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한국 복지국가 논의 지형과 좌파의 과제
진보정당들뿐 아니라 기성 정당들까지 보편적 복지와 무상복지 등을 내세운다. 특히 민주당(민주통합당)은 그 전부터 진보진영이 요구하던 복지 정책들을 대부분 자신의 공약으로 내놓았다. 부자들에게 세금을 걷어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하는가 하면 비정규직법 개정 등 노동 정책에서도 ‘좌클릭’을 거듭했다. 2011년 가을 당시 서울시장 오세훈이 무상급식에 반대하며 몽니를 부리다 결국 물러난 사건은 복지 논쟁의 좌경화를 극적으로 보여 줬다.
새누리당의 실질적인 주인이 된 박근혜도 이미 2010년 말에 이명박과 거리를 두며 ‘한국형 복지국가론’을 얘기했고 “아버지의 꿈” 운운하며 복지국가를 언급하곤 했다. 박근혜는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면서 ‘복지’를 당 정강·정책 1순위로 올려 놨다. 심지어 전에는 “복지 함정에서 탈출해 자활할 수 있는 인센티브[를] 부여”(7조)한다고 했던 것을 “보편주의와 선별주의를 아우르는 평생맞춤형 복지를 한국형 복지 모형으로 설정”(1조 1항)한다고 바꿨다. 개정 정강 2조에는 “일자리 창출과 고용 안정을 국정 운영의 최우선 목표로” 한다고 돼 있다.
이명박도 지난해 11월 29일 열린 국가경제자문회의에서 “0~5세 아이는 국가가 반드시 책임진다는 자세로” 무상보육 정책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물론 이명박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없다. 이명박은 2007년 대선 당시 무상보육과 함께 반값등록금을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이내 ‘선거용’이었다며 발을 뺀 전력이 있다. 실제로도 2012년 들어 시행된 보육 정책은 “국가가 반드시 책임”지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진보진영의, 심지어 민주당의 복지 요구를 두고 ‘복지 포퓰리즘’이라고 비난을 퍼붓던 자가 대중의 압력에 밀려 말을 바꾸게 된 것은 통쾌한 일이다.
이처럼 새누리당까지 말로는 복지를 외치고 있지만, 복지 확대를 막으려는 우파의 공격이 실제로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조선일보〉는 박근혜 비대위가 새로운 정강·정책을 발표하던 날 “정치권에서 ‘성장’이란 단어가 실종됐다”며 한탄했다. 며칠 뒤에는 “민주·새누리 복지 공약, 알고 보니 민노당 것 다 베꼈네” 하며 기성 정당들의 ‘좌클릭 경쟁’을 비난했다.
게다가 세계경제는 여전히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유럽 재정 위기가 해결되지 않는 데다가 2008년 이후 세계경제를 떠받쳐 온 중국의 경제성장률도 둔화하며 위기가 더 심화할 조짐을 보인다. 한국 경제성장률 전망치도 크게 낮아졌다. 위기가 심화할수록 정부의 재정 지출 우선순위를 두고 사회의 최상층과 압도 다수 대중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생겨날 것이다. 당장 기업주들과 가장 가까운 관료 집단이 반발에 나섰다. 기획재정부는 복지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최근 정치권에서 나온 복지 공약의 실현 가능성을 검증하겠다고 달려들었고 청와대 경제수석 김대기도 “복지 과도하면 국가 부도로 가든지, 청년들이 다 갚아야 한다”고 협박했다.
따라서 설사 대선에서 복지 공약을 내세운 민주통합당이 집권한다 해도 자동으로 한국의 복지가 대폭 나아지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이다. 복지 확대를 강제할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충분히 구축되지 않는다면 한국 복지의 미래는 낙관하기 어렵다.
이 글에서는 지난 몇 년 동안 벌어진 복지 논쟁의 쟁점들을 정리하고, 특히 진보진영 내에서 제시되는 다양한 대안들의 장점과 약점을 평가할 것이다.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
보편적 복지는 소득 수준과 상관없이 한 나라의 구성원 모두에게 적용되는 복지 제도를 뜻하고 선별적 복지는 일정한 기준(대체로 소득 수준)에 따라 일부에게만 적용되는 복지 제도를 뜻한다. 예를 들자면, 가난한 사람 일부에게만 적용되는 기초생활보호제도는 선별적 복지에 해당하고, 무상급식이나 무상의료 제도는 보편적 복지에 해당한다.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 하는 쟁점은 복지 논쟁에서 중요한 쟁점이다.
1 요컨대 보편적 복지에도 명백히 선별 기준은 있다. 그러나 그 기준은 사람들의 필요이므로 보편적 복지에서 선별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한국 지배계급은 전통적으로 ‘모든 이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과장하고 보편적 복지를 하려면 엄청난 재원이 필요하다며 보편적 복지를 반대한다. 정말로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택적으로’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보편적 복지를 시행하려면 재정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 경제는 보편적 복지를 시행할 만큼의 재원을 충당할 수 있다. 첫째, 한국 경제의 규모, 더 정확히 말하면 국내 기업들의 수익과 부자들의 재산이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들이 가진 부의 일부만 있어도 복지를 충분하게 제공할 수 있다. 둘째, 보편적 복지에서도 실제로는 ‘선택’이 이뤄진다. 예컨대, 무상보육은 아이들에게만 제공된다. 무상의료는 아프거나 아플 가능성이 꽤 있는 사람에게만 제공된다. 노령연금은 노인에게만, 무상교육은 학생에게만 제공된다. 즉, “보편주의 복지에서도 차이를 인정한다. 자녀가 있는 가구가 없는 가구에 비해 아동 양육과 관련된 욕구가 크고 비용도 많이 들 것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보편주의 복지는 돈이 많은 사람과 돈이 적은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지는 기본 욕구가 다르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보편주의 복지 원리는, 부자가 좋은 음식을 먹고 편안한 집에서 잠을 자야 하는 것처럼 가난한 사람에게도 좋은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가 필요하다고 본다.”반대로 흔히 ‘선별적 복지’라고 불리는 제도들은 필요가 아니라 자산과 소득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다 보니 복지가 필요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다.
2 그렇기 때문에 선별적 복지로는 저질 급식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다. 선별주의의 문제점은 한국의 현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명박은 “삼성그룹 회장 같은 분들의 손자 손녀야 무상급식 안 해도 되지 않겠느냐”며 선별주의를 옹호하지만 선별적 복지에서 자산 조사는 ‘필요한 사람’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복지 지출이 늘어나는 것을 막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다. 아마도 이명박은 가난한 집 아이들이 자기 손녀만큼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면 당장 ‘도덕적 해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선별적 복지는 “나쁜 복지가 될 위험이 있다. … 빈곤이 가장 광범위하게 퍼진 국가를 보면 최저 기준을 낮게 책정하고 자산 조사를 실시하는 국가들이다. 미국과 영국과 뉴질랜드 등이 그런 국가에 속한다. 또한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빈곤이 가장 심하게 늘어난 국가도 이런 나라들이다. 달리 말하면 자산 조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못한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공격을 상징한다.”
그림1과 그림2에서 보듯, 그동안 한국의 복지는 한국 사회의 빈곤과 불평등을 줄이는 데 별 도움이 안 됐다. 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2011년 한국복지패널 자료를 통해 본 사회지표’를 보면 전체 가구 중 4분의 1이 지난 5년 사이에 1년 이상 절대 빈곤층으로 추락한 경험이 있다. 상대적 빈곤층으로 추락한 경험이 있는 가구는 전체의 35퍼센트나 됐다. 이런 형편이다 보니 “정부가 세금을 낮추고 아주 가난한 사람들만 돕는 것보다 세금을 많이 내더라도 모든 국민에게 복지 혜택이 돌아가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72.1퍼센트나 된다. 월 소득이 4백만 원 이상인 사람들의 77퍼센트, 심지어 한나라당 지지자의 70.7퍼센트도 보편적 복지 제도를 원했다.
6 한마디로, 한국 민중과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에는 선별적 복지보다 보편적 복지가 더 이롭다. 이처럼 복지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할수록 복지의 질이 나아지는 ‘역설’은 보편주의 원칙이 사회적 자원 사용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둘 것이냐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음을 보여 준다.
이와 반대로 보편적 복지를 제공한 나라들은 복지의 양적 측면뿐 아니라 질적 측면에서도 훨씬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보편적 복지가 필요한 이유는 복지가 가난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국민 대다수가 가난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그래도 노동자들이 자기가 낸 세금으로 이건희 손자 밥 먹이기는 싫다는 정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찜찜함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부자들에게서 그만큼 세금을 많이 걷는 것이다.
