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민주주의의 성격을 묻는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 마르크스주의적 관점 *
1 이런 통찰을 통해 진은 오늘 우리가 다루려는 주제, 즉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 특히 카를 마르크스가 제시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에서 중요한 핵심을 제시했다.
“민주주의는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나온다.” 하워드 진이 자신의 훌륭한 영화 〈민중이 말한다〉의 도입부에서 전하는 메시지다. “명령을 거부하는 병사, 화가 난 여성, 반란에 나선 미국 원주민, 노동자, 선동가, 반전 시위대,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등 각종 반체제 인사들처럼 흔히 말썽꾼이라 불리는 바로 그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가져다줬다.”오랫동안 우리[미국인]는 우리가 이상적인 민주주의 국가, 즉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모든 국민에게 자유와 정의를 보장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들어 왔다. 우리가 주인이라는 이 공화국 미국에서 민주주의, 곧 대중에 의한 통치가 실제로 얼마나 구현되고 있는지 어디 한번 따져 보자. 개념상 ‘공화국’은 선출된 대표자들이 통치하거나 정부를 세우는 것을 뜻한다. 대중에 의한 통치와 정확히 같지는 않은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말하겠다. 아무튼 불완전하게나마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것은 정부가 대중을 대신해 무엇이 최선인지를 결정하고 대중 위에 군림하는 것보다 나은 것은 분명하다. 오늘날 많은 우파는 사회주의가 후자를 지향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20세기의 비극 중 하나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며 그런 거짓말에 힘을 실어 준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그 때문에 “대중에 의한 통치”는 사회주의와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국유화, 국가의 경제 통제, 정부 계획을 사회주의로 봤고, 대중이 언젠가는 자신의 삶을 직접 결정할 수 있겠지만 아직은 안 된다고 말했다. 사회주의 운동의 ‘온건파’라고 불린 엘리트주의적 개혁주의자들과, 소련 스탈린 체제의 독재자들은 이런 ‘위로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자신들의 핵심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 논리로 북한 같은 독재 정권을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평범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개념 때문에 혼란을 겪었다. 그러나 아프리카계 카리브해인인 혁명적 국제주의자 C L R 제임스가 썼듯이(그의 말에서 프롤레타리아라는 단어는 노동계급이라는 단어와 같은 뜻이다),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사회주의가 절정에 달한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결과로 이뤄지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자신과 대다수 민중을 행동에 나서게 하는 바로 그만큼 사회주의 혁명은 전진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체의 위원회, 노동조합, 정당 같은 조직들로 자신을 주체적인 세력으로 만들어 간다.
C L R 제임스에 앞서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 안토니오 그람시, 중국 공산당 내 좌익반대파 천두슈, 페루 마르크스주의자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 등 많은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1956년 헝가리에서 스탈린주의 관료 독재에 맞서 노동자와 학생들이 들고일어났을 때 제임스 P 캐넌(미국 공산당과 미국 트로츠키주의 운동 창립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주의자는 미국 노동자가 ‘나는 독재를 거부하고 민주주의를 원한다’고 말할 때 이를 반박하려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사회주의자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노동자들이 — 르블랑] 인권과 민주적 권리를 요구하는 것을 그 자체로 진보로 여겨야 한다. 사회주의자의 과제는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확장하고 더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다.” 캐넌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따라 자본주의에 반대했을 뿐 아니라 전 세계 노동운동 내 억압적인 관료에도 반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미국에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주요한 과제는 현장조합원들이 노동조합을 민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그는 또한 ‘공산주의’ 나라뿐 아니라 자본주의 나라에서도 “노동자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과 떼려야 뗄 수 없고, 노동자들이 승리하기 위한 필요조건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유진 뎁스 등 과거 미국 사회주의 운동의 전성기(20세기의 첫 20년)에 활동했던 사람들, 로자 룩셈부르크, 레온 트로츠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등 유럽의 혁명가들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흔한 혼동을 규명할 때 진정한 사회주의는 진정한 민주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뤄야 한다. 오늘 내가 설명하려는 내용은 사실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국 혁명과 그 여파가 이 주제에 관한 좋은 사례다. 그다음으로는 카를 마르크스와 그가 관여한 노동운동이 크게 기여한 이른바 “민주주의의 돌파구”를 간단히 살펴보겠다. 그다음으로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어떠했는지 시대별로 그것을 체험한 사람들의 입을 빌어 살펴보겠다. 그러고 나서 레닌과 트로츠키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결합에 대해 제시한 핵심적 통찰을 살펴보는 것으로 마무리하겠다.
먼저, 마르크스주의를 특정 방식으로 이해하기(사실은 오해하기) 때문에 생겨난 혼란을 하나 짚고 넘어가겠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인류 역사를 경제 체제에 따라 여러 단계로 나눈다. 맨 먼저 부족적 원시 공산주의가 수만 년간 이어졌고, 그 뒤에 계급 사회들이 이어졌다. 유럽에서는 고대 노예 문명과 봉건제가 있었고, 그다음으로 자본주의가 등장해 생산력과 경제적 잉여를 엄청나게 만들어 냈는데, 그 결과 사회주의 사회가 가능하게 될 토대가 생겼다.
4 일부 마르크스주의자와 많은 친자본주의 사상가들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서로 긴밀한 관계 속에서 등장했다고 주장했다. “사랑과 결혼은 말과 마차처럼 항상 함께 간다네” 하는 오랜 노랫말처럼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태생적으로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예리한 역사가들과 사회과학자들이 주장했듯이 이는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왜 그런지는 우리 미국인들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라 할 수 있는 1775~83년 미국 혁명을 살펴보며 알아 보자.
