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육과 혁명
교육과 혁명 *
러시아 혁명의 위대한 사회주의 교육 실험
이 글은 필자의 이전 소책자 《교육과 사회》에서 밝힌 주제를 완성한 것이다. 즉, “교육만큼 사회의 성격을 민감하게 보여 주는 지표도 없다. 교육은 학생들이 모두 성인 세대의 발자취를 따르고 해당 사회의 특징을 재생산하도록 가르치기 때문이다.”
혁명적 격변이 일어날 때 교육 제도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가 뒤따르기 마련이라는 것을 역사는 언뜻 보여 준다. 희망과 흥분으로 가득했던 노동자 권력들은 비록 단명했지만, 거대한 일보를 내딛고, 혁명적 변화를 도입하고, 후세대 투사들에게 영감을 주는 새로운 교육을 창조했다.
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이룬 최초의 성과는 매우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 뒤 스탈린의 절대 권력이 등장하고,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에 5개년 계획들이 시행되는 등 엄청난 압박 속에 러시아 혁명은 후퇴하는데, 이때의 얘기는 교훈을 준다.
서문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관은 모두 문제제기를 받고 있다. 교육계에서는 청년들이 체제 순응적 인간으로 길러지는 것에 저항한다. 점점 많아지고 있는 교사들도 자신이 왜곡된 인간을 만드는 도구로 이용되는 것에 저항한다.
현재의 교육 제도는 노동 분업이 능률을 올린다는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노동 분업과 그에 따른 조기 직업훈련과 전문화, 그에 수반되는 경쟁은 개성을 일그러뜨리고 편협한 반쪽짜리 인간으로 만들며 ‘바보 전문가’를 양산한다. 체제는 이윤에만 관심 있을 뿐 그 이윤을 만드는 노동자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사회주의 혁명은 모두 이런 교육 제도의 근간을 철저하게 파괴하며 사회 구성원 각자의 개성을 모두 발전시킨다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부족한 열매를 놓고 타인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풍요를 이루고 이것이 다시 각각의 개성을 기르는 자양분이 되고 각각의 개성을 고무하는 식으로 말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직후 공표된 1차 교육법은 서문에서 혁명의 정신과 이상을 분명히 밝혔다.
개성은 사회주의 문화에서 최고의 가치가 돼야 한다. 그러나 개성은 조화로운 평등 사회일 때만 영화롭게 발전할 수 있다. 우리(예컨대, 정부)는 개인들이 고유하게 발전할 권리가 있음을 잊지 않는다. 우리는 개성을 가로막거나 박탈하거나 틀에 박힌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공동체의 안정성은 획일화된 막사, 인위적 훈련, 종교적·미학적 속임이 아니라 공통 관심사에 대한 실질적 결속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교육에서 어떤 노력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초기 노동자 혁명들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최초의 혁명적 격변은 1871년 단명한 파리코뮌이었다. 파리 노동자들은 권력을 잡자마자 낡은 질서를 해체하는 일에 착수했다. 파리코뮌은 72일 동안 존속했다. 코뮌은 모두를 위한 무상 의무 학교 교육을 도입했다. 코뮌이 세운 학교는 필기구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교회와 국가의 간섭에서 벗어난 세속 교육을 실시하고, 각 지역 코뮌에 자치권을 부여하고, 미신으로부터 벗어나 이성과 과학적 실험에 근거를 둔 합리적 수업을 실시하고, 관습이나 종교적 교리에 근거하는 전통적 도덕에 반대해 연대와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이성적 도덕을 가르치고, 학생들을 학교 울타리 안에 가두는 비정치적 교육에 반대해 혁명적 활동 참가를 목표로 한 사회 정치적 교육을 지향하고, 예술을 가르치고, 교육과 산업을 연결(‘산업 디자인’)시키려 했다. 코뮌 교육위원회가 연 학교에는 이런 공고문이 붙었다. “과학적 문학적 소양을 기르는 과목들과 실습을 주로 하는 과목들을 조화롭게 가르칠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요소들을 모두 교육의 원리에 담았다. 이 원리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은 러시아 혁명 이후 입증됐다. 특히 교육과 산업의 연계가 근본적으로 중요했다.
이렇게 코뮌은 권력을 잡은 민중이 참여해 교육을 통제했다.
1917년의 ‘예행총연습’인 1905년 러시아 혁명 때 교육에 대한 민중 통제의 여러 모습이 쏟아져 나왔다. 학생들은 총파업과 봉기에 참가하면서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통제했다. 모든 중등학교 교실에서는 반 대표를 선출했다. 반 대표들은 자기 반 학생들의 규율과 규칙을 감독했다. 학생들은 각 마을 파업위원회에 파견할 대표들도 선출했다. 그러나 투쟁이 후퇴하며 학교는 근본적 변화로까지 나아가지 못했고, 6개월 뒤 정부는 이런 형태의 ‘자치’를 금지했다.
러시아 혁명
교육의 발전이 가장 멀리까지, 그것도 가장 흥미진진하게 진척된 때는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을 때다. 옛 질서가 일소되면서 볼셰비키가 새 교육 제도를 실험할 커다란 무대가 생겨났다.
소비에트 교육자들이 벌인 토론과 논쟁은 흥미진진하다. 그들의 열정이 얼마나 컸는지, 학교들이 개학 시기를 놓쳐 한 달 뒤인 10월에서야 개학할 정도였다.
이 글은 당시의 사태 전개를 간략하게 기술하면서, 당시에도 중요했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도 타당한 면들(예컨대 보편적 의무교육을 위한 투쟁)을 강조하는 데서 그쳐야 할 것 같다.
소비에트 교육자들은 파리코뮌과 1905년 혁명 같은 역사적 경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의 교육 철학, 전 세계 진보적 교사들의 이론과 실험적 실천을 크게 참고했다.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로 쓰인 심리학, 교육학, 교수법 서적들을 번역했다. 저명한 미국인 교육자들은 미국 못지 않게 소련에서도 잘 알려지게 됐다. 모두가 교과목, 교수법, 학교위원회, 고등교육·성인교육의 형태에 관한 방대한 실험에 기여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슬픈 현실 사정이 결국에는 다른 무엇보다 큰 문제였다. 러시아는 매우 낙후한 나라였고, 문맹률이 60퍼센트가 넘었다.(일부 농촌 지역에서는 90퍼센트가 넘었다.) 1921년까지 22개 전선에서 치른 내전과 갓 태어난 혁명을 분쇄하려는 적국들의 침략으로 러시아는 황폐해졌다. 1921~22년에는 기근이 덮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1919년의 산업은 1913년의 13퍼센트 수준밖에 안 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지에서 일어난(그리고 다른 나라들에서도 막 시작된) 서구 혁명들 — 고립된 후진성에서 벗어날 소비에트 권력의 유일한 희망 — 이 모두 분쇄당했다. 자력으로 버텨야 하는 상황에서 혁명이 낳은 위대한 교육적 이상은 희생되거나 일그러졌다. 문맹 퇴치, 숙련 노동자와 기술자를 신속히 양성하기 위한 직업 훈련이 최우선 과제로서 해결돼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러시아 혁명은 고립된 채 절망적인 경제 상황을 해결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혁명 초기와 이후의 후퇴 사이에 원칙과 실천은 어떻게 변해 갔을까?
1918년 교육법이 밝힌 사회주의 교육의 목표
볼셰비키의 교육 강령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1903년에, 다른 하나는 (10월 혁명 전인) 1917년 5월에 작성한 것이다. 두 교육 강령은 혁명 이후의 실천 방향을 설명하고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파리코뮌의 혁신과 놀랄 만큼 비슷했다.
혁명 직후부터 정책 성명과 포고령이 봇물 터지듯 발표됐다. 그 내용은 체계적으로 정리돼 1918년 10월 16일 공표된 교육법에 처음으로 담겼다. 1918년 교육법은 ‘통합 노동 학교의 기본 원리’가 발표된 뒤에 제정됐다. 1918년 교육법이 담고 있던 혁명의 정신과 이상은 앞의 서문에서 인용된 내용이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1 “통합 노동 학교의 목표는 특정 기술 연마가 아니다. 학생들에게 ‘과학·기술종합’ 교육을 제공하고 노동 방법에 관한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다.”
