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마르크스주의 계급 이론
마르크스 계급 개념의 핵심 쟁점들
이 글은 필자가 오래전 불가피한 사정으로 다른 이름으로 발표한 글의 일부다.
오늘날 ‘노동운동의 위기’를 얘기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특히 민중주의자)들이 계급과 계급투쟁 중심성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정치에서 계급 문제의 중요성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을 ‘환원론’, ‘본질주의’, ‘경제주의’, ‘결정론’ 등이라고 일축하는 경향이 있다.
1 노년에 병들거나 사고로 죽거나 고생할 가능성도 크게 다르다.(물론 이런 묘사는 기계적으로보다는 확률통계적으로 이해돼야 한다. 예컨대 노동자의 자녀는 소위 ‘일류’ 대학에 갈 확률이 전문직·관리직 사람들의 자녀보다 훨씬 낮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계급 사회에 살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같은 날 태어난 두 아이가 소속 계급에 따라 전혀 딴판인 인생을 살 수 있다. 진정한 지적 능력이나 학업 성실도 등 어떤 주관적 요인보다 계급 배경이 두 사람의 장래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주거·위생·놀이 등 여러 모로 더 나쁜 환경 탓에 노동계급의 자녀들이 출생시 사망률이나 유아 발병률이 더 높고, 유년기에 사고를 당할 가능성도 더 크다. 학교에서도 부잣집 아이들과 비교해 차별 대우를 받아 어린 마음에 상처 입기 십상이고, 때로 이것은 이후 인생을 좌우하기도 한다. 반면, 더 좋은 병원에서 안전하게 태어난 부잣집 아이들은 마당이 축구장처럼(아동에겐) 넓은 집에서 자라면서 더 좋은 음식물을 섭취하고, 학교 성적 향상에 효과적인 사교육을 받고, 대개는 넓은 운동장과 수영장과 테니스장과 외국어 랩과 도서관과 음악감상실 등을 갖춘 시설이 좋은 고등학교에 다닌다. 이른바 ‘일류’ 대학에 갈 가능성, 따라서 더 좋은 직업과 고소득과 쾌적한 주거지를 마련할 가능성, 고급 백화점 또는 부티크 쇼핑 기회 등도 자본가 2세들에게 훨씬 더 크게 열려 있다. 하다못해 낡은 소형 승용차 자가운전자가 벤츠 자가용차 운전자보다 교통경찰한테 걸릴 가능성이 더 크다. 직장 생활, 여가와 오락, 외식, 연금, 부수입, 직업병, 옷, 주식 보유, 장례와 무덤 등등. 연애와 결혼도 계급별로 하는 경향이 거의 절대적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여전히 진실이다. 서민층일수록 교도소에 갈 확률이 부유층보다 훨씬 큰 현실을 비꼬는 말이다.이러한 불평등의 사례들은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난다. 싫든 좋든 계급은 삶이요, 불쾌하고 우울하더라도 현실이다.
마르크스도 자기보다 앞서 여러 친자본주의 역사가와 경제학자들이 계급을 발견했다고 겸손히 지적했다.
나보다 훨씬 전에 부르주아 역사가들이 이러한 계급투쟁의 역사적 전개에 관해 서술했고,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여러 계급을 경제적으로 분석해 놓았습니다. 내가 새롭게 한 일은 다음 사실들을 증명했다는 것입니다. 1) 계급들의 존재는 생산의 특정한 역사적 발전 단계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2) 계급투쟁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결과에 이른다. 3) 이 독재는 모든 계급을 폐지하고 계급 없는 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를 이룰 뿐이다.
