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6월 항쟁: 1987년 민중운동의 장엄한 파노라마》
장엄한 민중항쟁에 대한 탁월한 보고서
6월 항쟁은 한국 현대사에서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6월 항쟁: 1987년 민중운동의 장엄한 파노라마》의 저자 서중석의 주장처럼 “6월 항쟁으로 (분단)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자유가 폭넓게 획득되었다. 그 자유는 푸른 하늘 사이로 잠시 보였다가 사라진 4월 혁명기의 자유와도 달랐다.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이제 자유와 민주주의의 나라로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서중석 2011, 673쪽. 이하 쪽수만 표기) 이 책은 6월 항쟁을 학술적으로 분석한 책은 아니다. 그리고 이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다. 이 책은 부제가 말해주듯이, “민중운동의 장엄한 파노라마”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데 일차적 목적이 있는 듯하다. 이 책의 생생한 현장감은 저자가 밝히듯이, 1987년 8월 발행된 〈말〉 12호와 1987년 7월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펴낸 《6월 민주화 대투쟁》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이다.(11) 이 문헌들은 당시 거리 항쟁을 생생하게 보고했다. 또, 집권 군부 세력의 동향,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 내 각 세력들의 대응, 학생운동의 노선 등을 항쟁의 전개 과정과 함께 결합해 설명하려 노력한다는 점도 장점이다. 이 책을 마르크스주의적 분석과 더불어 읽고 싶다면, 당시 트로츠키주의자로서 항쟁에 참가했던 최일붕의 짧은 논문
3 사실, 1970~80년대 한국에서 권위주의가 강화되고 이에 맞선 민주화 운동이 발전한 것은 당시 동아시아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예를 들어,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진 데 따라 나온 닉슨 독트린과 미국의 대중국 전략 변화는 동아시아 국가들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 나라의 지배자들은 권위주의 반동을 강화했다. “그것은 권위주의 체제 등장의 도미노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4 1970년 캄보디아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론놀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1971년 타이 군부는 의회를 해산하고 계엄령을 선포했고, 1972년 필리핀에서는 마르코스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한국에서는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6월 항쟁을 “1년 전 필리핀의 ‘황색 혁명’과 함께 1989년 유럽 공산주의 정권들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한 대대적인 민주화 저항의 선구”라고 평가한 바 있다.역으로 1986년 필리핀의 민주화 항쟁, 1987년 한국의 6월 항쟁, 타이완의 계엄령 해제, 1989년 중국 톈안먼 항쟁 등은 탈권위주의 시도의 도미노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한국의 6월 항쟁은 1986년 독재자 마르코스를 끌어내린 필리핀 민주화 항쟁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저자도 이 점을 놓치지 않는다. “필리핀의 ‘피플 파워’는 한국 민주화 운동의 대리전쟁이었다. 학생들과 민주 인사들은 필리핀의 민중 혁명이 실패한다면 당분간 우리 민주주의는 곤경에 처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고, 똑같은 이유로 전두환 정권은 그것이 실패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121-122) 실제로 지배 권력은 1986년 들어 거세진 저항을 ‘필리핀 사태’라는 프리즘으로 바라보았다. 예를 들어, 당시 안기부장 특보였던 박철언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1986년의 국내 정치는 무척 소란스럽게 시작되었다. 2월 4일, 경인지역 15개 대학의 대학생 1000여 명이 서울대학교에서 ‘86 전학련 신년 투쟁 및 개헌서명운동추진본부 결성대회’를 갖고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월 6일,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이 신민당에 입당했고 다음날 당 고문으로 취임했다. 2월 25일, 1984년 7월 미국으로 건너갔던 김종필 전 공화당 총재가 귀국했다. 대학생들의 반정부 투쟁이 거세지면서 그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구舊정치인들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복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필리핀의 혁명적인 정치 상황과 맞물려 있었다.