1918년 교육법이 그린 사회주의 공동체는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가 사라지고 결속된 인간들이 자연을 이용하는 일종의 ‘단일 공장’이었다. 그러므로 미래의 ‘자연의 주인’을 교육하는 것이 학교의 목표가 됐다. 이 목표를 성취하는 방법은 다면적이고 포괄적인 ‘과학·기술 종합 교육’polytechnic education이었다.1918년 6월 혁명적 교사들(러시아 교사 중 소수)의 대회가 개최됐다. 이 대회는 전인교육을 이룰 수단으로서 과학·기술 종합 교육의 주요 측면을 설명했다.
새 학교의 주된 목표는 다방면의 발전을 이룬 창의적 개성을 기르는 것이어야 한다. 교육은 과학과 기술을 종합해서 가르치는 방향으로 가야 하고, 학교는 자주적 활동과 공공적 이용을 위한 생산적 노동을 기초로 두면서도 지역 사정에 맞게 일하는 코뮌으로 바뀌어야 한다. 학교는 삶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일치해야 하며, 조화롭게 발전한 인류를 창조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1918년 교육법의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조: 학교급을 두 단계로, 즉 1단계 5년제(8~13세)와 2단계 4년제(13~17세)로 나눴다.(두 단계는 “통합”돼 있어서 보통 학생들은 모두 당연히 상급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반면, 차르 치하의 교육 제도에서는 1단계를 졸업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상급 학교 입학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3조: 모든 학교와 모든 학년에 무상교육을 도입했다.
4조: 8~17세 아동에 대한 의무교육을 선포했다. 가령, 1조에서 말한 두 단계 교육 과정의 이수가 평균적 학생들의 목표라고 선언했다.
5조: 학교를 모두 남녀공학으로 한다고 확정했다. 이는 5월 3일 포고령으로 도입된 것이었다.
6조: 교육의 세속화를 명시해 모든 학교에서 종교 수업을 금지했다.
11조: 사립학교의 존재를 허용하고, 심지어 당국이 그 유용성을 인정한 사립학교에 대해서는 국가 보조금 지급을 약속했다.(모든 학교가 무상이었으므로, 운영의 동기가 순전히 이타적이거나 실험적이어서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사립학교만 보조금을 받을 수 있었다.)
21조: 학생들이 모두 따뜻한 음식을 무료로 제공받는 무상 급식을 선언했다.
29조: 학교의 완전한 자치 원칙을 확립했다. 교사, 학생, 학교 노동자(가령, 경비원)가 모두 참가하는 ‘학교 공동체’가 학교 자치를 이끈다. ‘학교 공동체’는 상임간부회와 집행위원회를 선출해야 했다.
교과과정과 교수법은 “교직원, 학생 대표, 지역 노동자 대표, 지역 교육청 대표”로 구성된 ‘학교 평의회’(또는 학교 소비에트)가 맡았다. 숙제와 체벌이 폐지됐다. 대학 입시가 폐지돼, 16세 이상의 희망자는 모두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대학생 수는 1917~18년 3만 8440명에서 1918~19년에 6만 9645명으로 금세 두 배로 늘었다.) 1919년에는 학위 제도가 폐지됐다.
교육의 형태 변화
두 가지 사항이 두드러지게 우리의 관심을 끈다. 첫째는 과학·기술 종합 교육이다. 과학·기술 종합 교육은 마르크스주의 교육 철학의 핵심이었고, 혁명 이후 교육이 취해야 할 형태를 둘러싼 토론에서 중심적인 문제였다. 1866년이라는 매우 이른 시기에 마르크스는 과학·기술 종합 교육을 이렇게 규정했다. “생산 과정 일체에 대한 일반 원리를 가르치는 동시에, 학생과 청년들이 모든 산업에서 쓰이는 간단한 도구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실습 훈련을 시키는 교육이다.”
그래서 초기 소비에트 공화국의 통합 노동 학교의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통합 노동 학교의 … 핵심 관심사는 인간의 노동이다. 인간의 노동은 모든 단계의 학교 프로그램을 관통하는 주제이다. 전문 기술인의 관점으로 노동을 보지 않는다. 자기 직업과 관계 없이, 다양한 노동 형태들의 관계와 상호의존을 분명히 이해해야 하는 새로운 삶의 건설자라는 관점으로 노동을 봐야 한다. 그런 이해력 훈련을 우리는 보통교육이라고 부른다.
당시 소비에트 헌법은 ‘노동’을 “가사를 포함해 사회에 생산적이거나 유용한 활동”으로 규정했다.
둘째로 흥미로운 점은 학교 구성원 전체가 참가하는 대중 집회를 통해 의사를 결정하는, 완전히 민주적인 학교 통제이다. 이는 볼셰비키를 괴롭힌 경제적·문화적 빈곤이 없는 선진국(영국)에 사는 우리에게 특히 눈길이 가는 일이다. ‘학교 공동체’는 ‘교장’을 선출(하고 소환)했고, 광범하게 제기된 정책을 집행하는 집행위원회를 선출했다. 교과과정과 교수법을 결정하는 과정에 교사와 학생뿐 아니라, 다양한 노동자 공동체와 지역 교육청도 참여했다는 점은 정말 눈에 띈다. 이런 제도는 혁명적 이상과 노동자들의 생산 통제라는 초기 실천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그리하여 민중이 교육 과정에 직접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지도적 교육자이자 레닌의 부인이었던 크룹스카야가 교육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시절에 열정적으로 설명했듯이 말이다. 크룹스카야는 교육 관련 소비에트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그들은] 대중을 인텔리겐치아가 보살펴야 하는 대상으로, 마치 어리고 불합리한 아이처럼 보는 낡은 관점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다. … 우리는 혁명을 조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대중을 두려워하지 말자. 그들이 대표를 잘못 선출해 성직자들을 다시 불러들일 것이라고 두려워하지 말자. 우리는 대중이 이 나라의 주인이 돼서 스스로 나라를 이끌어 가기를 바란다. … 민중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밤낮 없이 일하더라도 계속해서 옛 사고에 젖어 있다면, 차라리 그만 두자.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다. 우리의 임무는 대중이 실제로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도록 돕는 것이다.
후퇴
러시아는 빈곤, 문맹, 무지, 미신이 사회를 짓누르는 상태에서 혁명을 이뤘다. 그 뒤 몇 해 동안 내전, 기근, 기아, 추위, 궁핍, 무질서가 이어졌다. 내전으로 수많은 학교가 완전히 파괴되거나 반파됐다. 1921~23년 이태 동안의 기근이 낳은 재정적 혼돈과 빈곤으로 학교 2만 7천 곳이 폐쇄됐다.(대부분 농촌의 학교였다.) 《교육 백과사전》은 이렇게 기록했다. “학교에 노동자, 교과서, 교과과정이 없었다. 교사들의 삶은 참담했다. 학교가 완전히 무너졌다.” 러시아 혁명에 우호적인 한 목격자는 1925년 말쯤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비에트 교육기관들보다 더 열악한 시설을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건물은 낡았다. 의자는 부서지기 직전이다. 칠판과 책이 없다. 교사 등 교육 노동자들의 보수는 열악했다. 때로는 여러 달 동안 임금이 체불됐다.
학교는 학령 아동의 절반만을 받아 줄 수 있었다. 교육 인민위원 루나차르스키는 교사가 2만 5천 명 부족하다고 추정한다. 교사를 충원하더라도 교실이 없다. 유럽의 큰 나라 중에서 물질적 교육 조건이 소련보다 열악한 나라는 십중팔구 없을 것이다.(Scott Nearing, Education in Soviet Russia, 1926)
내전 중 고아가 됐거나 극빈층 부모에게 버림받아 떠도는 극빈 아동이 최대 7백만 명까지 치솟았다. 이런 아이들은 백군을 따라다니며 연명하거나, 구걸하고 약탈하고 살인을 저지르며 거리를 배회했다.
광활한 나라 전역에 새 교육을 전파하고 보급하기 위해 정부는 학교 평의회(또는 학교 소비에트)가 새 교과과정과 새 교수법을 도입하고 중앙 당국의 시찰(혁명 초기에는 차르 시대의 교육 통제를 연상시킨다고 사람들이 반대한)을 감시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교사들은 수업은 했어도, 주로는 새 교수법에 반대해서 옛 방식으로 옛 과목들을 가르쳤다. 교사들은 대부분 옛 공립교육부 관료들과 함께 혁명적 새 질서를 적극 방해하고 나섰다. 혁명 직후, 전국교사노조는 볼셰비키와 함께 활동한 출중한 교사들을 제명하기까지 했다. 학교 소비에트가 적절히 활동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들을 단호하게 반대한 것이다. 그 결과 이런 대중 기관에 대해 대중이 능동적으로 개입한다는 희망이 파괴됐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부의 바람을 실현시킬 수가 없었다. 교사들과 학생들이 배를 곯고 교사들이 빈번하게 반대하는 상황에서 건물, 교과서, 필기구, 공동 연수, 보조 교재 등도 없이 새 교수법과 교과과정을 실험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이런 조건에서] 과학·기술 종합 교육이라는 이상, 즉 모든 노동 분야에 대한 일반적인 이론·실습 교육은 [현실에서는] 대체로 교실 바닥 청소, 땔감용 나무 베기, 세탁 등 가사 노동을 뜻했다.