오해가 생기는 지점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촉진하고 대체로 완성시킨 과정이라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여기는 것을 흔히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부르주아는 당연히 자본주의를 가리키는 것이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란 이른바 하층 계급 대중도 참여해 왕권 통치와 왕족·귀족들의 경제 지배를 물리친 혁명적 격변을 지칭한다. 그 결과로 자본주의 경제가 만개하고, 정도 차이는 있지만 민주 공화정이 등장할 토대가 놓였다.미국 혁명과 민주주의 [영국 식민지 시절 미국에 속한] 주州 13곳에서 대기업가, 자본가, 지배 엘리트는 북부의 대상인이거나 남부의 대농장주였다. 그들은 영국 제국을 지배한 거만하기 짝이 없는 왕정·귀족과 특권을 누리는 잉글랜드 상인들이 저 멀리서 주인 행세를 하면서 자신들에게 온갖 제약을 가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 효과적으로 도전하려면 훨씬 광범한 식민지 주민들, 즉 소농, 영세 상인, 장인, 노동자 등을 설득해 함께 행동하도록 해야 했다. [식민지 미국의 지배 엘리트는] 서민 대중이 토머스 페인 같은 급진주의자들이 선동적 베스트셀러 《상식》에서 제시한 혁명적 민주주의 개념에 특히 열광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후 토머스 제퍼슨이 1776년에 쓴 미국 독립선언문의 웅장한 미사여구에도 그런 개념이 포함됐다. [미국의 지배 엘리트는] 당시 세계에서 경제적·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한 강대국[영국]에 맞서기 위해 이 혁명적 민주주의 개념을 이용해 (당시 독립적 연합 국가로 변모하고 있던) 식민지 13개 주에서 지지를 끌어모았다. 미국 독립선언문은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됐으며, 그 누구도 창조주가 각자에게 부여한 생명·자유·행복추구권 같은 권리를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또한 미국 독립선언문은 정부가 통치당하는 사람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그 정당성이 사라지고 통치당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싫어하는 정부에 맞서 도전해 그 정부를 전복하고 다른 정부로 대체할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 혁명 지도자들 중 부유한 소수 상인과 대농장주의 권력을 지키고자 한 자들은 이렇게 급진적인 내용을 부담스러워 했다. [1787년 헌법 제정자 중 한 명으로 헌법 전문을 작성한] 거베너르 모리스도 그런 보수적 인물로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시 헌법 제정자이고 후에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이 되는] 존 애덤스는 이렇게 말하며 조마조마해 했다. “우리의 투쟁 때문에 정부의 결속력이 도처에서 느슨해지고 있다. 아동과 견습생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학교와 대학이 혼란에 빠지고, 인디언이 감독관을 무시하고, 흑인이 주인에게 무례하게 군다.” 애덤스는 재산이 없는 남성에게도 투표권을 주라는 요구에 큰 충격을 받았다.(게다가 그의 아내는 심지어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주라고 압박을 가했다.) 그는 이렇게 곱씹으며 걱정했다. “그리하면 모든 경계가 뒤섞여 사라지고, 모든 신분이 똑같은 수준으로 격하될 것이다.” 또한 이렇게 경고했다. “어느 사회에서나 못 가진 자들은 일반적으로 공무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어 제대로 판단을 내릴 수 없고, 타인에게 너무 의존해서 자기 의지가 없다.” 산업 자본주의를 예견하며 이를 열정적으로 지지한 알렉산더 해밀턴[역시 헌법 제정자이고, 후에 초대 재무장관이 된다]만큼 분명하게 말한 인물도 없을 것이다. “모든 공동체는 소수와 다수로 나뉜다. 전자는 부유한 상류 계층이다. 후자는 대중이다.” 대중은 “난폭하고 변덕스럽기” 때문에 “옳게 판단하거나 결정하는 경우가 거의 없으므로” 부유한 엘리트가 “정부에서 특정한 몫을 영구히” 가져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해밀턴은 또 일찍이 “절대적으로, 지갑을 관리하는 자가 통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혁명이 공식적으로 승리한 3년 후[1786년], 소농과 가난한 노동자들이 매사추세츠 주에서 일으킨 ‘쉐이즈 반란’의 여파 속에서 [이후 육군 장관이 되는] 헨리 녹스 장군은 [이후 초대 대통령이 되는]조지 워싱턴에게 이렇게 썼다. “그들의 신조는 영국이 미국의 재산을 빼앗지 못하도록 모두 함께 싸운 만큼 모두 함께 공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녹스의 이런 과장된 설명은[실제 쉐이즈 반란은 세금과 긴축 정책에 항의하는 것이었다] 독립 직후 미국 부유층이 느낀 두려움을 드러냈다. 녹스는 또한 이렇게 썼다. “이런 지독한 상황 때문에 뉴잉글랜드에서 지조와 재산이 있는 사람은 모두 경각심을 갖게 됐다. 우리의 생명과 자산을 지키도록 정부가 단련되고, 변화를 거치고, 바뀌어야 한다.” 1780년대 후반이 되면 대다수 주가 소수, 즉 재산이 있는 백인 남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물론 재산 소유자의 일부는 해밀턴이 “대중”이라 부른 사람들에 해당하는 소농, 장인, 영세 상인이었다. 대다수 주정부는 그런 사람들을 대표하는 하원을 뒀다. 