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민주주의의 성격을 묻는다
민주주의 ─ 사실과 물신숭배 *
민주주의는 대중에게 가장 인기가 있으면서도 논란도 많은 사상 중 하나다. 미국이 침략 전쟁을 정당화할 때 들먹였던 명분도 민주주의였고, 아랍 혁명이 표방한 목표도 민주주의다. 이스라엘은 민주적 선거의 결과라며 팔레스타인인 살해를 정당화하는데, 팔레스타인 사람들 자신도 [민족] 자결이라는 민주적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좌파 진영에서도 민주주의를 두고 종종 논쟁이 벌어진다. ‘점거하라’ 운동 참가자 중 다수는 다수결과 대의제 구조가 결함이 있고 억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비교적 소규모로 모인 구성원 사이의 합의제에 매달린다. 어떤 사람들은 현대 정치 체제의 미사여구와 실제 모습 사이의 엄청난 대조에 환멸을 느끼며 아예 [그것과] 거리를 두고 참여하지 않기로 한다.
이 글에서 나는 평범한 사람들이 집단으로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는 데서 민주주의가 가능한 수단일 뿐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오늘날 경제 위기는 전 세계 인류가 서로 촘촘히 이어져 있음을 밝히 드러내고 있다. 주요한 사안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결정해야 하는지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됐다. 이런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1퍼센트’가 아무 도전도 받지 않고 ‘99퍼센트’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분명 쉬운 문제는 아니다. 나치 독일이나 소련 스탈린 체제 같은 독재 정권들의 요식에 불과한 절차보다 의회 민주주의가 낫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그러나 이것이 곧, “공정한” 선거가 치러지는 한 빈곤과 불평등이 있더라도 그것은 다수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자본주의에서 민주주의가 왜 실패하는지를 얘기할 때는 선거 주기가 너무 길다거나, 책임을 묻는 제도적 장치가 없다거나, 공직자·판사·군장성을 임명제로 해서 [민주주의가] 훼손됐다는 식의 설명이 흔하다. [1994년에 작고한 영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자] 랄프 밀리반드는 다음을 이 문제의 원인으로 본다.
국가 체제의 인적 구성원들, 다시 말해 행정부·사법부·억압기구·입법부 같은 국가 기구의 최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 사회의 다른 전략적 고위직, 특히 경제와 문화 부문의 고위직을 지배하는 자들과 같은 계급에 속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이런 분석에는 들을 만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인물을 교체하거나, 선출 또는 임명 절차를 조금 바꾸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정말이지, 레닌의 말처럼 “민주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 할수록, 부르주아 의회 제도는 점점 더 주식시장과 은행가들의 지배를 받는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헌법의 일부 결함 탓에 다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가들이 생산수단을 지배하는 한, 선거로 어떤 겉치레를 하더라도 다수의 이익은 내팽개쳐지기 마련이다. 자본가들은 생산수단을 지배해 정보의 통로를 지배하고 나아가 설득·교육·강압 수단들을 지배한다. 실업의 공포, 금융시장의 협박, (인종차별, 성차별 등을 통한) 이간질을 통한 각개격파 등 수많은 수단을 동원해 다수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고 정치적 반대파의 기회와 가능성을 제약해서 진정한 권력 수단, 특히 국가의 억압 기구들을 넘볼 수 없도록 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한 세기도 전에 이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한 바 있다.
여기에서 의회가 대표하는 것은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 즉 자본가의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사회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의회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그 형태 면에서 민주적인 제도들이 그 내용 면에서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한 도구가 된다. … 의회는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국가가 사용하는 특정한 수단이다.
민주주의는 그것이 작동하는 사회적 조건을 우회하거나 뛰어넘거나 무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를 불변의 추상적 원칙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 편제 형태로 볼 때만 민주주의를 둘러싼 수수께끼를 해결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형식적 절차가 내용상[으로도] 진정한 민주주의를 얼마나 구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세 가지 요인에 달려 있다. 대표자 선정 구조와 의사 결정 구조, 권력, 사회적 맥락. 이 글에서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세 가지 역사적 형태, 즉 고대 [민주주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살펴볼 것인데, 이것들은 각각 상이한 계급 이익을 대표한다.
“완벽한 민주주의” ─ 맥락 속에서 보기
4 이것은 지성과 경험을 갖춘(돈과 “좋은 배경”을 가졌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일 것이다) 극소수의 우월한 사람들만이 지배할 수 있고, 다수는 자기들보다 “잘난 사람들”에게 통치권을 넘겨야 한다는 사상을 논박한다.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에서 창안된 것으로,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는 “인민”을 뜻하는 데모스(demos)와 “지배” 또는 “권력”을 뜻하는 크라테이(kratei) 두 단어를 합성한 것이다. 기원전 508년에서 322년 사이에 아테네의 모든 남성 시민은 국가 운영을 직접 통제했다. 한 역사가가 말하듯이, 그 결과는 “노골적인 또는 뒤에 숨은 통치 엘리트 없이, ‘인민에 의해’ 운영되는 비교적 안정되고 장기 지속된 정부라는 점에서 ‘참된’ 민주주의라 부를 만한 현상”이었다. 아테네가 이를 성취하기까지 뿌리 깊은 발전 과정이 있었다. 그리스에는 산과 섬이 많고 나일강 같은 큰 강이 없어서 대규모 중앙집권적 국가가 등장하기 어려웠다. 수많은 세습 왕정이 있었지만 취약했고, 기원전 590년에 이르면 소수의 부유한 특권층(‘과두’)과 독재자들(이들의 지위는 혈통에 의존하지 않았다)이 왕정을 대체하고 있었다. 아테네는 협소한 아티카Attica 지역만을 배후지背後地로 두고 있었는데, 바로 이곳에서 기원전 508~507년에 혁명이 일어나 집단적 통치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6 그뿐이 아니었다.
아티카의 모든 남성 시민은 민회에 참석할 자격이 있었다. 민회는 해마다 총 40일 정도 소집됐고, 정족수는 6천 명이었으며, 시민들은 거기서 모든 주요 결정을 내렸다. 민회에 참석하면 수당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 [참석 자격자의] 4분의 1 정도는 꾸준히 민회에 참석했다. 해마다 추첨으로 뽑힌 5백 명이 평의회를 구성했고 평의회가 안건 초안을 작성했다. 민회를 주관할 의장은 추첨으로 정해졌다. 시민은 누구나 발언과 발의가 가능했고, 결정은 손을 들어 찬반을 묻는 식의 단순 과반 표결로 이뤄졌다. 법원은 판사 없이 2백~3백 명 규모의 배심원단으로 구성됐는데, 배심원들은 추첨으로 정해졌고 수당을 받았다.[시민들은 민회에서] 기마부대 사령관 두 명과 부족 산하 부대 사령관들만 선출한 것이 아니었다. 모병을 관장하는 10인 위원회도 선출했다. … [10명의 장군들 같은 — 글룩스타인] 고위 군장교들은 모두 선출했다. … 선출된 10인으로 구성된 보조위원회[가 군선(軍船)을 지휘했다. — 글룩스타인] … 조선기사들은 대중이 선출했다. 선박과 부속 장비의 유지·보수를 관장했던 조선소 감독관들은 추첨으로 정해진 10인 위원회의 일원일 가능성이 높았다. … 추첨으로 뽑힌 치안판사나 위원회의 성원들이 축제를 관장했는데, 몇몇 경우에는 직접 선출되기도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추첨으로 선임된 위원회들이 전권을 쥐고 (국내와 해외 모두의) 재정을 … 운용했고 운용은 평의회의 감독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재정 운용 방식은 4세기 후반, 군사 예산 회계 책임자와 [축제 비용 조달을 위한 — 글룩스타인] 제의 기금 관리자들을 선출하기 전까지 지속됐다.
시민들은 부자들이 자신들을 착취하거나 국가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이런 대중적 견제 수단을 이용했다. 시민들은 [부자들을] 숭상하거나 따르기보다는 대중적 자의식을 높였는데, 그 결과 집단적 권력이 획일성을 낳는다는 믿음과는 반대로 개성이 만개했다. 철학, 정치 이론, 희극, 조각, 건축, 역사 서술 등 많은 분야에서 문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것은 아테네를 나머지 그리스 지역과 구별짓는 특징이었고, [이때 발전한 문화가] 오늘날 우리 문화[서구 문화]의 토대가 됐다.
8 그 밖의 모든 사람들, 즉 여성, 외국인, 노예들은 여기에서 영구적으로 배제됐다.
이런 정교한 체제가 그 참가자들의 눈으로 보면 대단히 성공적이었던 것은 맞지만, 계급 상황을 뛰어넘은 것은 아니었다. 첫째, “시민”의 범위가 엄격히 제한됐다. 시민은 전체 인구의 소수였고, 이 점은 줄곧 변함이 없었다. 양친이 모두 시민 계급 출신임을 주장할 수 있는 고작 2만~3만 명의 소년들만이 성인이 돼 [시민 자격을 얻는] 영광을 꿈꿀 수 있었다.9 과두들과 귀족들은 바로 민주주의가 가진 힘 때문에 “아테네의 자유 생산자들을 착취에 이용하는 것이 비교적 불가능”해졌고, “그 자체가 노예제의 성장을 초래한 결정적 요인이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어떤 점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민주주의에 참여할] 자유시간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부자들이 노예를 소유한 덕분이었다.” 10 그러므로,
대부분의 시민들은 노예 같은 비싼 상품을 감당할 수 없던 소규모 자산 소유자였고 “농민, 장인, 상점 주인으로서 자신의 노동에 의지해” 살아갔다.그리스 세계의 다른 대부분 지역에서보다 아테네에서 노예제가 더 강력하게 발전했다. 좀 더 미천한 신분의 시민을 충분히 착취할 수 없다면 … 노예 노동에 각별히 높은 수준으로 의존하는 것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유와 노예제가 동시에 발전”한 까닭이다.따라서 가난한 시민들은 투표를 통해 노예제를 배격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유 재산이 정당하다고 봤다. 심지어 거기에 인간이 포함된다 해도 말이다. 노예의 규모는 아티카의 인구 변동을 통해 알 수 있다.
