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한국 여성 노동의 현실과 투쟁
전 세계 자본주의 역사를 통틀어 여성은 늘 노동계급의 중요한 일부였고, 그 비중과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한국 자본주의 역사에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다. 여성 노동 차별이 여전히 뚜렷한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한국 여성 노동은 역동적으로 변화하며 성장해 왔다. 이 글에서는 한국 여성 노동의 변화와 그것이 여성해방에 끼칠 영향에 관해 다룰 것이다. 특히 여성 노동의 특징과 여성 노동자의 구실, 성차별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 하는 문제들을 둘러싸고 한국 여성운동 내에서 제기되는 주장을 다루면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으로 분석하려 한다.
여성의 노동자화
1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농·어업 분야에 집중 분포됐던 여성 취업자 비율은 판매직·생산직·서비스직으로 조금씩 분산되기 시작했다. 2
자본주의가 처음 이식되기 시작한 일제 강점기부터 여성들은 조금씩 노동자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여성은 압도적으로 농업에 종사했지만, 일부 여성들은 공업에도 진출했고 공장 노동자 중 여성의 비중은 일제 강점기 내내 3분의 1 수준이었다. 한국 자본주의가 독자적 발전 기반을 갖추면서 ‘여성의 노동자화’는 본격화한다. 1960~70년대 한국 자본주의는 수출품 생산 제조업에 집중 투자하면서 성장했는데, 여성 노동자들은 당시 팽창한 제조업 직종에 주로 진출했다. 1960년대 섬유·의류업 총고용의 75퍼센트가 여성 노동자였다. 고무, 전기·전자 산업에서도 여성의 비중이 늘었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전체 제조업 고용에서 여성 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40퍼센트까지 올라갔다.4 를 보면, 여성 노동자는 보건·사회복지 관련직의 70퍼센트, 교육 관련직의 70퍼센트, 경영·회계 관련 사무직의 44퍼센트, 판매직의 55퍼센트를 차지한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된 중화학공업 중심의 산업 구조조정으로 1980년대부터는 여성이 주로 고용돼 있던 노동집약형 제조업의 비중이 급격히 감소하게 됐다. 그렇다고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에 성장하고 있던 서비스업에 여성들이 새롭게 진출했다. 그 결과, 사무직·전문직·판매직 등에 종사하는 여성의 비율이 크게 증가했다. 2009년 직업중분류그림1-1과 그림1-2에서 보듯, 1980년대 이후 여성 취업자 수와 임금노동자 수는 대체로 증가했다.(1997년 경제 위기는 예외적인 시기인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임금노동자 비율의 증가 추세다. 1989년부터 통계청이 임금노동자 수를 별도로 집계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여성 취업자 중 임금노동자의 비율은 54퍼센트였다. 이 비율은 그 뒤 꾸준히 증가해 2011년에는 무려 75퍼센트에 이르렀다. 1989년 4백4만 명이던 여성 임금노동자 수는 2011년 7백47만 명으로 증가했다.
여성 노동자의 대다수는 결혼 후에도 일한다. 비록 출산 연령기에 여성들이 일을 그만 뒀다가 출산 후 다시 취업하는 경향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결혼과 출산 후에도 취업을 포기하지 않는 여성들이 늘어났다. 이는 가족의 생계에서 여성의 소득이 더 중요해졌음을 뜻한다. 배우자가 있는 1천1백62만 가구 가운데 맞벌이는 5백7만 가구로 전체의 43.6퍼센트를 차지했다(2011년 6월 통계청 조사 결과). 1982년 여성의 가계소득 기여도는 3.4퍼센트밖에 되지 않았지만, 2008년에는 12.7퍼센트로 높아졌다.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입 시기는 늦춰졌다. 2010년에 여성의 80.5퍼센트가 대학에 진학할 정도로 여성의 교육 기간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이 수치는 같은 해 남성의 대학 진학률(77.6퍼센트)보다 더 높은 것이다.
5 그러나 출산 연령기 여성들의 노동 참가가 일시적으로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후에 기혼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이 다시 늘어나므로 이런 진술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일각에서는 “성차별적인 한국의 노동시장 구조 때문에 여성은 서른 중반이 넘어가면 공식적 직업 영역에서 거의 사라진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전한 차별
여성이 전례 없이 집 밖에서 많이 일하고 있음에도 여성 노동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뚜렷하다. 우선,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비록 증가 추세(2011년 약 50퍼센트)이지만 남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에는 크게 못 미친다. OECD 평균에 비춰봐도 낮다. 전체 노동자 중 여성 노동자 비율 역시 절반에 못 미치는 42퍼센트다.
6 그러나 1997년 경제 위기 이후에는 그 격차가 거의 좁혀지지 않았다. 1998년 남성 평균임금 대비 여성 임금 비율은 62.7퍼센트였는데, 13년이 지난 2011년에도 그 비율은 62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은 OECD 국가들 중에서 임금 격차가 가장 큰 나라다. 한국은 OECD 평균임금 성비인 81퍼센트보다 20퍼센트포인트가량 낮다. 7
여성 노동에 대한 차별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임금이다.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이 늘어나면서 의식이 향상되고 투쟁과 조직이 성장한 결과, 여성 노동자의 평균임금이 상승해 남성과의 임금 격차가 많이 줄어들었다. 1975년 여성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남성의 41퍼센트가량에 불과했지만, 1989년에는 52퍼센트로, 1999년에는 63퍼센트로 그 격차가 줄었다.1989년 남녀고용평등법에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조항이 신설됐지만, 자본가들은 법을 교묘하게 피해 왔다. 예컨대, 대기업 효성의 울산 공장은 여전히 남녀 분리 호봉제를 실시한다. 이 때문에 2009년 효성 울산 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은 유사한 일을 하고도 남성 노동자 임금의 65퍼센트밖에 받지 못하는 현실을 고발하며 동일노동 동일임금 소송을 제기했다. 2000년대 금융권에서 도입된 ‘분리 직군제’는 또 다른 예다. 분리 직군의 압도 다수는 여성인데, 이 직군에 속한 노동자들은 다른 정규직 노동자들과 유사한 업무를 하지만, 별도의 직군으로 묶여 일반 직군으로 이동할 수도 없고, 승진도 제한되고, 임금도 낮다.
8 (그러나 이런 ‘성별 직종 분리’는 다소 완화되는 추세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뒤에서 다룰 것이다.)
