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의 사상과 실천, 그리고 21세기 레닌주의
실천가들을 위한 레닌주의 입문
1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단체나 개인들도 ‘레닌 신화 벗기기’라는 그럴 듯한 선전 구호를 내걸고 레닌주의의 핵심들을 부정하거나 깎아내리려 한다.
오늘날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혁명가 중에 레닌만큼 “죽은 자식” 취급을 당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레닌을 소련 공포 통치의 시조쯤으로 악마화하는 우파들의 왜곡은 제쳐 놓더라도 좌파 안에서도 레닌은 환영받지 못한다. 언어학자이며, 아나키스트이자 저명한 반제국주의 활동가인 노엄 촘스키는 아예 레닌은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일부가 아니라고 단언한다.이런 현실은 현재 급진화의 정도와 연관이 있다. 경제 위기가 심화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은 부활하고 있지만, 급진화가 아직 마르크스의 정치학(부르주아 국가 타도, 제국주의 체제, 정치조직 건설 등)으로까지는 연결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좌파의 부상도 혁명적 좌파가 아니라 좌파 개혁주의(그리스의 시리자, 영국 노동당 좌파 제러미 코빈 등)의 약진으로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스탈린주의 체제가 60여 년간 소련과 동유럽 블록을 지배한 역사적 경험은 레닌과 스탈린을 연결시켜 레닌을 공격하는 중요한 재료로 활용될 수 있다.
좌파로 좁혀서 살펴본다면 ‘레닌 신화 벗기기’ 시도들은 나름의 맥락이 있는 듯하다.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런 작업은 자신들의 변화와 실천을 정당화하려는 것과 연관이 있다. 예컨대 혁명적 조직 건설에서의 후퇴, 반제국주의 투쟁에서의 기회주의, 노동계급 주도 혁명으로 부르주아 국가 권력을 타도한다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전략 부정 등.
이 글은 레닌의 핵심 사상과 실천들을 살펴보면서, 왜 레닌주의가 노동계급 자력 해방을 위한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일부인지, 오늘날 자본주의를 변혁하려는 활동가들이 그에게서 배워야 할 점들은 무엇인지, 레닌주의에 대한 비판이 어떻게 잘못된 실천과 연결되는지 따져 보려 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마르크스주의의 출발점은 자본주의 동역학 분석이다. 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활동하던 시절 이런저런 사회주의의 청사진을 그려 제시하던 공상적 사회주의 조류와 그들이 결정적으로 달랐던 점이었다. 그 결정판은 (미완이기는 했지만) 《자본론》 발간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 분석을 통해 노동계급의 혁명적 구실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에 충실했던 레닌 또한 선배들의 방법을 따랐다. 레닌은 “나중에 그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마르크스와 ‘의논하는’ 법을 배워” 가며 《자본론》을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레닌에게 특히 두 가지 분석이 중요했다. 하나는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분석이었고, 또 다른 것은 바로 제1차세계대전이 벌어지게 된 배경에 대한 분석, 즉 제국주의 체제였다.
우선 러시아 자본주의 분석을 살펴보자. 러시아에서 《자본론》 번역본은 러시아 민중주의자들, 나로드니키가 먼저 출판했다. 영어판, 프랑스어판보다 몇 년 앞선 출판이었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폭로하면서,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건너뛰어 농민이 차르 체제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로 이행할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런 전략에 대해 토니 클리프는 “마르크스주의를 각색한 나로드니키는 근본적으로 공상적 사회주의자였다”고 평가한다.
