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오늘의 위기와 저항
카다피 몰락과 리비아의 앞날
인간은 직접 역사를 만들지만,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만들지는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정해져 있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환경에서 역사를 만든다. 모든 죽은 세대들의 전통이 악몽처럼 살아있는 세대의 머리를 짓누른다. 살아있는 세대가 자기 자신과 만물을 변혁하고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던 것을 창조하는 데 몰두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확히 그런 혁명적 위기의 시기에도 그들은 노심초사하며 과거의 정신들을 떠올려 도움을 받으려 하고, 그것들한테서 이름과 전투 구호와 의상을 빌려 이 유서 깊은 변장과 차용한 언어로 세계사의 새로운 장면을 연출한다.
마르크스의 이 말이 현재 리비아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곳도 없을 듯하다. 이웃 나라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일어난 혁명에서 영감을 받아 2010년 2월에 시작된 리비아의 민중 항쟁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금은 결국 서방의 후원을 받는 과도국가위원회NTC가 정국을 주도하는 모양새가 됐다.
2 평범한 리비아 민중은 큰 곤경을 겪고 있었다. 전체 실업률이 30퍼센트에 이르렀고 특히, 청년 실업률은 더 높았다. 리비아는 식량의 80퍼센트를 수입에 의존하는데, 세계적 식량 가격 폭등은 리비아 민중의 삶을 더 옥죄었다. 게다가 1990년대부터 신자유주의 정책이 추진되면서 공공지출이 대폭 삭감됐으므로 대중의 체감 경기는 바닥이었을 것이다. “계속된 억압 통치와 함께 이와 같은 빈곤이 카다피 정권에 맞서 리비아 민중이 목숨을 건 저항에 나선 이유였다. 튀니지나 이집트 민중과 꼭 마찬가지로 말이다.” 3 리비아 혁명은 튀니지·이집트 혁명과 동일한 맥락에서 시작된 혁명이고, 현재 벌이지고 있는 유럽 노동자 운동과 전 세계적 ‘점거하라’ 운동과 궤를 같이 하는 혁명이다. 따라서 좌파는 리비아 혁명을 진심으로 반기며 승리하기를 바라야 하고 지지해야 했다. 또한 같은 이유에서 리비아의 운명은 어느 정도 아랍 혁명과 국제적 운동의 진척과 연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초 혁명가들이 단순히 카다피만 몰아내거나 새로운 친서방 국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항쟁이 일어나기 전 리비아는 막대한 석유 수익 덕분에 거시경제 지표는 좋았지만,4 게다가 석유 산업 노동자들을 비롯한 여러 부문의 노동자들이 행동에 나서고 있었으므로 리비아는 지금과 달리 이집트와 비슷한 길로 나아갈 수도 있었다.
또한, 항쟁 초기에 리비아 민중은 서방을 그리 반기지 않았다. 서방의 군사적 개입 얘기가 처음 나올 때만해도 리비아 민중은 “서방 개입 반대, 리비아 민중 스스로 해 나갈 수 있다”는 현수막을 내걸고 서방의 개입에 반대했다. 지금은 친서방 인사들이 주도하는 NTC도 처음에는 “서방의 모든 군사 개입 반대를 천명했다.”그러나 전투기와 군함까지 동원하는 카다피의 잔혹한 탄압이 시작되면서 혁명은 굴절되기 시작했다. 카다피의 탄압을 빌미로 한 서방 제국주의의 개입, 서방의 후원을 받는 옛 카다피 정권 이탈파들의 등장 등으로 리비아의 민중 항쟁은 애초 목표에서 많이 멀어진 듯 보인다. 그렇다면 리비아는 새로운 친서방 국가가 될 것인가? 아니면 혁명이 부활할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그동안의 과정을 되돌아봐야 한다. 혁명 과정에 작용한 여러 모순적 요소들이 리비아의 앞날에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혁명의 시작과 카다피의 반격
5 이틀 뒤인 2월 17일 “분노의 날”이 시작됐다. 이날은 5년 전 벵가지에서 일어난 반카다피 저항 운동을 기리는 날이기도 했다. 이제 리비아 혁명이 시작됐다. 벵가지를 비롯해 여러 도시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카다피의 경찰과 보안대는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날 이후 항쟁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2011년 2월 15일 리비아의 2대 도시 벵가지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인권 변호사 파티 테르빌이 경찰에 체포된 것에 항의하는 시위였다. 1996년 아부 살림 교도소에서는 카다피의 명령으로 무고한 수감자 1천2백 명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테르빌은 아부 살림 교도소의 희생자 유가족들을 도왔는데, 카다피 정권이 이날 테르빌을 체포한 것이다. 이에 항의해 유가족을 중심으로 시위가 벌어졌다. 이날 경찰이 시위대를 공격해 38명이 죽었다. 