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마르크스주의 계급 이론
노동계급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글은 미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핼 드레이퍼Hal Draper(1914~90)의 명저 The Politics of Social Classes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78)의 “프롤레타리아” 관련 부분을 내용은 그대로 두고 우리 상황에 맞게 고친 것이다. 핼 드레이퍼는 노동계급의 자력해방 능력을 강조한 《사회주의의 두 가지 전통》(최일붕 역, 노동자연대, 2014)의 필자이기도 하다.
1 을 근본적 사회 변화를 위한 운동의 중심이 되는 사회 세력으로 본다. 왜 새 사회라는 원대한 목표와 사회의 일부일 뿐인 노동계급의 이해득실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건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노동자들은 노동자가 아닌 사람들보다 더 착하다거나, 더 똑똑하다거나, 더 정직하다거나, 더 용감하다거나, 더 인정이 많다고 ‘미화’ 또는 ‘이상화’하고 있는 건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는 노동계급오히려 노동자들은 이러저러한 자본주의적 또는 개혁주의적 정치인들을 신뢰하고 사회주의에는 조금도 관심을 안 보이지 않았던가. 그들도 사회의 다른 부문처럼 기만당하고 환상을 좇지 않았던가. 때로는 특정 편견에 지배계급보다 더 사로잡히지 않았던가.
이런 식의 질문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노동계급관을 오해한 것일 뿐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든 노동자들을 ‘미화’ 또는 ‘이상화’하지 않는다.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직시하면 그가 단지 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선한 사람이라고 할 근거는 전혀 없다. 도대체 그런 식으로 계급을 보는 것 자체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과는 관계없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소박한 도덕주의자처럼 선인 대對 악인 식으로 사람을 본다면, 남이 끼니를 거르게 만드는 자들은 악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최저임금이 쥐꼬리만 하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도 사용자들은 생색내기에 불과한 최저임금 인상에도 반대하고 있다. 그들이 악인이라서 그런가? 기업주들도 개인적으로는 자상한 아빠요, 친절한 남편이요, 의리 있는 친구요, 자선과 온정을 베푸는 데 인색하지 않은 인정 많은 사람일 수도 있다. 대개는 이기주의자이고 자비를 모르는 냉혈한이기 쉽지만 말이다. 사회라는 조직의 한 원자로서 행동한다는 것과 특정 사회계급의 일원으로서 행동한다는 것은 상당히 다른 것이다.
기업주들은 이것을 두고 ‘공公은 공이고 사私는 사야’ 하고 말한다. 또는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지’ 하고도 말한다. 자본가는 한 개인으로서의 자신의 태도 및 역할과, 자신이 속한 재계의 일원이나 지배계급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태도와 역할을 바로 그런 식으로 구별한다. 혹시 사인私人으로서는 훌륭한 인격을 가졌을지 몰라도 공인公人으로서 자본가는 사업상의 이해관계와 존재조건 때문에 자신의 개성과 크게 다른 사람이 된다.
다른 모든 계급이 그러하듯이 노동계급도 그에 속한 원자들의 총합 이상이다. 인간 대 인간으로 보면, 노동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성품상 더 사회주의자다운 것은 아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 자신의 이해관계에 의해, 그리고 하나의 계급으로서 자신의 존재조건에 의해 특정 방향으로 떠밀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주의 운동의 추진력은 사회의 다른 부문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투쟁과 조건에서 비롯했던 것이다. 체계적인 사회주의 사상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처럼 그 자신은 노동자가 아니었던 지식인들에 의해 주창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노동계급 쪽으로 이끌린 것은, 사회주의 사상을 구현하는 결정적인 사회세력이라고 그들이 인정한 역동적인 사회세력이 노동계급이었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이 사회적·정치적 미성숙 상태에 있을 때는 노동자들은 온갖 후진적·보수적, 심지어 반동적인 사상에 감염될 수밖에 없다. 흔히 교육 정도가 높을수록 이주민에 대한 편견을 덜 갖고 있다고들 한다. 이 말대로라면, 자본가들보다 교육을 덜 받은 노동자들은 이주민에 대한 편견을 더 많이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기도 하고 안 그렇기도 하다. 노동자들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잘 조직되지 못했을뿐더러 조직 경험도 많지 않고 계급의식을 바탕으로 조직되지 못했을 때는 인종적 편견에 더 크게 좌우된다. 반면, 많은 노조원들이 인종차별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학교 교육 덕분이 아니라 계급 교육 덕분이다.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자가 원자화된 개인으로서의 노동자에게서 뭔가 특별한 불가사의한 능력을 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얘기했다. 노동계급의 ‘특별한 지위’는 사회 속에서 그 집단이 점하는 계급적 위치에 본질로 내재하는 추동력 덕분이다. 이 추동력은 노동자들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갖는 지워버릴 수 없는 이해관계와 그들의 존재조건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특별한 지위는 노동계급이 스스로 조직하고(결국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럼으로써 계급적 경험들을 거쳐 개별 성원들의 관념들을 바꾸어 놓을 때 비로소 확보되기 시작한다.