의무교육은 불가능했다. 학교를 새로 짓고 낡은 건물을 수리하는 등 혼신의 노력이 있었지만, 1932년이 돼서야 8~11세 아동에 대한 보통교육이 실시됐다. 당시 7년제 학교에 다니는 아동은 전체의 67.3퍼센트였다. 나머지 32.7퍼센트는 학교가 없어서 다닐 수가 없었다. 1950~51년이 돼서도 언론은 농촌 아동의 95퍼센트가 7년제 교육을 이수하는 것이 목표라고 보도했다.
이런 역경 속에도, 1920년대 초까지는 혁명이 이룬 성과가 있었다. 그에 대해 한 미국인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소비에트 통치 초기라는 이 혼돈의 시기에 소비에트 학교의 기본 원리가 착상 단계로나마 거의 모두 제출됐다. 세속적이고 통합적인 남녀공학 학교 구조가 만들어졌고, ‘복합’ 교수법과 ‘프로젝트’ 교수법이 초보적 형태로나마 시행됐다. 학생 자치가 학교 생활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지도적 청년단체인 공산청년동맹(이하 콤소몰)이 창립했다. (Ruth Wildmayer, ‘A Historical Survey of Soviet Education’, 1954, in Soviet Society)
경제가 사실상 붕괴하고 농민들이 곡물을 도시로 공급하지 않는 상황에서 볼셰비키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921년 신경제정책NEP은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농민·소자본가를 위한 거래소를 부활시켰다. 레닌은 이를 두고 “사회주의 건설에서 국가자본주의로 가는 어쩔 수 없는 후퇴”라고 말했다. “패배를 인정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 우리가 씨름한 문제들 중에서 단박에 해결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교육에 대한 위대한 이상도 패배했다. 신경제정책이라는 후퇴에 뒤이어 교육도 후퇴하기 시작했다.
1923년 교육법
1923년 교육법은 어쩔 수 없는 후퇴를 반영한 것이었다. 자세한 내용을 인용해 보겠다.
3조: 학교급을 새로 구분했다. 1단계는 8~12세, 2단계는 12~17세 아동을 대상으로 했다. 2단계는 다시 두 단계(‘콘센티아’)로 나뉜다. 그 첫째 ‘사이클’은 3년, 둘째 ‘사이클’은 2년이었다.
5조: 학교를 모두 남녀공학으로 하기로 확정했다.
6조: 종교 교육을 금지했다.
7조: 사립학교를 금지하고 학교 교육에 대한 국가 독점을 선언했다.
10조: “각 학교의 교육적·재정적·행정적 활동에 대한 감독 책임은 교장이 맡고, 교장은 학교 평의회를 주재한다.”
11조: 교장은 지역 교육청이 임명한다고 밝혔다.
17조: 교사도 지역 교육청이 임명하거나 해임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19조는 (경비원 등) 기술직은 교장이 임명하거나 해임한다고 밝혔다.
20조: 학교 평의회는 모든 교사, 하위 직급의 대표 한 명, 교의校醫로 구성된다고 규정했다. 공산당, 노조, 지역 소비에트, 콤소몰의 지역 지부들이 각자 대표를 파견할 수 있었다.
22조: 학교 평의회의 결정에 찬성하지 않을 경우, 교장은 그 결정의 실행을 막을 수 있었다.
23조: 예외적인 경우, 교장은 학교 평의회의 사전 심의 없이도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26조: 8~17세의 아동은 모두 통합 노동 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 학교가 모자라 아동을 모두 수용할 수 없으면, 노동계급의 자녀들에게 우선권이 있었다.
32조: 학교에서 하는 활동의 기초는 인간과 그 조직의 노동 활동에 대한 자세한 이론적 실용적 연구이다.
35조: 학교에서 하는 활동 일체와 학교 생활에 관한 조직은 모두 학생들이 노동계급 의식을 갖추도록 독려해야 한다. 또 유용한 생산 정치 활동을 위한 준비뿐 아니라, 자본에 맞선 투쟁에서 노동자 연대에 대한 지식을 창조해야 한다.
36조: 모든 학교에서 학생 자치를 도입한다.
37조: 모든 종류의 벌을 폐지한다.
이런 점들이 1923년 교육법의 주요 조항들이다.
1918년 교육법과 달리 1923년 교육법은 [사회주의 교육의 이상에 대한] 재확인도 있지만 후퇴의 측면도 섞여 있다. 불가피하게 교육을 확산시키려는 노력이 둔화했고, 무상교육에 대한 언급이 사라져 전체 학생의 3분의 1에서 절반은 돈을 내고 학교를 다니게 됐다.(가난한 학생들은 제외였다.) 그러나 수업료 납부는 임시적 조처였다. 1925년 보편적 의무교육을 성취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수업료가 폐지됐다.
특성화 교육 논쟁
1923년 교육법은 통합 노동 학교에서 과학·기술 종합 교육을 한다는 원리를 유지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원리는 혁명 이후 몇 년 동안 애초 취지에서 벗어나 그 정반대의 원리와 실천으로 나아갔다. 원래 이 원리는 가장 중요한 생산 분야들에서 쓰이는 이론과 실천을 익혀 학생들이 다방면으로 유능한 “자연의 주인”이 되게 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학교에서 보통 가르치는 과목들이 한편으로는 기술 훈련에만 치우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문적 훈련에만 치우쳐 기술 훈련은 완전히 생략하는 식이었다.
이처럼 학교에서 한쪽으로 치우친 특성화 교육이 나타나는 현상은 경쟁을 수반하는 자본주의 하 노동분업[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를 뜻함] 문제와 결부된 것이다. 그래서 혁명 뒤 몇 년이 지나면서부터는 앞서 말한 현실에 대한 자기 성찰이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가난한 데다가, 내전으로 노동계급이 대거 죽고, 산업은 사실상 붕괴하고, 많은 사람들이 농촌으로 떠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숙련 노동자를 구하기 힘들어지고, 파괴된 산업을 재건해 발전시킬 필요가 명백했다. 그래서 일부 중심적인 볼셰비키 당원들은 학교 교육의 방향을 조기 직업 훈련을 통해 숙련 노동자를 빠르게 양산하는 쪽으로 틀려고 애썼다.
이는 현실적 필요에 부응하려는 노력이었지만, 혁명적 교육의 핵심 이상을 훼손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볼셰비키 당의 다른 지도적 당원들은 이에 반대했다. 그중에는 루나차르스키가 있다. 루나차르스키는 교육 인민위원회를 대표해 다음과 같이 반대 의견을 밝혔다.
우리는 폐허가 된 러시아 경제에는 전문 기술인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노동자의 본성을 억누르던 자본주의 하의 요소들에 맞서 노동자의 본성을 지키려는 권리를 옹호하는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지금처럼 힘든 시기일지라도 새로운 공산주의적 공장이 [자본주의적 공장과] 똑같은 경향을 보이는 것에 항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현재의 어려움, 우리의 모든 힘을 한계까지 쥐어짜야 할 필요성, 현재의 요구에 직면해 우리의 이상을 후퇴시킬 필요성을 이해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 다른 한편으로는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와 프롤레타리아 청소년들의 첫 번째 희망의 꽃 ― 다방면에 걸친 인간 발달 ― 을 꺾어서는 안 된다고 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모종의 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해 크룹스카야는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을 어린 나이부터 편협한 전문 기술인으로 만들어 불구가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 전문 기술인 … 은 단지 산업에만 관심을 두지, 노동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초기에는 아동을 모두 통합 노동 학교에 다니게 해서 17세까지는 노동을 기초로 한 일반교육을 받게 하려 했다. 그러나 끔찍한 경제 상황이 제기하는 요구 때문에 특성화 교육 반대 진영이 일찌감치 패배하리라는 점은 분명했다. 실제로, 1920년대 말부터는 일반학교와 함께 직업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했고, 1930년대 이후에는 학교 제도에서 조기 특성화 교육이 점점 더 중요해졌다.
과학·기술 종합 교육이 사회주의의 기준인가?