러시아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은 매우 중요했다. 전제정이 지배하고 농민이 인구의 압도 다수를 이루는 등의 봉건적 요소와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공존하던 러시아에서 혁명 전략이 무엇이어야 하느냐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레닌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에 기초해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긴 논문을 썼다. 여기서 레닌은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기초를 놓은 플레하노프(레닌도 그의 스승이라고 밝힌 바 있는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와는 다른 독창성을 보여 줬다. 플레하노프는 앞으로 벌어질 러시아 혁명에서 부르주아지의 구실을 높이 봤고, 농민을 무시했다. 반면 레닌은 부르주아지를 적대했다. 농민에 대해서는, 그들이 소유를 고집하는 한 반혁명적이지만 봉건적 질서에 맞서는 데서는 혁명적일 수 있다고 변증법적으로 접근했다. 이는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의 전략의 차이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래서 레닌은 러시아 혁명 와중인 1917년 4월 ‘노동자와 농민이 주도하는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그전까지의 공식을 버리고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전략으로 옮아갈 수 있었다. 반면 멘셰비키는 혁명이라는 시험대에서 임시정부을 지지하고 대중의 불만을 달래려 임시정부에 입각까지 하고, 10월 혁명과 함께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4 그러나 제국주의 체제가 자본주의에서의 일탈이 아니라 바로 그 자체에서 비롯한 것이고, 강대국의 노동계급과 사회주의자들이 피억압 민족의 해방 운동을 (비판적으로) 지지해야 한다는 그의 핵심 논지는 매우 중요했다. 이는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하며 노동계급을 배반한 제2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이나 전쟁에는 반대하지만 국가 간 협상으로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여긴 중간주의 지도자들의 평화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 전통을 구분 짓게 할 수 있었던 이론적 토대였다. 레닌은 이런 분석에 기반해,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슬로건을 제시하고 혁명적 패전주의 전술을 내놓을 수 있었다.
레닌의 또 다른 기여는 바로 제국주의 체제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킨 것이다. 비록 레닌이 《제국주의론》에서 내놓은 분석은 약점과 한계가 있다.5 에서 채택된 트로츠키의 평화주의 강령이 레닌의 혁명적 패전주의 전술보다 낫다는 견해가 나오고 있는데, 이런 견해가 한반도평화협정 체결 지지 주장 등으로 이어지는 것은 논리적 연결성이 있다.
그런데 최근 일각에서 중간주의자들이 주도한 1915년 치머발트 반전회의 당시 “중간주의자들은 평화주의나 반半평화주의 입장이었다. 그들은 자국 정부를 지지하는 것은 반대했지만, 협상에 의한 평화는 지지했다.”중간주의자들의 주장은 현실의 검증을 견디지 못했다. 레닌의 견해는 치머발트 반전회의에서는 소수파로 패배했지만 현실에서 올바름이 검증됐다. 제1차세계대전은 1917년 러시아 혁명과 1918년 독일 혁명, 즉 노동계급과 병사들이 주도한 내전으로 종식됐고 권력 장악을 위한 격렬한 투쟁으로 발전했다. 제2인터내셔널과 결별하고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건설하자는 레닌의 주장은 1919년에 현실화됐다.
평화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반제국주의 투쟁과 반자본주의 투쟁을 분리시키는 것이고, 반제국주의 투쟁을 계급투쟁과 분리시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스탈린주의자들인 자민통 경향이 이런 견해다. 그들은 반제국주의 투쟁을 계급투쟁과 분리시키고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평화를 위한 지상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사회진보연대도 “적극적 평화주의”를 주장한다.
7 제국주의 체제는 자본주의에서 비롯하므로 그 대안이 반자본주의(자본주의 국가나 국제기구 모두에게 독립적인 노동계급 투쟁)여야 한다는 결론은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날 세계적 불안정성이 커지고 있다. 특히 주요 열강들 사이에 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동아시아에서 사회변혁 활동가들에게 이 점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오늘날 제국주의 경쟁의 양상은 변했을지라도,이론적 엄격함과 원칙의 확고한 고수
8 즉, 당과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원칙 없이 변덕스러운 책략가였다는 것이다.(레닌을 왜곡한 글로 로버트 서비스의 《레닌》이 대표적이다.)
레닌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이론적 엄격함과 원칙의 확고한 고수이다. 이론을 경시하며 투쟁과 운동만을 좇는 활동가나, 이론적 원칙을 무슨 거래 대상처럼 간단히 내팽개치는 이에게는 불편한 말일 수 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지적했듯이, 주류 학계에서 레닌에 대한 왜곡의 핵심은 그가 “마키아벨리형 기회주의자의 전형”이라는 것이다.사실, 이런 비판에는 맥락이 있다. 레닌 사후 그의 이른바 후계자들이 공산주의를 책략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반면, 레닌은 확고한 원칙에 기초를 두고 구체적 맥락에 따라 유연하게 전술을 구사했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원리를 잘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전술을 무원칙한 책략쯤으로 여긴다. 토니 클리프도 《레닌 평전》에서 이런 위험성을 다루고 있다.