기원전 431년 | 기원전 323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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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카 총 인구수 | 310,000 | 260,000 |
시민(가족 포함) | 172,000 | 112,000 |
외국인(가족 포함) | 28,500 | 42,000 |
노예(가족을 이루는 것이 금지됐다) | 110,000 | 106,000 |
13 이 가난한 시민 계층은 중장보병을 이루고 있던 부자들보다 수가 더 많았다. ‘노老 과두주의자’로 알려진 5세기의 한 저술가는 빈민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해운을 기반으로 한 제국주의는 아테네 민주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또 다른 요인이었다. 아테네 제국주의는 ‘3단 군선’, 즉 더 가난한 시민 계층에서 충원된 노잡이들이 3단으로 노를 젓는 갤리선에 의존했는데,[빈민들은] 부유하고 집안 좋은 남성들에 견줘 유리한 점이 있다. 노를 저어서 아테네의 권력을 지킨다는 것을 그들 자신이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테네를 지키는 사람들은 아테네의 중장보병이나 부유하고 집안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키잡이, 갑판장, 50인장五十人將, 뱃머리의 초병, 조선공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보통 지리적으로 분산돼 있고, 서로 경쟁하는 소생산자다. 농민들은 심지어 [사회의] 다수일 때조차 단결해서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해군으로 결집해 있던 아테네 농민들은 응집력 있고 강력한 힘을 갖고서 혁명으로 얻은 민주주의를 오랫동안 지켜냈다.
15 러셀 메이그스는 아테네 ‘GNP’(국민총생산)의 60퍼센트가 공물에서 왔다고 말한다. 16 시민들은 정복한 영토에서 토지를 얻었고, 야만적 수단을 이용해 지역 주민들을 쫓아내고 노예로 만들었다. 17 의미심장하게도, 아테네 민회 내에 정당이라고는 전혀 없었음에도 (전쟁세를 내야 했던) 부자들은 전쟁에 반대해 투표하는 경향이 있었던 반면 빈민들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18
아테네는 제국의 무역과 공물 덕분에 기원전 447년 파르테논 신전을 “장엄한 대리석”으로 짓는 비용을 댈 수 있었고, 사법 제도와 민회를 위한 국가 지출을 감당할 수 있었다.19 A H M 존스는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한다. “토지를 재분배하자거나 부채를 탕감하자는 제안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 혁명적 취지에서 노예를 해방시키자는 제안도 아테네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20 가난한 농민들은 [사유] 재산 자체에 도전하길 바라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부자들이 더 큰 자원을 활용해 노예를 착취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고대 아테네인들이 노예제나 제국주의를 혐오해야 했다고 보는 것은 몰역사적인 처사일 것이다. 하지만 가난한 시민들이 부자들을 보고 경제적 불평등에 맞설 수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진실은, 민주주의 덕분에 가난한 시민 계층도 불평등과 착취를 바탕으로 한 체제에 이해관계를 갖게 됐다는 것이다. 조시아 오버가 주장했듯이, “시민들은 사적 생활에서 불평등한 상태를 유지했다. 비록 지배 엘리트는 민주주의를 두려워했지만, 아테네 인민은 자신들의 집단적 힘을 사용해서 탐나는 사유 재산을 평등하게 이용하게끔 만들려는 노력을 일관되게 기울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원조 의회” ─ 부르주아 민주주의
고대 그리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에서도 민주주의는 계급 관계를 초월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근대 의회민주주의는 부르주아지가 봉건제에 맞서 지배력을 획득하고자 투쟁했을 때 태어났다. 부르주아지는 수가 적었기 때문에 다른 세력의 지지를 받아야 했고, 그래서 보편적 용어를 썼다. 미국이 영국 식민지 신세에서 벗어나고자 하던 1776년에 발표된 독립선언문에는 이런 말이 있다. “정부는 시민이 구성하는 것이고, 정부 권력의 정당성은 피통치자들의 동의에서 비롯한다.”
1789년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프랑스 인구의 압도 다수를 차지하는 ‘제3계급’에 손을 내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3계급은 무엇인가? 모든 것이다. 지금까지 정치 질서에서 제3계급은 어떤 처지였는가? 아무것도 아니었다.” 2백 년 뒤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인도는 사실상 똑같은 용어를 사용해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한 인도 국민은 인도를 독립한 민주공화국으로 세우기로 엄숙하고 굳게 결심했다.”
1776년이나 1789년에 민주주의의 미사여구와 실제 제도 사이에 격차가 있었을지라도 나중에 모든 남성과 여성에게 투표권을 보장하게 된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성취한 것으로 볼 수 있는가? 그렇게 본다면 자본가들이 생산수단을 지배하면서 계속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처사다. 예를 들어, 1871년 독일에서 남성 보통선거권을 도입한 사람이 바로 반反혁명의 대표 인물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 백작이었다. 미국은 지방검사를 선출하고 주 단위 국민투표 같은 제도도 있지만 가장 성공한 자본주의 국가이자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축에 드는 나라이기도 하다.
21 더 최근에 일어난 아랍 혁명은 잔혹한 탄압을 무릅쓰고 민주적 선거제도를 위해 투쟁했다.
그럼에도 보통선거를 실시한 것은 실질적 영향이 있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발전해도 자본가 지배의 토대가 손상되거나 민중이 국가를 지배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보편적 언어와 호소는 민중이 자신들이 이해하는 대로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과정을 촉발시켰다. 존 몰리뉴가 보여 줬듯이, “넓게 보아 투표권은 노동자들이 제1차세계대전 말 유럽을 휩쓴 혁명 물결의 부산물로 쟁취한 것이다.”보통선거권이 국가와 사회에 대한 자본주의의 지배를 위협하지 못한다면, 왜 자본주의는 때때로 보통선거권을 크게 억누르는가? 그리고 민중은 왜 별 득이 없는데도 보통선거권을 그토록 요구하는가? [봉건제 말기] 신흥 부르주아지는 보편적인, 그래서 불가피하게 모호한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고전적 사례는 프랑스 혁명의 구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유, 평등, 우애.”
의회민주주의를 쟁취하며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마음대로 착취할 자유를 얻으려 했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의회민주주의를 착취에서 벗어날 자유로 해석하기도 했다. 평등이라는 구호는 자본가의 지위가 더는 봉건 지주보다 낮지 않다는 것을 뜻했지만, 모두를 위해 부를 더 평등하게 분배한다는 약속으로 보이기도 했다. 민주주의는 단지 몇 년에 한 번 선거를 치르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자본 축적을 교란할 권리로 보이기도 했다. 노예제나 봉건제 사회와 달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자유롭다는 광범한 믿음에서 득을 얻을 수 있는데, 정교한 현대 과학기술은 혹독하게 쥐어짜낸 노동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자유와 권리가 있다는 자각은 노동조합이 활동할 공간을 열어 주기도 한다.
22 위해서였다. 의회는 귀족원the House of Lords[현재의 상원]과 “각 주州들의 덜 고귀한 주민들이 선출한 대표자들”, 곧 서민원the House of the Commons[현재의 하원]으로 구성됐다. 23 1년 뒤에는 자치도시들의 대표자들도 의회[하원]에 포함됐다. 24 따라서 당시 영국 의회는 봉건적 지배계급의 자문위원회 성격이었고 여기에 신흥 부르주아지가 일부 포함됐다. 중앙 권력은 국왕이 이끄는 국가에 남았다.
그래서 부르주아 혁명 때조차 민주주의 사상의 모호함은 서로 다른 계급들의 이익이 표출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했고, 주민 다수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를 열어 줬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담론에 포함된 다양한 요소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례, 즉 영국 웨스트민스터의 “원조 의회” 사례에서 잘 드러났다. 세계 최초로 의회제도가 성립되는 역사 내내 계급적 맥락을 찾아볼 수 있다. 1264년 하급 귀족들의 반란으로 잉글랜드에 의회제도가 도입됐다. “위대한 장로들과 평신도들로 이뤄진 위원회가 국왕을 단속해 제멋대로인 권력의 손을 묶기”25 왕실의 간섭, 귀족들의 특권적 지위, 세금과 종교 정책 등 많은 부담에 불만을 나타냈다. 사회 상층부에서 일어난 분쟁으로 대중적 민주주의 운동이 터져나왔다. 그 중심에는 “중간 부류의 사람들”, 즉 위로는 지주들과 아래로는 봉급 생활자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26
영국 혁명은 의회를 더 발전시켰다. 자본주의 사회관계들은 봉건제라는 고치 속에서 성숙했고 1640년이 되자 부르주아지는 국가의 의사 결정에 더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싶어 했다. 그 해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 패한 찰스 1세는 의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성 인구의 5분의 1을 유권자로 포괄한 하원은27 의회를 파괴하려던 국왕의 의도는 런던 금융가에 의해 좌절됐지만 그 결과는 양날의 칼이었다. “런던은 이제 의회의 것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의회는 이제 런던의 것이었다.” 28
1641년 12월 국왕은 지도적 [하원]의원들을 체포하려 했다. 브라이언 매닝은 이렇게 썼다. “이때는 역사에서 중대한 순간이었고 결정권은 왕도 아니고, 의회도 아니고, 귀족이나 젠트리[중세 후기에 군사적 역할을 잃은 기사가 지주로 되거나, 자영농이나 상인들이 토지를 구입해 지주로 되면서 형성된 소지주 계층]도 아니고, 무장한 군인들도 아니고 … 런던의 민중에게 있었다. … 오늘날의 총파업에 버금가는 일이 일어났다.” 부르주아지가 왕당파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기대야 했던 사람들과 부르주아지 사이에는 긴장이 있었다. 1641년 1월 많은 빈민층 사람들이 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했을 때, 의회는 감히 그 청원서를 공개적으로 거부하지 못하고 이렇게 선언했다. “비록 청원서에는 이례적인 내용이 있지만 하원은 잠자는 사자를 깨우는 것이 좋지 않다고 본다. 소란만 앞당길 것이기 때문이다.”30 [신형군 장교와 병사로] 선택했다. 1645년 신형군은 결정적 전투에서 승리해 국가 구조의 근본적 전환을 확보했고, 그 본질은 이후에도 뒤집히지 않았다.