여성의 평균임금이 남성보다 낮은 또 다른 이유는 여성들이 여성 편중 직종에서 많이 일하고 그 직종의 임금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다. 2006년 여성 노동자의 46퍼센트가 여성 비율이 70퍼센트가 넘는 이른바 ‘여성 직종’에서 일했다. 2006년 현재 ‘여성 직종’의 평균임금은 1백23만 원으로, 남성 비율이 70퍼센트가 넘는 ‘남성 직종’ 평균임금(2백37만 원)의 절반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9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고용 형태와 성에 따른 임금 차별을 이중으로 받는다. 2011년 3월, 남성 정규직 평균임금을 100으로 했을 때, 여성 정규직의 임금은 66.3, 여성 비정규직의 임금은 39.2밖에 안 된다.(남성 비정규직의 임금은 50.3이다.) 10
여성 노동에 대한 차별은 높은 비정규직 비율에서도 드러난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2000년대 들어 여성 노동자 중 비정규직의 비율은 70퍼센트에 육박했다. 최근 들어 비정규직 비율이 감소했지만 남성에 견줘 여성의 비정규직 비율은 여전히 높다. 2011년 3월, 남성의 비정규직 비율은 39.7퍼센트였는데, 여성의 비정규직 비율은 61퍼센트나 됐다.연령에 따른 여성 고용률은 점진적으로 변해 왔다. 미혼 여성들은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이, 더 오래 노동시장에 머문다. 그래서 고용률이 가장 낮게 떨어지는 연령대는 갈수록 늦어진다. 노동시장 진출 증가, 교육 수준 향상, 여성의 자의식 성장 등으로 여성의 결혼과 출산이 점점 더 늦어지기 때문이다. 출산 이후 노동시장에 남아 있는 여성도 계속 늘고 있다. 그럼에도 여성의 경력 단절 현상도 여전히 뚜렷이 나타난다. 즉, 출산 연령기에 여성 고용률이 급감하며 이른바 M자형 곡선을 그린다. 20대 중반에는 70퍼센트에 가까운 여성 고용률이 30대 초반에는 48퍼센트로 떨어진다(그림2). 일본을 제외한 OECD 국가들에서 M자형 곡선이 거의 사라지고 있는 현상과 대조적이다(그림3). 출산 연령기가 지난 후 여성의 고용률은 다시 증가하지만 이때 임시직 비중이 급증한다(그림4).
연령대별 여성 고용률 곡선이 M자형을 보이는 까닭은 국가의 보육 지원이 너무나 형편없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한국 정부는 출산율과 여성의 노동 참가율을 높이고자 보육 예산을 늘려 왔으나 턱없이 부족했고, 주로 민간 보육시설을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이윤 추구가 우선인 민간 시설은 보육의 질이 높지 않고, 질이 높은 경우는 매우 비싸다. 전체 보육시설 중 국공립 보육시설의 비중은 5.3퍼센트밖에 안 된다. 전체 아동의 11퍼센트만이 이용할 수 있는 수준이다. 직장 내 보육시설은 1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기업들은 직장 내 보육시설을 갖추지 않아도 별 처벌을 받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는 집권 첫 해에 2010년까지 국공립 시설 2천7백 곳을 확충하겠다고 했지만 말뿐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유연근무제는 여성에게 반토막짜리 일을 하고 줄어든 노동시간만큼 임금도 적게 받으면서 육아도 병행하라는 뜻이다. 이는 저임금 일자리만 늘릴 것이다.
여성 노동은 왜 차별받는가?
그렇다면 21세기에도 왜 여성 노동은 이렇게 차별받는가? 마르크스주의는 여성 노동이 차별받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여성 차별은 자본주의 이전의 계급사회에서도 존재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벌어지는 여성 차별은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체제를 유지하는 고유한 방식과 맞물려 나타난다.
‘여성의 노동자화’ 현상은 자본주의의 일반적 특징이다. 자본주의 경제 발전으로 노동 인력이 대거 필요해지면서 여성이 노동할 수 있는 영역이 훨씬 확대되고, 각종 가전제품, 조리된 가공식품, 상품화된 서비스 등을 구매해 가사노동의 일부를 해결할 수 있게 되면서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이 더 쉬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가는 여성에게 집안일만 맡기는 것은 낭비이고, 집 밖에서도 착취하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동시에 자본주의는 여성들이 집안에서 해야 할 구실도 강조한다. 자본주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려면 건강하고 교육받은 노동력이 끊임없이 공급돼야 하는데, 그러려면 누군가는 노동자들이 제대로 먹고 입고 쉴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야 하고, 다음 세대 노동력을 길러야 한다. 자본가는 이런 재생산 노동의 부담을 개별 가정의 여성에게 떠넘김으로써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물론 자본가는 여성 노동자를 착취해야 하므로 어느 정도 보육에 투자하지만 여성을 육아와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킬 정도로 충분히 투자하지는 않는다. 특히 유럽 국가들보다 복지가 취약한 한국에서 여성의 이중 부담이 더 두드러진다. 21세기에도 모성과 가족 가치가 강조되는 까닭이다.
자본가들은 여성이 본래 있어야 할 곳은 가정이라는 관념을 부추겨 여성을 부차적 노동력으로 취급해 여성들에게 싼 임금과 저질 일자리를 강요할 수 있다. 또, 여성들이 싼 임금을 받고도 일할 준비가 돼 있다는 사실을 이용해 임금 인상 압력에 대처할 수 있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정규직과 비정규직, 한국인과 이주자 등으로 나눠 차별하고 이간질해 노동자 전체의 단결과 상향 평준화를 가로막듯이, 남성과 여성 노동자를 이간질해 각개격파함으로써 마찬가지 효과를 노린다. 소수의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은 사회의 대다수를 이루는 노동계급을 분열시키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또, 여성이 집안에서 하는 구실은 각종 여성 천대의 원인이기도 하다.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되고 능력이나 자질보다는 외모로 평가받으며 성폭력·성희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페미니즘은 여성 노동이 차별받는 이유를 이와 다르게 설명한다. 다양한 조류의 페미니즘이 있지만, 페미니스트들은 대부분 가부장제 이론을 수용한다. 가부장제 이론의 핵심은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가부장제적 관계는 그대로 유지·적용된다는 것이다. 가부장제 이론은 그 출발부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생산, 재생산, 노동, 착취, 계급 등과 같은 마르크스 이론의 주요 개념들이 여성 삶의 주요한 측면들을 포착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에 대해서 페미니스트들 사이에 광범한 동의가 이루어졌다.”
