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좌파가 저지를 수 있는 오류들
사회주의 정치는 선전으로 환원될 수 없다 *
마르크스주의는 흔히 말하듯 실천 활동 길잡이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노동자 중 소수조차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길잡이 구실을 받아들일 태세가 돼 있지 않은 조건에서 활동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은 영국에서도 오랫동안 존재했다. 영국은 역사유물론의 창시자들[마르크스와 엥겔스]이 정치 활동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인데도 그들의 사상에 대한 반감이 유럽의 주요 나라 가운데 가장 큰 곳이기도 하다. 나는 이 글에서 그런 상황이 벌어진 이유를 다루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이 영국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다루고자 한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영향력이 노동계급의 극소수에게만 한정되는 상황에서 마르크스주의 조직들은 교조적 종파가 되기 십상이다. 특히, 자본주의에서 계급투쟁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으로 나뉘는 내재적 경향 때문에 그러기가 더 쉽다. 이런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분리를 토대로 개혁주의가 싹튼다. 개혁주의는 노동자들의 조건을 개선(특히 경제 영역에서)하려 하지만, 자본가 계급의 지배 자체에 도전하는 것은 일절 회피한다.
이런 개혁주의 관료의 행태와 대칭을 이루는 사회주의자들이 일부 있다. 방금 앞에서 말했듯이 노동계급의 일상 투쟁이 대체로 정치와 경제를 분리된 것으로 전제한다는 이유로, 노동자 일상 투쟁에 개입하는 것을 깔보는 경향이다. 이런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인즉 이렇다. 특히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사회에 통합돼 변질했으므로 혁명적 전략을 효과적으로 추구하려면 노동조합 바깥에서 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이러저러한 일부 측면과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전체와 대결하는 것이 혁명적 전략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노동자 대중이 자본주의적 사상과 단절하기 전까지는, 대중 투쟁이 지배계급에 맞선 만만찮은 도전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따라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패퇴시킬 방편으로써 사회주의적 사상을 선전하는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이 과업을 완수하기도 전에 자잘한 투쟁에 개입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 아니라 오히려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사회를 받아들이는 성향과 정치·경제의 분리 경향을 혁명가들이 강화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선전주의라고 부르고자 하는 이런 경향은 특히 영국에서 영향력이 강하다. 영국에서는 혁명적 좌파가 비교적 약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에서 여러 형태의 선전주의가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 주고자 한다. 또한 혁명가뿐 아니라 개혁주의자도 선전주의 경향을 보일 수 있음을 드러낼 것이다.
마르크스·엥겔스와 공상적 사회주의
마르크스·엥겔스와 걸출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샤를 푸리에, 로버트 오언, 1840년대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의 관계 문제는 매우 복잡하므로 이 글에서 충분히 다루기는 힘들다. 헤겔의 훌륭한 제자들답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미래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의 청사진과 기존 현실을 대립시키는 것을 헛수고로 보고 거부했다. 그런 모델은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가 어떤 조건에서 가능할지를 무시한 채 제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부르주아 문명을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것보다 더 유익한 일일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내가 다루려는 문제와 관련해 이것이 핵심은 아니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과 마르크스의 근본적 차이는 사회 변화에 대한 견해에 있었다. 푸리에와 생시몽은 크게 보아 계몽주의의 후예였다. 디드로·엘베티우스·콩도르세 같은 걸출한 계몽주의자들처럼 푸리에와 생시몽은 인간 본성을 사회 편제 방식과 관계 없이 유지되는 일단의 성향들로 보고 현재 질서에서는 그것이 온전히 발현될 수 없다고 봤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18세기 계몽주의자들과 다른 점도 있었다. 첫째,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인간 본성을 이기심과 사리사욕뿐 아니라 협동심과 인정人情도 포함하는 것으로 넓게 이해했다. 둘째,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계몽주의자들과 달리 옛 봉건 질서가 아니라 사적 소유와 경쟁을 바탕으로 한 사회가 모두 억압의 원천이라고 봤다. 그리고 인간은 생산수단을 집단으로 소유하고 지배하는 사회에서만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사상 투쟁의 결과로 사회 변화가 일어난다고 봤다. 그들은 역사를 “인간 정신의 진보”(콩도르세의 표현)로, 곧 점진적 계몽 과정으로 봤다. 그 과정에서 (자본가를 포함한) 사람들이 사회주의가 자기에게 이익이 됨을 깨닫게 된다. 대중 투쟁과 무장봉기는 필요하지 않고 오히려 해로울 수 있고, [사회주의] 사상을 퍼뜨리면 충분히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을 사회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취급했다. “노동 빈민”이 겪는 곤경은 동정할 만한 것이고 그들의 처지를 바꾸는 것이 사회주의의 목표다. 하지만 그 변화가 노동자들의 자체 해방 과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게 꽤나 낯선 것이었다. 심지어 바뵈프나 블랑키처럼 혁명적인 공상적 사회주의자조차 봉기를 음모적으로 조직한 극소수가 대중을 대신해 벌이는 것으로 여겼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쓸 때 염두에 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환경과 교육의 변화에 관한 유물론의 교의는 인간이 환경을 바꾸고 교육자 자신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교의는 사회를 두 부분으로 나눠, 그 중 한 부분을 다른 부분보다 우월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해,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사람들이 보이는 개인주의적이고 공격적인 행태를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라고 간단히 설명해 버리는 동시에 자신들은 그 조건에서 벗어나 있다고 본 것이다. 자신들은 기존 계급 관계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그 계급 관계를 해체할 사회주의 사상의 전달자라는 것이다.
