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오늘의 위기와 저항
오늘날 중국의 저항 운동
2010년 말부터 시작해 2011년 말까지 지속되고 있는 아랍 혁명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줬다. 아랍 혁명이 튀니지를 넘어 이집트로 정신없이 확산되던 1월 초, 일부 자본가들은 중국을 떠올렸다. 막강해 보이던 아랍 독재자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또 다른 강력한 독재국가인 중국은 과연 안정적일지 걱정했다. 좌파라면 아랍 혁명이 또 다른 독재국가인 중국으로 확산되는 것을 쌍수를 들어 환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통일학연구소 한호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구 언론 매체들이 날조, 유포한 ‘재스민 혁명’이라는 말에 담겨진 또 다른 의미는 연쇄반응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순으로 ‘재스민 혁명’이 일어났으니, 머지않아 그 강력한 여파가 중동으로 번져 바레인, 예멘, 오만 등에서도 ‘재스민 혁명’이 일어날 것이며,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재스민 혁명’이 이란을 휩쓸고 마침내 중국에까지 밀려갈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 그러나 ‘재스민 혁명’의 연쇄반응에 대한 기대는 무지와 억측이 빚어낸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2 이것은 《포춘》 선정 5백대 기업 중 대다수가 중국에 진출해 있고, 2008년 세계경제 위기 발생 이후 중국이 세계경제의 회복에 기여한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꼴 보기 싫은 보수 언론들이 위선적으로 중국의 민주화를 논한다고 해서 좌파들이 중국의 민주화 투쟁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하거나 그것을 환영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게다가 한호석의 주장은 매우 피상적이다. 왜냐하면 주류 언론과 서방 정치인 들의 주장을 자세히 보면, 중국에서 혁명이 일어나기를 바라기보다는 중국이 불안정에 빠지는 것을 걱정하거나 아랍과의 차이를 앞세워 대중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을 부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령, 세계적인 기업주 신문 〈파이낸셜 타임스〉의 한 칼럼니스트는 ‘중국인들이 이집트 혁명에서 고무받지 않는 이유’라는 글을 썼다.3 라는 책을 낸 ‘중국 민주화 운동 전문가’ 앤드류 네이선은 최근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 인터뷰에서 이런 경향을 잘 보여 줬다.
기업주들만 이런 주장을 펴는 것은 아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중국학 연구자 사이에서도 중국 체제의 안정성을 강조하는 것이 유행했다. 이는 1989년 톈안먼 항쟁 이후 중국 공산당의 몰락 가능성 논의가 유행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예컨대 1989년 중국 공산당 최고위 관료들의 회의 기록을 편집해 《톈안먼 페이퍼》뉴욕 콜럼비아대학교 정치학 교수인 앤드류 네이선은 중국 권위주의 체제가 “놀랍도록 견고하다”고 말했다. “물론 이 체제는 영구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 체제는 약점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매우 탄탄하다. 공산당 정권에서 당장 큰 변화가 일어날 조짐을 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공산당 지도자들은 유연하고 역동적이고 똑똑해서 계속 나타나는 도전들에 성공적으로 대처했기 때문이다.” 최근 지도자들이 쫓겨난 중동 권위주의 정권과 달리, 중국 중앙정부는 국민들의 삶을 개선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고 네이선은 지적했다. “이런 설득을 가능케 했던 메커니즘으로는 지도자의 정기적 교체, 중간계급과 지식인의 포섭, 사회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간헐적 타협 등이 있다.” 네이선은 “현 중국 공산당 체제는 새로운 종류의 권위주의 정권으로, 나는 이와 비슷한 정권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5 공산당 독재에 항거한 이전 반란들의 실패라는 직접 경험에 바탕을 둔 이런 주장을 쉽게 기각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올해 혁명이 발생하기 이전 아랍 독재국가들에서도 비슷한 전망이 우세했던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단지 독재 체제의 유지에 이해관계를 가진 서방 정치인뿐 아니라 중동 전문가와 언론들도 대부분 이집트와 튀니지 독재 체제의 ‘안정성’을 강조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 본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이른바 공산당의 통치 능력에 압도된 이런 견해는 저명한 중국 반체제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2011년 초 아랍 혁명 이후 몰아친 중국 정부의 반체제 인사 탄압 물결 속에서 수감됐다가 풀려나면서 전 세계의 관심을 모은 저명한 예술가 아이웨이웨이는 중국에서 대규모 저항이 발생할 가능성을 묻는 한 잡지의 질문에 “1989년에 발생한 것 같은 시위가 다시 일어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고 답했다. 이집트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나 4·6 운동 같은 단체들은 무바라크 체제의 불안정성을 꿰뚫어 보고 혁명 이전부터 다양한 저항 운동들을 서로 연결하려고 노력했다. 국제 좌파 진영의 일각에서도 아랍 세계의 모순에 주목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해마다 열린 카이로 국제 반전 회의와 이집트 사회포럼은 아랍, 특히 이집트 운동과 국제 좌파가 서로 조우하는 소중한 기회였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에 바탕을 두고 아랍 세계의 모순을 분석했고, 머지않아 모순이 폭발할 가능성을 예측했다. 그리고 혁명 물결이 시작된 뒤에도 혁명의 성과와 전망을 가장 설득력 있게 분석했다.이 글의 목적은 아랍 혁명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참조해 중국에서도 격변이 일어날 만한 심각한 모순과 계급투쟁의 잠재력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아랍 혁명의 배경 — 신자유주의 개혁이 낳은 모순
7 따라서 뉴욕 월가 주코크 공원을 점거한 ‘월가를 점거하라’ 시위대가 이집트의 타흐리르 광장 점거 투쟁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집트 혁명가들도 뉴욕 ‘월가를 점거하라’ 참가자들에게 보낸 연대사에서 이렇게 화답했다. “우리는 많은 점에서 동일한 성격의 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호사가들이 ‘아랍의 봄’이라고 부른 것은 전 세계에서 벌어진 수많은 시위, 소요, 파업, 점거 운동 들의 연속입니다.” 8
아랍 혁명을 논의할 때 ‘아랍 특수론’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아랍 혁명은 근본적으로 신자유주의와 2008년 시작된 경제 위기 같은 자본주의의 모순에 맞선 투쟁이다. 이집트 혁명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 혁명적 사회주의자 단체RS의 지도자이고 카이로아메리칸대학교 사회학 교수인 사메 나기브는 이집트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아랍 혁명은 본질적으로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효과에 맞선 전 세계적 반란의 일부”라고 평가했다.물론 이런 보편성을 지적한다고 해서 아랍 혁명을 낳은 특수한 모순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아랍 혁명의 가장 중요한 배경은 국가자본주의에서 시장 자본주의로 급격히 전환한 것이 낳은 모순이었다. 1950년대 서방 제국주의의 식민·반식민 통치에서 독립한 이집트와 시리아 등 아랍 민족주의 정권들은 국가자본주의 발전을 추구했다. 그러나 국가자본주의 발전 방식이 점차 벽에 부딪치자 이 정권들은 1970년대 말부터 점진적으로 시장 개혁을 시작했고 1980년대 외채 위기를 겪은 뒤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장 개혁을 추진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는 모순되게도 시장의 힘이 미약한 곳에서 시장 메커니즘을 강제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주체는 국가였다. 이런 시장 개혁은 몇 가지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먼저, 국가 주도의 시장화는 국가 관료와 ‘민간’ 자본가들 사이에 대단히 밀접한 유착 관계 — 간단히 말해 부패 — 를 낳았다.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시장화는 정부 고위 관료와 언론들이 선전하는 것처럼 투명하고 중립적인 과정이 아니라 국가 관료가 특권층 — 신흥 자본가들 — 의 뒤를 봐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체제의 정당성 위기를 낳았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중동에서 신자유주의는 (추상적 자유시장 개념에 함축된) 경제와 정치의 분리가 아니라 그 둘의 융합으로 표현됐다. 이는 더는 국가자본주의가 아니었다. 이제 사회 최상층부 사람들은 연줄에 힘입어 엄청난 축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엘리트층의 그토록 노골적인 부패는 결과적으로 경제 사회적 불만들이 정권 맨 꼭대기까지 향하게 만들었다.
이런 정당성 위기는 시장 개혁을 도입한 모든 아랍 정권의 공통된 문제였다. 그러나 부족·가문이나 종파 간 경쟁, 탄압, 선별적 복지를 결합해 정권을 유지하는 걸프 지역 왕정들보다는 이집트, 튀니지, 시리아처럼 ‘매판 자본가’와 특권 지주와 제국주의에 맞선다는 명목으로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화해 온 아랍 민족주의 정권들이 더 심각했다.
10 예컨대 나세르 치하 이집트는 국영기업 노동자들에게 일자리와 최소한의 복지를 제공했고, 빈민들은 국가보조금 덕분에 저렴한 가격으로 생필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세르의 후임자인 사다트는 ‘인피타’(개방)라는 구실로 생필품 보조금을 축소했고, 사다트의 후임자인 무바라크는 대규모 사유화와 해고, 국영기업 노동자의 복지 제도 해체, 생필품 보조금 철폐, 역逆농지개혁 등을 추진했다. 11 튀니지에서도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에 시장 개혁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패배한 후 정부는 IMF 등 국제기구의 권고에 따라 개혁을 추진했고, 1990년대 농촌 빈곤율이 두 배나 상승했다. 12 실업, 특히 청년 실업은 반영구적 문제로 고착됐다. 데이비드 하비가 지적했듯이, 아랍 국가들을 포함해 시장 개혁을 시작한 대다수 제3세계 국가들에서는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성장률이 줄고 거듭 외채 위기를 겪는 등 상황이 악화됐다. 13
둘째, 시장 메커니즘이 기존 국가의 복지 제도와 공공서비스를 대체했지만 시장은 사라진 공공복지를 벌충하는 데 실패했다.14 또, 튀니지에서는 관광업에서 일자리가 늘어났지만 워낙 불안정한 탓에 높은 청년 실업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 15
이집트를 포함해 일부 아랍 경제는 1980년대 초 외채 위기를 겪은 후 세계 평균을 웃도는 성장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장 개혁의 효과가 아니라 외부적 요인 덕분이었다. 특히 대對중국 수출이 크게 늘고 국제 시장에서 값싸게 돈을 빌릴 수 있었던 2000년대 중반 이후 성장률이 높아졌다. 그러나 성장의 질은 매우 낮았다. 1981~2006년 이집트의 구매력 지수PPP는 네 배가 올랐지만, 실질임금은 하락했고 법정 최저임금은 전혀 인상되지 않았다.16 대통령직 승계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2000년대 중반 키파야로 상징되는 민주화 운동과 정부 간의 대립으로 시작됐지만, 나중에는 승계를 지지하는 무바라크 핵심 측근들과 이것이 낳을 불안정을 우려하는 미국 정부, 이집트의 다른 고위 관료들, 일부 자본가들 사이의 갈등으로 확산됐다. 그러나 부르주아들은 공개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정치 세력으로 결집하지 않았다. 비록 그들 중 극소수가 나중에 타흐리르 광장 점거에 지지를 보냈지만 말이다. 그들은 무바라크 퇴진 이후 이제 혁명이 끝났으니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가장 먼저 주장했다. 그들은 민주화 운동이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수준을 넘어 궁극적으로 자신들을 위협하는 사회적 투쟁으로 발전할까 봐 두려워했다.
