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데이비드 하비 비판
신랄한 신자유주의 비판, 아쉬운 설명과 대안
서평 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 한울아카데미, 2007
그러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파선 선고는 아직 신자유주의의 ‘죽음’을 가져오진 않았다. 유럽에서는 경제 위기의 고통을 노동계급에게 전가하기 위한 긴축정책이 계속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신자유주의 논리를 바탕으로 한 각종 규제완화와 노동개악 등이 추진되고 있는 것을 보라.
따라서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기존의 신자유주의 비판 담론들을 검토하고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그중에서도 데이비드 하비의 《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이하 《신자유주의》)는 여전히 주목해서 볼 만한 책 중 하나이다.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의 신자유주의 비판서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국내외 신자유주의 담론에 큰 영향을 준 책이기도 하다. 게다가 몇몇 부분에서는 상당한 통찰력이 엿보인다. 물론, 이 책에 일부 엄밀하지 못하거나 부정확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부분을 비판적으로 읽고 고민해 보는 것 또한 오늘날 자본주의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신자유주의 이해에 대한 하비의 기여
2 이러한 모순과 간극을 폭로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이 ‘과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로서의 신자유주의는 (현실을 잘 설명하기 위한 이론이라기보단) 노동계급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이며 지배계급의 자신감을 고취시키기 위한 도구 구실을 한다. 3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고개가 끄덕여진 부분은 제1장이다. 여기에서 하비는 이론적 신자유주의와 실제의 신자유주의 사이에 상당한 괴리와 모순이 존재한다는 점을 신랄하게 폭로한다.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이론적 설계를 실현시키려는 유토피아적 프로젝트”인 동시에 “경제 엘리트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한 정치적 프로젝트”이다.(36쪽) 하지만 이 둘 중에서 결정적인 측면은 정치적 프로젝트의 측면이다. “신자유주의적 원칙들이 엘리트 권력을 회복하거나 유지해야 할 필요와 충돌할 경우 이 원칙들이 폐기되거나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왜곡”되는 경우가 다반사기 때문이다.(37쪽) 예컨대 “신자유주의 국가는 한편으로 뒷자석에 앉아서 그저 시장이 기능할 수 있는 무대를 설정하는 역할만을 담당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국가는 “적극적”인 “경쟁적 실체로 활동”하기를 요구 받기도 한다.(104쪽) 크리스 하먼도 지적했다시피, “미국 지배계급에게 신자유주의 … 란 미국 자본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 경제에 강요할 교리였지, 국내에서 제한 없이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신자유주의》에서 통찰력이 돋보이는 또 다른 부분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지속 불가능성을 매우 잘 폭로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이것은 상식이 되었지만, 이 책이 쓰여진 것이 2005년이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물론 혹자는 로버트 브레너, 크리스 하먼, 제라르 뒤메닐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물론이고 조지프 스티글리츠, 누리엘 루비니, 폴 크루그먼, 라구람 라잔 등 주류경제학 진영의 많은 학자들까지 신자유주의의 위기를 경고하지 않았냐고 되물을 수 있다.(물론 위기의 가능성을 지적하는 방식은 각자 달랐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시절의 전반적 정서를 생각해 보자.
4 한편 마르크스주의 진영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곤 했는데, 《소셜리스트 레지스터》 편집자로 유명한 레오 패니치와 샘 긴딘 같은 사람들도 당시에는 “금융 우위의 세계적 축적구조가 상당한 안정성을 갖고 재생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5 따라서 2005년에 이미 신자유주의의 위기를 예견한 것은 꽤나 통찰력이 빛나는 전망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새고전파 경제학의 얼굴마담인 로버트 루카스는 “불황에 대처하는 것에 대한 핵심적인 문제들은 이미 해결됐다”고 말했고, 경제학자들은 세계경제의 “대大 안정기”를 자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 신자유주의에 맞선 투쟁을 상당히 고무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비는 “IMF의 조언을 거부한 성공적 사례들이 많으며, 이는 월스트리트-미국 재무부-IMF 복합체가 으레 주장되는 것처럼 그리 막강하지 않”고,(147쪽) 계급투쟁은 귀환했으며,(243쪽) “신자유주의가 전도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고귀하고 쟁취해야 할 자유의 전망이 있다”고 서술한다.(248쪽) 좌파 지식인들 중 꽤 많은 사람들은 현대 자본주의의 참혹함 앞에서 좌절감을 표출할 뿐, 투쟁의 가능성이나 대안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하비의 태도는 빛을 발한다.7 그런 점에서 필자는 신자유주의 분석에 대한 하비의 기여 중에서 일부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검증’을 통과한 후 수용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하에서는 특히 신자유주의란 무엇인지, 그것의 작동 메커니즘은 무엇이고 어떤 결과를 수반하는지에 대한 하비의 규정에 대해 평가할 것이다.
