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2:아나키즘과 신디컬리즘, 효과적인 대안인가
프레카리아트: 새로운 계급인가 허구적 개념인가? *
필자인 키어런 앨런은 아일랜드 사회주의노동자당 SWP의 지도적 당원이다. 국내에 번역된 저서로는 《막스 베버의 오만과 편견: 독일의 승리를 꿈꾼 극우 제국주의자》(삼인, 2010)이 있다.
의류업계처럼 학계도 유행을 탄다. 사업 수완 좋은 사회과학 학자들은 새 용어를 만들고 책과 동료 심사 논문으로 그것을 판매한다. 다른 학자들에게 많이 인용될수록 그 용어를 만든 학자는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된다. 유행을 앞서가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어서 신조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프레카리아트”라는 용어도 그런 최신 유행어의 하나다. 그 말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낱말을 가지고 만든 것으로 세계화로 말미암아 생겨난 최근의 시류를 담아 내려 한 말이다. 바스대학교 경제학 교수였고 현재 런던의 동양아프리카연구대학SOAS 교수인 가이 스탠딩이 처음으로 그 말을 만들어 냈다. 그 전에 가이 스탠딩은 국제노동기구ILO에서 20여 년 간[1975~2006년] 경제학자로 일하며 “유연성”에 관한 세계적 전문가로 알려져 있었다. 신자유주의 담론의 득세에 회의적인 스탠딩의 관점은 또 다른 학계 유명 인사인 칼 폴라니의 영향을 받았다. 폴라니는 사실상 시장의 엄청난 힘을 규제를 통해 제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2년 ILO 경제학자였을 때 스탠딩은 현대 사회의 핵심 집단인 것처럼 여겨지는 “유연 노동자”가 늘어나는 것에 맞춰 복지 국가도 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유연 노동자”라는 말이 “프레카리아트”라는 말로 바뀌었고, 스탠딩은 학계에서 일약 유명해졌다.
만약 “프레카리아트”가 그저 학술 출판 시장 때문에 생겨난 말에 불과하다면 논란거리가 거의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프레카리아트” 같은 말은 이론적 이해를 반영하는 개념이다. 학계의 이론이 온갖 치장과 난해한 전문 용어로 넘쳐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론은 직접적 경험을 넘어서는 세계를 이해하도록 돕는 도구다. 때로 그런 이해는 우리의 실천이나 전략적 선택과 연결돼 있다. 가이 스탠딩의 프레카리아트 개념도 분명히 중요한 함의가 있다. 스탠딩에 따르면, 프레카리아트는 다음 일곱 가지 주요 노동 안전망이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첫째, 다시 찾아온 대량 실업 때문에 충분한 소득을 벌 기회가 없다. 둘째, 일자리를 갖더라도 사용자가 내키는 대로 해고할 수 있다. 셋째, 명시된 직무기술서가 없다.[즉, 업무에 관한 권한과 책임이 분명하지 않다.] 넷째, 고용되더라도 건강·안전에 관한 작업 수칙이나 노동시간·초과근로 규정 등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다섯째, 진급이나 기술 연마의 기회가 없다. 여섯째, 최저임금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물가인상률만큼의 임금 인상을 보장받지 못한다. 일곱째, 집단적 의사 표현 수단이 없다. 이것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특히 이주민이나 청년이나 노인(연금이 충분하지 않아서 다시 일을 해야 하는)이 그렇다.
이해관계가 다르다?
그러나 스탠딩의 목적은 단지 현상 묘사가 아니다. 이론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이런 사태 전개를 이해할 방법을 밝히고 실천과 정책의 지침을 제공하려는 것이다. 스탠딩은 마르크스주의의 언어를 모방해서 프레카리아트가 “형성 중인 새 계급”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프레카리아트는 조직돼 있거나 자신의 독자적 이해관계를 자각하고 있지는 않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하나의 계급으로서 존재할 객관적 조건이 조성돼 왔다는 것이다. “프레카리아트”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핵심 이유는 이 계급이 “프롤레타리아”와 이해관계가 뚜렷이 다르다는 것이다. 스탠딩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프레카리아트는 “노동계급”이나 “프롤레타리아”의 일부가 아니었다. 노동계급이나 프롤레타리아는 사회가 주로 다음과 같은 노동자로 이뤄졌음을 시사한다. 곧, 장기간 안정적으로 일하고, 노동시간이 정해져 있고, 승진 경로가 보장돼 있고, 노동조합의 가입 대상이자 단체협약의 적용 대상이고, 부모 세대도 알 만한 일자리를 갖고, 친숙한 국내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 말이다.
4 이를 통해 그는 노동계급이 더는 공통의 이해관계로 단결하며 새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이제 희망은 “형성 중인 새 계급”인 “프레카리아트”에 있다는 것이다.