13 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표적인 가부장적 자본주의 이론가 중 한 사람인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하이디 하트만가부장제는 … 여성을 지배할 수 있도록 상호의존과 연대를 형성하는 남성들 간의 사회적 관계들의 체계[이며] … 남성들은 여성을 지배하는 공통의 관계 속에 결합돼 있다. 즉, 그들은 그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 의존한다. … 가부장제가 기반하고 있는 물적 기초는 가장 근본적으로는 여성의 노동력에 대한 남성의 통제에 있다. 그러한 통제는 여성들이 필수적인 경제적 생산 자원에 접근하는 것을 배제하고 여성의 성을 제한함으로써 유지된다.
15 또,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여성의 노동력 참여가 급속히 증가했음에도 가족임금은 여전히 현재의 [노동시장에서] 성별 분업의 초석이 되”고 있고, 그 결과 “여성은 음식 준비와 접대, 청소와 세탁, 사람을 돌보는 일 등 여성이 가정에서 해 온 바로 그런 일을 [집 밖에서도] 한다”고 주장한다.
하트만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영국 노동운동에서 등장한 가족임금제(남성 가장 한 명이 아내와 자식들을 부양할 임금을 받는 대신 여성은 집안에서 양육과 가사를 전담하도록 하는 제도) 요구를 가부장적 요구라고 봤다. 즉, 남성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공모한 결과라는 것이다.가부장제 이론이 광범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사회의 단면과 여성들의 삶의 경험을 어느 정도 반영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여성보다는 남성이 집안에서 더 존중받고, 집안일에서 자유롭고, 돈줄을 쥐고 있다는 것이다. 가정 폭력을 저지르는 쪽도 주로 남성이다.
그러나 가부장제 이론이 남성과 여성 노동자의 관계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하트만의 가부장제 이론은 남성의 여성 노동력 통제를 여성 차별의 핵심 원인으로 본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 노동자들을 통제하고, 필수적 생산 자원에 접근하는 것을 막을 권력이 없다.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의 노동은커녕 자신의 노동조차 통제할 수 없고, 그들 자신도 생산 자원 접근에서 철저히 배제돼 있다. 그들은 무엇을, 얼마나, 언제, 어떻게 생산할지 결정할 권한이 없다. 마르크스가 주장했듯이, 그들은 생산과정과 생산물로부터 철저히 소외돼 있다. 여성의 저임금, 비정규직화, 성별 직종 분리 등은 남성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가 결정한 것이다.
16 이는 여성의 저임금이 남성 노동자의 임금도 위협하며, 따라서 여성의 임금 수준을 높이려면 남성과 여성 노동자가 단결해 싸울 필요가 있음을 보여 준다. 게다가 여성의 임금이 점점 가계소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현실에서 여성의 저임금은 가족의 생계비를 떨어뜨리는 구실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을 남성 노동자가 환영할 이유는 없다.
무엇보다 이런 차별로부터 남성 노동자가 얻는 이익이 없다. 여성이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고통받는 것은 자본가에게는 확실히 이익이지만, 남성 노동자에게는 이익이 아니다. 여성의 저임금은 오히려 남성의 임금을 떨어뜨리는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다. 최근 한국노동연구원이 발표한 조사 결과를 보면, 여성 노동자 비중이 높은 작업장일수록 정규직 평균임금이 낮아지는 경향이 있다.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어쨌든 여성이 양육을 전담하게 된 것은 남성 노동자에게 이익 아닌가’ 하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여성의 임금이 남성보다 적고 정부의 보육 지원이 턱없이 부족한 조건에서는 주로 여성이 아이를 보게 되겠지만, 육아에 대한 사회적 투자가 늘어나 안심하고 아이 맡길 곳이 많아지고 개별 가정의 육아 부담이 줄면 남성과 여성 노동자 모두에게 이익일 것이다. 자본가가 재생산의 부담을 개별 가족에게 전가하는 것은 물론 노동계급 여성에게 더 많은 고통을 안겨 주겠지만, 남성 노동계급에게도 엄청난 헌신을 요구한다. 노동계급 여성들이 무보수 가사노동을 전담하거나 임금노동과 가사를 병행하느라 집 안팎에서 고통받고 있는 한편, 노동계급 남성들은 가족 생계비와 양육비를 벌려고 초과근무를 밥 먹듯 하며 온갖 부당한 처우를 참고 일해야 한다.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는 여성해방을 위한 실천에서 매우 중요한 차이를 낳는다. 가부장제 이론을 일관되게 적용하면 우리는 남성 노동자를 여성 노동자의 이익을 침해하는 집단으로 여기고 그들과 투쟁을 벌이거나 멀리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전희경은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저임금과 차별 해고에 적극적으로 공모해 온 예에서 보았듯이,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의 ‘계급적 이해’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봤듯이, 두 집단의 이해관계는 일치한다. 이런 관점에 선다면 여성 노동자의 투쟁에 남성 노동자들의 연대를 건설하고자 애쓸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남성 노동자들의 성차별적 태도에 대한 비판과 논쟁을 동반하면서 말이다.(가부장제 이론이 노동운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여성 노동은 주변화됐는가?
여성 차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상이한 분석은 남성과 여성 노동자의 관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여성 노동자들이 사회 변화와 여성해방에서 어떤 구실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도 차이를 낳는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에서 차지하는 특수한 지위를 보고 노동계급을 주목했다. 노동계급은 모순적인 양면성이 있다. 노동자들은 극심한 노동의 소외를 겪는다. 그들은 삶의 중요한 모든 결정권에서 배제돼 있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자신감이 없고 수동적이고 보수적인 관념에 찌들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낳는 착취와 억압 때문에 노동자들은 현실에 불만을 품고 저항에 나서기도 한다. 노동자들이 집단적 행동, 특히 파업에 나설 때 자본가의 이윤에 큰 타격을 주는 그들의 위력이 드러난다. 즉, 노동자들은 단지 착취당하는 불쌍한 대상이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집단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을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자들”이라고 불렀다.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계급의 중요한 일부라는 사실은 여성 노동자들도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자들”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여성 노동자들을 가부장제의 희생자로만 여긴다면 그들이 노동계급 고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 또, 여성의 노동이 집안일의 복사판이라고만 여긴다면 여성이 왜 가정주부로서는 발휘할 수 없는 힘을 노동자로서 발휘하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페미니스트들은 대부분 여성들이 노동자로 대거 진출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여성들이 차별받는 현실을 보며 여성 노동이 주변화됐다는 주장도 동시에 한다. 그런데 주변화에 방점을 찍는다면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 집단적인 힘을 발휘하고 자본주의 생산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사실보다는 주변화된 희생자라는 점을 더 주목하게 된다. 그러나 여성 노동이 주변화됐다는 주장은 여성 노동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다. 여성 노동의 양측면을 모두 봐야 한다. 여성 노동이 차별받는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별받는다는 사실이 곧 여성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게 남성 노동자들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인 것은 아니다. 오늘날 많은 여성들은 자본주의 체제 작동에서 핵심적인 산업과 서비스 부문에서 일한다. 지금부터는 여성 노동이 주변화됐다는 주장의 근거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문제점을 짚어볼 것이다.
