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마르크스주의 계급 이론
마르크스주의 계급론과 노동자 계급의 결정적 중요성
불평등과 사회 양극화 문제가 세계적으로 큰 화두다. 사회가 1퍼센트 대 99퍼센트로 나뉘어 있다는 문제의식이 늘었고, 한국의 청년들 사이에서도 금·은·동·흙수저라는 ‘수저 계급론’이 화두가 됐다. 이런 현상은 자본주의가 개인이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 근본에서 계급사회라고 하는 대중적 의식이 성장했음을 보여 준다.
이런 불만에 대해 박근혜 정부나 자본가들은 오히려 노동자 계급 내 격차와 불평등이 확대됐다는 식으로 뒤틀어 버리며 노동자 계급을 이간질하고 있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자들은 언제나 명백히 존재하는 계급을 가리려 해 왔다. 민족, 국익, 기업의 이익을 강조하며 계급 간 적대관계를 흐리고, 국적별, 성별, 기업별 등으로 노동자 계급을 분열시키는 것은 그들의 지배전략이다.
개혁주의자들도 정규직 양보론 등을 받아들이며 지배계급의 생각을 절충적으로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 좌파 중에도 계급과 계급투쟁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강조를 얕잡아 보는 사람들이 꽤 많다.
서구에서는 1960~70년대를 거치며 계급이 아니라 억압받는 사람들의 정체성에 기반한 운동을 지향하는 ‘신사회 운동’이 성장했다. 2000년대에는 노동자 계급이 더는 사회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율주의 사상이 인기를 얻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1980년대에는 계급 개념을 옹호했던 사람들이 옛 소련의 몰락 이후 노동자 계급 중심성을 폐기하거나 여러 절충적인 생각을 받아들이며 혼란스러워진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바꾸려면 계급에 기초해 사회를 분석하고 대안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마르크스의 계급론은 오해되거나 곡해돼 온 측면도 많은데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잘못된 개념들
보통 계급이 소득 수준이나 직업, 생활 스타일 등에 따라 나뉜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기준에 따르면 진정으로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집단을 구분해 내는 것이 아니라 현상적인 분류에 그치기 쉽다.
예컨대 상류층, 중산층, 저소득층 등과 같이 소득 기준에 따라 분류하면, 투쟁을 통해 제법 많은 임금을 받게 된 노동자들은 중산층으로 분류되고 더는 사회 변화를 이룰 수 없는 집단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소득이 같다고 해도 이해관계는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달에 3백만 원을 버는 편의점 사장은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할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러나 같은 돈을 버는 노동자라면 임금 하향 압박을 막기 위해서도 최저임금 인상에 찬성하는 것이 이득이다.
직업으로 계급을 구분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나 직업이 같아도 처해 있는 조건은 크게 다를수 있다. 예를 들어 의사들은 전통적으로 중간계급으로 분류되지만 의사들도 위치에 따라 이해관계가 다양하다. 의사 중에 개원했거나, 병원에 고용돼 일하면서도 병원 운영에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중간계급이 다수이긴 하다. 그러나 대형 병원을 소유하고 운영하는 자본가 계급도 존재한다. 또 별 권한 없이 수익성 압박에 시달리며 일해야 해 노동자 계급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의사들도 있다. 라이프 스타일과 문화가 계급을 구분하는 기준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프랑스의 급진적 사회학자였던 피에르 부르디외는 계급 분석에서 학력, 기술, 언어 능력, 매너, 문화적 취향 등을 의미하는 문화적 자본을 강조했다. 부르디외에 영향을 받아 《한국 노동자 계급의 형성》이라는 추천할 만한 역사서를 쓴 구해근 교수는 “상층 노동자층이 등장하고 그들은 일종의 중산층화한 소비 행태를 통해서 하위 노동자 계층과 분리되는 새로운 정체성을 발달”시키고 있고 계급이 분절화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런 기준들에 따른 계급 구분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막스 베버의 구분과 유사하다. 베버는 재산, 시장에서의 지위, 기술, 교육, 면허증이나 직업의 종류 등에 따라 계급이 규정된다고 봤다. 베버에게 계급은 특정 요소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합이지, 동질한 이해관계를 가진 하나의 집단이 아니다. 이렇게 규정하면 직업이나 특정 조건들에 따라 계급은 천차만별로 나뉘게 된다. 사실 베버는 마르크스주의와 논쟁하는 맥락에서 나름의 계급론을 제시한 것이다. 