노동계급을 이렇게 기괴하게 정의하는 것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루기로 하고, 우선 이 가상적인 논조와 노동계급을 다소 보수적으로 여기는 관점에 주목하자. 사실, 스탠딩은 이런 “전통적” 노동계급을 노골적으로 업신여긴다. 그는 노동계급이 수세기 전에 “우리 문화에 자리 잡은 용어”일 뿐이라며 “오래 전에 노동계급이 끝장났다”는 앙드레 고르즈의 선언(얄궂게도, 고르즈가 이 말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68년 프랑스 총파업이 벌어졌다)에 동의한다.5 스탠딩은 노동조합이 “경제주의적이고 다른 집단에 공격적으로 되기 마련”이라며 사실상 폄하하는 반면, 프레카리아트는 사용자뿐 아니라 다른 노동자 집단과도 “단체협상”을 맺을 새로운 집단적 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노동조합으로 자신을 대변할 수 있는 샐러리아트나 핵심 종업원들과는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6
이런 변화는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스탠딩이 ILO의 사회자유주의[진보적 언사를 사용하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여전히 옹호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이런 관점의 근원에는 노동운동에서 득세하는 개혁주의 정치에 대한 반감이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 정치에 대한 이런 공격이 때로는 반자본주의 좌파의 언어를 연상시키지만, 사실 이 공격은 우파적 공격이다. 전통적 노동운동은 관료적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안정을 누리는 보수적 세력으로 묘사된다. “샐러리아트”(화이트칼라 노동자를 일컫는 사회학 용어)는 엘리트 계층과 마찬가지로, 더 열심히 일하는 것도 아니면서 “금융 자본을 대부분 가져가고 훨씬 더 많은 소득을 얻는다”는 것이다. 기계적 결정론과 시대적 불가피성이라는 편리한 논리 뒤에 숨어서 스탠딩은 “큰 국가”[를 바라는] 개혁에 집중하는 것이 시대착오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프레카리아트가 “세계화의 자녀”이고, 세계화는 결국 국가와 “국가의 계획과 규제 기관”을 싫어하는 “대담한 사회·경제 사상가 집단”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비극인 것은 그들의 진단은 일부 맞지만, 그들의 예후가 냉혹하다는 것이다.”8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살아 있는 창조적 에너지를 한낱 상품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비판했는데, 스탠딩은 오히려 그런 상품화가 충분히 진척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마지못해 지급하는 것에 모두 가격을 매겨야 한다고 한다. 예컨대, 미국 노동자들이 받는 “화려한” 건강보험 혜택을 “시장의 선택에 따라 구매할 수 있는 혜택”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9 스탠딩은 출산 휴가를 폐지하자는 더욱 기괴한 주장도 하는데, 그런 비시장적 혜택을 결코 받지 못할 납세자들(프레카리아트를 포함해서)에게 부담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10 그는 관료적 복지 서비스를 비난하며 NGO의 자발적 복지 서비스를 찬양한다. 심지어 데이비드 캐머런[영국 보수당 소속의 현재 총리]의 말뿐인 제안에도 머리를 끄덕이는데, 그 제안은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자신이 속한 기관을 협동조합처럼 운영해 스스로 영업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임금이 깎일 공산이 큰데도 말이다.
스탠딩이 제안하는 덜 냉혹한 해결책은 “큰 국가”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개혁주의자들은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 하고 선언하지만, 그와 반대로 … 노동을 완전히 상품화해야 한다.”만약 이런 것이 스탠딩 주장의 요지라면, 대체 왜 “프레카리아트”라는 말이 좌파에서 그렇게 유행하는가? 예컨대, 노엄 촘스키는 스탠딩의 책이 “매우 중요하다”며 “프레카리아트”라는 말을 되풀이 해 쓴다. ‘점거하라’ 운동의 다수는 미국의 일부 노동조합과 유대가 있으면서도 “프레카리아트”라는 말을 쓴다. 그러나 [‘점거하라’ 운동 내] ‘투쟁을 전진시켜라’ 같은 소규모 그룹은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노동조합 투쟁, 특히 비교적 특권을 누리는 노동자들이 벌이는 노동조합 투쟁에서 빈민, 실업자, 미등록 이주노동자, 이주민, 유색 인종도 얻는 것이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이것은 많은 혁명가와 좌파가 보지 않으려 하는 불편한 진실이다.리처드 시모어 같은 저술가들이 스탠딩의 주장에 통찰력 있는 비판을 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시모어는 “프레카리아트라는 호칭은 [훨씬 더 광범한] 민중을 주체로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며 좌파가 이런 표현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급진적 다수에게 반자본주의적인 정치를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최근 프레카리아트라는 개념이 일부 좌파들의 담론에 침투한 데는 많은 이유가 있다. 스탠딩 책의 내적 구성이 그 이유 중 하나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상품화가 더 진척된 자본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인데도 이 책은 1999년 시애틀 항쟁 이후 반자본주의 운동에서 등장한 여러 논의를 끌어온다. 즉, 대학을 장악하는 기업에 대한 비판, 상업적 이익에 침해당하는 “공유지”와 도시 공간에 대한 방어가 담겨 있다. 스탠딩은 노동과 여가의 경계가 “흐려진다”는 비평을 할 때는 원래 1970년대 이탈리아 노동자주의 운동에서 등장한 “사회적 공장” 얘기도 흘깃 언급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때문에 광범한 대중의 생활수준이 떨어진 사실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폭넓은 비판도 있다. 스탠딩이 이런 논의들을 현상적 측면에서 다루기는 하지만 이 책의 핵심 논지는 여전히 프레카리아트가 조직 노동계급과 이해관계가 다르고, 국제적 규제가 있지만 상품화가 더 진척된 자본주의가 필요하고, 프레카리아트가 시장에서 더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하려면 기본소득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스탠딩의 책이 비교적 긍정적인 반응을 얻는 데에는 책 외적인 이유도 있다. 서구 자본주의의 구조조정으로 많은 사람들(특히 청년)이 엄청난 불안정에 시달리게 된 것이 그 이유 중 하나다. 이 구조조정은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한층 더 빨라졌다. 그 결과 한때는 노동계급 최하층의 일부가 겪던 끔찍한 생존 조건을 훨씬 더 많은 노동자들이 겪게 됐다. 예컨대 대졸자들을 보자. 변화가 얼마나 큰지를 묘사하기 위해 아일랜드의 통계를 살펴보겠다.
