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이전 사회 발전의 몇 가지 문제들
이 글은 필자가 16년 전인 2000년에 발표한 글인데, 당시에 불가피한 사정으로 다른 이름으로 그래야 했다. 이번에 다시 내놓으면서 참고 문헌과 각주를 업데이트했다.
오늘날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은 자본주의 경제 분석과 직결돼 있는데도 이상하게 언저리로 밀려나 있는 듯하다. 전에 마르크스주의가 스탈린주의와 동일시됐던 것의 결과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이 천박하지 않고 안식이 높음을 보여 주려면 마르크스주의적 역사학이 발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역사유물론이 천박한 속류유물론에 의해 오염된 대표적인 문제 몇 개만이라도 골라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독자들의 흥미를 돋우고 탐구욕을 자극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든다.
1. 인류 역사는 모두 4단계에 걸쳐 발전해 왔나?
이 흔하디 흔한 주장은 인류 사회가 예정된 단계들 ― 원시 공산주의,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 을 어김없이 밟았다는 주장이다. 1 역사 발전 4단계설(만약 사회주의 사회 도래의 필연성 주장까지 덧붙여지면 5단계설)로 일컬어지는 이 속류유물론에 따르면, 한반도에 존재했던 사회들도 노예제와 봉건제를 거쳤다는 것이다. 2 그러나 이처럼 “마르크스·엥겔스 사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경향”에 대해 홉스봄은 이렇게 적절히 묘사한다. “주요한 경제적 사회구성을 모든 인간 사회가 하나하나, 다만 제각기 다른 속도로 올라가 마침내 똑같이 정상에 도달해야 하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3 그 결과 “모든 사회나 시기를 이것이나 저것으로, 이미 정해진 분류에 확정적으로 끼워 넣으려 하므로, 말하자면 경계 확정상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4
그러나 세계의 여러 지역들이 이런 단선론적인 역사적 진행을 정확히 따르지 않았다. 게다가 실제 사회들은 결코 순수 형태가 아니었고 언제나 이질적이고 상이한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각 사회 간에는 공통점뿐 아니라 차이점도 존재했다. 이 둘 모두를 똑같이 봐야 한다. 그러면 다음 사실들을 알 수 있다. 첫째, 상이한 시대, 상이한 지역에서 비슷한 발전 단계를 발견할 수 있다. 둘째, ‘후기’ 단계에서 ‘초기’ 단계로 퇴보하는 경우가 있다. 셋째, 똑같은 사회 안에서, 그리고 인접 사회들에서 옛 생산양식이 새 생산양식과 나란히 몇 세기 동안 공존할 수 있다. 예컨대 노예제와 농노제는 장기 공존하면서도 서기 300년 이후 노예제는 점차 쇠퇴하는 한편, 농노제는 점차 흥성했다. 넷째, 각 사회의 변동이 언제나 그 사회 내부의 동력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더 선진적인 사회로부터의 충격 ― 정복·식민주의·교역 등 ― 이 주된 구실을 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역사적 단계들을 건너뛸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기도 했다. 그래서 노예 사회나 ‘아시아적’ 사회(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설명하겠다) 또는 심지어 원시 사회가 훌쩍 자본주의 사회로 도약한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런 경우에는 다른 오래된 자본주의 사회보다 모순이 훨씬 더 심각해진다. 다른 사례는 게르만족의 경우처럼 원시 사회가 봉건 사회로 건너뛴 사례다. 4세기 말 동쪽으로부터 훈족의 침략을 받은 동고트족의 이주 여파에 밀린 서고트족이 로마 영내로 들어왔는데(375년), 이를 계기로 게르만족의 이동이 시작됐다. 이 ‘충격’은 ‘진보적인’ 사례였지만, 반대로 충격이 ‘퇴보적인’ 경우도 있다. 중미의 아스텍(멕시코)과 잉카(페루) 문명이 스페인 정복자들(각각 코르테스와 피사로)에 의해 유린당한 것이 전형적 사례다.
2. 원시 사회는 극빈 사회였나?
