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경제 위기 분석과 대안
진정,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2005년 발간된 《쾌도난마 한국경제》에서 주주 중심 재벌 개혁론을 비판하며 ‘재벌과의 대타협’과 복지국가를 대안으로 제시했던 장하준(캠브리지대학교 교수), 정승일(복지국가소사이어티 운영위원), 이종태(《시사IN》 기자)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이하 《선택》)를 냈다.
저자들이 7년 만에 대담집을 낸 것은 총·대선이 치러지는 2012년에 ‘경제 민주화와 재벌 개혁’이 한국 사회의 화두로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을 주축으로 한 ‘야권 연대’ 측은 말할 것도 없고, 박근혜조차 총선 전에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2009년에] 출총제를 폐지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남용되는 면이 있기에 공정거래법을 강화하는 등 보완이 필요하다”며 재벌 개혁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듯한 말을 했다.
《선택》의 저자들은 꽤나 절박했던 듯하다.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전 세계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이 모색되는 지금, 한국 진보진영이 재벌 개혁이라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1 당혹감과 불만을 쏟아냈다.
그래서 《선택》은 “경제 민주화와 재벌 개혁은 낡은 화두”고 “구시대 담론”이라고(《선택》 420쪽. 이하 쪽수만 표기) 강력하게 비판하고, 강철규·유종일·김상조·김기원·김대호 등 대표적인 재벌 개혁론자들과 통합진보당·참여연대·경실련 등 진보 단체들을 직접 거명하며 재벌 개혁론의 문제점을 논쟁적으로 제기한다. 이 때문에 많은 진보 인사들은 “보수에 대한 비판은 최소화하면서 우군이라 할 수 있는, 약간 생각이 다른 진보적 경제학자들에게 이렇게 집요하게 공격을 퍼붓다니. 그 집요함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하며재벌 개혁론 비판
사실 한국의 진보진영 대다수는 《선택》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복지국가를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한국 사회의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재벌 개혁과 경제 민주화가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기본 관문이라고도 생각한다. 《선택》이 이들과 갈라지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선택》은 “경제 민주화가 따로 있고 복지국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보편적 복지의 확대가 바로 경제 민주화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420) 《선택》은 재벌 개혁론자들이 모범으로 보는 KT를 사례로 들면서 소유 구조 개편 주장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1999년 민영화 이후 KT는 기업 지배 구조를 잘 바꿨다고 상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상을 받아 마땅했을까요? 민영화 과정에서 원래 정규직의 절반 가까이가 해고되고, 그중 일부는 다시 비정규직으로, 외주 노동자나 파견 노동자로 재고용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주주 배당은 엄청나게 높였어요. 순이익 대비 주주 이익 환원율이 2010년에는 50퍼센트 정도였는데, 2009년에는 94퍼센트더군요. 이런 기업에 진보적 시민단체가 상을 주면서 노동자들의 눈물은 외면했어요. 정말 ‘좋은 기업 지배 구조’는 누구에게 좋은 걸까요? 경제 민주화는 누구를 위한 민주화인 걸까요?(230)
《선택》의 이런 비판이 올바른 것은 재벌 개혁론이 내세우는 기업 소유 구조 개편이 노동자들의 이해관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을 제대로 포착했기 때문이다.
2 한국에서는 자유주의가 확립된 적이 없기 때문에 재벌들이 독점적 경제 권력을 이용하고 모피아(경제 관료들)와 유착해 불법·탈법을 저질러,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부를 가로채고,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빈곤·실업 등을 심화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재벌 개혁론자들은 “법치주의 내지 공정 경쟁 질서의 확립 등과 같은 구자유주의적 과제”를 3 달성하도록 한국의 진보진영이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재벌 개혁론자들도 인정하듯이, 재벌 개혁을 비롯한 기업 소유 구조 개편은 자유주의적 문제 의식이다. 대표적인 재벌 개혁론자 중 한 명인 김상조 교수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신자유주의의 과잉 및 구자유주의의 결핍”이라고 정식화한다. 재벌 개혁론자들은 자유주의를 따라 시장을 이상화한다. 재벌 같은 독과점이나 국가 개입이 없다면 시장은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작동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정은 사실 신자유주의도 똑같이 갖고 있는 것이다.5 훨씬 전에 마르크스도 자본가들이 ‘자유로운 경쟁’을 내세우며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노동자들을 16∼18시간씩 일 시킨 영국 자유주의 시대 상황을 《자본론》에서 보여 준 바 있다.