과학·기술 종합 교육은 본디 인간의 다방면적 발달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를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노동의 존엄성을 옹호하고,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계율이 지켜지는 사회에 가장 잘 어울리는 교육이다. 그러므로 노동자 국가와 사회주의에 어울리는 교육 형태다. 그러나 통합적 전인교육을 지향하는, 자본주의 나라들의 진보적 교육자들도 과학·기술 종합 교육을 인정한다. 자본주의 나라들에서도 이 노선을 따르는 실험이 많이 있다. 달튼 플랜이나 듀이의 ‘프로젝트’ 교수법은 미국에서 수십 년째 진행되고 있는 유명한 실험이다. 영국 교육계에서 진행되는 프리스쿨 실험 등도 이 노선을 따른 것이다.
이처럼 과학·기술 종합 교육의 특정 형태는 크고 작은 변형은 있을지라도 여러 체제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체제들의 성격을 구별해 주는 기준은 통치의 양상, 즉 누가 노동자와 피고용인(과 그의 자녀)의 삶 ― 형식과 내용 모두 ― 을 결정하느냐이다. 달리 말해, 노동자 민주주의가 존재하느냐 여부이다. 그러면 우리는 러시아 사회에서 관료가 성장하는 것의 진정한 피해자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유럽 혁명이 결국 패배하고, 스탈린이 관료적 위계의 정점에 선 절대적 독재자로 등극하자, 러시아 사회에서 관료의 성장은 1923년에 중요한 첫 걸음을 내디뎠고, 1928년 5개년 계획이 시행된 뒤로는 그 속도가 정신없이 빨라졌다.
1923년 교육법이 제정된 뒤로는, 학교 구성원이 모두 참여해 평등한 협력자로서 정책을 민주적으로 입안하고 책임자들을 선출하는 일이 더는 가능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이제 학교 평의회에 대한 권리가 없었고, 교과과정과 교수법을 만들어 내는 일을 도울 수 없었다. 교사들은 교장 임명에 관여할 수 없었고, 지역 교육청이 임명한 교장에게 종속됐다. 교장은 학교 평의회의 결정 사항이 이행되지 못하게 막을 수 있었고, 학교 평의회에 대해 져야 할 책임이 더는 없게 됐다. 교장의 급여도 점점 더 상당히 많아졌다.
누가 통치하느냐는 문제는 민주적 사회주의 사회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므로, 더 깊이 탐구할 가치가 있다.
학생들은 위계의 사다리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으므로, 학교 내 통치 권력 관계에서 학생들이 어떤 지위를 차지하느냐는 정치 풍토가 어떠한지를 보여 주는 가장 정확한 척도이다. 따라서 필자는 가장 중요한 이 측면을 먼저 다룰 것이다.
초기 몇 해 동안의 학생 자치
모든 연령대의 학생들을 아우르는 학생 자치의 배경에 있는 교육 원리가 무엇인지는, 1920년대 초 러시아 공화국 교육평의회의 과학교육 분과가 밝힌 바 있다.
우리의 학교에서 자치는 학생을 손쉽게 다스리는 수단도 아니고, 헌법의 기능을 연구하는 실습도 아니다. 자치는 학생들이 현명하게 살아가고 일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할 수단이다.
학생들의 삶이 풍부해질수록 학생들의 자발성도 더 커질 것이다. 함께 일하는 것은 어떻게 조직하는지를 배우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다. 함께 일하는 것이 학생의 삶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중추신경처럼 되는 학교에서만, 자치가 가장 합리적이고 유익한 형태로 발전할 수 있다.
… 어떤 상황에서도 학생들의 의사를 학교 위원회들이 잘 대표해야 한다.
자치를 위한 활동은 모두 학생들이 주도하는 가운데 교사와의 협력이 가미돼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자발성 함양에 적극적으로 기여해야 한다. 그러나 교사는 학생들이 완전히 독립적일 수 있도록 보장할 것이고, 학생들에게 교사로서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을 것이다.
1920년대 중반 과학교육연구소 소장 핀케비치 교수는 학생 자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제안한 것과 같은 질서를 세워 나갈 때는 당연히 여러 어려움이 뒤따를 것이다. 학생들은 실수를 저지를 것이다. … 그러나 학생들이 스스로 실험해 본 결과로 그런 결론에 도달하도록 하자. 그러면 학생들은 스스로 확신에 찰 것이고, 다른 누군가가 내놓은 처방을 그저 따르지는 않게 될 것이다. 학생들은 차츰 자신의 오류를 깨달을 것이고, 이런 진리 발견 과정을 통해 많이 배울 것이다.
학생들은 새 학교 시스템 속에서 혁명적 열정과 열의로 충만해 있었다. 교수법과 교과과정이 완전히 새롭고 혁명적인 학교, 학교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 사이에 민주주의가 확립된 학교를 실현하는 주요한, 아니 사실상 유일한 수호자는 바로 학생들이었다.
1923년 교육법 제정으로 후퇴가 시작됐지만, 학교에서 학생 자치가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몇 년이 더 걸렸다. 그때가 바로 1930년대 초였다. 즉, 첫 번째 5개년 계획이 도입되고, 1929년 루나차르스키가 교육 인민위원직에서 사임한 뒤였다. 루나차르스키는 1917년 이래 계속 교육 인민위원으로 활동하며 교육 분야에서 혁명의 최고 이상을 실현하고자 그 누구보다 크게 애쓴 인물이자, 1918년 교육법의 주요 설계자였다. 이제 ‘자치’라는 낱말은 (수많은 다른 마르크스주의 용어처럼) 계속 사용되지만 빈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것이 됐다.
1920년대에도 학생 자치가 점점 쇠퇴했지만, 속도는 더디고 양상은 지역마다 달랐다. 다음의 인용문들은 학생 자치의 쇠퇴가 왜 더뎠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학교 운영에 대한 학생들의 참여가 여전히 강했지만, 혁명 초기 몇 해만큼은 아니었다.
러시아 혁명에 우호적인 미국인 스콧 니어링에 따르면, 1920년대 중반 학생 자치가 시행되던 영역들은 다음과 같았다.
학생 집행위원회는 대체로 규율과 학급 업무에 대한 책임을 맡았다. 문화위원회는, 그들이 존재하던 때에는, 읽을거리를 정해 배포하는 일과 대자보 제작을 책임졌다. 보건위원회는 때로는 교실 위생을 유지할 임무를 맡고, 때로는 학생들의 개인 위생을 감독하고, 때로는 둘 다 수행했다.
1925~26년 스콧 니어링은 전교생이 1천1백 명이었던 포크로프스키 초등학교(8~15세)의 체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각 학급에는 세 명으로 구성된 학급위원회가 있었다. 학급위원회는 학생들의 출결 상황을 기록하고 학급 규율을 책임지고 교사들과 협력해 학습 계획안을 만들었다.
학급위원회 구성원은 모두 학생학교위원회의 구성원이었다. 학생학교위원회 구성원은 모두 75명이었다. 학생학교위원회는 7명으로 구성된 집행위원회를 선출했고, 집행위원회는 학생 관련 업무들을 책임졌다. 그 아래에는 보건, 경제 활동, 스포츠, 학생 문화 활동 등을 관할하는 위원회들이 있었다. …
교육 활동을 포함한 이 학교의 업무는 모두 다음과 같이 구성된 학교 위원회가 관리했다. 교사 37명, (각 소모임이나 학급에서 한 명씩 선출된) 학생 대표 25명, 학부모 단체 대표 3명, 도시 평의회(지역 소비에트) 대표 1명, 학교 노동자 대표 1명, 공산당 소년단 피오네르[콤소몰 이전 연령대인 10~15세 학생들의 단체] 대표 1명, 콤소몰 대표 1명, 중앙 노동조합 대표 1명, 학교 근처 대공장 대표 1명, 교장 1명, 총 72명.
이 학교위원회는 한 달에 한 번 모였다. 효율적으로 활동하기 위해 학교위원회는 두 분과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1~4학년을, 다른 하나는 5~7학년에 관한 업무를 다뤘다.
학교의 집행 감독은 교장, 교감, 교사 대표, 학생회장, 학부모 대표로 구성된 학교집행위원회가 맡았다. 이런 대표·집행의 원리는 소련 전역에서 지켜졌다. 내가 방문한 모든 학교에서 학교위원회 전체회의는 일이 있을 때 열렸고, 소규모 집행위원회 회의는 자주 열렸다. 이 집행위원회에서는 항상 교사들이 우세했다.