9 벨기에 공산당 지도자가 레닌의 책 《‘좌익’ 공산주의 ― 유치증》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지지하며 인용했다.
옛 지도자들의 순응성과 진정한 혁명적 경험의 부족을 감안하면, 새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볼셰비즘을 ‘교묘한’ 책략 부리기와 동일시할 위험은 대단히 컸다. 로스메르는 “아주 위험한 책입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레닌에게는 전혀 위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노동계급에 유리하게 책략을 부릴 것이고, 그가 하는 타협은 노동계급에 이로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젊은 공산주의자들은(심지어 이제 더는 젊지 않은 일부 공산주의자들조차) 노동자 투쟁의 실천적 경험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 그들은 이 지침서에서 부차적 사항들만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손쉽고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필요한 노력과 탐구를 하려고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책략과 타협을 뒷받침해 줄 사회주의적 토대가 확고하지 않으므로 책략과 타협을 문제의 본질로 여기고 자신의 모든 행동을 손쉽게 정당화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이런 위험이 결코 허구가 아니었음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레닌 사망 직후 ‘지노비에프가 주도한 [코민테른의] 볼셰비키화’로 말미암아 코민테른의 모든 지부에서 이런 위험이 대두하기 시작했고, 스탈린[의 집권]과 함께 ‘공산주의’ 자체가 책략으로 전락했다.”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 소련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적 토대”가 거세되고 생명력을 잃어, 존 몰리뉴가 말한 것처럼 “국가 종교”로 전락했다. 이론은 관료들의 실천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레닌은 어떠했는가? 신생 공산주의자들을 교육할 목적으로 내놓은 《‘좌익’공산주의 ― 유치증》은 러시아 혁명 운동의 온갖 경험들을 일반화한 전략·전술에 관한 걸작이다. 이 책을 읽는 활동가들은 노동조합, 타협, 의회 등에 관한 레닌의 날카롭고 명료하고 설득력 있는 전술에 넋을 잃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조차 레닌은 러시아 볼셰비키의 토대가 마르크스주의 혁명 이론임을 분명히 했다. “볼셰비즘은 1903년 매우 굳건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토대 위에서 생겨났다. … 러시아는 지난 반 세기 동안 견줄 데 없는 고뇌와 희생, 유례없는 혁명적인 영웅적 행동, 믿기지 않을 정도의 정력, 헌신적 탐구, 연구, 실천적 시도, 좌절, 검증, 그리고 유럽 경험과의 비교 등을 하는 가운데 겪은 고통을 통하여 유일하게 올바른 혁명 이론인 마르크스주의에 진실로 이르게 되었다.”
토니 클리프는 레닌 당 이론의 두 가지 핵심을 이렇게 일반화했다.
레닌 당 이론의 기본 주제는 두 가지다. 첫째, 한동안 노동계급의 소수파가 되더라도 원칙을 확고하게 고수하는 것. 둘째, 노동자 대중이 참여하는 모든 투쟁에 실천적 지도, 즉 유연한 지도를 제공해서 그들과 최대한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 개인이나 당은 오로지 자신의 독자적 투쟁을 통해서만 이 두 가지를 모두 흡수할 수 있다.
13 1917년 러시아 임시 정부 타도라는 실천적 결론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국가론에 대한 철저한 탐구의 결과였다. 그 작업의 산물이 《국가와 혁명》이었다. 권력을 장악하고 노동자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탐색하기 위해(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대해) 레닌은 파리 코뮌에 대한 마르크스의 저작들을 탐구했다. 14 변덕스러운 책략가나 유행이나 좇는 기회주의자들과 달리 레닌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원칙에 충실했고, 이 때문에 때문에 번번히 소수파가 됐지만 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레닌의 출발점은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분석에서 비롯한 원칙이었다.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을 분석하기 위해 레닌은 “마르크스와 의논하는 법”을 배워 가며 《자본론》을 집중 탐구했고, 제국주의 체제를 분석하기 위해 “148권의 책과 232편의 논문·기사”를 연구했다.노동계급 자력 해방 원칙 옹호와 실천
15 (최근 국제사회주의 경향을 이탈한 일부 활동가들이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에 대한 회의감을 드러내는데, 이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원칙으로부터의 이탈을 뜻한다.)