선별적 복지는 징벌적 효과도 있다. 목숨은 부지할 수 있게 해 주지만, 충분하고 질 좋은 복지는 결코 제공하지 않으면서 ‘자립’을 강요한다. 이로 말미암아 이른바 ‘낙인’ 효과가 생기고, 가난의 이유는 개인의 무지나 게으름 탓으로 돌려진다. 그래서 선별적 복지는 노동계급 내에 소득 수준에 따른 구분을 만들어 불필요한 분열과 반목을 낳을 수 있다.
이와 반대로 보편적 복지는 ‘복지가 권리’라는 인식을 담고 있다. 이는 노동자들에게 복지를 요구하며 싸울 수 있는 자신감을 주고 공통의 이익을 지키고자 노동자들이 광범하게 단결할 가능성도 높일 수 있다.
7 주장은 문제가 있다. 앞서 제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봐도 이런 주장은 현실과 맞지 않고 지나치게 비관적인 주장이다.
따라서 한국 진보진영은 보편적 복지의 관점에 서서 노동자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고 노동자들이 더 광범하게 단결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런 점에서 “대기업에서는 근로자들의 욕구를 임금 인상과 기업 복지로 충족시켜 주고 있다. … 대기업이 지배하는 경제 구조 속에서 노조가 굳이 공공 복지를 요구할 유인도 약한 데다 분절되어 있어 힘을 모으지도 못하고 있다”는8 동시에 진보진영은 정규직 노동자들(흔히 중산층이라고 불리는)도 매력을 느낄 만큼 높은 수준의 복지를 요구해야 한다. 그래야 이런 요구들이 노동계급과 그 운동을 단결시키는 구실을 할 수 있다.
대기업 노동자들이 “누리는” 임금 인상과 기업 복지도 자본가들이 알아서 “충족시켜” 준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쟁취하고 지켜 온 것이다. 투쟁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 온 대기업 조직 노동자들이 전체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해 나설 수 있도록 설득하고 돕는 것이야말로 진보진영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려면 정규직 양보론 같은 분열 이데올로기에 맞서 노동자들을 단결시킬 수 있는 올바른 정치적 대안이 필요하다. 또한, 일부 진보인사들이 ‘보편적 복지’를 하려면 정규직 노동자들이 먼저 세금을 더 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잘못이다. 책임을 기업주·부자 들에게서 노동자 계급 내 일부에게 돌림으로써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기 때문이다.복지와 시장
이처럼 국가가 보편적 복지를 제공하게 되면, 시장 규제가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정부가 무상의료를 제공하려면 필연적으로 제약 회사와 병원의 이윤 추구를 규제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아무리 많은 돈을 건강보험에 투입하더라도 제약회사와 병원이 요금을 올려버리면 말짱 도루묵이 되기 때문이다.
복지 확대가 시장과 자본에 대한 규제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사실은 무척 중요하다. 이는 유럽 복지국가들의 성장과 쇠퇴 과정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일 뿐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복지 개혁을 평가하는 데에도 꼭 필요하다. 그리고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복지 개혁에 대한 평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계승한 민주통합당과 이에 비판적인 진보진영 내 대안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오늘날 진보진영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유럽 복지국가를 모델로 제시할 때 중요한 실수를 저지른다. 이런 나라들의 현재 복지 제도에는 서로 상충하는 두 가지 압력이 반영돼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9 프랑스에서는 레지스탕스 전국위원회가 전후에 사회개혁 헌장을 공포했는데, 이 헌장에는 “프랑스의 경제 운영에서 거대한 경제적 금융적 봉건 세력들을 제거할 것, 모든 대규모 독점 생산수단·동력원·광물·보험회사·은행의 국유화, 사회보장의 완벽한 계획, 충분한 노후 연금, 모든 프랑스 아동에게 부모의 처지와 무관하게 완전한 교육 기회를 제공할 것” 등이 포함됐다. 패전국 독일에서는 노동자들이 노동자 위원회를 만들어 공장을 장악하고 국유화를 요구했다. 당시 분위기가 어찌나 급진적이었던지, 우파 정당인 기독교민주당 내에도 자본주의는 “독일 국민들의 가장 중요한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이익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자본주의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급진파가 활동할 정도였다. 비그포르스와 미르달이 주도해 만든 스웨덴 사민당 전후강령은 시장에 맞서 공공연히 계획경제를 옹호했다.
하나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특히 제2차세계대전을 거쳐 1970년대까지 복지국가가 발전하던 시절에 노동계급의 조직된 힘에서 비롯한 압력이다. 이 힘을 바탕으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집권하고 대대적인 개혁이 추진됐다. 여기에는 광범한 사회보장 제도 확대 같은 복지 정책들도 포함돼 있지만, 이를 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기간산업과 은행 국유화 등 시장에 대한 강력한 규제 제도들도 포함돼 있었다. 예컨대, 영국 노동당은 전후강령에서 “사적 이윤을 위해 타인을 착취하거나 낮은 임금을 주거나 가격을 올리는 자유를 좌시하지 않겠다. 모두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해 산업을 공적으로 장악한다”고 선언했다.전시경제는 사회[국가]의 지도 하에서, 또 사회가 결정하는 목적을 위해 노동력과 물질적 자원이 이용될 경우, 집약적인 생산을 이룰 수 있다는 큰 가능성을 보여 줬다. 우리는 실업에 직면할 필요가 없으며 경제적 곤궁을 해소할 수 있다.
현실에서는 이런 강령들 중 일부만 실현됐지만, 이런 강령들은 당시 개혁의 방향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는 듯하다.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은 정부가 실시한 ‘개혁’으로 삶이 조금씩 나아지고 휴가가 늘어나고 앞날에 대한 불안이 줄어드는 것을 경험했다. 국가가 이를 책임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현재 유럽 복지국가들의 복지 제도에 담겨 있는 또 다른 압력은 1970년대 이후 이윤율 위기를 겪은 자본과 국가들이 기존의 복지국가를 체계적으로 파괴하려고 도입한 제도들에 담겨 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대에 정부가 추진한 복지 ‘개혁’은 연금을 삭감하고, 보험료를 올리고, 서비스를 민영화하고, 본인 부담을 늘리는 것을 뜻했다. 이제 국가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듯했고 모든 것이 개인의 책임이 됐다. 핵심은 시장과 자본에 대한 규제를 풀어 기업주와 부자 들의 경제적·사회적 권력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각국 정부는 IMF·세계은행·WTO 같은 국제기구들의 도움을 얻어 국내의 자본 규제를 걷어내려 하며 ‘세계화’ 때문에 더는 자본을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엄살을 부렸다. 고세훈 교수는 이런 변화를 이끈 유럽 사민주의 정당의 후퇴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몇 안 되는 한국의 좌파적 개혁주의자 중 한 사람이다. 고세훈은 특히 영국의 신노동당과 블레어 정부를 “유럽 사민주의 가운데 가장 오른쪽으로 급진화한 현대화론자로 평가”하며 그들이 “계급적 선택”을 포기하고 “주어진 예산 내에서의 우선순위”에 집착하는 실용주의적 태도를 보였다고 비판한다.
물론 이 두 가지 상반된 압력이 항상 공존했음도 기억해야 한다. 복지국가가 발전하던 시절에도 복지 확대와 상반되는 정책들이 일부 도입됐고 복지국가의 쇠퇴기에도 노동자들이 공격을 막아내거나 승리하기도 했다.
12 많은 경우에 자본가들의 압력과 저항을 제압한 것은 사민당 정부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압력이었다. 이는 자본가들의 신문조차 인정하는 바다.
유럽 복지국가가 발전하고 쇠퇴하는 과정에서 국가는 대체로 자본가들이 가하는 압력을 집행하는 구실을 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집권한 국가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만약 보수당 정부가 계속 집권해 노동자들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불만에 대해 공감을 표시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적의에 찬 파업이 전염병처럼 만연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노동당 정부가 들어서서 영국이나 외국의 모든 전례를 되풀이 한다면, 보다 큰 산업 불안이 발생할 것이다. 노동자들이 노동자의 정부에게 압력을 가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부의 정책에 대한 [자본가들의] 저항을 분쇄하는 데 일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이코노미스트》 사설, 1945년 7월 14일)
문제는 한국처럼 복지가 형편없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볼 때는 지난 30여 년 동안 망가지고 후퇴한 유럽의 복지 제도조차 여전히 부러움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 진보진영의 많은 사람들이 현재 유럽 복지국가가 내포한 이 두 가지 상충되는 경향을 뒤죽박죽 섞은 채로 ‘모델’로 그리면서 혼란에 빠지곤 한다. 유럽 복지국가의 발전과 쇠퇴의 모순된 과정을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추진한 경우에 이런 혼란은 더 커진다.