그 목적은, 마르크스주의의 개념에 의하면 노동자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의 이질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런 베버 식 개념은 지금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국 공산당의 에릭 홉스봄이 화이트칼라들을 노동자 계급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나, 최근 유행하고 있는 ‘프레카리아트’ 개념도 베버 식 개념과 유사하다. 가이 스탠딩의 프레카리아트론에 따르면 계급은 7개로 나뉜다: 최상층에 엘리트가 있고, 엘리트 아래에는 안정적 풀타임 일자리에 고용돼 연금, 유급 휴일, 기업 수당 등을 받는 샐러리아트가 있다. 샐러리아트와 나란히 프로피시언이 존재하는데, 그들은 전문적 기술이나 숙련기술을 보유해 고소득 계약을 맺는다. 프로피시언 아래에는 옛 노동자 계급이 있지만 축소되고 있다. 이 네 집단 아래 프레카리아트가 성장하고 있고, 그와 나란히 실업자와 사회적 부적격자가 있다. 이는 재산, 기술, 교육, 일자리의 안정성 여부 등의 기준으로 계급을 구분한 것이므로 베버 식 분류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계급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는 마르크스와 베버의 계급 개념을 절충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 연구 방향은 마르크스의 계급 분석의 장점을 흐리며 사실상 베버 식으로 기우는 방향이다.
이런 계급 개념으로는 사람들을 현상적으로 분류할 수는 있지만 그 계급이 어떤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고 어떻게 행동할 잠재력이 있는지 등을 예측할 수는 없다. 그래서 베버는 “계급 행동은 필연적이지 않다”며 계급 개념과 계급 행동을 분리했다.
마르크스주의 계급론
계급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접근은 베버와는 근본에서 다르다.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은 정태적이고 도식적으로 인간 집단을 분류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사회의 핵심 동학을 규명하려는 시도이다.
마르크스는 사회를 분석할 때 현상과 본질을 구분하고, 규명된 본질에서 도출한 근본 동역학을 바탕으로 현상을 설명했다. 마르크스의 계급 개념은, 현상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본질적 이해관계의 충돌이 어디서 벌어지는지를 규명하게 하는 개념이다.
마르크스는 생산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계급을 규정했다. 이 점이 마르크스 계급론의 중요한 특징이다. 《자본론》에서 계급과 관련한 장은 미완성으로 남았지만, 그럼에도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분배관계와 생산관계를 비교하며 생산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분배관계의 역사적 성격은 생산관계의 역사적 성격이며, 후자의 한 측면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생산관계가 사회의 동역학을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이건희는 1억 원이 넘는 자동차를 1백24대나 가지고 있었고, 이건희 가족들이 휴가를 갈 때 스키장을 통째로 빌렸다는 등의 일화들은 유명하다. 그럼에도 이건희는 이런 소비 수단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반도체·핸드폰 공장 등 생산수단을 소유했기 때문에 재벌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도 다른 사람의 노동의 과실을 가져간다.
상대적으로 고소득인 노동자들도 (물론 재벌과 비교할 수 없겠지만) 꽤나 값비싼 자동차나 집을 소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생산수단을 전혀 소유·통제하지 못하고 자신의 몸뚱이를 팔아서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착취받는다.
계급으로 나뉜 사회(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에서 지배계급은 생산수단을 장악하고 피억압 계급을 착취해 왔다. 이렇게 생산을 통해 만들어 낸 가치를 어느 집단이 더 많이 가져갈 것인가를 둘러싸고 계급투쟁이 벌어져 왔다. 그래서 계급은 착취관계가 표현된 것이고,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싸우는 과정인 계급투쟁과 분리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자본가 계급이 생산수단을 소유·통제하고 노동자를 경쟁적으로 착취해서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사회이다. 그래서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간에 이 사회의 주요한 갈등과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계급을 구분할 때 형식적·법률적 소유관계가 아니라 생산수단과 생산 과정에 대한 실질적 통제 여부를 중요하게 봐야 한다.