그러나 장하준이 다른 책들에서도 지적했듯이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은 역사적 실체가 없는 허상일 뿐이다. “영국에서나 미국에서나 19세기 이래 실제로 존재했던 자본주의는 그러한 ‘구자유주의’의 허울을 내걸고 실제로는 온갖 탈법·불법·폭력을 구사하며 오로지 ‘비즈니스’에 골몰했던 공장주들과 로스차일드 가문, 그리고 미국의 ‘날강도 귀족들robber barons’이 날뛰던 세계였다.”따라서 자유주의에 기초한 재벌 개혁이 설사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재벌 가문 사람들 5백 명 정도만 잘 먹고 잘 살던 걸 기껏 5만이나 50만 명의 금융 자산 부자들까지 잘 먹고 잘 살게 만드는 경제 민주화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266) 《선택》의 지적은 정당하다. 재벌 개혁 같은 소유 구조 개편은 본질상 재산 소유자들 사이의 ‘공정·공평’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대호나 김기원 같은 재벌 개혁론자들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맞선 희망 버스 운동을 두고 “희망 버스는 절망 버스”라거나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정리해고는 기업의 정당한 권리이며, 그로 인한 문제는 복지국가를 만들어서 해결하면 된다”라며 비난한 바 있다.(386∼387) 시장의 효율성을 맹신하는 재벌 개혁론의 약점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이다.
《선택》은 노동조합도 재벌과 마찬가지로 약화시켜야 할 ‘독점’이라고 간주하는 재벌 개혁론자들을 “신고전파 포퓰리즘”이라고 맹비판하면서(380) ‘경제 민주화’가 누구를 위한 것이냐고 묻는다.
김대호 소장이나 김기원 교수의 주장에서 허점은, 정리해고는 당장 이루어지지만 높은 수준의 실업수당과 직업 재훈련 등 제대로 된 국가적 복지 제도를 정착시키려면 빨라야 5년, 길게는 수십 년이 걸린다는 거예요. 지금 길거리에 나앉게 생긴 한진중공업이나 쌍용자동차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는 당장 아무런 대안도 되지 않을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 거죠. 정리해고는 반드시 규제되어야 합니다.(387)
또, 시장의 공정성과 효율성을 신봉하는 재벌 개혁론자들은 흔히 정부의 경제 개입을 모두 ‘관치’라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재벌 개혁론자들은 2008년 위기 이후 이명박 정부가 외환·금융시장에 개입한 것을 두고 ‘시장의 신뢰를 훼손한다’고 비판하며 금리 인상과 긴축재정으로 구조조정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에 《선택》은 “그 ‘시장’이 누굽니까? 외환시장과 금융시장을 좌우하는 국제 금융자본이잖아요? 그걸 규제하고 통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신뢰를 주는 정책을 써야 한다고요?” 하며 비판한다.(108) 또, 재벌 개혁론자들이 “빚이 많은 가계와 기업의 파산이 더 많아[지고], 경제적 약자부터 파산할 거라는 점”을(111) 알면서도 ‘어차피 터질 폭탄은 빨리 터뜨리는 게 좋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도 신자유주의와 다를 바 없다고 옳게 비판한다.
한편, 재벌과 관치에 반대하는 재벌 개혁론자들은 ‘재벌의 중소기업 수탈’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흔히 그 대안으로 하도급 규제를 제시한다. 물론 재벌 개혁론자들은 하도급 규제가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임금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중소기업은 선이고 민족자본이며, 대기업은 악이고 매판자본”이라는(279) 공식을 거부하는 《선택》은 “중소기업 노동 문제 해결에 보다 큰 힘이 되는 제도는 재벌 개혁이나 하도급 규제가 아니라 보편적 복지와 강력한 노동 시간 규제, 최저임금 규제”라고 주장한다.(395) “대기업들이 납품 단가를 높여 준다 하더라도, 과연 중소기업 기업주들이 자진해서 종업원들 임금 올리고, 장시간 노동을 줄이고, 그래서 더 많은 인력을 채용할 것 같지가 않다”는 것이다.(396) 이런 주장도 중소기업 기업주를 재벌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를 착취하는 착취자로 본다는 점에서 올바르다.
사실 재벌 개혁론자들은 대부분 중소기업을 시장 효율성의 화신으로 보면서 그들과 동맹을 맺으려 한다. 그러나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중소기업 기업주들과 함께 하도급 규제를 요구해야 한다는 주장은 결국 기업 이윤이 충분해야만 임금을 올릴 수 있다는 논리를 노동자들이 받아들이라는 것과 같다. 이렇게 되면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자신의 기업주에 맞서 일관되게 싸울 수가 없게 된다.
