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브렉시트: 세계사적 전환
이 글은 브렉시트 결과가 나온 직후인 6월 27일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에 발표된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Brexit: a world-historic turn’을 편역한 것이다.
6월 23일 영국인들은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하기(‘브렉시트’)로 결정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제국주의에 이 결과는 큰 타격이었다. 지배력을 행사하려고 세계적으로 구축해 놓은 각종 동맹 관계를 헝클어뜨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EU가 입을 타격이 몹시 크다. EU 지배자들은 지금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회원국 중 경제 규모는 2위이고 군사력과 금융산업 규모는 가장 큰 영국이 탈퇴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이번 결과는 국민투표와 관련된 EU의 불명예 기록을 또 한번 갱신한 것이다. 그리스(2015년), 아일랜드(2001년, 2008년), 네덜란드(2005년), 프랑스(2005년), 스웨덴(2003년), 덴마크(1992년). 이 모든 투표에서 민중은 EU를 거부했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논설가 볼프강 뮌차우는 오는 10월 이탈리아에서 치러지는 개헌 국민투표에서 총리 마테오 렌치가 패배하면 이탈리아도 영국의 뒤를 따를 수 있다고 우려한다.
영국 국민투표 결과는 세계 경제가 가뜩이나 취약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투표 몇 주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금리 인상을 미룬 것도 바로 세계 경제의 취약성을 보여 줬다.(그전까지 연준은 미국 경제 “정상화”를 위해 금리 인상이 필요하다고 했었다.) 〈워싱턴 포스트〉는 영국 국민투표 결과를 간결하고도 적절하게 묘사했다. “브렉시트 투표가 전 세계 물을 흐리다.”
영국 국내에서는 주류 양당이 모두 혼란에 빠졌다. 당초 이번 국민투표는 집권 보수당의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이 당내 우파를 달랠 묘수로서 꺼낸 것이었다.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는 캐머런이 무슨 생각으로 2013년에 국민투표를 약속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일화를 실었다:
“2014년, 유럽이사회 전前 의장 허만 반 롬퓌는 영국 총리 관저에서 캐머런에게 왜 그렇게 정치적으로 위험한 수를 뒀냐고 물었다. 캐머런은 스코틀랜드 독립 국민투표와 비슷하다면서 ‘저는 그 투표에서 손쉽게 승리해서 향후 20년 동안 스코틀랜드 독립 문제가 다시는 거론되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EU 문제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캐머런의 오만한 기대와 달리, 스코틀랜드 국민투표 때문에 영국은 거의 쪼개질 뻔했다. 노동당이 스코틀랜드 독립 반대에 한껏 힘을 실어준 덕분에 캐머런은 간신히 이길 수 있었다.(그 대가로 노동당은 스코틀랜드에서 지지 기반을 상당히 잃었다.)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보면,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초래할 타격이 더 큰 일이다.(게다가 이 때문에 스코틀랜드 독립 문제도 다시금 불거지고 있다.) 또한 보수당은 총선에서 뜻밖의 승리를 거둔 지 1년도 안 된 지금 당과 정부가 심각한 내분에 처했고, 캐머런은 총리직을 내려 놓게 됐다.
국민투표 운동이 시작될 때만 해도 보수당은 1990년대 존 메이저 정부 하에서 유럽 문제로 자신들이 분열한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당시 보수당 정부는 유럽과 가까워지는 문제를 놓고 심각한 내분에 휩싸여 정부의 통솔력이 떨어졌고, 이후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수십 년 만에 노동당에게 정권을 내줬다.) 그러나 올해에도 보수당은 잔류파와 탈퇴파로 좍 갈려서 서로 험악한 말을 쏟아냈다.
국민투표 전에도 정부 각료 사이의 긴장은 심각했다. 또한 2020년 총선 전에 물러나겠다고 밝힌 캐머런의 후임 자리를 둘러싸고 보수당 내 술책이 난무했고, 국민투표 선거운동 과정에서 1990년대의 적대감이 되살아났다. 브렉시트 상황에서 영국 자본주의와 정부를 안정화시키려고 벌어질 쟁투에서 이 요소들은 한층 더 강해질 것이다.
이처럼 보수당이 위기에 빠진 상황에 대해 두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첫째, 보수당 내 갈등이 왜 이렇게 첨예한 것일까? 둘째, 새 지도자가 등극하면 이 위기가 쉽게 진정될까? EU 잔류를 주장한 좌파 3인 ─ 녹색당 의원 캐롤라인 루카스, 노동당 예비내각 재무장관인 존 맥도널, 전 그리스 재무장관 야니스 바루파키스 ─ 은 이 질문에 답하기 쉽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영국이 EU에서 나가면 누가 가장 득을 보는가? 바로 영국의 정치·금융 엘리트다.”