최근 아일랜드에서 25~34세 인구 중 매우 많은 사람들이 고등교육을 이수한다. 그 비율은 해당 연령층의 48퍼센트에 이르고, EU 평균인 33퍼센트에 견줘 높은 수준이다. 대다수 청년들은 대학 학위를 따면 더 나은 삶을 누릴 기회와 어느 정도 안정적인 “직장”을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하며 대학에 들어간다. 실제로 다수는 대학 학위를 중산층으로 진입하는 입장권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매우 다르다. 청년 실업률이 30퍼센트까지 치솟았다. 이민을 떠난 수많은 사람들을 통계에서 제외했는데도 그렇다.(특히 청년층이 이민을 많이 떠났다.) 많은 청년들은 일자리를 얻기 전에 무급 인턴으로 몇 달을 일한다. 그러고 나서도 청년들은 정규직이 되기까지 임시직 일자리를 전전하기 십상이다. 아일랜드중등교사노동조합ASTI에 따르면, 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들이 평균 8년 동안 임시직으로 일한다. 더구나 청년들은 일자리를 얻어도 더 적은 임금과 더 적은 연금을 받게 되는데, 노조 지도자들이 청년 노동자들을 배신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보면 “프레카리아트”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주장이 꽤나 호소력이 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둘째 이유는 반자본주의 좌파 일부가 빠져 있는 이데올로기적 혼란과 관련 있다. 2008년 경제 위기는 “체제의 전반적 위기”라는 점에서 1929년 경제 위기를 닮았다. 그런데 노동운동의 대응은 그리스 같은 특정 나라들에서는 강력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다. 일부 좌파는 위기의 규모에 견줘 노동계급의 대응이 약하다는 불균형을 설명할 “새” 이론을 찾아 나서게 됐다.
게다가 페리 앤더슨이 오래 전에 지적했듯이,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부쩍 학계로 들어가 계급 투쟁과 관련 없는 문화나 관념론적 철학에 탐닉해 왔다. 앤더슨이 이런 지적을 했다는 것이 역설처럼 느껴질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레닌, 트로츠키, 룩셈부르크 같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사회 환경에 있다는 그의 요지는 유효하다. 그 결과로 사회과학 학계의 많은 학술적 좌파들은 “전통적” 노동운동이 경제주의적인 부문적 요구 외의 다른 요구로는 투쟁하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놀랄 것도 없이 학계에서는 두 가지 유형의 새 이론이 나와서 노동계급의 수동성을 설명하려 했는데, 불행하게도 이 이론들이 좌파 사이에서 영향력이 있다.
13 스탠딩의 《프레카리아트》도 후자 유형의 이론의 좋은 사례다. 《프레카리아트》는 자본주의가 구조적으로 변했으니, 이제 관심을 조직 노동자가 아니라 더 넓은 사회운동과 “프레카리아트”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여러 변형들은 조직 노동자에게 너무 초점을 맞추다가 “운동”과의 연결고리를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일부 반자본주의 좌파 사이에서 청중을 얻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노동계급의 뼛속까지 침투해 노동계급은 이제 집단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는 것이 첫째 이론이다. 제니퍼 실바의 《더 올라갈 수 없다: 불확실성의 시대의 성인 노동계급》이라는 책이 좋은 사례다. 이 책은 청년 노동자들이 더는 개인의 아픔을 사회 문제와 연결시켜 보지 못하고, 그 결과 근본적으로 개인주의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자본주의의 성격과 노동계급이 구조적 변화를 겪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엡스타인과 크리프너는 “금융화”에 관한 연구서에서 이윤이 더는 생산과 관계 없이 생겨나는 현상이 자본주의 구조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 좋은 예라고 했다.바로 이것이 스탠딩의 “프레카리아트” 개념이 호평을 받은 더 큰 맥락이다. 이 책의 핵심에는 마르크스주의의 능동적 세계관과 어긋나는 분석틀(주로 학계에서 가져온)이 있다. 스탠딩의 분석틀은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인간 노동의 상품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하는 것일 뿐 아니라, “세계화”로 말미암은 변화를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정당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 책은 노동운동 안에서 일어나는 정치투쟁을 분석하지는 않고 그저 “가짜 향수”를 자극하며 노동자가 신자유주의 가치를 내면화하고 말았다거나 경제의 구조적 변동 때문에 쓸모없어졌다고 폄훼한다. 스탠딩의 책 전체에서 가장 큰 공백은 노동운동에서 개혁주의가 득세하는 것에서 비롯하는 전략과 정치를 검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혁주의의 구실
14 얇은 계층이나 노동조합과 노동당의 관료 기구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분명 이런 기구들은 기층의 분노가 허용 범위를 넘어서려 할 때 개혁주의적 분석과 실천을 관철시키는 데서 핵심 구실을 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사상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의 특정 단계에서 하는 경험에서 비롯하는 것이고, 노동당이 없더라도 다른 세력(때로는 좌파 민족주의)이 등장해 같은 기능을 한다.