고용의 ‘유연안정성’이라는 개념이 대표적이다. 유연하고(자르기 쉽고) 안정적인 일자리라는 말은 ‘둥근 사각형’이라는 말처럼 완전히 형용모순인데, 이 개념을 잘 이해하려면 이 용어가 나온 사회적 맥락을 봐야 한다. 사실, 유럽 복지국가의 전성기에 노동자들은 기업주들이 함부로 해고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라고 요구했고, 많은 복지국가들에서 실제로 고용 안정을 보장하는 법률이 제정됐다.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으로 불리는 이 제도 하에서는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을 때 단순히 실업 급여를 지급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하거나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교육을 하는 등 여러 가지 지원이 이뤄졌다. 일자리를 잃더라도 삶의 ‘안정’이 크게 뒤흔들리지 않게 한다는 것이었다. 전후 장기 호황기에는 이런 제도들이 다른 복지 제도와 함께 순조롭게 작동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는 몇 가지 정책들 때문이 아니라 실업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업주들은 만성적인 노동력 부족을 호소했고 여성 취업과 이주자들의 유입이 크게 늘었다. 그런데 호황이 끝나고 신자유주의 시대가 시작하면서 상황이 1백80도로 달라졌다. 실업자가 늘면서 실업 급여 지출도 빠르게 늘어나자 복지국가의 실업자 ‘지원’ 프로그램은 점차 관료적인 지원 대상 ‘선별’ 프로그램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실업자 지원에 이렇게 많은 재정이 투자되고 있으니 고용을 ‘유연하게’ 해도 괜찮다며 해고를 자유롭게 하는 조처를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이처럼 훗날 집권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해고를 비교적 쉽게 만들려 하면서 지어낸 말이 ‘유연안정성’이다. 그래서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유연화’, 즉 해고의 자유인 것이다.
14 물론 한국의 상황에서 이런 모델론이 장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더 높은 수준의 복지를 요구하는 ‘현실적’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정리해고와 신자유주의 복지 삭감을 정당화하는 정책인 것을 지속가능한 복지국가를 만들려면 마땅히 수용해야 할 정책으로 미화하는 것은 문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정된 일자리와 이를 보조하는 복지 제도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둘 다 중요하지만 안정된 일자리가 더 중요하다. 아무리 복지 제도가 잘 갖춰져 있어도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 진보진영 내 일부 정책입안자들이 ‘유연안정성’을 다소 약점은 있지만 좋은 정책인 것처럼, 또는 불가피한 정책으로 소개하는 것은 문제다.15 “2010년에도 노르웨이는 ‘유엔인간개발지수’ 순위 1위에 올랐다. … 이런 식으로 보면, 노르웨이는 다른 북유럽 국가들과 함께 위층 갑판의 객실을 계속 지키고 있다. 그렇지만 앞에서 강조한 대로 그것이 ‘타이타닉’ 호의 객실이라는 사실이 문제이다. …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의 경우 부자와 빈자의 격차가 1986년부터 1996년 사이에 9퍼센트 증가했다. 이는 대처 시절인 1979년부터 1989년 사이에 런던의 격차와 거의 비슷한 수치이다.” 16
더 나아가 스웨덴 같은 북유럽 나라들에서 복지가 후퇴하지 않은 것처럼 얘기하는 것도 현실을 호도하는 것이다.김대중 정부와 ‘생산적 복지’
‘생산적 복지’나 ‘사회투자국가’론 같은 것들도 ‘유연안정성’과 같은 맥락에서 도입된 정책들이다. 한국에서 이런 대표적인 신자유주의적 복지 정책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처음 도입됐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추진된 복지 정책 평가도 한국 복지 논쟁에서 중요한 쟁점이다. 그림3에서 보듯이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한국의 복지 지출 규모는 꽤 늘었다. 두 전임 정부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비롯해 친민주당계 인물들은 하나같이 이 점을 높이 평가한다. 이러저러한 문제들이 있었어도 적어도 복지에서만큼은 큰 기여를 했다고 말이다. 이창곤 〈한겨레〉 논설위원도 비슷한 평가를 내린다. “김대중 정부는 대한민국 복지 불모지에 국가 복지를 허겁지겁 뿌렸습니다. … 학계의 평가는 엇갈립니다. … 어느 쪽이든, 이 기간에 복지 지출이 대폭 늘어난 것만은 분명합니다. … 노무현 정부의 복지 개혁은 ‘내실화’와 ‘사회서비스 확대’로 요약됩니다. … 노무현 정부 복지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일은 ‘비전 2030’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림1에서 보듯이 이 시기에 상대적 빈곤율도 거의 같은 속도로 늘어났다. 그림2는 오히려 이 시기에 늘어난 복지 지출이 빈곤율 상승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음을 보여 준다.
이는 두 전임 정부가 미국과 유럽의 주요 선진국들이 추진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실업률도 크게 늘었고 소득 양극화가 빠르게 진행됐다. 따라서 이 시기에 사람들의 삶에 악영향을 끼친 중요한 변화들을 무시하고 복지 지출만을 따로 떼어내서 평가하는 것은 지나치게 협소한 관점이고 두 전임 정부의 정책을 제대로 평가하기 힘들어진다.
지출이 늘어난다고 해서 사회 구성원들의 복지가 반드시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어느 나라에서 실업률이 높아지고 복지 지출 또한 높아진다면, 그 결과 그 나라 국민의 복지가 향상되었다고 결론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실업은 실업 수당으로 보상이 이뤄진다 하더라도 부정적인 현상인 것만은 분명하다. 실업의 고통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특히 더 그렇다.
김대중 정부는 자신의 복지 정책에 ‘생산적 복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생산적 복지의 핵심 사상은 복지도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는 복지는 좋은(지속가능한) 복지이고, 그렇지 않은 복지는 나쁜 복지이니 없애거나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에 도입된 기초생활보호제도가 대표적 사례다. 기초생활보호제도는 소득이 최저생계비 미만인 사람들에게 생계비를 지급하는 제도다.
이 제도의 문제가 드러나는 데는 1년도 걸리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 민정수석과 국정기획수석을 지낸 연세대 김성재 교수는 생산적 복지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보호 복지라고 하더라도, 기초생활보장제도에는, 근로 능력을 향상시켜서 일을 통해 자립 자활을 하도록 유도하는 정책이 들어 있습니다. … 일을 하면 그 수익만큼 지급을 축소시켰기 때문에, 되레 일하는 게 손해라는 생각으로 일을 안 해버리는 상황이 발생하게 됐습니다. … 근본적으로는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생산적 복지는 당시 IMF가 요구하고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다양한 신자유주의 정책 묶음의 일부였다. 중앙대 신광영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경제정책에 모든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실제로 복지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었다. … 그러나 여러 차례 신자유주의적 경제 개혁을 시도해 온 국제 금융기구는 …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을 추진함으로 인해서 대량 실업과 빈민이 발생하고, 이들에 의한 대규모 저항이 발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결과로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이 좌초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 그리하여 국제 금융기구는 김대중 정부와 구제금융 지원 협약을 맺으면서 사회적 안전망 확충을 주된 합의사항에 포함시켰다.
21 노동 연계 복지Workfare도 그 일부다. 복지국가들에서 노동 연계 복지 정책은 일하지 않으면 복지를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거꾸로 말해, 그 전에는 엄격한 자산 조사나 구직 활동 증명 없이도 비교적 관대하게 기초생활비나 실업 급여를 지급했다는 얘기다. 따라서 노동 연계 복지는 명백히 복지 축소를 뜻했다.
복지 제도가 신자유주의 개혁과 충돌을 빚지 않도록 하는 구체적 방침들은 대개 1990년대 중반에 선진국들에서 광범하게 시행되고 있었다.그러나 당시 한국은 실업자는 물론이고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그럭저럭 복지를 제공받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상황에서 노동 연계 복지는 적어도 일을 하면 복지를 받을 수 있음을 뜻했다. 특히, 건설일용직 등 일자리가 극도로 불안정한 사람들에게는 최소한의 안전망이 생긴다는 것을 뜻했다.
22 지금도 기초생활보호의 기준이 되는 최저생계비가 비현실적으로 낮다는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자산 조사와 구직 활동 증명 등 까다로운 선별 제도로 뒷받침되는 기초생활보호제도의 근본 성격은 다른 나라의 제도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이전의 빈민 복지 제도인 ‘생활보호’ 때보다 못하다는 얘기도 나왔다. 김대중 정부의 생산적 복지는 한편에서는 정부의 복지 지출이 늘어나는 결과를 낳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적 안전과 복지 제도를 처벌과 보상의 시스템으로 바꿔놓[는]” 결과를 낳았다. “[노동 연계 복지] 정책의 사상적 바탕은 ‘불신과 의심’이다. … 노동 참여를 촉진하기 위한 인센티브로 위장한 경제적 처벌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 엘리트들과 언론계의 성공한 중산층들의 따가운 눈총과 도덕적 훈계까지 견뎌내야 했다. 이 모든 조치들이 문제는 근로 환경이 아니고 바로 당신이라는 암시를 전하고 있다.”앞서 선별적 복지를 비판하며 지적했듯이, 복지 수혜자에서 벗어나 노동시장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복지 정책에는 징벌적 조처가 따르게 마련이다. 예컨대, 실업 급여는 최저 임금보다 낮아야 한다. 최저 임금이 오르면 실업 급여도 따라서 오를 것이므로 최저 임금은 ‘도덕적 해이’를 막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낮아야 한다. 워낙에 부작용이 많이 드러나 진보진영은 물론이고 친민주당 지식인들 내에서도 생산적 복지나 노동 연계 복지를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신동면 교수가 2010년에 ‘정의로운 복지국가’를 제시하며 ‘근로 연계 복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당시에도 그가 거의 유일하게 노동 연계 복지를 지지한 사람이었다.