20세기 초 마르크스주의를 수정하려 한 베른슈타인은 주식회사가 확대되면 기업을 소유한 사람들이 많아져서 계급 적대가 약화될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그 주장을 둘러싸고 논쟁이 오간 지 몇 년 되지 않아 1905년 러시아 혁명이 벌어졌고, 1918년에는 독일 혁명도 벌어졌다. 기업 경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소액 주주의 증가가 자본가 계급의 증대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 역사적으로 입증된 것이다.
계급 구성
자본가 계급에는 기업을 실제로 소유한 자본가뿐 아니라 연봉을 받는 전문경영인CEO도 포함된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생산이 발전하면 자본가 계급 내부에서 기능 분화가 일어난다고 지적했다. 자본 소유자들은 생산과 착취를 실제로 조직하는 구실을 덜 하는 반면, 이 구실은 고액의 보수를 받는 경영자들에게 넘어가는 경향이 나타난다. 여기에 덧붙여서 국가를 운영하는 권력자들도 분석해 볼 수 있다. 상층 국가 관료들은 싫든 좋든 자본축적을 앞장서 추진할 수밖에 없다. 국가는 다른 국가와 경쟁해야 하고, 이를 위해 국가 관료들은 자본 축적을 지원하는 데 이해관계를 가진다. 무기를 사고, 계급 사회의 질서를 유지 하고, 관료 기구 등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은 노동자를 착취한 잉여가치에서 분배된다. 그래서 자본주의 국가에서 국가 관료들은 제한적인 자율성이 있을지라도 노동자들을 착취해야 한다는 점에서 자본가들과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진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정의대로라면 그들의 자본가 계급의 일부이다. 그래서 크리스 하먼은 상층 국가 관료를 “정치적 자본가”라고 불렀다.
5 그러나 이는 사실상 자영업자들을 포함한 것으로 정확하지 않은 수치이다. 서관모 교수는 피고용인 5인 이상 사업체의 업주·임원을 자본가로 보고 그 규모를 추산해서 1955년부터 1985년까지 자본가 계급이 전체 인구의 0.3~1.4퍼센트를 차지한다고 추산한 바 있는데 6 이처럼 실제 자본가 계급은 매우 소수이다. 7
보통 학자들의 연구에서는 피고용자를 단 1명이라도 고용한 사람은 자본가라고 계산해서 자본가 계급이 전체 인구의 대략 6~7퍼센트라는 추산을 내기도 한다.이와는 반대로 생산수단을 소유·통제하지 못하고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임금을 받아 살아가는 계급이 노동자 계급이다.
그 노동자가 블루칼라이냐 화이트칼라냐, 제조업에서 일하냐 서비스업에서 일하냐, 생산적이냐 비생산적이냐,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냐 불안정적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모두 노동자 계급의 일부이다.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에 있는 집단이 중간계급이다. 생산수단을 어느 정도 소유·통제 하면서 자신도 노동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상층 중간계급은 자본가 계급과 처지가 비슷하고, 하층 중간계급은 노동자 계급과 비슷하다. 중간계급은 처지에 따라 상황이 다양하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처럼 집단적인 이해관계를 가지지 못한다. 그래서 두 양대 계급 사이에서 더 힘이 강한 쪽으로 이끌리곤 한다.