그러나 하원은 더 강력한 상원의 통제를 받아야 했고, 상원은 부자들이 장악했다. 게다가 권한이 막강한 주와 지역에서는 책임자가 선출되지 않고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1780년대 말 미국 헌법을 논의하고 작성한 ‘건국의 아버지들’[헌법 제정자들]은 수세기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명한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봤을 가능성이 크다. “민주주의와 과두제의 진정한 차이는바로 빈부 차이다. 지배자가 재산의 논리에 따라 통치하면 … 과두제이고, 빈민들이 지배하면 민주주의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엘런 메익신스 우드가 지적했듯이, [미국 지배자들은] “영국의 식민 지배와 혁명을 겪어서 수세기 동안 지배계급과 부자 계급이 염치 없이 해 왔던 것과 달리, 그리고 당시 다른 곳에서는 여전히 그랬던 것과 달리 민주주의를 노골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다.” “다른 곳”, 적어도 유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뒤에서 살펴보겠다. 아무튼 미국 독립 직후인 1787년의 제헌회의는 민주주의(다수에 의한 통치)와 과두제(소수에 의한 통치)를 접목해서 부자들의 권력을 보호하고자 했다. 이때 사용한 핵심 개념이 바로 대의제 민주주의, 곧 부유한 엘리트가 노동계급 대중을 대표한다는 것이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주요 헌법 제정자들의 글 모음집인] 《연방주의자의 글》 35호에서 이렇게 썼다. “계급들이 모두 각각 사람을 보내 스스로 대변한다는 생각은 완전한 공상”이고, 그 대신 숙련공과 제조업 노동자들은 대부분 “[부유한 상인들이 가진] 영향력, 중요성, 우월한 학식”을 보며 “상인들을 모든 계급의 대표자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다.” 엘런 메익신스 우드는 이를 이렇게 깔끔하게 표현했다. “사회적으로 우월한 자들이 제화공과 대장장이를 대표한다는 것이다. … 미국 건국 세력이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방지하거나 적어도 우회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대의제를 제안했다는 맥락을 봐야 한다.”저 폭도들이 생각하고 사고하기 시작했다. 미천한 벌레들 같으니라고! 저들은 봄볕이 드리운다고 보고, 겨울의 허물을 벗으려 애쓰며 햇볕 아래 몸을 쬐고 있다. 정오가 되기도 전에 저들은 우리를 물기 시작할 것이고 지금 누리는 햇볕을 내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상류층은 이를 겁내기 시작했다. … 나는 다음 사실을 보며 두려움에 몸서리친다. 만일 우리가 계속 대영제국과 분쟁을 벌이면 가능한 지배 중 최악의 지배, 즉 폭동을 일으킨 군중의 지배를 받으리라는 것이다.
심지어 ‘건국의 아버지’들 중 비교적 진보적인 인물이자 토머스 제퍼슨의 측근인 제임스 매디슨조차 이렇게 강조했다. “재산이 불평등하고 불균등하게 나뉜 것은 사회가 파당으로 나뉘는 가장 흔하고 또 가장 끈질긴 요인이다. … 어느 사회에서나 재산을 소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는 서로 이해관계가 달랐다.”(《연방주의자의 글》 10호) 이 글에서도 우리는 사회를 노동하는 다수와 부유한 소수로 구분하는 관점을 볼 수 있다. “순수한 민주주의에서는 … 다수가 자신의 지배욕과 이익을 앞세워 공익과 전체 시민의 권리를 해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매디슨은 헌법이 규정한 공화국 개념이 “이와 다른 전망을 제시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해결책을 약속한다”며 적극 옹호했다. 매디슨은 《연방주의자의 글》 51호에서 이 문제를 다시 언급하며 헌법이 다수를 분열시킬 구조와 동력을 마련했다며 치켜세웠다. 그 중에서도 헌법이 규정한 [권력의] 상호 견제와 균형 원칙 때문에 “입법부는 별도 기구로 독립하고, 각 기구는 별도의 선출 방식과 원칙에 따라 운영되고, 그 기구들끼리 (사회를 공동으로 구성한다는 한도 안에서) 가능한 한 서로 엮이지 않게” 됐다. 매디슨이 염두에 둔 요소가 한 가지 더 있었다. 그는 이렇게 우려했다. “만일 다수가 공통의 이해관계로 단결하면 소수의 권리가 불안정해질 것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비록 [정부의 — 르블랑] 권위는 모두 사회에서 나오고 사회에 의존하겠지만 사회 자체는 시민들의 이해관계와 계급에 따라 수많은 조각으로 잘게 나뉘어 다수가 뭉쳐 개인이나 소수의 권리를 위협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한 [미국이라는] 공화국은 지리적으로 광대하면서 여러 주로 나뉘고 각 주마다 “아주 다양한 이해관계, 정당, 파벌”이 존재하므로 다수가 연합해 부유한 소수를 위협하지는 못할 것이다. 처음부터 노예제를 옹호한 것은 제쳐 놓더라도 미국 헌법은 점점 더 많은 남성과 더 나중에는 여성이 투표권을 얻으려 할 때마다 특권층을 옹호하는 구실을 했다. 현대 사회과학자 3인(디트리히 뤼시마이어, 에블린 후버 스터븐스, 존 D 스터븐스)은 《자본주의 발전과 민주주의》라는 중요한 연구서를 낸 바 있다. 그들은 1780년대 [미국에서] 생겨난 것은 “입헌 과두제나 자유주의적 과두제”(비민주적 공화정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였다고 했다. 그들은 1820년대와 1830년대, 1860년대, 1920년, 1960년대에 이뤄 낸 중요한 성과들, 곧 선거권을 확대시키고 정부를 다수의 염원과 요구에 반응하도록 바꾼 역사를 추적했다.
