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에릭 홉스봄의 《폭력의 시대》
“폭력의 시대”를 넘어서기 위하여
오늘날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체제를 뭐라고 불러야 적당할까. 에릭 홉스봄의 《폭력의 시대》라는 책 제목은 현 체제를 포괄적이고 완전하게 설명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체제의 중요한 한 단면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다.
1 그렇기 때문에 조지 부시 일당이 벌인 “테러와의 전쟁”의 폭력과 야만, 그리고 이에 맞서는 반전 운동을 경험했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국제적인 환멸과 분노를 공유하는 젊은이들이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이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폭력의 시대》는 새천년이 시작된 이후의 비교적 최근 상황을 다루고 있다.홉스봄은 이 책에서 현 체제의 중요한 문제들을 다룬다. 세계화, 21세기 초의 전쟁과 평화, 제국들의 과거와 미래, 민족주의, 자유민주주의의 앞날, 정치적 폭력과 테러 등 묵직한 쟁점들에 관해 내놓은 역사학 대가(大家)의 통찰과 분석은 매우 가치 있다.
세계화, 국가 그리고 민족주의
홉스봄은 “자유시장의 세계화”가 낳는 폐해를 다음처럼 지적한다. “자유시장의 세계화는 국가 내부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경제·사회적 불평등을 급격히 심화시키고 있다. … 이런 불안정성의 증폭은, 특히 1990년대 세계화된 자유시장이 만들어 낸 것 같은 극단적인 경제 불안정 상태에서, 새로운 세기의 사회·정치적 긴장을 만들어낸다.” 경제적 경쟁의 불안정이 국제적 차원의 사회·정치적 긴장과 불안정과 연결된다는 홉스봄의 분석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게다가 홉스봄은 세계화에 관한 과장과 신화를 반박하고, 그것의 모순을 밝히고 정확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예컨대, 최근 강화되고 있는 이주노동자·이민자 마녀사냥에 대한 언급이 그렇다. 홉스봄이 지적하듯이, “유럽에서는 이민의 세계화가 이민자들에 대한 경제적인 적대감을 다시 불러왔고, 집단 문화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데 대한 거부감을 더욱 키웠다. 그보다 정도는 덜하지만 대부분 집단 이민으로 형성된 미국 같은 나라도 마찬가지다.”
마녀사냥을 강화하는 지배계급의 과장과는 달리 실제 이민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서 살지 않는 인구의 비율은 3퍼센트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서방의 선진 산업국에서는 이민이 중요한 정치적 문제가 된다.” 게다가 이민자들과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지배계급은 오히려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이주하는 데 걸림돌이었다.
홉스봄은 “세계화는 이론상으로 말하자면 빈곤 지역에서 부유한 지역으로 노동력의 이동을 증가시켜야 마땅하다. … 자본과 상품, 통신과는 달리 국가와 정치는 지금까지 노동력 이동에 강력한 제동을 걸어 왔다”며 지배계급의 모순을 지적한다. 이 말은 세계화와 국가의 관계에 관한 홉스봄의 견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홉스봄은 “경제, 기술, 문화, 심지어 언어에서도 세계화는 큰 진전을 이뤘다. 그러나 정치와 군사 분야는 예외다. 그 분야에서는 지금도 개별 국가가 유일한 권위를 갖는다”고 분석한다. 축구를 예로 들어 풀어가는 세계화와 민족주의의 모순에 대한 설명도 흥미롭고 유익하다. 홉스봄이 든 사례처럼, “축구에 관심이 있고 또 축구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은 구세계적 정서의 마지막 보루인 애국심과 신세계의 출발점인 초국가 정신 사이에서 심각한 정신분열증에 시달린다. 이런 극단적인 복잡성은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순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선 “초국가 정신”의 사례라고 할 수 있는 유럽의 슈퍼클럽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기본적으로 세계적인 축구 사업은 세계적인 브랜드를 가진 일부 제국주의적 구단이 지배한다. 유럽 몇 개국의 초대형 슈퍼클럽들이 국내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경기를 펼친다. 그 클럽들 소속 선수들은 국적에 상관없이 스카우트되며, 클럽이 속한 국가의 국적을 가진 선수는 일부에 불과하다. … 2002년 기준으로 유럽리그에서 뛰는 비유럽권 출신은 약 3,천 명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여전히 국가 대항전 월드컵이 단연 세계 최대의 축구 대회다.