그래서 영국 혁명은 왕과 의회 사이의 분쟁 이상의 것이 됐다. 사실 의회는 투쟁의 여러 구심 중 하나인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투쟁에는 다른 구심도 있었다.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의] 내전이 일어나자 부르주아지는 자체의 군대가 필요했다. 여기서도 성공하느냐 못 하느냐는 부르주아지 외부의 민중을 얼마나 끌어들이느냐에 달려 있었다. 신형군New Model Army 사령관 올리버 크롬웰은, 자신은 부유한 지주였지만 “지주 계층의 군인이나 인물이 아니라, 서민 계층과 가난한 사람들과 보잘것없는 가문의 인물들을”이 과정에서 의회가 한 구실은 단순하지 않았다. 찰스 1세가 가하는 눈앞의 위협이 약해지자마자 의원 중 다수(장로파)는 이제 활개 치고 다니는 혁명적 인자들에 기겁해서 국가 권력을 다시 강화하려고 국왕과 타협해서 다음과 같은 일을 막으려고 했다.
왕국 전체의 빈민층은 곧 대단히 강력해질 것이고, 처음에는 자신들을 무엇으로 여겼든 조만간 스스로 일어나 왕국의 모든 귀족과 젠트리를 철저히 파멸시킬 것이다.
32 이제 크롬웰의 군대는 의회보다 더 효과적으로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변했고, 대의제의 형태(예를 들어 의회)와 이 계급[부르주아지]의 지배 사이에는 필연적 연관성이 없음을 보여 줬다. 실제로, 국왕에 맞서 승리한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신형군은 의회를 10년 동안 6번 정도 숙청했다.
크롬웰은 이처럼 의원들이 후퇴하는 것을 시기상조라며 반대했다. 크롬웰은 의원들에게 “사퇴령”Self-Denying Ordinance을 내려 의원들을 중요한 군사적 업무에서 배제했다. “전쟁을 치르는 이 시기에는 양원兩院의 그 누구도 [군사적 — 글룩스타인] 업무를 맡거나 명령을 내려서는 안 된다.”모든 사람이 이처럼 민주주의 형식들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중간 부류”의 많은 사람들은 의회 대의제의 가능성을 믿었다. 그들은 스스로 수평파라고 불렀고 선거권 확대를 요구했다. 1647년 퍼트니 논쟁에서 토머스 레인스버러 대령은 수평파의 신념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정부를 받아들이려면 모든 사람들이 먼저 이 정부의 통치 아래 살겠다고 자발적으로 동의해야 한다. 이에 따라 나는 영국에서 빈민층은 자신을 대변하지 못하는 정부에 전혀, 조금치도 종속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
34 정말로 다수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는 민주주의라는 사상을 표현한 것이다. 35
이에 대해 폴 풋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레인스버러는 찬란한 두 문장으로 보통선거권을 옹호하는 주장을 요약했다.”36 대중의 급진화가 꺾이고 왕정의 기구들을 성공적으로 길들이면서 자본가 계급은 옛 기구들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질서와 권위를 복원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국왕 자리는 크롬웰에게 넘어갔고(그는 호국경이라는 칭호를 더 좋아했다) 그가 죽은 뒤 1660년에 찰스 2세에게 넘어갔다. 1649년에 폐지된 귀족원이 그해 다시 설립됐다.
1649년 수평파는 크롬웰에게 분쇄당했다. 크롬웰이 생각한 혁명의 목적은 발흥하고 있던 자본주의의 지위를 강화하는 것이었지, 민중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것은 아니었다. 크롬웰은 [수평파의]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국무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경들에게는 이 자들을 쳐부수는 것 말고는 달리 이들을 다룰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여러분을 쳐부술 것이고 … 여러분이 이룩한 업적을 모두 없앨 것입니다. … 이 자들은 비열하고 저열한 인간들입니다.”37 의회가 [1215년] 마그나 카르타부터 현재까지 쭈욱 이어진다는 생각은 허구이지만, 그런 생각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영국에서 보통선거권이 마침내 시행됐을 때, 국회의원들이 입성한 하원은 고대의 의례儀禮 냄새가 나는 것들로 치장됐다.
영국 혁명이 가져온 사회적 변화는 지워버릴 수 없었지만, 기억은 없앨 수 있었다. 현대의 부르주아 역사가들은 [당시] 의회가 한 구실을 과대평가하며 이렇게 단언한다. “1640~60년에 일어난 일들은 전체 영국 역사의 흐름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그 일들은 헌법이 발전하는 데서 매우 중요하다.”38 이처럼 1832년의 선거권 확대도 [지배계급의] 양보인 동시에 “혁명을 막을 최상의 방벽”이었던 것이다.
영국 혁명 후 보통선거권이 확대되는 역사가 일관되게 대중이 특권에 도전하는 투쟁을 벌여 승리한 얘기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다. 선거권이 크게 확장된 때는 1832년, 1867년, 1884년, 1918년이었다. 1832년 “대”개혁법은 산업혁명과 함께 등장한 새로운 중간계급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다. 이 법은 대규모 거리 시위와 소요 물결이 인 이후에 제정됐다. 그 저항이 얼마나 거셌던지 지배계급 중 선견지명이 있던 인물이자 국회의원이었던 매콜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계획[대개혁법 제정]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혁명을 막을 최상의 방벽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39 안타깝게도 의회는 거듭거듭 차티스트의 제안을 거부했다. 대중의 거의 혁명적인 압박은 선거권을 확대하지 못했다.
뒤이어 1840년대에는 차티스트 운동이 일어났다. 이 대규모 운동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지했고 부를 급진적으로 재분배하는 수단으로서 남성 보통선거권을 촉구했다. “우리의 관심사는 우리 자신이 입법 기구에 대표돼야 한다는 것이고 우리가 우리의 힘을 사용해 중간계급[즉, 부르주아지 — 글룩스타인]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 작업장 안팎에서 스스로 통치자가 돼라.”40 1884년의 세 번째 개혁법은, 1840년대는 제쳐 두더라도 1867년만큼의 운동도 없었는데도 통과됐다. 그러나 선거권 확대 규모는 가장 커서 남성의 3분의 2가 선거권을 갖게 됐다.(그 전에는 남성의 3분의 1에게 선거권이 있었다.)
선거권은 1867년에 확대됐다. 개혁법을 지지하는 소요가 일어났지만 이 운동의 급진성은 차티스트 운동보다 훨씬 떨어졌다. 그 운동의 지도자들은 “서로 다른 계급들 사이의 … 적대를 끝내고 … 서로 다른 이해관계들을 조화로운 하나의 이해관계로 통일해 모든 계급을 통합하”는 방편으로 선거권 확대를 원했다. 1918년 여성에게도 선거권이 생긴 것은 대중 선동의 결과도 아니었고, 자발적 양보의 결과도 아니었다. 폴 풋이 설명했듯이 1914년까지 일어난 여성 참정권 운동의 기여가 있었지만 말이다. “1918년의 승리는 그 전 여러 해 동안 일어난 투쟁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성 참정권 운동이 벌인 전투적 활동은 남성 우위 이데올로기를 약화시켰다.”하지만 여성 참정권 운동은 제1차세계대전 개전으로 멈춰 버렸고 [그 지도자들은] 애국주의적 응원을 벌이는 데 집중했다.(예컨대 군 입대를 연기하는 청년 남성들을 “겁쟁이”라고 비난하는 운동.) 심지어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러시아로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볼셰비키의 평화 요구를 지지하지 말라고 만류했다. 개혁법은 1917년 5월 국회에서 두 번째 심의에 들어갔다. 그때는 제1차세계대전의 결과가 무엇일지 전혀 확실하지 않은 때였다. [영국 보수당의] 로이드 조지 정부는 정권을 계속 유지하려면 후방 민간인들의 사기를 유지시켜야 하고, 그래서 혁명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이후 독일은 혁명 때문에 전쟁을 중단하게 된다.) 여성 선거권 보장은 “참전 용사를 위한 주택”[영국의 초기 공공주택 정책]처럼 전쟁을 지속시키고 혁명을 피하려고 고안된 여러 공약 중 하나였다.
달리 말해, 선거권[의 확대]은 어떤 때는 계급투쟁의 산물이었고 어떤 때는 아니었다. 선거권 확대는 노동자들의 영향력이 국가 안에서 강해지는 표지라기보다는 [지배계급이]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치른 대가였다. 그러므로 의회는 세심히 구성되고 허구적이기까지 한 이미지를 얻었다. 수평파는 차티스트와 함께 기억에서 잊혀졌다. 반면, 입헌군주제, 상원, 봉건적 의례, 허례허식으로 이뤄진 우리[영국]의 의회제도에서는 지배계급 우월감의 악취가 물씬 나지만, 계급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수동적 굴종이 잘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의회민주주의가] 앞에서 설명한 타협의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훨씬 더 중요한 점은, 영국 노동자들도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때 이 나라가 세계 최강의 제국주의 열강이 됐다는 것이다. 이 점을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영국은 자본주의의 발전이 처음 시작하고 성공한 나라였고, 이는 영국이 19세기 세계시장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는 사실 덕분이었다. 또 이 사실 덕분에 영국 부르주아지는 [세계] 부르주아지 중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력하고 가장 계몽된 부르주아지가 될 수 있었다.
42 이 모든 것들 때문에 [영국 노동자들의] 투표 성향은 유난히 자제하는 경향이었다.
그 결과 영국 노동자 운동은 “중세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보수적 꼬리”를 달고 있었다.그러므로 영국 노동운동의 정치적 발전은 다른 나라들과 다른 경로를 따르게 됐다. 유럽 대륙 곳곳에서는 사회주의 정당들이 19세기 중반 이래 완전히 자리 잡고 활동했던 것과 달리, 영국에서는 1900년에야 노동당이 창당했다. 창당 당시 영국 노동당은 정치적으로 매우 소심해서 사회주의(제2) 인터내셔널에 특별 회원 규정(사회주의 정당이 아니어도 특정 조건으로 가입이 허용되는)이 생기고 나서야 겨우 인터내셔널에 가입할 수 있었다. 이는 영국 노동계급이 [다른 유럽 나라 노동계급보다]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차티스트 운동이 패배한 이후 노동계급 대중의 급진화가 노동조합 운동으로 수렴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 노동조합 운동으로부터 노동당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 정당이 노조를 설립했던 유럽 대륙의 경험과 정반대였던 것이다.