선거권 확대는 위로부터 선사된 선물이 아니라 집요하고 때로는 폭력적이었던 오랜 사회적 투쟁의 산물이었다. 이 투쟁에 앞장선 것은 하워드 진이 앞서 애정을 담아 “말썽꾼”이라고 부른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아직 미국에서 진정한 민중에 의한 통치가 달성됐다고 볼 수는 없다. 미국의 현실 대해서는 곧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뤼시마이어 등이 유럽 “민주주의의 돌파구”라고 부른 것에 대해 먼저 살펴보겠다.
민주주의의 돌파구 뤼시마이어 등은 유란 투르비언 같은 선행 사회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추적하고, 재구성하고, 면밀히 검토한 끝에 이렇게 밝혔다.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자유주의적 사회과학자 등은 부르주아지가 본성적으로 민주주의를 확산시킨다고 보지만, [조사 결과] 부르주아지는 그런 구실을 거의 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유럽 전역에서 재산 소유자들은 자신들의 사촌뻘인 미국 자본가들만큼이나 민중에 의한 통치로 가는 것을 꺼렸고, 그 대신 자유주의적 과두제나 입헌 과두제를 더 좋아했을 뿐 아니라 때로는 왕, 귀족, 장군들과 거래를 하기도 했다. 뤼시마이어 등은 이렇게 말한다. “민주주의 확대의 돌파구가 열린 데에는 노동계급이 성장하고 노동계급의 자체 조직화 능력이 커진 것이 가장 결정적이었다. 제1차세계대전 이전 50년 동안 서유럽에서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된 결과(지역마다 시기는 달랐지만) [노동계급의 — 르블랑] 규모와 조직화 정도가 커졌다. 이 덕분에 시민사회 내 계급 세력 균형이 민주주의 세력에 유리해졌다.” 그들의 연구는 다음 사실을 확증했다. “남성 보통선거권을 확립하고 책임 정부[국왕 등이 아니라 의회 신임에 기대는 정부]가 수립되도록 쐐기를 박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으로 대표된 노동계급이 한 구실이 결정적이었다.”(여성이 정치 참여를 보장받기까지는 대다수 사회주의자가 지지한 여성들의 투쟁이 추가로 필요했다.)
그럼에도 진정한 민중에 의한 통치가 수립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처럼 투표권과 정치적 결사의 자유를 획득한 덕분에 노동 대중이 부유한 소수를 압박하기 수월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의 처지가 상당히 개선됐다. 여기서 아주 중요하게 지적할 것이 하나 더 있다. 또 다른 사회과학자 오거스트 님츠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민주주의의 돌파구에서 그들이 한 기여》라는 아주 훌륭한 책에서 뤼시마이어 등의 연구 결과를 수용하고 또 발전시켰다. 님츠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1847년 6월에 결성된] 공산주의동맹 속에서, 1848년 혁명기와 그 뒤 잠시 잠잠했던 시기에, 그리고 [1864년에 결성된] 국제노동자동맹(제1인터내셔널)과 [1871년] 파리 코뮌 시기에 한 지적 작업과 정치적 실천이 노동계급 민주주의의 동역학에서 핵심적인 요소였다고 기록한다. 님츠의 연구에서 특히 탁월한 점은 1860~70년대의 전반적 정치 상황에서, 특히 유럽과 북미 노동운동이 발전하는 데서 제1인터내셔널이 얼마나 중요한 구실을 했는지를 잘 묘사한다는 것이다. 그는 방대한 자료를 제시하며 자신의 “가장 중요한 주장”을 편다. 곧,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9세기 민주주의 운동의 가장 중요한 주역이었으며, 바로 그 시기에 인류는 민주주의를 향한 오랜 투쟁에서 결정적 돌파구를 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여러 자본주의 나라에서 등장한 ‘민주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고, 특히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그랬다. 두 사람이 그토록 비판적이었던 이유는 그들이 민주주의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누구보다 열렬하게 진정한 민주주의를 옹호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그에게는 사회주의와 같은 말이었다)야말로 자신이 열정적으로 옹호한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봤다.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에서 “현대 산업과 세계 시장이 확립된 이래 마침내 부르주아지가 현대 대의제 국가에서 정치적 지배력을 배타적으로 장악”했고, “현대의 국가 권력은 전체 부르주아지의 공동 사업을 관장하는 위원회일 뿐이다” 하고 썼다. 그에 맞서려면 노동자들이 자신의 작업장과 지역사회에서 더 나은 삶을 위한 투쟁을 벌이며 점점 더 광범하게 단결을 이뤄 궁극으로는 “프롤레타리아가 하나의 계급으로, 나아가 하나의 정당으로 조직”되고, 그럼으로써 “부르주아지를 강제력으로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지배의 토대”를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공산주의자들과 다른 모든 노동계급 정당들이 “프롤레타리아를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시켜 부르주아 지배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가 정치 권력을 장악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노동계급 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를 지배계급으로 끌어올리고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이고, 이후 점차 경제에 대한 지배력을 장악해 사회를 사회주의적으로 재편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진정한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마르크스는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정부(1871년 파리 코뮌. 친자본가 군대가 학살했다)를 설명하며 이렇게 썼다. “[코뮌의] 보통선거권은 3년이나 6년에 한 번 지배계급 가운데 누가 의회에서 대중을 잘못 대표할지를 결정하는 수단이 아니라 코뮌을 구성하는 대중에게 봉사하는 수단이었다.” 22년 뒤 엥겔스는 미국에 사는 동지에게 이렇게 썼다. “오랫동안 미국은 유럽 세계에 다음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부르주아 공화국은 자본가들의 공화국이고 정치도 일종의 사업에 불과하다는 것 말입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
미국 노동계급의 뛰어난 혁명가 중 한 명이자 헤이마켓[1886년 미국에서 수십만 명이 하루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당시 정부는 시카고 헤이마켓에서 소행이 불분명한 폭탄 테러가 발생하자 이를 빌미로 파업의 지도적 인물 7명을 체포했고 4명을 사형시켰다. 오늘날 메이데이는 이 파업 투쟁을 기리는 것에서 시작됐다.]순교자이고 자신을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로 소개한 앨버트 파슨스는 “현실 정치”를 명쾌하게 묘사했다. 그는 쉬지 않는 활동가이자 조직가인 동시에 1880년대 시카고에서 영향력이 막강했던 국제노동자협회의 영자 기관지 〈경종〉의 편집자기도 했다.