개혁주의의 영향력이 서구 노동운동에 최초로 깊이 뿌리 내린 것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독일 사회민주당과 영국 노동당이 등장했을 때였다. 그 뒤로 1948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 자본주의가 오랫동안 확장된 “황금기”에 개혁주의의 영향력이 다시 커졌다. 개혁주의의 주도권은 노동계급 삶의 여러 측면에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그렇다. 예를 들어, “노사관계”를 정치투쟁과 분리된 것으로 여기는 것, 투쟁을 이끌기보다는 협상에 치중하는 직업적 노조 관료의 등장, 교묘한 후원 구조를 통해 노동계급 투사들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이기, 체제에 순응하는 바람에 시장이 노동자들 사이에 분열을 만드는 것을 묵인하기 등이 있다. 개혁주의의 주도권은 ‘노동귀족’(원래 레닌이 제시한 개념)이라는오늘날 자본주의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고, 노동운동에서 득세하던 개혁주의 정치는 위기에 처해 있다. 개혁주의의 지도층은 사회자유주의를 받아들였고, 꾀죄죄하게 “좌파” 시늉을 하며 자신들의 지지 기반을 달래려 한다. 착취받으며 점점 커지는 불안정으로 고통받는 노동자 대중은 모순된 처지에 있다. 다수는 투쟁을 원한다.(아일랜드에서 치러진 대다수 쟁의행의 찬반 투표 결과가 그런 정서를 보여 준다.) 그러나 흔히 노동자들은 자신감이 낮고 여전히 누군가 대신 싸워 주기를 바란다. 더 넓은 차원에서 보면, 노동자들의 공통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 새로운 혁명적 대안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이렇듯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는 노동운동 내의 위기로 반영됐고, 자본주의 자체에 도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개혁주의의 영향을 받는 노동자들을 혁명적 방향으로 끌어당기기 위해 그들과 관계를 맺는 것도 그런 투쟁의 일부다. 스탠딩은 그런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따라서 ‘프레카리아트’라는 새 개념은 노동자들 내부의 분열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려 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스탠딩 주장의 기원이 무엇이든 그의 주장 자체도 다뤄야 한다. 그의 책이 현상 묘사 차원에 그쳐 이 일을 하기가 꽤나 까다롭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몇 가지 주요 쟁점을 들어 그를 비판하겠다.
허구적 프롤레타리아트 개념
스탠딩이 사회계급을 보는 관점은 계급을 단지 뚜렷한 특징을 가진 여러 범주로 보는 일종의 베버식 사회학에서 비롯했다. 스탠딩은 계급 구조가 이렇게 이뤄져 있다고 한다. 첫째, 엘리트 계층이다. 둘째, “샐러리아트”라는 계층으로, “연금과 유급 휴가와 사내 복지를 누리고 흔히 국가 복지 혜택을” 받는 화이트칼라 노동자다. 셋째, “프로피시언”으로, 보유 기술에 대한 수요가 높은 전문가나 기술자다. 넷째, 육체 노동자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계급을 완전히 다르게 보는데, 계급을 생산 과정에서 서로 적대하게 되는 집단들의 관계로 본다. 여기서 말하는 생산은 단지 제조업을 뜻하는 협소한 개념이 아니라, 환경을 바꾸는 데 인간의 힘이 이용되는 방식을 뜻하는 개념이다. 보통 “서비스”라는 범주에 들어간다고들 하는 노동, 예컨대 교육과 보건의료 분야의 노동에서도 계급 관계가 형성된다. 이런 “서비스”는 새 세대의 노동자를 기르고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데에 일조한다. 따라서 서비스도 환경을 변화시켜 사회적으로 규정된, 그리고 확장되는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과정의 일부다.
핵심 논점(스탠딩은 완전히 놓치고 있는)은 자본주의에서 이런 관계가 착취를 바탕으로 하며 자본의 근본 논리에 따라 형성된다는 것이다. 자본의 근본 논리는 다시 말해, 높은 이윤율의 무제한적 추구를 바탕으로 한 자기 증식 충동이다. 이 때문에 노동계급을 정태적인 범주로 밀어넣을 수 없다. 오히려 노동계급은 자본에 의해, 그리고 자본에 맞선 투쟁에 의해 계속 변한다.
15 그리고 육체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의 황금기에 고용주에게서 어느 정도의 안정성을 얻어 냈다고 해서 2014년에도 여전히 “안정적” 일자리를 가지고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현실은 정반대다. 자본이 착취율을 높여 수익성 감소를 벌충하려 하면서 모든 노동자들의 안정성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 현재의 일반적 상황이다. 대다수 선진 경제에서 육체 노동자들은 연금이 불안정해지고, 대규모 실업으로 고용 안정성이 떨어지고, 계속되는 유연화 압박으로 직무 안정성이 흔들리는 상황에 있다. 예를 들어, 아일랜드에서는 1990년 2,500개였던 확정급여형 연금의 수가 오늘날에는 고작 800개밖에 안 된다. 지난 4년 동안에만 확정급여형 연금이 400개가 사라졌고, 이에 노동자 6만 5000명이 피해를 봤다. 16 최근 유럽에 관해 조사한 한 연구 결과를 보면 전체 노동자의 32퍼센트만이 취직 전망이 좋다고, 즉 현재의 일자리를 잃었을 때 임금과 노동조건이 비슷한 다른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 반면, 산업 노동자의 23퍼센트는 앞으로 6개월 안에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고 걱정한다. 17
따라서 먼 옛날의 육체 노동자만 노동계급으로 보는 것은 터무니없는 견해다. 과거에는 조직 노동자의 핵심 부문이 숙련공이나 광원이나 자동차 노동자였을지라도 지금도 여전히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최근 아일랜드에서는 화이트칼라 종업원의 노동조합 조직률이 숙련공의 조직률보다 높다. 일반 사무직원의 노조 가입률은 37퍼센트인 반면, 기능공의 노조 가입률은 30퍼센트다.그러므로 육체 노동계급을 고용이 안정된 집단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불안정성은 어느 특정 집단의 특징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다수가 다양한 정도로 겪는 조건이다.