1986년 들어 전두환 정권이 저항 운동에 매우 강경한 탄압으로 대처하게 된 데는 ‘필리핀 사태’에 대한 두려움도 반영돼 있었을 것이다. 전두환 정권의 강경 탄압은 1천여 명의 구속자를 낸 건국대 사태, 부천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살해 사건 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강경 탄압은 결국, 정권의 무덤을 파는 행위였음이 드러났다.
항쟁 직전 학생운동의 상태
1986년의 강경 탄압으로 학생운동은 위축됐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을 전한다.
1986년은 서울대에서 휴학이 가장 많았던 해였다. 학교 앞 술집에는 노랫소리가 사라졌고 술만 먹으면 울곤 하는 학생이 늘어났다. 학교가 무서워 나오기 싫다는 학생도 있었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인생에 대한, 또 대학 생활에 대한 고민과 불안, 걱정이 커졌고 두려움과 염증이 깊어졌다.(217)
많은 대학에서 학생운동 조직 역량이 약화되고 학생 대중의 지지 기반도 무너졌다. 한양대의 경우 84학번 학생운동 활동가가 100명 가량 있었으나, 건국대 사태로 50여 명이 구속되면서 현저히 약화[했다.](219)
당시 한 공안당국자가 “서울대 학생운동은 향후 10년 동안 재기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학생운동 지도부뿐만 아니라 저학년 학생까지 구속되었다. 학생운동 지도부는 타개책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219)
물론, 이를 너무 과장한다면 일면적이고 인상적인 평가가 될 것이다. 탄압의 충격에 휩싸인 학생 활동가의 눈으로만 당시 상황을 보게 되면, 당시 물밑에서 급진화하고 있던 분위기를 놓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분위기에 대한 “타개책으로 대중 노선이 강조되었다. 비폭력이 강조되었고, 학생운동의 중심을 총학생회·과학생회·동아리를 중심으로 한 대중적 학생회 조직에 두었다.”(219)
저자는 이러한 “대중 노선” 때문에 1987년 2∼4월 동안 학생들의 거리 투쟁이 저조해졌다고 비판적으로 본다. 심지어, “2∼3월에 학생 시위가 적었던 것은 전두환이 4·13 호헌 조치를 내리는 데 한몫했다”고도 평가한다.(224) 그리고 저자는 이렇게 침체돼 있던 학생운동을 대신한 세력이 새로운 주체로 떠오르던 “행동하는 시민”이었다고(228) 주장한다.(다른 한편, 저자는 “대중 노선”이 야당과의 민주대연합이 성사되는 데 한몫했다고도 평가한다.)
그러나 1987년 상반기 학생운동 주류의 “대중 노선”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너무 인색하다는 느낌이다. 사실, 박종철의 죽음과 관련된 시위인 2·7 추도 대회와 3·3 대회의 주력 대열은 학생이었다. 게다가 전두환 정권의 강경 탄압으로 집회 자체가 성사되지 못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기만적이나마 전두환이 박종철 ‘치사범’들을 재빨리 구속해 사태가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는 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물론 이는 축소·은폐·조작된 것으로 알려져 이후 항쟁의 기폭제 구실을 하기도 했다.) 부차적이지만, 이 대회들이 열린 시점이 방학중이거나 입학 시즌이라는 점도 고려할 수 있다. 전두환의 4·13 호헌 발표에 학생운동이 굼뜨게 대응한 것은 사실인 듯하지만, 저자도 서술했듯이, 5월 15일 전국의 대학 36곳에서 1만 3천여 명이 호헌 철폐를 외치며 교내 시위를 벌였고, 일부는 거리로 진출해 경찰과 충돌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학생 활동가들이 1986년 말 강력하게 탄압당한 이후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대중 노선”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최일붕의 평가가 일리가 있다.
당시 상황에서는 주효했던 전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대중운동이 고양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약간 귀에 거슬리는 듯한 급진성을 완화하고, 선진적 대중에게 다가가는 언어를 사용하고, 불필요한 폭력도 삼가는 전술 방침이 유효했던 거죠. 그런데 6월 항쟁 때는 그것이 또 나쁘게 작용하기도 했어요. 경찰이 최루탄으로 마구 공격을 해대자 선진적 대중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돌을 들고 싸우려 했는데, 그런 것까지 ‘비폭력! 비폭력!’ 하면서, 마치 비폭력이 원칙이나 되는 양 사람들을 말리는 부정적 상황으로 나타난 때도 있었어요. 그러나 6월 항쟁까지 가는 기간 동안에는 그것이 약이 됐죠.