이처럼 《선택》이 재벌 개혁론을 비판하는 것에는 공감할 측면이 많다. 특히 《선택》은 재벌 개혁이 자유주의적 문제 제기이고, 재벌 개혁이 성공하더라도 재벌 가문의 부와 권력 일부를 다른 자본가들에게 이전할 뿐이라는 점을 옳게 지적한다. 따라서 재벌 개혁이 아니라 노동시간 단축, 임금 인상, 복지 확대처럼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는 목표에 집중해야 한다는 지적도 옳다.
이런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서라도 노동자들은 재벌뿐 아니라 모든 자본가들에 맞서 투쟁을 벌일 필요가 있다. 특히 지금처럼 경제 위기가 심각해 자본가들이 양보할 여력이 별로 없는 시기라면 체제를 위협할 만한 투쟁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선택》은 ‘재벌과의 대타협’이라는 또 다른 잘못된 길로 들어선다.
주주 자본주의론과 재벌 대타협론
《선택》은 실업과 빈곤을 늘리고 양극화를 심화하는 신자유주의를 주주 자본주의라고 정의한다. 주주 자본주의는 “주식 투자자들의 이익 극대화가 기업의 최우선 경영 목표로 부상한 것”(85) 또는 “금융이 몸통이 되어 실물경제라는 꼬리를 흔들어 대는 자본주의”를(80) 뜻한다고 한다. 《선택》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주주 자본주의는 배당과 주가 관리를 위해 기업들이 단기 수익성 경영에 매달리게 만든다. 기업들은 주주 이익을 위해 “10년 후에 큰 수익을 올리는 사업보다는 일주일 뒤, 한 달 뒤에 주가를 올리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174쪽) 그리고 장기적인 설비투자가 줄어 경제의 성장 잠재력은 떨어진다.
1990년대 초중반에 우리나라 금리가 2000년대 초중반처럼 낮았다고 해 보죠. 그러면 대기업이건 중소기업이건 대출 받아 설비투자를 늘리는 데 치중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혀 그러지 않았어요. 저금리 대출 자금이 두드러지게 주택 대출 쪽으로 흘러가게 된 것도 그래서입니다. 그렇다면 기업들은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요? 바로 기업들이 주주 자본주의에 포획되면서 단기 수익성 위주로 경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78)
또, 주주 자본주의는 실업과 비정규직을 늘린다. “정리해고 추진하고 비정규직 채용이나 외주화 등으로 고용 조건을 더 유연하게 만드는 게 주가 올리는 데 유리”하다는 것이다.(174)
그런데 《선택》이 주장하는 주주 자본주의론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저성장, 불평등 확대의 책임에서 재벌에 면죄부를 준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재벌이 투자를 줄이고 실업과 비정규직을 늘리는 것은 주주 자본주의 때문이지 재벌의 본성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재벌이 주주 자본주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외국인 주주들이 마음만 먹으면 대기업 경영권을 재벌 총수의 손에서 빼앗아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게 되었”기(174) 때문에 “재벌 가문들이 자신들의 경영권 수성을 위해 주식 펀드들과 일종의 타협을 한”(215) 것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선택》은 “한진중공업의 거듭된 정리해고도 기존의 그룹 구조를 지주회사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사태”이므로, “한진중공업 사태에 대해 ‘봐라! 재벌이 노동자들 자르지 않냐. 재벌 개혁이 다시 필요하다’” 하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가 전도”된 것이라고 주장한다.(197∼198)
마찬가지 측면에서 《선택》은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에도 면죄부를 주면서, “왜 박정희가 경제 개발하고 재벌이 본격으로 성장하던 1960년대, 1970년대에는 비정규직이 없었던 겁니까?”(174) 하고 당당하게 묻는다.
이처럼 《선택》은 저성장과 불평등 확대를 전적으로 주주 자본주의의 책임으로 돌리고 나서, 복지를 확대하려면 국가 개입 강화와 재벌의 경영권 보호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추가해야 하겠지만, 신자유주의 이전의 자본주의 형태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실업과 불평등 확대 같은 최근의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재벌 개혁론이 자유 시장과 중소기업을 효율성의 원동력이라고 미화하며 중소기업과의 동맹을 추구하는 길이라면, 《선택》의 재벌 타협론은 국가 개입과 재벌의 투자 확대를 대안으로 보면서 재벌 같은 거대 산업자본과의 계급연합을 추구하는 길이다.
