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1:그리스 시리자와 좌파 개혁주의의 한계
좌파 개혁주의에 답하며 *
이 글의 필자 앨러스터 매킨타이어(1929~ )는 지금은 서양 윤리학과 정치철학 분야의 세계적으로 저명한 학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가톨릭 신자가 돼 있지만, 1960년대 말까지는 국제사회주의경향의 혁명적 사회주의자였다. 이 글은 그가 32살 때인 1961년, 영국 공산당계의 스탈린주의자이자 개혁주의자인 헨리 콜린스를 비판한 소론小論으로, 개혁주의 전략을 추구하는 스탈린주의 정당이 진보 정치를 표방하는 오늘날의 한국 노동운동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줄 것이다. [ ] 안의 말과 각주는 옮긴이가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단 것이다.
《자본론》에서 정교한 경제 분석을 완성하기 전에 이미 혁명적 입장을 취했다는 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콜린스 입장의 이론적 구조는 무엇인가? 콜린스 자신이 그것을 밝히지 않아, 우리는 그가 특정 쟁점들에 관해 한 주장에서 추론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공정치 못한 처사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입장의 이론적 구조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진정한 쟁점이 흐려지므로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나는 그의 특징적 주장 다섯 개를 다룰 텐데, 그것들을 모아 보면 현대 사회 전체에 관한 어떤 이론을 포착할 수 있다. 첫째, 그가 주장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모두 경제에 관한 것들이다. 그가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기본 도식에 따르면, 정치 활동은 경제 체제의 작동 방식을 바꾸거나 억제할 수 있고, 반대로 경제 체제는 정치 활동이 개입하지 않는 한 [자연] 법칙처럼 작동한다. 그의 경제 체제 개념은 사람들의 활동과 그 활동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일부만 추상해 묘사한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가 자본주의다. 특히, 콜린스는 사람들이 체제에 대해 갖고 있는 신념이 체제 안에서 하는 구실을 보지 않는다.(콜린스의 글만 보면 마르크스의 출발점이 부르주아 정치경제학 비판이었다는 것과, 마르크스가콜린스의 세계관에 따르면, 체제에 대한 신념(자본주의에 대해 자본가가 갖고 있는 신념이든 콜린스나 마르크스주의자가 갖고 있는 신념이든)은 체제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된다. 베른슈타인도 그렇게 생각했다. 신념과 사회 체제의 관계를 이렇게 보는 것이 바로 마르크스와의 기본적 차이점이다. 이처럼 콜린스는 신념을 체제 바깥에 있는 것으로 보아, 정치도 경제의 바깥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경제 활동과 정치 행동이 사회적으로 연결돼 있음을 결코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콜린스는 마르크스주의를 한편으로는 경제학,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학으로 여길 뿐 그 실체를 보지 못한다. 즉, 콜린스는 마르크스주의가 독특한 철학적 요소가 가미된 사회학이라는 점을 놓친다.
1 경제학이 서로 강조하는 바가 크게 다른 여러 이유 중 하나다.
둘째, 콜린스가 ‘레닌 대 베른슈타인’ 허수아비 전투에서 끌어와 자기 경제관의 핵심 요소로 삼은 개념은 ‘한계’다. 즉, 자본주의는 확장하는 한 살아남을 수 있고, 새로운 시장이 존재하는 한 확장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그런데 시장은 제한돼 있으므로 한계에 다다르면 자본주의는 위기에 처하게 되고 결국 붕괴할 것이라는 것이다. 개혁주의자들이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은 자본주의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마르크스가 잘못 예측했느냐 아니냐는 것이다. 거대 자본의 형성과 그것의 지배력, 제국주의, 기술 발전, 상시군비경제 같은 것들이 자본주의의 한계를 지연시킬 만병통치약으로 시기에 따라 제기됐다 사라지곤 했다. 그러나 사실은 이 ‘한계’라는 개념 자체가 완전히 잘못됐다. 자본주의 생산의 한계는 처음부터 체제에 아로새겨져 있는 것이지 어떤 임계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 한계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는 체제가 어떤 국면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 자본주의가 붕괴할 수밖에 없는 임계점이 어딘가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는 [이윤율 저하라는] 장기적 추세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불황에 관한 철칙이나 절대 이론을 인정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경제학과 바르가의2 과연 그런 유형의 국가가 노동계급이 가하는 압력에 고분고분 따르고 또 경제를 통제할 수 있는지 따져봐야 하는데, 콜린스는 그냥 그렇다고 선언해 버린다.
