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지오바니 아리기 외 《체계론으로 보는 세계사》
세계 패권의 이동을 통해 본 자본주의의 역사
1 의 대표적 이론가다. 그는 《장기 20세기》(1994)를 통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장기 지속의 시간 동안 패권 국가는 주기적으로 교체된다는 주장을 폈고, 뒤이어 1999년에 《체계론으로 보는 세계사》를 발간해 헤게모니의 순환을 강조했다.
이 책의 원제는 “Chaos and Governance in the Modern World System”으로, ‘근대 세계 체제 속의 대혼란과 통치’라고 번역할 수 있다. 원제에도 ‘근대 세계체제’라는 단어가 포함돼 있듯이, 저자인 지오바니 아리기는 이마누엘 월러스틴, 안드레 군더 프랭크와 더불어 세계체제론 아리기는 ‘자본주의 세계체제’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자본주의를 “체계적 축적 순환”으로 볼 필요성을 제기했다. 페르낭 브로델이나 이마누엘 월러스틴처럼 아리기도, 자본주의가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됐다는 논점을 반박하면서 14세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제노바에서 자본주의가 시작됐다고 주장한다. 특히 제노바(1340년대~1630년경), 네덜란드(1560년경~1780년대), 영국(1740년경~1930년대), 미국(1870년경~?)으로 헤게모니가 순환했다는 것이 아리기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이윤율이 저하해서 이윤율과 이자율이 역전되는 국면에는 과잉축적 위기가 발생하고 이 때문에 물질적 팽창이 중단되면 금융적 팽창을 통해 이윤율 저하를 만회하려는 시도가 등장한다. 이 때문에 투자 지역을 이전하려는 시도들이 늘어나면서 금융적 교란이 일어나는데, 이는 결국 경합지역에서 유리한 조건을 누리는 세력의 등장과 함께 패권을 둘러싼 치열한 경합을 낳는다. 이로써 국가 간 체계의 질서가 무너지는 대혼란(Chaos)이 발생하고, 결국 새로운 축적 체제 하의 새로운 패권 국가가 등장한다.아리기는 이 책에서 18세기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의 세계 패권의 이동,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영국에서 미국으로의 세계 패권의 이동을 고찰해 두 차례 완료된 패권 이동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했다. 또, 새로운 패권 국가가 등장할 것인가, 세계화가 국가의 힘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약화시켰는가, 사회 변화를 위한 ‘하위집단’의 능력은 유효한가, 서양 문명과 비서양 문명 사이의 세력 균형의 변화가 올 것인가 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금융 팽창, 기업 변천, 사회 갈등, 문명 충돌 아리기에 따르면, 패권의 위기는 국가 간·기업 간 경쟁이 격화하고 사회 갈등이 고조될 때 나타난다. 자본의 과잉축적과 유동 자본을 얻으려는 국가 간 경쟁으로 금융 팽창이 일어난다. 이 주장은 페르낭 브로델의 연구에 기초하고 있는데, 상품 형태를 벗어던지고 화폐 형태를 취함으로써 유동성을 되찾으려는 자본의 반복적 경향이 13세기 이탈리아 제노바부터 오늘날의 서양에 이르기까지 나타난다는 것이다.
4 곧 그 패권이 종말을 맞이할 것을 상징하는 하나의 신호라는 의미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수립된 유럽의 주권 국가 체제는 네덜란드 패권의 주요한 기반이었다. 아리기는 네덜란드가 유럽의 다른 나라와 달리 지정학적인 측면을 고려해 해상권 장악을 시도한 점은 패권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선택이었지만, 영국과 네덜란드 간의 전쟁으로 제해권이 영국에 넘어가자 위기에 빠진 네덜란드는 마지막 피난처로 대형 금융을 선택했다고 본다. 또한 영국은 산업적 기반과 제국적 기반을 토대로 발전했지만, 19세기 말 공황이 발발하자 대부업과 투기로 활로를 찾고자 했다. 다시 말해, 네덜란드 제국이 쇠퇴할 때도, 영국의 패권이 미국으로 넘어갈 때도 금융 팽창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리기는 패권 이동의 시기에 나타나는 금융 팽창을 두고 브로델의 표현을 빌려, “가을의 표지(sign of autumn)”라고 불렀다. 금융 팽창이 특정 패권 아래서 성립한 자본 축적 과정의 성숙기를 나타낼 뿐 아니라,아리기는 이 같은 방식으로 세계 패권의 이동 시기에 나타나는 특징들을 기업 체계의 변화 및 국가와 자본의 관계 변화를 통해서도 설명했다. 17세기 ‘네덜란드식 법인 자본주의’는 일종의 특허 주식회사들에게, 19세기 영국은 제조회사들에게, 20세기 미국은 다국적 기업들에게 독점적 권한을 부여했는데, 시기마다 기업의 수와 영향력은 상당히 달라졌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기업들에 대한 국가의 규제 능력은 상당히 약화됐다는 것이다.