그러나 이 말은 완전히 틀렸다. 선거운동 기간 중 자본가들이 브렉시트에 대해 온갖 험담을 쏟아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흔히들 핵심 자본가들의 입장이 어떤지 알고 싶을 때 참고하는 주요 기관들 ─ 예컨대 주요 투자은행, 다국적기업, 영국경총CBI, 영국중앙은행, 로이드은행, 유럽계 기업인 라운드테이블ERT, IMF, OECD ─ 이 모두 브렉시트를 비난했다.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강화되는 EU 규제에 항의하는 헤지펀드 정도가 예외일 것이다. 1980~90년대에는 유럽환율조정장치ERM나 유로존 가입 등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인 것과 달리, 오늘날 영국 대기업들은 유럽 문제에 대한 입장차가 훨씬 작다. 국민투표 결과가 나온 날 세계 도처에서 증시가 폭락한 것도 자본들이 어떤 결과를 원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올해 2월 캐머런은 특유의 기회주의적 수완을 발휘해 EU에게서 양보를 받아냈다. 큰 틀에서 보면, ‘영국에서 활동하는 자본’의 이익을 도모하는 내용이었다.(영국 자본주의는 매우 국제화돼 있어서 영국인이 운용하는 자본의 이익과 영국에 크게 투자한 외국계 자본의 이익 ─ 예컨대, 미국·일본·유럽계 은행과 자동차 기업 ─ 을 따로 구분하기가 어렵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그 협상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캐머런과 [재무장관] 오스본은 … 전략적 수를 뒀다. 전통적으로 영국 지도자들은 영국이 ‘유럽의 심장부’에 있다고 자처해 왔는데, 이번에는 영국이 주변부에 있다고 했다. 영국은 유로존에도 [회원국 간 입국심사를 없애는] 솅겐조약에도 가입해 있지 않아 유럽 대륙이 직면한 경제 위기와 난민 위기에서 한발 떨어져 있는 만큼 유럽이 한층 더 긴밀하게 통합되려면 영국에게 무언가를 보장해 줘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처럼 영국이 유럽의 주변부에 있다는 주장은 협상의 최종 결과에 반영됐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유로존의 역외 금융 중심지로서 영국 금융계(일명 시티)의 지위를 보장하고, 영국 정부가 EU 출신 이민자들에게 한동안 복지를 제공하지 않아도 되도록 허용한 것이었다.
영국 자본주의
과거 영국이 다른 유럽 강대국과의 경쟁에서 앞설 수 있었던 것은 영국이 산업 자본주의가 태동한 곳이었다는 점, 그 덕분에 세계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는 점 덕분이었다. 이런 점에서 인도는 영국에게 여러모로 중요했다. 영국 기업들에게는 시장을, 영국 국가에게는 세수와 병력을 제공했다. 19세기 보수당 총리 솔즈버리 경은 인도를 “돈 한푼 쓰지 않고 수많은 병사를 차출할 수 있는, 동양이라는 바다에 떠 있는 영국의 병영”이라고 불렀다. 인도에서 차출한 병력 덕분에 영국은 제2차세계대전 중 태평양 전장에 미국보다 2배나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있었다.
영국은 제국의 과잉 확장과 식민지 반란 때문에 1947년에 인도를 포기한 뒤에도 유럽으로 통합되기를 거부했다. 윈스턴 처칠은 제2차세계대전을 치르기 전에도 후에도 유럽합중국이라는 구상 자체는 지지하지만 영국은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처칠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유럽과 함께할 것이지만 그 일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전후에 들어선 노동당 정부도 같은 노선을 따랐다. 영국은 1951년 유럽철강석탄공동체ECSC 출범으로 막 첫발을 뗀 유럽 통합과 거리를 뒀다. 전임 보수당 정부와 마찬가지로 노동당 정부는 영국 제국주의가 미국과 소련 다음가는 “제3위 세계 열강”이자 미국의 충직한 동반자로서 최상위 결정 과정에 참여하기를 바랐다.
1956년에 벌어진 두 가지 사건은 이 환상을 깨뜨렸다. 첫째, 영국과 프랑스가 가말 압델 나세르의 이집트 민족주의 정권을 전복하려고 한 것을 미국이 가로막은 것이다. 이후 유럽 국가들은 그때까지 남아 있던 식민지도 빠르게 잃었다. 둘째, 1957년 3월 ECSC 회원국 6개국이 로마조약을 체결해 유럽경제공동체EEC를 결성한 것이다. 이를 통해 대륙의 유럽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영국을 추월할 발판을 마련했다. 반면 당시 영국 자본주의는 경쟁력 저하라는 만성적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후 1960년대의 노동당과 보수당 정부가 EEC에 가입한 것은 자신들의 과거 노선이 실패했음을 인정한 행동이었다. 1966년 영국 외무부가 작성한 문건은 영국 지배자들이 느낀 패배감이 얼마나 쓰라린 것이었는지 보여 준다.
“지난 20년간 이 나라는 표류해 왔다. 그 시기 내내 세계 무대에서 우리의 입지와 위상은 쇠락했다. 그래서 국민 사이에서 좌절감이 커졌고 사기가 떨어졌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모르고, 자신감을 잃고 있다. 희망과 활력을 되찾기 위해 새로운 목표와 새로운 사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지점에 도달한 것인지도 모른다. 유럽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자극과 목표를 줄 수 있을 것이다.”
1973년 “공식으로는 영국의 EEC 가입에 반대”했고 오늘날에도 EU에 회의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 영국 재무부에도 당시 비슷한 정서가 스며들어 있었다. 1990년대에 재무부 수석 경제 자문으로 일한 앨런 버드는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70년대 초 영국 경제는 너무 형편없어서 관료들은 EEC 가입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영국의 국운은 너무 기울었고 EEC 가입은 ‘지푸라기 잡는 심정’에서 나온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훗날 역사를 보면 영국 자본주의는 EEC와 그 후신인 EU를 통해 상당히 성공적으로 재건됐다. 유럽 통합 프로젝트에는 서로 다른 2개의 제국주의적 야심이 언제나 깃들어 있었다. 첫째, 미국의 야심이다. 미국은 유라시아 대륙 서부에 안정적이고 부유한 동맹이 있기를 바란다. 둘째, 유럽 열강들의 야심이다.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은 유럽이 통합되면 세계 무대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비록 미국의 지정학적 우위를 인정하는 한에서 그렇지만 말이다. 이 둘째 야심과 관련해서 영국은 프랑스·독일과는 시각이 조금 다르다. 영국은 혼자서 미국과 유일무이한 관계를 맺은 동반자가 되고자 한다.