파슨스는 1884년 선거철에 발행된 〈경종〉 1면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우리의 사회 체제, 산업, 정치, 종교 전체에는 도대체 멀쩡한 데가 단 한 곳도 없다. 그 중심부까지 썩었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제도는 해적질에서 유래했고, 사기와 폭력으로 세워졌다. 위대하신 미합중국에는 세상의 모든 속임수를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속임수가 있다. 바로 선거다. 지금 이 나라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열풍 한가운데 있다. 대통령 선거철인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정치인, 횃불 행진, 악단이 동원되고 이런저런 후보와 정당을 찍으라는 소리가 난무한다. 돈 없이 선거에 출마하기란 자본 없이 사업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
이 기사는 계속해서 이렇게 주장했다. 설령 가난한 사람이 인기가 많아 후보자가 되더라도 그는 소속 정당의 부유한 동료들이 준 돈으로 선거운동을 한다. 그 부유한 동료들은 그가 특정 사안에서 “제대로 투표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만일 그가 기대를 저버리면, 부유한 동료들의 기대에 부응할 다른 사람이 대신 후보자가 될 것이다.
그는 집무실에 앉아 유산 계급의 “신성한 권리”를 침해할지 모를 법률은 모조리 없애도록 표를 행사하고 마치 경비견처럼 특권을 누리는 자들의 기득권을 수호한다. 이것이 바로 “현실 정치”다. 가난한 사람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인 처지다. 노동자들이 자신만의 정당을 만들면 그들은 배제된다. 게다가 작업장을 지배하는 자들이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의 투표를 좌우하는 것이 일반적 현실이다. 재산이 없는 사람은 사실상 투표권이 없는 것과 같다. “현실 정치”는 유산 계급의 통치를 뜻한다.
파슨스의 마지막 문장, 바로 우리 중 다수가 작업 시간의 대부분이자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작업장에 관한 언급에 덧붙일 것이 하나 있다. 설령 사용자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저렇게 투표하라고 압박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작업장에 들어서자마자 경제적 독재의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어떤 작업장은 비교적 온화한 독재 체제이고, 어떤 작업장은 전체주의적 지옥 같은 곳이고, 많은 경우는 그 중간 어디쯤 될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민주주의는 없다. 다수결도 없고, 표현의 자유도 제약되고, 흔히 (특히 노조가 없으면) 기본권도 없다. 부유한 소수는 작업장과 경제 전체에서 우리를 지배하는데, 누구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이 때문에 현실은 큰 영향을 받고 그 영향이 무엇인지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같은 대단한 천재가 아니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 자신이 1949년에 이와 관련해서 한 말이 있으니 한번 들어보자.
사적 자본은 점점 더 소수의 손아귀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있는데, 한 가지 이유는 자본가들끼리의 경쟁이고, 또 다른 이유는 기술이 발전하고 노동이 잘게 분업화되면서 생산 단위가 점점 커지고 작은 것들은 그에 밀려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사태 전개의 결과는 사적 자본들의 과두제 수립이고, 이 거대 권력은 정치가 민주적으로 조직되더라도 사실상 감시받지 않는다. 국회의원들은 정당이 선택하고, 그 정당은 사적 자본가들의 돈에 의존하거나 그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고, 그 자본가들은 온갖 목적으로 유권자를 국회에서 멀어지게 한다. 그 결과 국민의 대표자들은 사회에서 소외된 인구의 이익을 사실상 보호하지 못한다. 게다가 지금의 조건에서는 사적 자본가들이 주요한 정보 제공 수단(신문, 라디오, 교육)을 직접·간접으로 통제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 개인이 객관적 결론에 도달하고 정치적 권리를 현명히 사용하기란 아주 어렵고 대부분의 경우 사실상 불가능하다.
17 즉, “우리 민중”이 스스로 정치적으로 표현되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부유한 엘리트와 그 하수인들이 경제와 문화 전반을 움직이고, 정보 제공 수단, 여론, 정치적 절차를 죄다 장악해서 그들의 목소리가 표현된다는 것이다.