계급과 계급투쟁 얘기가 아니라 계급이 생산에서 비롯한다는 점, 노동자 혁명과 노동자 권력 얘기가 특별히 마르크스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3 사실 마르크스의 계급 개념은 그의 고유한 사상을 포함하고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계급은 관계, 착취 관계다. 계급은 착취가 사회적 관계들로 나타나는 방식이다. ‘착취’는 다른 사람들의 노동생산물의 일부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급은 사회의 생산관계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규정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생산조건들’(생산수단과 노동을 합쳐 이렇게 일컫는다)과의 관계(특히 통제 여부)를 중심으로 살펴보되 다른 계급들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
물론 이때 “마르크스는 너무 겸손했던 듯하다.”계급에 관한 오해
이 점에 관해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계급에 관한 흔한 오해를 먼저 다루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가장 흔해빠진 오해는 계급을 직업과 혼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흔한 직업명인 ‘자영업’을 예로 들어 봐도 금세 알 수 있는 건 이들을 하나의 계급으로 보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영업자들의 상층 ― 예컨대 전관예우로 크게 성공한 변호사, 수익성 높은 병원을 소유한 의사, 사무실 건물 소유주, 투자 컨설팅으로 큰 돈을 번 컨설턴트 등 ― 은 많은 돈(생산수단의 화폐 형태)을 투자해 큰 수익을 거두곤 해 사실상 자본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반면 자영업자의 하층은 노동계급과의 경계선 상에 있는 존재들이다. 둘째 오해는 계급을 의식에 근거해 규정하는 것이다. 진보적 사회학자들 가운데 이런 오해가 많다. 이런 이해 방식은 가령 사무직 노동자나 피고용 의사, 심지어 공무원과 교사를 노동계급의 일부로 보지 않는다. 이런 사회학자들은 특히, 산업혁명기 영국 사회를 다룬 걸작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의 지은이 에드워드 톰슨의 ‘계급형성’ 개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계급은, 어떤 사람들이 (이어받은 것이든 아니면 함께 나누어 가진 것이든) 공통된 경험의 결과 자신들 사이에는 자기들과 이해관계가 다른(대개 상반되는) 타인들과 대립되는 동일한 이해관계가 존재함을 느끼게 되고 또 그것을 분명히 깨닫게 될 때 나타난다.”
5 홉스봄이 비록 “온전한 의미의”라는 수식구를 넣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전후 문맥상 이 어구에 강조점을 두는 듯하지는 않다. 오히려 강조점은 앞 문장, 즉 “계급과 계급 의식 문제는 분리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홉스봄은 노동계급을 육체 노동자로 환원했다. 그리고 1970년대 말 서구 노동자 운동이 침체하기 시작했을 때, “[계급의]나머지와 상관없이 각기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노동자들의 “부문주의적이고 경제주의적인” 의식을 비판했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쇠퇴를 선언했다. 6 사실, 홉스봄은 ‘노동계급/운동의 쇠퇴’가 1951년에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훌륭한 역사가였지만 정치적 입장은 (인민전선 노선 등) 결함투성이였던 에릭 홉스봄도 이렇게 주장했다. “계급과 계급 의식 문제는 분리할 수 없다. … 온전한 의미의 계급은 계급들이 자신에 대한 의식을 획득하기 시작하는 역사적 시기에만 생겨난다.”7 더 나아가 마오(그리고 그의 지지자 루이 알튀세르 8 )에게 계급투쟁은 당이 하는 일로 돼 있다. “우리는 지난 10년간 계급투쟁을 해오지 않았다. 1952년에 한 번 했고, 1957년에 한 번 했으나 이것은 단지 행정 기관과 학교에서 했던 것일 뿐이다.” 9
마오쩌둥도 계급을 의식 문제로 치환했다. “노동자, 농민, 도시 프티부르주아 인자들, 애국적 지식인들, 애국적 자본가들, 기타 애국자들이 온 나라 인구의 95퍼센트 이상 된다. 우리의 인민민주주의 독재 하에서 이 모든 사람들이 인민으로 분류된다.”10 둘째, 역시 《브뤼메르월 18일》에 있는 것으로, “고대 로마의 계급투쟁이 특권적 소수 내에서만, 다시 말해 부유한 자유민과 가난한 자유민 사이에서만 벌어졌고, 인구 가운데 거대한 생산 대중이었던 노예는 이들 투쟁 당사자들을 위해 순전히 수동적 발판 구실만 했다”는 구절이다. 11 셋째, 《자본론》에 있는 것으로, “고대 세계의 계급투쟁은 주로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투쟁이라는 형태로 행해”졌다는 구절이다. 12
물론 마르크스가 계급을 다르게 정의한 듯한 구절이 서너 개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첫째,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월 18일》 속에서 프랑스의 자작 소농이 어떤 면에서는 “계급을 이루고” 다른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구절이다.이 모든 경우에 마르크스의 계급과 계급투쟁 개념은 정치(적) 투쟁을 포함하는 것이다. 특정 계급이 일정한 발전 단계에 도달해, 마르크스가 (헤겔의 용어로) 말한 “대자적” 계급이 되면, 의식이나 단체행동 같은 특성들이 발생함 직하다.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이렇게 썼다.