바로 이것을 마르크스주의자는 계급의식의 발전이라고 부른다. 현재 노동계급의 의식 발달은 비교적 초보적인 단계에 있다. 그래서 특히, 노동자 투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친중간계급적 인자들 사이에서 노동계급의 자력해방 능력에 가장 끈덕지게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막상 노동계급 투쟁에 직접 대처하는 지배자들은 오히려 노동운동이 사회운동을 주도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요컨대, 어중간한 상황에서 헛갈리는 것은 어중간한 사람들인 셈이다.
조직적인 노동계급 투쟁은 언제 어디서든 자유와 인간 해방을 지향하는 노력 하나하나와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 노동계급이 패배한 곳에서는 민주주의와 진보 그리고 인간성도 패배했다. 해방을 갈구하는 세력이 싸우는 곳에서 전위에 섰던 세력은 노동계급이었다. 노동계급 말고 다른 어느 계급도, 어느 부문도 노동계급을 대신하지 못했다.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이 처한 존재조건 때문에 좋든 싫든 보유하는 강점은 무엇인가? 아래 내용은, 개별 성원으로 보자면야 남들보다 더 선할 것도 더 악할 것도 없는 노동계급이 한 사회계급으로서 지니고 있는 특징들을 개괄해 본 것이다.
1. 존재조건과 조직화
노동계급은 자신의 존재조건 때문에 조직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의 동질적인 운동으로서는 가장 견고한 조직을 갖추게 된다. 물론 이 점에서 노동계급과 맞먹을 만한 계급이 하나 있긴 한데, 바로 자본가들이다. 이들의 계급의식과 계급 연대는 노동자들이 언제 어디서든 본받을 만한 본보기이다.
농민이 조직 면에서 노동계급에 견줄 만한 성과를 올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차이점은 농민 개개인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농민은 그들의 존재조건상 자족과 단독성과 개별성을 중시하는 원자화한 집단을 이뤄 살아간다. 노동자와 달리 농민은 계급으로 결속되지 않으며, 사회적 투쟁이 불붙을 때도 한데 결집하기보다는 여전히 분산적인 경향이 있다.
노동자들은 조직화를 배운다. 그들의 지능이 다른 계급보다 우월해서도 아니고, 외부 선동가들의 사주에 의해서도 아니며, 바로 자본주의 덕분에 그렇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분업 자체에 의해 부서·작업반·조립라인·근무교대조·분임조 등으로 조직된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을 ‘조직’하지 않고는 존속하지 못한다. 자본주의 자체가 노동자들에게 협동과 연대라는 덕을 가르친다. 자본주의는 규율을 가르친다. 자본주의는 노력의 집중을 강요한다. 자본주의는 협동의 이점을 매일 통감케 하고, 집단이 필요로 하는 일에 개인의 사리사욕을 종속시킨다.
자본주의가 이 교훈들을 모든 노동자에게 똑같이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사장 개인의 지시를 받으면서 동료 노동자들과 떨어져 사장과 함께 일하는 비서보다는 대공장 조립 라인에서 동료들과 함께 일하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가 가르치는 집단성의 교훈을 더 쉽게 배운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조성하는 조건들이 서로 다른 부류의 노동자들에게 행하는 서로 다른 수준의 ‘교육’에 대한 간단한 사례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노동계급 내의 상이한 계층 ― 조직화 수준이 다른 ― 이 보이는 상이한 사회관과도 관계 있다.
2. 이해관계와 투쟁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에 의해 조직된 하나의 결속된 집단으로서 자신의 이해관계에 이끌려 투쟁하게 된다. 투쟁은 흔히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바라지 않는 식으로 벌어진다. 보통의 노동자에서 출세해 자본주의 사회의 존경받고 책임있는 성원이 되는 염원을 품게 되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흔히, 사용자와 충돌하기보다는 그들과 유쾌하고 우호적인 협상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노동자 대중이 감수할 수밖에 없는 존재조건에서 벗어난 노조 고위 상근간부층은 개혁주의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중간계급과 비슷한 지위에 놓이기를 원한다. 대형 노조나 상급단체 노조 지도자들은 대기업 고문변호사만큼 존경받기를 원한다. 물론 기업주들은 노조 지도자들이 ‘처신을 잘하는’ 경우에만 그들에게 우호적이다.