카다피의 탄압은 역효과를 낳았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독재자를 타도한 것을 목격한 리비아 민중은 이제 용기를 내 카다피에게 대항했다. 유가족들은 외쳤다. “벵가지여 일어나라. 당신이 기다리던 날이 다가오고 있다!”6 저항 운동에 정당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월 20일 벵가지가 저항세력에게 넘어가고, 저항이 동부로 확산되고, 수도 트리폴리에서도 반란이 일어나자 카다피의 대응은 더욱 잔혹해졌다. 카다피의 아들 사이프 알 이슬람 카다피는 TV에 나와 저항세력에 맞서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울 것이라고 연설했다. 7 카다피는 용병을 동원해 트리폴리의 운동을 짓밟았고 제트기와 전함을 보내 동부를 공격했다. 그러나 군인들의 이탈은 계속됐다. 전투기 조종사 몇 명이 카다피의 명령을 거부하고 말타와 이집트로 망명했다. 2월 말이 되면 트리폴리를 제외한 거의 모든 도시를 저항세력이 장악했다.
리비아 민중은 총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강경한 탄압에도 항쟁은 전진했다. “분노의 날” 사흘 뒤인 2월 20일 저항세력은 보안대를 제압하고 벵가지를 장악했다. 이것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변변치 않은 무기로 무장한 시민들이 중무장한 군대를 제압할 수 있음을 보여 줬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가스통을 승용차에 싣고 돌진해 군부대 담장을 폭파시키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더 중요하게는, 저항세력이 벵가지와 다른 도시들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과거 위대한 혁명들에서 나타난 특징이 나타났다. 바로 군대 내 균열이 생긴 것이다. 민중의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압델 파타 유니스가 이끄는 벵가지 대대가 항쟁에 동참했다.8 다른 한편, 카다피 정권에서 법무부 장관을 지낸 무스타파 모하메드 압델 잘릴 같은 카다피 정권 이탈파들이 벵가지에 나타났다. 이들은 임시정부를 결성하고 리비아의 정치적 지도자를 자처했다. 그러나 카다피 정권 이탈파들은 민중에게 그다지 신뢰받지 못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카다피 밑에서 안락한 생활을 누리던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혁명위원회들은 임시정부가 아무런 정당성이 없다고 선언했다.
저항세력이 장악한 도시들에서는 혁명위원회가 건설됐다. 혁명위원회는 “항쟁 지도부, 존경받는 지역 인사들, 반란을 일으킨 군부대 등으로 구성[됐]다. … 위원회는 국가의 모든 기능 — 감옥, 군대, 경찰, 재판소 등 — 을 대중 통제 아래 두었다. 위원회는 필요를 기준으로 식량을 분배하고 기업들이 방기한 이주노동자 수천 명의 복지를 책임[졌]다. … 벵가지 혁명위원회는 전국적 혁명 기구인 전국위원회를 결성해 리비아 전역에서 우후죽순처럼 나타난 민중위원회들을 서로 연결시키려 [했]다. … 위원회들은 리비아 전체를 민중 통제 아래 둠으로써 혁명을 심화시킬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카다피가 총공세에 나서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2월 27일 트리폴리 반란이 진압됐다. 카다피는 혁명을 완전히 파괴하고 저항의 중심지 벵가지를 피의 늪으로 만들기 전에는 탄압을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카다피의 잔혹한 반혁명 움직임에 대항하면서 항쟁은 무장 봉기로 변했다. 단 몇주 동안 많은 청년 혁명가들이 목숨을 잃었다. 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과 군대의 폭력에 죽거나, 대대적인 체포 이후 감옥에서 죽거나, 정부군과의 교전에서 죽었다. 많은 사람들이 탄압을 피해 지하로 숨거나 튀니지로 도피했다. 반란이 실패하고 운동의 성격이 무장 봉기로 변하면서 “리비아 혁명은 튀니지나 이집트와 다른 길을 가게 됐다.”10 또한, 카다피 정권은 석유 수익의 혜택을 입던 집단에도 지지 기반이 있었다. 주로 카다피의 고향인 시르테와 수도 트리폴리에 거주하는 친카다피 세력은 그동안 민중의 고혈을 짜낸 대가로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이들은 혁명으로 자신들이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길까 봐 두려워했다. 서방 제국주의의 움직임도 친카다피 세력의 재결집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미 2월 말부터 미국을 비롯한 서방 열강들은 리비아 주변에 군대를 파견하고 있었다. “미국은 해군과 공군이 리비아로 이동 중이라고 말했다. 유엔 주재 미국 대사 수잔 라이스는 미국이 나토 회원국들과 군사적 옵션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11 3월 1일에는 힐러리가, 3월 2일에는 오바마가 카다피의 퇴진을 요구했다.