1920년대 중반쯤, 교장의 지위는 꽤나 확고해졌다. 교장은 회의를 주재했고, 교감은 그를 도왔다. 그래도 교사들은 학교위원회에서 다수였고, 학교 운영에서 학생들의 지위는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강했다.
5개년 계획 이후의 ‘자치’
5개년 계획이 도입되자 쇠퇴하던 자치는 완전히 사라졌다.
전문 기술인과 숙련 노동자 육성을 포함해 생산을 극한까지 끌어올려야 한다는 엄청난 압박 때문에 학교의 자원 이용과 인적 관계가 극도로 뒤틀렸다. 1928년 고등교육기관에는 학생 16만 명이 있었다. 제2차 5개년 계획(1933~37년)이 시행되는 동안 이 고등교육기관들은 전문 기술인 34만 명을 육성하라고 지시받았다. 이는 제1차 5개년 계획으로 양성된 전문 기술인 수의 갑절이었다.
공업에서도 비슷한 생산성 증대 압박이 있었다. 5개년 계획의 목표를 달성하려면, 공장들은 부득이하게 매우 중앙집권적이고 권위적인 1인 경영 체제로 갈 수밖에 없었다. 학교들도 같은 처지였다. 그러나 새 교육자들은 학교를 권위적인 1인 경영 체제로 운영하기를 바라지 않았고, 학생들을 서구의 학생들처럼 생기 없는 인간으로 만들 뿐인 성과 달성 압박을 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관료의 지시를 수행하는 데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을 고안해 대중의 교육 수준을 급속히 끌어올리고자 했다.
공산당 소년단 피오네르는 여러 파견대로 구성됐고, 파견대 산하에는 ‘링크’들이 있었다. 각 학교에는 학교소년단이 있었다. 각 학교소년단 평의회를 선출한다. 학교소년단 평의회는 자체 활동의 대부분을 조율하고, 성인인 ‘시니어 피오네르 리더’의 지도를 받는다. ‘시니어 피오네르 리더’는 이런 종류의 일을 위해 특별히 훈련된 전문가이거나 교사이다. 피오네르의 업무는 모든 교사들의 수업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했다.
2 1935년에 쓴 책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혔다.
피오네르가 의식적으로 추구한 목표는 권력자의 한쪽 팔이 되는 것이었다. 피오네르는 덜 열성적인 학생들에게는 열의를 끌어올리라고 주문하고, 냉담한 학생들에게는 관심을 가지라고 촉구하고, 반항적인 학생들에게는 위협을 가했다. 1930년대 중반이 되면 ‘자치’는 본래 의미의 정반대 상황을 가리키게 됐다. 혹시라도 사람들이 오해할까 봐, 핀케비치 교수는‘학생’ 조직들은 교사의 업무를 도와, 학교에서 사회주의적 경쟁과 자발적 초과 노동을 발전시키라는 기대를 받는다.
피오네르는 학교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 경쟁의 명사수라고 묘사될 수 있다.
핀케비치는 다음과 같은 “사회주의적 경쟁과 자발적 초과 노동”의 사례를 칭찬했다.
루빈스크 지구에 있는 이바노프스크의 시범학교 1학년 학생들은 전국 시범학교 경연대회에 참가해 다음과 같이 맹세했다.
1. 규율의 모범을 세우고, 지각이나 결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출석률과 수행 진척도를 98퍼센트까지 끌어올린다.
2. 뒤처진 학생들을 위해 동지적 도움을 조직한다.
3. 매일 예습한다.
4. 학교의 자산을 보호한다.
5. 각 수업에 할당된 45분을 최대한 활용한다.
6.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완벽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경쟁에서 최상의 성과를 낸 학생 개인과 해당 학교는 상을 받았다.(1944년 사회주의적 경쟁은 교육 분야에서는 폐지됐다. 학생들의 체력을 갉아먹고 교육적으로 해로웠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관료들의 바람을 따른 가장 강력한 동기의 하나는, 가장 잘 순응하고 세 단계(스카우트 등급과 비슷한)의 피오네르 시험을 완수한 훌륭한 소년단원만이 더 폐쇄적인 콤소몰에 가입원서를 제출할 수 있고(합격이 보장된 것은 아니지만), 콤소몰의 일원이어야 권력의 핵심부에 다가가거나 적어도 좋은 직업을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후기 피오네르의 주요 목표는 스카우트와 마찬가지로 애국주의(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온갖 관념)를 고취하는 것이다. 피오네르의 신조 제1항은 “피오네르는 조국과 소련 공산당을 사랑한다”였다. 이를 1920년대 초기 피오네르의 신조 제3항이 표방한 국제주의와 비교해 보라. “피오네르는 소년단원들, 그리고 전 세계 노동자·농민의 자녀들의 동지다.” 당시 피오네르의 신조 제1항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전 세계 노동자·농민의 대의를 굳게 옹호할 것이다.”
학교 운영에 참여하는 것은 피오네르 등 학생 조직의 권리나 의무가 아니게 됐다. 1935년 핀케비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조직(피오네르)이 할 일은 학교 관리자(교장)나 교사가 하는 일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다. 학생들을 조직해 정치적·신체적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핀케비치는 자신의 논지가 잘 전달됐는지 확인하고자, 학생 자치의 형태에 관한 장을 다음과 같은 진술로 마무리한다. “우리가 열거한 조직 가운데 그 어느 조직도 관리자의 결정을 취소시키지 못한다. 그 조직들의 임무는 조언으로 관리자를 돕고, 관리자의 결정이 잘 이행되는지 점검하는 것이다. 그 조직들은 관리감독 기능은 전혀 하지 않는다.”
교사
교사들은 대부분 볼셰비키 혁명에 반대했다. 많은 교사들이 외국으로 이민을 가거나 교사 일을 그만뒀다. 최소한 그들은 전국교사노조VUS의 지도자들이 채택한 [혁명] 반대 노선을 묵인했다. 전국교사노조 페트로그라드 지부는 10월 혁명이 일어난 지 일주일도 안 돼, “권력을 참칭하는 세력의 지시는 수행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조합원이 4천 명인 전국교사노조 모스크바 지부는 거의 만장일치로 모스크바 공무원 파업에 동참했고, 1918년 3월 11일까지 파업을 이어갔다. 랴부쉰스키의 상업은행 가문이 교사 파업을 지지했다고 한다. 페트로그라드 교사들의 파업은 1918년 1월 6일까지 지속됐다.” (Sheila Fitzpatrick, The Commissariat of Enlightenment, 1970.)
루나차르스키는 분노에 차 다음과 같이 썼다. “이 교사들이 스스로 자기 이마에 새긴 명예롭지 못한 글자들을 민중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씻어 내려면 그들은 얼마나 많은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할까? 바로 이런 글자 말이다. ‘1917년 12월 민중이 착취자들에 맞서 처절히 투쟁하는 그 한복판에서, 나는 학생 가르치기를 거부하고, 이를 위해 착취자들의 돈을 받았다.’”
그럼에도 레닌은 이렇게 혁명 정부에 저항할 모든 전문가들과도 함께 일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크룹스카야는 말을 안 듣는 교사들 ― 초기에는 이런 이들이 다수였다 ― 에게 강경하게 대처하자는 주장에 반대하면서, 혁명 정부에 적극 맞서는 것은 전국교사노조의 지도부일 뿐이라고 말했다. “마을의 교사들은 민중에 가까운 프티부르주아들이고, 사회주의 선전을 위한 비옥한 토양이다.” 루나차르스키도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각별히 더 강하게 압박하려는 시도, 더 일반으로는 교직원들을 대하는 정부와 프롤레타리아의 태도를 뾰족하게 만들려는 시도”를 비판했다.
상황은 점차 교사들을 설득하기 유리하게 바뀌었다. 끔찍한 조건 탓에 제약이 심했음에도, 진보적 교수법을 독려하는 시범 교과과정이 공급되고, 전 세계에서 나온 교육 관련 문헌들이 번역되고, [사회주의 교육] 실험에 대한 흥분이 고취됐다. 학교는 운영의 모든 측면에서 자율성을 갖게 되고 교사들은 민주적 권리를 완전히 보장받았다.
교육 분야의 노동자들을 모두 의사 결정 과정에 포함시킨 덕분에, 학교에서 서로 다른 업무를 보는 직원들 사이에 마찰이 줄었다. 특히, 학생 자치가 도입되며 학생과 교사가 동지적 관계를 맺게 됐다. 그래서 교사들이 쓸데없이 권위를 내세울 필요도, 자신의 위신이 깎일까 봐 불안에 떨어야 할 필요도, 학생들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까 봐 두려워할 필요도 사라졌다.