셋째, 부패, 정당성 약화, 경제적 불안정은 정치적 분열과 위기를 낳았다. 이집트에서 이것은 무바라크가 아들인 가말 무바라크에게 대통령직을 승계하려는 시도를 놓고 불거졌다.넷째, 신자유주의 개혁이 낳은 정치적·경제적 모순과 갈등이 폭발하는 것을 억누르기 위해 대다수 아랍 국가는 사회운동과 야당을 탄압하는 등 권위주의적 통치를 지속했다. 물론 제 아무리 잔인한 정권이라도 탄압만으로 유지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일관된 민주화 개혁은 전혀 진척되지 않았다.
17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중동 분석가 앤 알렉산더가 영국의 반자본주의 계간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이 주최한 강연에서 지적했듯이, 시장화, 부패, 서방과의 타협은 노동자들에 대한 지배 체제의 헤게모니적 통제를 점점 약화시켰다. 18
다섯째, 모순이 존재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다양한 불만과 파편화된 운동들이 서로 결합해 혁명으로 승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아랍 나라들에서는 불만이 행동으로 표출될 수 있는 조건들이 형성됐다. 나세르 시대 이집트에서는 정부가 노동자들의 정치적 독립성을 박탈했지만 대신에 기초적 생활수준을 보장했고, 서방 열강과의 대립은 ‘민족 발전’을 위해 민중이 희생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사회에 강요하기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물론, 과거 좌파 운동의 패배 경험과 권위주의 국가의 오랜 탄압 탓에 이런 상황을 이용해 기층의 다양한 불만을 연결할 수 있는 독립적 정치 세력은 약했다. 야당은 계속 탄압받았고, 그 속에서 전국적인 조직을 유지한 대표적인 이슬람주의 조직들 —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과 튀니지의 알나하 — 은 끊임없이 동요했다. 이집트 노총은 국가 정책을 전달하는 컨베이어 벨트 구실을 했고, 튀니지 노조들은 지역 수준에서는 상당한 자율성과 전투성을 보존했지만 상층 지도자들은 어용이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이집트에서는 대략 2000년대부터 기층 운동이 성장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4·6 운동은 비록 극소수였지만, 기층 운동에 참여해 그것을 급진화시키려고 애썼고 종종 성과를 거뒀다. 그리고 한 부문에서 운동의 성장은 다른 운동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줬다. 2000년대 초반 부상한 반전 운동은 이런 점에서 특히 중요했다. 이집트 정부는 미국의 중동 정책에 협조했고,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고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봉쇄를 도왔다. 2000년대 초반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 2003년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은 정부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대규모 시위로 분출하는 계기가 됐고, 이후 민주화 운동인 키파야와 2007년 마할라 노동자 파업이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20 아랍 혁명은 그것이 현실화된 대표적 사례다.
마지막으로, 2008년 세계경제 위기는 아랍 세계의 모순을 더욱 심화시키는 구실을 했다. 단지 성장률만 하락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 양적완화 정책의 여파로 곡물가가 폭등하는 이중의 고통을 겪었고, 지배자들의 분열도 더욱 심각해졌다. 캘리니코스는 2008년 경제 위기가 발생했을 때 “장기화된 경제 위기는 부르주아 정치 구조에 압력을 가하며 그 속의 단층선을 드러낼 것”이라고 예측했는데,중국의 국가 주도 시장화와 그 모순
21 중국 경제는 국가자본주의 시기에나 시장 개혁 이후에나 아랍 나라들보다 훨씬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지금부터 살펴보겠지만 중국의 모순은 이 나라들과 상당히 공통점이 많다.
중국 현대사는 아랍 민족주의 정권들과 역사적 궤적이 비슷하다. 즉, 반식민지에서 벗어난 후진국 처지에서 국가 주도의 공업화를 추진했고 나중에 그 방식이 한계에 이르자 시장 개혁을 시작했다. 중국 고위 관료들은 이런 공통점을 잘 알고 있다. 관변연구소인 중국사회과학원은 동유럽과 소련 몰락 이후 중국에서 유사 사태의 발생을 방지할 목적으로 전 세계 장기 집권 사례들을 집중 연구했는데, 이때 이집트와 튀니지 정권이 중국과 비슷한 사례로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22 그리고 이집트나 튀니지와 마찬가지 이유로 — 강력한 국가와 시장의 부재 — 국가가 이 과정을 주도했다. 중국의 시장 개혁은 국가 주도 성격이 아랍 국가들보다 더 강했다. 1970년대 중국에는 민간 자본가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23 중국에서 온전한 의미의 민간(‘사영’) 자본가는 1990년대 공산당 관료들의 ‘발명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대형 민간 기업은 사유화된 국영기업인 경우가 많았고, 사유화된 기업의 자산 규모는 민간 기업의 두 배 이상이었다. 24 관료와 자본가는 긴밀히 결탁돼 있는데, 특히 기술 집약 공업에서는 정치적 연줄이 있는 자본가일수록 이윤도 더 많았다. 25 부동산 개발도 이런 결탁 관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분야다. 자본가들은 지방정부 고위 관료들의 지원을 받아 노동자와 농민 들한테 토지를 강제로 수용해 그 위에 고급 아파트를 건설하고 부동산 투기를 부채질했다. 관료와 자본가의 관계는 공산당의 구성을 봐도 잘 드러난다. 2003년 장쩌민이 ‘삼개 대표론’을 발표해 민간 자본가의 공산당 입당을 허용하기 전에도 이미 민간 자본가의 약 35퍼센트가 지역·성·전국 단위 정치협상위원회 위원이었다. 26 현재 자본가들은 인구 중에서 공산당원 비율이 가장 높은 집단이다. 2007년 기준으로 전체 인구 가운데 공산당원 비율은 평균 6퍼센트인데, 기업인들 중 공산당원의 비율은 38퍼센트나 된다. 27
중국 공산당 관료들은 1970년대 말부터 시장 개혁을 점진적으로 추진했다.28 그러나 일부 좌파의 생각과 달리 이것은 중국이 사익보다 공익이 우선인 체제임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사기업이든 국영 부문이든 사람보다 이윤을 우선시하기는 마찬가지다. 예컨대 중국석유공사는 국제 석유 가격이 오를 때 국내 판매 가격을 재빨리 올리고 국제 석유 가격이 내릴 때는 국내 가격을 인하하지 않거나 최대한 질질 끄는 전 세계 민간 석유 배급업체의 관행을 그대로 따라 공분을 샀다.
시장 개혁 과정에서 민간 영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커졌고 2003년 이후에는 민간 경제가 국영기업 규모를 넘어 섰다. 그러나 금융과 핵심 기간산업(국방, 전력, 석유, 화학, 통신, 항공, 선박, 자동차, 기술 개발 등)을 통제하는 덕분에 여전히 국가가 상당한 경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다.29 이제 공산당은 점점 중화민족주의에 호소하고 있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까지 제국주의 아래 중국이 당한 역사적 고통을 생각하면 민족주의의 영향력이 여전히 막강한 것은 크게 놀랍지 않다. 또, 미국이 지정학적으로 중국을 포위하려는 노력을 갈수록 노골화하고 있으므로 민족주의는 계속 호소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30 실제로 미국과 이스라엘에 굴복하는 모습을 숨길 수 없었던 이집트 지배자들과 달리 중국 공산당 관료들은 서방과의 갈등을 국내 통치에 좀더 능수능란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중국 정부는 2008년 올림픽 성화 봉송과 티베트 항쟁을 둘러싸고 터져 나온 민족주의적 물결을 이용했다.
시장 개혁은 자본축적의 기준에서 보면 대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공산당은 그것을 대중에게 정당화하는 데는 실패했다. 처음에 공산당 관료들은 자본가들과의 유착 관계를 될수록 숨기려 했다. 그러나 이윤 추구를 매개로 관료와 민간 자본가가 일상적으로 협력하는 추악한 모습을 감출 수는 없었다. 장쩌민의 ‘삼개 대표론’이나 후진타오의 ‘조화 사회’ 같은 이데올로기는 이런 결탁에 사회적 내용을 부여해 정당화하려는 것이었지만, 사회적 호응을 거의 얻지 못했다.31 여전히 사람들은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앞두고 실시되는 여론조사에서 부패를 중국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로 꼽는다. 최근 실시된 관영 〈런민일보〉의 여론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91퍼센트가 ‘모든 부유한 가문들은 정치적 연줄이 있다’고 답했다. 32 중국 정부 지도자들이 각종 문건과 연설에서 “우리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반부패 투쟁은 당의 생사가 걸린 문제다” 하고 33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공산당이 은근히 민족주의를 부추겨 사회적 모순을 감추는 데 성공했다고 보기 어렵다.사회적 모순의 증대
성장률로 보자면 중국의 시장 개혁은 튀니지나 이집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성공했다. 지난 30년 동안 중국의 연평균 성장률은 10퍼센트에 달했다. 또, 중국은 2010년에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부상했을 뿐 아니라, 독일을 제치고 세계 1위 수출 대국으로,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 제조업 국가로 부상했다. 중국의 부상은 19세기 말 미국과 독일의 부상에 견줄 만한 세계사적 사건이다.
34 의 저자인 프랑스 좌파 경제학자 제라르 뒤메닐과 도미니크 레비는 2011년에 출간한 《신자유주의의 위기》에서 이런 주장을 폈다. 즉, 미국에서는 1980년대 ‘볼커 반혁명’을 계기로 자본가가 투자보다는 화폐 자산 확보에 몰두하면서 총이윤 중 금융 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고, 자본축적률이 낮아지고, 일자리가 사라지고, 빈부격차가 크게 늘어난 것과 달리, 35 중국에서는 관리자 계급이 “국민경제 발전”을 위해 자본축적을 독려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뒤메닐과 레비는 자본주의의 미래를 전망할 때 중국 모델의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다 보니 중국의 급속한 발전에 큰 인상을 받은 일부 좌파들은 ‘파산한 영미식 시장 주도 자본주의’와 비교해 중국 경제가 질적으로 낫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현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다가올 수십 년 동안 중요한 문제는 [미국을 제외한] 다른 지역이 어떤 정치적 방향을 추구할 것이냐다. … 세계적 수준에서 신자유주의의 운명은 미국과 유럽의 손에만 달려 있지 않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과 유럽은 덜 중요해질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운명은 다른 지역의 도전자들이 어떤 길을 추구할 것인지에 달려 있다. 30년 동안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겪은 후 새로운 전망이 열리고 있다. 이런 역사적 추세에서 가장 중요한 열쇠는 중국과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정부]다.
