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좌파가 저지를 수 있는 오류들
경제주의란 무엇인가? *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는 언제나 노동자 투쟁에 동참할 때 해당 투쟁을 더 큰 사회적 맥락 속에서 보려고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노동자 투쟁의 현장에서 언제나 상당한 비중으로 작업장 밖 쟁점을 선동해야 한다는 것을 뜻할까?
던컨 핼러스가 쓴 이 글은, 영국에서 국제사회주의자IS 동지들이 노동자 투쟁에 개입하면서 정치적 요구를 충분히 제기하지 않았다는 비판에 대한 응답이다. 핼러스는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노동자들의 생활·노동 조건을 방어하는 투쟁에 집중해야 하는 까닭, 노동자들의 의식을 잘 알아야 지도와 계급의식을 결합시킬 수 있다는 것, 그 반대인 구호 만능주의의 위험 등을 분석하고 있다.
1972년 건설 노동자 파업 때 국제사회주의자들IS은 이런 구호들을 제기했다. “파업을 확산시키자”(당시 건설노조UCATT 지도부는 파업을 일부 작업장으로 제한하려 했다), “전국적 전면 파업을 벌이자”, “아직도 작업중인 건설 현장, 시멘트 작업장, 기타 건설 자재 공급처 앞에서 대대적으로 피케팅[대체 인력 투입 저지]을 하자”, “모든 협상장에 선출된 파업위원회 대표들을 들여보내자”, “주 35시간 노동, 30파운드 지급 요구에서 후퇴해서는 안 된다” 등을 포함해 이와 비슷한 요구들을 많이 제기했다. 이 구호들은 다양한 사람들한테서 “경제주의”라는 비판을 받았고, 그 비판은 그럴 듯하게 들렸다.
그런데 이 구호들과 다른 노동쟁의들에서 등장하는 비슷한 구호들이 옳고 그른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그것은 따져 봐야 할 문제다. 그리고 제대로 판단하려면 해당 산업의 상황, 노동자들의 정서, 노동조합의 상황, 사용자들의 전략 등을 만만찮게 분석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구호들을 “경제주의”로 치부한 비판가들은 [그런 분석 없이] 그 구호들이 “정치적”이지 않으므로 단연코 틀렸거나 적어도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 구호들은 “단지 투쟁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 단체[IS]의 한 동지도 그런 견해를 표명하며, “건설업·토지·은행·금융사 국유화와 노동자 통제”가 핵심 구호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대륙에서 온 한 방문객도 파업을 “정치적으로 만드는” 것만이 올바른 노선이라고 우리에게 충고했다. 즉, 혁명적 조직의 회원들, 세입자들, 건설 노동자들로 이뤄진 ‘파업 지원 위원회’를 세워서 “값싼 공공 임대주택 확대”를 선동하며 가을에 열릴 노동당 전당대회에 “대중적으로 개입”하려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건설 노동자들이 “보수당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총파업”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고 천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리를 비난하기도 했다!
이 제안들이 모두 정치적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런 제안들이 실제 상황과 연관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럼에도 보편적 요구를 내놓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도 전에 제기한 바 있다. 우리가 다양한 투쟁에서 노동자들이 실제로 채택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구호들을 내놓는 것이 올바른가? 아니면 노동당이나 정부 등등을 겨냥해 보편적이고 “정치적”인 요구들을 강조해야 하는가? 과연 ‘경제주의’란 무엇이고, 그것은 우리에 대한 정당한 비난인가?
레닌과 ‘경제주의’
20세기 초에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지도자들, 특히 레닌은 운동 내의 이른바 ‘경제주의’ 경향에 맞서 정치 투쟁을 벌였다. 레닌은 ‘경제주의자들’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는 경제주의자들이 “노동계급 투쟁의 계급적 성격을 흐리고, ‘사회를 인정하자’는 무의미한 말을 늘어놓으며 이 투쟁을 약화시키고,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하찮은 개혁주의 경향으로 격하시키려” 했다고 썼다.
레닌이 이 경제주의자들을 비판한 것은 그들이 파업 기간에 구체적인 ‘경제적’ 구호들을 제기했기 때문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이 비판받은 이유는 혁명적 노동자 정당을 창건하려는 노력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경제주의자들의 선언문(《신조》)은 이렇게 주장했다. “독자적 노동자 정당에 관한 논의는 외국에서의 목표와 성과를 우리 토양에 이식한 결과일 뿐이다.” 그들이 경제주의자들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는 정당(당시 러시아 상황에서는 불법 조직이 될 수밖에 없었다)을 건설하지 말고 “프롤레타리아의 경제 투쟁을 지원”하자고 주창했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경제주의자들은 신디컬리스트들이 아니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신디컬리스트들, 미국의 세계산업노동조합IWW, 20세기 초의 다른 신디컬리스트들은 선거라는 정치 활동에는 반대하는 대신 계급 전쟁을 옹호하고 “사용자들과의 평화 따위는 없다”고 부르짖었다. IWW의 강령은 이렇게 주장했다. “노동계급과 사용자 계급은 공통점이 없다. 수많은 노동 대중이 굶주림과 빈곤에 시달리는 반면 극소수의 사용자 계급은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다면 평화는 있을 수 없다. … 우리는 산업 조직을 통해 낡은 사회의 껍데기 안에서 새 사회의 구조를 만들고 있다.”
