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1세기 한국 좌파의 전망
이 글은 다함께가 주최한 ‘맑시즘2009’ 포럼에서 최일붕 다함께 운영위원과 정태석 대안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이 패널 토론한 ‘21세기 한국 좌파의 전망’을 그대로 녹취한 것이다. 각주와 꺾쇠괄호([ ]) 안의 설명은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편집자가 넣은 것이다.
사회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이 토론의 사회를 맡은 저는 다함께에서 활동하는 김인식입니다.
이번 토론은 ‘21세기 한국 좌파의 전망’입니다. 제가 좌파의 전망을 자세하게 얘기하는 것은 월권 행위일 것이고 아마도 두 패널들한테서 충분히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먼저, 발표해 주실 두 연사를 소개하겠습니다. 제 왼편에 계신 분은 정태석 전북대 사회교육학부 교수입니다. 그리고 지금 대안연대회의 운영위원장도 맡고 계시고, 진보신당의 ‘진보정치 10년 평가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계시기도 합니다. 뜨거운 박수로 맞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 오른편에 계신 분은 최일붕 다함께 운영위원입니다. 그리고 다함께 국제연락간사를 맡고 계시기도 하고요. 그리고 현재 ‘맑시즘’ 서점에서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는 [청중 웃음]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웃지 마시고, 끝나고 한 권 사시기 바랍니다.
자, 그럼 두 연사한테서 20분씩 한국 좌파의 전망에 관한 발표를 듣겠습니다. 먼저, 최일붕 다함께 운영위원이 발표하겠습니다. 힘찬 박수로 맞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일붕(다함께 운영위원) 기조 발표
1 도 아니고 이를 어쩌나 난감했습니다.
‘21세기 한국 좌파의 전망’에 관해 얘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조금 황당했습니다. 21세기가 앞으로 90년이나 남았는데, 내일 일도 예측을 못하는 판국에 어떻게 90년을 예측해서 얘기하나, 내가 조반니 아리기그러나 어쨌든 21세기 좌파라고 한 것을 보면 20세기 좌파하고는 무언가 좀 달라야 한다는 함의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해서 20세기 좌파에 대해서 한번 돌이켜봤습니다. 20세기 좌파는 스탈린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득세했었습니다.
먼저, 스탈린주의부터 얘기하기로 하죠. 스탈린주의는 소련과 소련권, 즉 동유럽·중국·북한 등 스탈린 체제에 기반을 둔 운동이자 사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련의 스탈린 체제는 우리 모두 알다시피 1991년에 무너졌습니다. 그 체제가 무너질 때 노동자들은 전혀 그 체제를 지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노동자들은 그 체제가 무너지도록 그냥 놔뒀습니다. 실제로 그 체제의 지배자들은 옷만 바꿔 입었습니다. 공산당원에서 아르마니 양복을 입은 자로, 석유 재벌로, 마피아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지금도 러시아의 실권자인 푸틴은 바로 소련 보안경찰 KGB의 수장이었던 자입니다. 그의 후계자[현 러시아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도 역시 KGB 출신입니다. 소련의 붕괴는 결코 소련이 역사적으로 퇴보한 것,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퇴보한 것이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에서 시장자본주의로 옆걸음을, 게걸음을 친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란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이다” 하고 강조했고,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권력”이라고 얘기했는데, 스탈린 체제는 노동자 ‘권력’이기는커녕 노동자 ‘권리’도 존재하지 않았던 체제입니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도 만들 수 없었고, 사용자와 교섭할 수도 없었고, 파업권도 없었습니다. 경영자와 평균적인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 격차는 1980년 당시 기준으로 봤을 때 미국의 최고 경영자와 보통 노동자의 임금 격차보다 더 컸습니다. 물론 지금은 미국이 훨씬 크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그랬습니다.
2 라고 불린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킨 체제입니다.
노동자 권리가 없었을 뿐 아니라 민주적 권리도 없었습니다. 선거도 없었고, 있었다 해도 완전한 사기극이었고, 언론·출판의 자유도 없었고, 결사·집회의 자유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민족적 권리도 없었습니다. 러시아 민족이 다른 비러시아계 소수민족들을 억압하는 체제였습니다. 그래서 민족적 반란이 1980년대 말에 곳곳에서 분출했죠. 또한, 이 체제는 단지 소련 국경 내의 비러시아계 소수민족만을 억압한 것이 아니라 소련 국경 밖의 동유럽 인민들도 억압하는 제국주의 체제였습니다. 그리고 1979년에 아프가니스탄까지 점령했다가 1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인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서 마침내 1989년에 소련군이 철수했고, 그것이 바로 동유럽 붕괴의 도화선이 됐죠. 그리고 러시아 제국주의 체제는 우리도 알다시피 카레이스키스탈린 체제는 같은 볼셰비키 동료들을 1936년에서 1937년 사이에 모스크바 재판에서 모조리 학살해 버린, 스웨덴 주재 대사이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만 남기고 모조리 학살해 버린 체제였습니다. 이 체제는 중국과 대결하면서 핵무기로 상대방을 말살해 버리겠다고 위협하던 체제였고, 베트남과 캄보디아로 하여금 서로 전쟁을 치르게 만든 그런 체제였습니다. 도대체 어디를 봐도 사회주의와는 조금치도 닮은 데가 없는, 형식적으로 국유화라는 무늬만 닮은 그런 체제였습니다. 지금 그 체제의 파편이 남아 있긴 합니다. 북한과 중국, 쿠바 등이 그 체제의 파편들입니다. 그러나 중국을 보면, 이데올로기와 정치는 스탈린주의일지언정 사회 체제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보다도 더 시장적 체제라서 지금 중국 체제를 동경하는 좌파는 별로 없는 걸로 보입니다. 그리고 북한과 쿠바라는 스탈린 체제는 지금 애처롭게 서방 제국주의 체제와의 협상을 통해서 체제 보장과 안전을 얻는 데 급급해 할 만큼 가엾은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이 스탈린주의와 관련해, 스탈린 체제 바깥의 서방 세계에 존재하던 스탈린 체제 지지자들, 다시 말해, 공산당들에 대해 얘기해야 합니다. 이 공산당들은 일찍이 1930년대 중엽 인민전선(국민연합) 정책 때부터 이미 좀 기회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다가 마침내 결정적으로 1970년대 중엽부터 유러코뮤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사회민주당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입장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런 공산당들의 입장은 사회민주주의를 얘기할 때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이제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이 사회민주주의도 역시, 적어도 20세기의 주류 사회민주주의의 경험으로 봤을 때, 거기서 우리가 배울 것이 있겠는가, 무엇보다 우리가 그것을 한국 땅에서 재연해야만 하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서유럽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 즉 영국 노동당, 프랑스 사회당, 독일 사민당, 이탈리아 사회당과 옛 이탈리아 공산당이 민주좌파당이라고 이름을 바꾼 당이 집권했습니다. [그런데] 좌파가 집권했는데도 신자유주의 정책을 구현했습니다. 그래서 주로 프랑스에서는 이것을 ‘사회적 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영국에서는 ‘제3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무늬만 좌파이고 실제로는 신자유주의인 정책을 실행했습니다. 독일에서도 ‘신중도’라는 이름으로 말로만 좌파이고 실천은 신자유주의인 정책을 실행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비록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아니지만 노무현이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참 직설적인 이름으로 제3의 길 정책을 집행했고,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완전한 실망과 배신감을 자아내서 마침내 노무현은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사회민주주의는 개혁주의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입니다. 사회민주주의만이 개혁주의는 아니죠. 그런데 어쨌든, 가장 전형적인 형태인 사회민주주의가 보여 줬듯이, 개혁주의의 모순은 개혁주의 지도자들, 개혁주의 의원들이나 개혁가들이 집권해서 — 이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집권을 합니다만 — 그 개혁을 집행하려고 하면 반발에 부딪힌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진정한 권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권력을 갖고 있는 자들은 기업의 이사회에 있는 자들, 경찰 간부들, 결정적일 때는 군 장성들[입니다.] 바로 이러한 선출되지 않은 자들이 진정한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국민이 선출한 사람들이 진지한 마음으로 개혁을 집행하려고 할 때 그것을 사보타주합니다.
3 가 오스카 라폰텐을 재무장관 자리에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이런 일이 수두룩합니다.
그래서 1980년대 초반에 프랑스 자본가들은 돈을 해외로 빼돌려서 프랑스의 프랑화를 폭락시키고 마침내 미테랑을 1983년에 완전히 굴복시켰습니다. 그 다음에 1999년에도, 《심장은 왼쪽에서 뛴다》라는 책을 쓴 케인스주의자이고 지금은 좌파당의 지도자인 오스카 라폰텐이 자본가들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한마디 했다가 [쫓겨났습니다.] 오스카 라폰텐 취임 직후에 자본가들이 그를 제거하라는 압력을 넣어서 제3의 길을 따르던 슈뢰더이들은 1890년대에 사회민주주의가 형성되기 시작한 뒤로 이런 일을 거듭 당하다 보니, 마침내 거의 1백 년이 지났을 때쯤인 1990년대에는 아예 개혁을 약속하지 않게 됐습니다. 그래서 ‘개혁 없는 개혁주의’라는 말이 유행하게 된 것이죠.
그럼에도 사람들은 보수당, 우파 정당 치하에서 지긋지긋했던 시절, 가령 마가렛 대처 하에서 보냈던 지긋지긋했던 시절을 끝내려고, 그리고 아마도 ‘우리 사회민주주의 정당 지도자들이 집권하면 달라질 거다, 지금은 표를 얻으려고 약간의 ‘전술’을 쓰는 걸 거다’ 이렇게 희망적으로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투표했습니다. 그런데 집권하고 나니까 정말로 ‘개혁 없는 개혁주의’를 가차 없이 몰아붙였던 것입니다. 가장 마지막까지 기대를 받던 이탈리아 재건공산당 리폰다찌오네조차 올리브나무연합에 다시 들어가서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하고,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취함으로써 실망을 많이 자아냈습니다.
사실, 한국에서도 바로 이런 제3의 길이 있었습니다. 노무현 정권이, 아니 그보다 앞서 김대중 정권이 내세운 ‘민주적 시장경제’라고 하는 것, ‘생산적 복지’라고 하는 것 자체가 바로 제3의 길 정책이었습니다. 비록 김대중 정당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아니라 포퓰리스트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자본가 정당이지만, 어쨌든 그 정책과 이데올로기는 제3의 길이었는데, 이것이 완전히 사기극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노무현 정권도 꼭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아예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자신의 입장을 요약했죠.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이런 제3의 길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북대학교 김형기 교수가 공동대표로 있는 ‘좋은정책포럼’ 같은 데도 그런 곳이라고 저는 보고 있고요. 과거 민주노총의 고위상근 간부였고 지금은 한국노동교육연구원의 교수로 계신 박태주 씨의 입장도 제3의 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창작과비평사에서 《노무현 시대의 좌절》이라는 책을 펴낸 한반도사회경제연구회도 제3의 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유시민이 ‘사회투자국가’론을 얘기하고 있는데, 이것도 역시 제3의 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지금 답습할 필요가 없습니다. 서구에서 완전한 사기극으로 드러난 일을, 우리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민족적·일국적 관점에 갇혀 보지 못한 채 다시 제3의 길을 실험해 볼 필요는 없습니다.
한편, 서구에서는 이런 사회적 자유주의, 즉 말로는 사회주의를 얘기하면서 실제로는 신자유주의적 시장 정책을 추진하는 주류 사회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 그보다 왼쪽에 있는 세력들이 ‘급진좌파’라는 이름으로 정치 세력들을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급진좌파는 매우 유럽적인 용어인데 그냥 쓰기로 하겠습니다.
급진좌파 정당으로는, 예를 들면 프랑스 반자본주의신당NPA, 독일 좌파당(디링케), 이탈리아 재건공산당, 지금은 와해돼 버린 영국 리스펙트, 포르투갈 좌파블록, 그리스의 쉬나스피스모스를 비롯해 한두 개가 더 있습니다. 그런데 급진좌파들의 현황은 상당히 불균등합니다. 리스펙트처럼 완전히 와해돼 버린 곳도 있는가 하면, 포르투갈의 좌파블록처럼 여전히 잘나가는 세력도 있고, 프랑스의 반자본주의신당처럼 꽤 그럭저럭 잘하고, 가장 기대를 모으고 있는 세력도 있습니다.