미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핼 드레이퍼는 사회주의 운동을 “위로부터의 사회주의”와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로 구분했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그람시 등이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전통에 있는데, 이 전통의 핵심 두 기둥은 “노동계급의 자력해방”과 “민주적 노동자 국가”다.레닌은 바로 이 원칙에 충실했고, 무엇보다 여지껏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원칙을 현실에서 가장 멀리까지 실현시킨 혁명가였다. 레닌의 이런 원칙은 소수파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러시아 혁명 운동과 국제 마르크스주의 운동, 심지어는 레닌이 만든 당 안에서도 말이다. 혁명을 포기했던 제2인터내셔널 지도자들과 마르크스주의를 결정론으로 후퇴시킨 중간주의자들이 주도하던 국제 마르크스주의 운동에서, 레닌을 비롯한 혁명적 사회주의 경향은 소수였다. 러시아에서도 레닌과 볼셰비키는 1917년 후반에야 노동자 다수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레닌은 볼셰비키당 안에서도 종종 소수파였다. 특히 1905년 혁명 때 소비에트에 대한 종파적 태도를 비판한 주장, 1917년 혁명 때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주장은 처음에는 소수만이 지지했다.
레닌은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과 함께,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현실의 투쟁과 혁명에서, 살아 숨 쉬는 계급투쟁과 계급에게서 배우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마르크스가 파리 코뮌을 평가하면서 자본주의 국가를 분쇄해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냈듯이 말이다. 1905년 혁명 때 등장한 소비에트에 대해 고참 볼셰비키들이 종파적 태도를 취하고 있을 때, 레닌은 그들을 비판하며 소비에트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레닌은 1905년 혁명을 경험하며 소비에트가 대안 권력의 맹아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가장 먼저 포착한 혁명가였다.(로자 룩셈부르크는 대중파업의 위력을 포착해 분석한 명석함을 보여 줬지만 소비에트를 제대로 평가하지는 못했고, 혁명 당시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이었던 트로츠키조차 소비에트의 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레닌의 동지이자 아내인 크룹스카야는 1924년 레닌의 장례식 조사弔詞에서 노동계급으로부터 배우려 한 레닌의 태도에 대해 말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피테르[오늘날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 사이에서 작업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주장을 경청하면서 마르크스의 위대한 사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실천의 결정판이 1917년 10월 봉기의 성공이었다. 그런데 10월 봉기 이후 탄생한 신생 노동자 국가의 여러 문제는 레닌 비판의 중요한 소재이다. 예컨대 아나키스트인 노엄 촘스키는 1917년 러시아에서 레닌이 반혁명을 이끌었다고 주장한다. 10월 혁명은 쿠데타였을 뿐이고, 2월 혁명의 성과인 사회주의적 개혁(공장위원회나 집단농장)을 파괴했고, 이렇게 레닌과 트로츠키가 닦아 놓은 반혁명의 길을 스탈린 등 후임자들이 공고히했다는 것이다. 촘스키는 이것이 “전위정당”론의 결론이라고 주장한다. 박노자는 노엄 촘스키보다는 레닌 비판에 조심스럽긴 하다. 예컨대 박노자는 레닌의 장점을 인정한다.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또 그 안에서 설득을 통해 다수파가 되려 했던 민주적 설득 정책이 비범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제시한 것이 실현되지 못한 이유가 “레닌이 꼭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권력 사수死守 논리,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인수·인계 받은 국가 운영의 논리가 결국 민중적 민주주의 논리를 압도했”던 것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박노자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국가 건설에 성공한 레닌은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건설에는 실패했다. 레닌의 초지初志는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통한 볼셰비키 주도의 사회주의로의 사회 재편이었겠지만 ‘볼셰비키 주도’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결국 희생시켜야 했다.”