2 변화는 계급투쟁을 통해 일어나며, 이 계급투쟁의 성격과 형태는 그 사회에서 우세한 생산관계가 결정한다. 게다가 이런 투쟁에 참여함으로써 사람들의 관념이 변하고, 바로 이 점이 내가 이 글에서 말하려는 핵심이기도 하다. 계급투쟁이 노동자 자신을 바꾸므로 사회 변혁이 가능하다는 것을 봐야만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을 어려움에 빠뜨린 역설을 해소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를 ‘실천 철학’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혁명적 실천을 통해서만 환경 변화와 함께 인간 활동의 변화나 자기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사회 변화를 공상적 사회주의자들과 비슷한 관점으로 바라본 청년 헤겔파를 겨냥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와 《독일 이데올로기》는 역사유물론의 출발점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인즉, 간략히 말해 인간 본성은 고정 불변의 성향이 아니라 사회적 노동을 통해 환경에 적응하며 환경을 바꾸는 인간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노동 과정은 언제나 사회적 생산관계의 틀 안에서 조직되고 다른 모든 사회 활동의 토대다. 또한 인간은 노동 과정을 통해 자연과 사회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자신도 변화시킨다. 다시 한 번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인용해 보자. “인간의 본질은 개별 인간에 내재해 있는 추상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다.”이러한 사회 변화 개념은 두 가지 중요한 결과를 낳는다. 첫째, 사회주의를 노동계급의 자체 해방으로 이해한다. 사회주의는 깨우친 소수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대중이 스스로 행동해야 성취할 수 있다. 둘째, 사회주의자들의 임무는 단지 사상을 선전하거나 봉기를 준비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람들의 세계관이 오직 투쟁 속에서만 바뀔 수 있다면 혁명가들은 노동계급이 나날이 벌이는 투쟁에 개입해야 한다.
영국 선전주의의 기원
4 1895년 영국 혁명적 좌파의 상태를 보며 엥겔스가 한 말이다. 영국이 산업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고, 노동조합이 주로 직업별로 조직돼 있고, 노조가 정치적으로 자유당에 종속돼 있는 등의 이유로 이 나라에서는 20세기 초까지 (그것이 설령 개혁주의라 하더라도)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노동운동이 출현하지 못했다. 마르크스주의를 따른다고 자처한 조직들이 이런 상황에 대처한 방식은 엥겔스의 말을 빌리면 이랬다. “마르크스주의 발전 이론을 하나의 경직된 교의로 환원해, 노동자들 자신의 계급의식의 결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계급의식의 발전 과정 없이 하나의 신조信條처럼 단번에 주입시키려 했다.” 5
“종파만 있을 뿐, 당은 없다.”제1차세계대전 개전 이전 영국에서 가장 중요했던 마르크스주의 단체이자 엥겔스가 앞의 말을 할 때 중요하게 염두에 둔 조직은 사회민주연맹이었다. 사회민주연맹은 1880년에 결성된 민주연맹으로 출범했고, 1884년에 선명한 사회주의적 강령을 채택했지만, 창립자 헨리 M 하인드먼의 기이한 성향을 따라 그 단체의 정치는 뒤틀려 있었다. 하인드먼은 마르크스주의에서 급진적인 부분을 제거했을 뿐 아니라 민족주의와 유대인 배척 같은 편견에 찬 보수당계 기업인이었다. 영국 사회당British Socialist Party(1912년 사회민주연맹이 채택한 당명)의 다수가 자신의 전쟁 지지 정책을 거부하자 하인드먼은 자신의 그런 편견을 좇아 1916년에 국민사회당을 결성했다.
6 이러한 태도는 노동계급의 대중 조직들을 경멸할 때도 어김없이 드러났다. 1897년 그는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조직을 건설하는 데 노동조합은 사실 … 걸림돌이다.” 7
하인드먼은 한평생 노동자들에게 완전히 적대적이었다. 1900년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일반으로 이 나라 노동자들이, 그리고 특히 우리 당의 노동자들이 매우매우 역겹다고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다. 우리처럼 교양 있는 계층에 속한 능력 있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봉사해야 할 이유가 하등 없다. 그것은 인생 낭비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희생하거나 그들을 걱정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8 당시 엥겔스는 편지를 쓰며 영국과 미국의 혁명가들이 노동자들의 대중 투쟁과 관계를 맺지 못하는 상황과 그들이 노동자들의 현재 의식과 사회주의 강령을 그저 대립시키기만 하는 경향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엥겔스가 미국 상황을 다루며 쓴 편지의 두 문단을 보면, 그가 이 문제를 어떻게 봤는지 잘 알 수 있다.
사회민주연맹은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고(하인드먼은 하이드파크에 정기적으로 가서 연설을 했는데 그때마다 중산모를 쓰고 프록코트를 입고 나갔다), 지방선거와 총선에 후보를 내는 등 선전 단체로 활동했다. 사회민주연맹의 내부 구조는 지리적 편제를 따랐는데, 이것은 사회민주연맹이 노동자 투쟁에 개입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 결과, 사회민주연맹은 신노동조합운동[기존 직업별 노동조합의 부문주의에 도전한 노동운동 내 진취적 흐름]이 출현한 1889년과 그 이후의 운동 고양기에 수많은 비숙련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조직 노동자 운동 속으로 빨려 들어왔지만 이에 별 관심이 없었다.(비록 [신노동조합운동의 대표적 부문인]가스 노동자들의 지도자이자 일반지방공무원노조의 창립자 윌 손 등 일부 회원이 개인으로서 이 고양기에 중심적 구실을 했지만 말이다.) 이런 행태에 엥겔스는 큰 분노와 반감을 느꼈다.게다가 엥겔스는 노동조합을 결코 노동계급 발전의 장애물로 보지 않았다. 1875년 독일 사민당이 채택한 고타 강령을 비판하며 엥겔스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 오류와 누락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노동조합이라는 수단으로 노동계급을 계급으로 조직하는 것에 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것은 매우 치명적인 문제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은 프롤레타리아가 그 안에서 자본에 맞서 나날이 투쟁을 벌이고, 자신을 단련하고, 오늘날 최악의 반동적 시기에조차 … 결코 쉽게 파괴되지 않는 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계급 조직이기 때문이다.”대중은 발전하려면 시간과 기회가 필요하다. 대중은 스스로 운동을 펼칠 때만 그런 기회를 갖는다. 그 운동이 그들의 운동인 한 그 형태는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자신의 운동 속에서 대중은 자신의 오류에서 동력을 얻고 자신의 경험에서 배운다. … 독일인들[1930년대까지도 미국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부분 독일이나 러시아 출신이었다 — 캘리니코스]이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이론대로(우리가 1845년과 1848년에 이해한 바와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면) 행동하는 것이다. 즉, 현실에 존재하는 보통의 노동계급 운동 속으로 들어가 그 운동의 현재 모습을 출발점으로 받아들이고, 운동이 겪은 모든 오류와 좌절이 어째서 기존 강령의 잘못된 이론에서 비롯한 필연적 결과인지를 지적함으로써 그 운동을 이론적 수준으로까지 점차 끌어올려야 한다.