셋째, 콜린스의 국가관은 허수아비 전투에서 나타나는 국가관과 본질적으로 같다. 바로 국가를 자본가 계급에게서 떨어져 있는 행정·입법 권력으로 보는 것이다.(비록 자본가 계급이 국가를 지배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콜린스는 노동계급이 국가에 압력을 가해 자본가들의 경제 지배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콜린스의 견해는 기이해진다. 자본주의 경제를 (내 생각만큼이나)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보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변화는 거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가가 경제에서 하는 구실이 콜린스의 주장처럼 그렇게 대단하다손 치더라도,넷째, 콜린스의 글에는 누가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왜 그들이 그럴 것인지에 관한 언급이 일언반구 없다. 트로츠키는 오직 의식적 노력으로만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강조했고 레닌은 소수나 한 정당이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둘의 말을 종합하면 사회주의는 오로지 대중이 사회주의 의식을 획득해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콜린스는 “노동계급의 압력”과 “노동자와 민주주의의 끊임없는 압력”을 말한다. 그가 “압력”이라는 용어를 불분명하게 사용한다는 것을 제쳐 놓더라도 대체 그 압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누가 그 압력을 창출하는가? 그 압력을 이끌어 낼 사회주의 의식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콜린스가 이에 아무런 답변도 내놓지 않는 것은 그가 “사회주의”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 밝히지 않는 것과 한 짝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물음의 해답은 사회주의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고 묻는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질문에 혁명가들이 내놓는 답변 가운데 하나는 개혁주의적 방식으로는 사회주의라 부를 만한 것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3 자본주의 내부 노동운동의 압력에 의해 자본주의 사회는 점진적이고 완만하게 사회주의(그 뜻은 불분명하지만)로 이행할 것이라고 한다.
정리하면, 콜린스의 논리 구조는 이렇다. 자본주의 경제는 순전한 경제적 압박만으로는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고, 부르주아 국가도 많은 정치적 압박을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외부 공산주의 나라들의 압력과여기서 콜린스 이론의 다섯째 특징이 도출된다. 바로 그가 공산당 국가들을 사회주의 국가(불완전하지만)로 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논박하겠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콜린스가 이 공산당 국가들의 특징이라고 제시한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지 않은 것, 즉 그 국가들이 국제적으로 다른 국가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다. 핵무기를 중심으로 한 세계적 무력 경쟁 문제를 콜린스는 어물쩍 흐리고 넘어간다. 그 대신 콜린스는 공산당 국가들의 도전 덕분에 독립을 이룬 나라들(이 나라들의 본질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이 자유를 얻게 됐고, 결국에는 자본주의 지배계급이 “통제력을 상실”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나는 논쟁적으로 콜린스의 주장을 정리했다. 지금부터는 개혁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무엇이 다른지 살펴보겠다.
II
개혁주의는 단지 사회에 관한 일련의 사상이 아니다. 개혁주의 사상은 사회 생활을 설명하려 하지만 개혁주의 사상 자체가 이미 사회 생활의 일부다. 개혁주의 사상은 주로 어떤 사회 생활을 반영하는가? 개혁주의 사상은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정당성을 획득하고 지배력을 구축한 조건에서 비롯한다. 개혁주의는 사회주의 사상을 사회 현실에 맞게 수정하려는 흐름을 나타낸다. 개혁주의가 등장하는 단계 앞에는 자본주의가 확장하는 단계가 있다. 자본주의 확장기에 노동계급 운동은 겉으로는 여전히 혁명적 목표를 추구하고 혁명적 이론을 따르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 안에서 노동계급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목표를 추구한다. 독일 사민당은 1890년대에 이 단계에 도달했다. 독일 사민당에서 베벨은 정치 전술을 담당했고 카우츠키는 이론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 단계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데, 실천에 맞도록 이론을 정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내 대두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장기간 성장하던 탓에, 체제가 결국 파멸한다는 비현실적 예언은 입지가 좁아지고, 자본주의가 자기 조절 능력을 가졌다는 믿음이 생겨난다. 베른슈타인이 카우츠키를 밀어낸다.