경제적 조건들은 먼저 그 나라의 대중을 노동자로 바꾸어 놓았다. 자본의 득세는 이 대중에게 공통된 상황, 공통의 이해관계를 만들어 냈다. 그래서 이 대중은 이미 자본에 맞서는 계급이지만 아직 대자적이지는 않다. 투쟁 속에서 … 이 대중은 단결하게 되고 대자적 계급이 된다. 이 대중이 지키는 이익은 계급 이익이 된다. 하지만 계급에 맞서는 계급의 투쟁은 정치(적) 투쟁이다.
그러나 정치(적) 투쟁은 마르크스의 계급과 계급투쟁 개념에 결코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다. 다른 수많은 구절들에서 보듯이, 경제적 차원에서의 끊임없는 계급투쟁, 즉 착취와 착취에 대한 저항이라는 요소만으로도 마르크스의 계급 개념으로 충분하다. 저항이 단체행동을 꼭 포함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고대 노예의 경우 도주가 가장 흔한 저항 형태였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 임금노동자 계급은 언어가 서로 다른 고대 노예보다 훨씬 덜 이질적이고 대도시와 대규모 일터에 집중돼 있는 덕분에 계급투쟁의 긴장이 심해질수록 정치 활동을 할 공산이 커지는 경향이 있다.
역사상, 억압당하는 계급들의 성원들은 하나의 계급으로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공통의 이해관계를 전부 또는 일부 의식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다른 계급의 성원들에게 적대감을 느낄 수도 있고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계급투쟁은 본질적으로 계급들 간의 근본적인 관계인 착취와 착취에 대한 저항을 포함하지만, 꼭 계급 의식이나 공통의 단체활동(정당이든 노동조합이든)을 포함해야 하는 건 아니다. 계급은 계급들이 자신의 공통의 정체성과 공통의 목적을 자각하고 공통의 정치 활동을 하기 전에 이미 그에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의식이나 집단적 투쟁 여부에 관계없이 계급은 존재한다. 노동자들은 정의당이나 더민주당, 심지어 새누리당에 투표해도 노동자다. 가끔 스키를 타러 가거나 오페라를 보면서 스스로 중간계급에 속한다고 느끼더라도 노동자는 노동자다.
14 노동계급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들도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정태적 관점으로는 노동계급의 의식을 고정되고 결정된 것으로 가정하게 된다. 그리 되면 ― 홉스봄이 그랬듯이 ― 노동계급의 ‘선진’ 부분(예컨대 제조업 육체 노동자)이 쇠퇴하면 노동계급 자체도 쇠퇴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리기 쉽다. 15
계급을 객관적 관계 속에서 본다는 것은 노동계급의 실제 이해관계와 현재의 의식을 분명하게 구별한다는 뜻이다. 또한 그것은 노동계급이 착취라는 자신의 조건으로 말미암아 철저한 사회 변화를 향해 나아가는 역사적 경향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즉, 그들의 잠재력과 현재 모습을 구별할 줄 아는 것이다. 이것은 계급을 사회학의 정태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동태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반면 계급을 정태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특히 에릭 홉스봄)계급에 관한 불충분한 이해
16 또,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는 홉스에게 동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홉스 등이 그랬듯이 권력이 권리의 기초라고 한다면 권리, 법 등은 단지 국가 권력이 의존하고 있는 다른 관계들의 징후, 표현일 뿐이다.” 17
계급에 관한 오해는 아니지만 불충분한 이해는 첫째, 계급을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로 정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산관계와 소유관계는 구분된다. 전자는 내용이고 후자는 형식인데, 내용과 형식이 조금 다를 수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에서 사회의 생산력이 특정 발전 단계에 이르러 기존 생산관계와 갈등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 얘기할 때, “생산관계들의 법률적 표현일 뿐인 소유관계들”이라고 했다.18 셋째, 현대의 주식회사다. 기껏해야 약간의 지분만을 소유하고 있는 고용된 전문경영인들이 실제로 회사를 운영할 때 그들은 중간계급의 일부가 아니라 지배계급의 일부인 것이다. 19 넷째, 옛 소련(그리고 현 북한)의 국가 관료다. 그런 사회의 국가 관료는 개별적으로는 공장과 광산 등 기계설비류나 사무용 건물, 금융 자산 등을 소유하지 않았고, 그저 사치재 등 소비재와 특혜적 서비스만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향유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통제하는 국가를 통해 집단적·간접적으로 생산수단을 지배했고, 노동계급은 국가와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소유에서 배제돼 있었다.