조직이 안정돼 있고 기량이 훨씬 뛰어난 슈퍼클럽과 달리 국가 대표팀은 일시적으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해외 클럽에서 뛰는 선수들을 일시적으로 불러 모은다. … 국가 대표팀으로서 호흡을 맞추는 데 필요한 단기간 동안 해외 클럽에서 뛰지 못하기 때문에 그 클럽은 그동안 매일매일 손해를 보게 된다. 슈퍼클럽과 거기에 소속된 스타 선수들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보다 클럽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국가적 정체성이라는 비경제적인 요인도 그 못지않게 강하기 때문에 국가 대표팀 간의 경쟁인 월드컵이 세계적인 축구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단일 대회로 자리 매김한다. 결과적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몇몇 나라의 경우 자국 출신들이 유럽의 슈퍼리그에서 명성을 얻고 부자가 되는 데 박수를 친다. 그러나 국가 대표팀의 존재는 지방, 부족, 종교적 정체성과 별도로 국가적 정체성을 확립해 준다.
한국의 사례를 들어보자. 예컨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지성은 아시아 최초로 유럽 클럽 대항전인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출전한 선수로 추앙을 받았지만, 그는 한국 대표팀의 주장이기도 하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속한 잉글랜드와 한국이 국가대항전을 벌인다면 거의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한국팀을 응원할 것이다. 세계화 시대에도 민족주의가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홉스봄은 축구의 사례를 들어 민족주의 경향이 더욱 강화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영국의 경우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로 구분되는 것과 달리 통합적인 잉글랜드 팀의 깃발이 공공연하게 펄럭이는 것은 잉글랜드의 민족주의가 부활하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 특히 제국주의를 표방했던 국가들의 팬들이 그런 경향을 더 많이 띤다. 그들은 인기 클럽이나 국가 대표팀(외국인 및 흑인 선수 포함)에 대한 자긍심과, 오랫동안 열등하다고 간주돼 온 인종과 민족의 선수들이 자기 나라에서 두각을 점점 드러내는 데 대한 은연중의 불쾌감 사이에서 고민한다. 과거에는 인종차별이 없다고 생각됐던 스페인, 네덜란드 같은 나라들의 축구 경기장에서 인종차별적 행동이 간헐적으로 분출되고, 훌리거니즘이 극우 보수파의 정치와 연계되는 것은 이런 갈등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21세기 전쟁과 평화, 제국의 미래
“제국주의를 혐오”하는 것이 “확고한 정치적 신념”이라고 밝힌 홉스봄은 한평생 제국주의에 반대해 활동하고 글을 써왔다. 그는 21세기에도 여전히 “무력 분쟁은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계속 유행병처럼 번져나갈 것”이라고 예측하며, “평화의 세기는 아직도 요원”하다고 말한다.
6 고 21세기 불안정성의 이유를 제시한다.
홉스봄은 냉전 해체 이후 “국력이 강하고 안정된 나라들이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불안정한 국가들에 다양한 이유나 구실을 붙여 무력 개입을 하는 과거의 상태[냉전 이전 시대]로 되돌아갔다”홉스봄은 냉전 이후 미국의 민주당 클린턴 정부 시절 제국주의 전쟁에 활용된 새로운 개념인 “인도주의적 제국주의”를 비판한다.
야만성과 폭력, 혼란이 점점 더 세계화하는 시대에서는 인권을 보존하고 확립하기 위해 무력 개입이 정당하며 때로는 필요하다는 일반적인 제언을 말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제국주의적 패권, 특히 인류 보편적 인권을 확립할 능력이 있는 유일 강대국인 미국이 행사하는 패권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도주의적 제국주의’로 명명될 수 있는 이 발상은 발칸 반도의 분쟁 과정에서 공론화됐다.
‘인도주의적 제국주의’에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 강대국들의 제국주의적 외교 정책이 인권 주창자들의 구미에 맞을 수도 있고 또 거기에는 선전 효과도 따르지만, 그것은 진짜 목적에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요즘 강대국들은 목표를 반드시 달성해야 한다는 판단이 서면 무자비한 야만성을 드러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게 바로 20세기의 유산[이다.]