5 그러나 심지어 지금도 몇몇은 존속하고 있는 ‘원시’ 사회, 즉 ‘식량 찾아다니기’ 6 또는 ‘채집’ 사회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는 원시 사회가 ‘야만’ 상태였기는커녕 ‘문명’ 시대의 수많은 대중보다 더 어려운 삶을 살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세계화로 세계적 빈부격차가 커진 오늘날보다 형편이 나았던 1970년대 말경에도 저개발국 인구의 3분의 1이 절대 빈곤 상태에서 살고 있었고 어린이 세 명 중 한 명이 영양실조였다. 7 그런가 하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나라 미국에서 기혼 백인 남성의 5분의 1과 기혼 흑인 남성의 3분의 1이 4인 가족을 빈곤선 이상으로 부양할 수 없었다. 8 미국에서 빈곤선 이하에서 살고 있는 어린이의 비율은 1970년 15퍼센트에서 1990년대 중엽 선진국 중 가장 높은 20퍼센트로 올라갔다. ‘복지국가’라는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영국에서도 어린이의 10퍼센트가 빈곤선 이하에서 산다. 9 그러나 한 저명한 인류학자에 따르면, 원시 사회는 “최초의 풍요 사회”였다. 10 기본적으로 협동과 평등주의와 이타주의가 가능했을 ― 물론 필요하기도 했다 ― 만큼 그들은 비교적 넉넉하게 살았다.
인류 역사의 초기인 원시 공산주의 사회를 극빈 상황으로 생각하는 게 상식이다. 채집을 해서 먹고 살면 어떤 때는 먹을 것을 조금밖에 구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러면 온종일을 배가 고픈 채로 보내야 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3. 농업(및 목축업)의 발생과 함께 사유재산이 발생했나? 11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동시대 인류학자 루이스 모건의 연구 결과를 근거로 삼았다. 물론 모건의 연구는 오늘날의 연구 성과에 비추어 보면 낡았다. 그러나 이 때문에 엥겔스의 기본적 결론들이 무효화되는 건 아니다. 루이스 모건의 연구 대신에 최근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계급과 국가와 여성 차별이 발생한 건 ‘최초의 농업 혁명’(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이 일어나고 한참 뒤(지금으로부터 5천 년 전)였다. 12 이때조차 사유재산은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 13 즉, 최초의 계급 사회는 사유재산에 토대를 둔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마르크스가 ‘아시아적’이라고 부른 사회였다.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최초의 계급 사회인 초기 문명 모두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경제 체제였다.
엥겔스는마르크스에 따르면, 이 형태의 계급사회에서는 사유재산이 존재하지 않았다. 14 오히려 지배자들은 국가 기구에 대한 집단적 통제를 통해 전체 농민공동체들을 착취할 수 있었다. 한편, 농민공동체들은 사유재산 없이 공동으로 토지를 경작했다. 물론 역사학계의 비판대로 마르크스의 ‘아시아적 생산양식’ 개념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틀렸다. 15 특히, 그러한 사회들의 발전이 정체한다는 주장이 가장 잘못됐다. 하지만 메소포타미아·이집트·중국·인도·메소아메리카·남아메리카의 최초 ‘문명’(즉, 계급사회)은 마르크스의 대략적인 설명에 부합한다. 사회의 잉여는 신전을 관리하는 신관(대제관)이나 궁전의 왕 이하 관료가 지배했다. 이들은 관개나 제방 사업을 지도하고, 신전이나 궁전에 딸린 농민의 노동을 지도하며, 교역을 관리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잉여를 지배했다. 그러나 신관이든 궁전 관료든 아무도 사유재산을 갖지 못했다. 노예는 적었고(대중적 역사 이야기 16 와 달리, 이집트의 피라미드 돌을 운반한 인부들은 노예가 아니라 강제부역에 동원된 농민이었다), 다른 직접생산자인 농민과 장인에 대한 착취는 집단적·간접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착취는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도 있었다. 다만, 그리스·로마 세계의 농민이 지주에게 내는 지대 말고도 세금·병역·부역의 형태로 착취당했다면 17 초기 문명의 농민은 주로 공납과 부역의 형태로 착취당했다. 농민(과 장인)의 생산도 사유재산에 토대를 두지 않았다. 계급 발생 전부터 내려오던 유산으로서 공동 생산의 조직 형태가 여전히 존속했던 것이다. 특히, 옛 친족 혈통에 따라 조직된 상부상조 체계가 그 골간이 됐다.