43 여기서는 “최종 분석”이라는 말을 강조해야겠다. 노동계급 투쟁과 의회 선거의 연관성은 존재하지만 매우 약하다. 의회에서 거두는 진보는 때로 계급 투쟁과 반비례하기도 한다. 노동당의 전신 격인 독립노동당은 1893년 창당했는데, 파업 행동을 의회 전술로 대체하려는 의식적 움직임의 결과물이었다. 노동당은 1926년 총파업의 패배에서 득을 봤다. 에드워드 히스의 보수당 정부를 무너뜨린 위대한 산업쟁의가 벌어진 1974년에 노동당의 득표율은 그 전 선거에 견줘 6퍼센트 떨어졌다. 핵심은 뭔가 고정된 패턴이 없다는 것이고, 그 이유는 노동계급의 실제 삶과 선거 사이에는 유기적 연계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보수당과 노동당 사이의 선거적 균형은 최종 분석에서는 계급투쟁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이런 상황은 레닌이 《“좌파” 공산주의 ─ 유치증》에서 한 주장에 옳게도 관심을 기울이는 사회주의자들이 의회 선거 출마를 고려할 때 문제가 된다. 레닌은 선거 출마를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허용할 수 있는 것과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바라는 것 사이의 상시적 격차를 들춰내는 수단으로 삼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앞에서 설명한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이것은 영국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영국 공산당CPGB의 예를 보자. 영국 공산당은 혁명적 조직으로 출발했고[영국 공산당은 1920년에 창당했다], 비록 스탈린주의에 굴복했지만 한동안 투사들의 구심 노릇을 했다. 영국 공산당은 분명히 노동당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대안이었고 이른바 “브랜드 인지도”도 높았다. 1935년까지 이르는 기간에 피의 금요일(1925년 7월 31일)과 총파업 [1926년] 같은 거대한 투쟁이 일어났다. 그 뒤 1931년 제2차 노동당 정부가 무너졌고, 총리였던 램지 맥도널드가 노동당을 탈당해 보수당으로 갔고, 노동당은 선거에서 참패했다. 그러나 영국 공산당의 득표율은 0.3퍼센트를 넘지 못했다. 1945년에 얻은 최고 득표율 0.4퍼센트도 영국 공산당 자신의 노력 덕분이라기보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소련 적군Red Army이 히틀러에게 승리한 덕분이었다. 1951년 1월 영국 공산당은 《사회주의로 가는 영국의 길》을 발행해 “의회 다수파가 되기 위한 결단”이라는 노선을 세웠다. 이렇게 노선을 바꿨음에도 영국 공산당은 0.2퍼센트라는 장벽을 결코 넘지 못했다. 표2는 반세기 동안 영국 극좌파의 핵심적 정당[공산당]이 기울인 선거적 노력의 결과가 얼마나 참담한지를 보여 준다.
연도 | 득표수 | 득표율(퍼센트) | 국회의원 수 |
1922 | 33,637 | 0.2 | 1 |
1923 | 39,448 | 0.2 | 0 |
1924 | 55,346 | 0.5 | 1 |
1929 | 20,634 | 0.2 | 0 |
1931 | 74,824 | 0.3 | 0 |
1935 | 27,117 | 0.1 | 1 |
1945 | 102,780 | 0.4 | 2 |
1950 | 91,765 | 0.3 | 0 |
1951 | 21,640 | 0.1 | 0 |
1955 | 33,144 | 0.1 | 0 |
1959 | 30,896 | 0.1 | 0 |
1964 | 46,442 | 0.2 | 0 |
1966 | 62,092 | 0.2 | 0 |
1970 | 37,970 | 0.1 | 0 |
1974a | 32,743 | 0.1 | 0 |
1974b | 17,426 | 0.1 | 0 |
1979 | 16,858 | 0.1 | 0 |
이것을 유럽 대륙 공산당들의 성과와 견줘 보자. 1914년 이전 차르의 두마 선거에서 볼셰비키는 노동계급 투표의 50~80퍼센트를 득표했다.(노동계급은 다른 사회집단과 따로 투표했다.) 나치즘이 파괴하기 전 독일 공산당은 17퍼센트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유럽 대륙의 공산당들이 저항 운동에서 훌륭한 구실을 하고 적군이 히틀러에게 승리한 상황에서 1945년 프랑스 공산당은 26퍼센트를 득표했고, 벨기에 공산당과 덴마크 공산당은 13퍼센트를, 노르웨이 공산당은 12퍼센트를 득표했다. 1970년대 이탈리아 공산당은 34퍼센트, 포르투갈 공산당은 14퍼센트, 스페인 공산당은 11퍼센트를 득표했다.
하지만 득표율 기준으로 영국 공산당을 평가하면 심각한 오류일 것이다. 영국 공산당은 영국의 가장 중요한 계급투쟁에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다. [1926년 총파업으로 가는 계기인] 피의 금요일을 준비하는 기간에 영국 공산당의 영향을 받은 ‘소수파 운동’Minority Movement 단체들은 노조에서 좌파가 지도부로 선출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총파업 기간[1926년 5월 3일~13일]에 영국 공산당은 행동위원회Councils of Action를 설립하는 데서 핵심적 구실을 했다. 1930년대 영국 공산당 투사들은 1937년 런던 버스 파업과 자동차 공장 노조 조직 운동 등 산업쟁의가 되살아나는 데서 중심에 있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영국 공산당은 전국 직장위원회 조직을 이끌었다. 이 직장위원회 조직은 해럴드 윌슨 노동당 정부를 뒤흔들었고 히스 보수당 정부를 끌어내렸다.
스탈린주의라는 정치를 잠시 제쳐 놓고 보면, 영국 공산당의 산업 영향력과 선거 영향력이 서로 조화되지 않은 것은 당원들의 재능이나 능동성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거대 정당들에 유리한 소선거구제 탓도 아니었다. 직장위원 선거도 소선거구제를 바탕으로 했다. 공산당원들이 직장위원으로 선출된 것은 공산당원들이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해 싸우고, 승리할 수 있는 전술에 관해 타당한 견해를 가졌음을 동료 노동자들이 직접 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선거를 무시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주의主義로서 선거에 기권하는 초좌파주의를 레닌이 비판한 것은 전적으로 옳았다. 의회주의가 가망이 없는 전략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다음과 같은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레닌은 강조했다.
“무수한” 프롤레타리아가 여전히 일반적으로 의회를 더 좋아한다. … 우리가 볼 때 쓸모 없는 것을 계급이 볼 때도 쓸모 없는 것이라고, 대중이 볼 때도 쓸모 없는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 우리는 대중의 수준으로, 계급의 후진적 층의 수준으로 떨어지면 안 된다. 두 말하면 잔소리다. 우리는 대중에게 쓰디쓴 진실을 말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편견과 의회적 편견을 편견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냉철하게 계급의식의 실제 상태에 조응해야 한다.
사회주의자는 “계급의식의 실제 상태”를 고려해 의회에 접근해야 하고 “계급의식의 실제 상태”는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좋고 나쁜 것 모두)의 영향을 받는다.
의회 선거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강하다면 사회주의자들은 그것을 무시할 수 없고, 안타깝지만 같은 이유에서 많은 사람들이 선거에서 낸 성과를 기준으로 특정 정치 단체가 만만찮은 세력인지 여부를 판단한다. 참패할 전투에 몰두하는 군대는 지지자들을 얻기 힘든 법이다. 그래서 구체적인 각각의 상황에 맞게 “냉철하게” 판단해야 하고, 사회주의자의 선거운동 이면에 있는 실제 세력관계를 재고 그 결과를 예상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고대 그리스의 많은 도시들은 아테네와 사회 구조는 비슷했지만 민주주의가 없었다. 꼭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일부 자본주의 국가는 의회가 없다. 소수에 의한 계급 지배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고, 언제나 필요 없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권력은 대표 체제와는 무관하게 생산수단을 지배하는 것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히틀러를 후원했던 프리츠 티센은 다음과 같이 썼다.
기업인은 언제나 정치를 일종의 차선책으로 보고 싶어 한다. … 행정기관이 건전하고, 세금이 적당하고, 경찰이 잘 조직돼 있고, 질서가 잘 유지되는 나라에서는 기업인이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온전히 사업에만 몰두할 수 있다.노예·농노·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들은 정부에 공평하게 참여하든, 특정 위원회나 왕이나 독재자가 나서 그들을 대신해 국가를 운영하든 여전히 착취자다.
이 점에서 자본주의는 운신의 폭이 굉장히 넓다. 착취가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에서 분리돼 겉으로는 “자발적으로” 노동하는 듯 보이고, 노예제·봉건제 사회와 달리 국가가 강제적으로 일 시키지 않는 듯 보인다. 자본주의에서는 국가가 반드시 개입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노동자들이 반격에 나서거나, 위기가 심각해져 이례적 수단을 동원해야 할 때는 다르지만 말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통한 느슨한 지배와 마찬가지로 파시즘, 군사독재, 제국주의 지배 등도 똑같이 자본주의와 어울린다.
노동계급은 다수 계급이 집단으로 권력을 행사해야 해방될 수 있으므로 사정이 다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과거의 역사적 운동은 모두 소수의 운동 또는 소수의 이익을 위한 운동이었다.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압도 다수의 이익을 위한 압도 다수의 자기 의식적이고 독립적인 운동이다.
이 “압도 다수”가 국가와 생산수단에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면 그에 걸맞은 집단적 조직 형태가 있어야 한다. 바로 여기서 진정한 민주주의(애초 그리스어 단어의 뜻 그대로의 민주주의[즉, 인민의 지배])가 꼭 필요하다. 자본가들은 생산수단을 지배하는 덕분에 간접적인 경로로 계급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노동계급은 그럴 수 없다. 이러한 전혀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를 성취하기 위한 노력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노동운동은 노동조합부터 개혁주의적 정당과 혁명적 정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조직을 창출했고, 노동자들은 이 조직들을 통해 집단으로 자신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단일 쟁점 운동에서 등장하는 조직 형태도 있지만, 너무 분산돼 있고, 너무 다양하고, 지속 시간이 너무 짧아서 그 내부 구조에 일관된 추세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이 글에서 분석하기는 어렵다.)