홉스봄의 비판은 바로 이 순간에도 매우 유용한데, 오바마가 “인도주의적 제국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조지 부시보다 더욱 세련된 표현을 사용해 전쟁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홉스봄은 또한 “국제 기구”의 구실에 대해서도 회의적이고 비판적이다.
UN을 비롯해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WTO), 국제재판소 등이 그렇다. 회원국들의 합의에 따라 부여받는 권위 외에는 아무런 힘이 없다. 아쉽지만 가까운 미래에 이런 상황이 달라지기 힘들다. 지금은 진정한 힘을 개별 국가가 행사하기 때문에, 예컨대 전쟁 범죄 같은 문제를 다루려고 할 때 국제 기구는 어떤 조치를 내려도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 거기서 내려진 판결을 무시할 만큼 힘이 센 나라들이 있는 한, 정당성과 구속력을 인정받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힘센 나라들이 손을 잡으면 약한 나라의 말썽꾼을 국제재판소에 넘겨 특정 지역의 참혹한 무력 분쟁을 억제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예는 국제 역학 구조 내에서 개별 국가들이 뭉쳐 힘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통적인 방식이지 국제법을 행사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홉스봄의 또 다른 기여는, 냉전 해체 이후 “제국이 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나라”인 미국의 패권의 위기와 약화에 대한 지적이다. 홉스봄은 미국 패권에 맞서는 데 비관적인 태도를 비판한다.
미국에 맞설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냥 그들의 편에 서 버린다. 어떤 사람들은 미국 국방부를 움직이는 이념을 혐오하면서도 미국이 무력 개입을 하는 과정에서 일부 국가나 지역의 불의를 제거한다는 점을 근거로 그런 행동을 지지한다.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 제국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한다.
미국의 현재 같은 위세가 얼마나 지속될까? 아무도 모른다.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점은 다른 모든 제국들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 제국도 역사적으로 보면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한 사람의 일생 동안 모든 식민 제국의 종말, 독일의 소위 ‘천년 제국’(실제로는 12년밖에 가지 못했다)의 종말을 목격했다.
아울러 홉스봄은 제국 내부의 요인도 중요한 약점으로 지적한다.
미국 제국이 지속되지 못할 내부적인 이유도 있다.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대다수 미국인들이 제국주의나 통치의 개념에서 말하는 세계 지배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13 그리고 더 나아가 “아무리 군사력이 강하다고 해도 단일국가(미국)가 세계적인 패권을 지속할 전망은 더더욱 없다. 이제 제국의 시대는 완전히 끝났다”고 단언한다. “제국의 종언”을 점치는 홉스봄의 대단히 낙관적인 전망에 관해서는 그의 약점을 다룬 부분에서 논의하겠다. 14
이런 분석에 기초해 그는 대단히 낙관적인 결론을 내놓는다. “미국이 자국 내의 골치 아픈 경제 문제와 씨름을 하게 되면 외국에 야심적인 무력 개입을 계속할 가능성이 적다.”자유민주주의의 한계와 미래
15 … 민주 선거는 오늘날 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정통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인정된다. 또 부수적으로는 정부가 구체적인 정책을 시행한 뒤 그 결과를 심판 받지 않고 사전에 ‘국민’의 뜻을 물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편리한 방편[이다.]” 16 지난해 촛불 시위 때 운동의 전망을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틀에 가두려 했던 최장집 교수와 운동 내 우파들이 곱씹어 봐야 할 내용이다.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자유민주주의(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잘 지적한다는 것이다. 홉스봄은 자유민주주의를 “학문적 재담”이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현실”로 다룬다. 그는 보통선거의 한계를 지적한다. “전통적인 이론에 따르면 그것이 민주주의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한 선거가 끝나고 다음 선거가 있을 때까지의 기간(주로 수년의 공백)은 민주주의가 대통령이나 총리 또는 여당의 재선 가능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기능할 뿐[이다.]17 이라고 전망한다. 이것은 현재 전 세계 공식 정치의 공통된 실상이기도 하다. 한국을 비롯한 거의 모든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기성 정치인들과 정당들에 대한 환멸과 무관심이 커졌고, 투표율도 하락했다.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비민주성을 지적하며 홉스봄은 “앞으로 정치적인 결정은 대부분 막후에서 협상을 통해 이뤄질 전망이다. 그렇게 되면 국민들은 정부를 더욱 불신하게 되고, 정치인들을 더욱 싫어하게 될 것”그래서 홉스봄은 “장기적으로 볼 때 민주주의나 지구의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고 한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홉스봄의 분석과 전망에는 타당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바로 대안이다.