18 1990년대 들어 여성들이 대거 진출한 사무직, 교육 관련직, 보건·사회복지 관련직 등은 대체로 ‘혼성 직종’에 속한다. 1995~2000년 교육·보건·행정·과학 등 이른바 전문직으로 분류되는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 노동자의 비중이 36.5퍼센트에서 45.9퍼센트로 크게 증가했고, 전문 기술직의 여성 비중도 2000년대 들어 늘고 있다. 19
여성 노동의 주변화를 말할 때 성별 직종 분리를 근거로 많이 제시한다. 여성과 남성의 직종 자체가 아예 분리돼 있고, 여성은 노동시장에 진출하더라도 집안일의 연장인 직종에 몰리고, 보조적이고 주변적인 2차 노동시장에서 주로 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별 직종 분리가 여전히 나타나는 가운데서도 여성들은 점점 다양한 직종으로 진출했다. 2006년에 여성 노동자의 45퍼센트는 ‘여성 직종’에서 일했지만, 38퍼센트는 ‘혼성 직종’에서 일했고, 혼성 직종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임금은 ‘남성 직종’의 평균임금에는 못 미치지만 ‘여성 직종’의 평균임금보다 20퍼센트포인트가량 더 높았다. 또, 여성의 16퍼센트가량은 ‘남성 직종’에서 일한다. 여성의 비율이 비교적 높은 사무직, 판매직, 서비스직 등은 탈숙련화되고 단순한 업무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지만, 숙련 정도로만 업무의 중요성을 판단할 수는 없다. 남성들이 주로 일하는 중공업 역시 첨단 생산 설비 도입으로 상당히 탈숙련화돼 있다. 그렇지만 이런 일은 현대 자본주의가 굴러가는 데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노동이다. 또, ‘단순 노무직’이나 ‘단순 제조업’으로 분류되는 일조차 상당한 경험이 필요한 일들이 많고, 여성 노동에 대한 차별적 편견이 제거된다면 더 높게 평가해야 할 직업들이 있다는 연구 조사 결과도 있다.심지어 여성들이 실제로 그들이 집안에서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할 때조차 사회적 노동의 일부로서 하는 것과 집에서 개별적으로 하는 것은 명백히 다른 특성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생산과정에서 공장과 사무실에서 수행되는 노동을 변화시키는 방식이다. 생산 라인에서 식품을 가공하는 것은 가정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것과 조금도 관계가 없다. … 재봉틀에 앉아 하는 일처럼 공장에서 하는 어떤 특정한 일이 집에서 하는 일(또는 원래 집에서 했던 일)과 비슷하다고 해도, 그 노동의 성격은 공장 생산 때문에 바뀌게 된다. … 궁극적인 생산물도 그 노동자가 자신을 위해, 아니면 쓰거나 팔기 위해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22 자본가의 처지에서도 특정 업무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발전시킨 노동자를 계속 새로운 사람으로 교체해 처음부터 다시 그 일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은 손해다.
여성 노동자 중 비정규직이 많다는 것을 여성 노동 주변화의 근거로 들기도 한다. 다들 알다시피 여성 노동자 중 비정규직 비율은 여전히 매우 높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계속 줄어드는 추세다. 2011년 현재 여성 노동자의 40퍼센트가량은 정규직이다(표1). 게다가 비정규직이 곧 주변적 일자리는 아니다. 자본주의가 굴러가는 데서 꼭 필요하고 중요한 일자리인 경우가 많고, 모두 잠시 일하다가 금방 그만두는 성격의 일자리도 아니다. 비정규직의 21.3퍼센트는 상용직이다(2011년 3월). 더 자세히 살펴보면, 기간제 노동자의 59.6퍼센트, 파견 노동자의 66.2퍼센트, 용역 노동자의 61.6퍼센트가 상용직이다.2001.8 | 2002.8 | 2003.8 | 2004.8 | 2005.8 | 2006.8 |
70.9 | 70.7 | 69.5 | 69.2 | 69.5 | 67.7 |
2007.3 | 2008.3 | 2009.3 | 2010.3 | 2011.3 | |
67.5 | 65.5 | 64.9 | 63.5 | 61 |
출처: 김유선, ‘비정규직 규모와 실태’, 각 년도
여성이 호황기에 투입됐다가 불황기에 퇴출되는 산업예비군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이 또한 옳지 않다. 산업예비군이라는 용어는 마르크스를 차용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호황과 불황을 반복하는 자본주의의 특성 때문에 실업 상태의 인구(상대적 과잉인구)가 자본주의에서는 언제나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며 이를 산업예비군이라고 불렀다. 자본이 계속해서 생산수단을 혁신해 산업의 구성이 바뀌면 기존의 노동자를 퇴출시키거나 새롭게 고용을 늘리는데, 산업예비군은 이 과정을 용이하게 해 준다.
23 여성 노동자는 이 세 유형 중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는다. 마르크스도 여성 노동자를 통째로 산업예비군에 끼워넣지는 않았다.
마르크스는 산업예비군의 유형을 유동적 형태, 잠재적 형태, 정체적 형태로 구분했다. 유동적 산업예비군은 성인이 될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고용되는 소년 노동과 같은 집단을 뜻했다. 잠재적 산업예비군은 농촌 인구처럼 도시 노동계급으로 전환될 수 있는 집단을 뜻한다. 이 집단은 한 번 노동계급으로 유입되면 이전의 직업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정체적 산업예비군은 일상적 실업자군처럼 자본가가 멋대로 처분할 수 있는 노동력을 뜻한다.24 실제로 전쟁 기간 동안 여성들을 생산에 끌어들이려고 애썼던 국가가 전쟁이 끝나자 태도를 바꿨다. 전쟁 기간 동안에는 공공 보육시설 확충 등 노동 여성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투자가 대대적으로 이뤄졌지만, 전쟁 후에는 더는 이런 조처들을 보장하지 않았고 여성의 가족 내 구실을 다시 강조하기 시작했다. 1943~48년 영국에서는 전쟁 관련 산업을 중심으로 여성 1백25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그러나 여성의 이탈은 일시적이었다. 특히 전후 장기 호황이 시작되면서 여성들이 빠르게 노동 인구에 흡수됐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이 전쟁 같은 예외 상황에서만 노동하게 되는 일시적이고 일회용인 노동자들이 아니라, 노동 인구의 영구적 일부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25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산업예비군임을 보여 주는 증거로 제2차세계대전을 제시한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서구에서 징병으로 비게 된 남성의 일자리를 여성들이 메웠지만, 전쟁이 끝난 후 남성들이 복귀하자 많은 여성들이 일자리를 잃게 됐다는 것이다.경제 위기와 여성 노동
26 여성을 우선적으로 정리해고하는 일이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당시 은행권에서는 여성 행원의 86퍼센트, 여성 대리(4급)의 18퍼센트가 여성 우선 정리해고로 쫓겨났다. 27 이것은 당시 정리해고의 성차별적 측면을 보여 줬다.