서구의 급진좌파정당 얘기를 하는 이유는 사실 한국에서도 급진좌파 정당을 실험해 봤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한국에서는 민주노동당의 대략 10년의 경험이 급진좌파정당의 경험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한국에서 급진좌파정당의 경험은 일단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년 반 전에 분당 사태가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실망했고 지금도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우 이해할 만한 동기에서 ‘두 당이 재결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저는 지금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당의 형태로서 재결합하는 것이 현실적이냐의 여부를 떠나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모종의 단결은 있어야 한다고 보는데, 그 단결의 형태는 정당 형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당이라는 것은 어떤 정치적인 입장을 상당히 일치시키는 것을 전제로 만드는 거거든요. 그런 것이 아니라 공동전선 형태로, 즉 느슨한 연대체 형태로 결합해 연대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봅니다. 여기에 다른 정치세력들, 즉 분당 과정에서 떨어져나간 사람들, 또 애당초 민주노동당에 참여하지 않고 바깥에 있었지만 종파주의를 버리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고 민주노동당보다 오른쪽에 있었지만 그동안 좌경화하고 급진화한 사람들을 포함해서 커다란 연합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21세기 한국 좌파의 바로 요 몇 년 쯤을 내다보는 저의 전략적 전망입니다.
다음 얘기를 하면, 이런 좌파는 일단 경제 위기의 대안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얼마 전에 들이닥친 경제 위기는 [첫째,] 엄청나게 낙폭이 큽니다. 둘째, 무엇보다도 이번 위기는 1998년처럼 동아시아와 러시아와 브라질 정도만을 엄습한 위기가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핵심부인 미국과 유럽과 일본, 즉 삼극체제라고도 하는 세계의 선두 주자들을 모두 엄습한, 말 그대로 ‘일반적 위기’ 또는 ‘전반적 위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위기는 금세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부분적인 회복은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계적으로 몇 년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위기가] 상당히 오래 갈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자본가들이 할 것이 확실한 한 가지 일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체제가 문제이고 그 체제에서 수혜를 보는 자신들 또한 그 문제를 악화시키는 데 일조했음에도 그들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오히려 체제의 희생자들에게, 특히 체제의 피착취자인 노동계급에게 모든 책임과 고통을 전담시키려 한다는 점입니다. 거기에 맞서서 노동계급과 피억압자들은 싸워야 할 것입니다.
저는 과거 민주노동당처럼 굉장히 포괄적인 수십 수백 개의 요구들을 다 일치시켜서 아주 방대한 강령을 작성해서 대응하는 방식, 그리고 굉장히 타이트한 조직 체계를 유지하는 방식이 아니라, 열 개나 스무 개 정도의 간단한 요구들,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동의할 수 있는 요구들을 중심으로 공동전선을 맺고 대응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예를 들자면, 첫째, 이명박이 민주적 권리를 공격하는 것에 반대하고 국가보안법 같은 아직도 남아 있는 반민주적인 잔재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둘째, 노동자들을 이간질하는 각종 차별과 억압, 즉 여성차별, 동성애자 차별, 이주노동자 차별, 별로 많지는 않지만 종교 차별 등 각종 차별을 일체 반대하고,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차별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셋째, 대량 해고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쌍용차를 공기업화하라’는 요구를 다함께처럼 내놓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민주노동당은 얼마 전에는 공기업화를 받아들였는데, 진보신당은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기업화를 요구하기는 어렵겠지만 ‘대량 해고를 중단하라’ 정도를 가지고는 우리가 함께 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각자 그 이상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함께가 ‘공기업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듯이, 각자 선전·선동을 통해서 하면 되겠죠. 그런 독자적인 선전·선동의 자유와 권리는 분명하게 보장돼야 할 것입니다.
그 밖에도, 비정규직 차별 철폐와 정규직화, 민영화·사유화 반대, 부유층 감세 말고 오히려 증세하라, 누진세를 도입하라, 인간다운 최저임금을 보장하라, 보건의료·교육·사회복지 지출을 대폭 증액하라든가, 지금 특수고용노동자들에게는 파업권도 제대로 보장되고 있지 않은데, 그런 노동조합 권리를 온전히 보장해야 한다든가 등등 … 시간 제약상 다 나열하지는 않겠지만, 이처럼 우리는 상당히 많이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을 가지고 함께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울산 북구에서 보여 줬듯이, 선거에서도 서로 연합 공천하는 방식으로 공동 대처한다든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근본적 사회변혁을 바라는 사람들은 이것을 분명히 지지하면서도 단순히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대중 운동을, 그리고 이런 대중적인 지지에 기초를 둔 좌파 정치의 이점을 발판으로 자신들의 독자적인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 활동, 정치적 선전과 선동과 정치적 행동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러한 대중 운동과 대중적인 지지에 기초를 둔 좌파 정치의 전진과 진보에서 생겨난 유리한, 즉 좀 더 넓어진 전략적 공간을 활용해서 노동계급 자신이 다른 피억압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일로 나아가도록 뒷받침해야 할 것입니다.
정태석(대안연대회의 운영위원장) 기조 발표
반갑습니다.
‘21세기 한국 좌파의 전망’에 관해 20분간 발표해 보라는 말씀을 듣고 제가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상당히 광범위한 주제이기 때문에 쉽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제 나름으로 도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21세기 한국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런 다음에 이런 한국사회에서 도대체 좌파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사회를 지향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좌파의 목표를 설정했을 때 그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며, 특히 대중의 관심과 의식 수준이라고 하는 측면을 고려할 때 어떻게 실현 가능할 것인가, 이런 큰 세 가지 줄기에서 얘기해 보겠습니다.
우선, 한국사회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과거에서 지금까지 점점 내적인 변화를 겪어 오고 있는데, 그중에서 산업구조의 변화가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면 현대 사회는 서비스 사회로, 서비스 노동자들 또는 서비스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65퍼센트 내외로 상당히 높습니다. 그리고 특히 우리나라는 우리가 흔히 자영업이라고 얘기하는 부분이 20~30퍼센트로 상당히 높다는 것이죠. 산업 구조 측면에서 보면 흔히 탈산업사회, 서비스사회라고 하는 것은 전통적인 제조업 중심의 사회에서 서비스업 중심의 사회로 넘어가고 있다는 얘기죠. 이와 더불어, 계급 내적으로도 다양한 분화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측면을 고려해서 자본주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또 한 가지는 지구화라는 측면입니다. 흔히 신자유주의라고 얘기되는, 세계 시장을 통합하려고 하는 흐름이죠. 앞에서도 말씀하셨지만, 이런 흐름이 오늘날 미국의 금융 위기에서 시작돼 자본주의 전반적인 위기로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 속에서,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사회도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고, 또 이와 더불어서 노동시장도 상당히 불안정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현실의 개괄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적인 틀을 가지고 있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이 안정적으로 그냥 쭉 앞으로만 나가는 것은 아니겠죠.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듯이, 민주주의라는 것은 항상 후퇴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의 대다수 국민들이 민주주의가 우리의 기본적인 바탕이 돼야 하는 정치 체제라는 데는 다들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쉽게 되돌릴 수 없는 하나의 흐름이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함으로써 생겨나는 여러 가지 모순이나 이율배반적인 것도 있을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국가권력이 여전히 계급성 또는 편파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자본주의 자체가 기본적으로 계급으로 분화되는 경제 시스템이기 때문에 여기에 기반해서 국가의 성격이 계급적이 되고, 계급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적대 형태들, 즉 성이나 환경이나 소수자 문제 등의 다양한 적대들이 존재하고 있죠. 그래서 이런 부분에서 국가권력의 편파성, 계급성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민주주의 틀 안에서 정치적인 권력을 획득하려고 하는 다양한 정당들이 나타나고, 이 정당들이 선거 절차를 통해서 권력을 잡으려고 합니다. 물론 권력을 잡으려고 하는 이유는 권력을 통해서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오늘날 절차적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이 가능성이 있으면서도 한계가 있다는 것은 다들 이해하고 계실 것입니다. 결국 이런 민주주의 틀 안에서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모순과 갈등 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것들이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나름의 역동성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 우리가 민주주의를 얘기할 때, 단순하게 국가권력만을 얘기해서는 안 되고 시민사회[도 얘기해야 합니다.] 시민사회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계급 적대를 포함해서 다원적인 적대들로 구성돼 있고, 그 속에서 각 세력들이 [갈등과 투쟁 등을 벌입니다.] 물론 각 영역의 피지배 세력들은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것이죠. 그것은 평등과 자유, 여러 가지 권리들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시민사회를 헤게모니 투쟁의 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민사회의 양면적인 모습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헤게모니 투쟁을 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헤게모니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대중적인 동의를 얻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사실, 민주주의와 상당히 깊이 연관돼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결국 무엇입니까.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지를 통해서 정치권력을 잡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렇게 본다면, 헤게모니 투쟁은 결국 다수의 지지를 얻어가는 과정입니다. 헤게모니를 단순하게 세력을 장악하기 위한 과정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대중적인 정당성을 획득해 가는 과정이라고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헤게모니와 정당화의 변증법적인 과정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겠죠. 그 속에서, 전통적인 계급정치와 더불어서 다양한 다원주의적인 정치들이 시민사회 공간에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국가권력을 지향하는 과정 속에서 나타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앞서 제가 잠깐 말씀드렸지만 시민사회가 다원화한 것은 우리사회가 상당히 다원주의적인 사회로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계급 관계가 다원적인 방식으로 표출되는 측면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적인 것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적대와 갈등 요소로 존재하고 있는 부분들도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것을 다원주의가 가지고 있는 양면적인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육 문제, 주택 문제, 복지, 일자리, 먹거리 문제, 최근에 촛불시위를 통해서 드러난 먹거리 안전 문제 … 이런 것들이 그 자체로 계급적인 차원과 깊이 연관돼 있는 부분들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은 부분들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는 계급 문제를 단순한 공장의 문제, 생산의 문제를 넘어서는 소비의 문제, 시장의 문제로, 또는 시민사회의 문제로, 일상생활의 문제로 복합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서 현대 사회에서 또 다른 중요한 문제가 위험사회라는 요소입니다. 위험사회라는 요소는 환경문제와도 직접 연관이 있는 문제죠. 기본적으로는 생태환경적인 문제, 그리고 과학기술의 문제 등이 인간의 삶의 질을 얼마나 불안정하게 만드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들은 물론 자본주의의 이윤 논리나 성장주의 논리와도 연관돼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우리 사회에서 지금 나타나고 있는 저출산·고령화 현상인데, 사실은 이것이 상당히 심각한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에 정부는 저출산·고령화 때문에 여러 정책들을 쓰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애 하나 더 낳으면 50만 원 준다, 또는 여러 지원들을 해 준다, 이렇게 나오죠. 특히 둘째, 셋째 낳으면 더 준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걸 바라고 애를 더 낳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되겠죠. 왜 그런가. 결국은 우리가 먹고 살아야 하고, 또 애를 키우고, 키워서 애가 일자리를 잡고 또 나름대로 편안하게 살아가도록 해줘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장애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게 뭐냐. 우선 양육이 쉽지 않죠. 특히 여성들의 경우에 가사노동과 바깥 일을 같이 하는 경우에는 더더구나 어렵습니다. 그 다음에 교육 문제. 사교육비가 엄청나게 들어갑니다. 그 다음에는 일단 대학을 보내려고 하는데, 대학교 가면 일자리가 보장이 되느냐? 일자리도 보장이 안 됩니다. 이렇게 되니까 경쟁은 더욱더 치열해지고, 경쟁이 치열해지니까 더욱더 교육에 많은 돈을 쏟아 부으려고 하는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흔히 4대 보험이라고 하는 복지 영역도 제대로 보장이 안 됩니다. 특히 연금. 내가 늙어서 기본적으로 먹고 살 수 있겠느냐, 이런 게 항상 걱정되는 것이죠. 이런 사회에서 누가 애를 낳으려고 합니까. 제가 보기에는 이렇게 애를 안 낳으면 일할 사람도 없고, 결국 일할 사람이 없으면 자본이 이윤을 착취할 수 있는 그런 기반도 약화되고, 이렇게 되면 ‘야, 결국은 일하는 사람이 없으면 사회가 안 굴러가는구나’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될 텐데 … 그런 사회가 되면 더 비참한 결과를 낳게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물론 그런 사회로 가기 전에 우리가 우리 사회를 나은 사회로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되겠습니다.