그러나 이상에서 언급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하비의 신자유주의 비판에는 엄밀하지 않거나 다소 부정확한 부분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비는 분명 마르크스주의적 범주들을 활용해서 현대 자본주의를 묘사하지만, 엄밀성이 떨어지는 접근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신자유주의 ‘계급권력 회복’의 핵심은 ‘재분배’인가?
8 탈피한 것이며,(28쪽) 본질적으로 계급권력의 회복(을 위한 움직임)을 의미한다.(50쪽) 9 하비에게 계급권력의 회복이란 곧 부를 지배계급에게 집중시킨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이다. 따라서 하비에게는 “신자유주의화의 본질적이고 주된 업적은 부와 소득의 창출보다는 재분배에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부와 소득이 지배계급에게 재분배되는 핵심 메커니즘은 “탈취에 의한 축적accumulation by dispossession”이다.(194쪽, 강조는 전부 필자의 것) 요컨대 하비에게 신자유주의란 탈취에 의한 축적을 통해 지배계급에게 부와 소득을 집중시키는 것이고, 이는 계급권력의 회복과 동의어다.
우선 데이비드 하비에게 신자유주의는 “착근된 자유주의embedded liberalism”에서하비는 이 책에서 탈취에 의한 축적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예시를 다양하게 들지만, 핵심적 양상은 네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민영화와 상품화”로, 공기업이나 지적재산권이나 유전자 정보 등 기존에 공유재였던 자산을 특정 자본가의 사유재산으로 전환시켜 지배계급에게 부를 집중시키는 방식이다. 둘째, 금융화다. 이는 높은 금융 수익을 올리고 피지배자들을 금융적으로 탈취해 부를 지배계급에게 재분배하는 것이다. 셋째, 위기의 관리와 조작이다. 이는 제3세계 나라들의 경제 위기를 빌미로 그들에게 빚을 지게 해서 수탈하고 또 신자유주의화를 강요하는 것이다. IMF가 외환 위기 때 한국에서 했던 일들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넷째, 국가에 의한 재분배다. 이것은 공공서비스와 복지수혜 등 사회적 임금을 삭감시키고, 역진적 조세정책을 시행하는 것을 의미한다.(195~201쪽)
이는 자본주의의 현상을 매우 잘 묘사한 것이다. 지배계급은 실제로 자본축적에 도움이 된다면 자유시장 원리에 맞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또 폭력 사용도 무릅쓰며 탈취를 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를 분석할 때 계급이라는 변수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 또한 유용한 접근법이다.
앞서 인용했다시피 하비는 계급권력 회복의 본질이 부와 소득의 재분배에 있다고 본다. 그리고 계급권력을 다루면서 그는 압도적으로 (재)분배에 관한 얘기만 할 뿐, 다른 내용은 전혀 강조하지 않는다.(심지어는 생산현장에서 일어나는 노동계급 착취 강화에 대해서도 충분히 언급하지 않았다는 인상이 든다.) 그런데 ‘권력’이 단지 더 많은 분배 몫을 차지하는 것과 동일시될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계급권력의 회복=지배계급(중에서도 상층)으로의 재분배’와 같은 규정은 다소 일면적인 규정이 될 위험이 있다. 송종운이 뒤메닐과 레비의 《신자유주의의 위기》를 비판하면서 지적한 바 있듯이, 이와 같은 논지 전개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라기보다는 ‘소득의 정치학’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신자유주의를 조망할 때 소득의 동역학을 본질적 측면으로 보면, 왜 지배계급이 이전에는 ‘착근된 자유주의’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운용했으면서 신자유주의 시기에는 노동계급의 분배 몫을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방식으로 경제를 운용하는지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10 단지 지배계급이 더 많은 분배 몫을 갈망하는 것이 문제였다면 개혁을 통해 지배계급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 반신자유주의 정치에서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윤율 저하라는 지배계급의 위기 속에서 신자유주의가 발생했다는 점을 이해하면, 그리고 신자유주의 하에서 지배계급의 행태가 근본적으로 그와 같은 수익성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직시한다면, 하비와 같이 ‘좋은 자본주의’를 지금에 와서 재추진하는 것이 현재의 바람직한 대안이라고 결론 내릴 수 없을 것이다. 11