8 한국에서도 전통적 중간계급이 차지하는 비율은 1960년부터 1990년까지 30년 동안 73.4퍼센트에서 34.4퍼센트로 줄었고, 9 1995년부터 2010년까지 29.1퍼센트에서 22퍼센트까지 줄었다는 추산이 있다. 10
전통적으로 중간계급은 소상인, 자영업자, 농민과 같은 사람들을 의미했다. 이 숫자는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발달하면서 축소돼 왔다. 예를 들어 전체 산업에서 농림·어업 부문에 종사하는 사람의 비율은 1949년 79.89퍼센트에서 2010년 7.18퍼센트로 줄었다.11 이들도 중간계급에 포함된다. 이들은 신중간계급에 포함된다. 12 이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고 임금이나 봉급을 받는다는 점에서 노동자 계급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스스로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자본가들의 임무였던 노동자들에 대한 관리·통제 구실을 대신하는 모순된 계급이라는 측면에서 중간계급으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자본가들은 자신을 대신해 노동자들을 관리·통제할 관리자를 늘려 왔는데,또, 캘리니코스는 《노동자 계급에게 안녕을 말할 것인가》라는 책에서 “반半 자율적 피고용자”도 신중간계급에 포함시켰다. 전문적 기술이나 지식을 보유해 노동과정에서 지속적인 감독이나 통제 아래 놓이지 않는 사람들은 노동자 계급과 달리 중간계급으로 분류했다.
13 이제까지 비교적 특권을 누려 왔던 교수들도 점점 평가가 강화돼 자율성이 축소되고 조건이 열악해지고 있다. 강사, 교수, 변호사 등 이전에는 전문직이라고 불려 왔던 많은 직업들에서 이런 “프롤레타리아트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 이윤 논리가 강화될수록 이런 집단도 점점 프롤레타리아트화한다는 측면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캘리니코스는 신자유주의적 대학 구조조정 때문에 대학에서도 “프롤레타리아화”와 “불안정성”이 강화되고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14 물론 장귀연 교수도 지적했듯이 전문기술직에는 노동자 계급이 포함돼 있을 수 있으므로 실제 규모는 그보다 적을 것이다.
장귀연 교수가 추산한 바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경영·관리와 전문기술직을 포함한 신중간계급은 1995년에 11.3퍼센트에서 2010년에 14.6퍼센트로 늘었다.위의 통계에 따르면 전체 중간계급의 수는 1995년에 41.5퍼센트에서 2010년에 38.1퍼센트로 줄었다. 전반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중간계급은 줄고 노동자 계급은 증가하고 있다.
왜 노동자 계급이 중요한가 이처럼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성장해 왔고, 세계적으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국제노동기구 ILO의 통계를 보면, 임금노동자는 2013년에 역사상 최초로 세계 경제활동인구의 절반을 넘었다. 전 세계 임금노동자는 이제 16억 명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로만 6억 명이 늘었다.
16 물론 이 수치도 앞에서 지적했듯이, 중간계급이 다소 과도하게 추산된 것의 결과이므로 실제 한국 노동자 계급의 규모는 더 클 것이다.
한국에서 노동자 계급은 1997년 IMF 위기 이후로도 꾸준히 증가해 1995년 51.1퍼센트에서 2010년 56.1퍼센트로 늘었다. 크리스 하먼에 따르면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대체로 인구의 40퍼센트가 전통적인 육체 노동에 종사하고 있고 20퍼센트가 하급 화이트칼라 직종에, 15퍼센트가 교육과 보건의료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인구의 약 75퍼센트가 노동자 계급이라고 할 수 있다.물론 노동자 계급이 사회를 변혁할 힘을 가진 이유는 단지 규모 때문만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계급이 전 세계 인구의 2~3퍼센트에 불과했던 1848년에 《공산당 선언》에서 노동자 계급이 자본주의를 변혁할 핵심 세력이라고 주장했다.
노동자 계급이 사회 변혁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사회의 부를 생산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기차와 지하철을 굴러가게 하는 것도, 공장을 돌리는 것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노동자들이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만든 부를 빼앗아 갈 뿐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고 생산을 멈춰 사회를 멈추게 할 힘이 있다. 최근 프랑스에서 노동개악에 맞서 벌어진 파업은 이런 힘을 느낄 수 있게 했다. 프랑스 정유소 노동자들과 핵 발전소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자 전기가 끊기는 지역이 생겨 났고, 전력 부족 때문에 업무 시간을 단축해야 하는 일도 벌어졌다.