노조 지도자들이 일상적 시기에 노동계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건 기업주들의 공세에 저항하기 위해 노동계급에 대표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혁주의적 노조 지도자들은 밑으로부터 대중의 다양한 요구의 압박을 받는다. 그 요구들은 계급 화해의 언사로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노동자의 삶에 꼭 필요한 것인 동시에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는 존재의 심연에서 솟아나오는 염원들이다.
산업 평화가 이럭저럭 유지되는 시기에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위태롭게나마 지속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보수적이고 가장 온건한 노동조합 지도자조차 자신의 지지 기반의 욕구는 어느 정도 충족시켜야 한다. 그래서 계급투쟁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그들이지만, 비겁하게든 투쟁적으로든, 한결같든 주저주저하든, 세련되게든 조야하게든, 어쨌든 노동자들의 지도자 구실을 계속하는 한은 계급투쟁의 도구가 돼야 한다.
3. 투쟁의 반자본성
조직적인 노동자 투쟁은 반자본주의적 경향, 즉 자본주의의 제도와 사상의 틀을 넘는 경향을 함축하기 마련이다. 노동계급이 스스로 다른 모든 부문에게 중심이 됨을 자각하기 시작함에 따라 노동운동은 날이 갈수록 지배계급의 소유권 주장과 충돌을 빚게 된다.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본질적으로, 경제 영역이 공공성에 아랑곳하지 않는 자본의 일방적인 힘의 지배를 받게 됨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자본주의는 많은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1) 연합한 자본가들이 국가에 대한 온전한 지배력을 유지한다. (2) 그러한 국가는 사회의 대표자로서 개입할 권한을 부여받는다. 자본주의에서 (계급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계층이 두드러져 보이는 현상은 여기서 비롯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내놓은 타협안이 무엇이든 그것은 노동계급 운동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 현재의 온건한 노조 운동조차 만족시킬 수 없다. 계급투쟁이 격렬했던 1930년대 중엽 투쟁적 노동운동가들은 소유권에 대한 일말의 켕김도 없이 작업장을 장악한 바 있다. 그들의 정치적 경향은 개인주의(사적 소유)냐 공공성(공적 소유)이냐 가운데 후자를 지지하는 것이다. 물론 공적 소유가 노동자 관리와 결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관료화에 일조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 관리와 결합된다면, 그러한 ‘개인주의냐 공공성이냐’를 둘러싼 충돌이야말로 노동운동의 본질에 내재하며 그리하여 도저히 뿌리뽑을 수 없는 사회주의의 싹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분배 증대 욕구가 자본가의 수익성 증대 욕구와 양립할 수 없는데도 노동자들이 일관되게 압박을 가하는 한, 그래서 자본가들이 격하게 분노하는데도 노동자들이 물러서지 않고 이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한, 노동계급은 자신의 존재에 내재한 논리를 자본주의의 틀 밖으로 몰고 나가 분출시킬 수도 있다. 노동자의 계급적 조건과 필요와 욕구, 이익은 조직적인 노동자 투쟁을 자본주의 체제의 테두리를 파열시키는 쪽으로 몰고 가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다른 어느 사회계급에도 해당하지 않는 얘기다. 농민과 중소상공업자는 집요한 소자산 소유자이며, 따라서 그들이 그러한 계급적 한계를 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반면 운동의 강령과 목표가, 빨리든 늦게든,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향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오직 노동계급의 경우뿐이다.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의 특별한 역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물론 민중주의자들은 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노동계급을 하나의 계급으로 보는 게 아니라 사회의 한 ‘부문’ 정도로만 보기 때문에 노동계급의 특별한 지위와 독자성을 보지 못한다.
4. 대담성과 용기 그리고 투쟁성
노동계급은 자신의 조건과 이해관계 때문에 조직적인 반자본주의 투쟁의 방향으로 떠밀릴 뿐 아니라, 노동계급만이 투쟁의 결정적 순간에 대응하는 데 필요한 대담성과 용기, 투쟁성을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그런 중대한 상황 자체가 노동계급의 이런 고유한 속성을 발휘하도록 등을 떠민다. 앞에서도 분명히 밝혔듯이, 우리는 도덕론을 설파하고 있지 않고, 노동자를 미화·이상화하고 있지도 않다. 우리는 그저 노동자들이 조직적인 계급으로서 지닌 잠재력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투쟁 속에서 받은 교육과 존재조건이 강요한 집단성이 몸에 배어 노동자들이 단체행동을 할 때마다 뚜렷하게 드러나는 내면화된 자질들에 대해 말했던 것이다. 이렇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계급 행동이다.