테러리즘
테러리즘에 관한 홉스봄의 역사적 고찰도 유익하고 재미있다. 그는 스리랑카의 ‘타밀엘람해방호랑이’, 페루의 마오주의 단체 ‘빛나는 길’부터 최근의 자살 폭탄 테러까지 다양한 테러 방식과 이와 관련된 역사적 현실들을 살펴본다.
무엇보다 중요한 그의 기여는 바로 2001년 9·11 이후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과 ‘테러’에 대한 분석이다.
2001년 9월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강대국들이 오랫동안 국제 사회에서 인정돼 온 전쟁의 규칙과 협약을 공식적으로 폐기하고 외국에 대한 무력 개입을 재개하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사실 새로운 국제적인 테러망이 선진국과 아시아의 안정된 정권에 가하는 실제적인 위험은 무시해도 좋을 만한 수준이다. 런던과 마드리드의 대중교통 폭탄 테러로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이 희생됐지만 대도시의 기능이 마비된 것은 단 몇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뉴욕을 강타한 9·11 테러는 소름끼칠 정도로 끔찍했지만 미국의 국제적인 힘과 내적 구조는 조금도 타격을 받지 않았다. 그 이후로 사정이 나빠졌다면 그것은 테러리스트들의 활동 때문이 아니라 미국 정부의 과잉 대응 때문이었다. … 이런 현상은 테러 운동의 현 단계가 상대적으로든 절대적으로든 강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증거다. 테러 운동은 현 시대의 증상일 뿐 결코 역사를 바꿀 수 있는 힘은 못 된다. … 미국의 현 정책은 터무니없는 ‘적’을 만들어 냄으로써 냉전 시대의 종말론적 공포를 되살리려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들이 갖고 있는 힘을 한층 강화하고, 또 사용하는 데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테러와의 전쟁’의 위험은 이슬람 자살폭탄 테러에서 오는 게 결코 아니다.
홉스봄의 지적처럼 “테러리즘”은 “현 시대의 증상”이다. 진정한 위험은 조지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 — 오바마가 “폭력적 극단주의와의 투쟁”이라는 다른 표현으로 포장해 이어받은 — 이다.
약점1 — 냉전 시절에 대한 향수
19 … 돌이켜 볼 때 냉전과 소련 제국의 존재는 국제정치적으로 안정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20
지금까지 홉스봄이 《폭력의 시대》에서 개진한 주장과 그 장점들을 살펴봤다. 이제부터는 그가 내놓은 주장의 약점을 살펴보겠다. 우선, 홉스봄이 이 책에서 자주 언급하는 것은 바로 냉전의 순기능에 관한 견해다. 그는 현재와 냉전 시기를 이렇게 비교한다. “소련의 붕괴로 거의 두 세기 동안이나 국제 관계를 지배하면서 국가 간의 전쟁에 상상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양극 체제가 사라졌다. 그로써 국가 간의 전쟁이나 다른 나라의 내정에 대한 무력 개입을 억제할 수 있는 주요 수단이 사라졌[다.]홉스봄은 자서전인 《미완의 시대》에서도 냉전 시절에 대해 다음처럼 말했다.
나 같은 사람들이 공산당에 남았던 것은 소련에 대해 너무 많은 환상을 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 과거가 되었건 현재가 되었건 [소련을] 서양 제국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의 동반자로 보았고 비유럽 지역이 경제사회 발전의 전범으로 삼아야 할 나라로 여겼[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는 물론이거니와 식민지에서 벗어났거나 벗어나려고 애쓰던 지역의 정부와 운동도 모두 미래가 소련의 존립에 달려 있었다. 공산주의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소련을 지원하고 수호하는 것이 여전히 국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그래서 우리는 의혹과 의구심을 애써 삼키고 소련을 옹호했다.