자, 그래서 이런 현실 속에서, 특히 한국사회에서 좌파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를 고민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물론 우리가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계급 없는 사회, 착취 없는 사회, 또 환경적으로도 건전한 사회, 이런 것을 추구해야 하는데, 사실은 이런 궁극적인 목표를 지향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중간 단계 또는 과도기 단계로서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사회가 어떤 것이냐면, 불평등이나 양극화가 좀 완화된 사회, 여러 가지 복지가 보장되는 사회, 일자리가 안정된 사회, 이런 것들이 될 수 있겠습니다.
또 다른 차원에서는 전통적인 복지국가가 보장해 줄 수 있는 위험과는 다른 차원의 생태환경적이고 과학기술적인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전 지구적이고 상당히 파급효과가 큰, 울리히 벡의 얘기로는 “보험이 안 되는” 위험들입니다. 예를 들면, 원자력과 핵문제가 등장했을 때 이게 보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이런 차원에서 위험사회를 극복할 수 있는 생태적인 사회[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다원적인 평등, 다원적인 민주주의, 다양한 소수자들이나 여성들을 포함해서 다양한 피지배 집단들이 권리를 보장받고, 평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좀 더 친환경적이고, 복지가 좀 더 강화되고, 또 공공선을 추구하고, 다원적인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인권이 신장되는 그런 사회를, 멀리는 아니라 하더라도 단기 또는 중기적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될 사회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현대 사회에서 특히 한국사회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가 쉽게 오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인식 때문이죠. 우리가 이상적인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무기, 과거에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트를 혁명의 무기로 얘기했듯이, 그런 형태의 무기가 과연 우리에게 있느냐, 이런 얘기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그런 무기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한국사회의 좌파가 가지고 있는 고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것은 대중의 의식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노력들이 필요합니다. 이게 앞서 얘기했던 헤게모니 투쟁, 담론 투쟁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죠. 또, 촛불 시위를 통해 가능성을 보고 있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무엇이냐면 일상생활의 정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일상생활의 문제와 정치의 문제를 별개의 것으로 보고, 이상적인 사회를 위한 것은 큰 정치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큰 정치가 가능하려면 우리의 일상적인 정치가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죠. 사실 우리의 일상적인 삶,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 자체가 바로 정치적인 것과 연관돼 있다는 것이죠. 안전한 먹거리를 추구하는 것, 교육의 기회를 보장받는 것, 누구나 다 기본적으로 주거를 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는 것, 이런 것들이 중요한 일상생활의 삶의 기반이 돼야 한다는 것이죠. 이런 것들이 우리의 기본적인 삶의 조건이 되도록 하는 것, 사실은 정치가 바로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개인주의적인 전략을 통해서 자신의 성취와 목표를 이루려고 하는 성향이 강했는데, 이제 그런 것들이 점점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일상생활에서 깨닫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에 금융 위기에서 비롯한 자본주의 위기가 보여 줬듯이, 우리가 누구나 주식을 통해서 돈을 벌 수 있을 것처럼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돈이 어디서 나오느냐면 결국 노동자들이 일을 해서 번 돈을 조금씩 조금씩 뜯어가 그걸 가지고 금융자본이 굴려서 돈을 벌고 그걸 또 나눠 주고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었죠. 그런데 그런 방식이 지속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가 인식하게 된 데서 이번 금융 위기가 중요한 계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부동산 투기를 통해서 불로소득을 추구하는 것, 주식을 통해서 대박을 노리는 것, 이런 것들이 지속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일상적인 사고방식과 의식을 변화시키고, 일상생활이 정치와 연관돼 있다는 사고를 하게 되고, 이렇게 함으로써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이런 과정에서 저는 여러 정당의 역할, 또는 시민단체의 역할들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제도적인 여러 가지 연대의 형태들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시장에 반대해서 공공선과 복지를 추구해 나가야 하는데, 또 복지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연대를 제도화시킨 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유럽의 복지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복지는 일자리 문제, 질병 문제, 노후 문제 등에 대해서 누구나 기본적인 삶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다 같이 자기가 사회에서 벌어들인 만큼의 세금을 내는 것, 물론 기본적으로는 더 많이 버는 사람들이 더 많이 내는 것, 즉 누진세를 강화하면서 누구나 보편적인 복지를 위해서 어느 정도 기여를 한다는 것과 그것을 통해서 복지를 모두가 서로 나누는 방식의 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유럽의 보편적 복지 제도인데, 우리 사회도 바로 이런 형태의 복지 제도를 추구하면서, 이것 자체가 하나의 연대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방향에서 여러 가지 의식의 전환, 사고의 전환을 이끌어 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또, 기본적으로 민주주의가 선거 틀을 통해서 나아갈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는 결국 선거를 통해 어떻게 민의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명박 정권 들어서 볼 수 있는 것이 선거가 민의를 반영할 수 없다는 것이죠. 미디어법에 70퍼센트가 반대하는데, 전체 국회의원의 3분의 2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를 한나라당, 이 보수정당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동안 우리나라의 의회에서 지속적으로 문제가 돼 온 것입니다. 그래서 선거 제도를 비례대표제 같은 형태로 개혁하는 것 등을 여러 가지 연대를 통해서 추구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절차적인 문제와 의식의 문제들을 동시에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통해서 좌파정당의 집권을 보다 가능한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고, 이것을 통해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좌파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하는 전망에 대한 저의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패널 간 쟁점 토론
사회자 :두 연사 분의 발표를 들었는데요, 지금부터는 패널 간 쟁점 토론을 해 보겠습니다. 아마 두 연사의 발표를 들으시면서 공통점들과 차이점들을 발견한 분들이 많을 텐데, 몇 가지 쟁점이 될 만한 것을 뽑아서 두 패널에게 질문을 던지고 상호 토론하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한 쟁점당 각 패널들이 2분 30초씩 자신의 견해를 얘기하고, 그런 다음에 또 2분 정도 상호 반론을 펴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제한된 시간 안에 여러 쟁점을 다루다 보니까 시간을 제약하는 것이니 패널 분들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선거 방송에서 볼 수 있는 후보자 토론 느낌이 다소 들더라도 특정한 쟁점에 관한 견해가 청중 여러분에게 분명히 전달되도록 고안한 방식이므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두 연사 분에게 던질 첫 질문은 이것입니다. 세계화와 함께 산업구조도 재편되고 그에 따라서 이 사회에서 노동계급의 변화가 있다는 주장이 많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노동계급이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다고도 얘기하고, 또는 이제는 노동계급이 워낙 분절화돼 있기 때문에 하나의 계급이라고 얘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거나, 또는 전통적인 노동계급은 사라졌다는 주장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좌파의 변혁 전략에서 노동계급이 여전히 주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겠습니다. 그리고 노동계급과 다른 피억압 민중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 노동계급과 소수자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해서 두 패널 분들께 먼저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먼저 최일붕 운영위원께서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일붕 : 아까 서비스업 비중이 높다며 탈산업사회라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저는 그것에 관해서는 조금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첫째, 자본주의는 세계 체제인데 세계 자본주의 체제 전체로 봤을 때 오히려 산업의 비중이 그동안 꾸준히 증대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엊그제 크리스 하먼이 “21세기 노동자 계급”에 대해서 강연할 때 구체적인 통계 수치로도 보여 준 바가 있었죠. 한편, 한국만 보더라도 오히려 얼마전 신문 보도를 보면, 전국경제인연합회가 “한국의 서비스업 비중이 OECD 국가 중에서 하위권에 속한다”는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아직도 한국은 상당히 산업사회인 거죠. 요컨대 국제 수준에서든 국내 수준에서든 산업의 비중이 높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런 만큼 노동계급이 상당히 강력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잠재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노동계급의 현재 모습이 그들의 잠재력과는 닮지 않았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즉, 노동계급이 과거만큼 투쟁성을 보여 주지는 못하고 있다든가, 과거에서 이어받은 문제점이자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즉 비노동계급의 피억압자들과 천대받는 자들과 차별받는 사람들의 문제에 관해서 다소간 굼뜨다든가 하는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저도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나 올해 민주노총 노동자들이 학생들의 등록금 인하 운동 같은 것을 상당히 지지했다든가, 그 밖의 다른 많은 쟁점들에서도 노동자들이 정치적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언뜻언뜻 보여 주었습니다. 오히려 그 잠재력을 인정하지 않고 약화시켰던 것은 노동조합 최상층의 상근간부 지도자들과 각종 개혁주의적인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아예 처음부터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고서 노동들의 운동이 정치적인 운동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기도 합니다. 가장 결정적인 예는 지난해 1백만 명이 거리로 나온 촛불운동 때입니다. 물론 [다함께의 주장은] 그것만 가지고 파업을 하자는 것은 아니었어요. 임금과 노동조건을 둘러싼 노동자들의 여름 투쟁이 있는데, 그것을 조금 당겨서 같이 날짜를 맞춰서 파업했다면 촛불 투쟁의 효과를 결정적으로 바꿀 수가 있었을 텐데도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을 봤을 때 아쉬운 점이 있지만, 우리가 이것을 너무 숙명적이고 패배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노동계급을 단결시키는 객관적 조건도 작용을 하거든요. 노동계급을 자본주의 시장의 편차에 따라 분열시키고, 정태석 운영위원장님께서 말씀하신 각종 적대, 즉 성적 차별, 성적 성향에 따른 차별, 인종에 따른 차별 등 지배계급의 분열 시도가 있음에도 노동계급을 단결시키는 객관적인 요인도 자본주의에서는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순에 사회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개입해서 조직하고, 선전·선동하고,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정치적이 되도록 고무한다면 사태는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태석 :노동계급이 여전히 사회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을 하셨는데, 한편으로는 될 수 있고 한편으로는 되기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또, 규범적인 차원의 얘기와 현실적인 차원의 얘기도 구분이 돼야 합니다.
서비스 사회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씀하셨는데, 실제로 우리 사회는 비록 OECD 국가 전체에서 보면 낮은 수준이지만, 서비스업이 60퍼센트 이상으로 상당히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또, 제조업 노동자들의 경우에도 노조 조직률이 10퍼센트 이하로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어 있죠. 이런 상황들이 노동자 내부의 연대도 상당히 어렵게 합니다. 또한 노동자들이 생산의 영역인 공장을 벗어나서 소비의 영역, 시장의 영역, 일상생활의 영역에서 연대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들과 조건들을 적극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문제들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에는 현대 사회의 변화된 기본 조건들을 우선 이해하면서 그 속에서 가능한 연대를 어떻게 찾아나갈 것인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생산의 영역 또는 공장의 영역에 치중해 있던 노동운동의 방식들을 일상생활의 영역으로 확장시켜 나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소비라고 하는 것도 생산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영역이기 때문에, 별개의 영역이거나 공장 문만 나서면 우리와 관계 없는 부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배우자나 자녀들이 다 어디서 살고 있습니까. 공장에 있는 게 아니죠. 공장 밖에 있다는 거죠. 이런 사람들과 연대할 수 있는 틀[이 필요합니다.] 또, 서비스 직종에 있는 사람들은 생산의 공간과 소비의 공간이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영역에 있습니다. 우리가 늘 만나는 이 사람들이 사실은 서비스 노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전화 신청을 하면 와서 설치해 주는 사람들이 서비스 노동자들인 거죠. 이 사람들은 과거 제조업 노동자들처럼 공장에 모여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죠. 이런 사람들과 우리가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고민해야 되는 거죠.
그런 차원에서 노동계급의 문제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고하는 틀에서 벗어나서 생활공간, 정체성이 형성되는 다양한 공간들을 노동자들의 삶의 공간으로 이해하고, 노동자이면서 소비자이면서 시민인 복합적인 존재로서의 노동자들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차이를 인정하는 속에서 연대의 가능성을 발견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일붕 : 좀 전에 ‘전통적 노동운동’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우리나라에서는 1920년대부터 1990년대 말까지 노동운동이라고 하면 노동조합운동을 뜻하는 것으로, 즉 노동운동을 노동조합운동으로 환원하는 관행이 있었어요. 심지어 2000년대 들어와서도 노동자 정당인 민주노동당이 거의 10년 가까이 활동했음에도 노동운동을 자꾸 노동조합운동으로 환원하는 사고의 관성이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노동조합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의 정치적인 조직, 변혁 정치조직이 노동자들의 생활조건·노동조건을 넘어선 문제들을 다룰 수 있고, 또 다뤄야 한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다만 제가 정태석 운영위원장님과 차이가 있다면, 저는 이른바 ‘다원적 적대’들, 말하자면 여러 차이들, 여러 구체적 차별과 억압들이 있다는 것을 동의하면서도, 다만 그중에서 계급 차별과 계급 억압, 계급 착취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강조한다고 해서 ‘이것이다, 너네는 복종해라’ 하고 패권주의적으로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정당] 조직 안에 있기보다 서로 공동전선 방식으로 연대해야 한다고 얘기한 것입니다.