25 홍헌호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이상이 대표가 제시하는 노동자 보험료·세금 인상론에 반대하고 부자 증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같은 가정을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 “경제 수준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복지, 이른바 과잉 복지도 포퓰리즘에 해당한다. 그리스의 연금 복지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스의 연금 수혜액은 퇴직 전 임금의 95퍼센트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6
그러나 ‘생산적 복지’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복지병’ 논리, 다시 말해 복지를 무작정 제공하면 노동자들이 복지에 의존하는 경향이 생기고, 이는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준다는 이데올로기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더 광범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예컨대,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대표는 “[그리스는] 연금의 경우 너무 일찍 돈을 주고, 실업 급여의 경우 너무 오래 돈을 준다. 그래서 ‘복지병’이 생길 수 있다는 보수파의 비판은 상당한 논거가 있다”고 말했다.27 그리스 노동사회부 장관조차 “보험 혜택 없이 일하는 사람이 유럽연합 평균치는 6퍼센트인데 그리스에서는 올해[2011년] 기준으로 26퍼센트에 달한다” 하고 말할 정도다. 28
그러나 그리스에 관한 이상이·홍헌호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리스의 연금과 실업 급여가 ‘과도했다’는 주장은 이 나라 노동자들에게 내핍을 강요하는 유럽연합의 거짓말일 뿐이다. 연금은 노동자들이 직장에 다닐 때 받던 임금에 따라 결정되는데, 그리스는 유럽 내에서 대표적인 저임금 국가다. “그리스 노동자들의 월 평균 임금은 8백3유로(약 1천63달러)인데, 이것은 놀랍게도 아일랜드의 월 최저 소득 1천3백 유로나 네덜란드의 월 최저 소득 1천4백 유로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29 분석이 있다. 연금 자체도 형편없으므로 이 분석은 그리스의 다른 복지 제도들은 볼 것도 없음을 뜻한다. 실업 급여도 형편없는데, ‘최근 2년간 직장이 있어야’ 받을 수 있고 그 액수도 실직 전에 받던 돈의 33퍼센트로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30 실업 급여도 연금처럼 임금 수준에 따라 정해지므로 생활을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연금 지출이 그리스 전체 복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커서 “다른 복지 부문에 쓸 돈이 부족하다”는 그리스 경제가 파탄에 빠진 것은 ‘복지병’ 때문이 아니다. 그리스의 좌파 활동가는 이렇게 지적한다. “그리스가 문제가 된 것은 경제 위기로 최근 부채가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인데, 그중 상당 부분, 약 6백억 유로가 은행과 기업 지원금으로 사용됐습니다. 부채를 급격히 늘린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은 국제 시장이 그리스 국채에 부과하는 이자율을 크게 높인 것입니다. 그리스 경제가 나빠져서가 아니라 세계시장의 불안정성이 커진 것에 국제 자본가와 투기꾼들이 대응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 국채 이자율이 크게 뛴 것은 2009년 두바이 사태 이후였던 것이 이 점을 증명합니다.” 설사 그리스의 복지 제도가 꽤 괜찮더라도 복지 혜택이 너무 많아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복지병’ 얘기는 허상일 뿐이다. 어떤 나라에서도 그런 꿈같은 수준의 복지를 제공한 적이 없다. 오히려, “OECD 자료를 보면 1980년에서 2008년 사이에 보편주의 복지국가의 노동자 1인당 생산성과 노동시장 참여율이 비보편주의 국가들보다 높게 나타난다.” 신자유주의 논리에 반대해 열정적으로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는 이상이 교수 등이 우파들과 같은 편에서 ‘복지병’ 논리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평소 경제성장 논리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타협한다는 점을 볼 때, 이상이 교수가 일부 복지 제도는 ‘낭비적’이라고 하는 생각을 수용하는 듯하다. 따라서 이상이 교수가 이끄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경제성장 논리를 수용하다 보니 … 사회지출과 복지 의존성 문제에서 모호한 태도를 보인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 투자 성격의 사회지출과 보험[소비] 성격의 사회지출을 구분하면서 보험 성격의 지출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비판은 타당하다. 게다가 “‘복지 의존성’ 논리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전통적 복지국가를 비난할 때 사용하는 단골 메뉴라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며 보편적 복지를 역설力說하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이 논리를 수용하는 것은 역설逆說[이다.]”경제성장과 복지
연금이나 실업 급여 같은 현금형 복지를 문제 삼는 것도 ‘생산적 복지’의 핵심 개념 중 하나다.
34 이런 주장에는 일부 진실이 담겨 있다. 자본가들에게도 복지 제도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많은 사회복지 연구자들이 서비스형 복지가 물가인상 효과 등 경제성장에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이 적을 뿐 아니라 일자리를 직접 창출하고 효율이 높기 때문에 성장 친화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론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복지국가 유지를 위한 현실 정치적 개혁 차원에서도 현금 급여보다는 사회서비스가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그 근저에는 이 분야의 생산 기여적 속성에 대한 믿음이 자리한다.”자본가계급이 부유해지는 방법은 오직 사람들의 일할 수 있는 능력(‘노동력’)을 착취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질병, 사고, 영양 부족 등은 노동력을 약화시킨다. 따라서 자본가들은 신체 건강한 노동인구를 유지하는 데 신경을 써야 한다(즉, ‘노동력 재생산’에 신경 써야 한다). … 양육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 적절한 교육과 훈련을 제공하고 노동 규율을 심어 줘야 한다. 자본주의 옹호자들이 ‘인적 자본’에 대해 걱정하고 학교 교육의 ‘부가가치’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 자기 처지에 만족하는 소를 원하는 농부들과 마찬가지로, 자본가들은 자기 처지에 만족하는 노동자들을 원한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언제나 자신의 이윤을 크게 해치지 않는 한에서만 복지를 유지하려고 한다. 복지 지출만큼 자기 몫이 줄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지가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현실에서는 복지 삭감을 정당화하고 시장 논리, 경쟁 논리, 경제성장 논리를 강화하는 데 쓰인다. 생산성의 관점에서 보면 예컨대 보육·교육·의료는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되니 ‘투자’할 가치가 있겠지만, 노인 연금, 장애인 연금, 장기 실업 급여 등은 그야말로 ‘낭비’일 것이다. ‘쓸모없게 된 노동자들을 왜 먹여살려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 대부분의 나라에서 가장 먼저 공격받는 복지가 바로 연금과 실업 급여다. 최근 새누리당이 보육 복지 얘기는 하지만 연금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보육 예산은 일부 늘었지만 국민연금은 두 차례에 걸쳐 대폭 삭감됐다.
지배계급은 이런 생산성의 관점에서 보육·교육·의료도 현금이 아니라 서비스 이용권 같은 형태로 제공해 전체 비용을 줄이려 한다. 물론 연금 삭감에 견주면 현금 대신 서비스로라도 보육과 의료를 지원하겠다는 것은 그나마 참을 만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첫째, 정부가 서비스를 직접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하는 정책과 함께 추진된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처럼 전체 의료비 지출은 가파른 속도로 늘어나는데도 서비스의 질은 그만큼 나아지지 않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둘째, 서비스 일자리는 저임금에 노동강도도 높은 저질 일자리가 되기 쉽다. 복지 서비스에서도 ‘필요’보다는 경제적 효율 논리가 우선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생산적 복지는 노동자들에게 실제로 지급되는 복지 혜택보다 경제성장 즉, 자본가들의 이윤 증대에 초점을 맞춘 제도다. 현실에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이해관계가 대립하므로 결국 ‘생산적 복지’는 노동자들을 쥐어짜는 수단이 된다.