민주주의와 노동조합
노동조합은 일차적으로 노동 생활과 관련 있다. 노동조합은 기업주들한테서 독립적이고,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의 부속물인 의회와도 다르다. 노동조합이 존재한다는 것은 일정한 균형의 결과다. 자본가들의 지배가 압도적이라면 노동조합은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노동자들이 자신의 공통 이해관계를 명확히 이해하고 단일한 계급으로 단결하면, 부문적 요구를 놓고 싸우는 부문 조직인 노동조합은 더는 존속하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노동자들이 사회를 운영한다면 임금과 노동조건을 놓고 협상할 기업주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균형이 이뤄진 결과 [노조] 관료 계층이 형성된다. 노조 관료는 기업주의 절대적 우위를 두려워하지만(그러면 노조가 모조리 제거될 것이므로), 노동자들의 독립적 행동도 두려워한다(그러면 자신들의 중재자 구실이 무의미해지므로). 노조 관료는 노동자 민주주의를 온전히 구현하는 데 장애물로 작용한다.
이 점에서도, 영국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다. 19세기 중엽은 “옛 노동조합 운동”의 시대였다. 이 시기 노동조합은 일부 협소한 직종의 숙련 노동자들을 포괄했다. 전체 노동계급의 약 15퍼센트 정도였던 이 “노동 귀족”들은 자기 노동의 가격을 최대한 높이려고 미숙련 남성과 여성의 채용에 반대했다. 옛 노동조합은 사용자와 타협하는 데 골몰하고 파업을 회피하는 선출된 노조 관료들의 “파당”[당시 영국의 웨브 부부가 노조 관료를 지칭한 표현]을 발전시켰다. 다수 계급의 지배를 바라는 염원을 표현하기에 옛 노동조합은 효과적 수단이 아니었다.
48 그러나 사용자들의 공격에 새 노동조합 운동의 기세는 결국 꺾이고 말았다. 그러자 사용자들의 강경한 태도에 직면한 약한 미숙련 노동자들은 노조 관료의 협상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20세기로 접어들 무렵에는 옛 노동조합 운동이든 새 노동조합 운동이든 모두 하나의 계층으로서 전임 관료가 장악했고 노동조합 내부 민주주의는 크게 훼손됐다.
1880년대 대중파업은 “새 노동조합 운동”을 낳았다. 새 노동조합 운동에서 노동조합은 노동계급 전체를 조직 대상으로 봤다. 이 노동조합들은 민주주의 문제에서 야심 찼다. [새 노동조합 운동의 대표적 노조인] ‘전국 가스·일반 노조’의 [창립자] 윌 손은 이렇게 썼다. “국제 노동계급의 연대를 실현해 … 우리는 저임금과 억압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에게 … 고통에서 벗어날 길을 손에 잡힐 듯 구체적이고, 분명하고, 불 보듯 환하게 제시했다.”영국에서 이런 난관을 뚫고 노조와 사회 전체에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쟁취하려고 맨 먼저 의식적으로 움직인 사람들은 신디컬리스트였다. 신디컬리스트들은 의회가 변화를 이뤄낼 수 없다고 본 투사 집단이었다. 그들은 노동자 자신의 조직인 노동조합을 통해 민주적 전진을 이룰 수 있다고 봤다. 이런 기대는 역사에서 결함 있는 것으로 판명됐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노동조합의 작동 방식에 관한 중요한 통찰을 제시했고, 이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1910~14년 ‘노동자 대투쟁’ 당시 활약했던 사우스웨일즈 지역 신디컬리스트들은 《광원 노동자의 다음 단계》를 출판했다. 거기서 그들은 “우리의 목표는 산업 민주주의”[주주가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 작업장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관리자들을 선출하는 것]라고 선언하고, 노동조합을 개혁해서 이를 달성하겠다고 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형식주의로는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전투적이고 공세적인 정책으로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살아 숨쉬는 것으로 만들지 않는 한, 그 구조가 얼마나 훌륭하든 규약 자체는 쓸모 없기 때문이다.”
신디컬리스트들이 보기에 노동자 민주주의로 가는 길은 계급 투쟁이었다.
[사용자들의] 회유 정책 탓에 조합원들이 가진 진정한 힘이 소수 지도부의 수중에 떨어진다. 누군가 ‘하지만 대의원대회와 총투표를 하지 않느냐?’ 하고 반문할 수 있다. 지도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을 때만 대의원대회가 소집되고 오직 그런 때만 투표를 하게 된다. … 그들 지도자들은 “점잖은 신사분”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자신들이 가진 권력 덕분에 상당한 사회적 명망을 누린다. … 현장 조합원들이 이런 특권을 침해하는 바로 그만큼 지도부의 명망도 떨어진다. 그런데도 지도자들이 변화를 꺼린다고 해서 놀라야 할까? … 지도자들은 진보를 가로막는 데에 이해관계가, 기득권이 있다.
51 (수동적인 투표보다는) 대중 집회가 포함됐다. 왜냐하면 “대규모 집회에서는 언제나 주장이 솔직해지고 관점이 폭넓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고, 그런 상황에서는 반동적 인자들이 초라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52 《광원 노동자의 다음 단계》는 의회주의라는 올가미를 배격했을 뿐 아니라 “교섭의 분산”[상급 단체가 아니라 각 지부가 교섭 권한을 갖는 것]과 “투쟁의 집중”[특정 지부에서 교섭이 결렬되면 연맹 차원으로 싸우는 것]을 주장하는 ‘민주적 중앙집권제’를 제안했다. 53
“전투적이고 공세적인” 정책에는 “다양한 파업 방법들”과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흐름은 제1차세계대전 중에 금속노조 직장위원회 운동으로 다시 시작됐다. 그 교훈은 J T 머피가 쓴 《노동자 위원회》에 집약돼 있다. 머피는 노조 관료를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분석했다.
모두 알다시피, 혁명적 언사 덕분에 노조 지도자로 당선한 인물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전과 이상하리만큼 대조적인 말을 하는 경우가 흔하다. 작업장에서 일하는 사람과 전임 간부로 일하는 사람의 관점을 비교해 보자. 작업장에 있는 사람들은 변화를 모두 체감한다. 그는 작업장의 정서를 느낀다. 그에게는 자신의 노동조건이 가장 중요하다. 노조 규약은 그 다음으로 중요하고 때로는 그 이하이기도 하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 전임 간부가 됐다고 해 보자. 그는 이제 작업장에 있지 않다. 그는 전혀 다른 계급의 사람들을 만나고 전혀 다른 분위기 속에서 살아간다. 전에는 가장 중요했던 것들이 이제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그는 규약에 파묻혀 지내고, 필연적으로 종전과는 다른 관점에서 상황을 보게 된다. … 이처럼 노동계급의 조건을 반영하는 사람들과 거기서 동떨어진 사람들 사이에 대조적 차이가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머피는 “진정으로 민주적인 정신으로 노동운동의 기운을 북돋는 것을” 목표로 관료들에게서 독립적인 현장 조합원 운동을 건설하자고 했다.
56 공식 절차가 쓸 데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형식 자체는 현장 조합원과 관료 사이의 세력 균형을 반영한다. 최상의 규약은 아래로부터의 압력을 전달하는 통로 구실을 하지만, 보통 규약이 바뀌는 속도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광원 노동자의 다음 단계》와 마찬가지로 머피도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려는 노동자들의 염원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규약을 얼마나 잘 만드냐가 아니라 투쟁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쏟느냐 하는 것임을 이해했다. 노동조합 민주주의의 상황을 보여 주는 또 다른 표지는 관료 자체다. “우파” 지도자냐 “좌파” 지도자냐 하는 구분은 “소속 정파의 정치”에 따르는 것이기보다는, 노동조합의 주된 기능을 교섭으로 보느냐 투쟁으로 보느냐에 따르는 것이다. 지도부의 좌우 성향은 노조 운영 방식에 영향을 끼치지만 이조차도 구체적 조건들을 제쳐 놓고 추상적으로 논의할 수 없다. 노동계급이 스스로 약하다거나 수동적이라고 느껴서 싸울 자신이 없는 상황이라면 그 어떤 규약도 좌파 지도부가 투쟁을 배신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반대로, 현장 조합원들이 전투적이고 능동적이면 우파 지도부가 행동에 나서도록 압박할 수도 있고, 만약 지도부가 기층의 민주적 요구들을 가로막으면 독자적으로 노조 행동을 이끌 수도 있다. 클라이드 노동자위원회의 유명한 공식이 이를 완벽하게 정리했다. “우리는 지도부가 노동자들을 제대로 대표하는 한 그들을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그 즉시 독자적으로 행동할 것이다.”58 [당시] 한 보수당 의원은 《광원 노동자의 다음 단계》가 묘사하는 종류의 대중 집회와 비밀 투표를 대비하며 이렇게 말했다. “거수로 투표를 하는, 요즘에 흔한 노조 대중 집회에서 누군가가 자기 뜻대로 표를 행사하려면 영웅에 가까운 용기가 필요하다.” 그는 비밀 투표를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라고 했다. 59 이런 식으로 전혀 다른 민주주의 개념은 1984~85년 광원 파업 때 현실의 시험대에 올랐다. 마이크 시몬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파업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벌이는 투쟁을 보면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집단적 의지를 드러내는 대중 집회보다 우편을 통한 비밀 투표[영국에서는 집에서 투표 용지를 우편으로 받아서 투표할 수 있다]에서 자본주의 언론과 부르주아 개인주의가 주는 압력이 더 커진다. 1980년대에 마거릿 대처는 “정부는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촉진하길 간절히 바란다”고 주장하며 비밀 투표를 강요했다.[비밀 투표] 요구는 진짜 민주적으로 토론과 의사 결정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계급 전쟁에 쓰인 [지배계급의] 무기 중 하나였다. … 1984년 광원 노동자의 적들은 [전국광원노조가 비밀] 투표를 시행하기를 바랐는데, 그러면 노조를 더 쉽게 깨뜨릴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사실, 1984년 파업은 철저하게 민주적인 방식으로 압도 다수의 노동자들에게로 확산됐다. 특히, 한 갱도나 한 지역의 광원들이 다른 곳으로 가 그곳 광원들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왜 연대와 단결이 중요한지를 설명했다.
자본가 계급의 지배에 집단으로 도전하는 것은 모두 진정한 민주주의로 한걸음 다가서는 것이다. 수동성을 부추기는 것은 모두 그 투쟁을 방해하는 일이다.