계급을 소유관계로 정의하는 것이 대개는 통하지만, 형식적이어서 때로는 오류를 빚는다. 사례를 들면 첫째, 중세 가톨릭 교회의 고위 사제(주교·대주교·추기경 등) 개개인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았지만, 지배계급의 일부였다. 교회가 생산수단을 집단으로 소유한 덕분에 교회를 통해 생산수단을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인도의 자본주의 이전 시대 지배 카스트들은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권이 없이 단지 점유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생산수단의 실질적인 점유 덕분에 그들은 지배계급이었다.20 중간관리자는 노동자들의 노동을 통제한다는 점에서 노동자와 다른 반면, 생산수단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기업주나 경영진과 다르므로, 결국 중간계급의 일부인 것이다.
계급에 관한 둘째 불충분한 이해는 생산수단과 맺는 관계만을 고려하는 것이다. 생산수단과의 관계라는 점이 핵심적 진실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노동에 대한 통제력 유무도 따져봐야 하고, 다른 계급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 특히, ‘신중간계급’을 정확히 파악하려 할 때 불충분함이 드러난다. 자본주의 기업의 중간관리자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도, 지배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노동자들의 노동을 통제한다. 이 점에서 그들은 대부분의 기술자(엔지니어·테크니션·오퍼레이터)와 구분된다. 기술자는 대개 숙련 노동자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노동에서 거의 자율성이 없다. 감독하는 구실을 하지 않는다. 재화와 서비스 생산에 가치를 부가한다. … 보수도 노동계급과 엇비슷하”기 때문이다.21 조돈문처럼 1985년 이후의 에릭 올린 라이트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22 (그럼에도 조돈문은 김석준 등 베버 파와 비슷한 계급 분석에 도달한다.) 그 결과 계급 간의 진정한 경계가 흐려진다. 노동계급으로 분류해야 할 사람(가령 간호사)들을 ‘신중간계급’의 일부로 분류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을 ‘신중간계급’의 상층과 하층으로 분류하는데, 이때 ‘신중간계급’ 상층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실은 지배계급의 일원으로 분류해야 한다.(그런데 신중간계급을 마치 독자적인 계급인 것처럼 다루면 자본주의 사회의 두 주요 계급 ― 지배계급과 노동계급 ― 사이에 끼어 있는 그 계급의 유동적이고 모순된 처지를 간과하게 된다. 이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농민을 다룰 때 다루기로 한다.)
‘신중간계급’ 문제는 오늘날 계급 논의의 핵심 이슈 중 하나다. 스탈린주의의 사상적 유산이 대부분 거부되면서(그래야 마땅하다), 안타깝게도 마르크스의 계급 개념도 사실상 외면당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진보적 사회학자들은 마르크스의 계급 개념과 부르주아 사회학(특히 막스 베버)의 개념을 절충하거나,사회 성격 규정 문제와 동맹 문제
23 방금 인용한 《자본론》 구절과 아래 주32의 《자본론》 인용문은 어떤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원리는 누가 생산의 대부분을 수행하는가 하는 점이 아니라 잉여 전유 방법, 즉 지배계급(들)이 가장 중요한 생산자들로부터 잉여를 추출하는 방식임을 분명히 보여 준다.