그러나 학교를 통제하는 종신직 교장이 임명되고 교사와 직원들의 지위와 보수가 크게 세분화되면서 이런 관계가 완전히 바뀌었다. 1930년대 이후 엄격한 중앙집권화가 일어나며 깐깐한 시찰이 시행됐다. 이 일은 비대해진 감찰부의 직원들이 수행했다. 교장도 정해진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자기 학교 교사들의 모든 수업을 정기적으로 참관하도록 했다. 교사들은 새 교수법을 자유롭게 실험할 수 없었다. 교사가 꽉 짜인 수업 방식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교육학 연구소 같은 곳에 자신의 제안을 보내고, 그것이 표준 교육과정에 포함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러므로 교사는 개인의 생각을 표현할 자유가 거의 없었다. 핀케비치가 나중에 학교 운영에 관해 말한 바를 반복하자면, “교사 조직을 포함해 학교 내 그 어느 조직도 … 관리자의 결정을 취소시키지 못한다. 그 조직들은 관리감독 기능은 전혀 하지 않는다.”
보수의 차등화도 민주적 참여를 떨어뜨렸다. 교사들은 더 좋은 자격증을 취득할수록, 더 높은 학년을 가르칠수록, 재직 기간이 길수록, 학교의 위치에 따라, 중고등학교에서는 1주일에 18시간 이상 초등학교에서는 24시간 이상 수업하면, ‘영예 교사’로 뽑히면, 학교 사서 같은 책임을 맡으면, 교장이 되면, 숙제를 (정기적으로) 내고 검사하면, 달리기 동아리 같은 특정 과외 활동 직무를 맡으면, 장애아를 가르치면, 언어 학교에서 외국어를 가르치면 보수를 더 받았다.
따라서 교사의 보수는 저마다 상당히 달랐고, 대다수 교사의 보수는 매우 낮았다. 1960년대 초 초등학교 교사의 월급은 60~90루블이었고 중고등학교 교사의 월급은 80~150루블이었다. 당시 숙련 노동자의 월급은 100~250루블이었는데 말이다.
교사들은 초과근무를 요구받았다. 교사들은 과제를 검사하는 것 말고도 가정방문도 해야 하고, 학부모·교사 회의에도 참석해야 하고, 과외 활동에도 참가해야 하고, 정치 세미나 등에도 참석해야 했다. 일주일 내내 쉬는 날도 없이 수업을 하면서 말이다.
어느 사회에서든지 교사들의 순응도는 매우 높다. 이는 소련 전체 인구의 4퍼센트만이 공산당원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교육 노동자들(각급 교육기관들의 모든 피고용인들)의 20퍼센트가 공산당원이었다는 사실을 봐도 알 수 있다.
소련 교사의 이런 지위에 대해 이 나라 영국의 교사들은 자신의 처지와 무척 비슷하다고 느낄 것이다. 순응하는 사람들은 어떤 체제에서나 잘산다. 그러나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에 소련과 영국은 똑같이 문제가 있다. 교과과정이나 교수법 결정에 전혀 관여할 수 없고 진취성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는 여기 영국보다 러시아에서 더 심했다), 말단일 때는 보잘것없이 적은 보수 때문에 안달복달하다가 보수가 올라가면 올라가는 대로 책임은 커지고 지위에 연연하게 되는 것, 과도한 업무, 35~40명이나 되는 큰 학급 규모, 교장·감사관·교육당국으로 대표되는 권위 밑에서 끝없이 굴욕감과 짜증을 느끼는 것 등등.
교사와 학생의 관계
혁명 직후 러시아 공화국 교육평의회의 과학교육 분과는 혁명 전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런 [혁명 전의] 학교에서 교사는 수업과 학생들에 대해 절대적인 주인 노릇을 한다. 교사가 할당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돕기 위해 벌과 보상의 체계가 마련돼 있다. 교사는 학생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 교사는 과제물을 갑절로 늘릴 수 있다. 교사는 수업 중에 학생을 교실 밖으로 내쫓아도 된다. 교사는 학생을 싸워야 할 적으로 봤다. 학생들은 교사의 지배에 맞서 싸우고, 교사가 세운 규칙을 일부러 어기고, 이를 목적으로 집단을 구성했다. 교사는 국가 권력의 대리인이므로 교사에 맞서 싸우는 것은 학생들에게 곧 국가의 명령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그런 투쟁에서 학생들은 단결하고, 당국의 위신은 추락하고, [당국의] 교육 목표 실현은 가로막히고, 불만은 커지고, 적대감은 강해졌다.
이에 대한 사회주의적 해법과, 민주주의를 최대한 보장하겠다는 약속은 다음과 같이 표현됐다.
이런 학교에 학생 자치를 도입하는 목표는 교사와 학생의 다툼을 없애고, 교사의 위신을 높이고, 학생들에게 자신을 스스로 감독할 임무를 주는 것이다. 교사의 결정을 그저 실행하는 것은 학생을 교사에게 예속시킬 뿐이고, 이는 학생 자치의 목표가 아니다.
핀케비치는 1927년에 쓴 《소비에트 공화국의 새 교육》에서 교사와 학생들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학교의 업무를 모두 완전히 학생들 손에 맡기는 것이나, 반대로 성인들에게 완전한 독점권을 주는 것이나 둘 다 적절치 않을 것이다. … 우리는 학교의 공식 기구이자 어느 정도는 공적 기관인 학교 소비에트의 심의에 학생 대표를 참여시키는 것을 필수적인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학생 대표자들은 학생이라는 특수한 계층의 수호자로 행동하면 안 된다. 학생 대표자들은, “학교 소비에트가 발전시키고 있는 교육 사상의 적용 대상이자 수행자로서, 특별한 지식과 자질을 지닌” 교사들을 자신들과 동등한 권리를 지닌 동료로 여겨야 한다.
교사는 “조직자, 조력자, 지도자, 나이 많은 동지” 역할을 해야지, “상관 노릇을 하면 안 된다.” 교사는 학생들과 동지적 관계를 유지해야 했고, 교사를 그의 성姓으로 부르는 것이 관례였다.
오늘날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 대한 설명, 그리고 위와 같은 이상으로부터 후퇴라는 슬픈 얘기는 뒤에서 상술하겠다.
교육과정과 교수법
1925~26년 스콧 니어링은 매우 다양한 교육적 실천과 학교에서 나타난 구성원들의 우호적 관계를 목격하고 다음과 같이 썼다.
각 학교들이 시행한 조처들은 매우 다양하다. 같은 공화국이나 심지어 같은 도시의 아주 가까운 학교들도 각각의 실천은 다르다. 받아들이는 이론은 같아도, 그 이론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했다.
오늘날 소련은 교육 실험실이다. 교과목, 교수법, 학생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 교육 노동자 조직하기, 학교 지도 위원회 조직하기, 노동자와 농민에게 고등교육을 제공하는 문제 등을 둘러싼 실험이 펼쳐지고 있다.
니어링은 한 학교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각 실습실에는 네댓 명에서 여섯 명의 학생이 둘러앉은 탁자가 몇 개 있었다. 학생들은 모두 모둠을 이뤄 실습했다. 실습실 맨 앞 교단에 놓인 책상에 앉아 지시를 내리듯 감시하는 교사가 있으리라 예상한다면, 오산이다. 교사는 한 모둠의 탁자에 앉아 학생들과 함께 실습했다. 그러는 동안 다른 모둠의 학생들은 자신의 실습을 계속했다. 실습실은 마치 대도시 도서관에 있는 열람실 같았다. 학교 특유의 ‘훈육’이라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니어링이 참 옳게도 말했듯이, 소비에트 교육은 “현대 사회에서 지금까지 수행된 사회적 실험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이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는 5개년 계획이 시행된 뒤에 엄청나게 커졌다. 5개년 계획의 시행과 함께, 교육과정과 교수법은 완전히 뒤집혔다.
핀케비치가 1920년대에 한 말을 보자. ‘수동적 학교’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강의식 수업은 혁명 이전 학교의 특징이다. 강의식 수업에서 학생들은 학습 목표가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강의’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교과서 암송하기, 일방적 가르침, 사회 현실과 동떨어진 수업을 떠올린다.”
그런데 핀케비치는 1930년대에는 이렇게 말한다. “학교에서 사용되는 주된 교수법은 강의이다. 1932년 8월 25일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통과시킨 결정문은, 강의가 꽉 짜인 시간표에 따라 고정된 그룹에 속한 학생들에게 이뤄져야 한다고 강하게 강조했다.”