또 노동자들은 이윤을 위해 생산을 하는 자본주의의 구조 때문에 끊임없이 투쟁으로 내몰리는 처지가 된다. 프랑스에서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지금도 경제 위기의 고통을 떠넘기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해고와 임금 삭감 압박을 하는 등의 공격이 벌어지고 있고, 이에 맞서 노동자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도 2014년 11월 공무원 연금 개악 반대 시위, 2015년 12월 노동개악 반대 민중총궐기, 올해 6월 공공부문 노동자 집회 등 10만 명 가량이 참가하는 노동자 시위가 매해 열리고 있다.
집단으로서 존재한다는 것도 노동자 계급의 중요한 특징이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 피억압 계급의 다수를 차지했던 농민은 투쟁을 통해 혁명을 일으키더라도 자신의 농지로 분산되는 특징 때문에 대안 사회를 운영할 집단적 힘을 건설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대규모 작업장에 모여 있다. 이 때문에 집단적으로 투쟁에 나서고, 집단적으로 사회를 운영할 잠재력도 가지게 된다.
이 집단성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더욱 성장했다.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이 소수의 손에 점점 집중되는 현상이 일어나는데 한국에서도 대기업의 비중이 늘어나고, 재벌의 손에 막대한 부가 집중돼 있다. 흔히들 이를 두고 자본의 힘이 강해졌다는 측면만 보지만 반대로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힘을 발휘할 잠재력도 커졌다는 것을 봐야 한다.
이런 특징들 때문에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사회를 건설할 잠재력이 있다. 실제로 노동자 혁명이 거대하게 일어날 때마다 노동자 계급은 새로운 권력기구를 만들었다. 1871년 파리 코뮌이나 1917년 러시아의 소비에트, 1918년 독일의 레테 등과 같은 노동자 평의회들은 노동자 계급이 중심이 돼 사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줬다.
마르크스주의는 계급환원론인가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에 대해 가장 많이 제기돼 온 반론 중의 하나는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이 사회의 다양한 억압을 무시하고 계급으로 환원한다는 것이다. 신사회 운동을 추구한 신좌파들,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등은 성, 성 지향, 인종 등에 따른 차별을 중요하게 보며 계급을 부정하거나 계급을 다양한 차별 중 하나 정도로 취급했다. ‘무지개 연대’, ‘적록보 사회주의’ 등은 이런 방향을 잘 보여 준다.
물론 이런 주장이 성장한 데는 이해할 만한 배경이 있다. 마르크스주의와 스탈린주의를 동의어로 여기는 많은 사람들이 옛 소련, 북한, 중국 등 스탈린주의 체제에 억압이 존재하는 문제를 보며 노동자 혁명을 통해 억압을 근본적으로 해결한다는 사상에 회의감을 품었다. 또, 마르크스주의를 협소한 노동자주의로 이해한 사람들도 억압 문제 해결과 노동자 투쟁이 큰 관련이 없다고 본다.
그러나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은 차별에 맞서는 것을 결코 경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별에 맞서는 것이 노동자 혁명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 볼셰비키당의 창당 문서라 할 수 있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은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조합의 서기가 아니라 민중의 호민관이어야 한다”고 썼다. 마르크스도 《자본론》에서 “흑인들이 낙인 찍히는 곳에서 백인 노동자가 해방되지는 못한다”며 노예제 폐지를 지지했고, 엥겔스와 함께 여성차별, 민족 문제, 인종차별 등을 다룬 선구적 저작들을 썼다.
마르크스주의는 억압의 원인이 다양하지만 결국 자본주의에서 지배계급의 이윤 논리와 맞물려 양산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소수가 다수를 착취하고 지배를 유지하려면 지배계급은 다수를 분열시켜야 한다. 특정 집단을 천대하며 더욱 열악한 조건을 강요하고, 이를 통해 전체 노동자 계급을 이간질하고, 억누르려 한다.
그래서 지배계급은 여성을 천대하며 가사 노동의 책임을 떠넘기고, 여성을 노동시장에서 차별하는 이데올로기와 제도 등을 양산한다. 최근에도 박근혜 정부가 올해 7월부터 전업 주부들은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낼 수 있는 시간을 12시간에서 6시간으로 줄이며 양육의 책임을 개별 가정에 떠넘겼듯이 말이다. 성소수자·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차별과 억압도 인간본성이 아니라 이윤 논리에 바탕을 둔 지배자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생긴다.