이와 정반대로, 러시아 경제주의자들은 정치 활동에 찬성했다. 다만, 그것은 차르 전제정에 반대하는 중간계급과 자본가계급을 지지하는 정치 활동이어야 했다. 《신조》의 구호 가운데 하나가 “자유주의적 야당 활동에 참가하자”였다. 경제주의자들이 반대한 것은 그런 정치 활동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독자적 정치 활동이었다.
사실, 러시아 운동 내의 우편향이었던 그들은 영국의 페이비언주의자들, 독일의 수정주의자들, 프랑스의 가능주의자들Possibilists[현실적으로 가능한 개혁만 요구해야 한다는 주장]과 비슷했다. 이 모든 집단들이 실제로 거부한 것은 계급투쟁의 정치와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목표였다. 수정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주의자들도 마르크스주의의 언어로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했다. 《신조》는 이렇게 말했다. “《공산당 선언》에서 베른슈타인주의로 노동운동이 발전한 것은 지극히 논리적인 과정이었다.” 베른슈타인은 독일 수정주의의 지도자로서, “사회주의라는 최종 목표는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했다. 《신조》 역시 “편협한 마르크스주의, 부정적 마르크스주의, 원시적 마르크스주의”가 “민주적 마르크스주의로 대체”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영국에서 혁명가들이 특정 투쟁을 발전시키기 위해 내놓아야 할 구호들을 둘러싼 논쟁은 경제주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아무 관계도 없다. 현대 영국의 경제주의자들은 노동당 의원단 지도부와 영국노총TUC 집행위원회다. 순전히 무지에서 나온 것(사실, 흔히 그렇다)이 아니라면, 경제주의라는 말로 IS의 정치를 묘사하는 것은 완전한 사기극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계급 대 계급의 투쟁이 정치 투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트로츠키는 “계급투쟁이란 잉여 생산물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라고 말했다.(“마르크스는 노동자 자신의 생계 유지에 필요한 생산물을 필요 생산물이라고 불렀다. 노동자의 생산물 가운데 이 필요 생산물을 웃도는 부분이 잉여 생산물이다.” — 트로츠키) 그렇다면 언뜻 보기에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은 근본적으로 똑같은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매우 명확하게 구분했다. “특정 공장이나 심지어 특정 업종에서 파업 등을 통해 개별 자본가에게 노동시간 단축을 강요하려는 노력은 순전히 경제적인 운동이다. 반면에, 법률 등을 통해 8시간 노동을 강요하려는 운동은 정치적인 운동이다.”
마르크스에게 이 차이는 요구의 차이가 아니라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차이였다. 모든 정치 투쟁이 결국은 ‘경제’ 투쟁인 이유는 그것이 항상 ‘누가 무엇을 차지하느냐’와 관계 있기 때문이다.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정치는 집중된 경제다.”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을 나누는 만리장성 따위는 없다. 오늘날 이 사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명백하다. 마르크스의 구분은 노동계급의 의식·조직과 관계 있다. 마르크스에게 정치 운동은 계급 전체의 운동이다. “노동계급이 지배계급에 대항해 하나의 계급으로서 행동하며 외부에서 압력을 가해 지배계급을 굴복시키려 하는 운동은 모두 정치 운동이다.”(강조는 마르크스의 것) 마르크스에게 경제 운동은 부문적 운동이다.
1 그것은 부문을 뛰어넘은 투쟁으로 지배계급을 굴복시킨 사례였다. 그러나 펜턴빌 투쟁의 발단은 미들랜드 콜드 스토어에서 벌어진 노동쟁의였다. 그것은 더 값싼 노동자를 고용하려는 것에 맞서 기존 항만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벌인 투쟁이었다. 즉, 매우 경제적이고 부문적인 노동쟁의였다. 이 경우에는 경제 투쟁이 정치 투쟁으로 이어졌는데, 대체로 말해서 (순전한 선거 쟁점을 제외하면) 계급 전체가 참여하는 정치적 행동은 흔히 이런 식으로 발전한다.