혁명가들은 용맹했지만 막강한 화력 앞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군대가 균열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군대 내에는 확고한 카다피 충성 세력이 있었다. 카다피의 “넷째 아들 무타심은 군 사령관이고, 여섯째 아들 카미스는 특수부대 사령관이[었]다.”12 “카다피는 ‘테러리스트’에 맞서 싸우는 자기 정부를 저버린 미국과 서방 나라들에게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13 아마도 카다피는 “테러와의 전쟁”을 도운 자신을 서방이 도와 주길 바랐던 듯하다. 이는 카다피가 진정한 반제국주의자가 아님을 보여 주는 사례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카다피가 처음에는 저항세력의 배후에 알카에다가 있다고 지목했다는 점이다.서방의 개입과 교착 상태에 빠진 전투
카다피의 잔혹한 탄압으로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면서 2월 말부터 서방의 군사적 개입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미 2월 말부터 미국을 필두로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캐나다, 네덜란드 등이 군함을 파견했다. 한국도 최영함을 보냈다. 3월 19일 마침내 서방은 공습을 시작했다. 나토의 지휘로 수행된 리비아 군사작전에는 모두 열 다섯 국가가 참여했다.
14 카다피 정권 이탈자들의 부상은 “리비아 혁명의 두 번째 전환점”이었다. 15 그러나 저항세력은 서방의 공식적 지상군 투입에는 끝까지 반대했다. 기층의 압력 때문에 NTC도 지상군 투입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작지만 귀중한 성과였고, 서방과 NTC가 앞으로도 자기 뜻대로만은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보여 줬다.
저항세력은 처음에는 서방의 개입을 반대했다. 서방 제국주의가 리비아에 개입한 역사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동안 리비아 민중은 서방 제국주의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었다. 1986년 미국은 트리폴리와 벵가지를 폭격했다. 이 때문에 아무 잘못 없는 리비아인 1백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뿐 아니라, 1981년 미국의 대리비아 경제 제재, 1986년 유엔의 경제 제재, 1996년 이란·리비아 제재법으로 경제적으로도 타격을 입었다. 이런 역사를 보면 서방 제국주의에 느끼는 리비아 민중의 반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카다피의 강력한 탄압과 무장 충돌 과정에서 혁명가들이 많이 희생되고 카다피군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는 상황이 되자 리비아 민중 내부에서도 서방의 군사적 개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정서가 싹텄다. 이 과정에서 서방을 등에 업고 카다피 정권 이탈파들이 지도력을 쥐고 현 NTC를 주도할 수 있게 됐다. 이제 카다피 정권 이탈파들은 “서방의 지원 덕분에 지도자로 행세할 수 있었다. 그들은 리비아에서 서방의 이익을 대변하는 구실을 하게 됐다. 카다피군의 반격이 강력해지면서 그들의 영향력도 강해졌다.”16 그러나 학살을 막을 수 없는 것은 애석한 현실이었지만, 국제 좌파진영이 서방 제국주의의 군사적 개입을 지지해서는 안 될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서방 제국주의는 혁명의 전진과 리비아 민중의 삶에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는 이번 전쟁으로 생긴 5천 명 이상의 난민들을 내팽개치는 서방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다. 국제앰네스티조차 난민 구제에 소극적인 서방의 태도를 비판할 정도다. 17 서방 제국주의는 카다피의 잔혹함을 핑계 삼아 튀니지·이집트 혁명으로 실추된 자신들의 위신과 영향력을 재확립하고, 아랍 혁명에 간섭할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할 뿐이었다. 서방 제국주의는 카다피와 맺은 석유 수출 계약이 불안정해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또한, 이 기회에 “자신의 규칙을 침해한다고 여겨지는 나라들을 공격할 권리를 가진다는 사상”을 다시 다지려 했다. 18 〈파이낸셜 타임스〉는 ‘리비아의 교훈’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리비아 전투와 아랍의 각성으로 영국은 독재자가 자기 국민을 공격하면 선진 세계에는 그에 대응해야 하는(어떤 때는 군사력을 써서라도) 책임이 있음을 새롭게 상기하게 됐다.” 19