특권적 샐러리아트라는 신화
지난 몇십 년 동안 추진된 자본주의 구조조정의 성격 탓에 가장 큰 변화를 겪었을 집단은 십중팔구 “샐러리아트”(주로 사무직·화이트칼라 노동자)일 것이다.
18 록우드는 그 둘의 지위와 노동조건이 다른 것을 첫째 이유로 지적했다.
100년 전 사무직 노동자들은 고용주와 “신뢰” 관계에 있었다. 고용주와 매우 가까이서 일하고 충성을 바친 대가로 보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에 루이스 코리는 이 집단을 고용주와 친밀·신뢰 관계에 있는 “명예 종업원”으로 봤다. 1950년대 말에 사회학자 데이비스 록우드는 심지어 “대다수 경우에 사무직과 육체 노동자는 계급적 처지가 다르다”고 했다. 하지만 1974년 미국 마르크스주의자 해리 브레이버먼은 이런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며 화이트칼라 노동자가 점점 더 “프롤레타리아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브레이버먼은 보통의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임금이 처음에는 숙련 육체 노동자의 임금보다 낮아지고, 나중에는 미숙련 공장 노동자의 임금보다 낮아지는 상황을 보여 줬다. 노동자들이 자율성을 상실하고 경영진의 통제가 강해진다는 면에서 “테일러주의”가 공장 작업대에서 사무실로 펴져나가고 있다는 것이 브레이버먼의 핵심 주장이다.20 이 계층은 흔히 보수와 보너스를 많이 받는다. 이 계층은 주로 자본가들의 노동자 착취에 봉사하는 비생산적 활동을 한다. 하지만 화이트칼라 노동자 대다수의 노동강도는 세어지고 시간당 임금과 안정성은 떨어졌다.
그 뒤로 “프롤레타리아화” 과정은 급격히 빨라졌다. 대다수 화이트칼라 종업원과 경영진 사이에 “신뢰” 관계가 형성되기는커녕 오히려 “감사” 관계가 형성됐다. 화이트칼라 종업원의 “생산량”은 핵심성과지표Key Performance Indicators 같은 기법을 통해 측정된다. 그 결과는 화이트칼라 종업원들을 서로 비교·평가하는 “기준”으로 쓰여 그들의 불안정성과 스트레스가 높아진다. 생산성과 보수가 연동되는 “성과급”도 늘어나는 추세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대거 생겨나면서 보통의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보수는 전체 노동자 평균보다 흔히 더 큰 폭으로 하락해 왔다. 하지만 화이트칼라 종업원 중 소수는 간부층으로 진입했다. 가족기업이 사라지고 대기업이 성장하면서 다수 노동자를 체계적으로 착취하려면 중간 관리직이 많이 필요해졌다.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신중간계급”이라고 부른그러므로 “샐러리아트”가 더 열심히 일하는 것도 아니면서 “금융 자본을 대부분 가져가고 대단히 높은 소득을 얻는다”는 스탠딩의 주장은 명백히 터무니없는 것이다. 물론 이 주장의 목적은 수사적이다. 즉, 특혜받는 “샐러리아트”와 보수적 육체 노동계급이라는 허구적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스탠딩은 이른바 새로운 계급, 즉 그들[‘샐러리아트’와 육체 노동자]과 이해관계가 다른 계급을 상정할 여지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화이트칼라 종업원의 다수는 나머지 노동계급과 마찬가지 처지로 점점 더 내몰리고 있다. 화이트칼라 종업원들은 더 강화된 착취를 받고 있으며, 그 일부로서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불안정 영역으로 내몰리고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프레카리아트”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화가 더 진척되고, 이와 함께 불안정한 제도가 확대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노동은 필요하다
21 그리고 불안정 고용이 늘어나는 이유를 스탠딩이 잘못 말한다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캐빈 두건이 지적했듯이, 스탠딩은 세계화된 자본주의에서 시간제part-time와 임시직temporary 노동의 증가 추세를 심하게 과장한다.자본주의는 수직적·수평적 투쟁을 둘 다 특징으로 하는 체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최대한 쥐어짜려 하지만[수직적 투쟁], 동시에 자금, 자원, 인력을 놓고 서로 수평적 투쟁도 벌인다. 노동이 자본에 기대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자본도 인간 노동이 필요하다. 직접적인 생산 활동이 가장 많이 사라진 부문에서조차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거나 투자 수익을 점검할 노동자가 여전히 필요하다.
그러므로 자본가들은 노동자를 보유하는 것에 신경 쓴다. 그들은 종업원의 이직률이 높은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숙련된 사원을 경쟁사에 빼앗길까 봐 걱정한다. 자본가들은 신입사원을 훈련시키고 자기 기업의 제도와 방식에 적응하도록 만드는 데 시간과 노력과 비용이 들어가는 것을 싫어한다. 따라서 대체로 선진국에서 자본가들은 호황기나 심지어 자본 투자율이 비교적 높을 때도 노동자를 붙잡아 두려 한다. 표1은 OECD의 통계다.