이처럼 복지 제도 중에서도 자본가들이 보기에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복지만 발전시키겠다는 정책을 그럴싸한 말로 포장한 것이 ‘사회투자국가’론이다. 그리고 이는 뒤에서 다룰 노무현 정부의 복지 정책에서 핵심적 구실을 했다. 사실 진보진영의 많은 사람들이 생산성 논리에 일관되게 맞서지 못하고 ‘복지가 경제성장을 낳을 수 있다’는 주장으로 대응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이론적으로도 오류인 데다가 사실 자신감 결여에서 나오는 주장이어서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최근 민주통합당에 들어가 경제민주화 논의를 이끌고 있는 유종일 교수조차 이 점을 지적한다. “복지와 경제성장은 사실 특별한 관계가 없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복지가 경제성장을 막는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지만 복지가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만 지나치게 강조하면 사회투자국가론으로 갈 위험이 있어요. 성장에 도움이 안 되는 복지도 있습니다. 그래도 해야 합니다.”
경제성장 논리에 자신감 있게 대응하지 못하는 태도는 특히 1970년대 이후 유럽 복지국가의 쇠퇴가 미친 영향인 듯하다. 많은 개혁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의 시작을 알린 당시 경제 위기가 과도한 복지 지출 때문이었다는 가정을 암암리에 수용한다. 개혁주의자들은 사상 유례없는 장기 호황이 끝난 이유를 달리 설명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앞서 지적했듯이 경제성장 논리로 신자유주의를 추진한 주체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추진한 복지 삭감도 복지를 지속가능하게 하려면 불가피한 조처라고 정당화하게 되는 것이다.
37 복지 등에 대한 국가 지출이 늘어나는 동안에도 오히려 경제는 더욱 빠르게 성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의 경제 위기는 복지 지출 탓이 아니었다. “미국을 제외하면 국가 소비[복지 지출을 포함한 재정 지출]는 1955~69년 사이에 모든 OECD 국가에서 실질치로 매년 3.9퍼센트씩 상승했다. 이때, 국민총생산은 5.7퍼센트씩 상승했다.”38 로버트 브레너는 1965~73년 미국 제조업의 순이윤율이 5.5퍼센트 감소했는데 그동안 노동생산성은 오히려 3.3퍼센트 증가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같은 기간에 실질 임금은 고작 1.9퍼센트 늘어나는 데 그쳤다. 39
임금 인상이 이윤율을 떨어뜨려 경제 위기로 이어졌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40 이 점은 뒤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사실, 그리스의 재정 위기처럼 1970년대 경제 위기도 복지 지출이나 임금 인상 등 소득 이전 때문이 아니라 이전 시기에 진행된 장기 호황 자체에서 비롯한 것이다.평범한 노동자들의 처지에서 보면 현금 복지와 서비스 복지는 둘 다 필요하다. 더욱이 노인 빈곤율에서 드러나듯 아직 연금 같은 소득 보장 제도도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상황에서 서비스 복지만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
노무현 정부와 사회투자국가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의 생산적 복지 정책을 계승했다. 다만 김대중 정부보다 더 일관성을 추구했다. 즉, 경제 정책에 우선순위를 두고 복지 정책에서도 신자유주의적 성격이 강화되는 식이었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사회정책수석을 지낸 김용익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사회투자국가’론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사회투자 국가는,
국민의 정부 때 생산적 복지[와] … 맥락에서 크게 다르지 않고 기본적으로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 참여정부 때 생각한 내용은 훨씬 더 경제와 사회 정책을 포괄적으로 한 덩어리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사회 정책은 경제정책적 성격을 굉장히 강하게 갖게 된다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대표적인 게 교육 같은 것입니다. 인적 자본이 형성되고 사회적 자본이 형성되어야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성장의 동력을 찾을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이것이 그의 머리 속에서 갑자기 떠오른 생각은 아니었다.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이미 1998년에 쓴 책 《제3의 길》에서 사회민주주의의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존의 사회민주주의도 아니고 신자유주의도 아니라는 점에서 제3의 길이다. 이에 따른 복지 전략을 ‘사회투자국가’라고 불렀다. 기든스는 세계경제가 ‘지식기반경제’로 탈바꿈했으므로 “좌파는 이제 시장을, 부를 창출하는 과정에서의 기업의 역할을, 사적 자본이 사회적 투자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는 시절에 이런 주장은 현실에서는 신자유주의에 투항하라는 얘기와 다름없었고, 영국 노동당을 비롯한 많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자신들이 추진하던 신자유주의 정책을 합리화하는 데 기든스의 주장을 가져다 썼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사회투자국가는 ‘지식기반경제’에서 핵심인 교육에 대한 ‘투자’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럴 때조차 교육은 권리가 아니라 ‘투자’의 일환이었으므로 문제를 낳았다. 연구 성과에 따라 국고 지원에 차등을 두면서 대학 간 경쟁이 심화했다. 이는 교수 간, 교원 간, 학생 간 경쟁 심화로 이어졌고, 학내 민주주의도 후퇴했다. 이처럼 1990년대 영국에서 사회투자국가의 논리는 현실에서 노동계급과 저소득층에 주는 복지를 줄이는 결과로 나타났다.한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시절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유시민이 당시에 추진한 국민연금 삭감, 저소득층에 대한 의료보호 삭감 등은, 노무현 정부의 사회투자국가가 실제로는 복지를 축소하는 논리였음을 보여 준다. 당시 가난하고 나이든 사람들 손에서 파스까지 빼앗는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를 느꼈다. 심지어 김대중 정부의 ‘생산적 복지’를 입안한 김성재조차 노무현 정부의 복지 정책을 비판할 지경이었다. “참여정부가 … 결과적으로 경제 논리를 우선시 한 부분이 있습니다. 한미FTA도 그렇고, 의료민영화, 보건의료 쪽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45 따라서 박근혜의 한국형 복지국가에 대한 다음 평가는 타당하다.
이렇듯 사회투자국가는 수익성 논리와 경제성장 논리를 수용하므로 상황에 따라서는 박근혜 같은 우파도 차용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박근혜가 2010년에 발표한 ‘한국형 복지 모델’은 노무현의 사회투자국가와 무척 비슷하다. “박근혜 복지의 기본 구상을 … 자세히 살펴보면 … 사회투자형 생활보장국가로의 변화를 주장한다. … 김용익 전 사회정책수석에 따르면 … 모두 ‘노무현 복지’의 구상과 정확히 같은 것이다.”참여연대와 일부 언론에서는 박근혜 진영의 한국형 복지국가 전략이 재정문제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한계로 지적한다. … 그러나 한국형 복지국가 전략이 갖는 진정한 한계는 구체적 내용의 부재가 아니라 그 본질에 있다. …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변형된 유럽형 복지국가 구상 일부를 수용한 결과물이다.마찬가지 이유에서 민주통합당이 내놓은 무상복지 정책도 노동계급과 민중의 삶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공산이 크다. 비록 지난 1년 사이에 ‘좌클릭’을 거듭하며 지금은 진보정당의 정책과 크게 차이 나지 않을 정도로 보이지만 말이다. 주은선 교수가 지적했듯이, “민주당 복지국가 구상이 처한 가장 큰 도전은 보수진영으로부터의 공격이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반발”이다. “민주당 내부에서 경제 관료 출신을 중심으로 한 일부 의원들이 예산 확보 문제를 중심으로 무상복지론에 반론을 제기한 바 있다. 특히 내부 논쟁은 재원 문제에 집중돼 표면화됐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사회정책수석을 지냈고, 현재 민주통합당의 보편적 복지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김용익 교수의 주장을 봐도 민주통합당의 정책은 노무현 정부의 사회투자국가가 낳은 결과를 반복할 듯하다.
시장은 자기 룰rule대로 가야 합니다. 정부가 규제하면 시장은 왜곡됩니다. …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규제하고, 도덕적으로 질타하고, 현대·삼성 1조 원씩 내놓으라 하고 그래선 안 됩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진정으로 보편적 복지를 하려면 시장을 강력히 규제해야 한다. 게다가 한국의 재벌들은 최근 이명박의 ‘동반성장’ 구호조차 외면해 버릴 정도로 강경한 태도를 고수한다. 지난해 12월 13일 전 국무총리 정운찬이 이끄는 동반성장위원회의 설립 1주년 포럼에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SK텔레콤, 포스코, 현대제철, 현대중공업, 두산중공업, 롯데쇼핑 등 대기업 측 위원 전원이 갑자기 불참하기로 통보했다. ‘이익공유제’가 반시장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시장에 대한 규제를 포기한다면 기업주들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없을 것이다.