요컨대 저는 이러한 것들[다원적 적대] 중에서도 한 가지 중심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정태석 선생님께서는 사회이론가이시죠.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 포스트그람시주의, 포스트구조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즉, 다중심의 입장, 다시 말해 제가 생각하기에는 중심이 없는 입장이라고 봅니다. 저는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이 노동계급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착취와 억압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봅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것을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예를 들어, 레닌은 “노동계급은 피억압자들의, 민중의 호민관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거든요. 그래서 전통적 노동운동, 사회주의 전통에서는 노동자들이 아닌 다른 피억압자들의 문제를 결코 경시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와 다르게 노동운동을 이해하고 강조해 온, 지금도 그러고 있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사회주의하고는 관계가 없는 노동자주의 또는 신디컬리즘 경향 같은 것이지, 결코 진정한 사회주의 전통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사회자 : [정태석 연사에게] 선생님 더 하실 얘기 없으십니까? 그럼 그 다음 쟁점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지금 민주주의와 관련된 얘기들을 각각 하셨고, 그리고 굉장히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됐다고 얘기하셨습니다. 오늘날 이명박 정부 하 좌파의 변혁 전략에서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이 차지하는 비중과 의미가 무엇인지 [얘기해 주십시오.] 설명하는 방식은 두 분이 약간 다른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정태석 선생님은 주되게 소위 시민사회에서 헤게모니 장악이라는 측면에서 민주주의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보시는 것 같은데, 그것에 관해 좀 더 부연 설명해 주십사 부탁드리고, 곧이어 최일붕 동지의 의견을 듣겠습니다.
정태석 : 제가 시민사회에서의 민주주의를 강조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결국 우리가 민주주의 없이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민주주의라는 것은,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만, 기본적으로 대부분이 동의하는 하나의 정치 체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게모니라고 하는 것도 결국 그 근본 원리는 민주주의와 맥이 닿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헤게모니를 장악한다는 것이 단순하게 권력을 장악해서 내가 맘대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라기보다는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방식, 그 틀에서 정책을 변화시키고 또 궁극적으로는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식으로 가자는 것이죠. 결국 이런 차원에서 보면, 헤게모니라는 것이 민주주의적인 정당성을 획득해 나가는 방식하고도 밀접히 연관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칸트식으로 얘기해 보면, 정당성 없는 헤게모니는 맹목적이고, 헤게모니 없는 정당성은 공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장난 같지만요. 결국 한편으로는 정당성을 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궁극적으로 뭔가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헤게모니 투쟁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고, 여기서 다양하고 가능한 민주주의적인 상징들, 즉 정의라거나 공공선이라거나 생명이라거나 평등 등의 가치들을 통해서 대중의 동의를 얻어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일붕 : 정태석 운영위원장님의 저서 중에 ‘급진민주주의’라는 용어가 들어간 저서가 있습니다.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의 급진민주주의 개념을 상당히 많이 흡수하시면서 하버마스의 이론도 받아들이신 걸로 보입니다. 저는 민주주의를 굉장히 중요시하는, 그리고 민주주의를 급진화시켜야 한다는 견해를 일단 상당히 좋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1년 전까지만 해도 “민주 대 반민주는 끝났다”고 주장하다가, 갑자기 이명박 정권 1년도 안 돼 “이명박 정권이 파시즘이다” 하고 얘기하는 분들이 있는데요, 이 분들이 ‘민주 대 반민주가 끝났다’고 주장했을 때 그것은 국가보안법으로 탄압받는 사람들의 가슴에 못 박는 얘기를 한 것이었죠. ‘민주주의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다, 너희는 공안 경찰의 밥벌이를 하기 위해 희생된 것이다’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면서 국가보안법 반대 운동에 대해서 오불관언이거나 아주 미온적인 태도만을 보였습니다. 그것에 비하면,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정태석 선생님의 견해가 굉장히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 이 부분은 진보신당의 다른 분들하고는 견해가 약간 다른 것 같아요. 진보신당의 다른 분들은 정치적 민주주의는 이제 별것 없고, 중요하지 않고, 사회적·경제적 민주주의가 중요하다, 반신자유주의 운동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면서 정치적 민주주의 문제를 회피하는 듯한 태도를 취할 때가 많고, 거기에 참가하더라도 다소 미온적인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경우와는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그 다음에 한 가지만 더 추가하겠습니다. 민주주의 투쟁, 정태석 운영위원장님의 용어로는 ‘다원적 적대’에서의 투쟁이겠죠. 실제로 레닌도 [이것을 아주 강조했습니다. 그는] 러시아 사회에서 러시아 정교회라는 기독교 교파에 속하지 않은 다른 교파들이 탄압받고, 기독교가 아닌 유대인들이 탄압받고 이슬람교도들이 탄압받는 것에 대해 이들을 방어해야 한다고 아주 강조했습니다. 그가 뭐라고 얘기했냐면, “공장에서 임금 등 근로조건을 가지고 싸우는 사람은 전투적이고 좋은 노동조합 운동가이지만 사회주의자는 되지 못한다. 그가 유대인들에 대한 학대에 맞서서 싸우고 또 비기독교 종파들에 대한 학대에 맞서 싸울 때 그는 진정으로 사회주의자다”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단지 착취에 맞선 것뿐 아니라 이런 억압과 천대, 차별에 맞선 투쟁을 ‘민주주의 투쟁’이라고 불렀고, 이런 민주주의 투쟁이 중요하다고 얘기했습니다. 저 역시 급진민주주의는 아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이것을 좀 더 급진화시킬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급진적인 급진민주주의가 필요하지 않겠느냐,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가는 것까지도 생각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를 더한층 계급투쟁적으로, 노동계급의 권력으로, 사회주의적으로, 민주주의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 정 선생님, 하실 얘기 없습니까? 진보신당의 주요 활동가들이 정치적 민주주의를 다소 도외시한다는 지적도 있었는데요.
정태석 : 예, 최일붕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사실은 제가 뭐 진보신당의 대표가 아니기 때문에 (청중 웃음) 저는 그냥 [진보정치 10년 평가]위원회에서 위원장으로 성실히 활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제가 [진보신당을]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진보신당이 그렇게까지 절차적 민주주의나 이런 차원의 문제를 도외시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역시 절차적 민주주의의 기반 위에서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추구해 나가는 것이지요. 물론 이 절차적 민주주의가 늘 안정적으로 변하지 않고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그런 점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도 더 민주화시켜 나가는 과정들이 끊임없이 필요하다는 지적에 저도 공감합니다.
사회자 : 제가 즉석에서 질문을 하나 더 던지겠습니다. 정태석 선생님은 대체로 급진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쓰시면서 민주주의 이론을 발전시킨 반면에, 최일붕 운영위원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급진민주주의는 무엇이고,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무엇인지, 이를 대변하시는 두 분께서 좀 더 부연 설명을 해 주시는 것이 청중들에게 친절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태석 선생님께서 먼저 말씀해 주시지요.
정태석 : 사실 급진민주주의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내용이 드러나지 않는 용어이지요. 그냥 급진적이다, 민주주의가 급진적이다, 이런 얘깁니다. 라클라우와 무페가 급진민주주의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여기서 급진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이해하기로는 기본적으로 여러 가지 적대의 문제들이 있을 때 모든 것이 등가적이고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죠. 존재론적으로 어떤 것이 더 우월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다원성을 진정으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그 속에 하나의 중심이 있어서 이 중심을 통해 모든 것을 서열화시키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라클라우와 무페가 생각하는 급진성이고, 말하자면 등가적 평등인 것이죠. 예를 들면 여성이 노동자계급보다 덜 열악하다거나 덜 다급하다거나 이런 식의 얘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이죠. 다양한 적대들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환경 문제가 그야말로 시급하고 소중한 문제인데, 이를 두고 ‘지금은 먹고사는 문제가 더 중요해, 계급 문제가 더 우선적인 것이야’ 이렇게 얘기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고, 여성 문제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사실은 급진민주주의 자체가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기보다는 바로 이런 급진적인 차원에서 등가성을 얘기하는 것이 핵심이죠. 그 속에서 내용을 생각해 본다면 아까 최일붕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계급적인 민주주의까지도 포괄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계급적인 차원에서도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고, 성적인 차원에서도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환경 문제나 소수자 인권 문제에서도 보다 평등한, 보다 생명을 추구하는, 정의로운 상태를 지향하는, 그래서 다원적인 평등을 추구하는 이념이 급진민주주의 이념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적인 과정, 절차, 이런 것들에 기반을 둬서 급진적인 내용을 추구해 가는 과정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최일붕 : ‘다원적 적대’ 문제 또는 민주주의 문제에 대해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차별과 억압을 당하는 사람들이 노동자들보다 그래도 더 나은 처지라고 생각해서 제가 노동계급 중심성을 얘기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정태석 선생님이 비판하는 종류의 이른바 ‘마르크스주의’는 결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스탈린주의이고, 우리 나라 운동의 20년 전통에서 굉장히 많이 본 경향인 노동자주의입니다. 요즘은 세력이 많이 축소됐지만 말입니다. 그런 입장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와는 결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면서 얘기하겠습니다.
이러한 억압과 차별 문제, 아까 정태석 선생님이 든 예만 보자면, 저출산·고령화 문제 — 이건 여성 문제이군요 — 양육과 교육의 문제, 이것도 여성 억압에 관련한 문제이고요, 이런 문제만 하더라도 그것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롯한 문제라는 겁니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는 그 객관적인 논리 자체가 우선, 노동시장을 편차화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둘째로, 자본가들은 의식적으로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기 위해 성에 따른 차별, 성적 성향에 따른 차별, 인종에 따른 차별, 국적에 따른 차별, 종교에 따른 차별 등의 차별을 계속 만들어냅니다. 심지어 그 분열이 자본가 계급 내에 영향을 미칠지라도 말입니다. 즉, 차별은 분열 지배, 즉 이간질해서 서로 자기들끼리 싸워서 자멸하게끔 만들려고 하는, 지배자들의 지배 방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에 맞서 투쟁하려면, 가장 효과적으로 투쟁하려면 자본주의 자체를 공격해야만 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인 세력은 자본주의의 심장인 이윤을 공격할 수 있는 세력입니다. 그 세력이 노동계급이기 때문에 제가 노동계급이 중요하다, 중심적이다 하고 얘기하는 것이지, 결코 노동자들이 좀 더 특권적인 지위에 있다거나 노동자 아닌 다른 피억압자들은 사정이 더 낫다든가 하는 생각을 해서가 아닙니다. 노동자들보다 더 열악한 학생, 노동자들보다 더 열악한 여성들이 많습니다. 노동계급이 중요하다는 것은 단순히 생활 수준과 처지에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가장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세력이 누구냐는 점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공격하려면 통일된, 일치단결한 반자본주의적인 운동이 필요하므로, 그런 운동을 공동전선 방식으로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특별히 공동전선이라는 형태를 얘기한 것은, 당黨이라는 집중적인 방식을 추구하면 정태석 선생님이 비판한 것과 같은 패권주의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그것은 아니다 하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사회자 : 1분 30초를 더 쓰셨으니까 [정태석] 선생님도 더 하실 말씀이….
정태석 : 1분만 하겠습니다. 제가 다원적 적대를 얘기한다고 해서 이런 것들이 다 따로 논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죠. 현실 속에서는 말이죠. 예를 들어, 자본주의 문제와 여성 문제는 연관돼 있는 차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차원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부장제 문제는 자본주의와 연관된 문제라고 볼 수 없는 차원의 것이죠. 집에서 여자들이 가사노동하고, 남자들은 그냥 쉬고 집안일 별로 하지 않는데, 이게 자본주의와 직접 연관돼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와 연관시키려면 조금 억지스러운 방식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연관돼 있는 부분에 관해서도 얘기하는 것과 동시에 연관돼 있지 않은 부분에 관해서도 얘기하고, 이런 것들을 다차원적인 측면에서 사고해야만, 동시적인 해방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사회자 : 시간이 제약돼 있기 때문에 이 쟁점에만 머물 수는 없고, 그 다음 쟁점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세계화가 진척되면서 한국에서도 새로운 종류의 민족주의가 부상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20~30대에게 굉장히 유력하게 나타나는 특징 중의 하나가 새로운 민족주의라고 하는데, 이것은 분명히 과거와는 다른 민족주의로서 세계화에 친화적이면서 동시에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인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두고서 시민적 민족주의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럼 좌파는 민족주의를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민족주의가 과연 진보적인 것인지, 아니면 퇴보적인 것인지, 또는 민족주의의 대안은 무엇인지에 관해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 가령 진보신당의 ‘진보정치 10년 평가서’를 보면, 동아시아 연대론을 민족주의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보입니다. 또, 최일붕 동지가 있는 다함께에서는 민족주의의 대안으로서 국제주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좌파가 민족주의를 어떻게 봐야 하며, 대안은 무엇인지에 관해서 두 분의 의견을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최일붕 운영위원의 의견을 들어보겠습니다.
