 자본주의 사회의 기초 자체에 도전하는 혁명으로 발전할 수 있다.
높아지는 기대와 경제 위기
이집트 혁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이행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자극하는 또 다른 주요 요인은 노동자와 빈민의 높아진 기대와 이집트 자본주의의 심각한 위기 사이의 모순 심화다. 사람들은 임금 인상, 실업률 하락, 주거 환경 개선, 교육, 건강보험을 기대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의 테두리 안에서 이 모든 것은 악화할 예정이거나 이미 악화하고 있다.
이집트 경제는 혁명 전부터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러나 혁명 이후 상황은 더 나빠졌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물가 상승이다. 예를 들어, 2011년 4월 식품 가격은 전년도 같은 달보다 20퍼센트 상승했다. 리비아에서 일하던 이집트 노동자 수십만 명이 본국으로 귀환하면서 실업률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리비아에서 일하던 이집트 노동자는 1백50만 명이나 된다. 리비아 혁명과 내전으로 외화 수입의 원천 중 하나인 해외 이집트 노동자의 국내 송금이 크게 줄었다. 국내총생산의 11퍼센트를 차지하는 관광 수입도 크게 줄어, 이미 수백만 명이던 청년 실업자가 수십만 명 더 늘어났다.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정부는 외환 보유고를 풀어서 이집트파운드화의 평가절하를 막으려 했다. 외환 보유고는 지난 석 달 동안 3백40억 달러에서 2백80억 달러로 줄었다. 그러나 이집트파운드화의 가치는 여전히 떨어지고 있다. 더 장기적으로 보면 이집트파운드화에 대한 투기와 통화가치 폭락으로 외환 보유고는 빠르게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2011년도 재정 적자는 9퍼센트를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국내총생산은 1사분기에만 4.2퍼센트 감소했다.
따라서 이집트 자본주의는 머지않아 붕괴하든가 아니면 노동계급과 빈민한테 경제 위기의 대가를 떠넘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노동계급과 빈민들은 이미 반란을 일으켰고 그 반란은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수십 년 동안 신자유주의와 그 실패의 대가를 치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겪던 빈곤, 실업, 굴욕, 수치가 끝나기를 바란다.
장군들과 자본가들, 그리고 그들의 과도정부는 신자유주의뿐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구조 자체와 단절하지 않고는 노동자한테 상당한 양보를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보기에 이것은 불합리한 일일 뿐 아니라 자멸하는 짓이다. 그들은 체제를 구하려고, 그리고 그 대가를 가난한 민중이 치르게 하려고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다. 가난한 민중도 혁명을 구하려고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다.
다시 격렬한 충돌이 벌어질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세계 자본주의로의 통합
이집트 자본주의는 세계 자본주의에 통합된 일부다. 이집트 자본주의의 생존은 미국, 유럽연합, 걸프만 경제와 긴밀한 연관을 유지하는 데 달려 있다. 그래서 과도정부는 이 나라들의 정부에 원조를 요청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최고군사위원회와 과도정부가 옛 정권의 경제·외교 정책을 지속하겠다고 약속하자 미국, 유럽연합 그리고 그들의 금융기관인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은 발벗고 원조에 나섰다.
5월 26일과 27일(에삼 샤라프가 참석한) 열린 G8 정상회담에서는 이집트와 튀니지에 최대 2백억 달러를 제공하겠다는 발표가 있었다. 여기에 아랍 국가들의 지원까지 보태면 이집트는 머지않아 차관, 투자, 외국 정부와 국제 금융기관의 원조 명목으로 1백50억 달러의 금융 지원을 받을 듯하다. 그러나 이 돈에는 조건이 달려 있다. 금융 지원의 전제 조건은 사유화, 규제 완화, 해외투자 촉진 등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지속하는 것이다.
5월 24일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은 2년 동안 이집트에 45억 달러를 제공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이미 이러한 조건을 내걸었다. 국제통화기금은 “개혁이 금융 지원만큼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G8 정상회담에서 다음과 같은 이집트 지원 조건을 분명히 밝혔다.
높은 실업률을 낮추려면 경제성장 속도가 무척 빨라야 한다. … 성장률이 높아지면 투자가 확대되고 생산성도 향상될 것이다. 공공 투자, 예컨대 저발전된 농촌 지역의 사회기반시설과 서비스 질을 높이기 위한 투자를 약간 늘려야 할 수도 있지만, 핵심 구실은 해외직접투자를 포함한 민간 부문이 맡아야 한다. 따라서 정부 정책은 민간 부문이 번창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지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무바라크 퇴진 이후의 이집트에서 국제적 금융 개입의 주된 목적은 무바라크 정권 때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가속화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정책들 때문에 다수 대중이 궁핍해지고 극소수만이 엄청난 부를 차지하고 국가와 억만장자들 사이의 유착이 깊어지는데도 말이다.
바로 이러한 이집트에 맞서 우리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바로 이러한 이집트가 지금 다시 무늬만 약간 바뀐 채 우리에게 강요되고 있다.