계급 ‘정형定型’이라는 것이 존재함은 일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 현실이다. 가령 급진적 사회학자 C 라이트 밀스(1916~62)는 중간계급을 이렇게 정형화한다:
의견 내놓기를 주저하며 내놓아도 혼동으로 가득 차 있고 오락가락하기 일쑤이다. 또, 그 행동은 초점이 없이 흐리터분하여 도무지 집중돼 있지 않으며, 지속성이 없다. 그런가 하면 그들에게는 걱정과 불신을 집중시킬 표적이 없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조급하며 열정을 지니지 못한다. 그들은 두려워서 툴툴거리지도 못하면서 박수갈채에는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합창단과도 같다. 단기적으로는 그들은 전전긍긍하며 특권을 추구한다. 장기적으로는 그들은 권력으로 가는 길을 따라간다. 불만을 실천으로 옮기고 책임 있게 투쟁하려면 상상력이 필요하며 심지어는 비전도 필요하다. 그러나 중간계급이 품은 불만에는 이런 것이 결여돼 있다. 반면 책임 있는 투쟁에는 지도력이 필요하다.
C 라이트 밀스의 이 묘사는 중간계급에 속한 개인들에 관한 인신공격이 아니라 하나의 계급으로서 중간계급의 집단적 행태를 묘사한 것으로 봐야 한다. 실제로 중간계급을 정형화해 보면, 한마디로 다른 누군가가 먼저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후위’後衛로 나타낼 수 있다. 하나의 집단으로서 응집력을 결여하고 있고, 자신의 존재조건에 대한 불만을 지속시키지 않고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책임 있게 투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중간계급 전체는 물론 중간계급의 상이한 계층들이 반자본주의적 지향성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왜 중간계급 조직들은 ‘용기와 대담성과 투쟁성’을 발휘하는 데 꼭 필요한 역동적 추진력을 가동시키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중간계급 인자들이 ‘사회적 인정’이라는 관념의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동계급보다 계급사회에서 덜 소외되어 있는 만큼 품위와 체면, 덕망을 선호하고, 여론을 거스르는 정면 충돌을 피하려 한다. 그럴수록 ‘용기와 대담성 그리고 투쟁성’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반면 역사는 이러저러한 공경할 만한 덕망가들보다 익명의 수많은 노동자들이 투쟁에서 보여 준 용기와 희생을 증언하고 있다. 집단성을 존재의 본질로서 내면화하고 있는 노동계급만이 진정으로 영웅적인 솔선수범의 귀감이 돼 왔다. 물론 사회주의자는 중간계급을 적대해서는 안 된다. 중간계급에 속한 괜찮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이따금 만나거니와 더 나아가, 중간계급의 개인들이 노동계급 운동을 지지하거나 이에 어떤 식으로든 동참하는 것은 환영해 마지않을 일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강력한 노동계급 운동의 부수적 효과일 뿐이다. 사회주의자는 계급을 초월해 중간계급과 연합하기 위해 자신의 원칙과 강령을 타협해서는 안 된다.
5. 사회적 힘과 비중을 가진 유일한 계급
노동계급은 옛 질서를 폐지하고 새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사회적 힘과 비중을 가진 유일한 계급이며, 따라서 조직적인 반자본주의 투쟁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노동계급이 자신을 지지하는 다른 차별받는 사회집단들을 이끌고 자본주의 폐지를 향해 움직일 때 그 최종 결과를 결정하는 것은 노동계급의 사회적 힘이라고 생각한다.
노동계급의 사회적 힘은 그 계급의 크기에만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의 사회적 힘은, 우리가 이제까지 논의해 왔듯이 그 동질성과 조직 가능성, 요컨대 그 타격력에 의존하는 것이다.
노동자의 사회적 힘은 또한 자본주의의 운영이 노동계급이 제공하는 노동에 필수 불가결하게 의존한다는 것에서 나온다. 노동계급만큼 사회가 돌아가는 데 근간이 되는 활동 ―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체제는 삐걱거리다 급기야는 멈추고 만다 ― 에 긴밀히 종사하는 계급은 없다. 다른 어느 계급도 조직된 핵심 부분의 목적의식적 결단에 의해, 예컨대 대규모 파업을 통해 사회적 위기를 촉발할 수 없다. 노동계급이 싸움에 돌입하면 모든 사회가 그 싸움의 소용돌이에 말려든다. 왜냐하면 사회 전체가 그들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이 요동칠 때마다 사회의 나머지 부분이 전율한다.