최일붕 : 민족과 민족주의는 우리 나라에서 굉장히 뜨거운 쟁점이 되곤 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 지배자들이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해서 소동이 일어났을 때 일본 군국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이 있었는데, 그 반대편에서는 그 운동을 ‘파시스트’ 운동이라고 비판하는 일이 있었지요. 우리는 반제국주의 운동, 반전 운동 같은 것이 일어날 때마다, ‘저건 민족주의 운동이다’ 하고 얘기하면서 그 운동 자체를 지지하지 않는 종파적인 태도를 자주 목격해 왔습니다.
비록 민족이라고 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발전,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적 국민국가의 형성 속에서 전개돼 온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민족의 형성에는 주관적인 요인도 작용했습니다. 즉, 민족의식, 민족국가를 수립하고자 하는 의욕·의지 등의 주관적인 측면도 민족을 형성해 왔다는 것이죠. 한국은 피억압 국가나 종속 국가의 처지를 일찍이 몇십 년 전에 벗어났습니다. 아직 제국주의 국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요. 그래서 객관적인 조건으로만 본다면 민족주의에 진보성이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의식의 문제에선 상당히 모순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즉, 일본 군국주의가 준동한다거나, 미국이 간섭을 하고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위협을 한다거나 하는 때에는 [일본과] 미국의 제국주의에 반대해서 일어난 반제국주의 운동이 민족주의적인 형태를 띠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럴 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단순히 ‘저건 쁘띠부르주아 민족주의다, 쇼비니스트적[국수주의적]이다’ 하고 기각해 버릴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그것이 상당히 종파적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다함께]는 그 운동을 지지하면서도, 그것은 민족주의적으로 풀 수 없는 문제라고, 반제국주의 문제는 오히려 국제주의적인 방식으로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국제적 반전 운동의 일부로서 같이 연대를 한다든가, 계급투쟁과 결합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입니다.
정태석 : 저도 큰 틀에서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흔히 민족주의라고 하면 서구에서는 Nation-State, 민족국가 또는 국민국가라고 얘기하는데, 그때 Nation이 형성되는 방식이 어떠했느냐[를 봐야 합니다.] 좁게 보면 종족적인 민족주의라고 얘기할 수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반면에 미국 같은 경우에는 서로 다양한 종족들, 다인종이 살고 있는 사회입니다. 그렇지만, 하나의 국민국가로서 미국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Nation-State라고 하는 것의 발생 상황이나 형태가 상당히 복잡한데요, 기본적으로 저는 민족국가라고 할 때 민족이라는 것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긍정적인 방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부정적인 방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흔히 부르주아 민족주의라고 할 때, 유럽에서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부르주아들이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중심으로서 민족국가를 내세워서 노동자들을 동원해 식민지를 건설하거나 전쟁을 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경우, 우리는 이런 민족주의가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지요. 그에 반해 제3세계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제국주의의 침략에 저항하는 의미의 민족주의로서 긍정적인 차원이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민족이라고 하는 것 속에는 계급 또는 계급 이외의 다양한 사회적 분화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특정한 형태의 민족주의가 그 사회 구성원들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계급일 수도 있고 또는 다양한 다른 집단들일 수도 있겠죠.
‘상상적 공동체다’ 하고 얘기하면서 민족주의가 만들어진 것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이론이 많이 확산돼 있습니다. 그런데 민족이 상상된 공동체라고 했을 때 누구나 자유롭게 상상만 하면 민족이 될 수 있느냐. 이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상상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로서 우리는 흔히 혈연이나 언어나 공유된 경험이나 문화, 이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생각해 보면, 내가 현재 민족주의에 관한 나의 생각을 갖기까지 과연 늘 민족주의에 관해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느냐, 저는 전혀 그렇다고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에는 대한민국, 한국팀이 경기를 한다 하면 아주 맹목적으로 ‘우리 팀 이겨라’ 이렇게 했죠. 물론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일종의 만들어진 민족주의가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거기에 대한 원초적인 공감을 형성할 수 있는 그런 기반이 나름으로 있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민족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보다는 민족이 원초적인 정체성을 형성하는 하나의 중요한 기반이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폐쇄적인 형태로 드러나거나 또는 공격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막을 수 있느냐 하는 차원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것이 좀 더 현실적으로 민족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면, 경제 위기에서 실업이 늘어나면 외국인 노동자들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갈 수 있는데, 우리가 열린 민족주의를 주장하려면 그만큼 우리 사회가 좀 더 피지배 대중에게 많은 복지나 안정적인 삶이 보장되는 사회[로 되는 것], 이런 것들이 폐쇄적인 민족주의로 흘러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겠지요. 그래서 민족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부정적인 방향을 억제할 수 있는 다양한 사회적 정책이나 프로그램들이 필요하고 의식의 변화, 열린 사고들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최일붕 : 정태석 위원장님의 얘기를 들어보건대, ‘종족적 민족주의’와 ‘시민적 민족주의’를 구별하시고는, 시민적 민족주의에는 일정한 긍정성이 있다고 주장하시는 듯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단 아주 단적인 반증 사례를 하나 들어 보면,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시민적 민족주의의 대표적 사례로 꼽고 있는 것이 영국과 미국의 민족주의인데 바로 영국과 미국이 발칸반도 전쟁이든, 이라크 전쟁이든,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든, 제국주의 침략 전쟁의 선두 주자들이라는 거죠. 그렇거니와 또한, 192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 사례는 이른바 시민적 민족주의라는 것이 1930년대 초에 대공황과, 노동계급이 단결해서 반파시즘 투쟁을 하지 못한 무능력, 이 두 가지가 만났을 때 어떻게 해서 갑작스럽게 파시즘에 자리를 물려주는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파시즘은 전형적인 소위 종족적 민족주의죠. 다시 말해서, 시민적 민족주의와 종족적 민족주의 사이에 어떤 만리장성 같은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시민적 민족주의의 긍정성이라고 하는 것은 허상이라고 봅니다.
제가 민족주의적인 운동에 대해서 때론 비판적 지지를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전술적입니다. 즉, 우리 나라에 좌파 민족주의자 동지들이 있는데, 좌파 민족주의자 동지들과 그들의 민족주의 운동이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한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이라크전 반대 운동, 아프가니스탄 전쟁 반대 운동에 같이하는 한은 그들을 지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동지들이 이주노동자들에게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아니면 좀 마땅치 않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에는 반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략적 지지가 아니라 전술적 지지라는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그것은 비판적 지지인 것입니다. 비판적 지지를 통해서 그 운동이 국제주의적인 운동, 계급투쟁으로 나아가도록 기여하자는 전술적 고려인 것입니다. 결코 ‘어떤 종류의 민족주의는 괜찮고, 어떤 종류의 민족주의는 나쁘다’고 하는 관점을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정태석 : 시민적 민족주의를 말씀하셨는데, 제가 시민적 민족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이냐면, 거기에는 조금 다른 맥락이 있습니다. 시민적 민족주의라고 하는 것은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아래로부터 [형성된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민족, Nation이라고 하면 혈연적인 개념에 상당히 가까운 방식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렇지만 국민국가라고 할 때 그 국민이라고 하는 것은 밑으로부터 하나의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Nation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Nation-State가 형성됐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는 하나의 형성 과정의 문제입니다. ‘뒤에 파시즘으로 나아갔다’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시민적 민족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로 얘기하는 프랑스는 그렇게 나아간 것은 아니죠. 물론 그런 차원들도 전혀 없을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어떤 고정된 형태의 민족주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사회적 맥락 속에서 변할 수 있는 것이죠. 예를 들면, 앞서 제국주의 말씀을 하셨는데, 그렇게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상황 속에서 우리가 민족주의라는 것을 생각할 때, 국제주의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지구적인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국가 간의 불평등 문제, 예를 들면 WTO 체제에서 나타나는 문제가 있을 때 국제주의적인 차원에서 다 열어 놓자, 이렇게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이런 차원에서, 국민국가가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저항이나 투쟁의 조건 또는 우리 삶의 근거라는 차원에서 [민족주의를] 얘기하는 것이지, 하나의 무리로서, 집단으로서, 우리가 옹호해야 할 경계를 추구하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민족주의 혹은 넓은 의미에서 국민주의를 생각하는 것이지, 폐쇄적이고 공격적인 차원의 것을 옹호한다거나 내부의 다양성을 억압하는 방식을 옹호한다거나 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사회자 : 마지막 쟁점 하나만 더 하고 그 다음에 청중 토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요즘 경제 위기에 맞서서, 또는 이명박 정부의 반동에 맞서서 연대해야 한다는 것은 굉장히 광범한 정서인 것 같아요. 거의 하나의 당위처럼 돼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연대의 문제에서 늘 뜨거운 논란이 되는 것은 민주당 문제입니다. 한쪽에서는 민주당과는 ‘어떤 경우에도 살을 섞을 수 없다’고 반대하고, 다른 한쪽에는 민주당과 모든 쟁점에서 함께해야 한다고 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과연 우리 좌파 진영이 경제 위기에 맞서서, 또 이명박 정부의 반동에 맞서서 광범한 운동을 건설할 때 민주당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두 분에게 의견을 묻겠습니다. 먼저 정태석 선생님께서 한 말씀 해 주시지요.
정태석 : 예, 상당히 곤란한 문제입니다. 저는 누구하고 연대를 절대적으로 해야 한다, 또는 안 된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물론 민주당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위해 연대하느냐를 먼저 얘기해야 연대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얘기할 수 있지, 어느 당이냐 아니냐 이게 중심은 아니겠죠. 우리 사회의 진보적 변화를 추구한다고 한다면, 진보적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하는 데 나름으로 중요하냐 그렇지 않냐를 [연대의]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하겠지요. 예를 들어 미디어법 같은 경우를 봅시다. 미디어법은, 제가 아까 헤게모니 투쟁을 얘기했는데, 기본적인 언론의 민주주의를 해칠 수 있는 법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좌우를 막론하고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의 공정한 룰을 지키려고 하는 입장이라면 누구나 연대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사실 애매한 부분이 어떤 것이냐면, 과거에 우리가 늘 느끼는 것인데, 민주당이 밉지만 연대하지 않으면 한나라당에게 또 집권이 넘어가고 … 이런 고민들이 있잖아요? 과거에 ‘비판적 지지’가 늘 그런 고민이었는데, 사실 저는 그런 경우에 상당히 곤혹스럽습니다. 한쪽은 아주 진보의 순결성을 강조하고, 다른 쪽은 그런 것보다는 현실적인 정치 논리 속에서 연대를 지향하는데 제가 보기에 참 정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사는 게 정답이 없는 것이지만. 그래서 저는 어떻게든 전체적으로 사회를 진보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가는 데 중요한 교두보가 될 수 있느냐, 중요한 기반이 될 수 있느냐, 이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여기서 다른 차원의 문제를 한번 제기하고 싶은데요. 그러면 왜 우리가 자꾸 ‘비판적 지지’에 신경을 쓰면서 살게 됐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은 아까도 제가 잠깐 말씀드렸는데, 대중의 의견을 정치적으로 그대로 대표할 수 없는 선거 시스템, 의회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계속 ‘비판적 지지’의 틀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비례대표제와 같은 형식을 통해서, 우리가 좌파 정당을 지지하는 만큼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면 우리의 의견이 의회에 그만큼 전달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제도 정치의 틀 안에서도 충분히 대중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방식들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소선거구제 속에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지역 정당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정당들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고, 전체적으로 보면 약 30~40퍼센트의 보수 세력이 선거를 통해서는 항상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고,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결국은 ‘민주당이라도 잘 돼야 될 텐데’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주당을 버리면서 한나라당을 줄 것이냐, 아니면 민주당이라도 줘 가지고 덜 후퇴하도록 만들 것이냐, 이런 고민을 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자꾸 ‘비판적 지지’의 고민에서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선거 제도를 바꿔서 대중의 의사가 제도 정치 속으로 정말 적절하게 대표될 수 있는 방식, 이걸 우리가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요구해야 되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일붕 : 정태석 위원장님께서 독일식 비례대표제 또는 정당명부투표제를 주장하셨는데, 저도 그렇게 되는 것이 조금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잉글랜드와 비교했을 때 스코틀랜드에서 비례대표제 덕분에 스코틀랜드 사회당이 전진하는 데 좀 더 유리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2004년 초에 비례대표제가 채택되면서 민주노동당이 2004년 총선에서 열 석이나 얻는 데 득을 봤죠. 두 석은 지역구로 얻었고, 나머지 여덟 석은 비례대표로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민주주의를 증진시키지는 못했고, 민주당을 정말 민주주의자들처럼 처신하도록 만들지도 못했습니다. 민주당은 민주주의자를 자처하는데, 그들은 전혀 민주주의자들이 아니고 자유주의자들입니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정말로 일관되게 옹호하느냐면, 심지어 자유민주주의조차,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조차 옹호하지 못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고, 상대적 후진국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곳들에서는 산업 자본주의의 발달이 뒤늦었고, 그것이 국가의 보호 하에서 제국주의 하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상대적 후진국의 부르주아지는 자유주의적이지도 못한 실정이었던 것이죠. 우리 나라의 민주당도 민주주의와 관계가 없고 심지어 자유민주주의조차 [옹호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민주당은 지난 10년 동안 국가보안법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속해서 [감옥에] 집어넣었는데, 이 자리에도 당시에 구속된 적이 있는 분들이 몇 명 계시네요. 단지 정치적 주장을, 반체제적인 혁명적 주장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북한하고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구속됐습니다. 또, 노무현 말기에는 북한하고 아무런 관계없이, 그저 20년 전에 법원이 이적도서로 결정한 도서를 인터넷으로 판매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구속되는 걸 보지 않았습니까. 그런가 하면 한미FTA 시위를 비롯한 주요한 시위를 다 금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노무현 정권 동안 구속된 노동자의 수가 그 전 20년을 통틀어 가장 높아, 노태우 정권 시절에 구속된 노동자 수에 버금가는 노동자들이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처럼 민주당이 결코 민주적이지도 않고, 심지어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대단히 불철저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들과 원칙으로는 말할 나위 없고 전략으로도 연대할 수 없다고 봅니다.