심지어 일부 좌파 지식인들은 중국 경제가 자본주의와 달리 위기를 겪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레디앙〉에 중국 관련 기사를 종종 기고하는 김정호(북경대학교 박사과정)의 글은 이런 환상을 잘 보여 준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30여 년간의 고도성장을 보라. 이 기간 중국이 이룩한 연평균 9.8퍼센트 GDP 성장의 신화는 앞으로도 수십 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다. 사회주의 본질이 충분히 표현되고 있는 현실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세계적으로 볼 때 경제의 장기간 고속 성장을 경험한 나라들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일본의 경우 2차 대전 후 19년간 연평균 9.2퍼센트 성장을 하였으며, 싱가폴은 20년간 연평균 9.9퍼센트 성장을 이룩하였다. 홍콩의 경우 경제 고속 성장기는 21년간으로 연평균 8.7퍼센트이며, 대만은 26년간으로 연평균 9.5퍼센트이다. 그런데 이들 나라들은 대부분 인구나 국가 규모 면에서 중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다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경제성장의 특성 면에서 얼마만큼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인 주기적인 경제 위기에서 벗어났는지를 보여 주는 ‘안정성’ 면에서 볼 때 훨씬 중국에 못 미치며, 이 점에서 자본주의의 한계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이런 평가가 옳다면 중국이 비록 정치적으로는 아랍 국가들과 비슷한 문제 — 부패와 정당성 약화 — 를 안고 있을지라도, 사회적 모순은 훨씬 덜할 것이고 정치적 격변이 일어날 가능성도 훨씬 낮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1990년대 시장 개혁이 본격화하면서 도시 노동자들은 국영기업의 대대적 사유화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약 6천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운 좋게 일자리를 잃지 않았더라도 국영기업이 제공하던 복지 혜택들이 시장으로 넘어가면서 삶이 불안정해졌다. 명목 임금이 계속 올라도 이제는 주택을 포함해 많은 것을 시장에서 비싸게 구입해야 한다. 게다가 중국의 신좌파 학자 호흥풍이 지적했듯이, 중국 제조업 노동자들의 임금은 경쟁국인 타이완이나 한국, 심지어 동남아 나라들이 중국과 1인당 소득이 비슷했을 때와 비교해도 너무 낮다. 언론들은 중국 인건비가 폭발적으로 상승했다고 보도하지만, 식량 가격 앙등과 함께 생활 물가가 크게 오른 것을 감안하면 그런 보도는 과장이다.
38 많은 농민들이 저임금 일자리라도 찾으려고 도시로 나가야 했다. 이렇게 탄생한 ‘농민공’은 오늘날 중국 자본주의의 모순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집단이다. 마오주의 시대에 호구제는 농민들의 도시 이동을 엄격히 규제해 도시에 최대한의 자원을 집중하고자 도입됐는데, 그 뒤에 농민의 도시 이주는 허용하되 거주권은 주지 않는 방식으로 개정되면서 차별받는 저임금 노동인구가 대규모로 창출됐다.
농민들은 인민공사의 틀에서 벗어나면서 좀더 다양한 경제활동을 할 수 있게 됐고 1980년대 초반에는 소득이 크게 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앙정부의 지원금이 줄어들면서 지방정부들이 투자 자금을 확보하려고 농민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물리거나 토지를 적절한 보상 없이 몰수했다. 런민대학교의 조사 결과를 보면, 농촌 거주자 중 70퍼센트가 자신의 사회경제적 처지에 불만을 토로했는데, 제1 요인이 토지 몰수였다.39 같은 기간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노동자 수가 엄청나게 늘어난 것을 감안하면 이것은 충격적인 변화다. 결국 중국의 지니계수는 개방 이전 0.22에서 0.46으로 악화됐다. 40 현재 라틴아메리카를 제외하고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수준이다. 또, 투자가 돈이 되는 지역으로만 몰리면서 지역 간 격차는 매우 커졌다. 도저히 한 나라로 볼 수 없을 정도다. 2000년대 중반 연안 도시 상하이와 내지 귀주 사이의 평균 소득 격차는 열 배에 달했다. 41 한 쪽에서는 수백 만 명이 여전히 동굴 집에서 살고 농민 수천만 명이 1백 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농법으로 농사를 짓지만, 다른 한쪽에는 전 세계 주요 도시를 모방한 초현대식 주거 단지가 있고 애플의 첨단 제품들이 생산된다. 그래서 “중국에는 아프리카도 있고 유럽도 있다”는 말이 유행한다. 42
동시에 사회적 불평등이 크게 늘었다. 정부 공식 통계를 보면, 1997∼2007년 국내총생산에서 기업 소득이 차지하는 몫은 21.23퍼센트에서 31.29퍼센트로 늘었지만, 피고용인 소득이 차지하는 몫은 53.4퍼센트에서 39.74퍼센트로 줄었다.43 중국 정부는 2008년 말부터 ‘서민 소비 증가’를 명분으로 경기 부양 정책을 시작했지만 불평등이 완화되기는커녕 더욱 강화됐다. 2009년부터 고정자본 투자는 국내총생산의 70퍼센트에 육박했지만 소비 비중은 중국 역대 최저이자 세계 최저인 30퍼센트대로 줄었다. 44
중국 관리들은 개방 이후 수많은 사람이 빈곤층에서 벗어났다고 자랑하지만, 빈곤은 여전히 만연해 있다. 중국 총리 원자바오가 2009년에 인정했듯이, 중국 정부의 자체 기준이 아니라 세계은행의 빈곤 기준(하루 소득 미화 1.25달러)으로 보면 1억 5천 만 명이 극빈층에 속한다.45 그러나 《중국의 부상과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종말》의 저자인 중국의 신좌파 지식인 리민치는, 이런 목표가 달성되기 힘든 구조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런 사회적 모순을 잘 알고 있는 공산당 고위 관료들은 지난 몇 년 동안 수출이 아니라 내수를, 저임금 경제가 아니라 고임금 첨단 경제를, 부동산 투기가 아니라 부동산 시장 안정을 달성해야 한다고 거듭 주문했다.자본주의 세계시장에서 중국은 반주변부 국가에 불과하다. 세계 상품 생산 체제에서 중국 자본주의 기업들은 주로 저부가가치 혹은 중간 수준의 부가가치 산업에 포진해 있다. 중국 자본가계급이 얻을 수 있는 부가가치의 한계를 볼 때 이들은 세계적 독점 초국적 기업들처럼 초과이윤을 얻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계급 관계에서 사회 전반적인 타협을 추구할 여유도 없다. … 중국 자본가계급이 추구할 수 있는 전략 중 하나는 세계적 자본주의 노동분업 구조에서 중국의 지위를 높이기 위한 진지한 노력을 해 특정 세계 상품 사슬에서 기술적·금융적으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해 초국적 자본주의자들처럼 초과이윤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런 전략을 실현하려면 높은 수준의 국가 개입과 상당히 효과적인 국가 기구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국가는 자본가계급 전체의 집단적 이익을 대변하면서도 개별 자본가들에게 규율을 부과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중국에 그것을 가능케 할 정치적 조건이 존재하는지는 불확실하다.
47 — 중국의 저임금 경제를 고착화시키는 구실을 한다.
비록 ‘주변부/중심부’라는 세계체제론의 틀로 설명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지만, 리민치는 의미 있는 지적을 했다. 그의 말대로, 중국 자본주의에는 저임금·저기술 구조를 고착화시키고 중앙정부가 장하준식 ‘선별적 산업 정책’을 추진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있다. 예컨대 내수 확장은 인건비 상승을 의미하므로 이미 치열한 경쟁과 낮은 기술 수준 때문에 이윤율이 낮은 중국 하청 제조업체들은 쉽게 양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이들에 의존해 지역 경제를 운영하는 지역 관료들도 마찬가지다. 또, 중국의 저임금 경제 문제는 중국 자본주의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적 다국적기업들과 그들과 연관된 하청업체들이 — 중국 대외 수출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48 중앙정부의 계획으로도 2020년이 돼야 국내총생산의 2.5퍼센트 이상을 연구개발에 투입할 수 있을 텐데 이것은 현재의 선진국 수준을 간신히 따라잡는 것에 불과하다. 현재 중국의 연구개발비는 국내총생산의 1퍼센트를 약간 넘는 수준이다. 49 물론, 중국의 일부 초대형 기업들은 머지않아 세계 일류 기업으로 발돋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더라도 중국은 여전히 선진국과 비교해 극단적으로 불균등한 나라일 것이다.
중국 정부는 임금을 올려도 경쟁력이 타격을 입지 않는 방식, 즉 첨단 기술에 투자해 노동생산성을 대폭 향상시키는 방식을 자본가들이 채택하도록 유도해 이런 모순을 돌파하려 한다. 그러나 여전히 전 세계 핵심 산업의 주도권을 서방의 다국적기업들이 쥐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은 쉬운 과제가 아니다.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중국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변화의 조짐이 조금 보이지만 말이다.50 그나마 노동자들에게 조금 유리하게 바뀐 내용도 제대로 관철되지 못했다. 중앙정부는 노동자들이 이 법의 적용을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인 독립 노조를 결성할 권리는 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2008년 말부터 경제 위기의 효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자 경제 위기 때 엄격한 법 적용을 기대하지 말라고 노동자들을 타일렀다.
물론, 중국 정부가 전반적 구조조정을 밀어붙이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도 중앙정부는 몇 차례 ‘외부의 힘’을 빌려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1999년 WTO 가입 이후 지방정부들이 통제하는 국영기업들의 구조조정을 가속화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또, 2007년에는 저임금 공장에서 일하는 농민공들에게 조금 유리하도록 노동법을 제정해 임금 인상을 통한 저임금·저기술 사업장의 구조조정을 유도하려 했다. 그러나 이것을 일관되게 추진하기가 쉽지 않았다. 예컨대 노동법 개정은 국내외 자본가들과 지방정부들의 큰 반발을 샀고 그 결과 막상 통과된 법은 초안과 상당히 달랐다. 백승욱은 “노동계약법은 초안에서 최종 법안으로 가는 과정에서 기업에 좀더 많은 재량권을 부여하여 노동 관계를 시장에 맡기는 방향으로 조정되었다. 반면 노동자의 권익 면에서 추가된 부분은 선언적인 측면만이 두드러진다”고 지적했다.이것은 앞서 인용한 김정호의 주장과 달리 중국 경제가 자본주의의 “주기적인 경제 위기”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다. 사실, 중국은 마오주의 시대부터 거듭 경제 위기를 겪었고, 개혁·개방 이후에는 세계 자본주의의 등락과 함께 동요했다. 2008년 세계적 금융 위기가 실물 위기로 확산되자 중국 경제는 분기별 성장률이 무려 10퍼센트나 하락했는데, 이는 대외 의존도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최초로 개방 정책을 시작한 곳이자 수출 의존도가 가장 높은 광둥성은 2008년 세계적 위기에 즉각 영향을 받았다. 2008년 3사분기에만 기업 7천1백48곳이 문을 닫거나 이전했다. 광둥성 역사상 그토록 짧은 시간 안에 그토록 많은 기업이 문을 닫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4사분기에는 상황이 더 나빠졌다. 순식간에 공장 5만 곳이 문을 닫았다. 2008년에 문을 닫은 공장은 총 6만 2천 곳이었다.