그래서 개혁주의 사상은 혁명적 목표를 폐기하는 경향을 띠고 또 그런 경향을 강화한다. 개혁주의 사상은 노동조합이 급진적 목표를 폐기하고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하는] 당이 부르주아적 정치를 수용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그 결과 노동계급 운동이 필연적으로 두 방향으로 갈라진다. 지도부는 부르주아 의회와 국가 기구에 동화된다. 기층 노동자들은 부문별로 파편화되고, 부르주아 사회의 가치관을 습득하고, 더는 단일한 운동을 이루지 못한다. 노동운동 기구 중 일부는 부르주아 사회의 기구로 편입되고, 또 다른 일부는 공적 영역에서 벗어나 사적 영역이 된다. 사회를 점진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부르주아 기구들에 활용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런 방식은 기껏해야 노동자들에게 개혁을 선사하겠다는 것이지, 노동자들 스스로 개혁을 쟁취하라는 것이 아니다. 개혁주의적 방식에서 노동계급의 자발적 활동은 최소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자발적 활동은 잠재적으로 혁명적인데, 자본주의의 경제 체제와 정치 체제가 근본적으로 기대는 것, 즉 노동자들이 자신의 소외된 처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완전히 단절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삶 전체가 그런 자발적 활동으로 영위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치 원칙이다. “혁명적 사회주의”라는 말이 동어반복인 까닭이다. 좌파 개혁주의 사상은 노동운동이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평화로운 길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에서 멀어지는 길을 제시한다. 개혁주의적 전술들은 혁명적 전략의 가장 효과적인 적이다.
노동운동이 개혁주의 사상과 더 중요하게는 그 사상이 표현하는 체제 논리를 수용하면, 자본주의가 가하는 사회적 압력에 취약해진다. 노동운동은 자본주의 경제와 정치가 가하는 압력에 대응할 뿐, 더는 변화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따라서 좌파 개혁주의자들이 말하는 ‘압력’이 생겨날 여지가 없다.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반란이 등장하면 노동운동 내 개혁주의 경향들은 부르주아 질서의 다른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그 반란을 배격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당이 핵무장해제운동CND을 거부하는 까닭은 노동당 지도부가 좌파 개혁주의 사상 대신 우파 개혁주의 사상을 받아들여서가 아니다. 노동당 전체가 좌우파를 막론하고 개혁주의적 활동 방식(또는 활동과 거리를 두는 개혁주의 방식)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청년 반란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노동당 산하 청년 단체인] ‘청년 사회주의자’의 각 지부에 활력을 주는 청년들이 지향하는 바는 사회 질서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데, 노동당은 기존 사회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개혁주의로 약화된 노동운동은 개혁주의적 구실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개혁주의는 노동운동의 반항 정신도 표현하지 못할 뿐 아니라 [노동운동이 아닌] 다른 운동도 대변하지 못한다.