제2의 이집트 혁명을 준비하자
이미 본 대로, 혁명기에는 정치적 요구와 경제적 요구가, 민주주의 혁명 국면과 사회 혁명 국면이 복잡하게 상호작용을 한다. 혁명의 이런 단계들 사이에 만리장성은 없다. 막 시작된 혁명의 주요 정치적·민주적 요구들의 성취는 이집트 노동계급의 대중적 참여로만 완성되고 유지될 수 있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혁명은 협소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요구를 뛰어넘어 사회적 요구(자본주의 틀 안에서, 그리고 자본주의의 끝없는 위기 상황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를 전면에 내세울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가 위협받게 되면 노동계급이나 빈민과 대립하는 여러 세력들이 모두 단합한다. 한편으로는 봉쇄 계획을 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혁명 음모를 꾸민다. 많은 이슬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노동계급과 빈민의 정치적 각성이 부를 위협이 장군들한테서 정치적·민주적 개혁을 얻어내는 속도가 더딘 것보다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민주주의 혁명을 진정으로 완성하려면 노동계급이 선두에 서서 빈농, 도시 빈민, 억압받는 사람들, 가난한 콥트교도, 누비아 족, 시나이 반도의 베두인 족을 이끌어야 한다. 그래야 혁명에 대한 봉쇄, 반동, 반혁명을 물리치고, 체제 전복을 완수할 새로운 항쟁을 준비하고, 구체제의 국가기구들을 분쇄해서 ‘청산’ 과정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노동계급이 빈농과 도시 빈민을 비롯한 모든 피억압 사회집단(옛 정권뿐 아니라 이른바 과도정부와 그 장군들한테도 억압받는)의 지지를 받아 정치 권력을 장악해서 “사회적 공화국”을 건설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러한 과제들의 달성은 미래의 봉기에서 필수적이지만 독립 노조와 민중위원회들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 혁명적 노동자당을 건설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당의 임무는 노동계급의 가장 선진적 부문들을 단결시키고 노동계급 중 미조직되고 고립된 부문들을 견인하는 것이다. 이 당은 “피억압자들의 호민관”이 돼서, 모든 착취와 억압의 피해자들을 설득해야 한다. 그들의 고통은 오직 노동계급의 지도 아래서만 진정으로 끝장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봉기에서 명확성과 정직성이 최고로 중요하다. 적은 우리를 상대로 악랄하게 싸울 것이다. 군대는 봉기 자체뿐 아니라 독립적인 노동자 조직의 흔적조차 말살하려 할 것이다. 따라서 다가올 전투에서 군 수뇌부를 폭로하고 고립시키고 궁극적으로 패배시키려면 사병들과 징집 장교들을 혁명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사활적이다.
적들은 조직적이다. 부르주아 언론 매체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다. 당원 수가 충분히 많고 혁명적 사상들을 전파하고 대중한테 혁명적 행동을 선동할 능력을 갖춘 혁명 정당이 조직돼 있어야 이 전투에서 승리를 바랄 수 있다.
이집트 혁명적 좌파의 현재 규모나 세력으로 앞서 말한 과제들을 실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주장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고 다가오는 투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항쟁 때 타흐리르 광장에 있었던 우리는 노동자들이 무바라크를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 파업을 기다리며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우리는 작업장의 지도적 활동가들한테 다가가 노동자들이 정권에 맞서 조직적·집단적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이집트와 아랍 세계의 혁명적 위기는 하도 심각해서(세계경제 위기 때문에 더 심각해졌다) 우리 적들은 가까운 미래에 위기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십중팔구 위기는 몇 달이 아니라 몇 년 동안 계속될 것이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진정으로 역사적인 기회를 얻었다. 우리가 혁명적 전략·전술이라는 핵심적 문제들을 바탕으로 그 기회를 제대로 이용한다면, 우리의 국제적인 혁명 전통의 성공과 실패에서 올바른 교훈을 얻는다면, 이집트와 국제 노동계급의 역사적 승리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승리와 패배를 가를 수 있는 또 다른 결정적 요인은 혁명적 국제주의 문제다. 세계 자본가 계급은 이집트 혁명을 봉쇄하고 질식시키려고 단결하고 조직한다. 그러나 세계 자본주의는 쉽게 끝나지 않을 장기적 위기에 빠져 있다. 전 세계 지배계급들은 위기의 대가를 노동계급한테 떠넘기려 한다. 이러한 책임 전가에 대한 저항이 세계적으로 확산·심화되고 있다. 예멘과 시리아의 혁명도 상상을 초월한 탄압을 받았지만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와 스페인의 대중 파업과 시위들은 이집트 혁명을 고무할 뿐 아니라 고무되기도 한다. 한 지역이나 국가에서 노동계급과 대중이 승리하면 나머지 지역도 엄청난 힘을 얻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혁명들과 운동들의 어느 정도 자발적인 상호작용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국제적 연대를 조직하고, 이 역사적 계기를 이용해 전 세계에서 우리의 조직을 건설해야 한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우리에게는 쟁취할 세계가 있다는 말이 실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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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ameh Naguib, ‘Unfinished Revolution — Egypt since the Fall of Mubarak’, International Socialist Review 79(September-October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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