몇 년 전에 좌파 민족주의 계열, 정확히 말하면 그중에서도 핵심적으로 주체주의 계열의 동지들이 그런 전략을 내놓았을 때 우리 다함께는 비판을 했습니다. 이것은 노무현 세력, 자유주의자들과의 연합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동지들은 그때 부정했습니다. 아니라고 발뺌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면, 이번 민주노동당 당대회 상황을 보면, 민주당과의 연대에 절대적인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가 힘이 모자라고 민주당이 주도할 때, [즉] 평범한 사람들, 피억압자들과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민주당의 운동을 지지할 때, 어제 서울역 앞 집회에서처럼 언론노조 활동가나 평범한 사람들이 민주당이 싸우는 것을 지지할 때 우리도 같이 지지하면서 그러나 전술적인 ‘비판적 지지’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청중 토론
사회자 : 지금까지 두 패널 간의 쟁점 토론을 들었는데요, 지금부터는 청중 토론을 하겠습니다. 상당히 많은 쟁점들이 형성돼 있기는 한데, 일단 먼저 나오는 분에게 우선권을 드리겠습니다. 시간 제약이 있기 때문에 늦게 나오시는 분들은 발언권을 얻지 못할 수 있으니까 미리 미리 나와서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청중1: 두 분 토론을 잘 들었습니다. 좀 전에 정태석 교수님께서 한국의 현대사회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라는 개념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개념은 ‘현대 사회를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으로 설명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죠. 그런데 제가 생각할 때 그가 얘기하는 여러 가지 문제, 환경 문제라든가 과학기술의 문제라든가 노무현 때 우리가 지겹도록 많이 들었던 고령화·저출산 등의 문제들은 늙은 자본주의가 나타내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입니다. 그리고 저는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으로 이런 문제들의 원인과 해결책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위험사회 같은 개념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문제와는 약간 다른 차원의 문제가 현대 사회의 핵심 문제라고 말합니다. 앤서니 기든스도 ‘사회적 배제’ 개념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노동자들만 배제된 게 아니라며 현대 사회의 문제가 더는 계급 문제가 아닌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제 동생이 며칠 후에 애를 낳게 되는데, 제부가 저한테 하소연하는 게 맞벌이 부부로 살아가면서 애를 낳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현실을 보면, 앤서니 기든스처럼 맞벌이 부부가 얼마나 우월한가에 기초해 싱글마더라는 사회 문제를 다루는 게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잘 알 수 있죠. 사실 이런 문제들은 모두 오늘날 노동계급이 처해 있는 다양한 모습들입니다. 즉, 여성으로서 겪는 출산 문제라든가, 싱글마더 문제라든가, 또는 노인이 돼서 사회적 일자리를 얻어 봤더니 겨우 20~30만 원밖에 못 받는 이런 문제들 말입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학 이론은 이 문제들을 계급 문제가 아닌 다른 문제로 해결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다른 길을 안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들이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이 봉착한 문제들이라는 점에서 노동계급이라는 주체의 문제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태석 교수님은 민주주의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시민사회를 헤게모니 투쟁의 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노동자들이 과연 무기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물음을 던지면서 ‘대중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과제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과연 주체는 누구인가, 누가 노동자의 의식을, 혹은 대중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그람시가 얘기한 헤게모니 투쟁이라는 것은 노동자들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 투쟁해서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해결하는 동시에, 농민에게 땅을 제공하고 지식인들에게는 더 나은 사회적 비전을 제공하는 것이었다고 이해합니다. 바로 이런 것을 헤게모니 투쟁이라고 이야기했지, 어떤 지식인들이 담론 투쟁의 영역에서 대중에게 더 나은 의식을 제공하는, 그런 위로부터의 개념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 저는 노동자들의 자주적 활동,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정태석 교수님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역동성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는데요. 과연 자본주의에서 진정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 거대 기업인들을 지금의 민주주의로 통제할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저는 생산 영역에서 노동자들이 생산을 통제할 수 있을 때에만 진정한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중2: 저는 한국사회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서비스 산업의 비중이 늘어난 것이 과연 노동자들이 전보다는 연대하기 더 힘들어졌다는 사실을 뜻하는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 얘기하고 싶습니다. 저는 서비스 산업의 비중 증대가 탈산업화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서비스 산업의 비중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죠. 하지만 이것이 객관적으로 단결이 더 힘들어진 조건을 뜻한다고 볼 순 없습니다. 우리는 2년 전만 해도 바로 서비스 직종에 있는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이 많은 사람들의 연대의 초점이 된 것을 봤습니다. 이랜드 홈에버 투쟁에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연대했습니까? 단지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들도 연대했고, 학생들도 연대했고, 특히 정규직들이 함께 연대했습니다. 홈에버 노동자 투쟁에서 해고된 사람들 다수가 비정규직이 아니라 사실 그 투쟁에 많은 정규직들이 함께 연대했다는 것을 볼 때 서비스 산업의 비중이 늘어난 것이 노동계급의 단결이 더 힘들어졌다는 사실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물론 지난 수십 년 동안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격차가 벌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단결하기 힘든 비정규직들의 객관적 조건의 반영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노동조합을 갖고 있는가, 그 노동조합이 얼마나 자신의 힘을 사용하려고 했는지가 결과를 좌우했다고 봅니다. 따라서 저는, 물론 노동자들이 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자동으로 단결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그것을 의식적으로 추구한다면 얼마든지 오늘날에도 연대를 현실화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청중3: 제 뒤에 누가 있으면 양보하려고 했는데 아무도 없네요. 아까 민족주의에 관해 말씀하실 때, 최일붕 씨는 계급과 자본주의의 형성 과정에서 생기는 민족이라는 개념도 있지만 주관적인 요소도 있다고 하셨고, 또 정 선생님께서는 원초적인 면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두 분 말씀을 제가 모두 동의합니다. 그런데, 반대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저는 이런 체험도 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혼혈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클 때 누구든지 저를 보면 미국 사람이라고, 글쎄 백인이면 왜 다 미국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미국 사람이라고 보통 그렇게 얘기했어요, 얘기를 하고 같이 앉아서 밥을 먹고 어쩌고 하다 보면 “어, 선생님은 저보다도 더 한국적이시네요” 하거나, 또 어떤 친구는 “어, 너, 나보다 더 한국적이다”는 말을 가끔 합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 저는 일단 좋다는 얘기니까 기분은 좋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속으로는 ‘나도 너하고 똑같은 한국 사람인데 무슨 더가 어디 있고 덜이 어디 있느냐’ 하고 생각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게 다 사실은 원초적인 체험이라고 할 수 있고, 주관적인 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물론 같이 앉아서 김치를 먹고, 된장찌개를 먹고, 나희덕의 시를 읽으면서 같이 얘기를 하고, 그게 다 좋은 경험이죠. 그렇게 하면서 제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기분 좋아요. 그런데 제가 LA에 사는데, 가끔 LA 한인타운에 나가서 음식점에 가서 밥을 먹지 않습니까? 그러면 주인은 한국 사람입니다. 서로 한국말을 합니다. 웃으면서 “한국 말 잘 하시네요”, “네, 좀 합니다” 하고 주고받는데 옆에서 멕시코 출신 저임금, 사실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저임금 노동자가 와서 그릇을 치우고 행주질을 합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서 제가 느끼는 감정이 있어요. 그런데 그때 제가 느끼는 감정은 그 사람한테 느끼는 연대감이 주인하고 한국말로 주고받으면서 생기는 원초적인 체험보다 훨씬 더 원초적이더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멕시코 사람하고 느끼는 연대감은 머리로 느끼는 연대감이고, 한국말을 주고받는 한국인 주인하고 느끼는 것이 더 원초적인 마음으로 하는 연대감이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최근에 제가 어떻게 느끼기 시작했냐면 그 저임금 노동자하고 느끼는 연대감의 깊이와 폭이, 그 사람을 착취하는 한국 음식점 주인하고 한국말 하면서 그 사람이 파는 김치를 먹으면서 느끼는 어떤 감정적인, 원초적인 연대감보다 훨씬 더 깊고 본질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초적이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즉 ‘어떤 원초적인 것이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것이냐’고 물었을 때, 사회와 경제의 구조에 관해서 내가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원초적이라고 하는 것의 체험과 정의가 달라지더라는 것이죠. 저는 멕시코 출신의 저임금 노동자하고 느끼는 연대감이 훨씬 더 원초적이더라, 민족을 완전히 초월하고 민족이라고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하고 훨씬 더 연대감이 깊더라는 것입니다.