진보진영과 복지국가
49 ‘유연안정성’ 등 사회투자국가론이 자주 사용하는 개념들이 진보진영 인사들의 주장에도 종종 등장한다. 예컨대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역동적 복지국가 모델은 ‘혁신적 경제’를 그 4대 영역 중 하나로 내놓는데, ‘지식기반경제’와 ‘유연안정성’이 혁신적 경제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거론된다. 덴마크 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한 양재진도 1993년에 시작된 덴마크의 노동 정책 변화, 즉 유연안정성을 덴마크 복지가 지속가능한 이유로 꼽는다. 50 이들이 사회투자국가론을 어느 정도 수용하는 까닭은 자본주의적 경제성장 논리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진보진영의 많은 사람들은 복지와 경제성장 사이에서 미로를 헤매다 사회투자국가론에 담긴 가정들을 적어도 부분적으로 수용하곤 한다. ‘지식기반경제’,첫째, 경제 위기 상황에서 과연 급진적인 복지 확대가 가능할까 하는 회의다. 재원 문제도 있고 기업주와 부자 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것인데, 이들은 기업주와 부자 들의 저항을 제압할 힘이 있는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보지 않는다. 그리고 계급‘투쟁’보다 사회적 합의를 중요시하는 우파 개혁주의의 관점에 서 있으므로 사회 엘리트들도 동의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데 골몰하며 후퇴하게 된다. 진보진영 내 복지 재원 마련 방안을 둘러싼 논쟁이 이를 잘 보여 준다. 2000년대 초에 민주노동당의 대표 공약이었던 ‘부유세’가 점점 온건한 조세 개혁으로 바뀌는가 하면 ‘사회연대전략’, ‘건강보험 하나로’, ‘보편적 증세’ 등 정규직 노동자 책임론을 받아들여 노동자들이 추가 재원을 일부 부담해야 한다는 주장도 계속 제기된다. 윤홍식 교수 등은 간접세 인상도 고려해 볼 수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이런 후퇴는 진보정당 내에서 계급적 관점이 약화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징표다. “두 진보정당[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모두 복지국가를 내걸면서 더 이상 계급정당, 혹은 급진주의 정당이기보다는 국민 정당으로의 정체성을 강화하고자 한다.”
그러나 경제 위기 시기라고 해도 재원 마련은 불가능하지 않다. 한국의 1천대 기업은 2010년 한 해에만 1백30조 원이 넘는 순이익을 냈다. 이 돈의 절반만으로도 최근 거론되는 무상복지를 모두 할 수 있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 프랑스 노동자들이 주 40시간 노동제와 장기 유급휴가 등을 쟁취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52 지적을 새겨들어야 한다.
유럽 복지국가들의 ‘사회적 합의’ 제도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무시하는 관점은 지극히 엘리트주의적인 것이다. 지금도 이런 나라들의 복지 수준은 계급투쟁의 수준에 따라 변하고 있다. 예컨대, 영국 노동자들이 커다란 패배를 겪은 1980년대에 영국의 복지 제도는 대폭 후퇴했다. 반대로 프랑스 노동자들은 1990년대 중반에 정부의 공격에 맞서 기존의 복지 제도를 지켜냈다. 한국에서는 노동계급이 눈을 뜬 1987년을 전후로 각종 복지 제도들이 도입되고 안착됐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사회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이해관계들 사이의 권력 균형이 [복지의 발전과 후퇴에서] 결정적인 요인”이라는53 그 힘이 사회의 ‘1퍼센트’를 구하는 데만 쓰였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이는 경제 위기 시기에도 정부가 나서서 국유화, 재정지출 확대, 부자 증세 등을 시행해 복지를 확대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보여 준다.
또, “이번 세계 경제·금융 위기는 지난 20년 동안 유행하던 신화, 즉 세계화의 효과로 국민국가가 쇠퇴하고 약해졌다는 신화를 깨뜨렸다. 금융권과 산업계를 구제하러 나선 것이 바로 국가였다.”둘째, 더 근본적으로 복지가 경제성장을 가로막는다는 주장에 효과적으로 맞설 이론, 즉 자본주의 위기가 어디서 비롯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일관된 이론이 없다 보니 경제성장 논리에 부분적으로나마 타협하게 된다.
이 글에서 경제 위기를 설명하는 다양한 이론들을 두루 살펴볼 수는 없지만, 주류 경제학의 다양한 변종들과 케인스주의가 오늘날의 경제 위기와 1970년대 경제 위기의 원인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주류 경제학은 위기를 심화시킨 장본인들의 이론이고 케인스주의적 정책도 경제 위기를 막지 못했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1949~73년의 장기 호황 시기에 주된 정책은 케인스주의적 정책과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 “[전후에] 정부가 실제로 경제에 개입했을 때, ‘문제는 [국가 재정의] 흑자를 적자로 전환시키는 것’이 아니라 ‘적자의 규모를 줄이는 것’이었다. ‘전반적 효과’는 ‘자제’였다. 사실 1970년대까지 정부 개입의 주된 형태는 경제를 부양하기 위해 지출을 늘리기보다는 경제성장 속도를 늦추기 위한 ‘금융긴축’이었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경제 위기의 원인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경제 위기는 자본주의적 경제성장 그 자체에서 비롯한다. 성장과 축적을 위한 자본가들의 경쟁은 개별 기업이 투자 자본의 더 많은 부분을 인건비보다 기계처럼 생산량을 빨리 늘릴 수 있는 부분에 투자하도록 강제한다. 그러나 새로운 가치는 오로지 노동에서 나오므로 노동에 대한 자본 투자 비율의 증가는 결국 이윤율을 낮추는 결과를 낳는다.
물론 상쇄 요인도 있다. 1949~73년의 전후 대호황기에는 미국과 소련의 막대한 군비 지출이 그런 구실을 했다. 군비로 빠져나가는 자본 때문에 노동에 대한 자본 투자 비율의 증가 속도가 억제됐다. 이 덕분에 이윤율이 높게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상쇄 요인은 근본적인 경향을 뒤집지는 못한다. 1960년대 말부터 이윤율이 하락하기 시작했고, 1973년 경제 위기 이후 세계 자본주의는 오랫동안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신자유주의가 시작된 배경이다.
2008년에 시작된 세계경제 위기는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아래로부터 위로의 재분배”로도 이윤율 저하 경향을 되돌리지 못했음을 보여 줬다. 요컨대, 경제 위기는 체제 내의 일부 요소들이 아니라 체제 자체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 같은 경제 위기 시기에 복지 지출을 위해 기업과 부자 들한테서 세금을 더 많이 걷으면 이는 즉시 성장률 저하로 나타날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경제성장은 이윤 증가량으로 측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지 지출이 경제 위기를 낳은 것이 아니라, 경제 위기 탓에 복지 지출이 그런 구실을 하게 된다는 점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진보적 복지 대안은 반자본주의적 대안으로 발전해야 한다. 즉, 자본주의적 경제성장 논리 자체에 맞서야 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경제성장 논리를 회피하거나 진보적으로 ‘이용’하려 하다가는 되레 그 논리에 말려들 공산이 크다. 자본주의 경제성장은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에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복지 대안을 쟁취하려면 이윤 논리로 작동되는 현 사회와는 근본에서 다른 사회를 제시해야 한다. 기업들의 무정부적인 이윤 경쟁이 아니라 대중의 필요에 따라 민주적으로 계획되는 체제가 필요하다.
자본주의 계급 관계의 조건에서 ‘성장에 기초를 둔 복지’ 모델이 실제로 작동 가능한 모델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복지에 기초를 둔 성장’ 모델 역시 자본주의에 내재적인 잉여가치 생산의 위기, 즉 이윤율 저하 위기로 인해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할 수 없다. … 진보진영은 복지를 … 자본주의 틀 내에서 위기 극복과 성장의 전략으로서 주장하기보다 …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의 필수적 요소로서 요구할 필요가 있다. … 복지 요구는 반자본주의 투쟁을 통해서만 실질적으로 쟁취될 수 있으며, 진정한 복지의 완전한 구현은 자본주의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고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건설함으로써만 가능하다.
56 하나는 앞서 지적했듯이, 경제 위기 시기에 반자본주의적 대안이야말로 일관되게 복지 확대를 요구할 수 있는 대안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비그포르스 자신이 당대의 개혁주의자들에게 복지국가에서 만족하지 말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을 목표로 삼으라고 역설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57
이 점에서 최근 홍기빈 등이 스웨덴의 급진 개혁주의자인 비그포르스를 소개하며 마르크스주의와 반자본주의적 대안을 비난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부적절하다.노동 복지
‘노동 복지’는 두 측면에서 제기된다. 첫째, 복지가 단순히 재분배뿐 아니라 분배 문제도 포함하므로 일자리와 임금 문제도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옛 민주노동당 등이 제기한 쟁점인데, 이는 올바른 문제 제기다. 사회의 다른 부분을 그대로 남겨둔 채 복지만 대폭 늘리는 일이 가능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조건에서는 복지 수혜자를 누구로 할 것인지, 세금과 보험료는 어떻게 징수할지 하는 문제가 복잡해진다. 지배자들이 기업주·부자 들에게는 책임을 면제해 주면서도 노동계급 내 상대적으로 소득이 높은 부문에서 돈을 걷어 저소득층에 주자는 조삼모사식 대안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계급 사이의 격차가 커질수록 이런 분열 선동이 먹혀들 여지도 커진다. 오늘날 수많은 노동운동 투사들이 이 분열을 뛰어넘기 위해 골머리를 썩고 있는 까닭이다.