즉, 볼셰비키 국가를 위해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저버렸다는 것이다. 노엄 촘스키의 아나키즘적 비판과 맞닿아 있다.
이는 국가와 당에 대한 거부를 드러내는 아나키즘적 반발이다. 그리고 이런 비판들은 중요한 사항을 고려하지 않는다. 즉, 신생 노동자 국가가 처했던 상황 말이다.
핵심은 두 가지다. 러시아 국내 상황과 국제 혁명의 가능성. 역사는 인간이 이끌어 나가지만 주어진 환경 속에서만 그렇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인간 실천의 중요성을 경시하는 결정론적 마르크스주의에 강력한 펀치를 날리며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지만, 그들이 러시아가 처한 조건을 뛰어넘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진공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토니 클리프는 《레닌 평전》에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요인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실제 수준도 세 가지 기본 요인에 달렸다. (1) 프롤레타리아의 힘 (2) 프롤레타리아가 구체제에서 물려받은 물질적·문화적 유산 (3) 자본가들의 저항이 그것이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벌어진 내전으로 노동계급은 58.7퍼센트가 감소했고, 공업 생산이 전쟁 전 수준의 5분의 1에 불과할 정도로 산업은 붕괴했다. 제1차세계대전 때 희생된 러시아인은 4백만 명이었는데, 내전기인 1918년 말부터 1920년 말까지 전염병·굶주림·혹한으로 죽은 러시아인이 9백만 명이나 됐다. 러시아사를 전공한 류한수 교수는 “1918년부터 1921년 내전 기간 동안에 러시아가 겪었던 고통은 우리가 1997년에 겪었던 IMF 위기 곱하기 1208배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게 심했단 얘기”라며 당시 상황이 매우 혹독했음을 설명한다.
비록 내전에서 가까스로 승리를 거뒀지만, 1917년 10월에는 노동자와 수병들의 혁명을 지지했던 농민들의 정서가 내전 후에는 극심한 불만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전 상황에서의 가혹한 징발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노엄 촘스키는 내전의 영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레닌주의가 독재와 국가자본주의로 나아갔다고 본다. 레닌이 파괴의 원흉이라는 것이다. 박노자는 국제 혁명의 패배(특히 독일 혁명의 패배)나 내전이 가져온 황폐화와 노동계급의 사실상 해체 상황을 중요하게 보지 않는다. 1921년부터 시행된 신경제정책이 이런 상황의 산물이었음을 보지 않는다.
둘 다 1921년 3월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을 규탄하지만, 이것을 당시 러시아의 상황과 국제 정세의 맥락 속에서 다루지 않는다. 또, 둘의 공통점은 레닌과 스탈린 사이의 단절을 보지 않는다. 레닌은 러시아가 “관료적으로 일그러진 노동자 국가”라고 한탄하며 그 생애의 마지막(뇌출혈로 쓰러져 정치적 삶도 사그러져 가던 그 시기)을 관료주의에 맞서 투쟁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당시 러시아 상황에 순응하며 관료의 성장을 정당화하던 스탈린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와 실천이었다. 물론 노동계급이 해체돼 레닌이 기댈 수 있는 무기가 사라졌고, 그래서 그 투쟁이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고 해도 말이다. 레닌이 주도하던 시기의 볼셰비키의 핵심 지도자들이 1930년대 스탈린에 의해 대부분 살해됐다는 사실은(자연사한 레닌과 살아남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그리고 망명한 트로츠키를 제외하고) 레닌과 스탈린 사이에 심대한 단절이 있다는 확실한 역사적 증거다.
혁명 정당 건설의 중요성과 그 구실
아마 레닌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혁명 정당을 조직하고 이를 통해 계급투쟁에 개입한다는 사상과 실천을 발전시킨 것일 게다. 토니 클리프는 레닌의 기본적 교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째 교훈은 사회주의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 언제든 가능하다는 점이다. 패배와 탄압으로 아무리 억압적인 상황이라 하더라도,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기본 사상을 중심으로 조직된 활동가들의 중핵은 창출될 수 있다.