광원들이 패배하자 [대처 정부는] 일련의 노동악법을 도입해 비밀 투표가 [노조에서] 뿌리 내리도록 했다. 그 결과 노조에 긴급한 사안이 있을 때 노조 활동가들은 아예 관여하지 못하는 것과 비밀 투표를 하는 것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경우가 흔해졌다. 이런 상황에서는 독재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낫고, 투표가 없는 것보다 비밀 투표가 낫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후자는 형편없는 대용품이다.
개혁주의 정당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위한 전투에서 노동조합은 중요하지만 매우 중요한 한계가 있다. 특정 집단의 임금과 노동조건에 집중하는 부문적 조직으로는 사회를 변화시키고 그래서 집단적인 권력을 획득하는 데에서 한계에 부딪힌다. 고용 방식과 무관하게 노동자 다수에게서 회원을 충원하고, 더 폭넓은 정치적 문제들에 집중하는 조직이 필요하다. 즉, 정당이 필요하다. 역사에서 [등장한 여러 유형의 정당 중에] 세 종류의 정당이 중요하다. 개혁주의적 정당, 스탈린주의적 정당, 혁명적 정당.
61 이것이 개혁주의 정당의 내부 체제를 규정한다.
노동조합이 계급투쟁의 균형을 반영한다면, 개혁주의 정당은 이데올로기의 균형을 반영한다.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사상을 모두 받아들인다면 개혁주의 정당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사상을 거부하고 혁명을 일으켜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개혁주의 정당은 득표를 최대한 늘리기 위해 노동계급 다수의 호감을 얻으려 한다. 그런데 노동계급에는 반동적 사상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부터 좌파 사상을 수용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포함된다. 그래서 개혁주의 정당은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현재 상태의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것이다.의도가 무엇이든 개혁주의 정당은 의회주의를 받아들이므로 근본적으로 비민주적이다. 선거에서 의원을 당선시키는 것이 핵심 목표이므로 당 규약이 뭐라 하든 국회의원들의 입김이 가장 세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개혁주의 정당은 [자본주의 틀 안의 개혁이라는] “게임의 규칙”을 받아들이므로 정권을 잡으면 자본주의를 운영하게 된다. 압력은 위에서 아래로만 향할 뿐 그 반대로는 향하지 않고, 개혁주의 정당이 노동계급의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평당원들이 그 정당의 통제를 받는 결과를 낳는다. 개혁주의 정당이 자본주의 국가를 포획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주의 정당이 국가에 포획되는 것이다.
영국 노동당이 좋은 사례다. 1918년 이전의 노동당에는 노동조합과 (독립노동당 같은) 사회주의 단체들이 가맹해 있었다. 의원들은 당원들에게 책임을 지지 않았다. 사실, 그에 관한 규약도 아직 없었다. 전쟁[제1차세계대전] 중 국내에서 일어난 대중의 급진화 속에서 1917년 러시아 혁명에 두려움을 느끼며 노동당은 당원 규정을 만들고 사회주의 당헌 4조[생산수단의 공공소유 등을 규정](실제로 실행되면 생산수단에 대한 의미 있는 민주적 통제를 가져올)를 채택했다. 1918년 당헌은 지역 조직, 연례 당대회, 전국집행위원회, 이것들과 관련된 내부 민주주의 규정을 뒀다. 대중의 급진화와 혁명이라는 외부 압력 덕분에 제한적으로나마 [당내] 민주주의가 개선된 것이다.
노동당 지도부는 이후 오랫동안 당대회 결정 사항과 당원들의 염원을 무시했지만, 적어도 민주적인 것처럼 보이려고는 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노동조합이 패배하고 그 결과로 노동계급이 자신감을 잃자, [1995년에 당대표가 된] 토니 블레어는 당 민주주의를 공식적으로 폐기하고, 당헌 4조도 함께 삭제했다.
혁명적 민주주의와 혁명적 정당
62 그러나 혁명적 당에는 이런 딱지를 붙여서는 안 된다. 혁명적 당은 자본주의 타도를 목표로 대중의 집단적 의지에 따른 지배를 실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노동조합과 개혁주의 정당들이 체제의 틀 안에서 움직이고, 불가피하게 계급을 배신하기 때문에, 예컨대 스페인의 인디그나도스[‘분노하라’] 운동 참가자 등 일부 사람들은 정당과 노동조합을 모두 원칙적으로 비민주적이라고 보며 거부한다.63 이런 기관들은 몇몇 정치사상가들이 고안한 것이 아니라 대중 투쟁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난 것으로, 권력이 집단으로 행사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기구이다.
이런 최종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은 혁명의 시기에 대중적 민주주의 기관들이 등장하면서 뚜렷해진다. 파리 코뮌과 러시아 혁명기의 소비에트 등 역사에 많은 사례가 있다.의회 제도는 투표를 위해 임의적인 지리적 구분에 따라 선거구를 구분하며, 자본가들의 핵심 권력을 건드리지 않는다. 그러나 혁명기에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 대표를 뽑아 소비에트 같은 기구를 통해 국가권력 기관을 세워 생산수단과 국가를 집단으로 지배한다. 작업장은 계속 가동되므로 대표자들은 언제든 소환될 수 있다. 작업장 집회만 열면 대표자를 교체할 수 있다. 반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서 유권자들은] 국회의원들에게 4~5년에 한 번만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소비에트에 파견되는 대표자들은 작업장에서 자신을 선출한 노동자들과 같은 임금을 받는다. 그래서 그들이 결정한 정책들이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몸소 체험한다. 반면, 의회 제도에서 국회의원들은 유권자들과 동떨어져서 살고 그들의 급여도 유권자들의 급여와 연동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조차 조직 형태를 만병통치약처럼 여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 최초 소비에트(1905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등장한)의 의장이었던 트로츠키는 [소비에트에서도] “한심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앙상한 형식만 뽑아내 물신화한다. 이런 일이 그동안 소비에트에서 일어났다. … 마치 소비에트는 태생적으로 노동자·농민을 기만하는 무기가 될 리가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1917년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운영한 소비에트야말로 그런 사례 아니겠는가? [이런 소비에트는] 부르주아지의 권력을 지지하고 부르주아지의 독재를 예비하는 무기였을 뿐이다. 1918~19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사민당 주도 소비에트는 어땠나? 부르주아지를 보호하고 노동자를 기만하는 기관이었다.
그러므로 소비에트라는 직접적 대의민주주의 자체는 프롤레타리아 지배의 맹아만 마련할 뿐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려면 소비에트가 더 나아가기를 바라야 하고, 이런 상황은 다수가 혁명을 지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러시아에서 이런 상황은 혁명적 당인 볼셰비키의 설득력 있는 노력으로 실현됐다. 1917년 2월 차르가 타도됐을 때, 볼셰비키는 “모든 권력을 노동자·병사·농민 대표 소비에트로!” 하고 외쳤다. 처음에는 소비에트에서 소수만이 이 요구를 지지했지만 가을이 되면 다수가 지지했고, 10월 25일에는 이제 페트로그라드로 이름이 바뀐 수도에서 무혈에 가까운 봉기가 일어나 볼셰비키의 구호는 현실이 됐다.
65 많은 기업을 노동자들이 관리하게 됐다고 썼다.
혁명적 당과 소비에트가 결합하며 민주주의는 역사상 최대로 신장될 수 있었다. 소수 귀족과 자본가들이 가졌던 권력을 타도함으로써 대중이 실질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됐고, 볼셰비키의 “평화, 토지, 빵” 정책이 실현 가능해졌다. 독일, 영국, 프랑스 의회는 무익하고 다들 혐오한 제1차세계대전을 지속했던 반면, 소비에트 정부는 병사들의 절실한 요구에 반응해 권력을 잡은 다음날 교전을 중지했다. 러시아 인구의 압도 다수는 농민이었는데, 지주들의 토지를 점유하는 것이 합법화됨으로써 토지를 갖고 싶어 한 농민들의 염원도 같은 날 이뤄졌다. 도시에서 노동자들은 공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1918년 초에 이르면 공장 500여 곳이 국유화됐고, 레닌은 곧 “일일이 셀 시간이 모자랄 만큼”이렇게 민주주의가 대약진하는 속에서 여성, 소수 민족, 성 소수자 등의 권리도 크게 신장됐다. 이는 혁명적 당, 소비에트, 생산수단 통제가 상호작용한 덕분에, 즉 대중의 대표기구, 권력, 사회적 맥락이 서로 보완한 덕분에 가능했다.
66 사람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극이게도 이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내전과 외세의 간섭으로] 소비에트는 빈 껍데기가 됐다. 스탈린주의 독재 정권은 숙청으로 [자파 세력만 남은] 볼셰비키 당을 이용해 국가를 운영했고 대중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흔히들 이것을 레닌의 볼셰비키 당과 그 당의 조직 방식이 가져온 불가피한 결과라고 본다. 예컨대, 역사가 로버트 서비스는 레닌이 “특히나 우두머리 기질이 강한”볼셰비즘 자체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초권위주의적인 성향이 있었다. 그래서 레닌 사후 설령 스탈린이 아니라 트로츠키나 부하린이나 심지어 카메네프가 당 최고 지도자가 됐더라도, 초권위주의적 지배 체제가 득세했을 것이다. 레닌이 그랬던 것처럼 트로츠키·부하린·카메네프는 스탈린보다 더 온건한 종류의 볼셰비즘을 옹호했다. 그러나 그것도 볼셰비즘이기는 마찬가지였다.
68 마지못해 인정하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민주주의가 완전하게 파괴된 것이 “우두머리 기질”이나 볼셰비즘의 “성향”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말이다. 비록 서비스도 “그래도 1917년의 볼셰비키 당은 비교적 민주적으로 행동한 정당이었다”고69 이런 관점으로 당시 러시아를 설명해 보자.
서비스의 말대로라면, 당 내부의 변화가 사회 전체에 대한 독재를 낳은 것이 된다. 그러나 이는 내 글의 주장과 충돌한다. 내 주장은 이렇다. 정치 체제(정당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포함해)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상부구조는 토대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볼셰비키 당과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둘 다, 전투적이지만 [전체 인구에 견주면] 비교적 소수인 노동계급에 기대고 있었다. 노동계급이 생산에서 차지하는 집단적 성격 때문이었다. 전체 인구의 80퍼센트를 차지하고 광활한 농촌 지역에 흩어져 살던 농민은 노동계급에 견줘 응집력도 약했고, 집단적 이해관계도 덜 공유했고, “노동자·병사·농민 대표” 소비에트에도 덜 참가했다.