따라서 1884년 12월 윌리엄 모리스, 밸포트 박스, 엘리너 마르크스, 에드워드 에이블링 등 여러 사회민주연맹 회원이 떨어져나와 사회주의자동맹을 결성하기로 한 결정을 엥겔스가 지지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 분열도 진정한 새 출발은 아니었다. 영국에서 엥겔스의 가장 긴밀한 조력자였던 엘리너 마르크스와 에이블링이 곧 사회주의자동맹에서 이탈했는데 주된 이유는 아나키스들이 사회주의자동맹으로 침투했기 때문이다. 모리스는 총선에서 후보를 내지 말아야 한다는 아니키스트들의 입장을 지지했다.(다른 쟁점에서는 아나키스트들과 견해가 달랐지만)
사회주의자동맹은 하인드먼의 선전주의와 절연하지 못했다. 사회주의자동맹의 창립자들이 사회민주연맹을 나오며 발표한 성명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의 관점은 이렇다. 현재 상황에서 그런 기구가 하는 기능은 오직 인민에게 사회주의 원칙을 교육하는 것밖에 없다. 그런 기구를 결성하는 것은 [자본주의의]위기가 닥쳐 우리가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을 때가 도래하면 마땅히 짊어져야 할 책임을 수행하기 위함이다.
12 사회주의자동맹은 신노동조합운동으로 이어진 투쟁들에 전혀 조직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1890년 3월 윌리엄 모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모리스의 정치가 확연히 드러나는 대목은 사회주의자동맹의 과제가 “사회주의자 만들기”라고 주장하고, 임금 인상 같은 “일시적” 조처에 반감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1890년 엥겔스는 이렇게 불만을 토로했다. “(사회주의자동맹은) 직접적으로 혁명적이지 않은 것은 모두 깔본다. 그들은 문구를 만드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만이 직접적으로 혁명적이라고 여긴다.”사회주의가 확산되고 있다. 내 보기로 그것은 사회주의가 확산될 수 있는 유일한 방향을 따랐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런 흐름 바깥에 있다는 단순한 이유로 사회주의자동맹은 사멸 상태에 놓였고, 나는 [사회주의자동맹을 떠나] 그 방향에 함께해야 한다. … 이 실패의 주요 원인은 … 어느 기구든 해야 할 일이 없으면 유지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이 사회주의 사상을 기꺼이 듣고자 하므로 우리의 평회원들은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영국 좌파의 특징이었던 이러한 수동적 자제의 영향을 가장 덜 받은 혁명가 두 명은 엘리너 마르크스와 에드워드 에이블링이었다. 그들은 1880년대와 1890년대의 대규모 투쟁(가스 노동자들의 쟁의, 항운 노동자들의 파업, 실버타운 고무공장 파업, 금속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 투쟁)에 적극 참여했다.
불행히도 이는 예외적인 것이었지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 점은 제1차세계대전 개전 이전 사회민주연맹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중요한 분열로 잘 알 수 있다. 첫 번째 분열은 1903년에 일어났는데, 그 결과 압도적으로 스코틀랜드에 기반을 둔 사회노동당이 설립됐다. 사회노동당은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하인드먼의 타협적 태도에 근본적으로 반대한 원칙 있는 혁명가들의 정당이었다. 사회노동당이 사회민주연맹보다 상당히 진일보한 조직이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회노동당의 이론가 윌리엄 폴은 자본주의 국가를 파괴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한편, “자본의 노동계 부관들”에게 매우 적대적이면서도 생산 현장에서 벌이는 투쟁을 매우 중요하게 봤다. 사회노동당은 미국 마르크스주의자 대니얼 들리옹의 견해를 좇아서 산별노조를 결성해 기존의 기업별 노조 체계를 대체하자고 주장했다. 사회노동당은 산별노조가 지금 당장 자본주의와 투쟁하는 수단이 되는 동시에 미래 노동자 국가의 초석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노동당이 선전주의와 절연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은 원칙적 순수성을 매우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노동계급 운동의 현재 상태와 자신들이 건설하고자 한 산별노조를 연결시킬 전략을 아무것도 발전시키지 않으면서, 자신들이 만든 ‘영국 산업 노동자’라는 조직을 기존 조직들과 대비시키기만 했다. 이처럼, 사회노동당의 당원 개인들은 1904년 직전 몇 년 동안 일어난 노동쟁의와 제1차세계대전 와중에 일어난 직장위원 운동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음에도 하나의 조직으로서는 선전 단체로 활동했고 사회주의 사상을 확신시키는 데서는 뛰어났지만 다른 조직들에 대해서는 매우 종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이전에 영국 좌파가 모두 보이던 선전주의 경향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의심할 바 없이 1904년 사회민주연맹에서 분열해 나와 결성한 대영제국 사회당Socialist Party of Great Britain이었다. 대영제국 사회당은 자본주의 국가 타도를 당면 목표로 삼지 않는 투쟁을 모두 완전히 헛된 일이라고 설교했다. 대영제국 사회당 당원 가운데는 노동조합원도 있었는데, 그들이 노동조합원으로서 하는 활동은 사회주의자로서 하는 활동과 아무 관련이 없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시도를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로 봤기 때문이다. 대영제국 사회당의 임무는 거리 연설에서, 자신들의 기관지 〈소셜리스트 스탠다드〉[사회주의적 표준]에서, 선거 유세에서 단순하고 순수하게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것이다. 대영제국 사회당은 선전주의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였고, 노동계급의 일상 투쟁 속으로 들어가 자기 손을 더럽힐 태세가 돼 있지 않은 조직은 필연적으로 있으나마나 한 조직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생생히 보여 줬다.