또, 아무리 복지 재원을 늘려도 서비스업을 민영화하거나 규제가 완화되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공산이 크다. 무상의료를 하겠다고 재원을 대폭 늘려도 온갖 낭비적인 부분을 보험 대상에 포함시키거나 영리병원을 허용하면 재정이 바닥나는 것은 시간 문제다.
막대한 군비 지출을 내버려두고 복지국가를 실현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의 국방비 증가율이 세계 1위 수준이라는 점도 떠올려야 하겠지만 영국 복지국가가 한국전쟁 당시 군비 지출 때문에 크게 흔들린 경험이 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처럼 복지 확대와 경제민주화, 고용 안정 같은 문제들은 서로 연결돼 있고, 이처럼 대중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들은 따로따로 해결하는 것보다 함께 바꾸는 것이 더 낫다. 한쪽의 변화는 마땅히 다른 한쪽의 변화를 수반할 것이고, 한쪽에서의 승리는 곧 다른 한쪽에서의 전투에도 자신감을 줄 것이다. 우리는 두 전선 모두에서 싸워야 한다.
58 이 약점을 극복하는 문제는 한국 복지 운동의 전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것이다.
‘노동 복지’가 제기되는 둘째 측면에서는 노동자들이 복지 확대를 위한 투쟁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 앞서 지적했듯이, 아래로부터 노동자 대중의 힘이 복지국가를 가능케 한 근본적 원동력이었으므로 이런 인식도 옳다. 주은선 교수는 이 점에서 한국 진보진영의 복지 운동 전략이 큰 약점을 안고 있다고 지적한다. “복지 정치 전략에서 노동계급과 노동조합의 역할과 위상이 모호한 것은 한국 노동 정치 자체의 위기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고령화
‘고령화 위기’ 담론은 실제 현실보다 엄청 부풀려진 측면이 있다. 사람들이 너무 오래 살게 돼서 연금을 삭감하고 보험료와 세금을 올리지 않으면 앞으로는 젊은이들이 이들을 부양하느라 허리가 휘게 되리라는 것이 요지다. 이런 주장은 연금과 의료 등 노인들에게 꼭 필요한 복지를 줄이고 그 부담을 젊은 노동자들 개개인에게 떠넘기려는 목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과 반대로, 오히려 연금이 삭감되고 보험료와 세금이 오르면 젊은이들의 허리가 부러질 것이다. 정부가 복지를 줄이는 만큼 부모를 부양하는 데 개인적 지출을 더 많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고령화가 진행될수록 복지 지출을 늘려야 한다. 한국보다 고령화가 더 진행된 유럽의 사례를 보면, 노인 부양을 사회 전체가 책임지는 방식은 전혀 공상이 아니다.
슈트라이슬러(2009)는 만일 유럽연합 안에서 생산성이 적절히 향상되고 노동참여율을 2060년 전까지 70퍼센트로(유럽연합은 2020년 전에 노동참여율을 75퍼센트로 높인다는 목표를 잡고 있다) 끌어올릴 수 있다면 현재의 연금 제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노르웨이 정부가 공개하길 원하지 않는 어떤 정보에 따르면, 2050년까지 구매력이 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는 [현행] 국민보험제도를 유지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영국과 스웨덴이 미국보다 사회 전체 의료비 지출은 적으면서도 더 나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볼 때, 노인 부양을 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책임지는 방식이 더 효율적이기도 하다.
결론 지금까지 한국 사회 내 복지 논의 지형을 살펴보고 각각의 대안이 가진 장점과 약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이를 토대로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실질적으로 복지를 대폭 확대하려면 일정한 수준의 물질적 조건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한국 자본주의가 그런 조건에 도달한 지는 오래됐다. 즉, 복지를 대폭 확대할 재원은 있다. 이 돈이 적절히 투자된다면 공공서비스 부문과 각종 소비재 산업 부문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대폭 늘릴 수 있다. 복지 확대 요구를 두고 “미래 세대에게 빚을 지울 것”이라거나 ‘경제 위기를 불러올 것’이라고 하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1950~60년대에는 유럽 복지국가들이 복지 지출을 상당히 증가시켰지만, 경제도 빠르게 성장했다. 심지어 일부 자본가들조차 보편적 복지 확대가 “최고의 장기 투자”라며 환영했다.
둘째, 그렇다고 자본가들이 복지 확대를 위한 재원을 스스로 내놓은 적은 없다. 복지 확대에 가장 관대하던 시절에조차 자본가들은 비용 부담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려 애썼다. 특히 전후 장기 호황이 끝난 1970년대 이후 이런 경향이 강화됐다. ‘장기 투자’는커녕 당장 일 년 앞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본가들은 투자하기보다는 자기 수중에 돈을 더 많이 확보하려고 애썼다. ‘자본가들의 계급투쟁’, 즉 신자유주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더구나 지금 같은 경제 위기 시기에 복지를 확대하려면 아래로부터의 강력한 노동자 투쟁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민주통합당이 선거에서 승리한다고 해서 복지가 자동으로 확대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한계는 민주통합당의 주요 기반이 자본가계급이라는 물질적 조건에서 비롯한다. 이 점을 잘 보여 주는 인물이 김진표 같은 자들이다. 이들은 민주통합당에서 핵심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민주통합당은 일부 NGO와 한국노총 지도부 같은 지지 기반도 있으므로 개혁 염원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런 다계급적 기반으로 말미암아 민주통합당은 결정적 순간에 우유부단, 우왕좌왕, 좌충우돌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 진보진영은 민주통합당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셋째, 유럽 복지국가 형성 과정에서 개혁주의적 노동자 정당(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집권하지 못한 나라에서도 계급투쟁이 성장하던 곳에서는(예컨대 북미 지역에서) 다양한 복지 제도들이 도입되고 확대됐다. 물론, 투쟁의 성장과 더불어 대중적 노동자 정당이 성장하고 집권한 유럽에서 복지 제도의 발전이 훨씬 안정적이었다. 그럼에도 복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집권보다는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운동이 더 근본적인 동력이었다. 사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성장과 집권 자체가 노동자 운동의 성장과 급진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노동자 계급의 바람과 투쟁의 결과를 단순히 반영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도 봐야 한다. 복지국가 형성기부터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모순적 구실을 했다. 한편에서 집권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노동계급의 힘을 바탕으로 보편적 복지 제도를 대대적으로 도입할 수 있었다. 이는 다시 노동계급의 자신감을 고무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집권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경제성장과 복지 확대라는 양 갈래 길에서 끊임없이 동요했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도전하지 않으려 하는 사회민주주의 정치의 한계에서 비롯했다. 많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용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복지국가가 만들어지던 시기에도 자본가들과의 타협을 어렵게 만든다며 노동자 운동을 가로막고 계급 세력 균형에 악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결론들에 비춰 보면, 오늘날 한국에서 복지 확대를 위한 요구는 첫째, 많은 노동자들이 실질적 개선이라고 여길 만큼 충분한 것이어야 한다. 계급 연합을 위해 진보진영의 요구를 민주통합당이 수용할 만한 수준으로 후퇴시킨다면, 노동자들은 그것을 위해 투쟁에 나서려 하기보다는 수동적 지지에 머물 것이다. 그러면 마치 엔진이 고장난 자동차처럼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될 것이고, 되레 노동자 투쟁을 기성 정치의 논리에 종속시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둘째, 노동자들을 광범하게 단결시키는 요구를 제시해야 한다. 그 점에서 정규직 양보론을 수용하는 ‘사회연대전략’이나 노동자의 보험료·세금을 인상해야 한다는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 ‘보편적 증세론’ 등은 문제가 있다. 이런 요구는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사기에 악영향을 끼치고, 운동의 힘을 약화시킨다.
셋째, 다른 사회 개혁 운동과 마찬가지로 복지 확대 과제를 실현하는 데서도 중간계급의 지지를 끌어내는 것은 중요하다. 이들의 지지를 끌어내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이런 개혁이 중간계급에게도 이익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기업주와 부자 들에게서 재원을 마련하는 ‘보편적’ 복지 확대 요구는 이런 조건을 만족시킨다. 거꾸로 보편적 증세 같은 대책은 오히려 이들도 멀어지게 만들 뿐이다. 다른 하나는 그런 개혁이 현실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려면 실제로 기업주와 부자 들의 저항을 물리칠 힘을 가진 노동계급의 투쟁이 강력해져야 한다.