다른 곳에서 최초로 계급이 발생하던 때 서유럽은 원시 사회였고 2천 년쯤 뒤에야 비로소 계급이 발생했다. 그때는 그리스 문명이었는데, 사유재산인 노예에 토대를 둔 경제 체제로서 등장했던 것이다. 그때는 앞서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발생했던 문명들이 지배계급 내의 분열과 지배계급들 사이의 유혈낭자한 전쟁, 그리고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 사이의 투쟁으로 1천 년에 이르는 인류 최초의 암흑시대를 보내고 지배계급과 농민 모두에서 사유재산이 발생한 지 한참 됐을 때였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의 사유재산 제도는 앞서간 사회들이 그 방향으로 전환했던 여파로 성립됐던 것이다. 더구나 그리스·로마 외의 다른 고대 사회는 그리스·로마만큼 광범하게 노예 노동을 사용하지 않았다. 백남운이나 속류유물론 일반이 주장하듯이 고조선이 그리스·로마와 같은 의미에서 노예제 사회라는 주장에는 설득력 있는 증거가 없다. 그러므로 원시 사회 다음에 노예제 사회가 온다는 식의 역사관이야말로 ‘서유럽적인’ 것이다. 마르크스 자신도 4단계(원시 공동체→노예제→봉건제→자본주의) 역사 발전은 서유럽에 한정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서유럽 자본주의 탄생에 대한 역사적 스케치를 모든 인민이 자신의 역사적 조건들과 관계없이 밟지 않으면 안 되는 일반적인 진로에 대한 역사철학으로 변형시키는 것”은 자신을 “지나치게 예우하는 것인 동시에 지나치게 망신시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계급과 사유재산이 처음으로 발생하는 방식에 대한 속류유물론의 묘사도 설득력이 없다. 즉, 농업이 발생해 정착 생활을 함에 따라 사람들이 토지에 대한 소유 관념을 갖게 됐고 이것이 사유재산을 발생시켰다거나, 생산력 발전으로 생긴 잉여 덕택에 유목 부족과 교환이 이루어진 것이 사유재산과 계급을 발생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공동체의 지도자가 지배자로 변신하는 과정은 일종의 횡령·배임·갈취 등 부정·부패 행위를 통해 개인 재산을 모은 것처럼 묘사된다.
19 그러나 사유재산 발생은 계급 발생 훨씬 뒤의 일이고 ― 이 점은 앞에서 설명했다 ― 계급 발생에서 인간의 부정적인 ‘원초적 본능’ 따위는 작용하지 않았다. 물론 먼저 생산력 발전(그리고 잉여 발생)이 있었다. 그러나 그 뒤 과정에는 불가피하고 필요했던 측면들이 주효했다. 물질적 문제들을 계속 완화시키기 위한 (생산력 증대) 노력의 일환으로 원시 공동체는 일부 사람들을 즉각적인 근로 부담에서 면제시켜 그들이 공동체 활동들을 조정하도록 해야 했다. 또, 잉여를 다 소비하지 않고 장래를 위해 저장해야 했다. 가뭄, 홍수, 메뚜기 떼의 공격 등으로 인한 기근 사태에 대비한다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비상 사태가 닥쳤을 때 언제나 여유 있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에는 생산을 감독하도록 육체 노동에서 면제받은 사람들이 지치고 배고픈 다른 사람들을 윽박질러서라도 일 시켜야 했고, 사람들이 배가 고픈데도 식량을 저장하도록 강요해야 했다.
그러나 계급 발생에 대한 이런 설명을 읽고 있노라면 우리는 문득 원래 탐욕적이고 이기적이던 인간 본성이 생산력 발전 덕분에 잉여가 발생하자 옳다구나 때를 만났던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지도자들이 지배자들로 바뀌기 시작하는 계기는 이렇게 주어졌던 것이다. 그들은 물자에 대한 자신들의 통제가 사회 전체를 위한 것으로 여기게 됐다. 그리고 그러한 통제권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겪더라도 통제권을 수호하려 했다. 왜냐하면 사회의 진보가 자신들의 능력과 안녕에 달려 있다고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공동체의 지도자들(국가 관료의 원형)은 처음에 실제로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다가 나중에는 마치 자신들의 이익이 사회 전체의 이익인 양 행동하는 것으로 변질했다. 인간 본성 때문이 아니라 불가피한 필요들이 그렇게 몰아갔던 것이다. 달리 말해, 사회의 발전이 최초로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고 억압할 동기를 부여했던 것이다.