너무나도 불균형한 전투를 치르고 있었으므로 서방의 힘을 빌려서라도 카다피를 타도하고 싶은 리비아 민중의 심정은 이해가 된다. 또, 국제적으로도 “카다피를 혐오하는 광범한 여론에 혁명에 대한 지지가 더해지면서 서방의 무력 행사에 반대하기가 무척 어렵게 됐다.”20 이는 사실상 카다피 시절의 정책을 계속 추진하라는 요구였다. 그리고 벌써부터 서방은 리비아 ‘재건’ 사업 등 전리품을 더 챙기려는 이권 경쟁에 돌입했다. 21
실제로 서방 제국주의의 개입을 받아들인 대가는 컸다. 첫째, 서방은 저항세력의 요구는 묵살하며 자신들의 요구만 강요했다. 서방은 저항세력에 무기를 제공하면 ‘이슬람주의 테러리스트’들의 손으로 무기가 갈 것이라며 무기를 판매하라는 저항세력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면서 저항세력에는 자신들과 카다피가 맺은 계약을 지키고, 이슬람주의 운동을 억압하는 정책을 유지하고, 아프리카인들의 남유럽 유입을 계속 막으라고 요구했다.22 따라서 카다피 정권 이탈파가 정국을 주도하는 것은 리비아 민중의 사회 변화 열망과 배치된다.
둘째, 저항세력 내에서 카다피 정권 이탈파의 입지가 커졌다. 카다피 정권 이탈파들은 이러저러하게 서방과 연계가 있으며 자신의 지위를 지킬 수만 있다면 서방에 적극 협력할 태세가 돼 있다. 이제 그들은 리비아에서 이집트 군부와 비슷하게(구체적 행태는 다를지라도) 반혁명적 구실을 할 것이다. 그들은 이미 나토에 작전 기간을 연장해 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셋째, 카다피군에서 이탈자가 생기는 것이 중단됐다. 이는 혁명 초기의 상황과 확연히 달라진 점이었다. 리비아에서 온갖 악행을 저지른 서방 제국주의가 저항세력을 편드는 모양새가 되자, 저항세력의 정당성은 훼손됐고 카다피는 반제국주의 투사를 자처할 수 있게 됐다. 넷째, 투쟁이 갈수록 군사력을 겨루는 쪽으로 변했고, 투쟁의 목표가 카다피 제거로 축소됐다. 이는 투쟁 과정에서 대중이 하는 구실이 적어짐을 의미했다. 사이먼 아사프가 지적했듯이, “혁명들은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관계를 탄생시키기 마련이다. 혁명 과정에서는 거리, 공장, 사무실, 경제와 자원을 누가 통제할 것인가를 둘러싼 도전이 공개적으로 분출할 수밖에 없다. 수백만 명이 자신의 주변 환경을 변화시키고 그 과정에서 그 자신의 의식도 변화시키는 활동에 뛰어드는 것이다. 리비아에서는 이 과정이 중도에서 멈췄다.” 따라서 서방의 개입을 반대했어야 한다. 그럼에도 서방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을 해 볼 수 있다. 아마도 그랬다면, 서방의 개입을 찬성했던 사람들의 가정처럼 카다피의 “학살”이 벌어지고, 벵가지 저항세력이 붕괴하고, 운동이 패배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랬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리비아 민중 운동의 종말을 의미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1980년 한국의 광주항쟁을 떠올려 보자. 1980년 광주에서는 참극이 일어났지만, 광주항쟁이 퍼뜨린 저항의 씨앗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 씨앗은 1987년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이라는 꽃으로 활짝 피어났다. 1980년의 패배는 1987년의 승리를 낳았다. 더구나 리비아 혁명은 아랍 혁명 전체에 연결돼 있으므로 다른 나라의 혁명 상황에 따라 운동의 부활은 더 빠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지적했듯이, 우리의 힘이 약해 참극을 막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우리가 더 강해지기 전까지는, 우리는 적어도 무엇이 중요한지에 관해 정치적으로 명확한 입장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5 도리어 전투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에 서방 제국주의는 당혹스러워했다. 