따라서 억압을 없애려면 억압을 양산하는 지배자들에게 도전해야 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해야 한다.
그런데 억압받는 사람들의 힘만으로는 체제를 변혁할 수 없다. 억압받는 사람들은 결코 단일한 집단이 아니다. 박근혜나 삼성의 이부진 같은 권력자·자본가들과 대다수가 노동자인 평범한 여성들의 이해관계는 근본에서 충돌한다.
억압받는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저항 의식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차별받고 멸시받은 경험은 사회에 대한 냉소를 부추겨 다른 집단에 분풀이를 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나치에게 억압받던 유대인 중의 일부가 억압에 맞선 대안으로 제국주의에 기대 시온주의를 추구하며 팔레스타인인들을 억압하고 있듯이 말이다.
억압을 받는다고 자동으로 힘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착취는 이와는 다르다. 착취를 받는다는 것은 이윤을 생산하고 있다는 말이고, 이윤 체제를 멈출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말이다. 억압에 맞서려면 이런 노동자 계급의 힘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렇게 억압을 체제의 문제와 연결시키기보다는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고, 정규직이 비정규직 차별에서 득을 보고, 내국인 노동자가 이주노동자를 차별한다는 식의 생각이 광범하다. 억압으로 인한 갈등은 가까운 관계들 사이에서 나타나고, 이런 관계들 속에서 겪은 상처 입은 감정이 분석을 압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현상 이면의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 아이를 키우는 부담이 개별 가정에 떠넘겨질수록 여성과 남성 사이의 갈등은 커질 것이다. 그러나 육아 부담을 키우는 진정한 원인은 누리과정 예산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고 책임을 개별 가정에 떠미는 박근혜 정부와 자본가들에게 있다. 공격의 화살이 지배계급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억압받는 사람들 서로를 향할 때 지배자들은 미소 짓는다.
미국 남부 주의 백인 노동자는 자신이 흑인들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기 때문에 이익을 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들은 차별이 덜한 북부의 백인 노동자보다 훨씬 적은 임금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여성 노동자들의 임금이 적어질수록 남성 노동자들의 임금도 적어진다. 이주노동자들의 임금이 적어질수록 내국인 노동자들의 임금도 적어진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토니 클리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단지 개인들 사이의 상관 관계만을 보기 시작하면 삼천포로 빠지기 마련이다. 이것은 사회에 대한 자유주의적 관념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사회를 한 개인과 또 다른 개인의 집합으로 본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 정반대의 관점을 가지고 사회를 바라본다. 개인은 계급의 일원으로 태어나서 사회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억압받는 사람들의 다수는 노동자 계급에 속하고, 억압에 맞선 투쟁은 계급투쟁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억압받는 소수자들의 권리는 계급투쟁의 전진과 후퇴에 상당히 연결돼 있다. 영국에서는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산업 투쟁에서 중요한 승리가 있었다. 이 시기에 1967년에는 낙태법이 제정되고, 1973년에는 자유로운 피임이, 1974년에는 16세 이하의 청소년들도 자유롭게 피임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허용됐다. 이후 투쟁이 하강하자 낙태와 피임의 권리에 대한 공격도 함께 강화됐다.
1969년 세계 성소수자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인 스톤월 항쟁도 1968년 프랑스에서 벌어진 1천만 노동자들의 파업, 미국의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과 흑인 시민평등권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에서도 1996~97년 노동법 개악 반대 대중 파업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줬다. 성소수자들이 무지개 깃발을 들고 처음 집회에 나온 것도 바로 이때다.