대중의 자발성
저자는 당시 항쟁 과정에서 나타난 대중의 폭발적 진출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대중의 자발성에 큰 신뢰를 보낸다. 이 책은 운동이 거대하게 성장하는 시기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기존 좌파보다도 더 단호하고 급진적인 투사로 변할 수 있음도 새삼 일깨워 준다.
국본 측이나 학생들, 전두환 정권과 민정당 관계자 그 누구도 6·10 국민대회가 그렇게 큰 규모로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지만, 더더구나 6·10 국민대회가 일회성 시위로 끝나지 않고 6월 항쟁으로 진전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311)
6·10 국민대회가 6월 항쟁으로 상승·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명동성당 농성 투쟁과 넥타이 부대 시위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대단히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명동성당 농성 투쟁이 운동권에 의해 조기에 해산될 뻔했던 것을 생각하면 ‘역사의 방향’이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 명동성당 농성 투쟁의 지속을 주장했던 사람은 대체로 활동가나 학생운동 지도부와는 거리가 있는, 문자 그대로 시민과 일반 학생으로 구성된 민중이었다.(316)
민중은 운동권 학생이 시위대의 투지나 열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지도부의 명령에 고식적으로 따르거나 그럴싸한 논리로 투쟁을 멈추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나약한 모습을 보일 때, 투쟁을 이끌어가는 핵심적 역할을 했다.(615)
국본과 학생운동 지도부가 머뭇거리고 당황하는 동안, 평범한 민중이 주도한 명동성당 농성 투쟁으로 항쟁은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런 압력을 받아 국본은 6·18 대회와 6·26 대회 등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저자의 신뢰는 ‘비폭력 대 폭력 논쟁’을 다룬 부분에서도 볼 수 있다. 당시 국본과 서대협의 비폭력 시위 방침은 논란의 대상이었고 앞서 지적했듯이 항쟁 기간에는 부적절한 방침이었다. 고속도로·철로 점거 등을 ‘폭력 시위’에 포함시킨다는 점에서 저자의 ‘폭력’ 개념에는 모호한 점이 있지만, 대중의 전투성이 항쟁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은 분명한 듯하다.
논쟁의 핵심은 비폭력을 주장하든 폭력을 주장하든 얼마나 철저히 … 싸우려 했는가가 중요한 준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국본의 비폭력 주장은 시위에 많은 시민이 참여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고, 여러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렇지만 국본이나 서대협은 명동성당 농성 투쟁과 그에 대한 호응 투쟁이 갖는 의미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6월 15~16일경부터 19일경까지 계속된 여러 지역에서의 강력한 투쟁은 명동성당 농성 투쟁과 그에 대한 호응 투쟁이 큰 영향을 미쳤고, 부산과 대전 등지에서의 과감한 투쟁에 고무된 측면이 있었다. 강력한 투쟁은 젊은이들의 투지를 달군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준 것이다.(648)
저자는 폭력을 수반한 이런 “강력한 투쟁”이 대중의 사기를 고무했고, 나아가 정권으로 하여금 군대 투입을 주저하게 만들고 6·29 선언을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고 주장한다. “만일 6월 항쟁이 비폭력으로 일관했더라면 광주 항쟁에서 시민·학생 들이 공수부대와 정면 대결해 싸우고 퇴출까지 시켰던 엄청난 폭발적 투쟁력이 6월 항쟁 곳곳에서 시현되는 것이 저지되었을 터이고, 6·29 선언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8)
그렇다고 저자가 기존 좌파의 구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저자는 6월 항쟁이 이전의 다른 항쟁과 달리 대규모의 전국 동시다발 항쟁이 될 수 있던 데는, 대학의 팽창으로 지방까지 대학이 확산됐다는 점과 더불어 민통련 등 지방 조직이 있던 단체들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고 평가한다.