이런 영국의 태도에는 물질적 토대가 있다. 그것은 영국 자본주의가 발전해 온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토니 노르필드는 최신작에서 영국 금융계가 지난 수십 년 동안 국제 금융 중심지로 발돋움한 과정을 설명한다.(미국 월스트리트는 규모로는 영국 금융계와 맞먹지만 거대한 미국 경제에 관여하는 데 더 치중한다.) 오늘날 영국 금융계는 외환 거래, 장외 파생상품과 국제 채권 시장, 은행 간 국제 거래의 압도적 중심지다. 노르필드는 1950년대 이래 모든 영국 정부가 때로는 미국 정책과의 충돌을 감수하면서도 영국 금융계를 지원한 과정을 추적한다. 그는 이 노력이 “영국 자본가들이 세계적으로 수익을 얻을 수 있게 하고 제국주의 열강으로서 영국의 지위를 확립하기 위한 메커니즘의 일부”라고 본다.
동시에 노르필드는 영국 금융계가 국제 금융의 중심지가 된 것은 세계의 생산적 자본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2013년 영국의 해외직접투자 규모는 1조 8천8백50억 달러로 세계 2위였다. … 이는 미국의 해외직접투자 6조 3천5백억 달러의 30퍼센트에 불과한 규모이지만, 경제 규모 비례로 보면 영국의 해외직접투자 규모가 더 크다. 〈파이낸셜 타임스〉가 2011년에 발표한 세계 5백대 기업을 봐도 비슷한 현상을 알 수 있다. 그중 영국계 기업은 34개로 시장 가치는 총 2조 8백50억 달러였다. 미국(1백60개 기업, 9조 6천2달러) 다음가는 2위였다. 또한 2013년 세계 1백대 비금융 기업(해외 자산 가치 기준) 중 미국계 기업은 23개, 영국계는 16개, 프랑스계는 11개, 독일계와 일본계는 각각 10개였다. 영국에 본사를 둔 대기업 3곳(로얄 더치 쉘, BP, 보다폰)은 각각 2위, 6위, 7위를 차지했다.”
이렇듯 영국 자본주의는 산업 혁명 이래 줄곧 그래왔듯이 여전히 주요 경제 중 가장 국제적인 성격을 보인다. 그래서 영국은 세계로 뻗어나가려는 지향성이 강하고, 같은 이유에서 영국 국가는 군사력에 있어서도 주요 강국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비록 그 군사력을 거의 언제나 미국과 보조를 맞춰 사용했지만 말이다. 노르필드는 한 나라의 권력을 다섯 가지 지표 ─ 명목 GDP, 국외 해외직접투자 규모, 국제 금융 자산과 채권의 규모, 외환거래에서 자국 화폐가 차지하는 비중, 국방비 ─ 로 측정할 때 “1위 미국과 큰 격차가 있지만 영국이 2위를 차지한다”고 했다. 자유주의 관점에서 평가한 또 다른 학자는 영국을 미국과 중국 다음가는 강국으로 “유럽의 마지막 남은 열강”이라고 봤다.
영국 자본주의가 차지하는 이런 세계적 위상 때문에 영국은 EU에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이다. 1992년 2월 체결된 마스트리히트 조약에서 영국이 유로화 적용 예외국 지위를 인정받은 것은 영국이 유럽 통합 프로젝트에서 한발 떨어져 있음을 보여 줬고, 1992년 9월 16일 “검은 수요일”이 닥치자 영국의 파운드화는 유럽환율조정장치에서도 탈퇴했다. 또한 1990년대 말 노동당 정부 시절 재무장관 고든 브라운이 유로존 가입에 반대한 것도 영국 금융계를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당시 총리 토니 블레어는 EU와의 관계를 영국이 경제적으로는 따로 행동하면서, 군사적으로는 유럽 전체가 (미국의 지도력을 인정하면서도) 더 커다란 협력체로 발전하도록 기여하는 식으로 맞추려 했다. 1999년 유고슬라비아 폭격을 나토가 주도한 것은 후자가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었다. 그런 점에서 블레어가 프랑스와 독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함께한 것은 그런 노력을 상당 부분 물거품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참으로 역설인 것은 영국이 고집스레 파운드화를 고집하고, 그럼으로써 로마조약 이후 가장 중요한 유럽 통합 프로젝트와 거리를 두고 있는데도, 영국 금융계가 유로존 금융의 수도가 됐다는 사실이다. 런던 금융계는 유로화로 이뤄지는 거래를 도맡아 처리한다. 그뿐 아니라 “유럽의 자본 시장과 투자 은행 수익의 4분의 3이 영국에서 거래된다.”(〈파이낸셜 타임스〉) 지난 몇 년 간 위기 속에서 유로존은 한층 더 높은 통합을 추구했고(예컨대, 유로화를 사용하는 거래는 반드시 유로존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규정하려는 시도), 그 때문에 영국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위태로운 듯했다. 캐머런이 2월 협상으로 얻어낸 것은 바로 유럽의 금융적 수도라는 영국 금융계의 위상을 지켜낸 것일 뿐 아니라 영국이 EU 안에서 특별한 지위를 누린다는 것을 공식화한 것이었다.(예컨대 로마조약은 조약국에게 “최대한의 통합”을 지향해야 한다고 규정하는데 영국은 예외국으로 인정받았다.) 2월 합의 이후에도 영국의 국민투표가 가까워짐에 따라 EU 집행위원회는 런던 금융계의 헤지펀드들에 대한 규제를 완화했다. 그러나 브렉시트라는 결과가 나오자 이 ‘당근’은 모두 사라졌고, 영국 금융계의 투자은행들은 유럽 시장 밖으로 밀려났다.