5 핵무기는 단지 여러 쟁점 중 하나가 아니다. 핵무기에 관한 정치적 태도는 현대 사회에 관한 정치적 태도다. 콜린스가 핵무기에 관한 아무런 언급도 없이 정치를 논하는 것은 그가 가진 개혁주의 사상의 약점을 드러낸다. 개혁주의자들을 포함한 광범한 사람들은 일국 국가의 성격이 국제적 상황과 무관하게 규정된다고 착각한다. 그러면서 국가의 외교·군사 정책을 단지 액세서리 정도일 뿐인 것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어느 국가든 외교·군사 정책과 조응하는 내부 구조를 갖추게 마련이다. 핵무기의 전쟁 억제력에 의존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국가가 그런 정책을 집행하려면 기밀로 은폐된 대규모 기술적·군사적 기구가 필요하다. 이 기구는 꽤나 큰 자율성(완벽한 자율성은 아니더라도)을 갖고서 전체 잉여가치의 큰 몫이 어디에 쓰여야 할지를 결정한다. 이런 기구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크게 약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런 기구는 사회주의적 질서와 결코 어울릴 수가 없다. 핵무기를 보유한 나라는 노동자 국가가 결코 되지 못한다. 노동자 국가가 핵무기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잉여가치에 관한 처분을 누가 내리고 그 처분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사회주의와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문제를 사회주의와 무관하게 여긴 고전적 사회주의 사상가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러나 공산당 국가들을 사회주의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주장할 수밖에 없다. 6
현재 가장 중요한 정치적 쟁점 하나는 핵무기 문제다.7 그러나 콜린스가 한사코 회피하는 마르크스주의적 핵심 질문은 이렇다. 시초 축적이라 불릴 만한 일이 일어나는 객관적 조건에서 어떻게 비非자본주의적 사회가 등장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는 것 말고 답이 존재한다면, 《자본론》 1권의 마지막 부분[제8편 시초 축적]뿐 아니라 역사유물론이 통째로 틀린 것이 된다. 생산수단을 차지한다는 것은 잉여가치를 처분할 권한을 갖는다는 뜻이다. 노동자에게 그럴 권한을 나눠 주지 않는 것이 자본주의의 전제 조건이다. 산업화 과정도 바로 그렇다. 산업화는 필요성의 영역realm of necessity, 곧 어떤 관념론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조건이 지배하는 사회 질서가 형성되는 것을 돕는다.
콜린스는 “공산주의 사회의 고소득·특권층”이 “사적 소유를 지키는 것에 이해관계가 있을” 때에야 그들을 지배계급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봉건제 사회에서 소유권은 흔히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 가졌다. 콜린스는 자본주의에서 소유권이 집단으로도 행사될 수는 없다는 주장의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어떤 사회가 계급 사회인가 아닌가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은 사회집단들이 착취 관계를 맺는가 아닌가이다. 콜린스는 공산당 국가들에서는 프레오브라젠스키가 “사회주의적 시초 축적”이라 부른 과정을 실시해야 했다고 인정한다.따라서 [소련과 동구권 나라의 관료가 지배계급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에서]입증 책임은 소련과 그 아류 나라들의 관료가 계급이 아니라고 [즉, 착취하는 지위에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있다. 그러나 그 나라들의 관료는 여느 계급 사회의 지배계급과 마찬가지로 온갖 특권을 누리므로 그런 주장이 성립할 여지가 별로 없다. 그래서 그 나라들의 관료가 착취 계급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근거는 다음 세 가지밖에 없다. 국유화, 이데올로기, 관료의 업적. 그러나 국가가 산업을 국유화했더라도 노동자가 그 국가의 주인이 아니면 그 산업을 노동자의 소유라고 할 수 없고, 소련식 마르크스주의는 지배계급 이데올로기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고, 관료의 업적은 전형적인 자본가의 업적이다. 콜린스는 소련의 높은 경제 성장률 운운하지만, 그는 19세기부터 오늘날 유럽경제공동체[유럽연합의 전신]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도 그와 같은 경제 성장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는 것을 편리하게 무시한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미국이 농업 부문의 성장률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에(반면에 소련은 아직 그러지 못했다) 미국도 사회주의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관료가 점차 해방을 가져오는 경향이 있다며 이를 사회주의에 가까워지는 징후로 보는 것도 터무니없다. 이 대목에서 소련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해방에 대해 설정한 기준이 얼마나 낮은지 지적해야 한다.