페미니스트들이 산업예비군론을 한국에 적용하는 구체적 사례는 1997년과 2008년 경제 위기다. 이때 여성 노동자가 우선적으로 퇴출됐다는 것이다. 경제 위기가 여성 고용의 양적·질적 측면을 모두 악화시킨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림5에서 보듯, 1997년 경제 위기는 여성 노동자 일부를 노동시장에서 밀어내는 결과를 낳았다. 여성 취업자 수는 남성 취업자 수보다 2배가량 많이 감소했다. ‘농협 사내 부부 정리해고’ 사건처럼 그러나 그림5에서 보듯, 1997년 경제 위기로 일자리를 잃은 것은 여성만이 아니었다. 남성들도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로 일자리를 많이 잃었다. 또, 취업자 총수가 아니라 임금노동자 수를 놓고 보면 남녀 감소폭의 차이는 훨씬 줄어든다. 게다가 1997년 경제 위기가 여성들을 노동시장에서 퇴출시킨 것은 아니었다. 위기 당시조차 여성 노동자의 더 많은 부분은 여전히 노동시장에 남아 있었고, 그 이후 여성의 노동 참가율은 빠른 속도로 회복됐다. 오히려 1997년 위기 이후에는 여성이 한동안 고용 증가를 이끌었다. 1998~2010년 남성은 농림어업을 제외한 취업자가 22.5퍼센트 증가했지만, 여성은 32.4퍼센트나 늘어났다.
오히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시장 퇴출이 아니라 여성 고용이 질적으로 악화한 측면이다. 경제 위기 이후 여성 상용직 비중은 급격히 감소했다. 1996년 41퍼센트였던 여성 상용직 비중은 1999년에 31퍼센트까지 떨어졌다. 경제 위기 이전까지 계속 좁혀졌던 남녀 임금 격차도 정체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경제 위기가 노동계급 전체에게 고통을 강요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 노동자들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 줬음을 보여 준다.
29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여성 노동자 중 정규직 비율은 꾸준히 소폭 증가했다.
2008년 경제 위기 직후인 2009년에도 여성 취업자 수가 약간 감소했고, 그 감소폭은 남성보다 더 컸다. 그러나 경제 위기의 타격이 1997년만큼 크지는 않았고 무엇보다 임금노동자 수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또, 그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회복해 2011년 상반기부터는 여성 취업자 수가 증가세로 돌아섰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전년 대비 여성 임금노동자 수는 증가했고, 특히 2010년 상반기에는 여성 상용 노동자가 큰 폭으로 증가했다.30 조순경 역시 경제 위기와 시장 원리의 확대는 복지의 원천이었던 임금과 기업 복지의 급격한 축소를 가져올 수밖에 없고, 이런 상황에서 단지 남성의 임금에만 의존할 수는 없어 여성이 주요 생계 소득원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31
경제 후퇴기의 효과를 너무 일면적으로 봐서는 안 된다. 경기 악화는 줄어든 ‘가장’의 임금을 벌충하려는 여성의 노동시장 진입을 촉진하기도 한다. 비록 더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수해야 하지만 말이다. OECD가 조사한 나라 15곳에서는 1974~75년 경제 위기 때 노동 인구 중 여성 비율이 되레 증가했다.경제 위기는 여성에게 또 다른 부담을 전가하기도 한다. 경제 위기 시기에 복지 예산 삭감 등으로 노약자, 어린이, 환자 등에 대한 복지가 축소되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개별 가정 여성의 몫이 된다. 경제 위기 시기에 자본주의 국가들이 ‘가족 가치’를 강조하고, 여성의 헌신과 봉사, 아내와 어머니로서 구실 등을 강조하는 보수주의를 강화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2010년 초 프로라이프의사회의 낙태 근절 캠페인과 이에 대한 정부의 동조는 이런 맥락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요컨대 경제 위기는 여성의 이중 부담을 강화하고 여성 고용을 악화시켰지만, 이런 측면이 영구적인 것은 아니었고 여성을 노동시장에서 퇴출시킨 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여성 노동에 대한 차별은 여러 측면에서 두드러지지만, 여성 노동자는 주변화되지 않았고 한국 노동계급의 영구적이고 중요한 일부로 자리매김해 왔다. 이런 사실은 한국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계급으로서 고유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음을 보여 준다. 실제로 한국의 여성 노동자들은 자신의 삶과 노동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오랫동안 투쟁했고 이 잠재력을 거듭 확인시켰다.
투쟁에 나선 여성 노동자들
32 여성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 초저임금, 인권 유린에 시달렸다. 한 여성 노동자의 수기는 당시의 끔찍한 노동조건을 잘 보여 준다.
한국 여성 노동자들의 삶·조직·투쟁은 한국 자본주의의 변화에 따라 역동적인 변화를 겪었다. 1960~70년대에는 수출품을 생산하는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산업의 중심을 차지했다. 자본가들은 시골에서 갓 올라와 온순하고 헌신적이며 값싼 미혼 여성 노동자들을 이 부문에 대거 고용했다. 이 시기에 여성의 노동자화는 남성보다 더 빨랐다. 제조업에 고용된 남성 노동자 수는 1963년 42만 8천 명에서 1985년 2백14만 7천 명으로 5배 늘어났지만, 같은 기간 여성 노동자 수는 18만 2천 명에서 1백35만 3천 명으로 7.4배 늘어났다.사장님, 일이 너무 힘들어요. 작업장이 너무 추워요. 기계가 너무 빨리 돌아 다칠까 두려워요. 감시하려고만 하지 말고 인간 대접 좀 해 주세요. 밥이 떡이네요. 잠 좀 자고 싶어요. 일요일에는 쉬고 싶어요. … 먼지가 너무 많이 나요. 목에서 까만 핏덩이가 나요. 팔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힘들어요. 시너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파요. 발이 퉁퉁 부었어요. 못하겠어요. 쉬고 싶어요. 쉬고 싶어요.