계급의식
계급투쟁이 중요한 이유는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의식이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시기에 노동자들은 지배계급이 퍼트린 다양한 차별적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투쟁에 참여하면서 스스로에 대해 긍지를 느끼게 되고 그 과정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을 차별하던 의식을 바꿀 수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과정은 이를 잘 보여 줬다. 1917년 이전 러시아에서는 유대인 차별이 엄청났고, 유대인 대량 학살도 벌어지곤 했다. 혁명이 벌어지자 인종차별 의식은 크게 약화했다. 그래서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이었던 트로츠키도,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이었던 스베르들로프도, 트로츠키가 적군의 의장이 됐을 때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 자리를 대신했던 지노비에프도 유대인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여성이 남성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질 정도로 후진적이었다. 그러나 혁명 이후 투표권 등을 포함해 법률적 차원에서는 완전한 양성평등이 보장됐다. 이혼도 쉬워졌고, 낙태도 합법화됐다. 이런 변화는 단지 제도적 변화만이 아니라 광범한 의식의 변화도 반영한 것이다. 당시 담배 공장 노동자들은 “여자를 포함해 모든 노동자들에게 일정량의 담배를 지급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노동자들의 의식이 후진적이라 사회 변화에서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투쟁 속에서 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 당장의 의식보다는 노동자들이 계급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객관적 잠재력을 중요하게 봐야 한다.
결론
역사적으로 노동자 투쟁이 충분히 강력하지 못했던 시기에는 어느 때나 노동자 계급의 잠재력에 회의를 나타내는 주장들이 인기를 얻었다.
20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세계화 때문에 노동자 계급이 약화됐다는 주장이 유행했다.
러시아에서 나로드니키(민중주의자)는 20세기 초반에 노동자 계급이 아니라 농민이 사회 변혁의 주체라고 생각했다. 1960년대에도 많은 학자들이 자동차 산업 같은 부문의 노동자들이 “부르주아가 됐다”며 자동차 산업 노동자들을 ‘노동귀족’으로 여겼다. 1980년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앙드레 고르는 《노동자 계급이여, 안녕》이라는 책을 냈다.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역사의 검증을 견디지 못했다. 나로드니키의 주장과 달리 노동자 계급이 주도해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다. 1968년 프랑스에서는 노동자 1천만 명이 한 달 동안 프랑스를 마비시키는 총파업을 벌였다. 지금도 중국의 노동자 투쟁이 성장하고 있고, 프랑스와 세계 곳곳에서 노동자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 계급은 다양한 변화를 겪어 왔지만 노동자를 착취해서 운영되는 자본주의의 핵심 동역학은 바뀌지 않았다. 노동자 계급의 잠재력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을 전진하지 못하게 만드는 정치가 문제이다.
타협을 추구하며 자기 패배적 전술로 이끄는 노조 관료주의나 개혁주의는 투쟁을 전진시키지 못하게 만드는 중요한 약점이다. 노동자 계급이 약해졌기 때문에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은 오히려 계급투쟁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21 알바노조 박정훈 위원장의 글은 이런 관점의 해악성을 보여 준다.
프레카리아트론이 설사 노동자들의 불안정한 처지를 환기하는 긍정적 구실을 했을지라도, 노동자 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노동자와 불안정한 노동자는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잘못된 관점을 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노동 개악 반대는 알바노조의 슬로건이 될 수 없다”는한국 좌파들 내에서 광범한 민중주의는 “각계·각층”의 동맹을 강조하고, 노동자들이 고유한 이해관계를 내세우면 그런 동맹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런 경향은 지난 몇 년간 한국의 운동에서 약점으로 작용했다. 2015년에 공무원 연금 개악을 막지 못했던 것도 이런 정치의 영향이 컸다.
세계경제의 불안정성과 위기가 심화하고 있는 오늘날, 지배계급은 위기감을 느끼며 필사적으로 노동자들을 공격하고 있다. 이에 맞서려면 노동자 계급의 투쟁이 성장해야 한다. 노동자 계급의 잠재력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혁명적 정치조직의 구실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주
- 구해근 2007. ↩
-
구해근, 조돈문 교수 등이 있다. 구해근 교수는 부르디외의 계급 개념을 지지한다. 부르디외는 경제적 자본, 문화적 자본, 사회적 자본의 소유 정도와 소유 구성에 따라 계급을 정의한다. 이는 생산영역에서의 관계보다는 소비나 라이프 스타일 등의 특징을 강조하는 것으로 베버 식 개념에 가깝다.