서방세계의 많은 학자들이 소련에서라면 자유로이 연구하거나 논문을 발행하지도 못할 거면서 소련이 서방세계보다 더 많은 자유를 보장한다고 찬양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마르크스가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누렸던 만큼의 학문적 자유를 소련 학자들이 언젠가 누리게 된다면, 현재 소련이 받는 찬사가 부르주아 사회와의 차이점이 아니라 공통점에서 비롯한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소련에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했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소련 사회의 국가자본주의적 본질을 찬양하는 것이다.
8 그 결과 전통적인 형태의 정치 활동으로 국가에 접근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진다. 현재의 구조 속에서 국유화 같은 전통적인 정치적 요구는 덜 적절해지고 있다. 산업이 발달한 나라에서는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정치 형태가 무엇이든 어김없이 관료제가 성장하고, 관료들이 무엇을 할지는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자들이 모인 각종 위원회들이 결정한다. 선출된 사람들이 그 안에서 활약할 여지는 거의 없다. 따라서 개혁주의자는 이런 질문에 답해야 한다. 당신은 무엇을 개혁하려 하는가? 앞으로는 문제를 정치적으로 다룰 가능성이 매우 작아진 조건에서 노동과 자본이 협상하는 양상이 증대할 것이다. 개혁주의가 장악하려는 국가 권력이 남아있는 한 레닌주의가 오래 전부터 부르주아 국가에 관해 개진한 주장들[부르주아 국가를 인수해서 개혁을 이룰 수 없다]이 여전히 유효할 테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국가 권력 자체의 성격이 변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콜린스는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서 인간의 의식적 측면이 얼마나 중요한지 전혀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에 필요한 객관적 조건(경제와 정치 모두)의 기준도 전혀 제시하지 못한다. 사회주의 건설을 방해하는 난관이 무엇인지도 명확히 제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대의 지배계급과 부르주아 국가에 관한 그의 견해에도 문제가 있다. 때때로 콜린스는 현대 국가가 경제와 사회로까지 활동 영역을 확대한 것을 두고 마치 거대한 단일 정치 구조물이 경제와 사회를 흡수한 것인 양 말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오히려 과거에 일원적이었던 국가 기구가 현대로 오며 각종 기관들의 네트워크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를 보여 주는 한 가지 사례는 영국 국가에서 의회가 하는 구실이 줄어든 것이다. 또 다른 사례는 [유럽 경제 공동체 건설을 주도하는] M 모네의 계획 입안 기구들인 프랑스의 전통적 정부 기구들과 프랑스 민간 자본의 관계다.9 대한 반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는 콜린스를 반박하며 개혁주의로는 사회주의를 실현할 노동운동을 보존하거나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것, 개혁주의는 핵무기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취급한다는 것, 그런 이유 등으로 현대 국가의 본질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는 것, 무엇보다도 사회주의로 이행하는데 필요한 객관적 조건과 사회주의적 의식을 어떻게 통일시키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마지막 대목은 좀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왜냐하면 이는 콜린스가 “종말론적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르며 비난하는 것에III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권력의 사용 방식과 관계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어떤 상황에서 그런 이행이 가능해지는가? 바로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에서 겪는 경험이 양면적이라는 점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 가능성이 나타난다. 노동자를 속박하는 바로 그 사회가 노동자를 속박에서 벗어나게 할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노동계급을 속박한다고 할 때 핵심은 노동계급이 가난하다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는 “임금이 높든 낮든 상관 없이” 자신에게 강요된 대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노동자가 스스로 해방될 가능성이 생겨나는 것은 흡사 쌍둥이와도 같은 두 조건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자가 속박된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는 것을 막을 수 없고, 그가 해방을 위해 다른 노동자들과 단결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자본주의에서의 노동 형태와 사회 생활이 이런 자각과 단결을 어느 정도 촉진한다고 할 수 있다.