패권 이동의 시기에는 국가와 기업 간 대립만 격화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사회적 불안에 대한 반응으로 엘리트 내부의 갈등이 발생하고 이 때문에 신흥 집단의 흡수가 관건이 된다.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패권이 이동하는 시기에는 대토지 소유자들뿐 아니라 식민지 플랜테이션 경영자, 해운업자, 금융업자, 고위 관리들이 부상했고, 이후 부르주아 혁명을 통해 부르주아지가 확실하게 권력을 잡았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패권이 이동하는 시기에는 노동조합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이 부상하는 시점이었다.
서양 세계 내에서 네덜란드와 영국의 패권은 모두 아시아 자원에 대한 특권적 접근권에 기초했다. 당시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제도를, 영국은 인도 아대륙 전체를 강제 합병했다. 그러나 서양 문명과 비서양 문명의 충돌에서 서양의 신념과 권위 체계는 부분적 승리만을 거뒀다. 서양의 아시아 지배는 동의보다는 강제에 의존했고, 아시아의 민족해방운동은 서양의 이념을 지지하고 서양의 성과를 획득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자신들의 문명 전통에 의존했다.
아리기의 다섯 가지 결론
5 둘째, 현재 패권의 위기에서 지정학적으로 가장 새로운 점은 전례 없는 군사 능력과 금융 능력의 분화인데, 이런 분화 때문에 체제의 가장 강력한 구성단위들 사이의 전쟁 발발 가능성이 감소한다. 6 셋째, 다국적 기업과 지역 사회가 늘어나고 다양해진 것은 미국의 패권 질서가 해체되는 주요 요인이며, 이 때문에 일반적으로 국가 권력을 약화시켜 체제가 변화할 것이다. 7 넷째, 새로운 사회 갈등의 물결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큰데, 자본의 금융화와 유동성 증가로 중심부(선진국)의 “대량 생산 노동 계급”이 힘과 특권을 잃었으므로, 세계 노동자들 가운데 여성과 유색 인종의 규모와 “중심성”의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다섯째, 서양 문명과 비서양 문명의 충돌이 어느 정도로 격렬하고 고통스러울 것인지는, 서양 문명의 주요 중심지들이 이전보다 덜 높은 자신의 지위에 얼마나 현명하게 적응하느냐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명 중심지들이 과연 미국 패권 이후를 감당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아리기는 패권 이동 시기의 반복적 패턴들을 통해 다음의 다섯 가지 명제를 결론으로 제시했다. 첫째, 1970년대 이래로 계속되는 세계적인 금융 팽창은 패권의 위기가 현재 한창 진행 중임을 나타나는 분명한 표지다.아리기는 앞서 보여준 분석에서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어떤 패턴을 통해 발전해 왔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그가 이런 분석을 통해 내린 결론인 다섯 가지 명제는 몇 가지 문제제기를 피할 수 없다.
8 그러나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불황은 1930년대 대공황과 같은 수준이 전혀 아니었고, 1970년대 이후 투기적 금융 거래가 확산된 것은 근본적으로 이윤율이 저하했기 때문이다. 이윤율이 떨어지면 자본은 좀더 수익성이 높고 안정적이라고 판단되는 부동산·원자재·금융 투자 등에 몰리게 되는데, 결국 투기가 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위기가 투기를 낳는다. 9
첫째,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금융 주도의 새로운 축적 체제로 볼 수 있을까? 아리기는 1970년대 ‘위기’를 겪으며 세계 자본주의가 새로운 축적 순환, 즉 금융적 팽창국면으로 교체됐다고 파악한다. 둘째, 군사 능력과 금융 능력이 분화돼 가장 강력한 구성 단위, 즉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의 전쟁 발발 가능성이 감소했는가? 제국주의가 발전할수록 강대국 사이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주장은 칼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미 작년 8월의 그루지야 전쟁은 미국과 다른 주요 열강의 충돌 가능성을 언뜻 보여줬다.11 여전히 국가는 많은 핵심 기업들을 설립하고 유지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셋째, 세계화 이후 다국적 기업의 증가로 인해 국가의 권력과 구실은 약화되었는가? 오히려 주요 다국적 기업들은 몇몇 나라에 더 많이 투자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자본의 국제화라기보다는 지역화(regionalisation)다. 게다가 무역과 투자는 대부분 선진국들 사이에서 이뤄지고 있고, 생산이 국제적으로 이뤄지는 경우에도 연구 및 개발은 자국 기반에 집중돼 있다.12 그들은 사회변화를 위한 힘을 잃었는가? 아리기는 네덜란드나 영국이 주도한 세계 무역과 산업의 팽창에서 발생한 이익이 장인과 농민을 포함해 상층 노동 계급으로도 흘러들어갔고, 영국 노동계급의 부담은 아시아 인민들에게 전가됐다고 본다. 13 이는 전형적인 ‘노동귀족론’으로, 선진국의 “대량 생산 노동 계급”은 선진국 자본이 제3세계에서 착취한 이윤의 일부를 나눠 갖기 때문에 사회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자본이 “대량 생산 노동 계급”에게 상대적으로 더 높은 임금을 허락하는 것은, 그들에게서 더 많은 이윤을 뽑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안정된 일자리에서 일하는 숙련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은 노동자들보다 생산성이 더 높기 때문에 더 많이 착취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새로운 국제 노동 분업이 주로 북아메리카·유럽 등에서 이뤄지고 있고, 연간 노동시간이 가장 긴 나라가 미국이라는 점을 보더라도, 선진국의 “대량 생산 노동 계급”이 제국주의 ‘초과이윤’을 나눠 갖는 ‘노동귀족’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자본의 세계화 추세는 국제 노동 계급의 저항과 연대의 가능성을 한층 높였다.