70 그 결과 러시아 인구의 4분의 1인 3500만 명이 극심한 기아에 시달려, 심지어 식인 행위도 나타났다. 71 내전에서 백군을 물리쳤지만 큰 전쟁을 치르려면 거대한 관료 기구가 필요했다. 내전이 끝날 무렵 국가기관에서 일하는 관료는 588만 명이었다. 이는 산업 노동자의 다섯 배에 이르는 수였다. 72
10월 혁명 이후 잔혹한 내전이 벌어졌다. 적군은 백군과 자본주의 외세의 개입에 맞서 싸웠다. 노동자 18만 명이 사망했다. [산업] 생산이 붕괴하면서 노동계급이 260만 명에서 120만 명으로 줄었다. 혁명에 앞장선 페트로그라드의 인구는 240만 명에서 72만 명으로 줄었다. 현대의 한 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소규모 공동체 수준이 아니라 [인구가] 수억 명에 이르는 거대한 사회에서 생산력이 이토록 크게 감소한 사례는 인류 역사에서 찾을 수 없다.”73 레닌과 트로츠키 등 지도자들은 이런 흐름을 바꾸려 했지만, 그런 비정상적 상황에서 큰 효과를 내지 못했다. 그들의 노력이 효과를 보기엔 사회적 맥락이 너무나도 불리했기 때문이다. 농민과 국가 관료가 노동계급을 완전히 압도했다. 1920년대 관료들은 각각 부하린과 스탈린 뒤에 줄을 서서 당권 경쟁을 벌였다. 노동계급의 쇠퇴와 함께 볼셰비키 당내 민주주의도 파괴됐다. 결국 당내 체제도 스탈린주의적으로 굳어졌다. 그런데 이는 스탈린이 운영한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반영한 것이다. 스탈린주의는 당과 국가 모두에서 완전한 독재를 시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계급의] 집단적 지배는 사라지게 됐다. 레닌에게 ‘우두머리 기질’이 있었든 없었든 간에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영향력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마르크스도 말했듯, “인간은 스스로 역사를 만들지만,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만들지는 않는다. … 이미 존재하고 정해져 있고,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환경 속에서 만든다.”러시아가 놀라운 민주주의적 성과를 이룩하고, 그 성과가 완전히 파괴된 과정은 [민주주의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봐야 한다는] 내 주장을 뒷받침하는 뚜렷한 증거다. 1917년에 소비에트 러시아는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에서 나타난 직접 통치를 구현했고, 잠시나마 사회의 압도 다수를 포괄했다는 점에서 아테네의 한계를 넘어서기까지 했다. 1917년 러시아, 민주주의가 위대한 전진을 이룩하는 데서 레닌주의 정당은 핵심 요소였다. 그래서 혁명적 당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문제는 민주주의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개혁주의 정당과 꼭 마찬가지로, 혁명적 당도 내부 구조는 그 정당이 활동하는 외부 환경과 연결돼 있다. 개혁주의 정당과 혁명적 당 모두 자본주의의 제약을 받으며 작동하지만, 그 제약에 대처하는 방식은 꽤나 다르다. 이 맥락에서는 지도라는 문제가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개혁주의 정당은 (노동조합과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의 다수에서 당원을 충원하는데, 그들은 다양한 정도로 자본주의의 사상을 받아들인다. 상층 간부는 기층 당원들을 대신해[지배자들에게서]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 그 중 하나다. 이 때문에 개혁주의 정당의 기층 당원들은 수동적으로 되고, 지도자들이 능동적 주체가 된다. 개혁주의 정당의 지도자들은 자본가와 기층 당원 사이를 후자의 제약 없이 중재하거나, 특혜와 고소득에 넘어가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된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평당원들에서 동떨어지게 되며, 인격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타락하기 쉬워진다.
레닌주의 정당 모델은 아주 다르다. 레닌주의 정당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아니라 사상, 혁명적 목적, 주변 환경 사이의 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혁명적 당은 다수 계급이 사회를 지배하게 나서도록 설득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만, 보통 때는 계급의 정치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부분만이 참여하는 소수 정당이다. 그래서 혁명적 당은 계급의 전위로서 행동하고자 하며, 노동계급 내 개혁주의적인 다수를 설득하고자 한다. 소수 정당으로서 이런 과제를 수행하려면 혁명적 당은 급진적 주장을 펴고 대안적 행동을 제안해야 한다. 다시 말해, 지도해야 한다. 따라서 혁명적 당은 모든 당원이 지도자가 되도록 애써야 한다. 이런 점에서 ‘지도자-지지자’라는 흔한 이분법은 혁명적 당에는 들어맞지 않으며, “당 중앙”과 기층 당원이 기술적 분업을 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옳다.
[혁명적 당의] 중앙은 능력 있다고 입증되고, 특정한 이론적·실천적 경험을 당에 기여할 수 있고, 조직에서 중심적 구실을 할 시간과 기회가 있는 등의 조건을 갖춘 당원으로 이뤄지기 쉽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혁명적 당의 중앙은 국회의원이나 노조 위원장과 달리 기층과 동떨어져 있지 않는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실제 통치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숨기려고 선거와 대의제를 물신화한다. 혁명적 당은 그럴 필요가 없다. 혁명적 당은 존재 자체가 목적도 아니고, 투표로 자신의 의사를 표출하는 것으로 순간적인 만족감을 느끼라고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혁명적 당은 사회 변혁이라는 특정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혁명적 당의 내부 절차는 그 목적 달성을 돕기 위한 것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혁명적 당의 당원들은 중앙이 자신들을 대신해 행동해 주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려서는 안 되는 동시에, 중앙도 당원들이 수동화되는 것에서 득을 보지 못한다. 당원이 모두 지도자가 되려면, 중앙과 기층의 관계가 역동적이고 상호적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혁명적 당은 관료적으로 타락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규약이 아니라 정치적 행동이다. 다른 경우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내부 구조와 외부 맥락의 관계가 중요하다.
혁명적 당은 현재로서는 자신보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개입하고자 하므로 주로 노동계급의 개혁주의적 다수에 자신을 노출시킨다. 따라서 혁명적 당에 가입했다고 개혁주의에 타협할 위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혁명적 당의 당원이 노동조합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을 수 있는데, 그럴 경우 그들은 다른 관료들이 가하는 압박을 받는다. 또한 당원들이 처음에는 혁명적 태도로 활동을 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굴복할 수도 있다. 혁명가들은 개혁주의 조직의 구성원들과 공동으로 운동을 벌이며 함께 일해야 하는데, 이[공동전선] 과정에서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향을 더 크게 받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혁명적 당은 이런 우경화 압력을 차단해야 진정한 민주주의 쟁취라는 이상에 충실할 수 있다. 따라서 당내 민주주의의 주된 기능은 혁명적 사상을 굳건히 해서 당원들이 타협 압력에 굴복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러려면 당 전체가 — 중앙과 기층이 모두 — 자신의 행동과 정치에 책임을 져야 한다. 개혁주의 정당에는 책임이라는 것이 없다. 당원들은 후진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유지할 수 있고 지도자들은 원칙을 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혁주의 정당에서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러시아의 멘셰비키는 원래 볼셰비키와 같은 당(러시아 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에 있었지만 이 책임 문제를 두고 볼셰비키와 분열했다. 멘셰비키는 그런 책임이 불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볼셰비키가 [혁명을 이끌어] 민주주의를 대폭 전진시켰을 때, 멘셰비키는 내전에서 백군 편에 서서 그런 성과를 파괴하려 했다.
우경화 압력에 맞서는 와중에 당은 종파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정반대의 위험도 겪는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혁명가들은 항상 시류를 거스른다. 그래서 노동계급과 중요하고 유용한 상호작용을 하기를 포기하고 그보다 더 안락한 고립 상태에 빠져들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그리 되면 당은 계급을 지도하는 게 아니라 한 켠에 비껴 서서 계급에 설교나 하는 처지가 된다. 과거에 많은 사회주의 정당이 이런 운명을 받아들였다. 종파는 내부 체제가 경직돼 있고 민주적 토론이 부족한 경향이 있는데, (지도부와 기층이 모두) 변치 않는 추상적 신조와 전략을 계속 되뇌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져올 유일한 수단인 혁명은, 현실과 동떨어진 신조를 통해서가 아니라 노동계급 안에서 지도력을 쟁취하고자 끊임없이 시험을 거치고, 발전하고, 정보를 얻어야만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혁명적 당은 자본주의라는 환경에 순응하라는 압박에 맞서 당을 보호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투쟁에 개입하며 당을 노출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혁명적 당은 그에 맞는 내부 구조를 갖춰야 한다. 즉, 노동계급 속에서 투쟁을 이끌려고 분투하는 과정에서 당원들이 겪는 경험을 반영하고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하는 내부 구조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민주적 중앙집권제”다. 민주적 중앙집권제는 노동자 국가나 소비에트 같은 대중 민주주의의 모습을 미리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위해 평생 헌신하다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게 목숨을 잃은 트로츠키는 민주적 중앙집권제가 규약에 있는 일련의 조항들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민주적 중앙집권제에 관한 오해와 잘못된 해석을 “한 번에 모두” 없앨 공식은 [없다. — 글룩스타인] 당은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다. 당은 외부 장애물 및 내부 모순과의 투쟁 속에서 발전한다. … 당의 체제는 완성된 상태로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투쟁 속에서 점진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당의 형태보다 당의 정치적 노선이 훨씬 더 중요하다. 무엇보다 전략적 문제들과 전술적 수단들을 올바로 규정해야 한다. 조직 형태는 전략·전술에 조응해야 한다.
이 말이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혁명적 당의 내부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서 핵심은 당의 외부 상황에 대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지향이다. 당 밖에 개입을 잘 하려면 두 가지를 잘 해야 한다. 전략의 수립과 전략의 적용이다. 레닌은 그 둘의 균형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운동에 대한 지도를 중앙집권화해야 한다. 또, 우리는 … 당에 대한 책임을 분권화해서 개별 당원, 당 업무 수행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 당에 속하거나 연관 맺고 있는 모든 서클이 더 많은 권한도 갖도록 해야 한다. 이런 분권화는 혁명적 중앙집권제에 대한 필수적 전제 조건이자 필수적 교정 장치다.