EU에 남는 것이 영국 자본주의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것이 그토록 확실하다면 어째서 보수당은 그 난리법석을 떨었을까? 그 이유는 “대처주의”와 “영국독립당”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1979년 보수당 총리 마거릿 대처는 영국의 위세가 기우는 것을 막겠다고 다짐하며 집권했다. 그가 신자유주의 공격을 무지막지하게 퍼붓고, 조직 노동계급에게 커다란 패배를 안기고, 1986년 규제완화 폭탄으로 영국 경제 구조를 금융계에 유리하도록 바꾸면서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영국이 과거 제국의 영광을 되찾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세계적 권력 분포가 변화하고 체제가 빠르게 변화하면서 영국 자본주의는 “검은 수요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군사 개입 실패, 2008년 경제 위기 등으로 거듭 취약함을 드러내며 수모를 겪었다.
보수당 내 대처주의 분파는 1990년대 메이저 정부 하에서도 지도부에 강하게 반기를 들었고, 블레어의 신노동당이 신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융합하는 것에도 (캐머런이나 오스본과 달리) 적대적이었다. 이런 대처주의자들에게 EU는 그들이 싫어하는 모든 것을 상징했고 자신들을 중앙무대에서 밀어낸 모든 원흉의 결집체였다. 그들은 영국이 EU에서 ‘대탈출’을 감행하면 과거의 ‘주권’을 되찾으리라고 생각한다.(그러나 그들의 기준대로라면 오늘날 미국조차 제대로 된 주권국이 아니다.)
영국판 네오콘임을 자처하며 EU 탈퇴를 주장하는 일부 보수당 정치인들(법무장관 마이클 고브, 전 국방장관 리암 폭스 등)은 또 다른 이데올로기적 환상도 가지고 있다. 영국이 EU에서 탈퇴하면 미국과 과거 영연방에 속했던 국가인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와 함께 자유무역이 보장되는 “앵글로 권역”을 이룬다는 장밋빛 구상이 그것이다.
이 구상은 정작 그들이 염두에 둔 국가들조차 거부한다는 문제가 있다. 버락 오바마는 4월 영국을 방문해서 브렉시트 논쟁에 개입하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이는 사실 미국의 전통적 대외정책을 재천명한 것이다. 즉, 미국은 유럽 통합을 지지하고, EU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강력하면서도 믿을 수 있는 동맹국이 그 결정에 관여할 수 있도록 영국이 EU 회원국으로 남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마치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1940년대 이래 자리잡은 미국 제국주의의 전략(전 세계에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질서를 수립하고 이를 미국의 군사력으로 뒷받침한다는 전략)을 거스르는 강령으로 공화당을 접수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영국에서도 대자본의 제1 정당이 그 대자본의 이해관계를 거스르는 역설이 일어난 것이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지배와 종속의 관계는 직접 생산자한테서 추출하는 부불 잉여노동의 구체적 형태에 달려 있고 생산 그 자체에서 생겨나지만, 바로 그 관계가 다시금 생산에 영향을 끼친다.” 실로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는 정치라는 상부구조에서 벌어진 갈등이 경제라는 토대에 큰 영향을 끼치는 사례라 할 만하다.
그러므로 브렉시트는 영국 자본주의가 플랜B로서 선택한 것이 아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 실시는 보수당이 변화를 겪으면서 내부에서 EU에 부정적인 입장은 커진 반면, 친EU 입장은 마이클 헤슬틴과 켄 클라크 같은 고리타분한 늙은이들이나 옹호하는 것으로 위상이 낮아진 상황이 그 발단이었다. 보수당의 이런 변화를 가속화한 요인으로는 영국독립당의 부상이 있다. 과거에는 “초국가” 유럽이 영국 주권을 위협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이 비교적 소수였지만, 영국독립당 대표 나이절 패라지는 이민 쟁점을 중심으로 EU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그런 생각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등 정치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패라지는 특히 EU가 2004년 이후 서유럽 너머 동쪽으로 확장하면서 중부유럽과 동유럽 출신 이민자가 늘어난 것을 집요하게 이용했다. 영국독립당이 보수당과 노동당 양쪽의 선거 기반을 잠식하기 시작하자 공식정치에서 이민 관련 논의가 우경화했을 뿐 아니라, 유럽 쟁점에 관한 주도권을 패라지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생각이 보수당 안에서 커졌다.
탈퇴의 정치학
보수당 내 탈퇴파는 브렉시트가 커다란 경제적 피해를 가져올 것이라는 자본들의 공격을 받자 더더욱 영국독립당과 비슷하게 행동하며 영국이 EU를 탈퇴하면 “국경 통제권을 되찾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약속도 허황된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것이다. 세계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에서 이민자가 늘어나는 것은 EU가 ‘이주의 자유’를 보장해서가 아니다. 현대 자본주의가 이주노동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탈퇴표를 던지도록 한 가장 강력한 요인은 인종차별이 아니다.