1980년대 한국 좌파에서는 소위 ‘사회구성체 논쟁’이라는 게 유행했다. 핵심 쟁점은 한국 사회의 성격이 뭐냐는 것이었는데, 특히 최대 다수파인 민족해방 운동가들(이하 자민통계)이 한국 사회를 식민지 반半봉건 사회로 규정한 게 최대 이슈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관점은 명백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갖가지 경제적 사회구성체, 예를 들어 노예제의 사회와 임금노동의 사회를 구별해 주는 것은 오직 이 잉여 노동이 직접적 생산자인 노동자로부터 추출되는 형태뿐이다.”24 에서 추출했기 때문이다. 25 물론 부자유 노동이 모두 노예의 노동은 아니었다. 첫째, 그다지 흔하지는 않았지만 농노제가 산재해 있었다(예컨대 스파르타). 둘째, 넓게 보면 노예제의 일부로 볼 수도 있겠지만 엄격한 의미의 노예(동산 노예)와는 구별되는 채무 예속민이 대부분의 지역에(민주정 하의 아테네를 제외하면) 존재했다. 셋째, 대략 서기 300년부터는 지배계급이 노예보다 농노한테서 더 많이 잉여를 추출했다.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를 예로 들어 보자. 실제로는 그 사회에서도 자유 독립생산자인 소농이 노예보다 더 많았다. 당시에 심지어 생산물의 양에서도 소농과 장인 등 자유 독립생산자가 생산한 것이 노예가 생산한 것보다 더 많았다. 그럼에도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를 ‘노예 사회’ 또는 ‘노예제 생산양식’에 토대를 둔 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 그 이유는 그 사회의 지배계급이 평소에 차지하는 잉여의 대부분을 노예와 그 밖의 다른 “부자유 노동”그러나 더 자세히 살펴보면 첫째, 농노제는 대략 서기 300년까지는 부자유 노동의 그다지 흔한 형태가 아니었다. 둘째, 보잘것없는 평민은 거의 누구나 예컨대 지대 납부 등 부자한테 진 채무를 변제하지 못해 채무 예속민이 될 가능성이 있었고, 채무 예속민은 ‘법률상’은 아닐지라도 ‘사실상’ 노예와 다를 바 없었다. 셋째, 노예는 서기 1000년경까지도 존속했다. 심지어 일부 농노는 지주가 제공한 덕분에 노예를 보유했다. 요컨대 노예제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처음부터 끝까지 부자유 노동의 전형이었다.
이제 농민과의 동맹 문제를 살펴보자. 자민통계는 지금까지도 농민을 중시한다. 그들뿐 아니라 민주노총 상근간부층의 다수도 “노·농·빈” 하며 민중주의적 전략을 주장한다. 빈민의 다수는 노동계급의 일부이므로 여기서는 농민 문제를 특별히 다뤄 보기로 하자.
27 소농은 자신의 생산수단을 지배하지만, 누구의 노동도 지배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소농도 중간계급의 일부다. 엥겔스는 소농을 이렇게 정의했다. “그와 그의 가족이 경작할 수 있는 것보다 보통 더 크지 않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작지 않은 크기의 땅뙈기의 소유자 또는 소작인, 특히 전자.” 28 “임금노동자 없이 꾸려나갈 수 없는” 대농과 중농 가운데 전자는 “공공연한 자본주의적 생산에 열중”한다. 29 이들은 농업 기업가 또는 농업 자본가인데, 독립 소생산자인 영세 자영 농민(소농)과 엄격하게 구별돼야 한다.
위에서 계급(그리고 특정 계급)이 생산조건들과의 관계에 따라서뿐 아니라 다른 계급들과의 관계에 따라서도 규정되는 것임을 보았다. 이것은 (특정) 계급이 계급 구조 속에서 자리매김된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농민도 관계(생산조건들에 대한 통제와, 다른 계급들과의 관계) 속에서 봐야 한다. 대개 ‘농민’ 하면 소농을 가리키는데, 소농은 계급사회가 처음 생겨나고부터 20세기 중반까지 5천 년 동안 인류의 대부분을 차지했다.30 농민은 그들의 생계수단인 농업 생산수단(토지와 농기구)을 점유한다.(소유는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농민은 노예는 아니었지만, 농노일 수 있었다.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 농민은 소규모 토지의 자유소유권자이거나 임차인(=차지인: 고정 화폐지대 또는 고정 현물지대를 냈는데, 노동부역을 제공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음) 또는 언제든 쫓겨날 수 있고 언제든 지대가 오를 수 있는 ‘임의 소작인’이었다. 그리고 농민은 주로 가족 단위로 존재하면서 가족 노동으로 경작하지만, 이따금 노예나 임금노동을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농민 출신으로 여전히 농민들 사이에 남아 있었던 장인이나 어부는 농민으로 여겨도 무방하다.