단지 지배계급(의 일부)에게 소득이 집중되고 있다는 것보다 중요한 논점은, ‘대체 그들은 왜 소득을 집중시키려 하나?’일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단지 탐욕스러운 지배계급 상층부가 자신들의 소득을 증대시키기 위해 벌이는 공세라고 볼 수 없다. 이윤율이 장기적으로 저하하는 추세 속에서 어떻게든 이윤을 끌어올리려는 시도라고 봐야 한다. “높은 경제적 성과가 나타나는 시기에는” 노동계급이 더 많은 분배 몫을 받아낼 여지가 어느 정도 커지기 때문에 “소득의 동학이 크게 제약 받지 않”지만, 수익성이 장기적으로 위협받는 시기에는 그러한 “타협”의 “물적 토대가 존재하지 않기에 … 오히려 계급 전쟁이 거세”지게 되는 것이다.하비와 같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소득 중심 접근법을 취하는 것이 갖는 위험성 중에는, 후술하겠지만,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동계급이 겪는 불안정성에 대한 과대평가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이 있다. 단지 (생산을 포기하고 탈취를 통해서라도) 상위계급의 소득을 극대화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목표라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노동계급의 노동조건과 복지와 같은 몫들을 모조리 빼앗아 오는 것이 지배계급의 목표인 것처럼 여기게 될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는 단지 상층 계급이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한 계략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신자유주의의 근본 목적이 자본의 수익성을 안정화시키는 것이라면, 생산과 재생산의 안정이 위협되는 수준으로 자본의 공세를 강화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2 요컨대 하비의 ‘재분배를 통한 계급권력의 복원’론은 직관적으로 와 닿는 개념이며 이해할 만한 규정이지만, 그 엄밀성에서 부족함이 있다.
따라서 계급권력을 단지 소득 분배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다소 단순한 접근법이고, 신자유주의를 단지 계급 간 재분배의 문제로 보는 것은 피상적이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차원에 수익성이라는 문제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제라르 뒤메닐과 도미니크 레비가 사용한 ‘자본의 반격’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하비는 이들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지배계급의 실천으로서 신자유주의는, 자본가 계급이 수익성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국가자본주의적 요소들을 구조조정하고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율을 강화하는 프로젝트다.(금융화의 경우에는 수익성이 낮아진 자본가들이 대안적 수입원을 찾기 위한 노력에서 나온 것이므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하비의 책을 읽다 보면 마치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부와 소득을 탐욕적으로 강화하기 위해서 온갖 신자유주의 공세를 펼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배계급에게도 신자유주의는 위기에 대한 ‘대응’인 것이지, 자본가들이 체계적인 계획에 따라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탈취인가 생산인가
또한 하비가 신자유주의의 핵심 메커니즘으로 지목한 ‘탈취에 의한 축적’ 역시 현대 자본주의의 동학에서 얼마나 근본적인지가 의문이다. 이 말은 자본가들의 소득의 주된 원천이 생산(‘부의 창출’)이 아니라 탈취로 넘어갔냐는 질문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이 쟁점에 대해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첫째, 탈취가 정말 ‘부의 창출’보다 양적으로 중요해졌는가 하는 것이다. 둘째, 그 탈취가 생산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탈취가 생산과 연관이 있다면, 신자유주의 시대에 실제로 탈취가 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생산 현장에서의 착취 문제에 맞서 싸우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선 탈취가 정말 생산보다 중요한 자본가 소득의 원천이 된 것일까? 그런 생각들은 흔히 과장돼 있다. 예컨대 하비가 여러 차례 언급한 제3세계에 대한 탈취를 보도록 하자. 1980~2004년 해외투자액 중 3분의 2는 선진국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점을 볼 때, “자본주의가 ‘남반구’의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착취를 통해 존속한다는 … 관념은 오늘날의 현실에 맞지 않다. 