좌파와 민주대연합
다른 한편, 저자는 야당과 재야의 광범한 민주대연합 형성이 항쟁의 규모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됐다고 본다. 이러한 민주대연합을 상징하는 것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다. 국본은 5월 27일 결성됐다. 국본 결성 과정 초기에 “호헌철폐·민주쟁취 운동을 진전시키기 위한 새로운 조직 틀을 어떻게 짤 것인지”를 두고 논쟁이 일었다. “개신교 측은 통일민주당과는 투쟁 과정에서 협력 관계를 갖되 새로 조직할 단체에 직접 들어오는 것은 찬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통련은 국민 대중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서는 정치인의 책임 있는 연합전선 참여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257) “민주당도 1986년의 경험 때문인지 재야와 직접적으로 한 조직에서 같이 활동하는 것을 망설였다. 여러 차례에 걸친 협의 끝에 모든 민주 세력을 망라하자는 천주교 측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드디어 4월 혁명 이후 가장 강력한 민주대연합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257-258)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저자는 “민주대연합이 갈등 없이 순항하고 투쟁의 목표가 단일화된 데는 학생들의 대중 노선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운동권 학생들은 1986년만 해도 야당으로서는 기겁할 만한 관념적 급진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야당이 가장 두려워했던 반미자주화 투쟁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638) … [그러나] 학생운동권은 5·3 인천 사태, 구학련 사건, 건국대 애학투 사건 등으로 혹독한 탄압을 받으면서 대중 노선을 제기했다. 대중 노선은 민주대연합에 적극적이게 했고, 야당의 유일무이한 투쟁 목표인 직선제를 쉽게 받아들이게 했[다.]”(639)
7 실제로도 “CA계는 대부분의 대학에서 소수 그룹으로 밀려났고, 6월 항쟁에서는 뒷전에 따로 수백 명씩 모여 ‘제헌의회 소집’을 외쳤기 때문에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639)
당시 좌파가 야당과 연합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광범한 대중이 보기에 김영삼과 김대중은 독재 정권한테 탄압받는 민주 인사였고, 그들의 선거 캠페인은 수만 명이 참가하는 일종의 반정부 집회가 되곤 했다. 그리고 “민주대연합의 큰 틀을 유지하고 직선제로 민선 민간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으로 투쟁 목표가 단일화된 것이 6월 항쟁을 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민주화 운동으로 추동시켜 6·29 선언을 가져왔다는 점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640) 최일붕도 지적하듯이, “당시에는 그런 방식으로 싸우지 않을 수 없었고 … 전술적으로도 그것을 거부한 채 싸운다는 것은 효과도 없을 뿐더러 심지어 고립될 수 있었[다.]”그러나 야당은 믿지 못할 세력이었다. 야당은 항쟁 기간 내내 결정적 국면마다 소심하게 동요했다. 특히 군대 투입설이 퍼질 때나 시위가 “과격화”될 때마다 그랬다. 예를 들어, “국본은 6·10 국민대회 이후 향후 진로를 설정하는 데 진통을 겪었다. 소장 측은 6·10 대회와 명동 투쟁에서 드러난 민주화 열기를 극대화하기 위한 투쟁을 빠른 시일 내에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신중론은 특히 민주당 측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들은 명동 투쟁과 같은 예정에 없던 투쟁이나 장외 투쟁이 뜻하지 않은 사태를 몰고 올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김영삼·김대중 등 민주당 수뇌부는 직선제를 반드시 쟁취하겠다고 말은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투쟁에 의해서 이번 기회에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이나 의지는 약했다. 민주당은 이미 원내 복귀를 생각하고 있었다.”(367)
따라서 문제는 ‘민주대연합’ 속에서 좌파가 야당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이었을 것이다. 저자도 당시 좌파가 야당을 지나치게 추수했다고 옳게 비판한다.