레닌, 그람시, 코민테른
앞에서 나는 1914년 이전 영국의 혁명적 좌파를 비판하며 엥겔스를 기준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당과 계급에 관한 엥겔스의 견해에는 한 가지 중대한 약점이 있었다. 그 약점은 혁명적 계급의식이 자발적으로 발전한다고 보는 경향(마르크스도 공유한 경향)이 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엥겔스는 1886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중요한 것은 노동계급을 계급으로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일단 이것을 실현하면 그들은 곧 올바른 방향을 발견할 것이다. 여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 모두 외톨이 소종파로 남겨질 것이다.이 인용문과 이와 비슷한 내용의 다른 글들을 보면,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들이 어느 정도는 역사 과정의 논리 덕분에 노동계급이 사회주의 의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17 엘리너와 에이블링은 1890년대 후반에 대수롭지 않게 사회민주연맹에 다시 가입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들의 활동이 특정 단체의 틀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활동은 사회주의를 향한 대중의 자발적이고 본능적인 충동을 고무하는 것이라고 여긴 듯하다. 18
이런 생각은 여러 사상가의 당 이론에도 깔려 있었다. 카우츠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운동 법칙 덕분에 혁명이 “자연적 필연성”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봤고, 로자 룩셈부르크는 계급의 대중 투쟁에서 혁명적 의식이 생겨나는 것은 시간이 걸리지만 필연적인 것이라고 봤다. 그들이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였던 것을 보면, 왜 엘리너 마르크스와 에드워드 에이블링이 노동자 투쟁에 체계적으로 개입할 조직을 건설하려 하지 않고 노동운동에 주로 개인으로 참여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이 사회주의자동맹의 잡지 《커먼윌》[공공 복지]에서 사임한 것(엥겔스는 이를 완전히 지지했다) 때문에 사회주의자동맹이 처음부터 실패할 운명이었다는 E P 톰슨의 주장은 아마도 옳은 듯하다.레닌이 마르크스주의에 크게 기여한 것 하나는 의식이 투쟁 경험을 통해 바뀌고, 따라서 혁명가들은 프롤레타리아의 일상 투쟁에 관여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통찰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노동계급이 자동으로 사회주의 쪽으로 이끌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한 것이다. 그는 선전과 선동을 둘 다 수행해야 하고 계급투쟁에 체계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편제된 당만이 혁명적 의식을 형성하는 데서 촉매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을 끌어냈다. 이 말은 혁명가들이 노동자들의 자발적 투쟁을 무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혁명가들이 그 투쟁에 참가해야 하지만, 혁명적 당이 없으면 그런 투쟁이 성공적 결말, 즉 정치 권력 장악에 이르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그런 당은 혁명적 사회주의를 확고하고 비타협적으로 고수하는(그래서 개혁주의와 중간주의가 발 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동시에, 객관적 상황의 변화, 특히 “살아 있는 운동”의 변화에 조응할 수 있도록 전술적으로 충분히 신축성 있어야 한다. 두 과제를 수행하려면 그런 당은 세 가지 특징이 필요하다. 현실의 변화를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는 과학적 분석력, 당이 대중 투쟁에 참가해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만큼 계급 속에 뿌리를 깊이 내림, 객관적 상황을 민주적으로 평가한 것에 근거해 내린 결정이 체계적으로 실행될 수 있는 조직 구조.
20 코민테른의 초기 시절은 혁명적 당(사회주의를 설파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노동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상 투쟁에 개입해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는 당)을 건설하려고 가장 만만찮게 노력한 시기였다.
이 새로운 당 모델은 1917년, 실천에서 효율성을 입증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창립은 혁명을 서유럽으로 확산시켰을 뿐 아니라 러시아 경험의 교훈을 일반화하려 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노력을 보여 준다. 이 노력의 한계와 결함이 무엇이었든(그 한계와 결함은 꽤 컸다), 당연히 레닌은 ‘좌파’ 공산당원들이 노동조합에 개입하거나 선거에 후보 내기를 거부한 것을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영국에서 이런 경향을 대표한 인물은 윌리 갤러거(사회노동당 당원)와 실비아 팽크허스트다. 《‘좌파’ 공산주의 — 유치증》은 혁명가들이 노동계급 대중의 커다란 지지를 얻을 수 있음을 입증하려 한 레닌의 가장 체계적인 시도였다. 혁명가들은 “프롤레타리아나 반半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있는 기구, 단체, 협회들에서(심지어는 가장 반동적인 곳에서도) 체계적으로, 끈기 있게, 집요하게, 참을성 있게 선전과 선동을 해야” 한다. 나아가 노동계급을 혁명 쪽으로 이끌려면 “선전과 선동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 대중이 스스로 정치적 경험을 해야 가능하다. 이것이 모든 위대한 혁명의 기본 법칙이다.”22 혁명적 당에 관한 이러한 개념을 기초로 1921년 코민테른 제3차 대회는 공동전선 전술을 강조했다. 공동전선은 공산주의자들이 제한된 요구를 중심으로 개혁주의의 영향을 받는 노동자들과 함께 싸울 수단이면서, 혁명가들의 지도력을 실천에서 입증하는 동시에, 노동자 대중에게 부분적 투쟁의 교훈을 이끌어내 줄 수단이다.