주주 자본주의론의 모순
그러나 《선택》의 분석은 주주 자본주의라는 자신들의 이론에 현실을 꿰어 맞춘 것으로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우선, 《선택》은 “주주 자본주의 원리가 관철되면서 재벌 계열사들끼리도 별로 돕지 않으면서 신중하게 투자하고 있고요. 그래서 대기업들은 보유 자금이 많은데도 생산적 투자를 크게 늘리지 않는 겁니다” 하고 주장한다.(184)
그러나 기업이 보유 자금을 늘렸다는 것은 그만큼 배당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는 ‘주주에게 배당을 최우선으로 하는 단기 수익성 경영’이라는 주주 자본주의 가설이 현실에서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기업들이 보유 자금을 높이며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현실은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 탓에 투자를 못한다는 주장도 현실에 맞지 않음을 보여 준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도 모든 기업이 반드시 배당을 최우선으로 경영하지는 않는다. 얼마 전 거대 IT 기업인 애플이 17년 만에 배당하기로 결정한 것이 크게 보도된 바 있다. 애플은 전 세계에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엄청나게 판매해 보유 현금을 1천억 달러나 쌓은 뒤에야 배당에 나섰다. 게다가 애플은 2001년 9·11 테러로 주가가 폭락했을 때도 자사주 매입 같은 주가 인상 시도를 하지 않았다.
둘째, 《선택》은 재벌 체제를 옹호하려고,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재벌 기업들이 투자를 많이 한다고 주장한다.
주목할 사실은 민영화된 공기업이나 재벌 해체를 당한 기업의 경우 매출액 대비 투자율이 IMF 사태 이전보다 현저히 낮아졌거나 더 이상 늘어나지 않고 정체되고 있다는 거예요. KT나 대우자동차, 쌍용자동차가 대표적이죠. 반면에 나름대로 그룹 체제가 유지된 재벌 산하에 남아 있는 대기업 중에서 잘나가는 일부 기업들은 매출액 대비 투자율이 계속해서 크게 늘어나고 있어요. 그 대표적인 회사들이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입니다.(234)
다시 말해,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는 … 재벌의 구조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투자율이 그나마 유지되는 거고요. 그룹 구조가 주주 자본주의의 압력에 대한 일종의 보호막 역할을 하는 셈”이라는 것이다.(237)
그렇다면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같은 재벌들은 주주 자본주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것인가 아니라는 것인가. 삼성전자는 매출이 엄청나게 성장했음에도 고용을 거의 늘리지 않은 대표적인 기업이고, 현대자동차는 불법파견 문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용을 오로지 비정규직으로만 늘려 왔다. 높은 투자율은 재벌 체제 덕분이고, 해고·비정규직 문제는 주주 자본주의 탓이라는 아전인수식 설명은 현실을 이론에 꿰어 맞추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다.
게다가 민영화한 공기업인 포스코는 여러 방면에 걸쳐 투자를 해 왔고, 투기자본의 공격까지 받았던 SK는 최근 엄청난 돈을 투자해 하이닉스를 인수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만 봐도 대기업들이 주주 자본주의 때문에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설명이 진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셋째, 박정희 시대가 소득 불평등, 노동 유연성과 거리가 멀다는 주장도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저임금은 개발독재 시대의 주요 특징이었다. 노동 유연성도 마찬가지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설립할 자유도 없던 개발독재 시대에 노동자들은 해고에 무방비 상태였다. 개발독재 시대에 노동 유연성이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지 않은 것은 당시가 고성장 시기라 완전고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반면 최근에는 저성장으로 실업자가 급증하면서 노동 유연성 문제가 훨씬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 것이다. 따라서 《선택》처럼 노동 유연성을 주주 자본주의의 단기 이익 추구의 결과라고만 설명하는 것은 잘못이다. 자본가들은 핵심 인력이 아닌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유연화를 추진했다.
넷째, 주주 자본주의론은 신자유주의 이전에 경제를 좌우하던 거대 산업자본들이 왜 주주 자본의 ‘지배’를 받아들이게 됐는지, 또는 신자유주의 시대 전까지는 힘이 미약하던 주주 자본이 어떻게 산업자본을 위협할 수 있게 됐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근본적인 약점이 있다.
《선택》은 주주 자본주의가 1980년대 미국에서 “금융 시장 규제 완화”(80∼82)로 시작됐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왜 그전까지 허용하지 않았던 규제 완화를 1980년대 추진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다.