52 중국 정부의 대규모 경기 부양 정책과 2009년부터 시작된 세계경제의 부분적 회복 덕분에 중국 경제성장률은 다시 10퍼센트를 육박하게 됐다. 그러나 그 결과 과잉생산과 부동산 거품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 2011년 말 현재 세계경제는 유로존 위기와 미국 경기 둔화 등 선진 경제의 위기를 중심으로 다시 요동치고 있다. 중국도 정부가 부동산 투기와 물가를 잡으려고 은행 대출 규제를 강화하면서 이미 성장률이 9퍼센트 이하로 하락하고 있다. 53 사회 안정에 필요한 적절한 수의 일자리를 만들려면 해마다 8∼9퍼센트씩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 중국의 상식인데 54 과연 그렇게 높은 성장률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점점 불확실해지고 있다. 다시 한 번 부양 정책을 편다면 과잉생산, 투기, 물가 인상을 다시 부추겨 또 다른 문제를 창출할 것이다. 최근 중국 자산 거품과 과잉 투자가 1980년대 말 일본과 비슷하거나 더 심각한 수준이라는 지적이 있는데, 55 이것이 사실이라면 중국 경제는 가까운 미래에 이른바 ‘경착륙’을 할 수도 있다.
중국의 저명한 친정부 경제학자 야인홍조차 “디커플링[탈동조화 현상 — M21]은 없었다”고 말했다.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면 지금까지 독재국가가 잘 통제해 온 지배자들 내 이견이 증폭되고 터져나올 수 있다. 앤드류 네이선은 경제 위기가 공산당 지배층에 미칠 영향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중국 공산당 정치 시스템은 높은 경제성장률 유지에 의존해 통치한다. 더구나, 지도자들이 매우 미묘하고 깨지기 쉬운 비공식 기구들에 의존해 서로 균형을 유지하기 때문에 [위기가 제기하는] 도전에 끊임없이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그랬듯이 경제 위기로 지배층 내 분열이 심화되면 대규모 기층 투쟁의 기회가 열릴 수 있다.
중국 자본가들
공산당 관료들의 분열이 가시화되면 중국의 신흥 부르주아들은 민주적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세력이 될까? 고전적 자유주의나 신자유주의 이론에 따르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중국의 시장 개혁이 크게 성공했기 때문에 중국 기업가들이 이제 정실 자본주의보다는 국가로부터 독립해 자유롭게 사업을 하고 싶어 한다고 주장한다.
57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중국 자본가 표본 집단을 대상으로 몇 차례 면담 조사를 한 브루스 딕슨과 58 칼리 차이의 59 연구 결과를 봐도 비슷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봤듯이 공산당 관료와 자본가들은 종종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결합돼 있다. 물론 이것을 너무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흔히 중국에서 ‘자본가’로 분류되는 집단에는 7명 미만을 고용하는 ‘개체호’부터 다국적 소매 기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가, 아이패드와 아이폰을 만드는 수만 명 규모의 다국적기업 소유주까지 포함된다. 이들이 모두 관료의 창조물인 것도, 관료로부터 똑같은 특혜를 얻는 것도 아니다. 상대적으로 관료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지 못한 집단들은 ‘큰 기업만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 쉽다’거나, ‘관료들에게 계속 돈을 찔러줘야 하는 것이 골치 아프다’거나, ‘관료들의 후원을 받는 국영기업과 경쟁하기 힘들다’ 등의 불만을 토로한다. 실제로 최근 원저우 중소 자본가들의 도산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많은 중소 자본가들이 국영은행에서 자금을 빌리지 못해 고리대업자들에게서 돈을 빌렸다가 세계시장의 위축으로 수출이 둔화하면서 빚을 갚지 못해 고통받고 있다. 또, 2011년 10월 중순 광둥성 후저우에서 농촌 출신 소자본가들이 세금 인상에 항의하며 지역 관리들과 무력 충돌을 불사한 것도 둘 사이의 갈등을 보여 준 사례다.60 그들은 일당독재 체제 내에서 선거를 도입하는 방식의 ‘민주 개혁’을 바라지만, 평범한 노동자 민중이 세력화해 정치적 의견을 표현하는 체제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들은 “국가에 대한 의존과 하층계급에 대한 두려움”을 보여 준다. 61
그러나 불만과 갈등의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조사 결과를 보면, 기업가들은 대부분 현재 공산당 통치를 적극 지지하거나 최소한 용인한다. 물론 중국 기업가들의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은 이데올로기와는 거의 상관없다. 자본가들은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경멸과 두려움이 있고, 국가가 자본의 이익을 위해 평범한 사람들의 저항을 억눌러 주기를 바란다. 중국사회과학원이 광저우와 원저우의 민간 기업인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70퍼센트가 시위와 청원 권리를 보장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들은 시위와 청원이 ‘사회 안정’을 해친다고 답변했다. 또, 베이징, 상하이, 관저우, 난징, 우한 등 주요 대도시 자본가들도 대부분 정치 변화보다 사회 안정과 현상 유지를 선호한다고 답했다.공산당 통치가 더는 이윤 추구를 위한 사회적 안정을 보장하지 못할 정도로 위기에 빠진다면 일부 자본가들은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을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 그들은 민주주의를 확대하기보다는 민주화 투쟁을 억누르거나 제한하려 할 것이다.
반체제 세력
62 특히, 중국 지배자들은 1989년 톈안먼 항쟁과 소련·동유럽 스탈린주의 정권의 몰락을 겪은 후 최소한의 야당 활동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방향을 굳혔다. “노조, 독립적 교회[종교 조직], 기타 시민사회단체의 독립성을 조금이라도 허용하는 것은 정치적 반대파에게 힘을 주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63
중국 정부는 독립적인 정치 조직이나 운동을 강력하게 탄압한다. 공산당 이외의 단체들은 모조리 관변 어용단체다. 중국노총(중화총공련)은 서류상으로는 조합원 2억3천만 명을 거느린 세계 최대 노총이지만 현실은 순전히 어용이다. 중국노총 헌장에는 “기업이나 국가기구에서 작업 중단이나 태업이 발생하면 노조는 … 기업과 국가기구를 도와 문제를 해결해 정상적 생산 질서와 기타 업무를 회복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는 조항이 있다.64 그러나 혹독한 탄압으로 독립 조직이 파괴되고 주요 활동가들의 수감과 망명이 이어졌지만, 시장 개혁 이후 공산당의 일상적 통제 기구가 이완되고, 이데올로기적 통제가 약화되고, 사회 이동성이 증가한 덕분에 비판적인 사상과 활동이 움틀 공간이 완전히 폐쇄되지는 않았다. 공산당 관료들도 불만이 표현될 작은 공간을 열어 두는 것이 유용하다고 판단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공간들은 소규모로 파편화돼 있고 국가가 철저하게 감시하지만 말이다. 가장 흔한 형태는 특정한 사상을 대표하는 잡지나 서점 등을 중심으로 느슨하게 조직된 경우다.
그래서 정치 강령을 두고 대중을 조직화하려는 시도는 모두 철저히 탄압받았다. 예컨대 1990년대 말 몇몇 활동가들이 사회민주주의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중국민주당을 결성하려 하고 이 준비 모임에 수백 명이 참가하자 정부는 이들을 간첩으로 몰아 조직을 철저히 파괴했다.65 이것은 국영 부문 노동자들을 더 열악한 상황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이런 사상적 경향은 흔히 ‘자유주의자’와 ‘신좌파’로 분류된다. 다른 조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1990년대 말부터 중국 시장 개혁과 정치 개혁의 방향을 놓고 주로 대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 진영 내에도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차이들이 있다. ‘자유주의자’ 진영을 보더라도, 영향력 있는 자유주의 경제 신문인 〈차이신〉은 관치 경제, 비효율, 부패를 근거로 현 정부를 비판하면서도 일당독재의 종식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류샤오보와 ‘88선언’으로 유명해진 자유주의 반체제 지식인들은 일당독재 해체를 요구한다. 또, 자유주의 반체제 지식인들은 시장 개혁의 확대를 요구하는 동시에 노동자·농민의 민주적 결사 권리를 옹호한다. 공산당은 자유주의 반체제 지식인들을 일상적으로 탄압한다. 전 세계 진보진영이 류샤오보처럼 탄압받는 자유주의 지식인을 방어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들이 요구하는 민주적 권리 확대는 중국의 평범한 노동자와 농민 들에게도 소중한 권리다. 그럼에도 반체제 자유주의자들의 모순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유명한 ‘88선언’에서 국가가 경제 영역에서 대대적으로 후퇴할 것, 즉 대규모 사유화를 주장했는데,66 오히려 신좌파들의 두드러진 공통점은 ‘국가의 역할’ 강화를 주장하는 것이다. 신좌파들은 국가가 시장을 통제하고 대중에게 복지를 제공하고 세계 시장에서 독립된 국가 발전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관점은 ‘외부의 적’(미국식 신자유주의, 서방 제국주의, 그것의 사주를 받았다고 근거 없이 의심하는 신장과 티베트의 소수민족 반란)에 반대해 현 정부를 옹호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종종 국가의 탄압을 받고 숱한 쟁점에서 정부와 충돌하면서도 말이다. 또, 신좌파들은 종종 민족주의 정서를 매우 강력하게 표현한다.
반대로, 중국 신좌파들은 1990년대 대대적인 시장화 정책(국영기업 사유화, WTO 가입 등)의 부정적 충격에 반발하는 등 주로 경제 정책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들은 마오주의 시대나 ‘그 시대의 문제의식’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 내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신좌파 진영도 모두 반시장적 마오주의인 것은 아니다. 신좌파에 속한 꽤 많은 인사들이 시장 개혁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주로 그것의 부작용만을 비판한다. 심지어 대표적인 신좌파 지식인 추이즈위안은 중국의 WTO 가입을 반대하지 않았다.67 저자인 신좌파 경제학자 한더치앙이 2005년에 WTO 반대 국제행동의 일환으로 홍콩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중국]노동자 투쟁이 커지면 사회 혼란을 낳기 때문에 지지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68 국제적으로 신좌파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자리잡은 왕후이가 국영 부문 노동자들이 ‘부당한 사유화’에 맞서 저항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것은 오히려 상당히 예외적인 태도다. 그러나 왕후이도 중국 민중과 노동계급의 투쟁에 중국 사회를 변화시킬 전략적 중요성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69 심지어 신좌파들은 위로부터의 개혁을 선호한 나머지 충칭 공산당 서기장 보시라이의 ‘개혁’에 열광하기도 했다.
신좌파들은 강제 토지 수용, 사유화, 저임금과 노동권 무시 등 시장화가 낳은 각종 문제들을 기층 투쟁보다는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이것이 정부의 검열을 의식한 결과인지 본심인지 종종 논쟁이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위로부터의 개혁이 신좌파의 공통된 입장으로 굳어져 가는 듯하다. 이것을 보여 주는 악명 높은 사례는 《13억의 충돌》의70 그러나 신좌파 사상가들이 종종 보여 주는 세계 자본주의와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보시라이의 ‘개혁’에 적용했다면 이것이 포퓰리즘적 ‘쇼’에 가깝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충칭이 부동산 투기의 중심지이고 깡패들이 설치는 것은 국영 부동산 개발회사가 투기를 조장하고 깡패들의 뒤를 봐주기 때문이다. 보시라이는 부동산과 건설업 임금 체불이라는 지역 문제조차 근본적으로 개선하지 못했다. 또, 독립 노조 결성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처럼 그는 이윤 논리와 독재국가가 밀접하게 결합된 구조에 도전하지 않는다.