1920년대에 핀케비치는 프로젝트 교수법(서구의 진보적 교사들도 지지하는 교수법)을 평가했다. 프로젝트 교수법은 학생들이 스스로 조사 연구를 하며 학습 요점을 깨닫고 공부에 흥미를 느끼게 하자는 취지로 개발된 것으로, 하나의 프로젝트에 여러 과목의 내용을 포함시키고, 학문적 지도와 실습적 지도를 겸하는 교수법이다. 핀케비치는 이렇게 썼다. “오늘날 학교를 개혁하고자 제안된 여러 방안 중에서 … 프로젝트 시스템이 (적절한 변화를 수반한다면) 소비에트 학교의 본질과 목적에 가장 잘 어울린다. 프로젝트 시스템은 학생들에게 더 큰 활동의 자유를 주고, 학생들이 실습에 열의 있게 참가하도록 고무하고, 학생들에게 스스로 계획을 세우라고 요구하고, 학생들이 조사 연구 방법을 익히도록 한다.”
1930년대에 핀케비치는 이렇게 말했다. “매우 최근까지 미국식 ‘프로젝트’ 교수법이 소비에트 학교들에서 널리 적용됐다. 소비에트 학교의 활동 일체는 ‘사회적으로 유용한 활동’이라는 원리를 기초로 했다. 당시 많은 소비에트 교육자들은, 교육이 일정수의 ‘사회적으로 유용한 프로젝트’를 이행하는 것으로 구성돼야 하고, 그 프로젝트를 이행하는 과정에서만 학생이 여러 과목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고 여겼다. 1931년 공산당과 정부는 프로젝트 교수법을 강하게 비판했다. 프로젝트 교수법은 소비에트 학교에서 더는 채택되지 않는다.”
(핀케비치가 1920년대에는 교육에서 일어난 각각의 변화에 대해 이유를 함께 설명했다는 점을 주목하라. 1930년대의 핀케비치는 집권당의 결정을 이유 없이 그저 전달할 뿐이다. 그의 머리에 총구가 겨눠져 있었음을 누구라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허울만 남은) 과학·기술 종합 교육조차 내팽개쳐졌다. 1937년 3월 4일 발표된 포고령에 따라 교육계획서에서 ‘노동’이 빠지고, 모든 학교에서 실습실과 공예실이 사라지고, 노동 과목을 가르치던 교사 중 대졸자는 수학 교사와 물리 교사로 “자격을 다시 부여”받고, 나머지 노동 과목 교사들은 해고됐다. 없어진 노동 수업 시간은 러시아어, 러시아 문학, 수학, 소련 헌법 수업으로 채워졌다. 교육계획서 전체가 혁명 이전으로, 즉, 교과목 중심 교수법으로 되돌아갔다. 스탈린이 죽은 지 한참 뒤인 1958년 과학·기술 종합 교육이라는 용어가 다시 사용됐지만, 현실에서는 주로 토요일 의무 노동을 뜻할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나이절 그랜트는 그의 책 《소비에트 교육》(1964)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시대에 뒤떨어지면 안 된다는 강조가 있음에도, 처방된 기법들은 극도로 형식적이고 낡은 것들이다. 여전히 소비에트의 표준 교육과정은, 관습과 옛 방식에 찌들대로 찌든 이 나라(영국) 교사들의 실천과 매우 닮아 있다.
교사들은 대체로 학생들이 해 온 숙제를 검사하며 수업을 시작한다. 숙제 검사는 교과서의 지정된 부분을 암송하거나 지목된 학생이 교사의 질문에 답하는 식으로 이뤄진다. 학생들은 칠판 앞에 서서 자기가 맡은 부분을 암송하거나 교사가 시킨 일을 한다. … 학생들은 이를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점수를 받는다. … 학생들은 모두 정기적으로 시험을 보고, 그 시험 점수는 졸업할 때까지 학생을 따라다닌다.
다음 단계는 새 내용 소개이다. 이 과정에서 교사는 일방적 강의를 하고, 학생들은 교사의 설명을 주의를 기울이며 앉아서 듣는다. 자세한 강의가 끝나면 교사는 학생들이 수업 내용을 잘 이해했는지 여러 명에게 질문을 던져 확인한다. 잘 이해하지 못한 학생들은 이때 설명을 더 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은 집에서 공부해 올 부분을 공지받는다. 그것은 교과서의 일부일 수도 있고 따로 나눠 준 인쇄물일 수도 있다. 그 다음으로 교사가 그날 수업을 요약한다.
수업 분위기는 그 체계만큼이나 딱딱하다. 학생들은 교사를 마주하고 줄을 맞춰 앉는다. 오래된 방식으로 말이다. … 교사가 교실에 들어오거나 나갈 때에 학생들은 일어서야 하고, 대답하거나 질문하거나 숙제해 온 것을 암송할 때는 차려 자세로 서야 하고, 교사의 강의를 들을 때는 팔을 책상에 가지런히 놓고 똑바로 앉아야 하고, 말할 게 있으면 손을 들어 허락을 받아야 하고, 다시 앉을 때도 허락을 받아야 한다. 교사는 절대적으로 통제하는 위치에 있고, 학생들은 교사의 지시나 허락 없이는 어떤 말도 행동도 할 수 없다.
이런 엄격한 체제 하에서, 부진한 학생들은 유급을 당해 해당 학년을 반복한다. 1958년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 흐루쇼프는 소련의 7년제 학교 학생 가운데 20퍼센트가 너무 자주 유급을 당해서 결국 졸업을 못 했다고 밝혔다.
현재[1970년대 소련]의 교육 제도는 혁명 이전 시기의 제도와 비슷하다. 1916년에 교사가 돼 1923년까지도 옛 방식을 사용하던 교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옛 방식은 무척 쉬웠다. … 학생들은 한목소리로 교과서를 소리 내어 읽었다. 교사는 교과서를 펼쳐 몇 쪽을 읽을지 지정해 주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수업이 시작된다. 마치 기계처럼 말이다.”
규율의 변화
교육의 여러 다른 분야만큼이나 규율에 관한 토론과 실험도 상당히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교사와 학생에게 각각 별도의 통제 영역을 할당하자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완전한 학생 통제를 원했다. 이 견해는 때때로 학생 법정을 설립하자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크룹스카야 등은 학생 법정을 세우자는 의견에 반대했다. 학생 법정은 처벌이라는 이름으로 복수심을 정당화하는 자기기만을 유발하고, 학생들이 범죄를 적발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며 재판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게 하고, 학생들이 형식적·인습적 관점과 외부적 정의 실현의 관점으로 사고하는 데 익숙해지게 만든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실, 1920년대 핀케비치는 “매우 드문 경우에만, 그것도 온화한 형태의 규율 조처가 필요하다”고 보며 규칙과 규제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권유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반복해서 말하건대, 어떤 법률과 규칙이 통과될지 너무 걱정하지 말자.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잘못된 조처가 때때로 취해질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규제 조처가 모두 교사의 능동적 도움을 받아 학생들이 스스로 끌어낸 것이라는 점이고, 그 조처들이 집단적 결정으로 도입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 가능하다면 규칙과 법률은 거의 없다시피 해야 한다.
규칙 위반 행위를 다루는 위원회는 대체로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접근법을 채택했고, 교사는 규칙 위반자, 학급, 학교와 함께 해당 행위에 관해 설명하거나 토론했다. 이 과정은 규칙이 거의 없고, 학교 분위기가 권위적이지 않고, 교사와 학생이 동지적 관계를 맺은 [1920년대] 상황에서는 잘 작동했던 것 같다.
그러나 5개년 계획이 시행된 뒤인 1930년대에는 사정이 달라졌는데, 핀케비치가 설명한 이유는 흥미롭다.
소련은 기술과 경제 면에서 자본주의 나라들을 따라잡고 뛰어넘어야 할 과제가 있다. … 그래서 학교에 규율이 필요하다. 소련 과학·기술 종합 학교의 규칙에 따르면 학교 관리자와 교사는 학생들의 규율을 다잡기 위해 정력적으로 투쟁해야 한다. 필요하면 정학 같은 징계 조처도 써야 한다.
체벌은 금지였지만 서방에서 사용되는 보통의 다른 징계는 사용됐다. 학생을 교실 밖으로 내보거나, 교사나 교장이 따로 부르거나 공개적으로 학생을 질책할 수 있었다. 징계 사실은 학교생활기록부에 기록됐다. 학생의 행동특성 점수가 일정 기준보다 낮아지면 자동으로 퇴학되기도 했다.