그들은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낼 수 있을 줄 알았다. 애초 나토군의 리비아 군사작전 기한은 90일이었다. 26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분할 얘기도 흘러나왔다. 27 이는 리비아 민중의 일부를 카다피 통치 아래 남겨 놓는 결과를 낳을 것이었다. 다행히 그리 되지는 않았지만 분할 얘기가 나온 것 자체가 리비아 혁명에는 큰 위기 상황이었다. 지지부진한 전투는 거의 여섯 달 동안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생긴 사망자는 3만 명이 넘는다. 카다피 타도의 서막이 다시 오른 것은 트리폴리 등 서부 도시들에서 대중의 저항 운동이 되살아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애초 예상과 달리 서방이 폭격을 시작한 뒤로 전황이 빠르게 저항세력에 유리해진 것도 아니었다. 나토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1만2천 번 이상 출격해 엄청난 공습을 해댔는데도 말이다.28 물론 NTC마저 지상군 투입에는 반대했으므로 서방은 지상군 병력을 대규모로 파견하거나 지상전을 직접 벌이지는 못했다. 지상의 전투는 대부분 무장한 시민들이 맡았다. 여러 지상전에서 리비아이슬람투쟁그룹 출신의 이슬람주의자들은 혁혁한 공을 세웠다. 대표적으로 현 트리폴리 군 사령관 압델 하킴 벨하지가 있다. 벨하지는 카다피 정권과 영국 정보기관의 합작에 의해 오랫동안 탄압받고 감옥에 갇혔던 인물이다. 저항세력이 트리폴리로 진격하는 데서는 이런 지상전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그럼에도 서방 제국주의는 카다피군을 괴멸하며 카다피의 몰락에 한몫했고, 리비아의 미래에 대해 어느 정도 지분을 차지하게 됐다. 물론 자기 지분보다 훨씬 더 많이 가져가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여섯 달 동안의 나토군 폭격으로 카다피군이 상당 부분 괴멸됐으므로 서방 군대가 카다피군을 무찌르는 데서 한 구실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서방은 꽤나 폭넓게 전투에 개입했다. 서방은 공중 폭격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일부 지상군도 리비아로 들어갔다. 사실 애초 제기된 ‘비행금지 설정’이 실효를 거두려면 지상군이 어느 정도 투입될 수밖에 없었다. 카다피군 전투기의 비행을 막으려면 나토군 전투기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카다피군의 대공 무기를 무력화해야 한다. 카다피군 대공 무기를 파괴하려면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고, 그러려면 지상군이 투입돼야 한다. 나토군은 전체 전략을 세우는 데에도 개입했고, 저항세력 전사들을 훈련시키기도 했다. 심지어 8월 20일 트리폴리에서 일어난 반란을 계획하는 데서도 나토군이 개입했다고 한다.민중 항쟁의 재등장과 카다피의 몰락
29 이번에는 2월과 달랐다. 2월에는 카다피의 반격에 밀려 저항세력이 트리폴리 반란을 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저항세력이 “트리폴리 서쪽에서 진격 작전을 감행해 수시간 만에 30킬로미터를 진격해서 잇따라서 마을을 탈환하고 주요 기지들을 점령했다. 그때마다 주민들은 쏟아져 나와서 반군들을 환호했을 뿐 아니라 반군들이 비밀리에 나눠 준 무기들로 무장한 주민들이 무장봉기해 반군들을 도왔다.” 30 8월 20일 저항세력의 진격 소식을 들은 트리폴리 주민들은 거리로 나와 보안군을 제압했다. 다음은 한 저널리스트가 함락 직후 트리폴리를 방문해 사람들을 인터뷰한 기사다. 8월 20일 저녁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전투의 교착 상태는 “서부 산악지대의 반란군이 튀니지 접경 지역을 장악한 여름 무렵 바뀌었다. 트리폴리 등지의 서부 도시들에서 탄압을 피해 피신했던 많은 리비아인들이 다시 국경을 넘어와 전투에 참가했다.”8월 21일 저녁 저항세력이 트리폴리로 진입했다. 트리폴리가 함락되면서 전세는 급격히 저항세력 쪽으로 기울었다. 