보시라이가 충칭의 악명 높은 부동산 깡패들을 상대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농민공의 체불임금을 받아주겠다며 공장에 경찰 특공대를 출동시킨 일 등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신좌파가 보시라이에게 열광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마오쩌둥의 유산을 부활시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오쩌둥 시대의 노래를 학교에서 강제로 부르게 하는 등 몇 가지 상징적인 조처를 빼면, 보시라이의 실천은 어느 시대의 마오주의와도 닮지 않았다. 그는 1930년대 마오쩌둥처럼 농민들의 투쟁을 조직하지도, 1950년대 이후 마오쩌둥처럼 민간 자본을 억누르고 국가자본주의를 강화하지도, 문화혁명 시대 마오쩌둥처럼 정적들을 제거하려고 대중운동에 호소하지도 않았다. 물론 신좌파들의 더 큰 문제는 가짜 마오주의에 현혹되는 것이 아니라 마오주의 시대에 환상을 품는 것이다.
71 중국 NGO들은 대부분 정부가 시장 개혁 과정에서 방기한 도시와 농촌의 공공서비스를 벌충하는 구실을 한다. 중국 정부가 NGO들을 용인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NGO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NGO들도 단체마다 성격 차가 매우 크다. 환경과 노동 관련 NGO들은 기층 저항과 연관 맺는 경우가 꽤 있다. 예컨대 선전 같은 연안 수출 단지의 노동 관련 NGO들은 고용주에 맞서 노동자 편에 서는 경우가 많다. 2007년 노동법 개정 과정에서 선전 지역 NGO들은 농민공들에게 새 노동법의 내용을 알리는 활동을 했다. 72 이 과정에서 NGO 활동가 한 명은 앙심을 품은 사장이 고용한 깡패의 공격으로 한쪽 다리를 잃을 뻔했다. 73 또, 환경 NGO들은 급증하는 대형 환경오염 사건에서 지방정부와 기업들을 상대로 한 주민들의 소송을 돕는다. 이런 NGO들은 민중 저항 운동의 중요한 일부다.
현재 중국에는 공산당으로부터 (반)독립적인 단체들도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지난 15년 동안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NGO들이다. 중국에서 NGO들은 의무적으로 정부에 등록해야 하는데, 2000년대 후반 대략 35만 개의 NGO가 등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등록하지 않고 활동하는 단체들을 포함하면 NGO가 3백만 개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다.74 그럼에도 중국 NGO들은 국가의 감시를 받고 종종 괴롭힘을 당한다. 2004년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 이른바 ‘색깔 혁명’이 뜨거울 때 중국 정부는 NGO들을 대대적으로 단속했다. 75
그러나 이렇게 용감한 활동을 하면서도 NGO들은 투쟁에 모순된 태도를 보인다. 중국 정부의 ‘법치’ 계획 — 법을 통해서 사회운동을 통제하려는 정책 — 에 찬동하면서 노동자들의 불만을 투쟁이 아니라 노동부 중재나 재판을 통해서 처리하도록 인도하고 설득하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NGO들을 지원하는 기업, 해외 NGO 단체, 서구의 대형 노조와 국제 노조연맹들은 중국 NGO들에게 그런 활동만 하라고 요구한다.76 지하 교회들은 1990년대 말의 파룬궁과 달리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지는 않았지만 정부와 갈등이 깊어지면 모종의 행동을 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특정 이데올로기나 정치색은 없지만 정부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이유만으로 탄압받는 단체들이 있다. 1990년대 말 교세를 확장했던 파룬궁이 대표적이다. 또, 정부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허가 없이 매주 예배를 보는 이른바 ‘지하 교회’들도 있다.77 중국 지배자들은 권위주의 통치 아래 대중의 지지를 받는 믿을 만한 협력자를 찾는 모순된 목표를 추진해 왔는데, 아직까지는 성공하지 못했다. 정치적·사회적 모순에 항의하는 기층 저항은 갈수록 성장하고 있는데 말이다.
공산당 관료들의 처지에서 독립적인 조직화 움직임을 막는 것은 체제에 도전하는 운동의 부상을 막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고 지금까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상황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즉, 분노가 거대한 운동으로 분출했을 때 그것을 중재할 매개자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독재국가들에서 여러 차례 나타난 현상이다. 중국에서도 지역 수준에서 큰 저항이 발생했을 때 정부가 협상 대표를 찾지 못해 사태를 조기에 매듭짓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최근 중국 정부는 조심스럽게 상시적 중재자를 만들려고 시도했다. 도시에서는 국내외 민간 기업에 중국노총 지부를 건설하고, 농촌에서는 촌락 선거를 실시한 것이다. 2000년대 중반 노조 지부 건설을 둘러싸고 노총 대표와 월마트가 티격태격 싸운 것이나, 일부 지역에서 농민 대표들이 전인대 지역 대표로 선출되면서 화제가 된 것은 바로 이런 움직임 속에서였다. 그러나 기업과 국가 활동을 보조한다는 중국노총의 어용적 성격은 변함이 없고, 농민 대표들에게는 실질적 권한이 없다. 중국노총 부위원장은 2011년 중국에 진출한 《포춘》 선정 5백대 기업 중 95퍼센트와 단체 협약을 체결하는 것이 목표라고 발표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언제나 고용주와 대립하는 서구 노조들과 달리, 중국 노조들은 기업의 발전을 촉진하고 건전한 노사관계를 유지하는 의무를 준수할 것입니다.”저항의 폭발적 성장
78 〈차이나 레이버 불리틴〉(중국노동통신)은 2007∼08년 중국 노동운동을 다룬 보고서에서 최근 저항 운동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본격적인 시장 개혁이 진행된 1990년대 중반부터 중국에서는 시장 개혁이 낳은 폐해에 항의하는 투쟁이 활발해졌고, 2000년대부터는 훨씬 더 뚜렷하게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것은 중국 정부의 ‘집단 돌발 사건’ 통계를 봐도 알 수 있다. ‘집단 돌발 사건’은 2003년 3만 건에서 2005년 무려 8만 7천 건으로 증가했다. 이런 통계 자체가 저항을 고무하는 효과를 낳을까 봐 두려웠는지 중국 정부는 2005년 이후 아예 통계를 발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사건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통계를 쉽게 구할 수 있다. 홍콩 잡지 《청밍》은 중국 공산당 고위 관료를 인용해 2008년 집단 사건의 발생 횟수가 12만 7천 건이라고 보도했다. 2005년보다 50퍼센트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보고서가 분석한 시기 동안에는 눈에 띄는 대형 군중 행동들이 상당히 많이 발생했다. 예컨대 귀주의 웡안에서는 고위 관료가 자기 장남이 15세 소녀를 살해한 사실을 은폐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주민 수천 명이 소요를 일으키면서 경찰서에 불을 지르고 경찰차를 파괴했다. 베이징 올림픽 개막을 불과 한 달 앞두고 발생한 이 사건은 대다수 사람들과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사건이 어떻게 삽시간에 수천 명, 심지어 수만 명을 결집시키는 대규모 저항을 초래할 수 있는지 보여 줬다. 사람들은 평소 쌓인 울분을 지역 정부와 경찰을 상대로 터뜨렸던 것이다. 이 사건에서 대다수 참가자는 소요를 촉발한 사건과 직접적으로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또, 중국의 한 지식인은 최근 어떤 집단의 저항이 급성장하고 있는지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 고위 관료와 결탁한 개발업자들에게 적절한 보상금을 받지 못하고 자기 집에서 쫓겨난 도시 거주민들.
- 관료들과 기업가들의 토지 강탈과 환경 파괴에 항의하는 농민들.
- 등록금 폭등과, 정부와 대학 당국의 약속과는 달리 빚을 내 대학을 졸업해도 좋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것에 분노한 대학생들.
- 부동산업자의 약속과 달리 입주 주택이 부실하거나 공공서비스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것에 항의하는 주택 소유자들.
- 노동권 보장을 요구하는 특정 업종의 종사자들로, 특히 택시 기사, 교사, 세발자전거 기사, 상인 등. 또, 특정 법규들에 권익을 침해당한 사람들.
- 공산당의 권력 독점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도전하는 파룬궁 회원과 기타 정치적 반대파들.
- 사유화 과정에서 퇴직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해고당한 노동자들과 설사 고용이 유지됐더라도 임금이 깎이고 노동조건이 불안정해진 국영기업과 집체 소유 기업 노동자들. - 임금 체불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항의하는 ‘농민공’[농촌 출신 도시 이주노동자].
2008∼09년 티베트와 신장에서 발생한 소수민족 반란의 규모와 파장을 생각하면 이 목록에 ‘중국 정부의 점령과 차별에 항의하는 소수민족’이 추가돼야 할 것이다. 소수민족 문제는 국가자본주의에서 시장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낳은 모순과 동떨어진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의 식민지 점령에 대한 분노가 소수민족 반란의 일차적 원인이지만, 소수민족 지역의 시장화가 그들의 삶에 미친 영향도 반란을 낳은 중요한 배경이었다. ‘공망 법률연구센터公盟法律研究中心’는 2008년 티베트 ‘3·14 사건’의 배경을 다룬 보고서에서 이 점을 잘 지적했다.
- [3·14 사건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개혁·개방이 티베트에 낳은 변화다. 정부가 그렇게 많이 지원했는데 무지한 티베트인들이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렀다는 평가는 개혁·개방이 티베트 지역에 가져다 준 모순을 보지 못한 것이다.
- 이 시기 정부의 티베트 정책은 문화대혁명 때의 실수를 만회하고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시장화를 확대하고, 종교 활동 통제를 일부 해제하는 것이었다.
- 정부는 언제나 정치적 안정을 최우선으로 삼았으므로 이른바 ‘발전’이란 것은 한족 간부와 이주민들이 주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 영역의 확대는 소수의 수혜자와 다수의 낙오자 간 모순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 [티베트의 수도] 라싸는 전시용 모델 도시이자 초현대식 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 티베트인들이 살고 있는 농촌 지역은 개발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오히려 시장화에 따라 외부 경쟁에 노출되면서 전통적 수공업 생산이 붕괴하고 농경과 목축 비용이 상승하면서 많은 티베트인들의 삶이 더 어려워졌다. 중앙 정부의 지원금은 거의 모두 도시 개발에 사용되고 있어서 대다수 티베트인들은 혜택을 누리지 못할 뿐더러, 발달한 라싸에서 좋은 일자리와 지원금을 한족 간부와 이주민이 독식하는 것을 보면서 박탈감만 커졌다.