야당은 유신 체제 이전으로 돌아가 민선 민간 정부를 세우면 민주주의 사회가 온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야당의 민주주의 주장은 정치적 민주주의로도 빈약했을 뿐더러 사회적·경제적 민주주의는 외면하고 있었다. … 국본이 직선제에 매몰된 것만은 아니었다. 출범할 때 선언문에서 “집시법·언기법·형법과 국가보안법의 독소 조항, 노동법 등 모든 악법의 민주적 개정과 무효화 범국민 운동을 실천한다[고 명시했다.] … 그렇지만 위의 선언문의 내용이 6월 항쟁에서 유인물이나 대자보, 삐라, 구호, 야당에 대한 요구 사항으로 구체화되어 제시되지는 못했다.(640)
민주대연합의 성격을 볼 때 6월 항쟁은 대체로 자유민주주의를 실현시키는 수준에 머물게 되어 있었지만, … 학생운동권은 6월 항쟁에서 직선제를 기계적으로 받아들였다는 비판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 학생이든 재야든 일부 운동권은 민중민주주의 같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급진적 주장을 폈다. 그런가 하면 급진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는데도 6월 항쟁과 그 직후의 대통령 선거에서와 같이 사실상 야당에 매몰된 현상 추수주의적인 성향을 보여 주었다.(641-642)
저자는 좌파가 야당을 추수하게 된 원인으로 당시 학생운동이 채택한 대중 노선의 한계와 대중 의식의 한계를 주로 지적한다. “학생들이 직선제 개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주장을 펴지 못한 것은 당시 학생운동의 한계이자 NL계 대중 노선의 한계였다.”(642) 또, 6월 항쟁은 처음부터 “자연 발생적으로 발전해 간 측면이 강했”는데,(643) 따라서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의 대중 노선은 “직선제 추수주의, 곧 대중 추수주의를 넘어서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644)
이는 일리 있는 지적이지만, 더 핵심적인 문제를 간과한 평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당시 항쟁 참가자의 상당수는 ‘직선제 = 민주주의’라는 정식으로 협소화되지 않는, 더 폭넓은 의미의 민주주의를 바랐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주류 좌파가 야당의 직선제 주장을 자신의 강령으로까지 삼게 된 것은 당시 좌파가 민주대연합을 유지하려면 야당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점, 그리고 야당을 통한 선거 혁명론이라는 전략을 채택했다는 점과 관련 있다. 이 때문에 좌파의 정치적 독립성은 마비됐다. 따라서 당시 NL 노선의 한계는 대중 추수주의의 한계보다는 계급 타협적 관점의 한계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전두환은 왜 군대를 투입하지 않았나?
8 당시 야당은 미국을 민주주의의 구원자로 인식하고, 일부 좌파는 전두환을 단순한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으로 여기는 등 많은 사람들이 미국 변수를 중시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관점이 미국의 구실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6월 항쟁에 대응해 전두환은 왜 1980년 광주 항쟁 때와는 달리 군대를 투입하지 않았는가? 일부 청와대 측근은 전두환이 미국과 무관하게 군대 투입을 유보했다고 보고, 다른 일부는 미국의 개입이 결정적이었다고 본다.그래서 저자는 미국의 개입보다는 국내적 요인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6월 항쟁이 정권 교체기에 일어났으므로 노태우나 민정당 등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 광주의 기억, 군부의 항명 가능성 등이 그것이다. 즉, 노태우와 민정당 등은 비상조치가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여겼고 전두환 자신도 광주의 악몽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당시 군부 내에 군대 투입에 회의적인 기류가 상당했다. “군이 출동했을 경우 부산·대전·광주·전주·성남 등 여러 지역에서 뜻하지 않은 돌발 사태가 일어나 엄청난 비극적 사태나 파국이 초래될 수 있었다. 군인들에게는 광주 항쟁에서처럼 학생·시민들이 도처에서 사생결단하고 시위에 나서고 있어 동시다발로 일어난 시위 지역이 언제 어떻게 터질지 알 수 없는 지뢰밭으로 보였다.”(557) 또, 군 지휘관 중에는 “동원된 군이 누구 편에 서게 될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564) 저자는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은 거대한 민중항쟁이었다고 지적한다.