조돈문 교수는 에릭 올린 라이트의 개념을 지지해 왔다. 라이트는 착취 관계에 따라 계급을 규정한다고 하지만 그의 착취 개념은 마르크스의 개념과 다르다. 라이트는 자본재, 조직재, 기술재를 소유했느냐 아니냐에 따라 계급을 구분하는데, 이에 따르면 고급 기술을 보유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착취한다고 규정된다. 이에 따라 고급 기술을 가진 노동자는 중간계급으로 분류된다. ↩ - 마르크스 2015, p1118. ↩
- 하먼 2012, p153. ↩
- 조돈문 2011은 2003년 자본가 계급이 전체 인구의 7.3퍼센트를, 장귀연 2013은 2010년 자본가 계급이 전체 인구의 5.7퍼센트를 차지했다고 추산했다. ↩
- 장귀연 2013. ↩
- 캘리니코스 2001, p74. “오늘날 자본가 계급의 핵심부는 아주 작다.” “영국 상층 계급에 대한 최근의 연구 저술에서 어떤 사회학자는 ‘만약 1980년대 독점 부문의 외적 한계를 1천 개의 대규모 기업체와 연관 기업들을 거느린 것으로 가정한다면 중역, 최고 경영자, 주요 주주의 수는 그들의 직계 가족을 합쳐서 2만 5천 명에서 5만 명을 헤아릴 뿐이다. 물론 이것은 대략적인 수치에 지나지 않지만 기업가 계급의 핵심부는 전체 인구의 0.1퍼센트 이하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
- 조돈문 2011, p83. ↩
- 조돈문 1994. ↩
- 장귀연 2013. ↩
- 캘리니코스 2001, p76. 캘리니코스는 통제와 관련한 개념을 좀 더 부연해서 설명한다. “하나는 ‘배치적’allocative 또는 ‘전략적’ 통제권, 즉 ‘자신의 이익이나 선호에 따라 자원들을 채택하거나 철수시킬 권환’이며 또 다른 하나는 ‘조작적 통제’, 즉 ‘이미 배치된 자원들의 일상적 사용에 대한 통제권’이다.” 캘리니코스는 투자와 자원 배치에 대한 배치적 또는 전략적 통제권은 자본가 계급의 특권이고, 조작적 통제는 신중간계급의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
- 캘리니코스 2001, p82. 캘리니코스는 “경영자와 관리자, 그리고 모순적 계급 위치에 있는 반자율적 피고용인”을 신중간계급으로 지칭했다. 그러나 이것이 “지금까지 존재하는 것 중에 가장 적합한 이름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좋은 이름은 아니다” 하고도 지적한다. 그 이유는 신중간계급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의미의 계급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중간계급은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이 가하는 압력을 받아야 하는 “모순적 계급 위치”를 점하고 있고, 이 두 계급 중에 더 강한 힘을 발휘하는 쪽으로 이끌리는 경향이 있다. ↩
- 캘리니코스 2010. ↩
- 장귀연 2013. ↩
- 차승일 2016. ↩
- 장귀연 2013. ↩
- 하먼 2010a. ↩
- 클리프 2003. ↩
- 클리프 2003 ↩
- 하먼 2010b, pp49~50. ↩
- 박정훈 2016.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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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칼 2015, 《자본론》 3권, 비봉출판사.
박정훈 2016, ‘노동 개악 반대는 알바노조의 슬로건이 될 수 없다’, 《월간 좌파》 제34호.
장귀연 2013, ‘신자유주의 시대 한국의 계급구조’,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10권 제3호.
조돈문 1994, ‘한국사회 계급 구조의 변화, 1960~1990’, 《한국사회학》 제28집 봄호.
조돈문 2011, ‘해방 60년 계급구조 및 노동자 계급 구성변화’, 《노동자 계급 형성과 민주노조 운동의 사회학》,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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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니코스, 알렉스 2001, ‘‘신중간 계급’과 사회주의 정치’, 《노동자 계급에게 안녕을 말할 때인가》, 책갈피.
캘리니코스, 알렉스 2010, ‘신자유주의와 대학 구조조정’, 《마르크스21》 6호.
클리프, 토니 2003, 《노동자 계급과 억압받는 사람들》, 노동자연대다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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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먼, 크리스 2012, 《좀비 자본주의》, 책갈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