따라서 건설 노동자들의 파업은 경제 운동이었다. 펜턴빌의 5인 석방을 요구한 파업은 정치 운동이었다.마르크스는 이 문제를 이렇게 요약했다. “노동계급 정치 운동의 궁극적 목표는 당연히 노동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경제 투쟁에서 생겨나 어느 정도 발전한 노동계급 조직이 미리 존재해야 한다.”(강조는 나의 것) 물론 혁명적 당은 경제 투쟁에서 직접 비롯하지 않는 정치 쟁점들(베트남 전쟁, 아일랜드 독립운동, 여성의 권리 등등)도 많이 제기해야 하지만, 그 활동의 핵심은 ‘경제적’ 투쟁들에 집중돼야 한다.
구호는 마법이 아니다
비록 경제 투쟁이 노동계급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직접적 의미에서는 경제 투쟁(부문적 투쟁)이 정치 투쟁(계급 전체의 투쟁)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가끔은 부문의 투쟁이 정치 투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 차이는 무엇 때문인가?
한 가지 흔한 대답은 지도 때문이라는 것이다. 올바른 지도로 제때에 올바른 구호를 제기하면 운동이 전진할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중요한 의미에서 사실이지만, 일면적 관점이기도 하다. 지도의 문제는 노동계급의 의식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의식은 다시 전반적 경제 상황, 따라서 정치적 상황에 달려 있다. 또한 마르크스가 표현했듯이 산 사람들의 뇌리를 짓누르는 과거의 유산에도 달려 있고, 노동자 운동 기구들(노조와 정당 등)의 힘의 균형에도 달려 있는데 이 기구들은 일부 노동자들의 의식보다 뒤쳐질 수 있다.(때로는 한참 뒤쳐진다.) 그 밖의 고려 사항들도 많다.
요컨대, 노동자 운동에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지도력의 발전과 계급의식의 발전은 동전의 양면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핵심적인 문제는 이런 것들이다. 우리는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가?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질문을 이렇게 던지면 답은 분명하다. 우리는 지금 운동의 주변부에서 영향력과 지도력을 획득하기 위해 투쟁하는 단계에 있다. 다음 단계는 그런 투쟁을 훨씬 더 광범한 부문들로 확대하는 것이다.
구호에 무슨 마법적 힘이 있는 것이 아니다. 구호의 내용뿐 아니라 누가 그 구호를 제기하는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다. 대학 졸업생 3명이 빌러리키[런던 외곽 소도시]의 밀실에서 지극히 올바른 분석과 지극히 올바른 구호·요구를 제기하면서 소득 정책 사기극에 반대하는 선언문을 발표할 수 있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 당시 [런던의] 툴리Tooley가의 재단사 3명이 ‘영국 민중’의 이름으로 발표한 혁명적 선언문과 똑같은 효과를 낼 것이다. 즉, 아무 효과도 없을 것이다. 똑같은 선언문을 포드·대거넘·브리티시레일런드·롱브리지[모두 영국의 자동차 공장들]의 [작업장] 위원들이 발표한다면 그것은 상당한 효과를 낼 것이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경청자들을 불러모을 지위와 권위를 어떻게 확보하는가? 동료 노동자들이 실제로 고민하는 쟁점들에 대해 만만찮고 능동적이고 끈질기게 투쟁하고 지속적으로 그럼으로써 경청자층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쟁점은 경제 쟁점, 부문 쟁점일 것이다. 노동조건, 보너스, 업무 평가, 임금[인상]률, 때로는 노동조합 정치 같은 쟁점들 말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이런 투사들(과 그들이 속한 조직들)이 온갖 부문적 문제들에 답을 분명하게 제시해야 하고, 구체적이고 일상적이고 평범한 쟁점들에서 혁명적이지 않은 동료들보다 더 훌륭하게 성공적으로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유화 구호
2 이 정치투쟁은 무엇보다 경제투쟁들, 부문적 투쟁들이라는 토대 위에서만 수행될 수 있다. 이 부문의 투쟁들에서 마법 같은 보편적 구호가 명확하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지도력을 대체할 수는 없다. 핵심 구호들은 이런 투쟁들에서 나와야 하고 이런 투쟁들을 일반화해야 한다.
현재 정치의 핵심 문제는 정부의 소득 정책을 분쇄하는 것, 그래서 정부를 무너뜨리는 것이다.여기서 “무엇 무엇을 국유화하라”는 구호가 적절한가? 광산이나 철강 산업 부문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명백하다! 특정 경우에는 그것이 쓸모 있는 구호일 수 있지만, 대부분의 투쟁들에서는 아마 핵심 구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술적 의미에서 노동당이나 [보수당] 정부를 겨냥한 선전 구호로 ‘소득 정책’에 반대하는 주된 투쟁과 관계 없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원이라면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소득 정책’ 반대 투쟁은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 모두에서 벌어지고 있다.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