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호를 내며
이번 호 〈특집〉은 오늘의 세계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글 세 개를 묶었다. 현재 단연 중요한 문제는 세계경제 위기다. 위기는 지금 유럽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심화하고 있을 뿐 아니라 중국 등 신흥국들로 확산되고 있고, 국제 질서의 불안정도 가중되고 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경제 위기, 혁명, 그리고 전쟁에 관한 소문들’은 올해 상반기에 주목할 만한 국제적 쟁점 세 가지를 연결해 다룬다. 먼저 유럽중앙은행의 장기대출프로그램으로 다소 수그러든 듯했지만 사실은 변함이 없이 계속되고 있는 경제 위기다. 캘리니코스는 경제 위기가 결코 끝나지 않았음을 강조했는데, 실제로 그 뒤 스페인에서 위기가 악화했고, 유럽 곳곳에서 긴축 정책이 도전에 직면했다. 지금은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가능성과 그 파장에 대한 우려로 위기감이 2008년 이후 어느 때보다 고조되고 있다. 또, 캘리니코스는 시리아 혁명에 덧씌워진 지정학적 요소와 그것이 촉발한 복잡한 세력 재편을 설명하고, 이와 연관해 이란 전쟁 가능성도 살펴본다. 캘리니코스는 비록 서방과 걸프 국가들이 시리아 혁명을 가로챌 수 있지만 시리아 혁명은 진정한 민중항쟁이라며, 아랍 혁명을 지지하고 서방의 개입에 반대해야 한다는 입장을 재차 강조한다.
이정구의 ‘중국과 세계경제 위기’는 놀라운 성장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머지않아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이 될 것이라고 점쳐지던 중국이 왜 최근 위기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지를 분석한다. 이정구는 중국이 세계경제에 편입되면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비결 자체가 이제 중국 경제에 족쇄가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정구는 수출 주도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이후의 대규모 경기부양책이 낳은 부작용 등을 분석하며, 중국의 성장 모델을 수출 중심에서 내수 위주로 변경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과제라고 주장한다. 또, 중국은 빈부격차 확대, 실업률 증가, 물가 상승 등으로 일촉즉발의 사회가 되고 있다며 보시라이 사태로 드러난 중국 지도부 내부의 갈등과 아래로부터 대중 저항의 증대를 살펴본다.
마틴 하트-랜스버그의 ‘오늘날 중국의 현실’은 1978년 이후 중국 시장 개혁의 성격을 다룬 글이다. 하트-랜스버그는 중국의 시장 개혁이 ‘시장 사회주의’의 우월함을 보여 준다거나 신자유주의 교리를 효과적으로 반박한다는, 좌파들 사이에 널리 퍼진 주장을 논박한다. 중국의 개혁은 자본주의가 아닌 대안의 창출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특히, 하트-랜스버그는 중국의 시장 개혁이 노동자 계급의 처지를 점점 더 열악하게 만들어 왔다고 강조한다. 중국의 시장 개혁으로 막대한 부가 창출되는 한편, 비정규직 증대, 국유 기업 노동자 대량 해고,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이주노동자 차별, 엄청난 빈부격차가 발생했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바로 이 과정에서 가장 혜택을 본 집단이다. 또, 하트-랜스버그는 중국이 새롭고 더 진보적인 국제 경제 질서를 구축할 수 있으리라는 주장도 논박한다.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경제는 더 넓은 초국적 자본주의의 동역학에 연결돼 있고 그 결과 중국이 현재 국제 경제 질서가 아닌 대안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더 강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트-랜스버그는 비록 마오쩌둥 시절의 중국을 호의적으로 보는 문제점이 있음에도 오늘날의 중국을 좌파적 관점에서 비판하는 몇 안 되는 논자다. ‘오늘날 중국의 현실’은 독자들이 1978년 이후 중국 개혁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최근 경제 위기 분석이나 대안을 다룬 진보 경향의 서적들이 국내외에서 여러 권 출판됐다. 〈논쟁〉에 수록한 글들은 이 중 몇몇 논자들의 경제 위기 분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거나 대안 문제를 논쟁적으로 다룬 것이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이하《선택》)를 비판적으로 논평한 글이다. 강동훈은 먼저, 《선택》의 재벌 개혁론 비판에는 공감할 측면이 많다고 인정한다. 