민주적 중앙집권제는 당 내부 문제만을 위해서만 필요한 게 아니다. 당 내부 차원뿐 아니라 노동계급 전체 차원에서 모두, 지배계급의 비민주적 중앙집권제에 맞서기 위한 필수 요소다.
어떤 민주주의 가면을 쓰든지 간에 소수 착취자인 자본가들은 다수를 지배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제에 기댄다. 자본주의 국가는 매우 중앙집권적이며, 군대와 경찰 같은 강압적 무기가 그것을 가장 잘 드러낸다. 이런 기구는 최하층 병사부터 최상층 장성으로 이뤄진 엄격하고 선출되지 않고 [지휘부에]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위계 질서를 통해 권력을 집중시킨다. 마찬가지로, 대기업들도 엄청난 중앙집권제를 보인다. 예컨대 2007년 월마트·엑손·쉘의 규모는 각각 그리스 경제 전체와 맞먹었으며, 덴마크·아르헨티나·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의 경제보다 컸다.
이렇게 엄청나게 집중된 힘에 맞서 싸우고자 한다면 노동계급은 자신의 힘을 집중해야 한다. 개별적으로는 이런 집중을 이룰 수가 없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이런 과정에 동참해야 하고, 따라서 그 과정은 민주적이어야 한다. 추상적 의미에서든 실천적 의미에서든 민주주의와 중앙집권제는 모순되는 동시에 보완적이다.
혁명적 당의 민주적 중앙집권제는 말로 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최선책을 찾기 위해 민주적으로 토론하는 데만 시간을 쓴다면, 그 당은 [혁명적 당이라는] 이름값을 못 하고 현실에서 동떨어진 수다 클럽이자 종파로 전락할 것이다. 결정 사항을 실행하는 데만 힘쓰고 변하는 상황에 비춰 결정 사항을 수정하지 않는다면, 그 당은 그 시기에 필요한 일들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 역시 종파로 전락하는 길이다. 적절한 균형을 반드시 유지해야 한다. 물론 그 균형은 끊임없이 바뀐다.
트로츠키는 이 주제에 관해 1937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민주주의와 중앙집권제 사이의 불변의 비율 같은 것은 결코 없다. 모든 것은 구체적 상황, 그 나라의 정치 정세, 당의 세력과 경험, 당원들의 일반적 수준, 지도부가 획득한 권위에 따라 달라진다. 당대회 전, 즉 다음 시기를 위한 정치 노선을 정하는 것이 문제일 때는 민주주의가 중앙집권제보다 우선한다. [그러나] 정치적 행동이 문제일 때 민주주의는 중앙집권제에 종속된다. 당이 자신의 실천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성을 느낄 때는 다시 민주주의가 자기 권리를 주장한다. 민주주의와 중앙집권제 사이의 균형은 현실의 투쟁 속에서 자리 잡는다. 때때로 그 균형은 깨지고 다시 형성된다.
혁명적 당의 민주적 중앙집권제는 가장 자유롭고 가장 공정한 의회 제도에서 일어나는 일과 정반대다. 부자·권력자·국가·군대·사법부·입법부의 중앙집권제는 민주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지배계급을 보호하기 위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결론
피지도자를 분리시킨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이 요소들을 모두 변증법적으로 통일하고, 다수에 의한 집단적 지배와 인류 해방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77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구체적인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민주주의를 말하는 경우가 흔하다. 나는 그것이 심각한 오류이며, 서로 다른 유형의 민주주의를 언제나 구분해서 말해야 의미 있는 논의가 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했다. 자본가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자본주의의 민주주의는 언제나 내용과 형식을, 대표자와 통치를, 데모스(demos)와 크라테이(kratei)를, 지도자와현재 자본주의가 겪는 위기는 민주주의를 믿는 사람들에게 유례 없는 과제를 제기하고 있다. 금융시장과 기업이 가하는 압박 탓에 곳곳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허위이고 피상적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동시에, 저항의 물결도 일고 있다. 저항 운동은 여러 형태를 띨 것이다. 그러나 그 형태가 총파업이든, 대중 혁명이든, ‘점거하라’ 같은 대중 운동이든, 사회를 집단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대중의 의지가 그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대의 그리스에서 현재의 그리스에 이르는 민주주의의 역사는 대중이 진정으로 사회를 지배할 잠재력이 있음을 보여 준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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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Donny Gluckstein, Democracy: fact and fetish, International Socialism, 136(Autumn 2012)
↩
- Miliband, 2004, p68. ↩
- Lenin, 1976, p22. ↩
- Howard, 1971, p84. ↩
- Ober, 1996, p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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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vies, 2004, p18. ↩
- Jones, 1969, p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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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e Croix, 1983, p141. ↩
- Wood, 1988, p43. ↩
- Meiggs, 1972, p439. ↩
- Claster, 1967, p44에서 재인용. ↩
- Meiggs, 1972, p264에서 재인용. ↩
- Meiggs, 1972, p258. ↩
- Ma, Papazarkadas and Parker, 2009, p215. ↩
- Jones, 1969, p131. ↩
- Ober, 1996, p90. ↩
- Jones, 1969, pp91-92. ↩
- Molyneux, 2012. ↩
- Bémont, 1930, p231. ↩
- Bémont, 1930, p216. ↩
- Bémont, 1930, p227. ↩
- 1,170,400명 중 212,200명 — Morton, 1979, p212. ↩
- Manning, 1976, pp152-153. ↩
- Manning, 1976, p96. ↩
- Manning, 1976, p98. ↩
- Manning, 1976, p109에서 재인용. ↩
- Hill, 1972, p63에서 재인용. ↩
- Manning, 1976, p216에서 재인용한 존 호섬(John Hotham)의 말. 호섬 부자는 원래 요크셔에서 왕에 맞선 중심적 구실을 했지만, 평화가 이뤄지지 않자 왕당파 쪽으로 넘어갔다. ↩
- Hill, 1972, p71에서 재인용. ↩
- Foot, 2005, p28에서 재인용. ↩
- Foot, 2005, p28. ↩
- 수평파가 모든 남성을 포함하는 보통 선거를 요구했는지, “중간 부류”만을 대상으로 한 선거를 요구했는지는 논쟁이 있다. 폴 풋(Foot, 2005)과 A L 모튼(Morton, 1979)은 전자라고 주장한다. 브라이언 매닝은 이견을 제시한다. “수평파는 자신들이 살던 가부장제 사회의 전제들에 도전하지 않았다. 투표는 가구 단위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었고, 이는 남성 가장이 자신의 하인과 견습생, 아내와 아이들을 대신해 투표하는 것이었다.”(Manning, 1976, p311). 어떤 점에서 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간 부류”는 진정으로 자신들의 이익이 보편적이라 믿었는데, 하층 계급과 여성이 자신들의 염원을 명료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시기에 이는 타당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혁명이 낳은 여러 가능성을 보여 주는 다른 징표도 있었다. 예를 들어, 디거파(The Diggers, 공유지를 경작하던 빈민이라는 뜻)는 수평파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갔고 토지의 공동 소유를 주장했다. 프랑스 혁명 기간에도 앙라제(engragé), 바뵈프의 “평등파의 음모” 등이 비슷한 종류의 급진적 강령을 제시했다. ↩
- Hill, 1972, p105에서 재인용. ↩
- Aylmer, 1963, p162. ↩
- Foot, 2005, p72에서 재인용. ↩
- Bronterre O’Brien, Foot, 2005, p96에서 재인용. ↩
- Foot, 2005, p137에서 재인용. ↩
- Foot, 2005, p236. ↩
- Trotsky, 1974, volume 1, pp21-22. ↩
- Cliff and Gluckstein, 1988, p382. ↩
- Lenin, 1993, pp67-68. ↩
- Thyssen, 1941, p62. ↩
-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말한 보나파르티즘도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어떻게 부르주아가 위기의 특정 국면에서 직접 통치하기를 자발적으로 포기하는지를 설명한다. ↩
- Marx and Engels, 1976, p495. ↩
- Kapp, 1976, p323. ↩
- The Miners’ Next Step, 1973, p30. ↩
- The Miners’ Next Step, 1973, p15. ↩
- The Miners’ Next Step, 1973, p30. ↩
- The Miners’ Next Step, 1973, p31. ↩
- The Miners’ Next Step, 1973, p30. ↩
- Murphy, 1972, pp13-14. ↩
- Murphy, 1972, p18. ↩
- Murphy, 1972, pp14-15. ↩
- Cliff and Gluckstein, 1986, p34에서 재인용. ↩
- Margaret Thatcher, Hansard, House of Commons debate, 11 February 1982. ↩
- John Browne (Tory MP for Winchester) in Hansard, House of Commons debate, 22 April 1980. ↩
- Simons, 2004, pp9-10. ↩
- Cliff, Harman, Hallas and Trotsky, 1996. ↩
- 아나키즘의 정당 조직 비판과 그 비판의 약점을 다룬 논의로는 Molyneux, 2011을 보시오. ↩
- Ness and Azzelini, 2011을 보시오. ↩
- Trotsky, 1974, volume 3, p185. ↩
- Lenin, 1964, volume 26, p334. ↩
- Service, 1997, p94. ↩
- Service, 1997, p97. ↩
- Service, 1997, p97. ↩
-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Harman, 1986을 보시오. ↩
- Kritsman, 1971, p257. ↩
- Cliff, 1978, p90. ↩
- Cliff, 1978, p178. ↩
- 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52/18th-brumaire/ch01.htm ↩
- 강조는 나의 것.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 설립 이전인 1937년 12월 미국 내부 회보에서.(www.marxists.org/archive/trotsky/1937/xx/democent.htm) ↩
- Cliff, 1975, p249. ↩
- www.marxists.org/archive/trotsky/1937/xx/democent.htm ↩
- 이것은 몽테스키외가 프랑스 혁명 전에 발전시킨 “3권분립”이라는 고전적 개념과 대비된다.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에서 파리 코뮌이 입법과 집행을 통합한 것을 두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특징이라고 찬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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