위에서 나열한 모든 불만이 항상 집단적 저항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분노를 집단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2000년대 고도성장과 함께 빠르게 성장한 대규모 환경오염 반대 시위를 보자. 2006년 중국 환경부의 한 고위 관료는 2005년에 환경 파괴에 항의하는 시위가 매주 1천 건 발생했다고 밝혀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놨다. 현재 중국에서 강 오염 때문에 3억 명이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하고, 전 세계에서 공기 오염이 가장 심한 도시 20곳 중 16곳이 중국에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통계가 놀랍지만은 않다. 매주 1천 건 발생했다는 환경오염 반대 시위들 가운데 어떤 것은 거의 반란 수준이었다.
82 2009년 8월 17일 산시성 펑샹에서는 아동 6백여 명이 중금속에 중독되자 마을 주민 1천 명이 오염 성분을 배출한 인근 제련소를 습격했다. 소요 진압 경찰이 출동하자 주민들은 투석전을 벌이며 강력히 저항했다. 주민 투쟁의 압력을 받은 법원은 환경파괴범에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했다. 83 또, 2009년 9월 1일 푸잔성 촨저우에서는 석유 공장 폐수로 암 발병율이 높아진 것에 항의해 주민 1만 명이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소요 진압 경찰 2천 명에 맞서 몇 시간 동안 시가전을 벌였다. 84 2011년 8월 말 다롄에서는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환경오염 반대 시위이자 아마도 1989년 톈안먼 항쟁 이후 가장 규모가 큰 시위가 발생했다. 다롄 주거지 근처의 화학 공장에서 강으로 배출된 유독 물질이 태풍과 함께 주거 지역을 덮칠 뻔했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위가 시작됐다. 분노한 주민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이 공장 이전을 요구했고, 시위 규모에 놀란 지방정부는 즉시 공장 운영을 중단시켰다. 중국 관영 언론은 이 투쟁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지만 이 소식은 다른 곳으로 금세 전파됐다.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는 이 역사적인 투쟁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2009년 8월 초 후난성 전토우 화학 공장이 샹 강江에 카드뮴 등 독성 폐기물을 버려 앞으로 60년간 농사를 지을 수 없을 정도로 물과 토양이 오염되자 전토우 마을 주민 수천 명이 대책을 요구하며 지방정부 청사를 습격했다.관영 언론들은 수천 명이 시위를 벌였다고 보도했지만 온라인과 인근 주민들은 수십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고 증언했다. 다롄 광장 남쪽에 있는 술집인 ‘노아의 방주’의 한 직원은 시위 시작 한참 전부터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었다고 말했다. “오전 11시 직전에 갔을 때 이미 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참가자는 계속 늘었습니다.” …
[시 정부가 굴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29세 사무노동자는 “우리가 해냈습니다! 저와 함께 참가한 사람들이 자랑스럽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녀는 이날 시위가 오염 가능성을 우려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인 자발적 시위였다고 말했다. 지난주 태풍 무이파가 제방을 무너뜨렸을 때 [화학 공장에서] 인구 6백만 명의 도시 다롄으로 유독 물질이 새지 않은 것은 운이 좋아서였다. “저는 시위가 있다는 소식을 직장 동료가 보낸 MSN 문자 메시지를 보고 알게 됐습니다. 저는 우리 생명이 걸린 문제인 것을 알기 때문에 친구들과 함께 집회에 왔습니다. 이날 시위는 제 일생을 바꿀 경험이 될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시위하는 모습을 텔레비전 국제 뉴스에서만 봤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그 일부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 시위 참가자들의 분노는 지방정부를 향했다. 지방정부가 환경 평가를 받기도 전에 이 문제투성이 공장의 운영을 불법적으로 허락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사람들은 더는 지방정부를 신뢰하지 않게 됐다. 그래서 시위대는 이날 일요일 아침, 시 정부 청사 앞의 인민광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광장에서 대형 현수막을 내걸고 ‘독극물 공장, 다롄에서 꺼져라’, ‘공장 운영을 중단하고 아름다운 도시를 돌려 달라’는 구호를 외쳤다.
86 요컨대,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아랍 혁명의 배경으로 지적한 정치적 메커니즘이 중국에서도 이미 소규모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위들은 두 가지 중요한 점을 보여 준다. 첫째, 중국에서 ‘저항 문화’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시위 참가를 호소하는 문자를 보내거나, 사용자가 3억 명에 이르는 중국판 페이스북 ‘웨이보’에 시위 소식과 사진을 올리거나, 직장이나 학교 동료들과 시위에 관해 말하는 것은 더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둘째, 개별 기업이나 특정 쟁점에 대한 불만이 순식간에 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연결되는 경향이다. 아직 이것은 주로 지방정부를 향하고 있지만 불만이 정치 투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 준다. 국가가 여전히 시장화를 주도하고 있고, 정부가 기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저항이 시작되면 정부가 즉각 무력 진압에 나서는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다양한 불만이 정부를 향한 투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예컨대 1990년대 사유화 움직임 속에서 정부가 교육의 효율성 증대를 빌미로 고등교육을 상품화하고 대학 설립을 자유화한 결과 대학 졸업증의 가치가 차등화됐는데, 2009년 이에 항의하는 분교 학생들이 벌인 대규모 시위는 대학 당국에 항의하는 수준을 넘어 순식간에 정부를 표적으로 삼았다.노동자 운동의 구실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독재국가에 맞서 승리를 쟁취하려면 강력한 사회적 힘이 필요하다. 마르크스부터 트로츠키까지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언제나 명쾌했다. 자본가를 위해 이윤을 창출하는 집단인 노동자 계급이 민주주의 투쟁에서 중심적 구실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노동계급 운동의 패배 경험과 스탈린주의 정치의 파산으로 노동계급 중심성은 오랫동안 설득력 없는 주장으로 취급받았다. 아랍 혁명에서도 노동계급보다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의 구실이 더 주목받았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무바라크 타도라는 승리를 쟁취한 결정적 계기는 노동계급이 파업을 벌이면서 혁명 운동에 동참한 것이었다. 2월 13일 이집트 최고군사위원회가 무바라크의 사임을 요구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2월 초부터 노동계급이 대중 시위에서 힘을 받아 계급적 요구와 함께 무바라크 하야를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87 〈차이나 레이버 불리틴〉은 2008년 경제 위기 후 중국 노동자 운동을 다룬 최신 보고서에서 이 시기의 특징 중 하나로 파업의 집중을 지적했다. “파업들은 특정 산업과 지역에 몰리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2010년 5월 17일에서 7월 16일까지 두 달 동안 주강 삼각주 지역에서만 자동차 부품 납품 업체 20여 곳에서 연달아 파업이 일어났다. 지난 3년 동안 다른 지역에서는 운수·교통, 환경 미화 노동자들이 비슷한 움직임을 보였다.” 88
중국 노동계급의 잠재력은 이집트 노동계급보다 결코 작지 않다. 《포춘》 선정 5백대 기업과 그 하청 공장들이 수출 공업 단지에 빽빽이 밀집해 있는 중국에서 노동자 파업이 이집트나 튀니지보다 덜 효과적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있는가? 광둥성에서만 중국 수출입의 35퍼센트가 처리된다. 광둥성과 양쯔강 유역에서는 중국 총수출의 무려 40퍼센트를 차지하는 전자제품들이 생산된다.89 그러나 공산당 체제에 비판적인 많은 중국 지식인들과 심지어 일부 좌파들은 매우 비관적이다. 그들은 시장 개혁 후 중국 노동계급이 계급투쟁을 할 능력을 잃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저명한 중국 노동운동 연구자인 리칭콴은 오늘날 “중국 노동계급은 노동시장과 작업장에서 아무런 협상력도 조직력도 없다”고 주장했다. 또, 대표적인 중국 민주화 운동 전문가로 꼽히는 테레사 라이트는 《권위주의를 수용한 중국인》이라는 매우 눈에 거슬리는 제목의 책에서, 중국 국영 부문 노동자들을 국가가 제공하는 특권을 누리는 배부른 돼지이자 투쟁력을 잃은 겁먹고 불쌍한 존재로 그렸다. 90 《중국에서 대중운동이 폭발한다는 신화》를 쓴 마틴 화이트는 튀니지 국영 노동자들처럼 중국의 국영 노동자들도 비교적 나은 임금과 복지로 국가에 포섭된 ‘특권층’으로서 적극적으로 저항할 의사와 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91 그가 튀니지 혁명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지 정말 궁금하다.
자본가들은 아랍 혁명을 보면서 중국 노동자들의 잠재력을 깨닫고 우려했다. 한 서방의 중국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최근 임금을 많이 올린 것은 사회적 불안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사용자들은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보면서 벌벌 떨었다.”92 백승욱도 동일한 가정 아래 시장 개혁 후 “노동자 지위의 하락”이 발생했고, 93 “사영 기업가를 당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중국 공산당의 방침은 노동자들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축소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94 그러나 횟수와 규모로 보면 현재 중국 노동계급의 투쟁 수준은 1949년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또, 마오주의 시대 노동자들이 ‘조직’된 방식에 대한 오해도 있다. 백승욱 등은 마오주의 시대를 모종의 사회주의로 보거나 적어도 마오쩌둥과 소수 관료들이 그것을 진지하게 추진했던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95 이렇게 보면 공산당 국가가 노동자들을 통제한 것을 노동자들 자신의 조직이라고 잘못 평가하기 쉽다. 그러나 마오주의 시대 중국은 모종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였다. 96
이런 종류의 주장에는 보통 몇 가지 잘못된 가정이 깔려 있다. 첫째, 개혁·개방 이전 중국 노동계급의 상태에 대한 과대평가다. 리칭콴은 중국 노동계급이 마오주의 시대에 “조직된 계급”이었다가 개혁·개방 이후 “탈조직화되고 개인화된” 존재로 변했다고 주장한다.97 사실, 공장 내에서 마오주의적 노동자 통제가 사라진 것이 최근 노동자 투쟁 수준이 올라가는 데 중요하게 작용했다. 특히 공장 당 위원회가 약화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98
게다가 1990년대 말부터 정부가 사유화를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던 데는 톈안먼 항쟁 패배의 충격도 작용했지만 길게 보면 노동계급이 공산당에 종속돼 있던 마오주의 시대의 유산 탓에 노동자들이 사유화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오 시대에 노동계급은 “작업장, [출신] 계급 표지, 주거 단위, 정치 활동 경험” 등 정부가 정한 분단선을 따라 나뉘어 있었는데, 1990년대부터 벌어진 반사유화 투쟁에서 국영 부문 노동자들은 이런 분단선을 뛰어넘어 단결하지 못해 결국 패배했다.둘째, 오늘날 국영기업 노동자 투쟁의 수준과 잠재력에 대한 과소평가다. 중국 국영 부문 노동자들이 1990년대 중후반 대대적인 사유화 과정에서 패배했고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진행 중인 사유화와 각종 구조조정에 맞서 — 대대적인 사유화 물결은 2003년에 일단락됐지만 — 국영 노동자들은 독립 노조를 건설하려 하는 등 갈수록 조직적이고 전투적으로 투쟁하고 있다.