전통적인 소농이 어떤 존재였는가를 알려면 서양 봉건제에 대한 권위 있는 연구자 로드니 힐튼의 연구에 의존하는 게 유용하다.31 때때로 곡물은 자유 시장에서 매매된 게 아니라 국가에 의해 가격이 책정됐다. 이 수매가는 생산성이 낮은 농민의 생산비를 밑돌았으므로, 생산성을 계속 올리지 못하는 비효율적인 소농은 잉여 노동을 착취당하다가 마침내 몰락한다. 그리고 도시 무산자無産者 계급에 합류하게 된다. 그때까지 농민은 고리대금업자나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때우려 하지만, 이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원리금 상환 부담만 갈수록 커진다. 다른 한편, 각종 세금 문제도, 때에 따라 정도 차가 있기는 하지만 농민에게 크게 부담이 됐다.
국가자본주의 하에서는 농민이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의 농민처럼 국가에 의해 착취당했다. 1990년대 이전 한국 사회와 현 중국 사회의 농민은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부채·가격·세금이라는 세 가지 방식으로 국가에 의해 착취당했다. 개별 유산자有産者가 자신이 부리는 생산자들을 착취하는 것이 ‘직접적이고 개별적인’ 착취 형태라면, 이것은 ‘간접적이고 집단적인’ 착취 형태라고 할 수 있다.이처럼 국가자본주의 하의 농민은 결정적으로 국가에 의해 착취당한다는 점에서 도시 중간계급과 다르다. 국가의 착취에서 벗어나도 여전히 농민의 대부분은 중간계급이다. 그러나 중간계급은 중간계급이지, 노동계급이 아니다. 둘의 차이를 ‘민중’이라는 말로 두루뭉술하게 흐려서는 안 된다.
32 그래서 지배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노동자들의 조건을 공격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문제들을 해결한다면, 중간계급의 대중을 자기들에 대한 지지 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을 것이다.
중간계급이 아무리 경제 불황으로 생활이 팍팍해도 노동계급과 이해관계가 일부 다를 뿐 아니라, 중간에서 동요하는 계급이기 때문이다. 중간계급은 서로 다투는 두 주요 계급 사이에서 동요하면서, 계급 세력균형에 따라 특정 방향으로 끌리는 경향이 있다. 동요야말로 중간계급의 결정적 특징이고, 이는 그 계급의 독자성 결여에서 비롯하는 것이다.반면 노동자 운동이 자기가 사회의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줄 수 있다면 중간계급 대중이 믿고 따를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 운동은 농민과는 다른 자기 나름의 정치와 조직을 추구하면서, 지배계급에 대한 세력의 우위를 농민에게 입증해야 비로소 자기 쪽으로 농민을 끌어당길 수 있다.
맺음말
비록 ‘계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은 구절이지만, 마르크스는 계급을 착취 관계로 정의하면서, 국가도 계급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지적했다.