최근 프린스턴대학교의 정치학 명예교수 셸던 월린은 아인슈타인이 지적한 내용을 업데이트했다. 그가 한 말을 이해하려면 그리스어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잠깐 그리스어 공부를 해보자. “민주주의”democracy라는 단어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데모크라티아”democratia다. 이 말은 다시 “데모스”(민중)과 “크라티아”(통치)라는 단어에서 왔다. 다음은 셸던 월린의 말이다. “언론복합체, 정치평론가, 텔레비전, 여론조사, 정치 컨설턴트가 판치는 시대에 대중이 의지를 발휘하고 자신의 목소리와 요구사항을 표현함으로써 자치를 실현한다는 약속은 공허하다.” 농담이 아니다! “미국의 정치인과 논객들이 미국 민주주의가 세계 최고라고 주장”하는 것에 월린은 이렇게 응수한다. “현실은 민중이라는 주인공이 없는 민주주의, 복화술 민주주의다.”(“데모스”의 뜻이 민중이라는 것을 기억하자.)많은 아나키스트는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사기라고 비난하며 정직한 혁명가라면 그에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해할 만한 주장이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주의자는 사기적 요소는 없애야 하지만 민주주의를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우리의 노력을 선거 영역 바깥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 있게 들리는데, 미국 선거 제도가 온갖 방식으로 자본주의와 자본가에게 유리하게 짜였기 때문이다. 정치에도 선거와 선거적 정당 외에 아주아주 많은 것이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도 (하워드 진이 말했듯이) 작업장, 지역사회, 학교, 거리, 문화 전반에서 비非선거적 투쟁과 다양한 창의적 수단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기성 권위에 도전하는 방향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이끌고, 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현실과 결정에 대해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미국에서 ‘민주주의’가 실제 작동하는 방식은 이와는 정반대이고 선거에 치중돼 있다. 뛰어난 아나키스트 교육자 폴 굿맨은 이런 현실을 탁월하게 묘사했다. 그는 1960년대 초에 미국 정치 제도를 다루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다음 것들이 우리 정부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군산복합체, 음지에서 활동하는 준準군사 기구, 과학으로 무장한 전쟁 기업, 극도로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한 꼰대들, 멍청이들, 경찰, 행정 관료, 직업 외교관, 로비스트, 정치자금 대는 기업들, 도시 재개발로 한몫 잡으려는 보험사와 부동산업자, 공식 언론과 공식 야당 언론, 다음 선거를 위한 온갖 야단법석과 다툼, 거국 정부 등등. 이런 장치들은 권력욕과 이윤 충동을 동력으로 오래 전부터 고착된 방식대로 굴러간다. 즉, 그 장치들은 기존에 하던 방식과 급진적으로 단절하는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설령 아주 뛰어난 사람이 선출돼 그 수반이 되더라도 그는 곧 모든 주요 쟁점(전쟁과 평화부터 미국인들의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에서 사회를 바꿀 수단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혁명가들은 기성 체제에 도전하는 사상, 정보, 분석, 계획을 광범한 대중에게 전달할 목적으로 때때로 선거에 출마하기도 한다. 당선하면 그 직책을 이용해 (비교적 온건하더라도 긍정적 효과가 있는 사회 개혁을 제안하거나 투표하는 것에 더해) 유권자들의 비선거적 대중 투쟁을 위해 정보를 제공하고, 시위를 조직하고, 지지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존 자본주의 국가에 혁명가들이 들어가는 것으로는 마르크스가 말한 ‘진정한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현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존 권력 관계를 지키기 위한 정치 구조물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본주의 억압을 끝내거나 자본주의 국가를 진정한 ‘민중에 의한 통치’의 수단으로 바꿀 수 없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우리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자들이 만든 기존 국가를 노동계급이 이용해 새 사회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면 노동자들은 자신의 고유한 운동과 조직, 새롭고 더 민주적인 정부 기구로 그 억압 기구[국가]를 박살내야 한다.
몇몇 혁명가들은 국가가 그런 혁명적 변화로 재편되기 전에 당선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더 넓은 사회운동과 비선거적 투쟁이 병행될 때만 자신이 정말로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이런 운동과 투쟁은 대중이 경제와 사회에서 더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야 하고, 또한 정치인과 정부 각료들과 자본가와 경영진이 노동자와 차별받는 사람들과 다수 민중의 필요와 의지에 반응하도록 압박을 키워야 한다. C L R 제임스의 말을 다시 떠올려 보자. “프롤레타리아가 자신과 대다수 민중을 행동에 나서게 하는 바로 그만큼 사회주의 혁명은 전진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체의 위원회, 노동조합, 정당 같은 조직들로 자신을 주체적인 세력으로 만들어 간다.” 이것들이 노동자 민주주의의 씨앗이다. 이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면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비민주적이고 부패한 정치 구조물에 도전해 그것을 대체할 것이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19 그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 등은 볼셰비키가 한 주장을 이데올로기적 방패막이로 삼고서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포악한 관료 독재를 굳혔다. 그 결과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대해 매우 심각한 오해를 하게 됐다. 20
결론을 내기 전에, 흔히 ‘공산주의’라고 알려진 나라들의 실상이 민주주의라는 개념과 도통 어울리지 않는다는 모순에 대해 짧더라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20세기 ‘공산주의’ 전통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마르크스와는 정반대로) 혁명과 공산주의가 민주주의와 대립하는 것으로 봤다. 그런 태도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레닌, 트로츠키, 볼셰비키는 노동 대중이 벌인 지극히 민주적인 봉기를 이끌었고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 직후 러시아는 외국군의 침공과 경제 봉쇄를 당했고, 적대적 외국 자본주의 열강들이 후원한 끔찍한 내전에 휩싸였다. 이런 끔찍한 상황에서 인정사정없는 1당 독재가 수립됐다. (레닌과 트로츠키를 포함한) 볼셰비키는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이론으로 그 독재를 정당화했고, 이 때문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 혁명을 지지하면서도 옳게도레닌과 트로츠키 둘 다와 볼셰비키의 혁명적 민주주의 전통에 서 있던 많은 사람들은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자행된 이 끔찍한 퇴보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너무 늦은 뒤였고, 1920년대 말 이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라는 단어는 스탈린 정권이 자행한 끔찍하고 전체주의적이고 잔혹한 부패를 가리키는 것으로 잘못 인식됐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의 사상과 실천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와 정반대편에 서 있다.