1960~70년대 내내 임금 인상 투쟁과 노조 인정 투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악독한 유신체제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영웅적으로 투쟁했다. ‘똥물 사건’으로 알려진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은 파업 농성을 해산하려는 경찰들에 맞서 알몸으로 저항했다. 콘트롤데이터 여성 노동자들은 결혼·임신 퇴직을 없애고 유급 산전산후 휴가를 쟁취했다.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과 신민당사 점거 투쟁은 독재 정권 하의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투지를 불어넣었다. 이 사건은 부마항쟁과 더불어 박정희 정권의 몰락에 중요한 구실을 했다. 당시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여성 노동자들이 단지 가부장제의 희생자가 아니라 노동자로서 차별과 억압에 맞서 집단적으로 투쟁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 줬다. 그뿐 아니라, 한국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일깨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당시 한 관찰자의 말처럼 “1980년대 중반 남성 노동자들이 스스로 행동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10년 이상 정의를 위해서 투쟁해 온 여성들의 어깨 위에 자신들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35 이 시기에 산업에서 비중이 커진 중화학 공업에 집중 분포된 남성 노동자들의 투쟁이 부상했고, 1987년 7~9월 대중파업에서 이들의 구실이 주로 부각되곤 한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들도 당시 전국의 산업 지대에서 파업 물결에 동참했다. 36 인천, 대구, 마산 공업단지 내 대부분의 섬유업체와 전기업체 들이 산업쟁의에 휘말렸다. 경인지역에서는 기혼 여성 노동자들이 투쟁에 적극 가담했고, 파업 중인 노동자의 부인들도 흔히 파업에 동참했다. 37
1970년대 중반부터 중화학 공업 중심으로 산업이 구조조정되면서 1970년대에 여성 노동자들이 주로 일했던 노동집약적 제조업 일자리가 1980년대에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1970년대에 결성된 여성 노동자 조직들이 유지되기 어려웠다.거대한 투쟁의 여파로 여성 노동자들의 조건도 개선될 수 있었다. 남녀고용평등법 등 여성 노동보호법들이 제정됐고, 1980년대 사무직 여성 노동운동의 핵심 요구였던 여행원제 폐지도 1992년에 쟁취했다.
38 한국노총 산하인 대규모 공공부문 노조의 여성 조합원 비율도 마찬가지로 높다. 예컨대 금융노조 조합원의 37퍼센트가 여성(3만 3천여 명)이다. 39
1980년대 폐업한 제조업 분야에서 밀려난 여성들은 노동시장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뒤 팽창한 사무직·전문직·판매직·서비스직 등으로 새롭게 진출했다. 1987년 노동자 투쟁 이후 금융, 교육, 공공기관, 병원, 통신 산업, 연구원 등 다양한 사무·서비스 직종에서 노동조합이 조직되자, 여성들은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됐다. 민주노총이 집계한 현황을 보면, 여성은 2010년 11월 현재 공공서비스노조원의 40퍼센트, 공무원노조원의 40퍼센트, 대학노조원의 41퍼센트, 보건의료노조원의 76퍼센트, 전교조 조합원의 63퍼센트, 사무금융연맹 조합원의 43퍼센트를 차지한다.여성 노동자들은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추진된 노동 유연화 등 노동조건 악화에 맞서 인상적인 투쟁을 벌였다. 예컨대 2000년 롯데호텔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요구하고 직장 내 성희롱에 맞서 74일 동안 파업을 벌였다.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 주로 일하는 작업장에서도 영웅적인 투쟁이 벌어졌다. 2007년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의 매장 점거 파업, 2011년 대학 청소 노동자들의 대학 점거 파업 등은 비정규직 차별의 현실을 고발했을 뿐 아니라,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도 투쟁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이랜드 노조 김경욱 위원장은 “점거 파업에 참가했던 조합원들은 정말 많이 변했다. 이제는 조합원들이 ‘우리가 투쟁에 앞장설 테니 위원장은 따라오기만 하라’고 할 정도”라며 여성들의 놀라운 능동성을 증언했다. 홍익대 청소 노동자들은 한겨울에 무려 49일 동안 학교 본관을 점거해 최저임금을 뛰어넘는 임금 인상을 쟁취했고, 다른 대학 청소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을 고무했다. 이 투쟁은 임금 인상이라는 성과도 낳았고, 관리자 앞에서 벌벌 떨던 중년 여성 노동자들에게 당당하게 큰소리칠 수 있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2011년 12월에는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직장 내 성희롱에 맞서 통쾌한 승리를 거뒀다. 이 여성 노동자의 굳건한 의지와 좌파, 여성 단체, 진보 정당, 민주노총 노동자들의 지지와 연대, 그리고 2011년 말 솟아오른 한미FTA 반대 운동의 파장 덕분에 이 투쟁은 승리할 수 있었다. 성희롱 피해가 산업재해로 인정됐고, 원청인 현대차가 원직 복직과 가해차 처벌을 직접 약속했다.
노동운동 내 성평등 문제
40 활동가 층에서 여성의 비중은 더 적다.