2000년 | 2011년 | 2012년 | |
---|---|---|---|
OECD 나라들 | 11.3 | 11.9 | 11.8 |
22 가난한 나라들에서 “비정형” 고용이 차지하는 비율은 예전부터 평균 40퍼센트 정도였다. 많은 제3세계 나라들에서 “불안정성”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표1의 수치는 노동자들이 주로 정규직으로 채용되는 상황을 반영한다. 비록 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도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지만 말이다. 뭉크는 스탠딩의 주장이 “유럽 중심주의”라고 적절히 지적했다. 스탠딩이 선진국의 불안정 고용을 지적하면서, 그것이 세계적 현상인 양 암시하기 때문이다.아일랜드의 상황 역시 일반적 유형의 흥미로운 변형이다. 표2는 아일랜드 중앙통계국CSO이 제출한 가장 최근의 수치를 보여 준다.
2000년 | 2011년 | 2012년 | |
---|---|---|---|
전체 고용 | 1735.4 | 1861.3 | 1841.3 |
전일제 | 1455.2 | 1423.8 | 1396.0 |
시간제 | 280.3 | 437.5 | 446.3 |
자발적 시간제 | 자료 없음 | 300.4 | 298.6 |
비자발적 시간제 | 자료 없음 | 137.1 | 147.6 |
CSO의 규정으로 비자발적underemployed 시간제란 종업원이 다른 도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시간제로 고용된 상태를 말한다. OECD는 CSO의 수치를 주로 가져다 쓰면서 시간제 고용이 전체 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00년 18.1퍼센트에서 오늘날 25.0퍼센트로 치솟았다고 주장한다. OECD는 임시직 고용도 4.7퍼센트에서 10.2퍼센트로 뛰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다양한 상황은 스탠딩과 매우 다른 얘기를 들려 준다. 스탠딩의 핵심 주장은 프레카리아트가 “세계화의 자녀”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화”는 사회학자들이 개발한 계급 중립적 용어의 하나다. 이런 용어들 덕분에 학자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불가피한 경향들을 현상적이고 꽤 추상적으로 논의할 수 있다. 이런 학술적 이론화의 원로 중 한 명이 앤서니 기든스(지금은 기든스 남작)다. 기든스는 “제3의 길” 사회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세계화와 함께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스탠딩의 관점은 기든스와 매우 다르지만, 프레카리아트의 등장을 “세계화”로 말미암은 불가피한 결과로 보는 그의 주장은 기든스의 주장과 마찬가지의 문제가 있다. 즉, 자본의 자기 확장 운동에 내재한 핵심 동역학(과 모순)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본이 집중된 곳에 노동자가 더 많이 필요한 법이다. 자본의 불균등한 분포(주로 제국주의의 결과다)를 보면, 왜 어떤 나라들의 자본가들 사이에서는 다른 나라들의 자본가들 사이보다 더 많은 경쟁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왜 어떤 나라들은 다른 나라들보다 더 많은 노동자가 필요한 것인지도 알 수 있다. 자본주의의 핵심 특징 하나는 시기에 따라 투자가 이뤄지는 리듬이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투자는 예상 이윤율에 따라 달라진다. 이윤율이 낮으면 투자가 감소하고, 그 결과 실업이 늘어난다. 이것은 특히 지난 10년 동안의 핵심 추세였다. 이 추세를 보여 주는 지표 하나가 기업들의 사내유보금(투자되지 않은 이윤)이다. 세계적 총자산에서 기업들의 사내유보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 9.5퍼센트에서 2012년 12.4퍼센트로 커졌다. 절대액으로 보면, 상장기업들의 사내유보금은 2000년 2.3조 달러에서 2011년 6.5조 달러로 껑충 뛰었다.
이윤율 하락은 모순된 결과를 자본주의에 낳는다. 한편으로는 무직 노동력인구가 늘어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취업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가 강화된다. 자본가들은 불안정성과 실업을 이용해 노동자들 개개인에게서 잉여가치를 더 많이 추출하고, 그들을 고용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줄이려 한다. 이것이 바로 고용의 불안정성을 높인 동역학이었고, 아일랜드는 이런 사태의 으뜸가는 사례다. 아일랜드가 “켈트의 호랑이”라고 불리던 시절[아일랜드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던 1995~2000년의 시기로, 당시 아일랜드 경제는 연평균 9.4퍼센트씩 성장했다]에는 노동에 대한 수요가 그칠 줄 몰랐고, 그래서 많은 노동자들이 “상용직”으로 채용됐다. 그러나 투자가 고갈되자(켈트 호랑이 시기의 3분의 1로 줄었다), 불안정성이 매우 커졌다.
불안정성 증대를 자본주의의 동역학 속에서 보면, 불안정성 증대는 특정 사회집단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 전체에 적용되는 현상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스탠딩은 불안정성이 커지는 변화의 한 측면을 옳게 포착하지만, 그것을 자본주의 자체의 동역학이라는 맥락 속에 자리매김하지 않는다. 그가 비현실적으로 시장 기반 해법(스탠딩은 상품화가 가공의 새 계급에 좋다고 주장한다)을 제안하게 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또한, 그의 이론이 현재 처지가 불안정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함으로써 노동계급 내 분열이 더 커지는 것을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현실에 대한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분석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원자화돼 무력하다?