물론 자본주의는 가난한 나라들에게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다 가져가”지만, “이들은 결코 주된 착취대상이 아니다.” 또 (설사 금융위기 이전을 포함하더라도) 금융산업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의 동력 구실을 한다는 주장도 과장돼 있다. 결국, 장하준이 옳게 주장했듯, “우리는 탈산업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복지국가를 후퇴시키는 것에서 자본가들이 바로 탈취할 수 있는 돈은 그렇게 많지 않다. 애초부터 ‘사회적 임금’이라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마르크스 경제학자인 안와르 셰이크에 따르면, 전후 장기호황기의 복지국가에서는 “사회복지 지출의 몫이 오른 만큼 GDP도 빠르게 성장”했고, “세율과 복지수혜 사이의 차액이라고 할 수 있는 순사회임금률은 일반적으로 매우 작았다.” 복지 지출의 증가 속도가 낮아진 것도 무엇보다도 “성장의 감속으로 인한 결과다.” 둘째, 설사 자본가들이 사용가치나 가치를 일정량 탈취해 오더라도 그것이 생산에 투하되지 않으면 별 소용이 없다. 따라서 탈취는 결국 생산을 위해 이뤄지는 것이고 생산에 비해 부차적(혹은 보조적) 치부수단이다. 예컨대 복지국가를 후퇴시키고 공공부문을 민영화하는 데에는 지배계급의 재원 마련 및 절약이라는 직접적으로 재정적인 이유도 있지만, 노동자들을 ‘시장경쟁’에 노출시켜서 그들에 대한 착취도를 훨씬 강화하고 생산성을 높이게 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다.
이 외에도 탈취한 지적 자산이나 유전정보와 같은 것도 지배계급들은 그것을 단지 보유하거나 기껏해야 로열티만 받는 것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그러한 사용가치를 (착취를 통한 잉여가치 생산을 수반하는) 생산에 투하해서 무엇인가를 독점적으로 생산해 초과이윤을 얻는 데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상품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데 쓰지 않더라도 그러한 소유권들을 연구개발에 사용할 것이다.
금융적 탈취 또한 마찬가지다. “금융자본은 가계대출을 늘려 노동자의 미래 소득 중에서 많은 부분을 이자로 가져갈 수 있다. 노동자가 사용자에게서 임금 인상을 따내지 않는 이상 이것은 사실상 임금을 삭감해 착취율을 높인 것과 같고, 이렇게 해서 늘어난 잉여가치를 금융자본이 가져간 셈이 된다.”
17 혹자는 그래도 탈취는 신자유주의에 부각된 새로운 현상이니 별도의 해결책이 필요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지배계급이 폭력적 수단을 통해서 부를 축적하는 것은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는 일이다.
이처럼 탈취는 생산의 문제, 즉 착취와 연결된다. 따라서, “이처럼 노동자에 대한 수탈을 2차적 착취로 보면, 수탈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기업의 잉여가치 창출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수탈하기 위해서는 먼저 생산돼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 때문에라도 그렇다. 결국 신자유주의 시대에 수탈이 강화됐다 하더라도 생산 현장에서 착취에 맞선 투쟁이 여전히 중요하다.”금융화, 노동유연화, 국가에 관한 하비의 견해
18 “신자유주의화는 투자를 고취하기보다는 기피하게 한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 포트폴리오 자본은 고부가가치 산업 … 뿐만 아니라, 투기적 붐에 의해서도 쉽게 유치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147쪽)
또한 하비는 탈취에 의한 축적 외에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여러 통설을 반복한다. 하비는 금융에 의한 탈취가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보편화했다면서, “모든 것들의 금융화”가 도래했다고 말한다. 그는 더 나아가 포스트 케인지언들과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널리 퍼진 금융화론의 통설을 반복한다. “제조 능력에서의 이익이 필수적으로 1인당 소득의 증가를 의미하지 않게 된 반면, 금융 서비스에의 집중은 분명 소득의 증가를 의미했다. … 메인스트리트Main Street의 생산 기업들과 월스트리트Wall Street의 금융 기업들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했을 때 후자가 선호되었다”라든지,(52쪽)19 요컨대 금융화 때문에 생산적 투자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생산적 투자가 줄어드니까 그만큼의 자금이 금융부문으로 몰린 것이다. 