둘째로는 당 건설의 방법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정불변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계급투쟁의 상황이 바뀌고 조직 자체가 성장함에 따라, 조직이 사용하는 전술이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나 1903년 멘셰비키와의 분열기에는 엄격한 직업혁명가 조직을 방어했던 한편, 1905년에는 볼셰비키가 “당의 문호를 개방”하고 투쟁을 통해 새로이 급진화된 젊은 노동자들을 대거 입당시켜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혁명을 맞이했던 것이다. 레닌은 ‘막대 구부리기’ ―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고, 가장 혁명적인 당에서도 생겨날 수 있는 관성을 극복하기 위해 재빠르고 정확한 전술상의 전환을 이루어내는 것 ― 실천을 완성했다. 셋째로 이런 전술의 유연함을 단순한 기회주의와 구별짓는 것은, 바로 그것이 레닌의 경우처럼 사회 변화에 관한 명확한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에 뿌리 박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를 이룩하기 위한 총 전략과, 그 전략의 한 부분으로서 주어진 시기에 수행하는 다양한 전술은 반드시 서로 구별해야 한다.
레닌의 교훈에 대한 명료하고 핵심적 정리다. 이런 사상과 실천이 러시아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그러나 레닌주의 정당에 대한 심각한 왜곡과 편견이 존재하는데, 바로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에 관한 것이 그렇다.
최일붕은 왜곡과 편견을 비판하며 레닌의 중앙집중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레닌은 중앙 집중을 노동자 대중에 대한 당의 리더십(지도)을 뜻하는 말로 사용했다. 그런데 이것은 (중앙)집중에 대한 외향적이고 가장 좋은 정의라고 할 수 있다. 흔히들 ‘(중앙)집중’을 내향적으로 이해해, 중앙 지도부에 대한 회원들의 무조건 복종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 말의 진정한 의미는 대중에 대한 당의 지도라는 외향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게다가 스탈린주의자들이 신화화하는 것처럼 볼셰비키는 레닌의 “영도”에 따라 일사분란하고 획일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 10월 무장봉기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앞두고, 무장봉기 반대파였던 중앙위원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중앙위원회 결정을 무시하고 막심 고리키의 신문에 볼셰비키의 무장봉기 계획을 폭로하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당의 구실은 중요했다.
1917년에 볼셰비키의 상황이 레닌의 중앙집권적 당 개념과 거리가 멀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당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1917년 2월에 볼셰비키당에는 당원이 2만 4000명 있었다. 볼셰비즘이라는 사상은 실체 없는 사상이 아니라 오랜 투쟁을 거치며 단련된 수많은 프롤레타리아 간부들을 통해 표현된 사상이다. 그래서 볼셰비키는 적절한 때에 말을 행동으로 바꾸고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다.
효과적 개입(대중에 대한 당의 지도)을 위해서는 규율이 필요하다. 집중은 행동과 실천을 집중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당원 개인이나 서클 들이 제멋대로 알아서 실천하는 집단을 당이라 부를 수 없다. 그럴 것이라면 굳이 당으로 뭉칠 이유도 없다. 집중을 위해서는 규율이 필요한데, 규율은 관료적 통제나 명령을 뜻하지 않는다. 토니 클리프는 레닌주의 정당의 규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일국 수준이나 국제 수준에서 민주적 중앙집중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당의 동질성 수준이 높아야 하고 의식과 교육 수준도 높아야 하며 지도자들끼리 서로 신뢰해야 할 뿐 아니라 모든 당원과 지도부 사이에도 상호 신뢰가 있어야 한다. ‘참모부’와 ‘야전군’이 긴밀하게 통합돼 있다면, 규율의 99퍼센트는 신뢰에서 나오고 1퍼센트만이 기계적 복종에서 나온다.
흥미롭게도 영어에서 규율을 뜻하는 ‘discipline’은 ‘훈련’을 뜻하기도 한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기계적 유물론자들이 “교육자 자신도 교육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고 비판했는데, 이런 비판은 레닌주의자들에게도 적용된다. 규율은 함께 배우고 가르치는 실천(훈련) 속에서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은 어떻게 집중을 실현하고 당원 전체와 계급의 선진부위를 움직이며 투쟁을 이끌 수 있는가? 1917년 볼셰비키의 경험은 우리에게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바로 신문의 구실이다. 토니 클리프는 신문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고 분석한다.