예전에 광원 같은 집단은 오밀조밀 모여 살고 집단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었지만 프레카리아트는 분산되고 파편화돼서 집단으로 조직될 여지가 없다. 프레카리아트는 작업장이 아니라 거리의 사회운동을 통해서만 성공할 수 있다. 물론 스탠딩은 이런 말을 직접 하지 않았지만, 사기가 떨어진 일부 좌파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일 때는 분명히 이를 함의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비정치적 행동의 고전적 사례다.
1911~13년 아일랜드 노동운동은 노동인구 중 임시직과 일용직 노동자들 사이에서 건설됐다. 제임스 라킨이 이끈 아일랜드운수일반노조ITGWU의 핵심 부문은 사실상 일용직이었던 부두 노동자와 짐마차꾼 노동자였다.
아일랜드가 켈트 호랑이라고 불리던 시절 대다수 노동자는 정규직이었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많아질 것이라는 조짐은 거의 없었다. 노동자들은 노동 부족 덕분에 경제적으로 유리한 지위에 있었지만, 그들의 전투성은 낮았고 성과도 많지 않았다.
이런 차이는 각각의 시기에 노동운동에서 득세한 정치와 관계 있었다. 제임스 코널리와 제임스 라킨의 혁명적 신디컬리즘은 노동계급이 노동 관계 법률에 대한 합법주의적 자세를 갖지 않고 계급투쟁적으로 단결하는 노동조합 운동을 구축했다. 임시직·일용직 노동자들을 투쟁하는 세력으로 결속한 대중적 피켓팅과 블래킹은 고용주들을 겁에 질리게 만든 전술이었다.
하지만 현대 아일랜드 노동조합 운동에서는 ‘노사정 동반자 관계’social partnership를 중시하는 노동당이 득세했다. 호황기 동안 노동당은 노동자들이 고용주들에게 상당한 양보를 요구하지 못하도록 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억눌렀다. 예를 들어, 서비스산업전문기술직노조SIPTU 대의원대회에서 고용주에게 연금 기여금을 의무적으로 부과하도록 요구하는 운동을 벌이자는 제안이 나왔을 때, 노동당은 이에 격하게 반대했다. 심지어 호황기에도 이런 실리적 노조 운동은 노동운동 내에서 분열을 더 키웠다.
경제 공황이 닥친 [2008년] 이후로는, 긴축 정책에 대한 [노동자들의] 복종을 끌어내는 수단으로서 노동자들을 이간질하는 것이 흔한 일이 됐다. 노조 지도자들이 기존 노동자들의 조건 일부를 개선하는 대신 괘씸하게도 신입 노동자들의 조건을 기업주들이 공격하는 것을 수수방관하는 일이 일상처럼 됐다. 그러나 이간질을 통한 각개격파 전략은 기존 노동자와 신입 노동자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헤딩턴 가街 합의Haddington Road agreement[2013년 5월 아일랜드 노조들과 정부가 정부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 공공부문을 구조조정하기로 합의한 것을 뜻한다. 2013년 2월 아일랜드 더블린 헤딩턴 가에 사무실이 있는 노동관계위원회가 제안한 내용을 기초로 한 합의여서 헤딩턴 가 합의라고 부른다.]는 원래 투표에서는 부결됐는데, 두 가지 전략에 의해 결정이 뒤집혔다. 첫째, 노조 지도자들은 노동당의 동료들이 하원에서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는 조처를 비상입법으로 추진하는 것을 보고도 못 본 척했다. 그 결과로 생겨난 것이 악명 높은 공익법의 “재정적 비상조치” 조항이다. 둘째, 노조 지도자들은 이 법을 큰 핑계거리로 삼아 일부 노동자들에게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보다 피해를 덜 입는 것이고 [이 합의를 거부하면] 피해가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개혁주의의 위기를 경제 공황 이후 몇 년 동안 일어난 엄청난 후퇴만큼 잘 보여 주는 것은 없다. 겉으로만 그럴싸한 사회학적 설명을 내놓는 사람들, 특히 “세계화”와 “프레카리아트” 때문에 “원자화”가 불가피하다고 설명하는 사람들은 핵심을 놓치고 있다. “원자화”는 주로 노사정 동반자 전략의 결과물이다. 그 전략은 노동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패배주의를 조장함으로써 노동자들이 내핍을 감내하도록 해 왔다.
결론
그러므로 프레카리아트는 유행어이지만 완전히 허구적인 개념이다. 프레카리아트는 오늘날 노동운동이 직면한 주요 문제를 반영하는 개념이지만 해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
첫째, 우리는 긴축과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데서 노동자들의 공통된 이해관계를 주장할 강력한 사회주의적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노조가 일부 노동자를 희생시켜 다른 일부 노동자의 조건을 개선하는 행동을 할 때, 이에 반대해야 한다. 임시직 노동자의 조건이 악화하면, 그 나빠진 조건이 나중에 모든 노동자에게 규범으로 작용하는 것이 현실이다. 일부 노동자가 혹사당하고 겁에 질려 있다면, 그것은 노조가 조금이라도 전진하는 데 장애물이 될 것이다. 이런 이간질을 통한 각개격파 전략에 반대하려면 실리적 노조 운동과 노사정 동반자 전략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들의 개입이 필수다.