이 말은 여전히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수익성 지표는 가치 생산에서 얼마나 이윤이 남는지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물론 신자유주의 시대에 금융부문의 팽창과 확장, 즉 금융화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생산적 투자로 가야 할 투자가 일부 비생산적 금융 분야로 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윤율이 낮아서, 생산적 부문에 대규모 투자를 한다 해도 “이윤을 얻을 수 있을지는 더 불확실”해진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수익성이 높을 듯한 투자처”를 찾고 “단기간에 이윤을 남겨야 한다는 압박”이 크다 보니 생긴 일이다.또한 하비는 신자유주의 메커니즘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의 상품화”로 인해 (칼 폴라니가 말한 토지, 노동, 화폐 등의) “의제 상품”들이 사회에서 받던 보호를 박탈당하게 되고 그에 따라 노동력도 온전히 시장 메커니즘에 맡겨진다고 이야기한다. 그에 따라 “유연적 노동시장이 달성되고”, “상대적으로 무력화된 노동자는 단지 단기 계약이 주문식으로 제공되는 노동시장을 만나게 된다.” 특히 “노동시장의 시공간적 조정” 덕분에, “지리적 이동성을 가진 자본은 지리적 이동성이 제한된 세계적 노동력을 지배할 수 있도록 허용”되고, 이를 토대로 “일회적으로 처분할 수 있는 노동자들”이 양산된다고 주장한다.(204~205쪽)
20 이른바 불안정 고용 중 상당수는 장기적이고 상시적으로 고용돼 있다. 21 장하준도 “기계를 옮기긴 쉬워도” “숙련 노동자나” “기업에게 있는 기술적, 조직적 역량”과 같은 “핵심 역량을 국경 너머로 옮기는 것이 쉽지 않”고 “제도적 여건을 다른 나라로 이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고도의 기업활동은 자국에 남게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노동력을 완전히 불안정하게 만들어 버릴 수는 없다. 지리적 이동성이 증가하거나 노동 보호 제도가 쇠퇴하더라도 말이다. “자본에도 국적은 있다.” 22
물론 자본가들이 신자유주의 공격을 통해 노동 유연성을 늘린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 “유연화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경제 논리의 반영이라기보다는 노동자들을 겨냥한 전략의 성격이 강하다.”물론 하비는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너무나도 경시하는)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경쟁을 상당히 강조한다. 그러나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자본에게는 국적도 국경도 별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서술한다.(89쪽) 하비는 자본이 국가와 연계를 맺어서 얻는 이득을 포기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특정 국가’일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국가는 마치 자본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은 존재인 것처럼 묘사된다.
23 그럼에도 국가는 단지 자본의 세력을 ‘반영’하는 것만 아니다. 국가 또한 나름의 이해관계가 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연합에서 국가는 (아낌 없이 주는 나무 구실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자본가 계급에 다소간 구속을 가할 수도 있다. 24 국가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하비가 발전시킨 최상의 이론적 기여인 역사유물론과 지리학의 결합을 통해서 도출된 것이다.
실제로 위에서 말한 지리적 이동성의 제약 때문에, 특정 지역에 있는 특정한 자본과 특정 국가 사이의 연합은 강해질 수밖에 없다.25 이러한 관점은 확실히 자본과 국가 사이의 구조적 상호의존관계를 파악하기 힘든 관점일 것이다.
그런데 정작 하비는 왜 그 사실을 못 봤을까? 이것은 국가에 대한 하비의 개념화와도 상관이 있다. 하비는 국가가 “계급관계를 내면화한 힘의 장이 되었다”거나(28쪽) “국가 내부의 평화와 평온을 보장하기 위해 자본과 노동간 일종의 계급타협이 구축되었다”고(26쪽) 말하는데, 이 견해는 니코스 풀란차스의 국가론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신자유주의의 대안
하비는 분명히 신자유주의적 탈취로 인한 평범한 사람들의 고통을 끝내고 싶어 하고, 탈취에 맞선 투쟁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 그러나 하비가 내놓는 대안은 아쉽게도 이와 같은 그의 목적을 이루는 데 불충분하다.