청중4: 정태석 선생님이 말씀하신 급진민주주의적 가치에 대해서 저도 적극적으로 공감합니다. 정의·공공성·생명·평등 등을 말입니다. 그러나 다양한 적대에 관한 탈중심적 전략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가사나 육아 문제를 예로 드시면서 자본주의로 다 환원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보기에 그것은 현상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집에 와서 빨래와 설거지 하는 것은 여성이긴 하지만, 그렇게 가사와 육아를 개별 노동자 가정에게 떠넘김으로써 누가 이득을 얻습니까? 바로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개별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자본가들이 이득을 얻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우리에게는 공동의 적이, 바로 이윤 체제와 그 체제를 운영하는 국가라는 공동의 적이 있는 것이고, 그들은 핵심적인 어떤 전략과 중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명박 정부는 어떤 전략과 중심을 갖고 있습니까? 이명박 정부는 지금 미디어법을 통과시켜서 [방송을] 조중동에 넘기고 그 다음에 쌍용차에서 대량해고를 관철시킴으로써 전국적으로 구조조정을 밀어붙이려고 하는, 어떤 중심과 전략을 갖고 거기에 지금 경찰력과 모든 국가권력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도 마찬가지로 힘을 집중시켜서 거기에 대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러시아 혁명가였던 레닌은 구체적 상황에서 특정한 어떤 고리가 되는 투쟁이 있고, 그런 고리에서 우리가 저들의 공세를 막아냈을 때 전체적으로 우리가 진전할 수 있는 어떤 중심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투쟁을 위해서 우리의 무기가 있는가 하는 고민을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런 이윤 체제에 맞서서 산업 노동자들이 바로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한국 경제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한국 경제를 이야기할 때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를 얘기합니다. 얼마 전에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위원장이 사퇴했다고 하면서 아홉시 뉴스의 주요 기사로 나오는 거예요. 그만큼 현대차·삼성전자, 이런 데서 주가가 얼마나 떨어지는지, 반도체가 얼마나 팔리는지 이런 것들이 한국 경제에서 대단히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런 곳들에서 노동자들의 힘이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또 다른 한편에서 서비스업 노동자들 또한 산업 노동자와 마찬가지의 힘을 갖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에 서비스 노동자들은 원자화했고 조직되기 힘들고 힘이 없다는 얘기들이 대단히 많았습니다. 예컨대 화물 노동자들은 전부 따로따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운전하기 때문에 모이기 어렵다는 주장 말이죠. 하지만 몇 년 동안 어떻게 됐습니까? 바로 그 노동자들, 화물연대 노동자들, 이랜드 노동자들, 이런 노동자들이 힘을 보여 주고 또 집중해서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또, 비례대표제 등을 통해서 개선해야 할 필요는 있겠지만, 자유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가짜 민주주의입니다. 우리는 강희락 경찰청장을 통제할 수 없고, 이건희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는 우리가 선출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노동자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룰 투쟁이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청중5: 민족주의에 관해서 한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지금 민족주의에 관한 논의가 어떤 컨텍스트에서,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사용돼야 하는지 동의 없이 그냥 ‘민족주의가 좋다, 나쁘다’ 하고 얘기하는 건 좀 쓸데없는 공방전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솔직히 외국에 나가면 없던 민족주의도 생깁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나를 구별하는 기준이 뭘까 곰곰이 따져 보면, 제가 체험 속에서 따져 보면 그것은 결국 인종이거든요. 없던 민족주의도 생겨요, 그런 공간에서는 말이죠. 왜냐하면 제가 마이너리티minority이기 때문에 그런 거거든요. 그런데 지금 말씀하시는 경우는 누가 머조리티majority가 되고 누가 마이너리티가 돼서 헤게모니를 쥐고 어떻게 행사하느냐에 따라서 단지 민족주의뿐 아니라 모든 사상과 가치가 굉장히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어떤 나쁜 악습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지, 민족주의 자체가 나쁘다고 규정짓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민족주의라는 것이 서구 사회에서는 굉장히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굉장히 공격적이고 제국주의적으로 사용됐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사실 우리는 별로 침범하거나 이런 적이 별로 없거든요. 개별적인 경우에 있었을 수는 있겠지만, 전체 역사로 봤을 때 그렇게 공격적으로 쓰이지 않았어요. 일본에서는 내셔널 아이덴티티national identity라는 말 자체를 쓰는 것을 굉장히 쉬쉬할 정도죠. 독일도 마찬가지일 걸요? 왜냐하면 전쟁 국가였기 때문에 그렇죠. 우리는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그들과 똑같은 차원에서 민족주의가 좋다, 나쁘다 얘기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좀 무의미합니다. 그 다음에 민족주의와 더불어 뭐가 있냐면 문화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까 상상화된 공동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이 맞죠. 근데 아마 부르디외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민족이 아무리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역사적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형성된 문화라는 것은, 단지 실체라고만 얘기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 자체가 실체로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쉽게 얘기해서 개별자인 저는 [민족주의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이었는데요, 외국에 나가보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래서 외국은 좋다, 저기 어느 나라가 괜찮다’ 하고 했던 것에 회의가 굉장히 많이 생겼어요. 그렇지 않구나, 질적으로 들어가 보면 그들도 마찬가지로 다른 양상으로, 다른 측면에서 부정적인 모습들이 굉장히 많이 있어요. 권위주의적인 면도 굉장히 많고요. 그래서 제가 예전에는 심지어 그 권위 때문에 우리나라의 존댓말이 문제라고까지 생각했는데, ‘아니다, 문화적으로 존댓말은 참 좋은 거다’ 하는 식으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얘기해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안을 가지고 얘기하느냐를 빼고서 민족주의 하나만 놓고서 좋다, 나쁘다를 얘기하는 것 자체가 이미 획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중6: [정태석 교수는] 갈등의 다원성을 말씀하시면서 여성 억압 같은 경우를 순전히 자본주의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자본주의로 설명되지 않는 많은 갈등이, 모순들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사실상 근거로 드는 유일한 것이 여성 억압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맞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만으로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계급 사회로 설명하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자본주의를 넘어서자, 자본주의를 전복하자’고 말할 때 그것의 함의는 단지 특정한 계급 사회를 철폐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 사회 자체를 철폐하자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이 여성 억압에 관해서 설명하지 못한다는 식으로, 물론 명시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암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인류학적 증거들을 보더라도 여성 억압이 인류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고 볼 수 있는 증거는 그 무엇도 없습니다. 사실 농경 사회 전에 소위 계급 이전 사회라고 할 수 있는 데서는 평등주의, 어떻게 보면 지독한 평등주의, 일반으로 말해서 여성이 남성들보다 사회적 영향력이 컸으면 컸지, 더 작지는 않은 그런 현상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만 계급 사회, 특히 농경 사회로 이행하면서 밭을 가는 일이, 특히 쟁기를 이용해서 가는 일에 근력이 더 많이 들어가게 됐던 점과 재생산 영역에서 사람들이 최대한 자식을 많이 나아야 한다는 이런 객관적인 필요가 등장하면서 여성 억압이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죠.
자본주의가 한 일은 바로 이런 여성 억압을 낳은 물리적 조건 자체를 없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사람의 근력 차이나 한쪽 성이 아이를 낳는데 일 년 정도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 때문에 사회 생산 활동에 기여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본주의가 창조한 물질적 잠재력을 모든 사람의 평등, 성과 인종의 차별을 넘어서는 평등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 프로젝트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 발언
사회자 : 이상으로 청중 토론을 마치고 두 분의 정리 발언을 듣겠습니다. 아무래도 정태석 선생님에 대한 문제제기가 많았으니까 먼저 말씀하실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두 분의 정리 발언을 각각 5분에서 7분 정도 듣고 이 토론을 마치겠습니다.
정태석: 많은 질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위험사회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면 ‘위험사회론은 자본주의 사회론에 대한 물타기가 아니냐’ 이런 얘기죠. ‘현대 사회를 자본주의로 분석할 수 있는데 핵심을 흐리기 위해서 위험사회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인식을 애매모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냐’ 이런 말씀이신 거 같습니다. 우선 [말씀드릴 것은] 제가 울리히 벡의 이론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쓴 글을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제가 비판한 것도 위험사회가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울리히 벡이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또는 재귀적인 현대라는 것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보통 우리가 ‘자본주의의 위기’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경제적인 위기를 말하지요. 과잉 생산, 유효수요 부족 등을 통해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위기들, 공황이나 불황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위험사회에서 얘기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성장주의에 매몰돼서 생태 환경적인 문제, 과학기술적인 문제 등이 인간의 생존 조건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위험사회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문제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본주의와 더불어서 생겨난 것이지만 자본주의의 문제로만 설명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런 것을 얘기하기 위해서 위험사회를 얘기한 것입니다.
거꾸로 얘기하면 이런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를 극복해서 사회주의가 됐다면 사회주의 사회는 환경 위기 없이 존재할 수 있느냐, 그냥 사회주의만 되면 환경 위기는 다 극복되느냐,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울리히 벡 같은 사람들이 모더니티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자본주의적인 문제뿐 아니라 현대 사회의 복합적인 차원들을 설명하려는 것이지요. 그런 것들이 자본주의와 무관하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차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부분을 우리가 고려하지 않으면 ‘사회주의가 되면 다 된다’ [하고 말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회주의 얘기를 많이 하는데, ‘저런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다’, ‘이런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다’, 그렇게 얘기하면 결국은 뭡니까, ‘자기 좋은 것만 사회주의다’ 이런 얘기가 되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사회주의라고 얘기해 온 것은 다 거짓이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이 정말 사회주의다’ 이런 얘기입니다. 그렇게 얘기해 버리면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자본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도 ‘내가 생각하는 자본주의는 이런 것이 아니고 사실은 이런 자본주의를 얘기한다’ 이렇게 얘기해 버리면 더 할 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들의 수준에서 현대 사회를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하는 차원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헤게모니 개념과 관련해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말씀하셨는데, 맞습니다. 헤게모니가 위에서 무슨 담론을 내세워 가지고 ‘야, 다들 이렇게 생각해’ 해서 되는 것은 아니지요. 어떻게 보면 그람시가 상식의 문제를 헤게모니의 중요한 자원으로서 얘기했던 것도 이런 차원입니다.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는, 그야말로 중요한 이론 또는 의식을 가지고 있고 이것을 쫙 퍼뜨려서 한꺼번에 쫙 어떻게 해 보자, 사실 이것은 불가능하지요. 단적으로 얘기하면 사실 저는 상당히 이상적인 관점에서 또는 원칙적인 입장에서 얘기하는 것의 한계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게 뭐냐면, 우리가 이데올로기와 과학을 구분하지요. 사실, 그람시 생각은 그것과는 다른데, 우리는 흔히 이데올로기와 과학을 구분해서 ‘과학적 사고를 가지게 되는 순간 허구적인 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렇게 많이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렇게 쉽지가 않은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그런 방식으로 이데올로기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사람들의 의식이라는 것은 단순하게 어떤 사고방식만 바꾸어서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실질적인 이해관계와 체험, 이런 것들을 통해서 의식을 형성하는 것이지요. 이런 것들과 무관하게 그냥 나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싹 지우고 다른 것을 불러들여서 집어넣으면 ‘이제 내 생각은 완전히 사회주의적이야’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람시가 헤게모니 개념을 얘기했던 것이고, 저는 그런 차원에서 밑으로부터의 사고[를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중적입니다. 한편으로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있는 사고이면서, 그 속에서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나가는 것이지요. 그런 차원에서는 이런 방식의 헤게모니 투쟁이라는 것이 단순한 문제가 아니죠. 이것은 진리의 문제만이 아니고, 다양한 욕망의 문제, 체험의 문제 이런 것들이 같이 엮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죠. 그래서 실질적으로 대중의 의식이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죠. 우리가 그렇게 지역주의를 욕하지만, 보수주의고 반공주의고 얘기하지만, 몇십 년을 떠들어도 그런 사고가 바뀌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이데올로기, 허구 의식, 이런 것들을 깨야 돼’ 하고 얘기한다고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또, 아까 ‘과연 권력을 장악해서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느냐’, 또는 ‘실질적으로 권력을 잡고 있는 세력들은 민주주의를 통해서, 선거를 통해서 쉽게 변화시킬 수 없는 세력들이 아니냐’ [이런 얘기가 있었는데요.] 그 얘기도 맞는 얘기입니다. 실제 그게 힘드니까 좌파가 아무리 열심히 변화시켜 보자고 해도 잘 안 되는 것이지요. 그와 관련해서 아까 최일붕 선생님께서 잠깐 말씀하신 것을 가져다가 얘기하겠습니다. ‘민주노동당이 선거를 통해서 의석을 10개 얻었는데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은 별것 아니지 않느냐’ 하고 말씀하셨는데, 사실은 제가 보기에, 그 사이에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민주노동당이 등장할 당시에 좌파정당에 대한, 또는 좌파 세력에 대한 지지는 5퍼센트도 안 됐죠. 아마 2~3퍼센트 정도 됐습니다. 물론 국민승리21부터 말이죠.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나름으로 진보정당에 대한 지지도가, 넓게 봐서 10퍼센트를 왔다갔다 하고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이명박 정권이 ‘삽질’을 하면 조금 더 올라가기도 하고, 이렇게 되지요. 이런 부분들이 사실은 그냥 ‘그거나 그거나 똑같은 것 아니냐’ 이렇게 단순하게 얘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만큼의 변화가 있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더 많은 변화를 어떻게 추구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생산 영역의 민주주의’,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제가 생산 영역을 부정하는 것은 전혀 아니고 생산 영역만으로 얘기해서는 더 이상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산 영역과 소비 영역, 또는 공장과 시장의 연대, 노동 정치와 일상생활 정치의 연대, 이런 것들이 어떻게 가능하냐 하는 것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고, 그런 연대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까 [누군가] 사례로 든 비정규직 투쟁이 어떻게 됐다, 학생들이 오고 그랬다, 이것이 그런 연대의 틀이지요. 이것이 공장을 넘어선 연대입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정규직-비정규직 간의 갈등이 있고요. 이 사이에서 정규직은 자신들의 생존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비정규직을 가능하면 배제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 틀을 더 넘어설 수 있는 연대의 방식은 없느냐, 바로 이것을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이죠. 다양한 복지 제도를 통해 모두에게 기본적인 삶의 질을 보장할 수 있는 방식을 추구해 나가야 할 필요성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 뒤에는 혼혈의 경험을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 부분은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우리가 ‘민족주의, 민족주의’ 하는데, 외국에 나갈 경우에 이런 체험을 바로 할 수 있지요. 예를 들면, 외국에 가서 공항에서 내렸는데 평소에 보던 사람하고는 다른 사람들이 쫙 있으면 뭔가 자기와 피부색이 비슷한 사람을 찾으려고 하고, 또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나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일차적인 우리의 정서고 감정이지만, 사실은 그것을 한번 더 넘어설 필요가 있습니다. 아까 외국인 노동자와의 연대감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예를 들면, 사실 저도 미국에 가서 조금 있었습니다만, 공원에 가면 백인들도 있지만 멕시코 사람들이 놀고 있고 그러면 같은 소수자로서 연대감 같은 것들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부분을 아까 중요하게 말씀하셨는데, 상황과 맥락, 이런 것들이 민족이라고 하는 생각을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백인에 대한 막연한 부정적 생각도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보면, 그런 것들을 계속 극복해가는 과정이 될 수 있고 그런 것들이 조금 더 바람직한 형태의 의식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갈등의 다원성, 탈중심적인 전략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고 말씀하셨고, 가족에 대해서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떠넘기기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만약에 사회주의 사회에서 가사노동을 여성이 한다면, 이것은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여성에게 떠넘기는 전략이냐 라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꾸 자본주의로 돌리려고 하는데 저는 그런 생각이 상당히 위험하다고 봅니다. 자본주의가 문제인 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자본주의 사회에 있는 모든 문제는 무조건 자본주의의 문제다 하고 생각해 버리면 그것은 결국 환원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저는 자본주의가 만들어 내는 문제를 부정하자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만들어 내는 문제도 있지만 이것을 자본주의로 환원시켜 생각할 수 없는 문제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들을 같이 고민하지 않으면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서 생겨나는 문제들에 대해서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민들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일붕: ‘다원적 적대’, 또는 억압·차별이 자본주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에 대해서, 저는 문제가 그보다는 좀 더 복잡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동성애자 차별은 자본주의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동성애가 이성애보다 더 우월한 것으로 여겨지는 경향마저 있었지요. ‘플라토닉 러브’라는 말도 그것과 관련이 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또, 인종차별로 말하면, 자본주의 전에는 흑인에 대한 차별이 없었습니다. 고대 로마에는 황제 중에 흑인도 있었죠. 오직 노예제 무역과 함께 자본주의 상황에서 인종차별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한편, 여성차별은 자본주의 전에 존재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억압은 계급 사회의 등장과 함께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들어와서 여성에 대한 차별·억압은 좀 더 체계적이고 제도적이고 사회적이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여성이 사회와 노동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자본주의의 눈부신 생산력 발전이, 바로 자본주의가 가능케 해 줌으로써 여성이 해방될 수 있는 물질적 기초를 마련해 줬습니다. 특히 계급투쟁 속에서 평범한 여성들이 노동계급의 투쟁에 같이 동참하고,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함께 반자본주의적이고 바람직하게는 사회주의적인 운동에까지 동참할 수 있는 경제적·정치적·사회적 토대가 마련됐다는 것이 특징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차별과 억압은 분명 자본주의로 환원된다고 얘기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것은 자본주의로만 환원되지 않을지는 몰라도 자본주의에 와서 더 체계적으로 되었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에 와서 해방의 조건이 마련됐다는 점을 얘기하겠습니다.