그러므로 어떤 당이 혁명적 당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은 단지 “계급의식과 … 혁명에 대한 헌신성”이 아니다. 그 기준은 “특정한 정책에서 가장 광범한 노동자 대중과 관계를 맺고,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필요하면) 융합할 능력”, “광범한 대중이 그들 자신의 경험에 비춰봤을 때 올바르도록 정치적 지도와 정치적 전략·전술을 그 전위가 제공하는지 여부”다.23 1920년 이후 공산당의 변신은 영국 혁명적 좌파의 질적 진보였고, 혁명적 좌파가 대중 투쟁 쪽으로 만만찮게 다가간 것이었다. 24
영국 사회당, 사회노동당 분파들, 더 소규모의 다른 그룹들이 합쳐 1920년에 결성한 영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이러한 모델을 채택하면서 활동 방식이 급격히 바뀌었다. 해리 폴리트와 팔메 더트가 작성한 1922년 조직 보고서는 “새로운 유형의 당”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특히, 지리적 편제를 따르던 옛 사회민주연맹의 조직 구조를 작업장에 따른 기능적 편제를 한 조직 구조로 바꾸자고 했다. 이것은 공산당이 노동자 투쟁에 개입하고 투쟁의 결과에 영향을 미칠 전투조직으로 활동하도록 취해진 변화였다. 그 결과 공동전선 전술들을 수행할 기초가 놓였고 우파 노조 지도부에 맞선 현장조합원 운동인 소수파 운동Minority Movement을 일으키는 데서 핵심이 됐다. 이 전략이 종국에 가서 실패한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꽤 많은 사회노동당 당원들은 이러한 움직임에 저항하면서 그 바깥에서 맴돌다가 결국 소규모 종파 집단으로 전락했다. 최근 영국 마르크스주의 운동에 관한 훌륭한 연구 결과가 나왔는데, 그 연구는 베일어브레븐이라는 지역에서 일어난 일을 잘 묘사했다.
쟁점은 주로 나이와 기질에 따라 해소됐다. 옛 당원들은 선임 당원들[사회노동당 지부의 — 캘리니코스]을 “지독하고”, “교조적이고 종파적”이고, “악담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존재로 기억하고 있었으며, 선임 당원들의 경직된 정설 체계는 자본주의가 완전히 붕괴하기 전까지는 노동자들이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고 한 성명(그것도 차티스트 운동 이래 베일어브레븐 지역이 가장 뜨겁게 들끓던 시점에 나온 성명)에 잘 드러났다. 반면, 청년 당원들은 전시에 성장했고 사회노동당이 그 지역에 있는 유일한 혁명적 조직이라는 이유로 가입한 터였다. 선임 당원들은 갓 생겨난 공산당의 단점을 따지고 앉아 있었지만, 젊은 당원들은 그 결정을 간단히 무시하고 공산당 지부를 건설했다. 2년도 채 안 돼 그들은 지방선거에서 노동운동을 승리로 이끌었다.
초좌파적 선전주의는 영국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었다. 《‘좌파’ 공산주의 — 유치증》은 갤러거와 그 지지자뿐 아니라, 무엇보다 독일과 이탈리아 ‘좌파’ 공산주의 운동의 대표적 인물들을 겨냥한 책이었다. 이탈리아 사회당 좌파는 1921년에 탈당해 이탈리아 공산당을 만들었는데 초기의 지도적 인물은 아마데오 보르디가였다. ‘좌파’ 공산주의자 가운데 아마도 능력이 가장 출중했던 보르디가는 경제 상황 때문에 대중이 공산당 쪽으로 몰릴 때 혁명이 일어난다고 봤다. 그는 혁명가들이 혁명적 격변의 시기를 기다리면서 자신들의 원칙적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보르디가는 특히 작업장 조직에 반감이 컸는데, 작업장 조직이 ‘계급협조주의’(코포러티즘)와 경제주의를 조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보르디가는 공산당 공장 세포조직 건설에 반대했고, 소비에트가 부르주아 의회와 같은 원리로 선출돼 지리적 경계를 따라 편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민주의를 부르주아 좌파로 치부하며 사민주의와의 공동전선을 일절 반대했고, 파시즘과 의회 제도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며 독일 공산당이 그 10년 후에 똑같이 반복할 파멸적 오류를 저질렀다.
26 그람시가 보르디가와 벌인 논쟁의 의의는 그람시가 혁명적 당의 임무를 공들여 체계적으로 진술했다는 것이다.(이것은 나중에 《옥중수고》에 포함된, 그람시가 헤게모니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 글들에 깃들어 있다.) 27 1924년 그람시는 다음과 같은 불만을 토로했다.
그람시가 이탈리아 공산당의 지도자인 보르디가에 도전해 그를 대체한 매우 복잡한 과정을 여기서 다루기는 불가능하다.(보르디가의 지도 아래) 당은 선동과 선전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활동하지 못했다. … 대중이 공산당과 같은 방향으로 가도록 기회가 있을 때마다 촉구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 당을 혁명적 대중의 자발적 운동과 조직하고 지도하려는 중앙의 의지가 결합되는 변증법적 과정의 결과물로 여기지 않았다. 당을 한낱 허공에 떠 있는 존재로 여겼다. 즉, 사정이 좋고 혁명적 물결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또는 당 중앙이 공세에 나서기로 하고 대중을 분기시켜 행동에 나서게 하고자 대중 수준으로 몸을 굽힐 때야 비로소 대중이 손 닿을 수 있는 존재 말이다.제1차세계대전 말 토리노에서 벌어진 공장평의회 운동에 참가한 경험의 영향을 크게 받은 그람시의 당 개념은 그가 당 사무총장이 된 후 리옹에서 열린 1926년 당대회에서 가장 완전하게 개진됐다. 그람시는 “당이 단순히 ‘물리적’으로 노동계급과 결합하는 것이 아니다” 하고 주장했다. 달리 말해, 당은 무엇보다 노동계급의 일부이지,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기관’(보르디가의 표현)이나 노동계급 머리 위의 “허공에 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람시는 공산당의 ‘극좌파’(보르디가와 그 지지자들을 가리킴)가 당을 프롤레타리아와 유리된 지식인들의 소유물로 봤고, 계급의 일상적 투쟁에 손을 담그길 꺼리는 사회주의 이론 전달자로 봤다고 지적했다. 그람시는 이에 반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견해로는 노동계급을 조직하는 사람은 노동자 자신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당을 정의할 때는 당과 그 당이 생겨날 기반인 계급의 관계가 밀접해야 함을 특히 강조해야 한다.”