볼셰비키당 중앙이 지방 조직들에 파견한 연설가와 강연자가 매우 적었고 중앙과 지방의 체계적 연락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방조직들이 제멋대로 행동했다거나 정책과 전술을 마음대로 결정했다는 말은 아니다. 당의 신문이 지방 조직들을 지도하는 중요한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7월 초에 볼셰비키는 41개의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고 있었다. … 총 발행부수는 하루 평균 약 32만 부였다. … 볼셰비키 신문의 총 발행 부수가 당원 수보다 겨우 3분의 1쯤 더 많았다는 사실은 첫째, 신문이 주로 당원들을 조직하고 지도하는 기능을 하고 있었다는 것과 둘째, 당 주변의 지지자들이 대체로 신문을 통해 당과 가까워지고 당에 가입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 신문은 또, 당 위원회들과 당원들을 지도하는 데서도 중요한 구실을 했다. 모든 시당 조직이 〈프라우다〉를 한 묶음씩 받았던 듯하다.
볼셰비키가 집중을 구현할 수 있도록 당원들과 지지자들을 설득하고 모아낸 것은 신문이었다. 레닌이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1901)와 《무엇을 할 것인가?》(1901~02)에서 제시한 집단적 선전가·선동가·조직자로서 신문이 혁명기에 제 구실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마치며
28 지금이 어려운 시기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레닌은 어려운 시기라 해도 혁명적 원칙에 입각해 조직을 건설하고 유지하려는 노력을 회피하지 않았다. 레닌과 볼셰비키에게도 엄청난 시련기가 있었다. 1905년 혁명 패배 이후 러시아 국내에서는 혁명가들이 차르 전제정에 의해 처형당하고 유배지로 쫓겨나고, 망명지에서는 혁명가들이 실의와 좌절에 빠지고, 심지어는 제대로 먹지 못해 정신착란에 빠져 자살한 동료 혁명가를 떠나 보내야 했던 그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레닌은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고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투쟁했다. ‘혁명’만을 외치며 의회와 노동단체 등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했던 초좌파들을 당에서 쫓아내기 위해 투쟁했고, 사기저하 속에서 고개를 쳐드는 신비주의 철학 등에 맞서 싸웠다.
오늘날 좌파 내의 레닌 비판자들이 레닌의 이런저런 측면을 비판하면서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이탈하고 있지만, 핵심 이탈은 바로 혁명적 정당을 건설하고 계급 투쟁에 개입하려는 노력을 거부하려는 것이다. 예컨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에서 탈당한 이언 버철은 레닌을 평가하면서 혁명 정당 건설을 먼 미래의 일로 미뤄 놓았다. “자본주의 권력의 가장 집중적인 국가에 맞서 온갖 종류의 투쟁을 집중시키기 위해 미래의 어느 순간에 우리는 의심할 여지 없이 집중주의적인 정치 조직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과제는 아니다. 우리의 첫 번째 과제는 훨씬 기본적인 것이다. 어려운 시기에 혁명적 좌파를 재건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그랬기 때문에 다시 러시아에서 계급투쟁의 상승기가 도래했을 때, 레닌과 볼셰비키는 전열을 갖추고 계급투쟁에 개입할 수 있었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29 그도 그럴 것이, 레닌과 기회주의는 상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기회주의는 레닌 비판을 넘어선다.
한편,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내던지며, 유행을 좇아 노동계급 분절론에 기웃, 페미니즘에 기웃, 중간주의에 기웃거리는 한 기회주의적 소모임이 ‘레닌 신화 벗기기’를 시도한다는 것은 시사적이다.그들은 레닌주의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마저 도마에 올려 놓는다. “클리프 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대개 스탈린주의 반혁명에 책임을 지우면서, ‘레닌주의’적 이론과 실천을 신화화하기 급급했던 게 사실이다 … 스탈린 이전의 후퇴가 그 길을 닦았던 것이 아닐까? 레닌과 볼셰비키의 정치에 변질의 요소가 있었던 것 아닐까? 1917년 10월 혁명과 볼셰비키의 실천은 단순 반복돼야 할 모범답안일까? 마르크스가 이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이미 내놓았는가?”