또 《선택》은 “《이코노미스트》나 〈월스트리트 저널〉, 〈파이낸셜 타임스〉 같은 영미계 유력 경제지들의 여론 공세가 먹힌 결과예요. … 게다가 독일이나 프랑스 같은 유럽 국가들에도 월스트리트처럼 쉽게 돈 버는 걸 좋아하는 금융 엘리트들이 많았어요. 한국도 비슷하지 않나요?”(86) 하고 말하며, 신자유주적 언론이나 금융 엘리트들의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설명도 1970년대까지는 왜 하이에크나 프리드만 같은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그의 주장이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얻지 못했는지, “쉽게 돈 버는 걸 좋아하는 금융 엘리트들”이 1970년대까지는 금융 규제를 풀지 못해 ‘억압’돼 있었는지 말해 주지 못한다.
사실 “1990년대 초반에 김영삼 정부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친노동 정책을 써서 비정규직 채용을 법률로 막았다면 상황은 매우 달라졌을 거예요”(173) 하고 말하는 것을 보면, 《선택》은 신자유주의가 확산될 수 있었던 조건의 변화가 무엇인지 의문조차 품고 있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라는 사상이 왜 전 세계 지배자들을 사로잡게 됐는지 제대로 설명하려면 물적 토대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봐야 하고, 이 둘을 함께 설명할 수 있어야만 진정 과학적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신자유주의 발흥의 이면에 1970년대부터 분명해진 이윤율 하락과 이로부터 비롯한 전 세계적인 위기가 있음을 보여 줬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단지 주주 자본의 권력 확대가 아니라 전 세계 지배자들이 이윤율을 회복하기 위해 노동계급에게 대대적으로 공격을 펼친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를 이렇게 봐야만, 왜 한국에서 거대 산업자본인 재벌이 앞장서서 신자유주의를 추진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2008년 경제 위기를 겪은 전 세계 지배자들이 신자유주의에 끝까지 매달리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맺으며
이처럼 현실을 직시하면 금융을 규제하고, 국가 관료들이 산업정책과 정책금융을 사용하고, 노동자들이 재벌과 ‘대타협’을 하면 성장률이 높아지고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선택》의 전략이 몽상임을 알 수 있다. 재벌, 금융자본, 국가 관료들이 합심해 노동자들을 쥐어짜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그리고 1930년대 대불황 이래 최대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지금, 지배자들에게서 작은 양보라도 얻어내려면 노동자들의 거대한 투쟁이 필요한 것이다.
《선택》은 결정적으로 이 지점에서 머뭇거리는 것이다. 《선택》은 노동자들에게 구조조정을 받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재벌 개혁론을 비판했지만, “조선업 전체의 산업 고도화에 노조가 적극 동참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기업과 산업의 구조조정에 따른 노동자들의 피해를 없앨 수 있어요”라며(353) 다시 구조조정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물론 복지국가가 완성된 뒤라는 전제를 달고 있지만 말이다. 이런 모순은 《선택》이 ‘시장의 효율성’이라는 신화는 잘 반박하지만, 근본으로 자본주의는 뛰어넘을 수 없다고 가정하는 데서 나타나는 것이다.
주주 자본주의의 원칙은 1원 1표입니다. 주식을 1원이라도 더 가진 주식 투자자가 기업 경영과 순익 분배에서 더 큰 몫을 차지하는 구조인 거죠. 반면에 민주주의의 원칙은 1인 1표입니다. 그런데도 1원 1표를 민주주의라 주장하는 건 시장 자본주의를 민주주의로 착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요.(349)
이 주장을 일관되게 밀어붙이려면 단지 정치적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기업 운영에서도 민주주의를 도입해야 한다. 그런데 《선택》은 재벌 총수들의 ‘독재적인 기업 운영’에 도전하길 거부한다.
마르크스가 주장했듯이, 국가 권력뿐 아니라 기업까지도 노동자들이 집단적이고 민주적으로 소유·통제하는 사회를 건설할 때만 진정한 경제 민주화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언제나 노동자들의 단결을 도모하고 노동자 투쟁을 발전시키려 하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관점에 서야 한다.
MARX21
주
참고 문헌
이정우 2012, ‘경제 민주화와 복지국가가 양자택일 문제라고?’, 《한겨레21》 908호(2012년 4월 30일).
김상조 2012, 《종횡무진 한국경제: 재벌과 모피아의 함정에서 탈출하라》, 오마이북.
홍기빈 2012, ‘김상조 vs 장하준, 재벌 놓고 재격돌’, 《시사IN》 241호(2012년 5월 3일).
천영식 2012, ‘애플 17년만에 첫 배당… 팀 쿡 ‘독자색깔’ 속도낸다’, <문화일보>(2012.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