4.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전환의 문제들
20 브레너는 서기 1000년에서 1300년 사이와 15세기 중엽에서 16세기 말 사이의 생산력 발전 사실을 사실상 무시하거나, 계급투쟁의 물질적 조건으로서 고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계급투쟁 개념은 주의주의적主意主義的이다. 즉, 객관적 제약과 자극을 고려하지 않고도 소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지만으로 대중 투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 돼 버린다.
먼저, 봉건제 하에서도 생산력의 발전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것은 요즘도 이 분야에서 영미 서양사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미국 마르크스주의자 로버트 브레너가 ‘계급투쟁’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비할 데 없이 훌륭한 출발점이다. 그러나 농업의 생산력 증대 덕택에 농촌의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덕분에 농촌의 “중산적[중간 규모] 생산자층”이 농촌의 “국지적 시장권”에 자기가 생산한 잉여 생산물(농산물과 수공업 공산품)을 내다팔기 시작할 수 있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맹아(싹)가 됐다. 또, 농업에서 등장한 부유한 농업 기업가(자본가적 차지농)와 수공업에서 등장한 매뉴팩처(공장제 수공업)도 자본주의의 맹아였다.22 특히, 상인에 의한 선대제가 한 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선대제(객주 제도)는 자신의 작업장과 도구를 가진 생산자에게 상인이 원료와 반제품, 경우에 따라서는 도구를 선대해 이를 통해 상품을 제조시키고 이에 대해 대가를 지급하는 방식이었는데,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전환기에 오히려 가장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리고 도시 상인은 봉건 지배계급이 아닌 신흥 중간계급이었는데, 자신보다 하층에 있는 도시와 농촌의 계급들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구실을 했지만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데서는 진보적 구실도 함께 했다. 예컨대 스위스의 칼뱅(칼빈) 파 상인과 시민(버거)은 귀족 내 비주류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경제를 더욱 시장화하려 했다. 이 점은 네덜란드 북부의 상인 부르주아지와 영국의 “평균계급들”도 마찬가지였다. 도시 상인들은 가장 온건한 반봉건 세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도시 상인을 단순한 봉건적 지배 세력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23 그러나 실제로는 절대군주정은 옛 봉건 질서와는 다른 것을 나타냈다. 《독일의 혁명과 반혁명》에서 엥겔스는 절대주의가 봉건 귀족과 부르주아지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는 국가라는 점을 강조했다. 24 절대주의는 봉건제에 의존하는 국가였으나 그 안에서 절대군주들은 시장체제 및 성장하는 도시와 연계된 새로운 세력들을 봉건 영주들의 세력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들의 정책은 부분적으로 여전히 강제력이나 혼인 관계를 이용해 토지를 획득하는 고전적인 봉건적 목적을 지향했다. 하지만 또 다른 목적은 상업과 국지적 생산을 확장하는 것으로 이것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었다.
오츠카 히사오 학파가 상인을 친봉건 반동세력으로 본 것은 절대주의 국가에 대한 입장과도 관계가 있다. 오츠카 학파는 절대국가를 단순히 봉건 국가로만 본다.25 다니엘 게랭 같은 아나키스트는 프랑스 혁명의 성과를 깎아내린다. 26 말하자면,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사람이 번다는 식으로 민중의 희생을 대가로 부르주아지만 이익을 얻었다고 시사한다. 그렇지 않다. 농민은 봉건 부과금에서 해방됐고 노동자의 실질임금도 혁명 전 수준의 무려 4분의 1에서 3분의 1이 인상됐다. 27 그리고 프랑스 혁명은 바뵈프와 그의 ‘평등파의 음모’라는 최초의 진정한 사회주의 운동을 탄생시켰다.(바뵈프의 ‘음모’는 실제 음모와 아무 관계가 없다. 탄압에 의해 비공개 활동을 한 데서 비롯한 명칭일 뿐이다.) 이런 것들은 분명히 ‘민중’의 이익이고 성과다.