99 최근에 가장 주목을 끈 국영 노동자 투쟁은 2009년 여름 퉁화 철강의 사유화 반대 투쟁인데, 퉁화 철강 노동자들은 사유화를 중단시키는 승리를 거뒀다. 이 투쟁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노동자들이 사장을 구타해 죽였기 때문이다. 사장은 전체 노동자들을 모아 놓고 사유화 계획을 발표하며 종업원을 1만 3천명에서 5천 명으로 줄이겠다고 밝혔다. 노동자들이 항의하자 사장은 “차라리 지금 나를 죽여라. 내가 살아 나가면 너희들이 앞으로 죽 한 그릇도 못 먹게 만들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흥분한 노동자들은 사장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이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을 때 노동자들을 동정하고 사장의 오만함을 질타하는 여론이 우세했다는 것이다. 100
예컨대 2005년 시안양의 직물 공장 노동자들은 사유화 이후 노동조건이 크게 후퇴하자 6주 동안 파업을 벌였고,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하고 독립 노조를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비록 독립 노조를 건설하지는 못했지만 임금과 노동조건에서 상당한 양보를 얻었다.101 이런 공격을 막고 생활수준을 지키려면 그들도 싸우는 수밖에 없고 그럴 가능성이 있다. 상대적으로 노동조건이 괜찮은 노동자라고 해서 싸우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특권층 취급을 받던 국영 노동자들이 튀니지 혁명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아직 싸우고 있지는 않지만, 페트로차이나, 차이나텔레콤, 안산철강, 상하이자동차 등 국영 핵심 전략 산업의 국영 노동자들은 막강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농민공보다 상대적으로 노동조건이 좋지만, 경영 합리화와 파견 노동 증가 등으로 심한 압력을 받고 있다. 게다가 국영 자동차 기업의 노동자들은 2000년대 중반 세계경제 호황기에 임금이 거의 오르지 않아 다른 제조업과 임금 격차도 많이 줄었다.102 그런데 호구 제도 때문에 농민공은 도시에서 천대받는 집단이다. 호구 제도는 원래 농촌 인구의 도시 유입을 차단하려고 1957년에 도입됐다. 그러다가 연안 지역을 중심으로 대규모 수출 공업단지가 조성되고 새로운 일손이 많이 필요해진 개혁·개방 이후에는 농촌 인구가 도시로 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되 거주는 제한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농민공은 도시에서 임시 주거권만을 얻을 수 있다. 덕분에 지방정부는 복지 비용, 주거 비용, 교육 비용을 절약할 수 있고, 자본가들은 농민공의 이등 시민 지위를 이용해 저임금·장시간 노동을 좀더 쉽게 강요할 수 있다. 중국 노동부의 발표를 보면, “[1992~2004년] 12년 동안 광둥 지역 농민공의 임금은 겨우 68위안[약 1만2천 원] 상승했다. 그동안 생계비가 크게 늘었으니 실질임금은 오히려 줄었다.” 103
셋째, 비관적 견해의 가장 큰 문제는 새로운 노동계급 집단인 농민공의 계급의식과 투쟁 발전 수준을 너무 얕잡아 본다는 것이다. 농민공은 수적으로 보나 수출 산업에 집중돼 있다는 점으로 보나 중국 경제에서 가장 강력한 노동계급 집단이고, 현재 가장 전투적으로 싸우고 있다. 중국사회과학원은 2009년 성 31곳을 조사한 뒤 농민공이 2억 3천5백만 명이라고 발표했다. 그중에서 약 1억 4천만 명이 외지 도시에서 일한다.104 그러나 농민공 연구가 펑첸은 농민공이 비록 토지 소유권을 가지고 있지만, “경제적·생활적·정신적으로 중국적 특색의 인클로저는 이미 시작됐다”고 지적한다. 105 농민공, 특히 전체 농민공의 3분의 2가 넘는 청년 농민공들은 임금이 수입의 거의 전부이기 때문에 토지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또, 그들은 부모 세대와 달리 농촌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이 없다. 재생산 구조의 변화와 의식의 변화가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106 2010년 혼다 노동자 파업 이후 중국노총이 발간한 보고서도 동일한 점을 지적했다. 이 보고서를 보면,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신세대 농민공들” 중 90퍼센트가 농업에 종사한 경험이 없고 대다수가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랐다. 또, 신세대 농민공들은 도시를 자기 터전으로 여기며, 중국의 고도성장을 경험해서 성장의 열매를 향유하려는 의지가 매우 강하다. 이 보고서를 작성하려고 인터뷰한 신세대 농민공 중 60퍼센트가 계속 도시에서 살기를 원했고, 도시의 높은 주거비를 감당할 수 있도록 임금이 오르기를 바랐다. 또, 45.5퍼세트가 ‘불의를 당했을 때 집단적으로 해결하겠다’고 답했는데, 이것은 이전 세대 농민공(17퍼센트)보다 거의 세 곱절 높은 수치다. 107
농민공의 잠재력을 낮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대개 농민공이 노동자이자 농민인 이중적 정체성 때문에 노동계급으로 발전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국가가 농촌 호구를 가진 농민공의 토지 점유권을 보장하기 때문에 농민공의 노동 현장(도시)과 재생산 현장(농촌)이 분리된다는 것이다.108 이 연구자는 1980년대 농민공의 탄생부터 현재까지 발전 과정을 연구했는데, 신세대 농민공들의 투쟁에서 다음과 같은 변화가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주류 언론이 가끔 보도하는 농민공들의 투쟁은 실제 일어나는 투쟁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이다. 홍콩의 한 연구자는 2005년 중국 최대 수출 도시 중 하나인 선전에서 현장 조사를 진행하면서 청년 농민공 수백 명을 인터뷰했는데 절반 이상이 파업에 참가한 경험이 있었다.1. 농민공 노동자들의 요구는 법내 요구에서 법외 요구로 갈수록 급진화했다. 1993년과 1994년 경영진이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를 수용한 대신 식료품비, 기숙사 이용료, 기타 요금을 올렸을 때 노동자들은 그것이 ‘합법적’이라는 이유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4년과 2005년에 노동자들은 이런 삭감 없이 법정 최저임금을 준수하라고 요구했다. 또, 2007년에 이르면 노동자들은 단지 ‘적정’ 임금 지급뿐 아니라 노동조건과 생활환경 개선도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였다.
2. 농민공 노동자들이 과거의 투쟁 경험과 다른 노동자들의 투쟁 경험에서 배우면서 갈수록 투쟁 전략이 정교해졌다. 1993∼94년에 파업한 노동자들은 공장 부지 내에 머물렀다. 그러나 2004∼07년에 노동자들은 언론과 여론의 관심을 끌고 국가의 개입을 이끌어 내려고 고속도로로 나갔다. 2004년 선 공장[익명]의 사례를 보면, 노동자들은 자신의 투쟁 경험을 다른 도시의 새로운 일자리에도 적용했다. 2007년 문 공장[익명]의 경우, 같은 회사의 서로 다른 두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서로 협의해 연대 파업을 벌였다. 3. 일손이 부족해지면서 노동자들의 자신감도 높아졌다. 1990년대 초반에는 농민공이 무한으로 ‘공급’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세계 자본주의와 중국의 관계가 갈수록 긴밀해지면서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었다. 2004∼07년 파업들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노동자들이 파업 후 일자리를 옮기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쉽게 다른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 높은 이직률로 일손 부족 문제는 더 심각해졌고 생산성은 떨어졌다. 이에 대응해 정부는 노동자 보호 정책을 강화했고, 경영진은 새로운 경영 전략을 수립해야 했다.
110 또, 새 직장의 조건이 이전과 비슷하거나 못한 것을 경험하면서 이직으로 원하는 노동조건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작업장에 파업 경험을 전수하는 농민공들도 있다. 이런 요인들이 결합돼 파업은 신세대 농민공들에게 ‘일상적 문화’가 됐다. 오죽하면 선전 지역의 한 기업주는 농민공 연구자에게 “파업이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111 2010년 농민공들이 주도한 난하이와 덴소 혼다자동차 부품 공장 연쇄 파업은 느닷없는 사건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발전돼 온 경향이 압축적으로 표현된 것이었다.
농민공의 높은 이직률은 이들이 직장 이동을 통해 협상력을 높이려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농민공 중 상대적으로 숙련도가 높은 사람들은 한 작업장에 오래 머물고, 파업을 주도하는 경우가 흔하다.112 농민공들의 조직적 역량이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최근 사례는 2011년 11월 14일 도시에 있는 펩시콜라 공장 다섯 곳에서 일어난 동시 파업이다. 노동자 2만 명이 참가한 이 파업이 특히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공장의 노동자들이 사전에 행동을 조율했기 때문이다. 113
혼다 부품 공장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초래할 효과 — 중국 내 혼다자동차 전 생산 라인의 완전 중단 — 를 정확히 계산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힘을 알았기에 고용주, 지방정부, 어용 노총의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대담하게 행동했다. 또, 그들은 민주적으로 대표를 선출했다. 혼다 파업의 승리 소식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전국적으로 주요 산업 단지에서 파업이 일어났고 평균 30퍼센트 이상의 임금 인상을 따냈다.114 그래서 그는 “중국 노동자에게 계급의식이란 사라져가는 과거의 유물에 불과하고, 고질적인 [계급적] 능력 부재 탓에 앞으로도 계급의식이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 주장한다. 115 또, 노동자들이 계급의식 대신에 시민적 의식을 가지므로 국가를 대단히 막강한 존재로 인식하고 국가에 읍소하는 방식을 추구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116 그러나 지방정부와 민간 자본가 들로 투자 결정이 분산되는 것이나 중앙 정부에 문제 해결을 청원하는 것이 중국만의 특징은 아니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1905년 1월 러시아 노동자들도 차르에게 ‘읍소’하기 위해 동궁으로 행진하지 않았던가. 오히려 그가 중국 노동계급 투쟁의 발전을 막는 장애물로 국영기업 노동자와 농민공의 구조적 분열을 언급한 것이 더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이 문제를 깊이 있게 발전시키지 않았다.
넷째, 비관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중국 노동자들의 투쟁이 양적으로 성장하고 있더라도 노동자들이 계급의식을 가진 정치 세력으로 도약하는 것을 가로막는 강력한 걸림돌이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리칭콴은 중국이 “중앙집중적 자본축적 체제”에서 시장 개혁 이후 지방정부 주도의 “탈중앙집중화된 자본축적 체제”로 이행해서 노동자들은 체제 전체가 아니라 지방정부만을 문제 삼게 되며, 노동자 투쟁이 ‘세포적 형태’[파편화]와 합법주의를 뛰어넘기 힘들다고 주장한다.117 이 위험을 인식해 여러 중소도시 정부가 농민공에게 도시 호구를 부여하는 정책을 도입했다. 118 그러나 막상 중국 최대 공업 단지인 연안 지역 대도시들에서는 변화 속도가 매우 더디다. 농민공 차별과 저임금 체제가 밀접히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호구제 개혁으로 농민공에게 교육과 의료 등 도시의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려면 엄청난 재원이 든다는 것도 개혁이 힘든 이유다. 119 또, 아직 해결되지 않은 국영기업 사유화 문제가 있다. 이집트에서도 사유화 문제는 혁명 전야나 한복판에서 벌어진 노동자 투쟁의 핵심 쟁점이었다. 현재 이집트 노동자들은 사유화된 기업의 재국유화라는 더 급진적인 요구를 내놓고 있다.