이제 카다피는 사면초가 신세가 돼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전쟁의 마지막 순간에 대중의 행동은 대단히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는 “리비아 혁명에 아직 숨이 붙어 있음을 보여 준다.”그날 밤, 트리폴리 중심지의 찌는 듯이 더운 아파트에서 한 그룹의 사람들이 모여 저녁 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이 뉴스는 리비아 혁명을 지지하는, 도하에 기반을 둔 뉴스 채널 〈리비아 알-아흐라르〉가 송신한 것이었다. 정확히 8시 30분, 라마단 금식이 끝나자마자, 지역 주민들이 모스크로 몰려가는 시간에 이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지가 나왔다. “우리는 진정으로 여러분의 명백한 승리를 보장합니다.” 뉴스 캐스터가 마지막 멘트로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은 쿠란 경구였지만, 이 방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 봉기의 시작을 알리는 매우 매우 명백한 신호였다. 48시간 뒤 트리폴리 주민들은 6개월에 걸친 리비아 혁명의 엄청난 대단원을 알리게 될 터였다. …
TV를 보던 사람들은 이 날을 몇주 동안이나 준비해 온 62명짜리 지하 혁명가 단체 소속이었다. 스무 살의 항만 노동자 말릭 자말 아바르고는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아바르고는 칼라슈니코프[통칭 AK-47 소총]를 들고 동지들과 함께 거리로 나갔다. 그는 말했다. “내 심장은 쿵쾅거렸습니다. 나는 순교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거리에서 반카다피 구호를 외치는 소규모 사람들이 보이자 모스크 안의 사람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곧 구호 소리는 우레같이 커졌다. … 세관 노동자인 칼리드 아부 후메이니는 밖으로 나왔다. “채소를 사려고 줄 서 있다가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내게 그 소리는 폭탄이나 제트기 소리보다 더 힘있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 알지 알았습니다.” 후메이니는 돌멩이를 한 짐 지고 나온 식당 주인 살렘 엘 부라이를 만났다. 성을 알려주지 않은 압둘은 화염병을 들고 나왔다.
군중은 수백 명으로 늘었다. 시위가 피바다로 가라앉은 지난 2월 이후 트리폴리에서 일어난 첫 번째 대규모 공개적 반정부 시위였다. 거의 즉시, 보안대를 실은 트럭이 도착했다. 보안대는 시위대에 총을 겨눴다. “우리는 한 걸음씩 나아갔습니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압둘이 말했다.
곧 양쪽 사이의 거리는 1백 미터도 안 됐다. 그들은 차량이 씽씽 지나다니는 커다란 고가 아래에서 마주쳤다. 저격수들이 근처에 배치됐다. 시위대 한 무리가 길가에 주차된 차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였다. “우리는 정부군을 혼란에 빠뜨리려 했습니다.” 엘 부라이가 설명했다.
이 도발이 먹혔다. 보안대가 사격을 시작했다. 총알이 쉭쉭 지나갔다. 시위대는 후퇴했다. 시위대는 콘크리트 기둥과 쓰레기통 뒤로 뛰었다.
처음에 보안대는 3 대 1 정도로 시위대를 수적으로 압도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이 골목에서 저 골목으로 흩어졌고 곧 보안대의 뒤를 잡았다. 사격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부군은 포위당했다. 무기가 있던 시위대는 대응 사격을 시작했다. 몇 명은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나는 총이 조금 무서워요. 그래서 화염병을 던졌습니다.” 엘 부라이가 말했다. 결과는 충격적이게도 시위대의 압승으로 끝났다. 경찰 13명이 죽었고 거의 30명이 사로잡혔다. 나머지는 도망쳤다. 그 순간, 그 거리에서는 42년 동안의 절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 세대 동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지금 새로 태어난 것 같아요.” 엘 부라이가 말했다. 여성과 아이 들은 난생 처음으로 국가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으며 조심조심 거리로 발을 내딛었다. 모르는 사람들끼리 얼싸안았고, 남자들은 기도했고, 혁명가들은 공중에 총을 쐈다.