영국독립당이 성장하는 데는 정치·경제 엘리트들에 대한 평범한 유권자들의 반감도 크게 작용했다. 이 요소는 국민투표 선거운동 기간에 모순된 효과를 냈다. 한편으로 국민투표는 젠체하는 보수당 상류층 인사들 사이의 다툼 정도로 비춰졌다. 이는 당연히 평범한 사람들의 투표 의욕을 떨어뜨리는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기득권층이 브렉시트 반대 진영에 광범하게 결집했는데, 이는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기득권층에게 한 방 먹이자는 심정으로 탈퇴표를 던지도록 하는 요인이었을 것이다. 2016년 5월 중순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EU를 통해 진정 득을 보는 것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기업(36퍼센트), 은행가와 정치인(각각 32퍼센트)이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
대중 정서와 관련해서 중요하게 봐야 할 게 또 있다. 어느 여론조사를 보든 가난할수록 탈퇴표를 던질 확률이 높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국 노동운동의 주류 세력은 노동계급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전혀 대변하지 못했다. 아닌 게 아니라, 2015년 12월 시리아 공습에 관한 표결은 확고한 블레어주의자들이 노동당에 진을 치고 있음을 보여 줬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정부가 노조에 적대적인 법을 아주 조금 완화해 주자 열정적으로 잔류 진영에 뛰어들었는데, 정녕 창피한 줄 알아야 한다.(반면 좌파가 이끄는 노조 3곳 ─ 철도기관사노조ASLEF, 제과음식노조BFAWU, 철도해운운수노조RMT ─ 은 그런 시류에 합류하지 않음으로써 명예를 지켰다.) 노조 지도자들은 자신들보다 아주 조금 더 좌파적이었던, 잔류 진영 쪽의 ‘또 다른 유럽은 가능하다’ 운동본부와 함께 EU가 진보적 사회 개혁을 위한 기구라는 헛소리를 늘어놨다. 이는 현재 EU가 신자유주의 공격을 무지막지하게 퍼붓는 것을 미화해 줄 뿐 아니라, 사회 개혁을 쟁취하는 데서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하는 구실을 사실상 무시하는 처사였다.
최악의 장면은 계급협력적 정치가 나타난 것이다. 사디르 칸(노동당 소속 런던 시장)은 캐머런과 함께 유세 연단에 섰고, 녹색당 의원 캐롤라인 루카스는 보수당 인사들이 주축이 돼 구성한 잔류 진영 쪽의 ‘영국은 유럽 안에 있을 때 더욱 강하다’ 운동본부 이사회에 참가하며, 존 메이저 ─ 총리 시절 탄광을 폐쇄하고 철도를 민영화하고 국민보건서비스NHS 민영화를 선도한 인물 ─ 가 탈퇴파 보리스 존슨을 비판할 때 환호했다. (안타깝게도 탈퇴 진영에서도 리스펙트 당의 조지 갤러웨이가 패라지와 함께 유세 연단에 섰다.)
이렇듯 EU 옹호론자들이 계급을 가로질러 손을 잡을 때, 노동당 대표 제러미 코빈은 나름 영리한 태도를 취했다. 예비내각에 참여하는 블레어주의자들의 압력을 받은 코빈은 당대표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EU 잔류를 지지하는 입장을 내놓아야 했다. 그럼에도 코빈은 EU를 열렬히 옹호하지는 않았다. 코빈은 보수당 인사들과 함께 유세 연단에 서기를 거부했고, 6월 초에는 EU 옹호 주장을 하라고 마련된 연설 자리에서 잔류 진영 내 보수당과 EU 자체를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당시 중도 좌파 잡지 〈뉴스테이츠먼〉은 이런 코빈의 태도를 못마땅해 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코빈은 당내 반대파들이 코빈의 열의를 문제 삼는 것이 사실은 다른 저의 때문이라는 인상을 줄 만큼만 EU에 관해 좋은 소리를 했다. 그러고 나서는 자신의 핵심 지지자들이 좋아할 TTIP[미국과 EU가 맺으려 하는 신자유주의적 무역협정] 비판과 철도를 재국유화[EU를 거스르는 조처] 주장을 했다. 더 중요하게는, EU에 반대하는 노동당 내 소수파 의원과 활동가들이 ‘코빈도 속으로는 우리와 함께하고 있어’ 하는 인상을 받도록 행동했다.”
아마도 코빈은 이번 국민투표가 본질적으로 보수당 내부 문제이고, 노동당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된다고 여긴 듯하다. 코빈의 행보는 영리한 처신일 수도 있고, 전통적 노동당을 지지자들에게 탈퇴표를 던지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분명한 정치적 지도를 제공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만일 코빈이 공개적으로 EU 반대를 긴축 반대와 결합시켰더라면 지난해 9월 그를 당대표로 앉힌 광범한 운동을 한층 더 강화했을 것이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코빈 매니아는 청년의 운동이고 소셜미디어의 운동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노동계급의 운동이었다. 노동당 대표 경선에서 투표한 사람들은 대체로 전체 영국인 평균보다 교육을 더 많이 받고 형편도 괜찮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중 전체 평균에 가까운 사람들은 대체로 코빈을 지지했다. 코빈 지지자들 가운데 연봉이 4만 파운드(6천만 원) 이상인 사람은 26퍼센트뿐이었다. 이는 전국 평균인 27퍼센트보다 조금 낮은 것이다. (반면 다른 당대표 후보 3인의 지지층에서 이 비율은 각각 29, 32, 44퍼센트였다.) 다시 말해 코빈은 유복한 이상주의자 청년들과 노동계급 내 좌파를 모두 얻은 것이다.”