어쨌든 중요한 점은 리칭콴이 지적한 장애물들은 투쟁 과정에서 극복될 수 있고, 오늘날 중국에는 그 극복을 촉진할 수 있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는 것이다. 먼저, 농민공의 호구제 문제다. 중국 국무부 소속 싱크탱크는 “만약 농민공들이 도시 사회로 흡수되고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면 앞으로 엄청나게 많은 갈등이 반복해서 발생할 것이다” 하고 경고했다.그 다음으로, 독립 노조 건설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그동안 중국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독립 노조를 허용하면 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철저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중국 노동자들의 자신감이 계속 높아지면 탄압만으로 독립 노조 건설 움직임을 막기는 역부족일 것이다. 만약 노동자들이 독립 노조 건설 운동을 전개한다면 이는 농민이나 다른 사회집단들의 조직 건설 움직임을 자극하게 될 것이다. 이집트에서 독립 노조 건설 운동이 농민과 의사 등 다른 사회집단들의 민주적 조직 결성을 자극하고 있듯이 말이다.
120 경제 위기는 이집트에서처럼 다양한 노동자 집단이 공통된 이해관계를 인식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세계적 경제 위기의 효과다. 세계경제 위기로 공산당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목표’ — 안정적 경제성장, 생활수준 향상, 일당 독재 체제 내 정치 개혁 — 가 성취되기 더 어려워지고 있다. 중국의 주요 수출국인 선진국들의 경기 하락 추세가 뚜렷해지면서 수출 공업 단지 기업들이 임금과 노동조건을 공격하려 하자 최근 노동자 투쟁이 격화되고 있다. 지난 11월 〈차이나 레이버 불리틴〉의 제프리 크로설은 “지난 몇 주는 2010년 여름[혼다 노동자 투쟁] 이후 중국 노동자 투쟁이 가장 격화된 시기였다”고 지적했다.물론 중국 노동자 투쟁의 미래에 난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좌파 지식인들의 전망은 지나치게 비관적이다. 현재 중국 노동자 투쟁은 명백히 상승 가도를 타고 있고 엄청난 잠재력을 보여 주고 있다. 광둥 수출 기업에 위장 취업해 농민공의 노동조건과 의식을 관찰하고 작성한 다음의 보고서는 이런 가능성을 아주 잘 보여 준다.
때로는 해결책이 없는 듯이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 혼다 파업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농민공 2세대들은 노동자들이 묵묵히 참아야 했던 옛날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제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 한다. 그들은 자기 권리를 보호할 유일한 방법은 투쟁하는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 자본가들은 이윤을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다. 반복된 투쟁을 통해서만이 노동자들은 중요한 교훈을 배우게 될 것이다. 단결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말이다. 단결만이 진정한 해결책이다.
주
- 한호석 2011. ↩
- Pilling 2011. ↩
- Zhang & Nathan 2002. ↩
- Yu 2011b. ↩
- Ai 2011. ↩
- 캘리니코스 2011, Alexander 2011, Ali 2011, Anderson 2011을 참고하시오. ↩
- Strasser & Mohamed 2011. ↩
- Shenker & Gabbatt 2011. ↩
- 캘리니코스 2011, p28. ↩
- Pfeifer 1999. ↩
- 마플릿 2011. ↩
- Maher 2011, King 1999. ↩
- 하비 2007, 6장. ↩
- Maher 2011. ↩
- Marzouki 2011. ↩
- Friedman 2011. ↩
- Chalcraft 2008, pp3-4. ↩
- International Socialism 2011, http://www.isj.org.uk/index.php4?id=716에서 볼 수 있다. ↩
- Chalcraft 2008, p7. ↩
- 캘리니코스 2011, p23. ↩
- Shaumbaugh 2008, 3장을 보시오. ↩
- 마오 시대 경제 발전의 모순에 대해서는 이정구 2009의 3장과 4장을 보시오. ↩
- 상하이 자본가들 중 혁명 중국에 남은 이들은 소유권을 박탈당했다. 이들 중 일부는 국가 경영자로 상당한 성공을 거뒀고, 1978년 개방을 시작할 때 이들이 홍콩 자본가들과 과거 가졌던 연줄이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다. Tsai 2007, pp50-53. ↩
- Chen & Dickson 2010, pp34-35. ↩
- Chen & Dickson 2010, p41. ↩
- Bergère 2007, p336. ↩
- Chen & Dickson 2010, p44. ↩
- Zhang 2011. ↩
- Shaumbaugh 2008, p168. ↩
- 이것은 오늘날 중국이 여전히 제국주의의 희생양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중국은 아시아 지역에서 제국주의 열강으로 부상하고 있고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 ↩
- 김용욱 2008b를 보시오. ↩
- FT reporters 2010. ↩
- Shaumbaugh 2008, pp124-125. ↩
- 뒤메닐 & 레비 2009. ↩
- 뒤메닐과 레비의 주장을 이해하려면 이들이 사용하는 ‘자본가’, ‘관리자 계급’, ‘하층계급’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적 개념과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뒤메닐과 레비는 20세기 발생한 세계사적 전환 — 러시아 혁명, 뉴딜, 나치, 전후 사민주의의 정권 등장 등 — 을 일으킨 핵심 동력이 자본가, 관리자, 하층계급 사이 동맹 관계의 변화에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관리자 계급이 자본가와 하층계급 중 누구와 동맹을 맺는지가 중요했다는 것이다. 동맹 없이 관리자 계급이 독자적으로 경제를 통제한 극단적 사례가 소련과 중국 등 스탈린주의 체제이고, 제2차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복지국가는 관리자 계급이 노동자 민중과 동맹을 맺은 사례이고, 신자유주의는 관리자 계급이 ‘자본가’와 동맹했을 때 탄생한 체제라는 것이다. ↩
- Duménil & Lévy 2011, p325. ↩
- 김정호 2010. ↩
- Huang 2011b. ↩
- 남지현 2011. ↩
- Huang 2009. ↩
- Hickey & Kawamoto 2010. ↩
- 등대마루 2008. ↩
- Zuo 2011b. ↩
- Holland 2009b. ↩
- 최근 중국 중앙정부가 꾀하는 변화에 관해서는 김용욱 2010을 보시오. ↩
- Li 2010, p96. ↩
- la redaction du Alternative Economique 2010. ↩
- Nolan & Zhang 2010. ↩
- Applebaum 2009, p77. ↩
- 백승욱 2008, p128. ↩
- Chan, Kam Wing 2010, p665. ↩
- Holland 2009a. ↩
- ‘유럽 위기에 악재 ‘겹겹’.. 상하이 0.3%↓’, <아시아 경제>(2011.9.6). ↩
- ‘성장률 8% 지켜 年 1000만 개 일자리 만들어라’, <중앙일보>(2008.12.21). ↩
- Holland 2009c, 한 중국 경제학자는 <파이낸셜 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중국의 자본/산출 비율이 거품 경기가 절정에 달했던 일본보다 훨씬 높다고 말했다. 그만큼 과잉 투자 문제가 심각해 이윤율이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Dyer 2010. ↩
- Yu 2011b. ↩
- Ren 2011. ↩
- Dickson 2007. ↩
- Tsai 2007. ↩
- Chen & Dickson 2010, pp68-69. ↩
- Chen & Dickson 2010, p68. ↩
- 중국노총 헌장 제6조, Chen 2010, p109에서 재인용. ↩
- Shaumbaugh 2008, p168. ↩
- Goldman 2005의 6장을 보시오. ↩
- 珍藏本 2009, pp14-15. ↩
- 추이즈위안·백승욱 2003. ↩
- 한더치앙 2011. ↩
- Yu 2011. ↩
- Wang 2006. ↩
- Garnaut 2011. ↩
- 전상희 2007. ↩
- China Labor Bulletin 2009, p20. ↩
- 셰퍼드 2007. ↩
- Friedman & Lee 2010, pp523-524. ↩
- Mooney 2006. ↩
- Yu 2011a. ↩
- Han 2011. ↩
- China Labor Bulletin 2009, p7에서 재인용. ↩
- China Labor Bulletin 2009, p7. ↩
- Chen 2009, pp14-15. ↩
- 方堃·黄莉·李响 2009, http://woeser.middle-way.net/2009/05/314.html에서 보고서 전체를 볼 수 있다. 2008년 티베트 항쟁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으로는 Hore 2008을, 티베트인들의 항쟁에 관한 국제 좌파들의 논쟁에 대해서는 김용욱 2008a를 보시오. ↩
- Huang 2011a. ↩
- South China Morning Post, ‘Hopeful sign on pollution amid smelter clash’ (August 8, 2009). ↩
- Tam 2009. ↩
- Shi 2011. ↩
- 샤오쉐후이 2006. ↩
- Ministry of Information Industry of China 2006, Xue 2008, p88에서 재인용. ↩
- China Labor Bulletin 2011a. ↩
- Hore 2011. ↩
- Wright 2010. ↩
- Whyte 2010, p114. ↩
- Lee 2007, pp124-125. ↩
- 백승욱 2008, p70. ↩
- 백승욱 2008, p98. ↩
- 백승욱 2008, pp361-375. ↩
- 호어 2005, 3장과 4장을 보시오. ↩
- Perry 2008, pp209-210. ↩
- Chan, Chris 2010, pp33-34. ↩
- Pringle 2011, pp76-77. ↩
- China Daily (July 31, 2009), Friedman & Lee 2010, p520에서 재인용. ↩
- Zhang 2008, pp28-29. ↩
- Lai 2009. ↩
- Chan, Anita 2006, p285, Chan, Chris 2010, p8에서 재인용. ↩
- Chan & Ngai 2009, p287. 중국에서 토지의 궁극적 소유자는 국가이지만 정부는 농촌 호구를 가진 이에게 15~30년을 단위로 토지 소유권을 보장한다. 그러나 국가가 필요하면 ‘적절한 보상을 거쳐’ 언제든 소유권을 박탈할 수 있다. 물론, 많은 경우 제대로 보상하지 않는다. ↩
- 盧暉臨 等 2010, pp67-68. ↩
- Chan & Pun 2009, p291. ↩
- 김용욱 2010에서 재인용. ↩
- Chan, Chris 2010, p37. ↩
- Chan, Chris 2010, pp167-168. ↩
- Chan, Chris 2010, p1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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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ingle 2011, pp112-113. ↩
- China Labor Bulletin 2011b. ↩
- Lee 2007, pp10-12. ↩
- Lee 2007, p57. ↩
- Lee 2007, pp57-58. ↩
- Anderlini 2011. ↩
- Zhan 2011, pp243-285. ↩
- Anderlini 2011. ↩
- Jacob 2011. Reuters, ‘Strikes crippling Western brands’ (November 26, 2011). ↩
- China Labor Bulletin 2010, http://www.clb.org.hk/en/node/100834#进厂打工杂感에서 중문 원본과 영어 번역본을 모두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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