저자가 열거한 이런 요인들이 중요했다는 점은 사실일 것이다. 이처럼 군대 투입을 좌절시킨 이유를 국내 계급 세력 균형, 특히 아래로부터 투쟁이 강제한 힘의 균형 변화에서 찾는 것은 큰 장점이다.
그럼에도 저자가 특정 국면에서 미국의 개입이 국내 정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애써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든다. 예를 들어, 저자가 암시하는 것처럼 군동원령은 단지 야당과 국본 지도부를 겁주기 위한 심리전 차원의 엄포용이었을까? 그렇다면 왜 하필 전두환은 군투입에 반대하는 레이건 친서를 들고 온 주한 미대사 릴리와 면담한 직후에 군동원령을 취소했을까?
사실, 전두환은 6월 항쟁 기간 내내 군대를 투입할지 말지를 두고 계속 갈등했을 것이다. 군대 투입에 반대하던 미국의 개입은 지배계급 내 ‘온건파’의 입지가 강화하는 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개입이라는 변수가 없었다면 지배계급 내 강경파를 제어하는 것이 더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미국이 한국 민중의 민주화 염원을 지지해서 개입했다고 볼 수는 없다. 한 해 전 필리핀에서 일어난 민주화 항쟁의 성공을 보며 미국은 한국의 계급투쟁이 더 격화했다가는 정권 자체를 유지하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필리핀 사태 이후 미국 정부는 기회주의적인 입장으로 변했어요. 그 전까지는 노골적이고 일방적인 독재 정권 지지 입장이었는데, 필리핀을 겪고 나서는 친미의 범위 안에서라면 될 성싶은 자들을 지지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약간 바뀐 것이죠. 이 게 효과를 보게 된 것은 이후 1987년 6월 한국 상황에서입니다. 전두환 정권이 군대를 투입하려 하자 미국은 ‘군대를 투입하면 내전 상황으로 간다’, ‘제2의 필리핀 꼴 난다’해서 그걸 막게 됩니다.
6월 항쟁과 노동계급
10 반대로, 노중기는 시민 항쟁이 노동자 계급에까지 확산된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이 덕분에 지배계급이 민주화 선언을 급히 발표하게 됐다고 주장한다. 11
6월 항쟁을 학생과 중산층의 운동으로만 보는 관점이 흔하다. 이에 견줘 저자는 6월 항쟁을 “민중 항쟁”이라고 규정하며 항쟁의 성격을 좀더 정확히 보여 준다. 그런데 이 민중 항쟁 속에서 노동계급은 어떤 구실을 했는가? 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예를 들어, 임영일은 “학생-도시중간층-야당의 강력한 민주화 연합이 …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군부 지배 세력의 양보를 이끌어 내기까지 한국의 노동운동은 실제로 한 일이 없었다”고 주장한다.12 이런 점에서 계급 세력 균형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데서 산업 노동계급이 상당히 중요한 구실을 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저자는 이 문제를 직접 다루지는 않지만 항쟁이 주요 공업 단지로 확산됐고, 많은 산업 노동자들이 항쟁에 참가했음을 서술한다. 또, 다른 자료들을 보면, 정부가 시위가 공업 단지로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 사력을 다했음도 알 수 있다. 어쩌면 6월 항쟁 초기 국면이던 6월 13일 아침 회의에서 전두환이 무심코 던진 말이 많은 것을 알려줄 수도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근로자가 동요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이 글에서 나는 몇 가지 이견과 의문을 제기했지만, 그렇다고 이 책의 장점이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6월 항쟁을 다룬 탁월한 보고서다. 일독을 권한다. 특히, 2011년부터 시작된 아랍 민중의 민주화 항쟁을 보며, 6월 항쟁의 역사를 돌이켜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주
참고 문헌
김성익 1992, 《전두환 육성 증언》, 조선일보사.
노중기 2007, 《국가의 노동통제와 민주노조운동: [1987-1992]》, 한국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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