그런데 일부 급진 좌파는 최근의 복지국가 논의가 계급적 불만을 체제 내 개혁으로 수렴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하며 회피한다. 그들의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대중에게 필요한 복지가 충분히 보장되려면 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른 원리로 운영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기업의 이윤이 아니라 대중의 필요에 따라 생산하고 분배하는 진정으로 민주적인 체제에서만 이런 일이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복지국가를 쟁취하려는 요구와 운동이 반자본주의적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점도 볼 줄 알아야 한다. 복지 확대 요구는 부분적이나마 ‘필요에 따른 분배’라는 반자본주의적 요소를 담고 있다. 특히 오늘날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 위기 속에서, 복지 확대 요구는 자본가들의 이윤 확대 요구와 충돌한다. 그리고 실현 가능하면서도 노동계급을 단결시키는 요구들은 더 광범한 계급투쟁을 고무한다. 이런 요구들을 내걸고 단결할 수 있을 때 노동자들은 훨씬 잘 싸울 수 있다. 이런 투쟁이 커지고 요구의 실현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노동자들의 요구는 확대·발전할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모든 거대한 노동자 운동들이 보여 준 보편적 사실이다.
따라서 변혁적 좌파는 개혁을 바라는 이 운동이 발전해서 체제 자체에 도전하는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려면 그 둘 사이에 가교 구실을 할 과도적 요구들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비정규직 정규직화, 무상의료, 무상교육, 무상보육, 기초노령연금 확대, 최저임금 인상(평균임금의 50퍼센트), 실업 급여 인상, 청년실업 해소, 공공임대주택 확대 등이 그런 요구들이다. 이를 실현하려면 ‘부자 증세’도 필수다.
주
- 윤홍식 2011a, p176. ↩
- 발 2012, p194. ↩
- 가처분 소득은 시장소득에 복지 혜택 등 재분배 결과를 포함한 것으로 한국의 재분배 정책이 양극화 완화에 거의 기여하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
- 절대 빈곤층은 소득이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는 가구를 뜻하고 상대적 빈곤층은 소득이 중위 소득의 50퍼센트 미만인 가구를 뜻한다. 중위 소득은 전국민을 소득에 따라 한줄로 세웠을 때 정확히 중간에 있는 사람의 소득이다. 2011년 최저생계비는 4인 가족의 경우 1백43만 9천 원이고, 2011년 이사분기 현재 도시가구의 중위 소득은 2백96만 7천 원이다. 따라서 가구 소득이 1백48만 3천5백 원 미만인 가구를 상대적 빈곤층이라 부른다. ↩
- 이창곤 2011, p60. ↩
- 윤홍식 2011b. ↩
- 양재진 2011, p120. ↩
- 자세한 논의는 정형준 2010과 장호종 2010을 보시오. ↩
- 암스트롱 외 1993. ↩
- 신정완 2000. ↩
- 고세훈 2007. ↩
- 노동자들에게 이로운 정책들의 경우에도 실제로는 자본가들에게 더 이로운 정책일 때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인 스웨덴의 연대임금 정책과 임금 유동 현상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장호종 2009를 참고하시오. 또 아스비에른 발은 이렇게 지적한다. “자본가들의 입장에서 노동운동이 결과적으로 끌어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양보할 뜻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여럿 있다. … 타협이 자본의 소유자에게는 고차원의 ‘집단 상식’이기보다는 전술적 행동이었다. 만일 ‘집단 상식’이라는 표현이 대결보다는 협력이 더 선호되어야 한다는 역사적 인식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렇다.” ↩
- 암스트롱 외 1993. ↩
- 양재진 2010. ↩
- 예컨대 김윤태 2009, 변광수 2011 등은 스웨덴도 복지 제도를 뜯어고치고 있다는 우파들의 주장을 비판하며 2006년 이후 보수당 정권에서도 스웨덴의 복지가 크게 후퇴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또, 이를 보건대 스웨덴에서는 좌우파를 뛰어넘어 복지국가에 대한 합의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아전인수식 해석이다. 실제로 보수당 정권 시절에 복지가 급격히 후퇴하지 않은 까닭은 이미 1990년대에 사민당 정부가 복지를 크게 후퇴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수십 년 만에 사민당이 정권을 잃고 보수당이 집권한 것은 그 결과였다. ↩
- 발 2012, pp185-187. ↩
- 이창곤 2011, pp116-119. ↩
- 발 2012, pp165-166. ↩
- 이창곤 2011, p133. 강조는 인용자. ↩
- 이창곤 2011, p262. ↩
- 예컨대 세계은행은 1994년에 발표한 ‘고령화의 위기를 피하기Avoiding the Old Age Crisis’에서 각국 정부들의 연금 개혁 ‘지침’을 제시했다. 그 핵심은 공공연금을 직장연금으로, 부과식 연금을 적립식 연금으로, 확정급여형 연금을 확정기여형 연금으로 바꾸는 등 금융화를 촉진하고 개인의 책임을 강조해 결과적으로 국가 지출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었다. ↩
- 윤수정 2001. ↩
- 발 2012, p254. ↩
- 같은 해 10월에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제3회 비판과 대안을 위한 보건복지연합학술대회’에서도 신 교수는 부자들에게 세금을 걷어 복지에 쓰자는 사회복지세를 반대하고 “복지국가 운동은 반자본 운동이 되면 안 된다”며 좌파적 대안들을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했다. 다만 최근에는 “누진적 조세 체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빈민과 일반 국민의 도덕적 책임뿐 아니라 부자와 권력을 지닌 자들의 사회적 의무”를 강조하는 등 최근의 분위기를 따라 왼쪽으로 조금 이동한 듯하다. ↩
- 이상이 2011. ↩
- 홍헌호 2011. ↩
- 정선영 2012에서 재인용. ↩
-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2011, p142. ↩
-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2011, p135. ↩
-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2011, p136. ↩
- 루도스 2010. ↩
- 윤홍식 2011a, p183. ↩
- 차승일 2010, pp323-324. ↩
- 안상훈 2011. ↩
- 하먼 2009, pp122-124. ↩
- 유종일 2011. ↩
- 고프 1986, p302. ↩
- 앤드류 글린, 밥 서트클리프 등 네오리카도주의자들의 주장인데 당시 많은 좌파 경제학자들이 이런 논리를 받아들였다. 그러다 보니 현금 복지도 위기를 낳는 데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됐다. 이에 대한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은 하먼 1995를 보시오. ↩
- 브레너 2002, p59. ↩
- 1970년대 경제 위기의 원인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하먼 1995를 보시오. ↩
- 이창곤 2011, pp131-132. ↩
- 차승일 2010. ↩
- 차승일 2011. ↩
- 이창곤 2011, p135. ↩
- 신동면 2011. ↩
- 주은선 2011. ↩
- 주은선 2011, p33. ↩
- 이창곤 2011, pp146-148. ↩
- 이에 대한 비판은 강동훈 2010을 보시오. ↩
- 양재진 2010. ↩
- 주은선 2011, p37. ↩
- 발 2012, p143. ↩
- 이수현 2010. ↩
- 하먼 2010, p49. ↩
- 정성진 2011. ↩
- 홍기빈은 최근 출판된 책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책세상)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해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는데 요지는 마르크스주의가 모종의 결정론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한 간결한 비판은 캘리니코스 2003을 보시오. ↩
- 신정완 2011. ↩
- 주은선 2011, p43. ↩
- 발 2012, p177. ↩
- 발 2012, p192. ↩
- 결론의 내용은 장호종 2011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
참고 문헌
강동훈 2010, ‘한국 진보진영의 경제 대안 논의 — 복지국가 논의를 중심으로’, 《마르크스21》 7호(2010년 가을).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2011, 《우리는 중산층까지 복지 확대를 요구한다》, 밈.
고세훈 2007, 《복지 한국, 미래는 있는가》, 후마니타스.
고프, 이안 1986, ‘선진자본주의에 있어서의 국가지출’, 《자본주의 국가논쟁》, 한울림.
루도스, 니코스 2010, ‘유럽 반자본주의 활동가들이 말하는 경제 위기와 노동자 투쟁, “반자본주의 좌파가 기층 투쟁 조직에서 결정적 구실 하고 있다”’, <레프트21> 37호(2010.7.31).
발, 아스비에른 2012, 《지금 복지국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부글.
브레너, 로버트 2002, 《붐앤버블》, 아침이슬.
신동면 2011, ‘어떤 복지국가인가? : 복지담론의 평가와 발전 방향’, 한겨레 사회정책연구소 주최 제4회 대안담론포럼 ‘복지국가 건설의 정치경제학’ 발표문(2011.12.8).
신정완 2000, 《임노동자기금 논쟁과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여강.
신정완 2011, ‘비그포르스와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포럼(2011.5.13).
안상훈 2011, ‘사회서비스형 복지국가전략의 지속가능성’, 《경제논집》, 제50권 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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