25 [그러나] 불안정성의 최첨단에 놓인 청년 노동자 대중을 조직할 수 있는 노조는 감히 법을 어기는 등 가장 전투적인 전술을 채택해서라도 무자비한 고용주들을 패퇴시킬 태세가 돼 있는 싸우는 노조밖에 없다.
둘째, 우리는 패스트푸드 산업과 소매업 등에서 임시직이나 초단시간 호출 노동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활동을 지원해야 한다. 그러려면 요새 많은 노조가 장려하고 있는 “조직화 모델”과 단절해야 한다. 이 모델은 미국의 서비스노조SEIU 같은 곳에서 유래한 것으로, 노조 조직률이 충분한 수준에 이르렀을 때 고용주와 동반자 협정을 맺기 위해 형식적으로만 투쟁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모델이다.셋째, 노조 운동의 현재 모델은 앞으로의 투쟁에 아주 부적합하다. 그 모델은 작업장에서 동떨어진 조직 구조를 바탕으로 한다. 그 모델은 공식적 노사관계 구조 내에서 개별 고충처리casework와 대변자 역할advocacy을 약속하는 [노조 관료의] 프로 정신을 바탕으로 한다. 그 모델은 겉으로만 좌파적으로 말하면서 비굴한 수동성을 감춘다. 그런 노조 운동 모델은 위기의 시기로 빠져들었다. 물론 그것이 낳을 결과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층의 주도력을 바탕으로 한 다른 형태의 계급투쟁적 노조 운동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넷째, 거리의 사회운동이 작업장에서 일어나는 운동보다 훨씬 더 전투적이고 더 반자본주의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은 개혁주의가 처한 위기의 한 측면을 보여 준다. 사회주의자들은 그런 운동에 조금도 거리낌 없이 공감해야 하고 새 세대 투사들에게 기꺼이 배우려 해야 한다. 우리는 그런 운동이 노동계급 정치를 개조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수세적 신디컬리즘을 거부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런 운동 안에서 조직 노동자에 집중해야 하고 조직 노동자가 투쟁에 나서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도 굽힘 없이 지적해야 한다.
[이집트] 타흐리르 광장부터 [스페인] 마드리드의 푸에르타 델 솔 광장까지 거대한 거리 운동이 있었고, 그 운동들은 노동자 사이에서 새로운 전투성을 일깨우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광장 점거 자체만으로는 이윤 추출 시스템의 힘을 깨뜨리지 못한다. 거리의 전투성이 작업장의 노동자 힘과 결합될 때만 그럴 수 있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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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ieran Allen, 2014, ‘The Precariat: New Class or Bogus Concept?’, Irish Marxist Review, Vol.3, No.9.
↩
- Breman, J., 2013, “A Bogus Concept”, New Left Review 84(November-December). ↩
- Standing, G., 2011, The Precariat: The New Dangerous Class (Bloomsbury Academic)[국역: 《프레카리아트: 새로운 위험한 계급》, 박종철출판사, 2014], p10. ↩
- 같은 책, p6. ↩
- 같은 책, p7. ↩
- 같은 책, p171. ↩
- 같은 책, p168. ↩
- 같은 책, p5. ↩
- 같은 책, p161. ↩
- 같은 책, p162. ↩
- 같은 책, p162. ↩
- Advance the Struggle, 2012, “Longview, Occupy, and Beyond: Rank and File and the 89% Unite!” (2 Feb). http://advancethestruggle.wordpress.com/2012/02/02/longview-occupy-and-beyond-rank-and-file-and-the-89-unite/ ↩
- Seymour, R., 2012, “We are all precarious - on the concept of the ‘precariat’ and its misuses”, New Left Project (10 Feb). http://www.newleftproject.org/index.php/site/article_comments/we_are_all_precarious_on_the_concept_of_the_precariat_and_its_misuses ↩
- Epstein, G., 2005, Financialisation and the World Economy (Edward Elgar Publishing) and Krippner, Greta R., 2005, “The financialisation of the American economy”, Socio-Economic Review, vol.3, issue 2, p173-208. ↩
- Cliff, T., 1982, “The Economic roots of reformism”in Neither Washington or Moscow (Bookmarks) ↩
- CSO, 2009, Quarterly National Household Survey Module on Union Membership 2009 Table 3a. ↩
- Collins, Stephen, 2013, “Pensioners may face cuts under reform package”, Irish Times (20 November). ↩
- Eurofound, 2013, Quality of employment conditions and employment relations in Europe (Eurofound). ↩
- Lockwood, D., 1958, The Blackcoated Worker (Allen and Unwin), p58. ↩
- Braverman, H., 1974, Labour and Monopoly Capital (Monthly Review Press). ↩
- Callinicos, A., 1983, “The new middle class and Socialism”, International Socialism Journal, Vol. 2, No. 20[국역: ‘‘신중간계급’과 사회주의 정치’, 《오늘날의 노동자계급》, 갈무리, 1994]. ↩
- Doogan, K., 2009, The New capitalism and the Transformation of Work (Polity). ↩
- Munck, R., 2013, “The Precariat: A View from the South”, Third World Quarterly, Vol. 34, No. 5, pp747-762. ↩
- Giddens, A., 1998, The Third Way and the Renewal of Social Democracy (Polity)[국역: 《제3의 길》, 생각의나무, 2001]. ↩
- ILO, 2012, World of Work Report, p75. ↩
- Allen, K., 2009, “Social Partnership and Union revitalization: The Irish Case” in G. Gall (eds) The Future of Union Organisaing (Palgra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