반면 중간계급의 ‘후위’적 성격은 그 계층들이 정치적·사회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음을 반영한다. 중간계급은 특유의 이해관계에 효과적으로 조응하는 사회적 계획(강령)을 갖지 못하므로 사회를 이끌고 나아갈 수 없다. 그들의 존재조건에서는 전 사회를 위한 탈출구를 가리키는 지침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노동계급은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어떤 강령을 함축하고 지향하기 마련이다. 개별 노동자들이 그런 강령을 부인하더라도 그렇다. 그 강령은 자본주의 폐지와 이를 반대하는 계급의 격퇴, 기업 대신에 민주적으로 조직된 대중이 ‘사회적 책임’(공공성)을 떠맡는다는 계획이다. 노동계급이 자유와 해방을 위한 모든 투쟁에서 전위 구실을 떠맡게 되는 것은 그런 투쟁에 끼어들 수밖에 없는 노동계급의 이해관계가 사회를 근저에서부터 변화시키고 재편하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노동계급과 그 이해관계가 그 적敵과 거짓 동맹들에 의해 얼마나 자주 기만당하고 배반당했는가 하는 점은 자본주의의 역사가 어떤 면에서는 노동계급에 대한 계속된 기만의 역사였다는 점만 봐도 충분하다. 사실, 노동계급을 기만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의 하나다. 반동 세력이 결정적으로 속이려 하는 대상은 중간계급이나 그 밖의 ‘후위’가 아니라 바로 노동계급이다.
3 바로 노동자들 자신의 행동이다. 마르크스주의자의 가장 주된 임무는 바로 이렇게 노동자들이 발전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에 맞서 사회주의, 즉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은 노동계급을 자신의 적敵들에 의한 기만에서 자유롭게 하는 투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투쟁은 그 정의상 노동자들이 더는 속지 않게 되자마자 승리로 끝나게 되는 투쟁이다. 노동자들이 그런 속임수에서 벗어나는 데 필요한 것은 이런저런 중간계급이나 ‘후위’의 도움이 아니라이와 관련해, 로자 룩셈부르크가 사회주의 혁명이란 끊임없는 패배의 연속을 겪은 뒤에 단 한 번의 승리로 끝나는 전쟁이라고 말한 것을 상기해 보자. 이 전쟁에는, 사악한 체제에 마음과 정신을 비열하게 적응시키기를 거부하고 새롭고 더 좋은 세계를 위해 싸운다는 긍지와 존엄성 외에는 아무것도 보장돼 있지 않다. 무릇 마르크스주의자라면, ‘과연 노동계급이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려나’ 하고 관망하는 자세로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런 태도는 숙명론적이고 추수주의적이지, 전혀 능동적이고 혁명적이지 않다. 오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지배계급의 거짓말을 낱낱이 들춰내 노동자들에게 분명히 설명해 줌으로써, 또 그것을 바탕으로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교육하고 훈련시킴으로써 노동계급은 지배계급을 타도하고 자신의 모습에 조응하는 세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낡은 세계도 새 세계도 모두 오직 노동계급이 만든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노동계급에 정치적 도움을 제공함으로써 노동계급의 아래로부터의 자력해방을 지지해야 한다.
MARX21
주
- 우리는 마르크스를 좇아 노동계급을 (공장·광산·사무실·부두·공항·병원·학교·백화점 등지에서) 사용자에게 노동력을 팔아 임금을 받음으로써만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한다. 한국의 ‘임금근로자’는 취업자(=경제활동인구-실업자)의 73.7퍼센트를 차지하는데, 이 수치는 신중간계급을 포함하므로(임금근로자와 실업자를 합친 인구의 10~20퍼센트로 추정됨), 아마도 한국의 임금노동자는 취업자의 60퍼센트 안팎(약 56~64퍼센트)이 된다고 추정할 수 있다. ↩
- 반대로 친중간계급적 기구들을 무원칙하게 끌어들이려 애쓰는 민중주의자들은 그 동맹들이 일정한 단계에 이르러 노동계급의 수족을 묶게 될 사태를 준비하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기회주의적으로 민중주의에 영합하는 어느 블로거는 2015년 11~12월 민중총궐기의 아쉬움을 털어놓으며 이런 말을 했다. “시민사회, 종교계의 동참은 외연 확대이면서 동시에 우리 편을 통제하는 양날의 칼 … 조계종은 한상균 위원장의 퇴거를 압박….” 그러나 노동운동에 대한 친중간계급적 기구들의 이런 압박은 민중주의적으로 운동이 계획됐을 때 이미 예정된 일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
- 이 점에서도 사회주의는 민중주의와 다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