그람시는 당원 중 프롤레타리아 비중이 크고 당이 공장 조직을 두는 것은 당의 책무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책무는 리옹 당대회에서 채택된 테제에서 설명됐다. 이 테제의 초안은 톨리아티의 도움을 받아 그람시가 썼다.
36. …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당이 계급을 지도하는 능력은 계급의 혁명적 기관임을 ‘자처’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일부로서 계급의 모든 부분과 연관을 맺고 객관적 조건에 맞는 방향으로 운동을 대중 앞에 제시하는 일에 ‘실제로’ 성공해야 갖게 되는 것이다. 당은 오직 대중 속에서 펼친 활동의 결과로서만 대중에게 ‘우리의’ 당으로 인정받고 다수를 설득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이 갖춰져야만 비로소 노동계급을 이끌 수 있다. … 37. 당은 노동 대중이 모이는 모든 조직들로 들어감으로써, 그리고 그 안에서 계급투쟁의 강령에 따라 역량을 체계적으로 동원하고 다수를 공산주의적 방침 쪽으로 설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행동을 펼침으로써 계급을 지도한다.
리옹 테제는 혁명적 당에 관한 이런 개념에 따라 공산당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여러 개 제안했다. 노동조합에서 활동하기, 파시즘에 맞서 개혁주의자들과 함께 활동하기, 북부 프롤레타리아와 남부 소농 사이의 동맹을 구축하기, 소비에트의 맹아로서 공장 평의회 건설하기 등이 그 제안이었다. 이처럼 혁명적 실천을 명료하게 설명한 리옹 테제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역사유물론의 기초를 놓을 때 밑바탕으로 삼았고 레닌이 볼셰비키의 이론과 실천에서 발전시킨 사회 변화 개념과 같은 관점을 취한다. 리옹 테제는 마르크스 정치 이론의 걸작 중 하나로, 이후에 쓰인 《옥중수고》만큼이나 중요한 그람시의 유산이다.
개혁주의와 선전주의
앞 절에서[RCT에 관한 앞 절의 내용은 생략했다] 나는 ‘혁명적 공산주의 경향’RCT에 대해 논의했는데, 그 단체 자체가 중요해서라기보다는 영국 좌파 사이에 꽤 광범하게 퍼져 있는 선전주의 경향을 가장 순수하게 보여 준다고 봤기 때문이다. RCT 회원들은 혁명가다. 그들은 레닌주의 정당이 필요하다고 보고(때때로 “마르크스주의 운동”이라고 통칭하고 그 필요성을 흐리기도 하지만) 부르주아지를 무력으로 타도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혁명적 좌파와 좌파적 개혁주의(특히 공산당과 노동당 좌파)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이데올로기 투쟁을 우선시하는 RCT의 선전주의적 경향을 공유한다.
선전주의 경향의 하나는 쉴러 로보썸 등 《파편을 넘어》의 저자들이 “예시豫示 정치” 개념을 보급시키고 있는 것이다. 예시 정치는 모름지기 사회주의를 위해 싸우는 단체와 운동이라면 미래 [사회주의] 사회의 본질적 요소들을 현 시점에서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배와 복종이라는 부르주아적 관계를 재생산할 뿐이라는 것이다.
31 1918~20년 투쟁 물결 속에서 그람시가 얻은 가장 중요한 정치적 통찰은 공장 평의회를 소비에트의 맹아로 본 것이다. 대중투쟁이 생산지점에 기반한 조직 형태를 산출하는 경향이 있고, 또한 노동자들을 인종·성·부문에 관계 없이 단결시키는 경향이 있어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가능해진다. 사회주의는 노동자들이 사용자에 대항해 단결하는 작업장에서 현실적 형태로 예시된다. 비록 그 형태가 다양하고 보통 한계가 있고 불충분할지라도 말이다.
이 주장에 담긴 합리적 핵심은 권력 장악 과정이 블랑키적 무력 정변이 아니라 노동자 국가의 진수를 제시할 조직 형태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조직 형태는 바로 소비에트다.물론 사회주의자들이 선전과 (가능한 한) 활동 방식에서 계급 없는 사회의 모습을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것은 필요하고도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 자체로 대중이 사회주의 정치에 관심과 호감을 갖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어리석다. 우리는 우리의 사상을 노동 대중의 일상적 염원·근심과 연결시켜야 한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에게 귀를 기울일 까닭이 없으면, [즉] 우리가 대중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놓고 싸울 태세가 돼 있음을 보이지 않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실천에서 이 말은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따분하게 여기는 임금, 노동권, 공공 지출 삭감 등을 둘러싼 투쟁에 개입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그럴 태세를 갖추지 않으면, 사회주의 정치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려 고립되고 말 것이다. 《파편을 넘어》의 저자들이 지난 가을에 소집한 대회를 보면 바로 그러한 일이 ‘예시’ 사회주의자들에게 실제로 일어나는 듯하다. 따분한 노동조합 투쟁에 염증을 느낀 1970년대의 부상병들은 정신분석, 영지주의, 노동당 좌파의 꽁무니 좇기 등으로 후퇴하고 있다.
사실, ‘예시’ 사회주의는 유럽 좌파에서 나타난 광범한 현상의 하나일 뿐이다. 바로 이데올로기 투쟁은 정치투쟁·경제투쟁과 별개이고 그것들에 선행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런 주장은 ‘유러코뮤니즘’으로 알려진 좌파적 개혁주의(그리 좌파적이지 않은 경우도 많다)의 신조다. 서구 공산당의 이론가들은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가 해체되기 전에는 정치 권력을 위한 투쟁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더 나아가, 사회주의 정치의 주도권을 확립하면 무장 봉기도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산티아고 카리요는 《유러코뮤니즘과 국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노동계급과 그 동맹들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을 장악하면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지배 기관들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 반면에 경제적 계급투쟁은 사회주의 사상을 퍼뜨리는 것을 가로막거나,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주의를 분산시킨다. 사회주의 사상을 퍼뜨리려면 비非프롤레타리아 세력과 함께 ‘민주대연합’을 구축해야 하는데, 이들은 노동계급이 조금이라도 ‘계급 이기주의적’ 태도를 보이면 부르주아 진영으로 넘어갈 태세가 돼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계급은 ‘계급 이기주의적’ 요구나 투쟁을 하면 안 된다.]