우선 토니 클리프가 쓴 《레닌 평전》 4부작(특히 혁명의 고립과 국제 혁명의 실패를 다룬 3권과 4권)을 충실히 읽었다면 토니 클리프가 스탈린 반혁명에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고, 레닌주의를 신화화했다는 주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단순화인지 알 수 있다.
토니 클리프는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에 따라 객관적 조건과 인간의 실천이라는 주관적 요소의 변증법적 관계를 고려하며 역사유물론의 관점으로 레닌과 러시아 혁명을 분석했다.
레닌에 대한 문제제기가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 연결되는 것은 흥미로운데, 이는 레닌이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속함을 부정하지는 못한다는 것의 반영일 것이고, 기회주의가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는지도 보여 준다. 아울러 아나키즘에 대한 기회주의적 태도도 엿볼 수 있다.
레닌주의는 이런 태도와는 확실히 다른 전통이다. 혁명 정당 건설을 먼 후일 언젠가로 미룰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곳에서, 내가 실천해야 하는 과제이다. 이것이 오늘날 레닌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다. 마르크스주의 혁명 이론의 전통을 중시하고, 소수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원칙을 고수하며, 끊임없이 계급투쟁에 개입하면서 배우고, 원칙을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유연한 전술을 발전시키며, 혁명적 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는 레닌의 교훈은 여전히 유효하다.
주
- Chomsky 2013. ↩
- 클리프 2004, p22. ↩
- 클리프 2004, p34. ↩
- 캘리니코스 2011, 1장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유산’을 참조하시오. ↩
- Hallas 핼러스는 중간주의자들이 치머발트 반전회의를 주도했다고 평가한다. 참전하고나서도 중간주의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레닌은 원칙을 굽히지 않고 고수하면서도 당시 상황을 고려해 전술적 유연성을 발휘했다. “[레닌의 혁명적 패전주의] 결의안이 표결에서 패배했지만, 레닌은 치머발트 반전회의를 ‘첫걸음’이라고 규정했고, 볼셰비키를 포함한 좌파들은 자신들이 제출했지만 부결된 결의안을 출판하는 것뿐 아니라 다수파의 선언문에도 찬성했다. 선언문은 ‘모든 나라의 자본가들은 전쟁이 조국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공표했다.” ↩
- Hallas 1985. 이와 관련해서는 강동훈 엮음 2016의 김영익, ‘부정확하기 이를 데 없는 한반도 주변정세 인식’을 참조하시오. ↩
- 캘리니코스 1993을 참조하시오. ↩
- 캘리니코스 2010, p51. ↩
- 프랑스 신디컬리스트였다가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주의자가 됐다. ↩
- 클리프 2013, p76. ↩
- 레닌 1992, p19. 강조는 원문. ↩
- 클리프 2013, p77. ↩
- 클리프 2009, p92. ↩
- 클리프 2010, 5장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관해 레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견해와 개념을 아주 명쾌하게 정리해 놨다. ↩
- 드레이퍼 2014. ↩
- Lih 2010, p450에서 재인용. ↩
- Chomsky, 2013, Chomsky 1986, 촘스키 2007. ↩
- 박노자 2008, p132. ↩
- 박노자 2008, p138. ↩
- 클리프 2010, p252. ↩
- 류한수 2008, p174. 류한수 교수는 1917년 7월부터 10월까지 러시아 혁명 기간을 다룬 알렉산더 라비노비치의 역작 《혁명의 시간 ― 러시아 혁명 120일 결단의 순간들》(교양인, 2008)과 아나키스트였다가 볼셰비키가 된 혁명가 《빅토르 세르주 평전》(실천문학사, 2006)을 번역했다. ↩
- 이 글에서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상황을 구체적으로 다루는 것은 한계가 있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최일붕 2007을 참조하시오. ↩
- 클리프 2004, p12. ↩
- 최일붕 2015. 강조는 원문. ↩
- 클리프 2009, p227. ↩
- 클리프 2013, p86. ↩
- 클리프 2009, pp231~232. ↩
- Birchall 2014. ↩
- 강동훈 엮음 2016을 참조하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