규칙을 심하게 어긴 경우에는 꽤 광범한 사회적 압력이 가해지기도 했다. 피오네르는 규칙 위반자를 설득하거나 회유함으로써 교사를 도왔다. 그래도 규칙 위반자가 뉘우치지 않으면, 피오네르는 그를 “따돌리거나” 대자보를 통해 조롱했다. 심지어는 그를 피오네르 모임에 나오지 못하게 했다(보통 한 학기 정도). 이것은 해당 학생에게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잘 쓰이던 징계로는 부모를 압박하는 것이 있었다. 부모는 소속 노조나 공장위원회를 통해서도 압박을 받았다. 이는 부모의 직장 생활을 매우 불편하게(특히 규칙 위반 학생이 공산당원이라면 더더욱) 만드는 것이었다. 키에프에서 있었던 사례는 이 징계의 전형을 보여 준다.
크라스니 공장에 4반 학생 아나톨리 올렌코가 학교에서 나쁜 짓을 했다는 취지의 공지문이 게시됐다.(다른 부모가 게시한 것이다.) 올렌코의 아버지는 당장 공장위원회로 불려가, 학생의 규율 위반은 그 학생, 부모, 학교뿐 아니라 공장에도 영향을 끼치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어떻게 좀 해보라는 얘기를 들었다.(Grant, Soviet Education)
이렇게 부모에게까지 압박이 가해지는데도 ― 또는 오히려 그 때문에 ― 러시아에서는 청소년 비행 범죄가 많았고, 많은 학생들이 서구에서도 잘 알려진 방식으로 기성 사회에서 “낙오”됐다. 한 러시아 청년은 학급이 “불평분자”와 “정보원”으로 나뉘어 있다고 묘사했다. 불평분자는 권위적 냄새가 나는 명령을 일체 불신하는 삐딱한 학생이고, 정보원은 뒤처져 있는 학생들의 언행(무엇을 하고 하지 않는지)을 교사에게 일러바치는 학생이다.
(영국의 젊은 노동자들은 각각을 ‘과격분자’와 ‘아첨꾼’이라고 부른다.)
과거로의 회귀
이렇게 권위적 질서를 세우려면 중앙집권화가 필요하다. 학교의 중앙집권화는 교장을 선출직에서 임명직으로 바꾸며 시작됐다. 1930년대 들어서는 다른 중대한 변화들도 나타나며 중앙집권화의 속도가 정신없이 빨라졌다. “모스크바와 마그니토고르스크, 타슈켄트와 탈린처럼 서로 멀리 떨어진 지역들에 있는 8년제 학교 5학년의 모습은 거의 차이가 없었다. 교복도 같고, 행동 수칙도 같고, 같은 과목을 같은 교과서와 같은 진도로 배웠다. 학생들이 15세가 돼서 졸업을 할 때쯤 선택하는 진학 진로도 어느 지역에서든 대체로 같았다.”(Grant, Soviet Education)
그 곧고 좁은 길에서 벗어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흐루쇼프가 스탈린의 악행을 “폭로”한 바로 그해에는 학교에서 역사 시험이 없었다. 교과서가 죄다 스탈린을 위대한 영웅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악행을 들춰내는 내용의 새 교과서가 부랴부랴 집필됐고, 바로 다음 해에 시험이 재개됐다. 교과서에 적힌 역사적 사실이 변했을 뿐이었다.
중앙집권화가 계속 진척되는 것과 함께, 시험도 부활했다. 1920년대 핀케비치는 시험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통적인 시험은 … 학생들에게 너무 작위적이고 낯선 것이어서 학생들의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파괴했다. 확실히 시험은 우리의 학교에서 사라져야 한다. 시험이 어떤 명분과 이름으로 시행되더라도 우리는 그에 맞서 전쟁을 벌여야 한다.
그러나 핀케비치는 1930년에는 별다른 설명 없이 “그해 말에 시험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부적절하게도 혁명 전에 쓰이던 시험 옹호 논리로 시험의 부활을 정당화했다.
1958년 흐루쇼프는 개혁을 시행해 4학년, 7학년, 10학년의 시험 횟수를 줄였다. 10학년의 시험은 대학 입학 자격 시험 같은 것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직후에는, 혁명 이전 교육 제도에서 쓰이던 성적 제도가 재도입됐다.(매우 나쁨 1, 매우 훌륭함 5)
이제 교육의 온갖 측면이 극도로 통제되고 정형화됐으므로, 학생들의 정신 자세도 통제의 대상에서 빠졌을 리 없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직후, 초중등학교에서 차르 시절에 쓰던 학생 행동 수칙이 다시 도입됐다. 이 수칙은 학생들의 도덕 의식 함양에 일조하리라고 여겨졌으므로, 끊임없이 강조됐고, 전국 학생들의 학교 생활 전반을 억누르는 규율적 족쇄로 이용됐다. 학생 행동 수칙은 20개 조항으로 돼 있었는데, 그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1. 끊임없이 지식을 습득해서 교양 있고 세련된 시민이 되고, 조국에 최대한 봉사한다.
3. 학교 관리자와 교사들의 지시에 의문을 갖지 말고 복종한다.
8. 수업 시간에 똑바로 앉는다. 손으로 턱을 괴거나 구부정하게 앉지 않는다. 교사의 설명과 다른 학생의 대답을 경청한다. 잡담을 하거나 정신을 딴 데 팔지 않는다.
9. 교사나 교장이 교실에 들어오거나 나갈 때 자리에서 일어선다.
10. 교사의 질문에 대답할 때는 차려 자세로 서서 말한다. 대답한 후에는 교사의 허락을 받고 자리에 앉는다. 질문에 대답하고 싶으면 손을 든다.
12. 교장과 교사들을 공손하게 대한다. 그들과 마주치면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남학생들은 모자도 들어올린다.
19. 학교생활기록부를 항상 지니고 다니며 잘 간수한다. 다른 사람에게 넘겨 주지 않는다. 교사나 학교 관리자가 요구하면 제출한다.
그 밖의 수칙으로는 근면, 시간 엄수, 청결, 예절, 학교 재산 보살피기, 약자에 대한 배려, 학급과 학교의 명예를 지키기 등이 있었다. 이 수칙과 그에 대한 명분은 학생을 교정하는 주된 수단이었다. 도덕 교육 성적표가 부수적으로 쓰이며 이 수칙의 시행을 뒷받침했다.
이 수칙을 1918년 교육법의 기본 원리와 비교해 보라. “우리는 개인들이 저마다 고유하게 발전할 권리가 있음을 잊지 않는다. … 우리는 개성을 가로막거나 … 틀에 박힌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 사회주의 공동체의 안정성은 획일화된 막사 … 에 근거하지 않는다.”
서구에서 교육이 진보하려면 권력 없는 사람들 ― 학생과 교사와 다른 교육 노동자들 ― 이 동맹해 떨쳐 일어서야 한다. 그 새싹은 이미 돋아나기 시작했다. 소련에서도 그 길은 같을 것이다.
MARX21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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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Chanie Rosenberg, 'Education and Revolution: A Great Experiment in Socialist Education', RANK AND FILE Teachers,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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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 Polytechnic Education은 ‘종합기술 교육’이라고 번역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서 ‘종합기술 교육’은 ‘직업 훈련’과 비슷한 뜻으로 쓰인다. 또, 뒤에서 나오지만 마르크스는 Polytechnic Education을 “생산 과정 일체에 대한 일반 원리를 가르치는 동시에, 학생과 청년들이 모든 산업에서 쓰이는 간단한 도구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실습 훈련을 시키는 교육”이라고 규정한다. 이 취지를 살리기 위해 Polytechnic Education을 ‘과학·기술 종합 교육’이라고 번역하겠다 ─ 옮긴이. ↩
- 1927년 알베르트 페트로비치 핀케비치 교수는 《소비에트 공화국의 새 교육》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혁명의 이상에 대한 큰 열광을 불러일으켰고, 소련에서는 교사들을 가르치는 교재로 사용됐다. 1935년 핀케비치는 《소련의 교육》이라는 또 다른 책을 썼다. 5개년 계획의 시행을 기점으로 교육의 지향이 180도 확 변한 상황을 분명히 보여 주는 더 나은 책은 없다. 그러나 그와 그의 양심은 참으로 딱한 일을 당했다.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희생돼 1937년 강제 노동 수용소(굴락)에서 “실종”됐다 ─ 옮긴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