32 다만, 사상 투쟁이 생산 지점에서의 투쟁과 부르주아 국가와의 대결에 선행돼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만을 살펴보려 한다. 이 주장이 단순히 사회주의 혁명은 노동계급 다수의 능동적 지지를 받을 때만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이라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유러코뮤니즘보다 훨씬 더 앞서 레닌도 그런 주장을 했다. [그러나]유러코뮤니즘은 노동계급의 의식이 일상적 경제투쟁과 무관하게(심지어 그것과 반대로) 바뀔 것이라고 주장한다. 앞에서 봤듯이,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매우 이질적인 관념이다. 그 주장은 그럴듯해 보이지도 않는다. 노동자들이 어떻게 사용자나 국가와 충돌하는 대중 투쟁을 하지 않고서도 전통적 관념의 거대한 짐을 떨쳐버릴 수 있단 말인가? 선전은 개인들을 설득하거나 이미 헌신적인 사람들의 확신을 키워줄 수 있다. 또, 노동자들이 이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도전하기 시작했다면 그 도전에 큰 뒷받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대중적 규모로 의식이 바뀌려면 대중 자신의 실제 경험이 결정적이다.
유러코뮤니즘의 사회주의적 전략이 가진 고질적 결함은 여기서 내가 다룰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매우 명백하게 입증돼 왔다.33 그러나 그람시는 이데올로기 투쟁을 정치투쟁이나 경제투쟁에서 따로 떼어내 특화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어느 계급이든 생산 과정에 참여할 때 그 행위에는 각 계급의 이해관계를 표현·추구하는 세계관이 반영돼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사회주의 사상은 노동자들이 생산 현장에서 차지하는 위치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세계관을 프롤레타리아의 세계관에 덧붙이며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차지한다. 그 때문에,
유러코뮤니스트들은 보통 그람시의 《옥중수고》를 오독하거나 개혁주의적으로 곡해해 자신들의 견해를 정당화한다.우리는 그[보통 노동자 — 캘리니코스]가 두 가지 이론적 의식(또는 하나의 모순된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그의 활동 속에 내재된 암묵적 의식으로, 세계를 바꾸는 현실의 실천에서 그를 다른 모든 동료들과 하나로 묶어 주는 의식이다. 다른 하나는 겉으로 드러나거나 말로 표현되는 것으로, 그가 과거로부터 물려받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이 말로 표현되는 관념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관념은 특정 사회집단을 하나로 결속한다. 그 관념은 도덕적 행위와 의지 향방에 영향을 미치고 그 영향력은 다양하지만, 대체로 모순된 의식을 낳아 어떤 행동이나 결정도 하지 못한 채 도덕적·정치적 수동성으로 빠져들도록 할 만큼은 강력하다.
노동자들의 “모순된 의식” 때문에 그들을 기존 질서에 묶어 두는 개혁주의 이데올로기와 그들이 실제 투쟁에서 보이는 전투성 사이에 충돌이 빚어진다. 이러한 충돌은,
해당 사회집단이 자신의 진정한 세계관을 일시적이고 순간적일지라도 실제로 가질 수 있음을 뜻한다. 그 집단이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서 행동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 집단이 순종과 지적 종속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른 집단으로부터 빌려온 관념(‘정상적 시기’의 관념)을 수용할 때, 그리고 그 관념을 말로 긍정하고 자신이 그것을 따른다고 믿을 때 그 집단의 행동은 독립적이고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순종적이고 종속적이 된다.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주의를 “실천 철학”으로 보는 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한 이유다. 계급의 일상 투쟁은 단지 부르주아 헤게모니를 약화시키는 데만 일조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는 억눌리고 은폐되는 사회주의 세계관을 수면 위로 드러내는 데도 기여한다. 따라서 초좌파적 종파와 유러코뮤니스트들이 임금 투쟁을 ‘경제주의적’이라며 깔보는 것은 근본적으로 틀렸다. 유러코뮤니즘의 지적 조상으로 잘못 알려진 그람시는 사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더 가깝다. 룩셈부르크처럼 그람시도 대중 투쟁이 경제적 요구를 중심으로 한 것이든 정치적 요구를 중심으로 한 것이든 관계 없이 그 대중 투쟁에 참여하는 것이 노동계급을 지배계급으로서 행동하도록 훈련시킨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결론
개혁주의와 ‘예시’ 사회주의자와 선전주의 종파의 특징은 이데올로기 투쟁을 정치투쟁·경제투쟁과 분리시키고 특화시켜 보는 경향으로, 이는 단순한 지적 오류가 아니다. 그런 경향은 현재 서유럽 전역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직면한 문제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영국·프랑스·스페인·포르투갈·이탈리아를 뒤흔든 거대한 경제적 전투들은 그 나라들의 부르주아 지배에 심각한 타격을 주지 못했다. 경제투쟁이 확산됐지만, (대다수 혁명가들의 바람과 달리) 대중의 의식이 정치적으로 명확해지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되돌아보건대, 혁명적 대안 세력이 아주 작고, 그 세력 안에서 프티부르주아적 경향이 득세하고, 그 세력이 보통 터무니없이 초좌파적일 때, 노동자들이 개혁주의라는 ‘낡은 집’을 버리길 꺼렸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레닌은 “정치 활동은 네프스키 대로처럼 넓고 곧은 포장도로를 달리는 것이 아니다”는 체르녜프스키의 말을 자주 인용했다. 계급투쟁은 일직선으로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후퇴와 전진을 수반하며 나선형으로 전개된다.