레닌의 한평생 실천을 이끈 것은 바로 진정한 사회주의와 진정한 민주주의는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전망이었다. 사실, 이것은 1917년 혁명을 승리로 이끈 전략적 지향에서 핵심이었다. 그리고 이 전망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레닌이 1915년 격렬한 논쟁을 겪으면서 이를 어떻게 옹호했는지를 살펴보자.
사회 혁명은 한번의 전투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온갖 경제적·민주주의적 개혁 문제를 둘러싸고 일련의 전투가 이어지는 시기를 뜻한다. 그리고 그 문제들은 오직 부르주아지의 재산을 몰수해야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가 민주주의 요구를 언제나 혁명적으로 제기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이 최종 목표 때문이다. 특정 조건의 어떤 나라에서는 노동자들이 근본적인 민주주의 개혁을 단 하나도 쟁취하지 못했더라도 부르주아지를 타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적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지를 그렇게 타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틀렸다. 프롤레타리아는 가장 일관되고 단호한 혁명적 민주주의 정신으로 무장한 뒤에야 그럴 수 있다. 21
프롤레타리아는 민주주의 없이 승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를 최대한 실현하고, 프롤레타리아의 모든 투쟁을 민주주의에 대한 단호한 요구로 연결시켜야 한다. … 우리는 자본주의에 맞선 혁명적 투쟁을 일체의 민주주의 요구(공화국 수립, [노동자] 시민군 창설, 관리 선출, 여성 평등권, 민족 자결권 등)에 관한 혁명적 계획·전술과 결합시켜야 한다. 자본주의가 살아 있는 한 이 요구들은 (모두)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성취될 것이고 그때조차 불완전하고 왜곡된 형태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민주주의를 보면서,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민주주의가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보면서 우리는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부르주아지의 재산을 몰수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것은 대중의 빈곤을 끝장내고 민주주의적 개혁을 모두 온전히 그리고 전면적으로 성취할 토대다. 이런 개혁 중 일부는 부르주아지를 전복하기 전에 시작될 것이고, 어떤 개혁은 부르주아지를 전복하는 한복판에서 시작될 것이고, 어떤 개혁은 부르주아지를 전복한 뒤에야 시작될 것이다.
이처럼 가장 철저하고 온전한 민주주의를 위해 비타협적으로 투쟁한 것은 진정한 레닌주의 전통의 찬란한 유산 중 하나다. 진정한 레닌주의 전통은 수많은 사람들의 요구와 염원과 현재 의식과 공명할 수 있는 동시에, 그것들을 혁명적 사회주의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레온 트로츠키는 1930년대 초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운동의 성장에 직면해 초좌파적 종파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며,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동시에 노동자 민주주의로까지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트로츠키는 노동자 운동의 혁명적 민주주의 요소를 방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설명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틀 내에서, 그리고 그에 맞서 부단히 투쟁하면서 …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요소들이 수십 년에 걸쳐 생겨났다. [노동자] 정당, 노동자 신문, 노동조합, 공장위원회, 동호회, 협동조합, 스포츠 모임 등등이 그 요소들이다. 파시즘의 임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 못지 않게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맹아를 분쇄하는 것이다.” 파시스트가 민주주의를 맹공격하는 것에 맞서 혁명가들은 “이미 존재하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요소들”을 방어해야 하는데, 그 요소들이 결국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의 토대”일 것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껍데기를 부수고 노동자 민주주의라는 알맹이를 거기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트로츠키는 말한다. 파시스트가 가하는 눈앞의 위협 앞에서 “우리는 소비에트 체제를 수립할 힘을 아직 갖지 못하는 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편에 선다. 그러나 동시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해 어떠한 환상도 갖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은 1915년 레닌과 1933년 트로츠키가 처한 상황과 다르고 그 상황 또한 1848년과 1871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처한 상황과 다르다. 그러나 다 다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각자 처한 상황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미래 사회의 토대인 민중에 의한 지배와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우리에게 그들의 통찰과 접근법은 도움이 될 수 있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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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Paul Le Blanc, What do socialists say about democracy, International Socialist Review 74(November 2010).