1980년대로 넘어오면 소련이나 그 추종 국가들의 사회주의가 10월 혁명에서 감동을 받은 우리들이 마음속으로 그렸던 사회라는 생각은 접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또 다른 초강대국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이 필요하다는 논리는 여전히 설득력이 있었다. 소련은 또 피억압 민족들의 해방을 지원한다는 도덕적 확신에서도 앞서 있었다.홉스봄은 또 다른 유명한 저작 《극단의 시대: 20세기 역사》에서도 냉전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한다. “냉전의 독특성은 객관적으로 말해서 세계전쟁이 곧 일어날 위험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게다가 양측 — 특히 미국 측 — 의 묵시록적인 언사에도 불구하고, 두 초강대국 정부 모두 제2차세계대전이 끝났을 때의 지구상의 세력 분배 상태 — 지극히 불균등하지만 본질적으로 도전받지 않은 세력 균형 상태였던 — 를 받아들였다.”
24 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함의가 있다. 첫째, 미국이라는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에 맞선 소련이라는 강력한 견제 세력이 존재했다는 점이다(물론 자서전에서 밝힌 것처럼 그가 소련 체제를 정치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영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인 이안 버철은 《폭력의 시대》 서평에서 홉스봄이 “냉전 시절에 대한 향수”가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홉스봄이 지닌 “냉전 시절에 대한 향수”소련은 사라졌지만, 오늘날에도 대항 국가를 이용해 미국을 견제해야 한다는 비슷한 생각이 존재한다. 예컨대, 국제 반자본주의 운동의 중요한 리더인 월든 벨로(‘남반구초점’)는 WTO 내부에서 미국의 이해관계에 도전하는 인도·브라질·중국·러시아와 같은 강대국들의 구실을 크게 평가했다. 한국의 NL 경향 활동가들은 북한의 강화된 군사력을 미국의 군사적 패권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으로 본다(홉스봄이 옛 소련 체제를 정치적으로 방어하지 않으면서도 미국 패권에 맞설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겼던 것처럼, 대항 국가를 수단으로 제시하는 사람들도 그 국가 체제를 지지하지 않으면서 그럴 수 있다).
냉전 시기에는 그 이전의 제국주의 전쟁 시기와 달리 강대국 사이의 전쟁이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핵무장 무한 경쟁 때문에 직접적 충돌에 대한 부담감과 신중함이 가중됐다. 핵미사일 발사 버튼 누르기는 자동소총인 칼라슈니코프(AK-47)나 M16의 방아쇠를 당기기보다 훨씬 부담이 큰 일이다.
그러나 열전(熱戰)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서 제국주의 사이의 불안정한 경쟁이 사라졌던 것은 아니다.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의 대결은 “한반도의 공공연한 전쟁, 중국 연안의 아주 작은 두 섬 금문도와 마조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정면 대결, 1961년의 베를린 위기, 마지막으로 세계 핵전쟁 거의 직전까지 갔던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 등”으로 나타났다.
제국주의 시대의 평화기는 전쟁 예비 단계라는 레닌의 지적처럼, 냉전 시기에 전쟁 준비는 풍토병이었다. 냉전 종식 후에 나타난 경제적·정치적으로 다극화된 불안정한 세계 체제는 바로 냉전 시기의 군비 경쟁과 연결돼 있다.
게다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가 간 경쟁을 이용한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 국가 간 경제적·군사적 경쟁은 불안정한 제국주의 체제의 근본 원인이다. 적(敵)의 적(敵)이 모두 친구인 것은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항 국가를 이용한다는 생각 탓에 진정한 대안, 즉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하찮은 것으로 여길 위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둘째, 피억압 민족해방운동을 소련이 지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한 반(反)혁명 이후 대외정책에서 소련의 주된 관심사는 피억압 민족해방운동 지원이 아니라 자국 국경 수호였다.
스탈린 반혁명 이전에 혁명 러시아는 민족해방운동에 진지하고 일관된 태도를 취했다. 제국주의를 약화시키는 민족해방운동을 무조건 지지하기, 그러나 그 운동에 공산주의의 색깔을 덧씌우지 않으면서 지지하기였다. 즉,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비판적 지지였던 것이다. 실제로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소비에트 공화국은 제정 러시아의 식민지 민족 구성원의 자결권을 존중했다. 소비에트 공화국에 편입되고 싶은 국가들은 그렇게 했고, 독립을 원했던 폴란드·핀란드·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는 독립 국가를 수립했다.