프랑스 혁명은 구체제와 신흥 부르주아지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며 양쪽 모두를 견제하던 절대국가를 전복하고, “광범하고 자유롭고 신속한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정치적 조건들을 조성했다.맺음말
조지 오웰의 《1984년》에 이런 말이 나온다. “현재를 장악하는 자는 과거를 장악하고, 과거를 장악하는 자는 미래를 장악한다.” 왜 박근혜 정부와 우익이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부의 핵심적 통제 대상인 주제들 가운데는 한국 자본주의가 아직 움트던 초기 단계에서 일본 제국주의가 한 역할 문제가 포함된다. 마르크스의 한평생 압도적인 관심사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 관해 비교적 짤막한 글들을 여러 편 썼고, 그의 역사유물론은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도 적용되는 방법들과 원리들의 체계를 담고 있다. 이 점을 상기한다면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 관한 우리의 마르크스주의적 탐구가 아무 결실도 못 거둘 무익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 글이 누군가의 그런 탐구에 동기를 부여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주
- 홉스봄의 묘사다. 홉스봄 1988, pp127~128. ↩
- 가령 백남운 2004. ↩
- 홉스봄 1988, p122. ↩
- 홉스봄 1988, p.126. ↩
- 조성오(편저) 2007, pp30~31. 이 책은 1984년 초판 출간 직후 몇 년 동안 당시 학생 ‘운동권’(요즘말로 활동가)의 베스트셀러였고, 이후 2000년대 중반까지 무려 20여 년간 스테디셀러였다. 그러나 이 책은 옛 소련 국정 교과서의 스탈린주의적 속류유물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비록 저자가 더는 스탈린주의 정치를 지지하지 않지만). ↩
- 흔히 ‘약탈 사회’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영어의 ‘foraging’(식량 찾아다니기)을 잘못 번역한 것이다. ↩
- 유엔사회개발연구소 1996. ↩
- 유엔사회개발연구소 1996. ↩
- 유엔사회개발연구소 1996. ↩
- 살린스 2014. ↩
- 대중적 역사유물론 입문서들이 이렇게 설명한다. 가령 조성오(편저) 2007, pp41, 43, 46~47, 49, 56. ↩
- 차일드 2011. 또한 해리스 1995, pp39~55, 113~139. 차일드(1892~1957) 책의 제1장은 시대에 뒤진 데이터에 관한 논의이므로 완전히 쓸모없다. 하지만 그 책의 나머지는 차일드가 위대한 마르크스주의 고고학자였다는 사실을 여실히 입증한다. ↩
- 차일드 2011. ↩
- 마르크스 1989, pp38~43. ↩
- Anderson 1974, pp462~549에 부록으로 실린 “The ‘Asiatic Mode of Production.’” 2013년 이전에 출간된 국역판에는 아쉽게도 이 논문이 빠져 있었다. 다행히도, 2014년 현실문화에서 출간된 판에는 포함됐다. ↩
- 예컨대 조성오(편저) 2007, p74. ↩
- 로마 제정기에 쓰여지고 편집된 신약성경의 마태오복음서(27장 32절)와 마르코복음서(15장 21절)에는, 로마 군인들이 키레네에서 온 시몬이라는 사람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라는 강제 부역을 시켰다는 얘기가 나온다. ↩
- K Marx, Otechestvennye Zapiski 편집부에 보내는 편지(1877년 11월). Marx & Engels 1972, pp 478~479에서 재인용. ↩
- 조성오(편저) 2007, p52의 설명이 이렇다. ↩
- 로버트 브레너 외 1988. 그러나 브레너는 속류유물론자는 아니다. ↩
- Harman 1989, pp35~87. ↩
- 지도적 민족경제론자 박현채(1934~95)를 비롯한 한국의 여러 민중주의적 경제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일본의 오츠카 히사오 학파의 견해가 이랬다. ↩
- 마츠다 토모오松田智雄 편 1985, pp132~136. ↩
- 엥겔스 1988, pp142~151. 카우츠키(Kautsky 1901)도 마찬가지 견해다. Day & Gaido eds 2009, pp 537~542에서 재인용. ↩
- Hill 1986, pp110~111. ↩
- Guerin 1977. 게랭 2015, pp47~52에서 재인용. 그러나 게랭은 파시즘에 대해서는 매우 훌륭한 저작을 썼다. ↩
- Lefebvre 1967, p307.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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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erson, Perry 1974, ‘The ‘Asiatic Mode of Production.’ Lineages of the Absolutist State, Verso.”[국역: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 현실문화,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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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erin, Daniel 1977, Class Struggle in the First French Republic, Pluto Press.
Harman, Chris 1989, ‘From feudalism to capitalism’, International Socialism 2:45, Winter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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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utsky, Karl 1901, La lutte des classes en France en 1789, University of California Libraries.
Lefebvre, G 1967, The French Revolution vol 2, Routledge.
Marx, K & Engels, F 1972, Basic Writings on Politics and Philosophy, ed. by L S Feuer, Anc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