둘째, 문화·인종·민족에 대해서 얘기하셨습니다. 민족과 인종은 때때로 겹치기도 하지만 같은 것은 아닌데요, 제가 다른 얘기를 할 게 많기 때문에 간단하게만 얘기하겠습니다. 아까 어떤 분이 국제적으로 돌아다니셨다고 했는데, 사실 저는 국제적으로 많이 돌아다니지는 않았습니다. 일생을 통해 미국에서 3년 반 살았고 다른 곳에서 살아본 적은 없습니다. 방문이라고 해 봐야, 기껏해야 영국·브라질·인도 정도이지만 저는 대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즉,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슷해져 가는가. 저와 마찬가지로 캐주얼한 차림을 하고, 먹는 것도 비슷하죠. 우리 모두 서민 음식을 먹죠. 반면에 지배계급은 우리가 볼 수도 없는 기가 막힌 공간과 환경에서 살고 있고, 벤츠나 캐딜락 같은 차를 타고 다니고, 산해진미를 먹고 … 완전히 문화가 다릅니다. 이건희하고 나 사이에 문화 공통점이 더 많으냐, 아니면 나하고 여기에 있는 크리스 하먼이나 조금 전에 혼혈 문제 얘기하신 분하고 문화 공통점이 많으냐 하면, 저는 오히려 여기[하먼과 청중 발언자]하고 더 많습니다.
외국인 출신이신 단국대학교 정수일 교수란 분이 있어요. 깐수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고 한국 이름이 정수일인데, 그분이 창작과비평사에서 고대 문명에 관한 두 권 짜리 책을 펴내셨습니다. 거기 보면 한국에서 고유한 것으로 알고 있는 소주 같은 것들이 고대 실크로드 시대에 한국에 들어왔다는 것이지요. 처용 같은 유명한 사람들도 외국 사람이었고요. 그리고 한국의 성씨 중에서 35퍼센트 가까이가 외국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2000년 11월 인구조사에서 자기들의 성이 외국에서 유래했다고 답변을 한 사람들이죠. 예를 들어 고려 몽고 출신들은 무슨 이 씨 성을 가지고 있고 그렇습니다. 그렇게 외국에서 유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문화도 그렇고 혈통도 그렇고 과거 고대 시대부터 융합되어 온 것이 역사입니다. 따라서 문화적 차이, 혈통의 차이 같은 것을 얘기하는 것은 허상적입니다.
거기다가 더 문제인 것은, 정치적으로 문제인 것은, 같은 인종, 같은 문화라는 그 베일 속에서 실제로는 계급 협조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심지어는 나치 같은 경우는 인종이나 독일 ‘민족공동체’를 얘기하는 가운데 지독한 억압을 자행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고려해 볼 때 민족주의나 인종주의, 문화 인종주의 같은 것들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마음 속의 잔재가 있다면, 그것은 계급투쟁 속에서 국제적인 연대, 소위 혈통이나 문화나 인종의 차이를 넘어선 연대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단련되지 않아서 [나타나는] 부르주아 사회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우리가 같이 연대하게 되면, 여성을 우리의 동지로 여기게 되고, 이주노동자를 우리의 동지로 여기게 되고, 소수자와 동성애자를 우리의 동지로 여기게 됩니다. 사실, 저는 30여 년 전에는 동성애자들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고 있었어요. 급진적 가톨릭, 혁명적 해방신학 입장이면서도 동성애에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뒤에 동성애자들과 함께 투쟁하는 가운데 동성애자들이 저하고 완전히 똑같은 동지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투쟁 속에서 우리가 그런 차이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겠습니다.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데, 저는 정태석 위원장님이 민주주의를 강조하신다는 것, 그것을 급진화시켜야 한다고 하신 것을, 거듭 말하지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을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 대다수 국민이 민주주의를 동의한다’, ‘민주주의를 쉽게 되돌릴 수 없다. 대다수 국민이 동의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지금 다원화 사회로 가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결정론적으로 얘기할 수 있을까요? 앞서도 제가 사례를 들었지만,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구현하던 곳은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이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초에 대공황과 노동계급의 무기력, 이 두 가지 요인이 결합되자 순식간에 히틀러가 집권을 했습니다. 그것도 폭력적인 혁명이나 쿠데타가 아니라 선거로 집권했습니다. 그 다음에, 순식간에 무기력한 노동자 당들,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을 분쇄해 버리고 유대인들 6백만 명 이상을 학살 공장에 보내 버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해서 민주주의가 되돌릴 수 없는 역전 불가능한 현상이라고 보는 것은 큰 위험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정태석 위원장님께서는 계급과 나란히 ‘다원적 적대’를 얘기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 정태석 위원장님의 강조점으로 보자면 계급이 아니라 다원적 적대라고 들리기도 합니다. 어쨌든, ‘등가’라고 얘기를 하시면서 계급 내적인 분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하십니다. 말하자면, 노동계급이 성에 따라, 성적 성향에 따라, 인종에 따라, 종교에 따라(우리 나라는 종교가 그리 심각하지는 않지만, 다른 곳 같은 경우는 종교에 따라), 연령에 따라, 사상에 따라, 신념에 따라 다양한 차별·적대 등에 의해서 계급이 내적으로 분화해 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물음을 던지셨습니다. ‘마르크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는 도대체 오늘날 어디에 있느냐’ 하고 말입니다. 저는 계급의 내적 분화를 부정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아까도 얘기했듯이 계급의 내적인 분화를 극복케 하는 반대 경향도 자본주의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계속 대도시로 사람들을 몰아넣고, 대규모 공장과 대규모 콜센터 같은 작업장으로 집중시킵니다. 또,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은 근로조건·생활조건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과정을 통해서 차이가 있는 다른 노동자 부문들과 연대를 하면서 연대감을 쌓아가고, 연대에 걸맞은 조직화를 하게 됩니다.
동시에, 차별·억압은 자본가들이 만들어낸 측면이 훨씬 더 강하다는 거예요. 정태석 위원장님이 《사회이론의 구성》이라는 책과 《시민사회의 다원적 적대와 급진민주주의》라는 책을 쓰셨는데, 제가 다 읽어 봤습니다. 거기 보면 루이 알튀세르 같은 입장을 따라서 이런 적대들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적 측면이 강하다, 다시 말해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노동계급이 내분해 있는 것이다 하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차별·억압이] 결코 우리가 저항할 수 없는 불가피한 구조적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차별과 차이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차이에 맞서 싸우는 것은, 헤게모니 투쟁은 단지 이데올로기 투쟁만이 아니라, 그람시가 강조했듯이, 힘을 사용하는 투쟁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힘이 있어야 사람들에게 설득력도 먹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진정한 헤게모니 투쟁, 그것은 바로 계급에 기초를 두면서도, 노동계급이 다른 소수자들, 피억압자들, 천대받고 차별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싸워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마르크스가 그토록 아일랜드인을 방어했듯이 말입니다. 마르크스는 미국의 흑인도 방어했습니다. 마르크스는 “검은 피부가 낙인인 곳에서 흰 피부의 노동자들은 결코 해방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자살론〉에서 약혼자와 성관계를 했다고 해서 주위 사람들한테 지탄을 받아 자살한 미혼여성을 방어했습니다. 마르크스는 1830년에 폴란드가 프러시아에 맞서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것을 방어했습니다. 마르크스나 레닌이나 트로츠키가 다 그랬습니다. 트로츠키는 “어느 사회의 진정한 평등의 잣대는 여성의 처지·상태로 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전통은 노동자가 자기들만의 이익을 위해서 싸우는 편협하고 이기주의적인, 그런 부문주의적인 투쟁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진정한 전통은 노동자가 모든 억압자들의 선봉장이 돼서 싸우는 것, 그래서 진정한 인류 해방을 위해서 성큼 자기 자신과 피억압자 모두를 해방시키고 마침내 종국적으로 인류를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노동자들은 이런 투쟁을 벌일 진정한 능력이 있습니다. 비록 그 점이 잠재적이며, 현재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그런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회주의는 주입시키면 되느냐’고 정태석 위원장님께서 말씀하셨지만, 파리 코뮌의 경험을 보십시오. 노동자들이 스스로 지방자치단체에 해당하는 자신들의 권력을 만들고, 대표를 뽑고, 대표들이 시원찮거나 허튼 수작을 할 때는 소환하고, 보통의 평균적인 노동자 임금만을 받게 하고 … 그런 파리코뮌에서 우리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볼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 혁명에서도 처음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외세와 내부 백군이 그것을 압살하기 전까지 러시아 혁명도 몇 년 동안 진정한 민주주의를 꽃 피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상황의 도래를 위해서 노력을, ‘헤게모니 투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 헤게모니 투쟁을 정말로 잘 할 수 있는 방법은 공동전선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제가 ‘중심’을 강요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중심은 여기에 있는 거고, 다원주의를 강조하는 분은 저기에 있는 거고, 그러나 우리는 함께 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직을 별개로 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제가 패권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다양성 속의 일치, 일치 속의 다양성을 누리면서 앞으로 전진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