25 1956년 헝가리 침공, 1968년 프라하 침공,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사례만 보더라도 소련이 민족해방운동에 진정한 열의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28년 스탈린 반혁명 이후에 레닌과 볼셰비키가 확립한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전술과 실천은 완전히 폐기됐다. “레닌 사후에 러시아에서 권력을 장악한 뒤 스탈린은 혁명의 성과들을 완전히 되돌려 버렸다. 동유럽 공화국들의 자결권은 금지됐고, 그 곳 주민들은 소련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야만적인 억압을 당했다.”약점2 — 낙관과 비관의 평행선
홉스봄은 미국 제국주의, 자유민주주의, 부르주아 국가의 위기와 약점을 잘 설명한다. 이것은 지나친 낙관으로 이어져 “제국의 종언”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미국 제국주의는 위기를 겪고 있는 동시에 여전히 강력하다. 그리고 제국의 권위와 패권을 지키고자 제국주의 전쟁을 지속하고 있다. 조지 부시의 후임자 오바마는 아프가니스탄에 증파해 점령을 강화하려고 한다. 아프가니스탄의 위기가 파키스탄까지 확대돼 확전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이제 “아프팍 전쟁”이라는 말은 반제국주의 활동가 일부만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게 됐다. 게다가 경제 위기의 심화 때문에 제국주의 체제는 더욱 불안정해졌고, 정치적·군사적 경쟁과 충돌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지나친 낙관과는 대단히 모순적이게도 홉스봄이 내놓는 대안은 매우 비관적이다. 예컨대 미국 제국주의에 대해서도 “현재로서는 가장 몰두해야 할 일이 미국을 말리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미국을 교육시키거나, 재교육시키는 것”이라고 자신감 없는 대안을 내놓는다. 또, 그는 “21세기의 사람들이 선호하는 통치 체제의 모델로서 기존의 국가 정부를 대체할 수 있을까?” 하고 묻고는,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고 말한다.
제국주의, 자유민주주의, 세계화에 대한 통찰력 있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홉스봄이 비관적 대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정치적 입장과 관련 있다. 1936년부터 영국 공산당에서 활동했던 홉스봄은 1970년대에 유로코뮤니즘으로 전향해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적인 입장을 버렸다.
그의 비관은 미국 제국과 경쟁했던 소련이라는 위로부터의 견제 세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실제로 미국 제국주의를 약화시키고 있는 세력 — 중동의 저항과 국제적인 반전운동 — 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폭력의 시대》는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더 나아가 홉스봄의 현 체제 비판과 분석, 낙관에 공감하는 이들과 그가 제시하지 못한 대안을 함께 건설하는 것은 책읽기 이상으로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주
- 이 책은 2007년에 나왔고, 한국에서는 2008년에 번역 출판됐다. 원제는 “Globalisation, Democracy and Terrorism”, 즉 “세계화, 민주주의 그리고 테러리즘”으로, 2000년부터 2006년에 발표한 저자의 기고문과 강연 원고를 묶은 책이다. ↩
- 에릭 홉스봄, 《폭력의 시대》, 민음사(2008), 95쪽. ↩
- 같은 책, 96쪽. ↩
- 같은 책, 97쪽. ↩
- 같은 책, 97~98쪽. ↩
- 같은 책, 91쪽. ↩
- 같은 책, 12쪽. ↩
- 같은 책, 13쪽. ↩
- 같은 책, 28~29쪽. ↩
- 같은 책, 172~173쪽. ↩
- 같은 책, 173쪽. ↩
- 같은 책, 173쪽. ↩
- 같은 책, 173쪽. ↩
- 같은 책, 86쪽. ↩
- 같은 책, 111쪽. ↩
- 같은 책, 117쪽. ↩
- 같은 책, 116쪽. ↩
- 같은 책, 142~144쪽. ↩
- 같은 책, 30~31쪽. ↩
- 같은 책, 89쪽. ↩
- 에릭 홉스봄, 《미완의 시대》, 민음사(2008), 319쪽, 322쪽. ↩
- 같은 책, 455쪽. ↩
-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 20세기 역사 (上)》, 까치(1997), 318~319쪽. ↩
- Ian Birchall, “Globalisation, Democracy and Terrorism”, Socialist Review(July / August 2007). ↩
- Anindya Bhattacharyya, “Imperialism, nationalism and national liberation struggles”, Socialist Worker 2116(30 August 2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