그런데 코빈이 모호한 입장을 취하면서 탈퇴표를 던지고자 한 많은 노동계급 사람들을 영국독립당의 패러지나 보수당 탈퇴파 존슨에게 사실상 떠미는 효과가 냈다. 그럼에도 이번 투표 결과에는 이질적 요소가 많다는 것을 유념해서 봐야 한다. 많은 급진좌파와 자유주의 좌파는 인종차별적이고 이민자와 난민을 배척하는 사람들이 탈퇴 진영의 주된 동력이고, 탈퇴 진영이 승리하면 보수당 내 대처주의자들이 득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명 인사 빌리 브렉은 그런 인물 중 한 명으로 트위터에 이런 말을 썼다. “탈퇴표를 던지는 사람이 모두 인종차별주의자인 것은 아니겠지만,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모두 탈퇴표를 던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단순한 사실 몇 가지만 봐도 이 말이 틀렸음을 알 수 있다. 캐머런과 오스본은 지난 6년 동안 정부를 이끌면서 대처는 상상도 못했을 정도로 신자유주의를 진척시켰다. 잔류 진영에 속한 재계의 거물이 탈퇴파인 노동당 의원에게 “1974년생 이민자가 … 우리 영국인들에게 이래라저래라 가르치려는 것이냐” 하고 끔찍한 말을 했다. 이것만 봐도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오롯이 한쪽에 있었다는 주장이 틀린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한 파시스트가 노동당 조 콕스 의원을 살해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자 그런 피상적인 진단이 힘을 얻는 듯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탈퇴파의 지도자들은 사기저하된 반면, 잔류파는 국민투표가 인종차별에 관한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논쟁 구도를 이런 식으로 몰아가는 데 앞장 선 것은 노동당 지도부였지만, 캐머런과 ‘영국은 유럽 안에 있을 때 더욱 강하다’ 운동본부도 마찬가지였다. 동시에 노동당의 톰 왓슨 부대표와 존 맥도널, 유나이트 노조의 렌 맥클러스키 사무총장은 영국이 EU에 남더라도 노동자들이 이주할 자유를 어느 정도 제한할 필요가 있다며 후퇴했다.
이런 후퇴는 노동당 의원단과 노조 지도자들(압도적으로 잔류를 지지했다)이 보기에도 노동계급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탈퇴표를 던질 것이 확연해졌는데, 그런 선택은 인종차별적 동기 때문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인종차별이 영국과 유럽 전역에서 무섭도록 자라고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조 콕스 살해를 근거로 영국에서 공공연한 파시스트들이 빠르게 조직되고 있다고 보는 것은 과장이다. 영국에서 파시스트 세력은 분명 존재하고, 그들을 끈질기게 감시하며 필요할 때는 맞불 집회도 조직해야 하지만, 지금 그들은 규모도 영세하고 자기들끼리도 반목하고 있는 처지이다.
EU=신자유주의 화신
이민자 배척적 인종차별 선동의 영향을 받아 탈퇴표를 던진 사람이 꽤 많으리라는 것은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 봤듯이 이번 국민투표에서는 경제·정치 엘리트에 대한 반감도 인종차별만큼이나 중요하게 작용했다. 지난 40년간의 신자유주의, 10년 가까이 지속되는 경제 위기, 정체되거나 떨어지는 임금, 해결되지 않는 실업 문제, 공공주택은 갈수록 악화되고 복지국가는 나날이 약해지는 현실이 엘리트 층에 대한 반감을 낳았다. EU를 신자유주의 화신이자 민주주의 침해 기구로 비판하는 것은 그런 정서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국제 금융의 중심지인 런던에서는 잔류표가 더 많이 나왔지만 잉글랜드의 나머지 지역과 웨일스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탈퇴표가 쏟아졌다. 한 분석에 따르면, 잉글랜드 북부의 투표율이 이례적으로 높았던 것이 균형 추를 탈퇴 쪽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잉글랜드 북부와 북동부, 웨일스에서 탈퇴표가 많이 나온 것에 대한 다음 분석을 보자.
“이 지역들은 누구나 인정하듯 노동당의 오랜 근거지이고, 탄광과 조선소가 있던 곳들이다. 또한 2015년 총선에서 런던과 스코틀랜드를 제외하고 노동당이 승리한 몇 안 되는 곳들이었고, 올해 가을에 총선이 치러져도 여전히 노동당의 표밭이 되리라고 예상되는 곳들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들의 용어를 빌리면, 이 지역들은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이래 ‘공간적 조정’의 수혜를 입지 못했다. 대처가 갱도를 폐쇄하고 통화주의를 통해 이 지역을 피폐하게 만들었지만, 그 공백을 채워 줄 민간부문의 일자리는 생기지 않았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이 지역들에서도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투자자가 곧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노동당의 해결책은 정부 재정을 이 지역들에 풀어 부가 조금 흘러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산업공동화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공공부문에 기반한 일자리를 웨일스 남부와 [잉글랜드] 북동부에 배치했고, 세금 공제를 통해 생산력이 떨어지는 서비스 부문의 생존을 도왔다. 이는 사실상 복지 제도 같은 구실을 했다. 비록 제도화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 대신 이 지역들이 다른 지역에 기생한다고 보는 정치 풍토가 자라났다. 노동당은 자기 근거지의 유권자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으니 결국 우리에게 투표할 수밖에 없을 것 아니냐’ 하는 태도를 취했다. 신노동당은 이 지역들에서 ‘재분배’를 도왔을지 몰라도 ‘존엄’을 되찾아주지는 않았다.