우선 그의 대안은 “착근된 자유주의”의 복원, 즉 뉴딜의 귀환과 같은 것이다. 물론 그는 혁명적 가능성을 아예 부정하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는 새로운 뉴딜이 답이라고 제시한다. 이는 ‘좋은 자본주의’와 ‘나쁜 자본주의’를 구분하고 전자를 선택하겠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앞서 서술했듯, “착근된 자유주의” 시절에도 분명히 탈취는 존재했고 그때에도 권력이 노동자들에게 있던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착근된 자유주의 식의 자본주의 또한 이윤율 저하로 인한 위기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따라서 ‘좋은’ 자본주의가 재건된다고 한들, 그 체제 또한 수익성의 위기에 직면하면 구조조정과 착취율 강화를 위해 금방 눈을 돌릴 것이다. 아니면 제국주의를 통해 위기를 해소 또는 무마하려 들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하비가 제시하는 대안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국가는 단지 계급관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가 계급 편향적이기 때문에, 국가를 이용해 노동계급을 위한 개혁을 쟁취하는 것이 하비의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비의 정치에는 노동계급 중심성이 빠져 있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약점이다. 하비는 모든 종류의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을 열렬히 지지하고, 노동계급의 투쟁도 거기에 포함시킨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투쟁을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는다. 이는 탈취에 대한 하비의 강조와도 관련 있는 듯하다. 하비의 입장에서 보면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생산 못지않게 탈취에서 얻는 부가 중요해졌으므로, 굳이 가치 ’생산’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특권화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탈취에 맞서는 투쟁이라면 어떤 것이든 자본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앞서 서술했듯, 탈취가 증가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자본주의에서는 생산이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투쟁은 여전히 중요하다.
비록 그의 전략·전술에 약점이 있다 하더라도 탈취당하는 민중들의 삶을 우려하면서 그들의 운동을 고무해야 한다는 하비의 주장은 공감할 만하다. 다만 그가 걱정하는 “탈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이 “보편적 계급”의 구실을 할 수 있도록 함께 투쟁해 나가야 한다. 단지 반신자유주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명확한 반자본주의적 전망을 가지고서 말이다.
주
- Ostry & Loungani & Furceri 2016. ↩
- 하먼 2009a, p101. ↩
- 하먼 2009a, p98. 한편 하비는 《신자유주의》의 제2장에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헤게모니를 획득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분석을 시도한다. 이 부분은 현실의 계급세력관계에 대한 설명과 충분히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지 않아 이데올로기 자체의 힘에 중심에 두고 서술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다소 아쉽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다른 부분을 더 집중적으로 논하기 위해 이에 관한 논평은 생략한다. ↩
- Krugman 2009. ↩
- 장진범 2006. ↩
- 예컨대 미국의 저명한 비판적 사회학자인 사스키아 사센은 이렇게 말했다. “저자는 오늘날 핍박받는 대다수가 변두리로 추방돼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예전처럼 지배자에게 맞서 봉기를 일으킬 수도 없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특히 축출 자본주의의 ‘탄압자’는 개별의 인간뿐 아니라 네트워크, 기계 등이 결합된 복잡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축출당한 사람들이 맞설 뚜렷한 구심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심혜리 2015. ↩