넷째, 선진국의 “대량 생산 노동 계급”은 ‘노동 귀족’이고, 다섯째, 중국이 동아시아 경제 팽창의 주요 중심지로서 새로운 세계적 지도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전망이 함의하는 바는 무엇인가? 아리기는 이 책뿐 아니라 2007년에 발간한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에서는 중국에 대한 기대를 더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특히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에서는 오늘날 중국 사회가 “비자본주의적 시장경제”라며 중국 사회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세계(자본주의)가 아니라,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의 세계(시장경제)라고 했다. 정성진이 지적했듯이, “아리기가 보기에 나쁜 것은 자본주의이지 시장경제가 아니다.” 아리기는 미국발 세계 경제 위기의 탈출구를 중국으로의 패권 이동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하지만 데이비드 하비의 지적처럼, 중국의 경제성장은 “극단적으로 낮은 임금과 산업혁명 초기 국면을 무색하게 하는 냉혹한 착취”의 산물이다. 또한 중국은 “명백히 신자유주의적인 경제”다. 그런데 중국이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것이 도대체 왜 “역사의 진보”란 말인가.15 하며 체제 자체에 함께 도전해야 한다.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장기 지속의 관점과 세계 패권의 이동으로만 봐서는 자본주의의 끝을 알 수 없게 된다.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말처럼, “50년, 1백 년이란 장기에서는 문제의 근원인 자본주의 자체가 제거되기를 희망”주
- 세계체제론에 대한 비판적 입장으로는 정성진, ‘세계체제론: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한울아카데미(2006)를 참조하시오. ↩
- 아리기의 이런 관점은 월러스틴의 패권 이동과 차이점이 있다. 월러스틴은 헤게모니의 교체를 상대적 효율성의 문제로 보면서 패권 국가의 기술적 우위가 외부의 모방에 의해 줄어들고 패권 국가의 국내 임금 상승으로 임금압박이 발생하며 그 국가의 체제유지 비용 증가로 전반적 효율성이 감소한다고 봤다. 이 때문에 새로운 패권 국가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져 세계전쟁을 통해 새로운 패권 국가가 출현한다. 아리기는 월러스틴의 논지가 패권 이동을 ‘외생적’으로 설명하는 데 비해, 자신은 ‘내생적’으로 본다고 했다. 지오바니 아리기, 《체계론으로 보는 세계사》, 모티브북(2008), 61쪽. ↩
- 같은 책, 66쪽. ↩
- 같은 책, 119쪽. ↩
- 같은 책, 431쪽. ↩
- 같은 책, 435쪽. ↩
- 같은 책, 441쪽. ↩
- 일부 PD 경향 단체 또는 개인들이 “금융세계화”론의 이론적 배경을 살필 때 아리기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역사적 자본주의” 등의 개념의 이론적 기초 또한 아리기의 주장에서 차용한다. 이에 대한 논의로는 백승욱, ‘역사적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의 역사 - 세계체계분석을 중심으로’, 《경제와 사회》 52호(2001년 겨울)를 참조하시오. ↩
- 이정구, ‘금융 주도의 축적 체제론 비판’, 《진보평론》 33호(2007년 가을). ↩
- 데이브 크라우치, ‘미국과 러시아는 충돌할 것인가 — 미국 제국주의의 새로운 전선, 그루지야’, 《저항의 촛불》 6호(2008년 9월 25일). ↩
- 크리스 하먼, 《세계화 때문에 국가는 덜 중요해지는가?》, 다함께(2005). ↩
- 같은 책, 332쪽. ↩
- 지오바니 아리기, 앞의 책, 287~288쪽. ↩
- 중국 경제에 대해 비동조화(Decoupling) 또는 비자본주의적 대안 모델이라고 보는 견해에 대한 비판으로는 정성진, ‘21세기 대공황’, 《21세기 대공황과 마르크스주의》, 책갈피(2009)를 참조하시오. ↩
- 정성진, <알렉스 캘리니코스와의 대담 - 신자유주의라는 야만을 넘어서>, 《창작과 비평》 106호(1999년 겨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