한편,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 잠재력이 언제나 잘 구현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가 여성들에게 가하는 일상적인 압력과 사회에 만연한 여성 차별은 여성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고 주도적 구실을 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곤 한다. 특히, 기혼 여성 노동자들은 대부분 육아 등 집안일과 집 밖에서의 노동을 동시에 해야 하는 이중의 굴레 속에 있어서 노동조합에서 주도적 구실을 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여성 노동자들이 집중적으로 조직된 작업장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 조직 노동자 중 여성의 비율은 아직 25퍼센트가량이고, 노동운동 내 많은 여성 활동가들은 이런 상황을 개선하고자 노동조합에서 여성위원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노조 지도부와 대의원 등에 여성할당제를 실시하라고 요구했다. 이런 요구가 반영돼 민주노총은 2003년부터 대의원대회와 중앙위원회의 30퍼센트를 여성에게 할당한다. 간부 중 여성의 비율이 지나치게 적은 상황을 개선하려면 제도적으로 여성의 비율을 높여 여성이 주도적인 구실을 할 수 있도록 고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제도만으로 여성 노동자들의 의식과 조건이 향상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민주노총 활동가들은 ‘여성할당제가 여성의 대표성 제고 및 여성의 노조활동 참여를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가?’ 하는 질문에 대체로 긍정적으로 답변하지 않았다.이런 상황을 개선하려면 노조 간부 직책을 여성에게 할당하는 것뿐 아니라, 노동조합의 여러 활동에서 실질적으로 여성들이 주도적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조직해야 한다. 무엇보다 여성 노동자들의 의식과 조직을 발전시키려면 여성 노동자들 자신이 투쟁에 나서도록 고무하고, 투쟁이 벌어졌을 때 승리할 수 있도록 연대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지난 수십 년 동안 여성 노동자들의 의식과 조직을 발전시킨 핵심 요인은 그들 자신의 투쟁 경험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사회에서 천대받으면서도 투쟁의 주역이 돼 왔고, 이를 통해 차별을 완화하고 계급의식을 발전시켜 왔다. 따라서 낮은 여성 간부 비율에 주목해 비관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 잠재력에 주목하고 그것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한편, 노동조합이 성평등 쟁점에 관심이 부족한 상황에서 노동조합 여성위원회가 이런 문제를 다루는 기구로서 의미 있는 구실을 하고 있는데, 동시에 성차별 문제가 노동조합 전체의 과제가 되기보다는 여성위원회만의 과제가 되는 딜레마도 있다. 이것은 노조의 부문주의적 한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런 한계를 뛰어넘으려면 노조 내 사회주의자들의 구실이 중요하다. 사회주의자들은 성평등 쟁점을 노동조합 전체의 과제로 삼도록 촉구하고, 특히 투쟁 속에서 여성과 남성 노동자들이 단결할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
물론 현실에서 단결이 효과적으로 구현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부문주의와 성차별주의는 남성과 여성 노동자의 단결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많은 노동조합 간부들이 성차별 문제에 무신경하고, 이런 문제를 다루는 것을 흔히 조합 내 여성위원회나 여성 부서만의 과제로 여기곤 한다. 심지어 성차별적인 언행을 하기도 한다.
42 알려진 1998년 현대자동차 식당 여성 노동자 정리해고다. 43 이것은 명백히 여성 노동자들을 희생양 삼은 성차별적이고 배신적인 타협이었다. 당시 식당 여성 노동자들은 천막농성에 참여하고, ‘여성 사수대’를 조직하는 등 투쟁의 선두에 서서 누구보다 열심히 싸웠다.
그러다 보니 노동운동 안팎의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제 이론을 적용해 이런 상황을 설명하고 대처하려 했다. 많은 여성운동가들이 ‘노동운동의 가부장성’ 주장에 공감한다. ‘노동운동의 가부장성’의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곤 하는 것이 바로 ‘밥꽃양’으로44 김광식 집행부의 정리해고 타협안은 1차 조합원 투표에서 부결됐고, 2차 투표에서도 찬성 50퍼센트를 간신히 넘겼다. 식당 여성 노동자 정리해고 수용에 대한 반발이 반영된 것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남녀 노동계급의 이해관계가 상반된다는 점을 증명하는 사례가 아니라, 노동조합 상근 간부층의 보수성과 타협적 태도가 단결과 투쟁에 얼마나 해악적인지를 보여 준 사례라고 봐야 한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이 사건을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대립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사례로 여긴다. 그러나 남성 노동자들의 태도가 모두 같지는 않았다. 김광식 집행부의 배신으로 식당 여성 노동자들뿐 아니라 다른 부문에서 일하던 남성 노동자 1백33명도 해고됐다. 무엇보다 점거농성에 참가한 남성 노동자들은 대부분 식당 여성 노동자를 희생양 삼는 타협안을 환영하지 않았다. 오히려 투쟁에 적극 참가한 조합원들은 김광식 집행부에게 불신과 비난을 나타냈다.남성 노동자들이 보수적 태도를 취한다면 마땅히 비판받아야 하고, 이런 태도를 교정하기 위한 노동운동 내 논쟁과 투쟁이 필요하다. 그러나 남성 노동자들이 종종 성차별적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투쟁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여성 차별로부터 이익을 얻고 차별을 유지하는 구조를 만들어 내는 장본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성차별적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많은 남성들이(그리고 상당수 여성들도) 그런 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의식은 고정불변이 아니다. 특히, 투쟁의 경험을 통해 변할 수 있다. 가령, 2000년 롯데호텔 파업 과정에서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 노동자들도 동등한 노동자라는 점을 깨닫게 됐고, 여성 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성희롱을 겪는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파업 과정에서 남성 노동자들은 성희롱 근절 요구를 함께 내걸고 투쟁했다. 당시 파업에 동참한 남성 노동자들은 파업이 끝난 후 “더는 여성 동료들을 ‘미스 김’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자본주의는 노동계급의 분열과 성차별주의를 강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여성과 남성 노동자들을 비슷한 조건으로 내몰아 단결의 조건을 형성하기도 한다.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함께 일한다는 사실 때문에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는 단결해서 함께 싸울 수 있고, 또 단결할수록 서로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사실 노동자 투쟁에서 여성들만의, 또는 남성들만의 투쟁은 찾아보기 어렵다. 남성과 여성 노동자가 함께 일하는 작업장에서 투쟁이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려면 남녀 노동자의 단결이 매우 중요하다. 일부가 파업에 참가하지 않으면 파업 파괴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한 성이 집중된 작업장도 마찬가지다. 가령, 대표적인 여성 비정규직 투쟁이었던 2007년 이랜드 투쟁이나 2011년 대학 청소 노동자 투쟁에서도 남성 노동자들을 포함한 노동자들의 지원과 연대가 투쟁이 승리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청소 노동자 파업은 점거가 연대의 구심점을 형성해 사회적 연대를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쌍용자동차나 한진중공업 같은 남성 작업장의 투쟁에서는 가족대책위의 여성들과 희망버스로 조직된 성별을 뛰어넘은 지지와 연대가 매우 중요했다.