“이런 문화적 모순은 계속 지속될 수 없었고 또 지리적 모순도 마찬가지였다. ‘공간적 조정’은 그 효과가 단기적이었을 뿐 아니라, 탈퇴표를 던진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갈망한 것, 즉 자립함으로써 자존감을 지키고 싶다는 바람을 전혀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그 지역들이 남동부 지역에서 갈수록 오르는 세금에 기생하고 중도좌파 정부는 그 돈을 (편파적으로) 흥청망청 쓴다는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투표 당일 나온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탈퇴표를 던진 사람의 49퍼센트 가까이는 EU를 떠나고 싶은 가장 큰 이유로 “영국에 관한 결정은 영국에서 내려져야 한다는 원칙”을 꼽았다. 반면 “영국이 다시금 국경과 이민을 통제할 수 있기를 원해서”를 꼽은 사람은 33퍼센트였다. 탈퇴표를 던진 사람들 중에는 흑인과 소수인종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 “백인 유권자는 53:47로 EU 탈퇴에 더 많은 표를 던졌다.” 또한 아시아계라고 응답한 사람의 33퍼센트, 흑인이라고 답한 사람의 27퍼센트도 탈퇴를 선택했다. 기독교인이라고 응답한 사람 58퍼센트가 탈퇴를 택했을 뿐 아니라, 무슬림 10명 중 3명도 탈퇴를 택했다.
그러나 보수당이 양 진영을 모두 주도하고, 영국독립당이 끊임없이 압력을 행사하면서 선거운동 기간 중 논쟁은 인종차별과 이민자 쟁점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이 구도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고, 그러지 못한 데에는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책임이 매우 크다. 그들은 좌파적 입장에서 EU를 비판할 기회를 내던졌다. 반자본주의자나 국제주의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과거 토니 벤이 그랬듯이 좌파 개혁주의자로서도 EU를 비판할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여기에는 유럽의 급진좌파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이 있다. 유럽의 많은 급진좌파는 코빈이 그랬듯이 여전히 “EU 안에 남아서 개혁하자”는 입장을 고수하한다. 지난해 그리스 시리자 정부가 EU 핵심 국가들과 유럽중앙은행에 의해 굴욕을 겪는 것을 본 뒤에도 여전히 그렇다. 이런 입장은 단지 무능의 문제가 아니다. EU 반대 진영을 송두리째 인종차별주의자와 파시스트에게 넘겨 준다는 문제가 더 크다. 독일에서 급진좌파 정당 디링케가 유럽연합 개혁 프로젝트를 고수하는 동안,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유로화 반대, 이민자 배척적 인종차별, 무슬림 혐오를 결합시키며 디링케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다시 영국 정치로 돌아 가자. 과연 브렉시트 투표 이후 영국 정부는 다시금 전열을 다듬고 원상복구될 수 있을 것인가? 현 정부는 선거 결과가 나오기 전에도 이미 위태로운 처지였다. 지난해 총선 이래로 정부는 거듭 후퇴했다. 오스본은 노동자들 감세 혜택 삭감, 장애인 수당 삭감, 일요일 영업 시간 연장, 연금생활자 감세 혜택 삭감, 학교 민영화 강행, 보호자 없는 아동 난민 수용 거부 문제에서 거듭 후퇴했다. 그 이면에는 보수당 안에서 캐머런과 오스본에 적대적인 소수 강경 우파 의원들이 보수당 의석이 절반을 조금 넘는다는 점을 이용해 공격한 것이 있었다. 이제 보수당 내 우파는 브렉시트 투표 결과에 고무돼 EU 탈퇴 절차를 서두르라고 압박할 것이다.
이렇게 분열된 현 정부는 앞으로 서로 충돌할 세 가지 일을 해야 한다. 첫째, 새 총리를 구해야 한다. 이 과정은 보수당 내 갈등을 한층 더 악화시킬 공산이 크다. 둘째, 시장을 안정시켜야 한다. 이는 영국 자본주의에게 EU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만만한 일이 아니다. “검은 수요일”은 하루로 끝났지만 파운드화와 영국 증시는 한동안 힘든 시기를 겪을 수 있다. 셋째, 의원들이 대부분 브렉시트에 반대하고 지배계급의 핵심부는 국민투표의 의미를 애써 흐리려 하는 가운데, 정부는 절반이 조금 넘는 의석을 가지고서 전문가들이 모두 험난하고 지난한 과정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EU와의 탈퇴 협상을 벌여야 한다.
영국은 EEC에 가입한 지 2년 뒤인 1975년 ECC에 계속 잔류할 것인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시행했다. 이에 대해 역사가 휴고 영은 이렇게 썼다. “논란의 종지부를 찍은 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는 사실에 양쪽 모두 동의한다. 당시 탈퇴 진영은 영국인들에게 유럽 바깥에서 살아 남는 것에 대한 확신을 주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두려움보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거치며 누적된 불만이 더 컸다. 그러나 탈퇴 진영 지도자들이 영국인들에게 확신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똑같다. 그들은 영국 자본주의가 장차 어디로 가야 할지를 놓고 우물쭈물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코빈은 대안을 제시하기에 좋은 자리에 있다. 그는 국민투표 선거운동 동안 EU와 거리를 둔 덕분에 탈퇴표를 던진 수많은 노동당 지지자들과 관계를 복원하기 나쁘지 않다. 그러나 예비내각에 속한 블레어주의자들은 브렉시트 결과를 근거로 코빈을 밀어내려고 한다. 놀라울 정도로 오만한 행동이 아닐 수 없는데, 이 쿠데타를 획책하는 자들이야말로 코빈보다 당 지도부에 훨씬 더 오랫동안 있어 왔던 만큼, 투표에서 패배한 책임이 더 크기 때문이다. 캐머런과 함께 잔류를 주장한 것도, 투표에서 패배한 것도 바로 그들이다. 더욱이 보수당의 위기를 이용해 조기 총선을 끌어낼 수도 있는 상황에서 노동당을 분열시키는 행위의 어리석음은 가히 범죄라 할 만하다. 그러나 코빈을 밀어내는 데 혈안이 된 힐러리 벤 같은 자들은 ‘대지를 불사르는 것’만이 노동당 안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보는 듯하다.