재벌 개혁이 자유주의적 문제 제기이고, 재벌 개혁이 성공하더라도 재벌 가문의 부와 권력 일부를 다른 자본가들에게 이전할 뿐이라는 주장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한편 강동훈은 《선택》이 저성장과 불평등 확대를 전적으로 주주 자본주의의 책임으로 돌리고 재벌 대타협론을 제시하는 것은 날카롭게 비판한다. 《선택》의 분석은 주주 자본주의론에 현실을 꿰맞추고 있고, 《선택》이 제시하는 전략 — 금융을 규제하고, 국가 관료들이 산업 정책과 정책 금융을 채택하고, 노동자들이 재벌과 ‘대타협’을 하면 성장률이 높아지고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 은 몽상이라는 것이다. 강동훈은 심각한 경제 위기의 시대에 지배자들에게서 작은 양보라도 얻어내려면 노동자들의 거대한 투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강동훈의 ‘진정,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장하준·정승일·이종태의
조셉 추나라의 ‘현 위기에 대한 제대로 된 마르크스주의적 해설을 위하여’는 국내에도 번역 출판된 데이비드 맥낼리의 《글로벌 슬럼프: 위기와 저항의 글로벌 정치경제 이야기》 등을 비평한 글이다. 추나라는 맥낼리가 1982년 이후 자본주의가 장기 침체이기는커녕 이윤율이 회복됐고 ‘지난 25년의 신자유주의 기간이 자본주의적 경제성장 주기’라고 주장하는 것을 논박한다. 1982~97년 이윤율이 두 배 이상 상승했다는 것은 과장이고, 195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이어진 이윤율 하락 추세가 멈춘 것은 임금 상승 속도가 현격히 줄어들고 여기에 구조조정이 더해진 결과인데, 이윤율이 단지 부분적으로만 회복됐던 탓에 자본가들은 금융 활동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추나라는 신자유주의적 “팽창”에 대한 맥낼리 주장의 여러 문제점을 들춰내고, 신자유주의 시대를 제2차세계대전 이후 장기 호황 시대와 비교하는 것의 의의를 설명하며, 맥낼리가 금융화 설명에 대한 자신의 독창성을 과대 포장하는 한편 금융화의 원인에 대해서는 진정한 설명이 없다고 비판한다. 또, 추나라는 맥낼리가 계급을 다종다양한 정체성 가운데 하나일 뿐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을 비판하고, 노동계급의 중요성과 혁명적 정당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정성진의 ‘자본주의 생산의 실패: 앤드루 클리먼의 최근 논의 검토’는 앤드루 클리먼의 최신작 《자본주의 생산의 실패: 대불황의 배후 원인》(근간)의 주요 내용을 소개하고 관련 쟁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글이다. 정성진은 클리먼이 이 책에서 이윤율 저하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에서 비롯한다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실증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 이윤율 저하 위기론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한다. 클리먼은 이윤율 저하 위기론의 관점에서 금융화 위기론과 과소소비설 같은 좌파 경제학자들의 통상적인 위기 설명 방식을 비판했다. 동시에 정성진은 클리먼이 브레너의 공헌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다는 점, 이윤율 저하로부터 현실 위기를 무매개적·직접적으로 도출한다는 점, 이번 위기에서 과소소비의 계기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점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고정자본 스톡을 현재 비용으로 평가하여 이윤율을 계산한다고 해서 이윤율 저하 경향이 검출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이번 호에는 〈기획 연재: 왜 자본주의는 경제 위기에 빠지는가〉의 두 번째 순서로 ‘1930년대의 대불황’을 실었다. 고故 크리스 하먼의 ‘1930년대의 대불황’은 그의 1984년 저작 《경제 위기를 설명하기: 마르크스주의적 재평가Explaining the Crisis: A Marxist Re-Appraisal》의 제2장을 번역한 것이다. 2009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혁명가들에게 일련의 강연을 하던 사이에 작고한 하먼은 헌신적이고 규율 있는 활동가이자 다방면에 특출한 재능을 보인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이 글에서 하먼은 1930년대 대불황이 시작된 1929년 10월 월스트리트 대공황은 금융 시장 자체보다 더 근저에 자리 잡은 실물경제에 근본적 원인이 있었고, 이것을 한동안 극복하게 해준 건 케인스적 경기부양책이 아니라 국가자본주의 하의 군비 증강과 제2차세계대전이라고 주장한다.