- 《신제국주의》(2003)에서 하비는 ‘탈취에 의한 축적’ 개념을 마르크스의 ‘시초축적’ 개념의 연장선으로 사용해서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신자유주의》에서도 여전히 그러한 개념화가 사용되고 있다.(p194) 시초축적이란 단지 지배계급이 자산을 폭력적으로 탈취하는 것뿐 아니라 그를 통해 사람들을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해 내고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비판으로는 하먼 2009a, 김공회 2006 등을 참조하시오. 다만 2016년 6월 방한 강연회에서 데이비드 하비는 자신은 ‘탈취에 의한 축적’ 개념을 ‘시초축적’과 구분해서 사용해 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강연회에도 참석했던 필자가 보기에 적어도 《신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에서는 하비가 이 개념들을 엄밀하게 사용하지 않는다. ↩
- 이 개념이 익숙하지 않은 독자는 편의상 장기 호황기의 경제 정책인 케인스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
- 제3세계의 경우, 계급권력의 “창출”을 위해서 신자유주의가 도입되는 경우도 있다고 말한다.(132쪽) ↩
- 송종운 2014, 특히 p279를 참조하시오. 다만 송종운이 뒤메닐의 ‘관리자 계급’론을 받아들이는 것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
- 이 점은 하비가 이윤율 저하 공황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과잉생산론에 입각해서 공황론을 전개하는 것과 관련 있어 보인다. ↩
- 심지어 신자유주의의 개막식과 같은 것으로 여겨지는 폴 볼커의 금리인상도 마찬가지다. 강동훈 2011은 이렇게 지적했다. “‘미국 경제정책의 갑작스런 변화로 말미암아 1971∼80년대 동안 평균 0.8퍼센트였던 은행 대부의 실질 이자율은 1982년 11퍼센트로 급등했다.’(헬라이너 2010, p219) 그러나 이런 전환이 ‘금융자본의 쿠데타’이거나 신흥공업국들을 굴복시키려는 ‘선진국의 음모’인 것은 아니다. ‘1978∼79년 달러 위기 때 다른 나라 정부들과 민간 투자가들은 별안간 미국의 경제정책에 대외적 규율을 부과하려 했다. 이런 새로운 대외적 구속에 직면해, 미국은 정책 자율성과 금융 개방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국제금융의 압력이 부과하는 규율을 따르기로 한 결정은 후자의 선택을 반영한 것이었다.’(헬라이너 2010, p170)” ↩
- 하먼 2009b, pp70~71. ↩
- 장하준 2010, pp257~259. 장하준 2014, pp257~259. ↩
- Shaikh 2003, pp546~547. ↩
- 하먼 2009a, p110. ↩
- 강동훈 2014. ↩
- 그런데 하비가 금융화를 논하면서 “주주들의 권력은 다소 축소된다”고 이야기한 것은 흥미롭다.(p52) 일부 금융화론자들은 주주자본주의의 위험성을 주되게 경고하기 때문이다. ↩
- 하먼 2012, pp369~371. ↩
- 던 2010, p35. ↩
- 하먼 2009a, pp117~119. ↩
- 장하준 2010, pp108~109, 116~117. ↩
- 캘리니코스 2011, p140. ↩
- 캘리니코스 2011, p132. ↩
- 풀란차스의 국가론은 하비의 개혁주의적 전망과도 친화성이 있는 듯하다. 풀란차스의 국가관에 관해서는 바커 2015를 참조하시오. ↩
참고 문헌
강동훈 2011, ‘발전국가론과 한국의 산업화’, 《마르크스21》 11호.
강동훈 2014, ‘금융수탈체제론, 어떻게 볼 것인가’, 〈노동자 연대〉 139호.
김공회 2006, <데이비드 하비의 제국주의론 비판>,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3권 제1호 (통권 제5호).
던, 빌 2010, ‘세계화와 신경제라는 신화’, 《세계화와 노동계급》, 책갈피.
바커, 콜린 2015, ‘니코스 풀란차스의 정치 이론 비판’, 《자본주의 국가: 마르크스주의의 관점》, 책갈피.
심혜리 2015, ‘경제가 살아났다는 건, 누군가의 삶이 사라졌다는 것’, 〈경향신문〉.
송종운 2014, ‘”이윤율의 경제학”에서 “소득의 정치학”으로?: G. 뒤메닐과 D. 레비의 『신자유주의의 위기』를 읽고’, 《진보평론》 62호.
장진범 2006, ‘서평: 데이비드 하비, 『새로운 제국주의』 - 제국주의 개념을 둘러싼 논란의 역사’, 《사회운동》 66호.
장하준 2010,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부키.
장하준 2014,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부키.
장호종 2009, ‘경제 위기 시기 복지국가 전략의 의미와 한계’, 《마르크스 21》 4호.
하먼, 크리스 2009a, ‘신자유주의의 진정한 성격’, 《21세기 대공황과 마르크스주의》, 책갈피.
하먼, 크리스 2009b, ‘스냅사진으로 보는 자본주의의 오늘과 내일’, 《21세기 대공황과 마르크스주의》, 책갈피.
하먼, 크리스 2012, 《좀비 자본주의》, 책갈피.
하비, 데이비드 2014, 《신자유주의 : 간략한 역사》, 한울아카데미.
핼라이너, 에릭 2010, 《누가 금융세계화를 만들었나》, 후마니타스.
Jonathan D. Ostry & Prakash Loungani & Davide Furceri, 2016, ‘Neoliberalism: Oversold?’, Finance & Development Vol 53, No.2.
Krugman, Paul 2009, ’How Did the Economists Get It So Wrong?’, New York Times.
Shaikh, Anwar 2003, ‘Who Pays for the “Welfare” in the Welfare State? A Multicountry Study’, Social Researsch Vol.70 N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