노동자와 사회주의 사상가들에 맞서 자본주의는 세 가지 방어벽이 있다. 첫째, 자본주의에는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위기를 견딜 객관적 능력이 있다. 자본주의가 위기를 견디는 능력은 노동계급의 의식화를 막고 그 의식에서 정치적 요소를 거세하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이를 위해 자본주의는 둘째 방어벽이 있는데, 바로 노동계급의 요구를 자본주의가 부르주아적인 정치·사회 제도 틀 속으로 통합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중간계급을 양성하고 노동계급 내 부문주의를 부채질하는 셋째 방어벽으로 노동계급을 더욱 길들인다. 개인적 야심, 반쪽 진실을 가르치는 교육, 대중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오락과 여가 등 임시방편으로 계급의식을 흐린다는 것은 너무 잘 알 테니 굳이 강조하지 않겠다. 이런 친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개혁주의는 터무니없다. 좌파 개혁주의자는 마지못한 자유주의자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차라리 의식과 인식이 있는 자유주의자가 나을 것이다. 혁명적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 제3의 길은 없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방어벽들 때문에 혁명적 사회주의도 가망 없는 것은 아닐까? 엘리트주의 정당이 궁핍한 노동계급을 이끌고서 그 방어벽을 넘는다는 것은 확실히 소도 웃을 일이다. 이런 것을 레닌주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레닌이 [그들처럼] 정치적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신랄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들 때문에 ‘베른슈타인 대 레닌’ 허수아비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 개혁주의를 반대한다면서 엉터리 혁명주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개혁주의를 퍼뜨리는 이들 못지 않게 개혁주의를 돕는 셈이다.
그러면 혁명의 진정한 전망은 무엇인가? 사회 생활의 세 요소가 한데 모이는 것이다. 첫째 요소는 자본주의가 양산하지만 자본주의가 해결할 수는 없는 강한 사회적 불만이다. 둘째 요소는 되풀이되는 자본주의 사회 체제의 객관적 위기다. 셋째 요소는 사회주의 사상이다. 셋째 요소가 없다면 첫째 요소는 둘째 요소와 전혀 결합되지 못하거나 우연히 결합될 뿐이다. 셋째 요소와 만난 사회적 불만은 창조적 힘이 돼 기존 사회 체제에 대한 급진적 대안을 가리킨다. 그러나 대안이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아 삶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전망을 보여 주지 못하면 노동계급 의식은 특정 개혁주의적 목표들을 추구하는 데 머물 것이다. 이것은 종말론이 아니라 사회주의 의식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좌파 개혁주의에 반대하는 아주 거칠고 대략적인 주장을 제시했다. 혁명을 옹호하는 주장은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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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Alasdair MacIntyre, ‘Rejoinder to left reformism’, International Socialism (1st series) 6(Autumn 1961)
↩
- 예브게니 바르가(1879~1964)는 헝가리 출신 경제학자로 1930년대 스탈린의 핵심 경제자문이었으나, 제2차세계대전 후에는 자본주의가 마르크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라고 주장해서 권력에서 밀려났다. ↩
- 콜린스는 마르크스 시대와 달리 국가가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대량 실업 같은 체제 위기가 재현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
- 콜린스는 소련 등 동구권이 생산력을 사적 소유에서 해방시켰고 세계적 수준에서 서방 자본주의에 맞설 가장 중요한 세력이라고 주장했다. ↩
- 콜린스는 “혁명적 전략 속에서 개혁주의 전술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
- 이 글이 쓰인 1961년 당시 냉전 체제의 지배자들은 핵전쟁으로 상대를 위협했다. ↩
- 콜린스는 ‘공산주의’ 국가들을 국가자본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하며, 그 나라들이 후진적 생산 조건과 그것을 만회하기 위한 강압적 산업화 정책 때문에 “흉물스러운” 사회가 된 것은 불가피했고 일시적인 일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
- 1926년에 출판된 《새로운 경제학》이라는 저서에서 프레오브라젠스키는 러시아 경제의 발전이 충분치 못하므로 국가가 농민의 잉여 농산물을 차지해 그것을 공업 발전으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
- 이 논문이 쓰인 시기는 유럽을 통합한다는 구상이 첫발을 내디딘 때였다. ↩
- 콜린스는 자본주의 국가가 노동자들의 압력 때문에 개혁을 양보하다가 더는 그럴 수 없는 처지로까지 몰리면 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의 견해이고, 그런 종말론 같은 주장은 20세기에는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