이 덕분에 세계 자본주의는 전후 4반세기 동안 완만하지만 꾸준한 호황을 구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윤율 저하 경향이라는 근원적 추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1970년 대 초 이후 오늘에 이르는 장기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물론 그 사이에 신자유주의적 공세를 통해 이윤율 저하 추세를 어느 정도 상쇄하지만, ‘어느 정도’였을 뿐이다. 결국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의 위기는 이 장기 위기의 가장 최신 국면이자 가장 심각한 국면인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책의 제3장이 이 과정을 분석한다.
이번 호 〈쟁점〉에서는 복지국가 논쟁과 한국 여성 노동의 현실을 분석하는 글을 실었다.
장호종의 ‘한국 복지국가 논의 지형과 좌파의 과제’는 최근 복지국가 논쟁의 쟁점들을 정리하고 진보진영 내에서 제시되는 대안들을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장호종은 현재 유럽 복지국가에는 두 가지 상충되는 압력 — 노동계급의 조직된 힘과 복지 제도를 체계적으로 파괴하려는 압력 — 이 반영돼 있는데, 한국 진보진영이 이를 ‘모델’로 수용하면서 혼란에 빠진다고 비판한다. 예컨대 고용의 ‘유연안정성’ 개념을 수용하는 것이 그런 문제점이라며 안정된 일자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또, 장호종은 ‘생산적 복지’와 ‘사회투자국가론’의 문제점을 자세히 분석하며, 진보진영의 일부가 자본주의적 경제성장 논리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사회투자국가론에 담긴 가정들을 부분적으로 수용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지금 같은 경제 위기 시기에 복지를 확대하려면 아래로부터의 강력한 노동자 투쟁이 필요하며, 진정한 복지 대안은 반자본주의적 대안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미진의 ‘한국 여성 노동의 현실과 투쟁’은 한국 여성 노동의 변화를 추적하며 그것이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에 끼치는 영향을 다룬다. 최미진은 여성이 전례 없이 많이 집 밖에서 고용돼 일하고 있음에도 임금과 고용 형태에서 심각한 차별에 노출돼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왜 오늘날에도 여성 노동이 심각한 차별에 직면해 있는지를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설명하면서 페미니즘과의 차이를 논쟁적으로 다룬다. 특히 여성 노동이 주변화돼 있다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과 그 함의를 반박한다. 최미진은 여성 노동자들이 단지 가부장제의 희생자가 아니라 노동계급으로서 고유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집단이라는 점에 주목하는 것인데, 한국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 경험을 들어 이를 뒷받침한다. 또, 노동운동 안에서 단결을 저해하는 부문주의와 성차별주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다루면서 ‘노동운동의 가부장성’을 강조하는 여성운동 내 일부 주장의 문제점을 파헤친다.
》이 이번 호를 발간한 후 당분간 휴간을 하려고 한다. 편집자들과 고정 필진이 사회 변혁 운동의 활동가들이다 보니 활성화되고 있는 작금의 사회·정치 운동과 관련된 활동들로 바빠 당분간 저널 발간에 역량을 쏟기가 어려운 사정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오래지 않아, 그리고 독자층의 요구와 필요에 가장 적합한 변화된 모습으로 다시 찾아 뵙도록 노력하겠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죄송스럽고 서운한 얘기를 전해야겠다. 《마르크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