향후 몇 달, 어쩌면 몇 년 동안 영국 정치에서는 ‘EU 내 이주의 자유’라는 쟁점이 지배적 화두일 것이다. 보수당의 탈퇴파 존슨과 고브는 브렉시트가 정해지면 더는 이 원칙을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캐머런의 후임자가 누구이든 그는 유럽 시장에 남길 바라는 영국 대자본의 압력을 받을 것이고(그래야 영국 금융계가 EU의 금융 관련 업무를을 처리할 수 있다), 그 대가로 EU는 영국에 이주의 자유 보장을 요구할 것이다. 국민투표 선거운동 기간 코빈은 이 점을 지적하며 이민 규모를 제한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 이제는 같은 이유로 이민 규모 제한을 받아들이라는 압력을 받을 것이다. 코빈에게 그런 압력을 넣는 사람들은 그래야만 코빈이 지도력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유명한 급진좌파로 잔류 투표가 진보적이고 국제주의적인 실천이라고 강변했던 폴 메이슨은 투표가 끝나자마자 이제는 총선에서 이겨야 한다며 이주의 자유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투표를 거치면서 영국 사회에서 인종차별 물결이 더 강화됐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사태가 온전하게 보수당, 영국독립당, 파시스트들의 바람대로 진행되지는 않고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2015년 가을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난민에 대한 연대 물결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영국에서도 난민을 다방면으로 지원하는 기층 네트워크가 많이 생겨났다. 이미 지난해 9월 영국 인구의 31퍼센트는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난민 지원 활동에 참여했다. 주류 정치권에서는 난민 지지 목소리가 없었음을 감안하면(코빈과 그의 동료들은 예외), 난민 지원 운동이 스스로 조직화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 운동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영향력을 상쇄할 강력한 힘이 있다. 런던 시장 선거에서 보수당이 무슬림인 노동당 후보 사디르 칸에게 인종차별적 비난을 퍼부으면서도 참패한 것은 인종차별적 공격이 언제나 이기는 것은 아님을 보여 줬다. 대도시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살면서 일상적으로 체득하는 관용은 인종차별에 맞선 방벽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저변에 흐르는 인종차별 반대 정서는 조직돼야 한다. ‘인종차별에 맞서 일어서자’(Stand Up To Racism)가 결성된 것은 그런 노력이 광범한 호응 속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인종차별에 맞서 일어서자’는 올해 3월 19일 인종차별 반대의 날 국제 행동을 건설했고, 6월 18일에는 정부 반대를 뚫고 프랑스 깔레의 난민촌에 구호품을 전달하기 위한 운동을 조직했다. 이번 국민투표 과정에서 좌파적이고 국제주의적 관점으로 EU를 비판한 ‘렉시트’(영어 단어 ‘좌파’와 ‘탈퇴’의 합성어)가 결성된 것도 주요 성과 중 하나다. 렉시트가 중요한 것은 자체적으로 탈퇴표를 많이 끌어왔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급진좌파를 결집시켰기 때문이다.
계급적 관점에서 EU를 거부하고자 한 노동계급 사람들을 대변해서 렉시트는 작았을지라도 중요한 정치적 목소리를 냈다. 노동당 좌파가 중심이 된 ‘다른 유럽은 가능하다’ 운동본부 지도자들이 계급 협력적으로 행동한 것과는 다른 대안을 보여 줬다. 또한 영국 극좌파가 지난 수년간 부진함과 쇠퇴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을 상기하면, 서로 다른 전통의 조직들이 잘 협력한 것은 중요한 전진이다. 그러나 전체 영국 좌파 가운데 렉시트는 소수였고, 나머지 좌파는 대체로 EU가 신자유주의와 인종차별에 맞설 보루라고 확신했다. 그 때문에 논쟁은 거칠었고 특히 투표일이 가까워질수록, 그리고 투표 결과가 나온 뒤에, SNS에서 더 그랬다.
·제국주의 괴물과 이를 지원하는 영국 자본주의의 핵심 부문이 주도하는 잔류 진영, 이민자를 혐오하고 인종차별적인 대처주의자들이 주도하는 탈퇴 진영 사이에서 양자택일할 수밖에 없는 난처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이번 국민투표가 보수당의 분열로 시작된 만큼 어느 진영에 서든 보수당 일부와 함께 표를 던지게 돼 있었다. (물론 기권도 한 방편이었겠지만, 그랬다면 영국에서 향후 몇 년간 볼 수 없을 만큼 크게 벌어진 정치 논쟁의 뒤켠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투표 결과로 말미암아 장차 영국은 더 많은 격랑에 휘말릴 것이다.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크게 위험해질 수도 있는 만큼 영국의 급진좌파는 유럽 문제에 대한 이견을 불비례적으로 강조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이번 국민투표는 양 진영 모두에게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하자. EU라는 신자유주의영국뿐 아니라 어쩌면 전 세계 자본주의 앞에 험난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보수당은 이를 헤쳐 나가려고 더 많은 공격을 할 것이 확실하다. 당장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려고 더 많은 긴축을 추진할 수 있다. 당분간 영국 정치에서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문제와 EU 잔류와 같은 문제들도 계속해서 블랙홀 구실을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영국과 EU가 앞으로 맺을 관계를 결정하는 협상이 진행될 것이다. 그 과정에 개입하는 것이 중요한데, 단적으로 이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 자체를 쪼갤 수 있는 국민투표가 스코틀랜드뿐 아니라 북아일랜드에서도 치러질 수 있다. 또 당장은 노동당 우파에 맞서 싸워야 한다. 인종차별과 긴축과 전쟁에 맞서고, 지난해 코빈의 당선으로 생겨난 정치적 공간을 지키기 위한 단결이 시급하다.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