리비아의 앞날
결국 카다피는 저항세력에 붙잡혀 10월 20일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0월 23일 리비아의 공식 해방이 선언됐고, 수많은 사람들이 독재자의 죽음과 승리를 축하했다. 이제 리비아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서방 제국주의는 군사적 개입으로 얻은 지분을 행사하려 할 것이므로 핵심적인 쟁점은 리비아가 새로운 친서방 국가가 될 것이냐, 아니면 리비아 민중이 이런 장애물을 뚫고 새로운 전진을 시작할 것이냐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서방 제국주의는 카다피와 체결한 계약을 이행하도록 리비아의 새 정부에 강요할 것이고, ‘재건’ 사업에 뛰어들어 막대한 이득을 챙기려 할 것이다. 또, 이번 성공을 교두보 삼아 아랍 혁명 전체에 개입할 기회를 노릴 것이다. NTC 내 친서방 인사들은 옛 질서의 많은 요소를 그대로 유지하려 하며, 카다피 정부에서 누리던 자신들의 옛 지위를 회복하려 한다. NTC가 통치하게 된다면 리비아는 서방에 종속될 것이다. 서방은 이 시나리오가 실현되기를 바란다.
33 이슬람주의자들은 민병대를 이끌고 여러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고, 그 결과 민중의 지지도 받는다. 그래서 서방은 리비아가 새로운 아프가니스탄이 될지도 모른다며 걱정한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무슬림형제단이 하는 보수적 구실을 봤을 때, 리비아 이슬람주의자들이 리비아의 진정한 변화를 이끌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들은 독재 정부에 대한 분노와 이 정부를 지원하는 서방 열강들에 대한 대중적 분노를 대변할 수 있지만, 그들은 또한 ‘경제 안정’을 바라고 서방 제국주의 열강들과의 타협(서방에 대한 종속이 아니라)을 꾀할 수도 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대중의 분노를 통제하고 분노가 근본적 사회 변화를 바라는 것에서 다른 것으로 향하도록 조종하려 할 수도 있다.” 34
그러나 이를 거스르는 흐름도 있다. 저항세력 내 이슬람주의자들이 대표적이다. 사이먼 아사프에 따르면, “이슬람주의자들이 서방에게 얼마나 큰 골칫거리일 수 있는지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현 트리폴리 군사령관인 압델 하킴 벨하지는 테러와의 전쟁의 일환으로 영국 정부에 의해 리비아로 납치된 인물이다. 리비아이슬람투쟁그룹의 원로인 벨하지는 영국 정보기관 요원들과 카다피 정부에 의해 고문을 받은 경험이 있다. 벵가지 군사령관은 전 리비아이슬람투쟁그룹 사령관 출신이다. 최근 살라비[벵가지 군사령관]는 과도국가위원회 지도자들이 측근을 석유 장관 등 요직에 앉히는 정실주의를 실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한 과도국가위원회 2인자인 마무드 지브릴이 신생 정부 각료 임명에서 이슬람주의자들과 미스라타 위원회를 무시하면서 ‘혁명을 강탈’하고 있다고 비판했다.”35 그래서 와하오일 노동자 등 여러 부문 노동자들이 투쟁을 벌이는 것은 기쁜 소식이다. 와하오일 노동자들은 부패 혐의와 카다피 정권과의 유착관계가 드러난 경영진의 사퇴를 요구하며 9월 초부터 7주 넘게 파업을 벌였다. 36 이 외에도 여러 석유 기업의 노동자들이 카다피를 후원하던 경영진의 사퇴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런 시위는 NTC의 무마 노력을 거슬러 일어났고 성과를 따냈다. 독재자를 타도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이런 투쟁이 발전해 리비아 혁명의 제2막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리비아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려면 결정적으로 혁명을 시작한 청년들, 특히 노동계급의 각성이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현재 리비아에는 혁명적 좌파는 말할 것도 없고, 독립적인 노동자 정치 조직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집트와는 다른 점이다. 이 때문에 리비아의 미래를 낙관적으로만 보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한 트리폴리 활동가가 지적했듯이, “[좌파가 등장할] 가능성은 카다피 치하에서는 더 희박했다. 혁명으로 말미암아 리비아 사회에서 좌파가 등장할 공간이 생겼다. 그런 일이 조만간 일어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러려면 경제 구조를 바꿔야 하고, 노동계급이 성장해야 하는 등의 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리비아 역사에서 처음으로 기회가 생겼다.”리비아의 앞날은 그 어느 것도 결정돼 있지 않다. 여러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며 우여곡절을 겪을 것이다. 이 과정은 서방의 개입 때문에 튀니지나 이집트보다 더 힘들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처음부터 리비아 혁명은 튀니지·이집트 혁명에 용기를 얻어 시작됐고 아랍 혁명의 한 고리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카다피의 죽음이 바레인과 예멘 민중을 고무했듯이, 다른 나라의 혁명 전진은 리비아 민중에게 새로운 용기를 줄 것이다. 현재 이집트에서는 군부가 반혁명을 시도하고, 이집트 민중은 군부에 대항하는 싸움을 시작했다. 군부에 맞서는 이집트 민중의 저항 운동은 서방과 NTC의 반혁명적 움직임에 맞선 리비아 민중의 저항에 귀감이 될 것이다.