↩
- Anthony Arnove, Chris Moore, and Howard Zinn, directors, The People Speak, 2009와 Howard Zinn, 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New York: HarperCollins, 2004)[국역: 《미국 민중사》, 이후, 2008]를 보시오. ↩
- C. L. R. James (with Raya Dunayevskaya and Grace Lee Boggs), “The Invading Socialist Society”, in Noel Ignatiev, ed., A New Notion: Two Works by C. L. R. James (Oakland, CA: PM Press, 2010), 28. 다음도 보시오. David Forgacs, ed., An Antonio Gramsci Reader (New York: Schocken Books, 1988), Gregor Benton, ed., Chen Duxiu’s Last Articles and Letters, 1937-1942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8), and Machael Pearlman, ed., The Heroic and Creative Meaning of Socialism: Selected Essays of José Carlos Mariátegui (Amherst, NY: Humanity Books, 1996). ↩
- James P. Cannon, “Socialism and Democracy,” in Speeches for Socialism (New York: Pathfinder Press, 1971), 356, 361. 다음도 보시오. Jean Tussey, ed., Eugene V. Debs Speaks (New York: Pathfinder Press, 1970) and Paul Le Blanc, From Marx to Gramsci: A Reader in Revolutionary Marxist Politics (Amherst, NY: Humanity Books, 1996). ↩
-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논쟁적 개념을 둘러싼 공격과 방어는 다음에 잘 정리돼 있다. Colin Mooers, The Making of Bourgeois Europe (London: Verso, 1991) and Henry Heller, The Bourgeois Revolution in France, 1789-1815 (New York: Berghahn Books, 2006) ↩
- Pauline Maier, American Scripture: Making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New York: Penguin Books, 1998). ↩
- Gary B. Nash, The Unknown American Revolution: The Unruly Birth of Democracy and the Struggle to Create America (New York: Penguin Books, 2005), 100, 203, 206, 278-79, 367; Sean Wilentz, The Rise of American Democracy, Jefferson to Lincoln (New York: W. W. Norton, 2005), 32. ↩
- Diego Rivera and Bertram D. Wolfe, Portrait of America (New York: Covici Friede, 1934), 104; Wilentz, 27-28. Edward Countryman, The American Revolution, revised edition (New York: Hill and Wang, 2003). ↩
- M. I. Finley, Democracy Ancient and Modern, revised edition (Rutgers, NJ: Rutgers University Press, 1985), 13; Ellen Meiksins Wood, “Demos Versus ‘We the People’: Freedom and Democracy Ancient and Modern”, in Josiah Ober and Charles Hedrick, eds., Demokratia: A Conversation on Democracies, Ancient and Modern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6), 132, 122-23; Alexander Hamilton, James Madison, John Jay, The Federalist Papers, Edited by Clinton Rossiter (New York: New American Library, 1961), 214-15. ↩
- Federalist Papers, 79, 81, 322–25. ↩
- Dietrich Rueschemeyer, Evelyne Huber Stephens, and John D. Stephens, Capitalist Development and Democrac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 [국역: 《자본주의 발전과 민주주의》, 나남신서, 1997], 40, 44, 122–32. ↩
- 같은 책, 141, 140. 다음도 보시오. Göran Thernborn, “The Rule of Capital and the Rise of Democracy,” New Left Review 103 (May–June 1977): 3–41, and Geoff Eley, Forging Democracy, The History of the Left in Europe, 1850–2000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
- August H. Nimtz, Jr., Marx and Engels: Their Contribution to the Democratic Breakthrough (Albany, 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000), vii; 이에 대해 내가 쓴 서평도 보시오. “Marx and Engels: Democratic Revolutionaries,” International Viewpoint, September 2002, http://www.internationalviewpoint.org/spip.php?article381. ↩
- Phil Gasper, ed., The Communist Manifesto: A Road Map to History’s Most Important Document (Chicago: Haymarket Books, 2005), 4243, 53, 56, 59, 69. “진정한 민주주의”가 공산주의와 같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시오. Richard N. Hunt, The Political Ideas of Marx and Engels, Vol. I, (Pittsburgh: University of Pittsburgh Press, 1974), 74–75, and Michael Löwy, The Theory of Revolution in the Young Marx (Chicago: Haymarket Books, 2005), 41–43. ↩
- Karl Marx, “The Civil War in France,”[국역: 《프랑스 내전》, 박종철출판사, 2003] in David Fernbach, ed., The First International and After: Political Writings, Vol. 3, (Harmondsworth, UK: Penguin Books, 1974), 210; S. Ryzanskaya, ed., Karl Marx and Frederick Engels, Selected Correspondence revised edition,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65), 452. ↩
- “Practical Politics,” The Alarm, October 11, 1884, 1 (microfilm). ↩
- Albert Einstein, “Why Socialism?”, Monthly Review, May 1949, http://www.monthlyreview.org/598einstein.php. ↩
- Sheldon Wolin, “Transgression, Equality, and Voice,” in Ober and Hedrick, eds., Demokratia, 87. ↩
- Paul Goodman, “Getting Into Power,” in Paul Goodman, ed., Seeds of Liberation (New York: George Braziller, 1964), 433. ↩
- 룩셈부르크의 비판이 옳았다는 것은 당시 상황을 부정확하게 이해한 것이다. ─ 옮긴이. ↩
-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얼마나 민주적이었고 또 뒤이은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시오. Rex A. Wade, The Russian Revolution 1917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and William Henry Chamberlin, The Russian Revolution, 1917–1921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7). 잘못된 이론적 정당화에 대해서는 Hal Draper, 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 from Marx to Lenin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87)을 보시오. 스탈린주의 독재에 대해서는 Leon Trotsky, The Revolution Betrayed (New York: Doubleday, Doran, 1937)[국역: 《배반당한 혁명》, 갈무리, 1995]와 Roy Medvedev, Let History Judge: The Origins and Consequences of Stalinism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9)을 보시오. ↩
- V. I. Lenin, “The Revolutionary Proletariat and the Right of Nations to Self-Determination,” in Paul Le Blanc, ed., Revolution, Democracy, Socialism, Selected Writings (London: Pluto Press, 2006), 233–34. ↩
- Leon Trotsky, “The United Front for Defense: Letter to a Social Democratic Worker,” in George Breitman and Merry Meisel, eds., The Struggle Against Fascism in Germany (New York: Pathfinder Press, 1971), 367–6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