지금과 같은 일시적 후퇴의 시기에는, 갖은 수고와 시간을 들여 사회주의 정치와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연결시키는 일보다 ‘이데올로기 투쟁’이 더 매력적인 것처럼 보인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수가 적고 투쟁의 쟁점이 (매스미디어 등을 통해 실제는 모르고 간접적으로 아는 사람들에게) 변변찮아 보일 때는 특히 더 그렇다. 그러나 선전주의가 제시하는 겉보기에 곧은 길을 따라가면, 실제로는 존재감 없는 종파가 되거나 (적어도 현재 영국 상황에서는 더 개연성 있는) 노동당 입당에 이르게 된다. 후자를 선택하는 사람은 분명 그것이 노동자들에 대한 좌파 개혁주의의 영향력과 싸우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의 영향력은 오직 혁명가들이 개혁주의자와 함께 피켓라인과 직장에서 사용자와 국가에 맞서 공동 실천을 함으로써만 파괴할 수 있다. 그 밖의 다른 것은 회피이자 도망일 뿐이다. 사회주의로 가는 길은 노동자들의 실제 투쟁을 거쳐야만 한다. 그 길에서 우리와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어디서 만날 수 있을지 알 것이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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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Alex Callinicos, ‘Politics or Abstract Propagandism?’, International Socialism 2(Winter 1981). [원문 중 오늘날 거의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례인 ‘A contemporary example: the RCT’ 부분은 생략했다.]
↩
- K. Marx and F. Engels, Collected Works, Vol. 5 (London 1976), p. 4. ↩
- 같은 책. ↩
- 같은 책. ↩
- K. Marx and F. Engels, Selected Correspondence (Moscow 1975)(이후 MESC로 인용), p. 452. ↩
- 같은 책, p. 448. ↩
- R. Challinor, The Origins of British Bolshevism (London 1977), p. 14에서 재인용. ↩
- Y. Kapp, Eleanor Marx, Vol. 2, (London 1976), p. 56에서 재인용. ↩
- 다음 절에서 분명히 밝히겠지만, 나는 엥겔스가 오류를 전혀 저지르지 않았다고 보지는 않는다. 에드워드 톰슨은 각주 7에서 인용된 이본 카프의 책을 비평하며, 그 책이 엥겔스의 정치적 판단을 “노예처럼 따르므로 … 객관적 연구가 아니다” 한 것은 완전히 옳다. E. P. Thompson, ‘English Daughter’, New Society 3, March 1977을 보시오. 카프는 흔히 신경이 거슬리고 때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훈계조의 글을 자주 썼는데, 이는 그녀가 소련 공산당의 교의를 따랐던 것의 영향이다. ↩
- MESC, p. 374, p. 377. ↩
- 같은 책, p. 275. ↩
- E. P. Thompson, William Morris (London 1977) p. 380. ↩
- 같은 책, p. 390. ↩
- Kapp, pp. 366–367에서 재인용. Thompson (pp. 366–589)은 사회주의자동맹의 기권주의, 순수주의, 선전주의를 상세히 설명한다. ↩
- 레이먼드 챌리너가 자신의 책에서 밝힌 정치적 판단이 이런 경향을 미리 보여 줬던 듯하다. 챌리너는 그 책에서 사회노동당이 영국의 진정한 혁명적 당이라고 치켜세웠고, 초좌파적 언사를 남발하는 것을 높이 평가한 루스 피셔를 인용하며 피셔가 공산당을 개혁주의라고 비난한 것을 지지했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노동당이 한 일이 모두 부정적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스튜어트 매킨타이어는 자신의 책 Proletarian Science (Cambridge 1980)에서 사회노동당의 중요성에 대해 더 균형감 있는 분석을 제시했다. ↩
- MESC, p. 376. ↩
- 당에 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관점은 H. Weber, Marxisme et Classe Conscience (Paris: 1976) 와 J. Molyneux, Marxism and the Party (London 1978)[국역: 《마르크스주의와 정당》, 책갈피, 2013]에 상세히 설명돼 있다. ↩
- Thompson, ‘English daughter’. ↩
- 이본 카프는 이 결정을 엘리너와 에이블링만큼이나 대수롭지 않게 기록했다. Kapp, pp. 650–655. ↩
- Molyneux, Weber와 T. Cliff, Lenin, 4 vols. (London 1975–9)[후자는 국역: 《레닌 평전》 1~4, 책갈피]를 보시오. ↩
- Cliff, Vol. 4를 보시오. ↩
- V.I. Lenin, Collected Works, Vol. 31 (Moscow 1966), pp. 53,93. ↩
- 같은 책, pp. 24–25. ↩
- Woodhouse and B. Pearce, Communism in Britain (London 1976)과 R. Hyman and J. Hinton, Trade Unions and Revolution (London 1975)을 보시오. ↩
- J. Hinton, The First Shop Stewards Movement (London 1972)를 보시오. ↩
- Macintyre, p. 237. 공산당이 강세였던 베일어브레븐 등 세 곳을 연구한 같은 저자의 책도 보시오. Little Moscows (London 1980). ↩
-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 (London 1971)[국역: 《옥중수고》 1~2, 거름]의 편집자가 쓴 ‘General Introduction to A. Gramsci’를 보시오. ↩
- 그람시 사고의 연속성에 관해서는 C. Harman, Gramsci versus Eurocommunism, IS (old series) 97 and 98[국역: 《곡해되지 않은 그람시》, 노동자연대]을 보시오. ↩
- A. Gramsci, Selections from Political Writings, 1921–1926 (London 1978), p. 198. ↩
- 같은 책, pp. 314–315 ↩
- 같은 책, pp. 367–368. ↩
- L. Trotsky,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London 1967), Vol. III, p. 41. ↩
- C. Harman, ‘Eurocommunism, the state and revolution’, IS (old series) 101을 보시오. ↩
- Harman, ‘Gramsci versus eurocommunism’과 P. Anderson, ‘The antinomies of Antonio Gramsci’, NLR 100을 보시오. ↩
- Gramsci,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 p. 33. ↩
- 같은 책, p. 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