주
- Marx 1852. ↩
- 리비아의 1인당 GDP는 1만4천 달러로, 이집트의 6천2백 달러보다 갑절 이상 높다. CIA. ↩
- 김하영 2011, p158. ↩
- 김용욱 2011. ↩
- Woods 2011. ↩
- Woods 2011. ↩
- Reuters(2011.2.20), http://www.reuters.com/article/2011/02/20/libya-protests-army-idUSLDE71J0QP20110220 ↩
- 아사프 2011a. ↩
- 아사프 2011c. ↩
- 김하영 2011, p153. ↩
- Reuters(2011.2.28), http://www.reuters.com/article/2011/02/28/us-libya-protests-idUSTRE71G0A620110228 ↩
- Al Jazeera(2011.2.25), http://www.aljazeera.com/news/africa/2011/02/20112254231296453.html ↩
- Reuters(2011.2.28), http://www.reuters.com/article/2011/02/28/us-libya-protests-idUSTRE71G0A620110228 ↩
- 아사프 2011c. ↩
- 아사프 2011c. ↩
- 캘리니코스 2011. ↩
- <경향신문>(2011.9.2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9202200345&code=970209 ↩
- 캘리니코스 2011. ↩
- Financial Times(2011.9.28), http://www.ft.com/intl/cms/s/0/680d2160-e9c4-11e0-bb3e-00144feab49a.html#axzz1eW4oa9Yy ↩
- 아사프 2011b. ↩
- <경향신문>(2011.9.1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9152151045&code=970209 ↩
- <프레시안>(2011.10.27),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11027163211 ↩
- 아사프 2011c. ↩
- 캘리니코스 2011. ↩
- 이 수치는 6월 23일까지의 것이다. 작전 완료 때까지는 총 2만6천 번 출격했다. ↩
- <연합뉴스>(2011.6.26),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1/06/24/0200000000AKR20110624193100098.HTML ↩
- <경향신문>(2011.4.4). ↩
- Gopal 2011. ↩
- 아사프 2011d. ↩
- <한겨레>(2011.8.22),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rabafrica/492810.html ↩
- Gopal 2011. ↩
- 아사프 2011c. ↩
- 아사프 2011c. ↩
- 아사프 2011c. ↩
- A writer in Tripoli 2011. ↩
- Martin 2011.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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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n, Jorge 2011, ‘Libyan oil workers strike for the removal of managers linked to Gaddafi’, In Defence of Marxism, October 21, 2011, http://www.marxist.com/libyan-oil-workers-strike-to-remove-pro-gaddafi-manager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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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ds, Alan 2011, ‘After the death of Gaddafi: Revolution and counterrevolution in Libya’, The Socialist Appeal, October 24, 2011, http://www.socialist.net/after-the-death-of-gaddafi-revolution-and-counterrevolution-in-libya.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