무보수 잉여 노동을 직접적 생산자로부터 추출하는 특정한 경제적 형태가 지배/종속 관계를 결정하고, 이 관계는 생산 자체로부터 직접적으로 발생해 생산 자체에 대해 하나의 결정적인 요소로서 반작용한다. 그 경제적 형태를 토대로, 생산관계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경제적 공동체의 전체 구조와 그 공동체의 특정한 정치적 형태가 구축된다. 직접적 생산자와 생산조건 소유자의 직접적 관계(의 특정 형태)는 당연히 노동의 성격과 방법에, 또 사회적 노동생산력의 특정 발전 단계에 항상 상응하는데, 그 관계 속에서 사회 구조 전체의 가장 깊은 비밀과 은폐된 토대, 그리하여 주권·종속 관계의 정치적 형태(요컨대 상응하는 특정 국가 형태)의 가장 깊은 비밀과 은폐된 토대가 발견된다. 그렇다고 해서 동일한(주요한 조건들에 관한 한 동일하다) 경제적 토대가 수많은 상이한 경험적 사정들(예컨대 자연 환경, 인종적 특징들, 외부의 역사적 영향 등) 때문에 무한히 다양하게 변모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편차는 그런 경험적 사정들의 분석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34 마르크스주의적 정치경제(학) 비판은 마르크스주의적 정치 이론과 실천으로 이어져야 일관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정치의 요체는 계급과 계급투쟁과 노동계급 투쟁의 결정적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오늘날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경제 분석과 비판은 칭송하면서도 그의 정치적 견해와 사상은 거부하는 경향이 여전히 광범하다. 이런 사람들은 특히 국가 문제를 다룰 때 흔히 사회민주주의나 아나키즘의 국가관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국가의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기초는 경제적 관계들 속에 있다. 레닌 말대로 “정치(학)는 경제(학)의 농축된 표현”인 것이다.주
- 최인섭·이상용·기광도 1999, pp80~82. 이 조사·연구 보고서는 우리 나라와 영국 모두에서 범죄가 경제 상황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를 각종 통계 수치로 잘 보여 준다. ↩
- ‘마르크스가 바이데마이어한테 보내는 편지’, 1882년 3월 5일. 마르크스가 말한 부르주아 역사가들과 경제학자들은 리비, 마키아벨리, 애덤 스미스, 시스몽디, 티에리, 기조, 티에르, 카알라일 등이다. 에른스트 피셔(편집) 1990, p77. ↩
- 캘리니코스 2009, p132. ↩
- 톰슨 2000, p7. ↩
- Hobsbawm 1971, p6. ↩
- Jacques & Mulhern (eds) 1981, pp284~286. ↩
- 1962년 1월의 연설. ↩
- 엘리어트 1992, pp289~303. ↩
- 1963년 5월의 연설. ↩
- 마르크스 1991, pp266~267. ↩
- 마르크스 1991, p159. 번역은 내가 조금 수정했다.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의 계급투쟁이 노예와 노예 소유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다고 해야 했을 것을 “자유민과 노예” 사이에서 일어났다고 했던 것은 사소한 잘못이다.(맑스·엥겔스 1998, p3) 자유민(시민)의 대다수는 노예를 소유하지 않았다. 노예와 자유민의 차이는 계급의 차이가 아니라 단지 법적 지위의 차이일 뿐이다. ↩
- 마르크스 1990, p175. ↩
- 맑스·엥겔스 1990, p295. 번역은 내가 영어판에 의거해 다소 수정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노동계급은 1980년대 후반부터 ― 1987년 7~8월 대파업을 기점으로 잡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 ‘대자적’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방금 “시작했다”고 표현한 것은 이것이 하나의 과정이며 지금도 우리는 이 과정 속에 있음을 암시하기 위해서다. ↩
- Jacques & Mulhern (eds) 1981. ↩
- Jacques & Mulhern (eds) 1981. ↩
- 맑스·엥겔스 1992, p478. ↩
- Marx & Engels 1976, p348.(독일어 원서는 1845년 봄에서 1847년 봄 사이에 쓰였다.) ↩
- Meillassoux 1973, pp89~111. 특히 p100. ↩
- 마르크스 1990, pp536~543. ↩
- Carter 1979, p101. ↩
- 가령 김석준·박형준 외 1999. ↩
- 조돈문 2011. ↩
- 마르크스, 1990, p273. ↩
- 마르크스 1988. p62. ↩
- Croix 1983, pp52~54. ↩
- Croix 1983, pp255~259. ↩
- Shanin (ed) 1971, p17. ↩
- Marx & Engels 1970, p625. ↩
- Marx & Engels 1970, pp637~638. ↩
- Hilton 1975. ↩
- 착취 형태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Croix 1983, pp205~208. ↩
- 로라 라파르그(마르크스의 딸)에게 보낸 엥겔스의 편지(1886년 10월 2일). 드레이퍼 1986, p199에서 재인용. 또, 엥겔스 1988, pp146~147. ↩
- 마르크스 1990, pp972~973. 영어판과 대조해 내가 번역을 약간 수정했다. ↩
- Lenin 1965, pp7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