개별 투쟁에서뿐 아니라, 여성 차별의 토대인 자본주의 체제를 뿌리뽑기 위해서도 남성 노동자들과의 단결이 필수적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려면 자본주의의 또 다른 주요 부위인 남성 노동자들이 함께 대중적 파업을 벌이고 투쟁해야만 진정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45 여성 독자노조(전국여성노동조합)를 만들었다. 전국여성노동조합은 경제 위기 상황에서 사각지대에 몰린 여성 노동자 중 일부를 조직하는 구실을 했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더는 여성 노동자들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전국여성노동조합의 선언과 달리, 2000년대에 일어난 여성 비정규직 투쟁과 파업의 대다수는 오히려 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에서 일어났고 그중 일부는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며 성과를 얻었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 노동자가 함께 조직을 결성하고 연대를 조직하는 것이 여성 노동자 투쟁이 방어받고 승리하는 데 더 유리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일부 여성운동가들은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대공장 남성 정규직 중심의 노동조합”이 더는 여성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국가와 자본, 남성의 이해관계 속에서 주변 노동력으로 밀려나고 있는 여성 노동자를 조직하고 그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조직”으로서맺으며
지금까지 한국 여성 노동의 현실과 그것이 여성 노동자 투쟁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봤다. 한국의 여성 노동은 여전히 차별당한다. 특히, 1997년 경제 위기 이후로 비정규직이 확산되고 남녀 임금 격차가 좁혀지지 않는 등 여성 노동자의 삶이 공격받았다. 이것은 여성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는 배경이 된다. 그러나 차별받는다는 사실이 곧 여성 노동이 주변화됐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한국의 여성 노동은 역동적으로 변화하며 성장했고, 한국 자본주의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가 됐다. 이런 사실은 여성 노동이 주변화됐고 경제 위기 이후 그 경향이 가속화했다는 여성운동 내 일부 주장들과는 차이가 있다.
여성 노동이 한국 자본주의의 중요한 일부라는 사실을 보면, 여성 노동자들은 주변화된 희생자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심장인 이윤에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노동계급 고유의 힘이 있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여성 노동자들이 남성 노동자들과 비슷한 조건에서 함께 투쟁할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여성들이 노동계급으로 대거 진출하고 있는 오늘날, 여성 노동자는 여성 천대를 낳는 토양인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여성해방의 열쇠 구실을 할 수 있다.
주
- 강이수 2011, pp266-269. ↩
- 강이수 2011, pp291, 297. ↩
- 강인순 2004, pp78-84. ↩
- 금재호·윤자영 2011, pp265-267, 원자료는 통계청이 2009년 8월에 발표한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 ↩
- 정희진 2005, p54. ↩
- 강이수 2011, 원자료는 노동부, ‘임금구조기본통계조사’. ↩
- 금재호 2010, p49. ↩
- 박선영 외 2009, p35, 원자료는 한국고용정보원 2006, ‘산업 및 직업별 고용구조조사’. ↩
- 김유선 2011, p7. 김유선 소장이 속한 한국노동사회연구소와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등 진보적 노동 연구소들은 통계청이 사용하는 분류법으로는 비정규직 통계를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보고 통계청이 2001년부터 발표한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를 원자료로 비정규직 규모를 자체적으로 산출한다. 이 글에서 사용하는 비정규직 관련 통계는 특별한 설명이 없으면 김유선 소장의 분류법을 따른다. ↩
- 김유선 2011, p20. ↩
- 정부는 ‘육아기 여성 노동자들의 일·가정 양립’을 유연근무제의 도입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이것을 지렛대로 단시간 근로가 가능한 직종을 늘려 전반적인 노동유연화를 꾀하려 한다. 따라서 유연근무제 도입에 반대하는 것은 단지 여성 노동자들만의 과제가 아니다. ↩
- 전희경 2008, p146. ↩
- 한국의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그의 이론을 빌어 여성 노동이 차별받는 원인을 설명하곤 한다. 박기남 2005, 강이수·신경아 2001 등. ↩
- 하트만 1989, 강조는 인용자. ↩
- 가족임금제가 남성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이 공모한 결과라는 주장에 대한 비판은 저먼 2007, pp49-67를 참고하시오. ↩
- 황선웅·장희은 2011. ↩
- 전희경 2008, p149. ↩
- 박선영 외 2009, p35. 원자료는 한국고용정보원 2006, ‘산업 및 직업별 고용구조조사’. ‘여성 직종’은 여성의 비율이 70퍼센트 이상인 직종, ‘남성 직종’은 남성의 비율이 70퍼센트 이상인 직종, ‘혼성 직종’은 여성의 비율이 30~70퍼센트인 직종을 말한다. ↩
- 정진상 외 2006, pp102-105. ↩
- 김양지영 2011, 김미주 2000. ↩
- 저먼 2007, p152. ↩
- 한국비정규노동센터 2011, p24. ↩
- 마르크스 1994, pp808-810. ↩
- 강이수·신경아 2001, p142 등. ↩
- 저먼 2007, p162. ↩
- 1999년 1월 농협은 사내 부부 중 여성을 우선적 명예퇴직 대상자로 선정하고 사직 압박을 가했다. 그 결과 사내 부부 7백52쌍 중 6백88명이 퇴직했다. 그 대상자였던 두 여성은 농협의 여성 우선 정리해고가 남녀고용평등법 위반이라며 법원과 검찰에 농협을 고소했다. ↩
- 김영주 1998. 김영주는 당시 금융노련 부위원장이다. ↩
- 금재호 2011, pp48-49. ↩
- 한국노동연구원 동향분석실 2010, pp12-13. ↩
- 저먼 2007, p170에서 재인용. ↩
- 조순경 2000, pp316-317. ↩
- 구해근 2002, p65. ↩
- 구해근 2002, p79에서 재인용. ↩
- 구해근 2002, p152에서 재인용. ↩
- 강인순 2011, p9. ↩
- 강인순 2001, 10장. ↩
- 구해근 2002, p258. ↩
- 2010년 11월 민주노총 조직 현황(산업별), http://nodong.org/formation 민주노총은 일부 지부에서 성별 통계가 누락돼 실제 총수와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민주노총이 산출한 최신 통계인데다 전반적 경향을 보여 줄 수는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통계라고 생각해 인용한다. ↩
- 한국노동연구원 2010, p140, 2008년 통계. ↩
- 이병희 편 2008, p192. ↩
- 민주노총 2010, pp54-55. ↩
- 1998년 현대자동차 파업 당시 식당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제목이다. ‘여성 노동자들은 평상시에 남성들의 밥을 지어주다가, 투쟁할 땐 꽃이었다가, 결국 희생양이 된다’는 뜻이다. ↩
- 1997년 경제 위기 당시 현대자동차는 노동자 1천5백여 명을 정리해고하려 했다. 이에 맞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36일 동안 공장을 점거하는 위력적인 파업을 벌였다. 이 투쟁의 힘 덕분에 구조조정 규모를 대폭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현대자동차노조 김광식 집행부는 정리해고 철회가 아니라, 식당 여성 노동자들을 포함한 2백77명 정리해고안을 수용했다. ↩
- 이에 대한 생생한 상황 묘사로는, 현대자동차 한 현장조합원 2001을 참고하시오. ↩
- 최상림 1999. 최상림은 여성 독자노조인 전국여성노동조합의 초대 위원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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