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마르크스주의 계급 이론
프레카리아트는 허구적 개념 아닐까? *
이 글은 가이 스탠딩의 책 The Precariat: The New Dangerous Class(《프레카리아트 : 새로운 위험한 계급》, 박종철출판사, 2014)에 대한 서평이다. 필자인 얀 브레먼은 네덜란드 사회학자로 인도, 인도네시아 등 현대 아시아 노동계급의 고용과 노사관계, 식민주의 역사, 이주 노동, 빈곤 등에 관해 지난 50여 년 간 현장 연구를 진행했다. 각주는 모두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옮긴이와 《마르크스21》 편집팀이 삽입한 것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주류 개발이론가들은 세계의 나머지 지역이 서방이 간 길을 따를 것이라고 여겼다. “저개발국”은 산업화와 도시화를 통해 선진 경제가 19세기에 겪은 경험 — 제조업 고용 증대, 생활 수준 향상, 대량 소비 — 을 장차 비슷하게 겪을 것이라고 봤다. 토지개혁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고 그때까지는 산업 일자리가 많지 않던 동아시아, 인도, 아프리카, 남미의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든 빈농 출신자들은 도시에 사는 것이 일자리를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분간 그들은 비어 있는 땅이나 도시 변두리의 임시변통으로 만든 집에 살면서 일용직이든 자영업이든 가리지 않고 저임금 일자리에서 일했다. 급증하는 비정형 부문informal sector은 처음에는 과도적인 영역, 즉 일종의 완충지대로 여겨졌다. 산업화가 역동적으로 진행돼 공식경제가 성장해 노동인구를 흡수하면 이 영역은 사라질 것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이런 성장은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것으로 밝혀졌다. 비정형 경제를 형성하는 데 일조한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남아 있거나 도시 외곽의 슬럼과 빈곤에 빠진 시골 촌구석을 오간다. 이들은 광범한 불안정 노동자 층을 이룬다.
노동조건의 불안정성 증대라는 점에서는 이제 서방이 세계의 나머지 지역을 따라가는 듯하다. 1970년대 이후 경기가 후퇴하면서 장기간에 걸친 높은 실업률, 민영화, 공공부문 노동자 공격 때문에 북미, 유럽, 일본에서 노동자들의 지위가 약화됐다. 이 지역들에서는 공장 이전이나 자동화에 따라 제조업 노동인구가 감소했을 뿐 아니라 미조직 서비스·소매 부문의 증대로 노동조합 운동이 약화됐다. 또한 중국의 부상, 즉 저임금 노동자 수억 명이 세계 노동인구에 편입되고 무역이 세계화함에 따라 노동 조건과 임금을 악화시키려는 압력은 더욱 커졌다. 시간제 고용이나 단시간 노동의 비율이 늘고, 자영업이라는 모호한 범주의 비중도 증대했다. 선진 경제에서 비공식부문 노동과 불안정 노동에 대한 문헌들이 방대하게 늘었다. 이런 사실들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포함되지 않지만 방대한 인류가 살고 있는 나라의 노동자들의 조건과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전 세계적 경향으로 볼 수 있을까 아니면 각 나라 경제를 구체적으로 비교해 봐야 할까? 노동인구의 구체적 양상이 바뀌는 것에는 어떤 정치적 함의가 있을까? 우리는 진정 새로운 현상을 보고 있는 걸까?
1 사람들의 삶과 노동이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다. 또한 그는 수십 년 동안 국제 세미나와 학회에서 비정형 경제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처한 취약성에 대해 토론해 왔다. 그가 ILO에서 처음 발간한 출판물은 1978년에 쓴 저소득 국가의 노동인구에 관한 학술논문이었고, 그 뒤 자메이카, 가이아나, 말레이시아, 태국 등지의 노동인구를 연구했다. 1980년대 중반에 가이 스탠딩은 ILO에서 OECD 국가들의 노동시장 “유연성”에 대한 일련의 분석을 수행했다. 이 분석들에는 신자유주의라는 처방에는 비판적이었지만 자본주의 경제들이 실업과 재정 위기가 특징인 새로운 시대로 진입했다는 견해는 반영됐다. 1990년대 초에 그는 러시아로 관심을 돌려 ILO에서 《유연성을 찾아: 새로운 소비에트 노동 시장》(1991)을 편집했다. 그 뒤에는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이후의 남아공을 다룬 《노동시장의 구조조정: 남아공의 도전》(1996)을 발표했다.
1975년부터 2006년까지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일한 경제학자인 가이 스탠딩은 이런 물음들에 답하기 유리한 경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최근 저작들이 주로 서방 세계의 노동 조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는 남반구2 에 대한 장벽, 산업안전 규제, 숙련, 안정적 소득, [노동조합을 통한] 대표권 — 로 규정했는데, 이것들은 모두 새로운 시대에 들어 서서히 파괴되고 있다고 봤다. 그는 “사회적 소득”을 6가지 구성요소 — 직접 생산, 임금, 지역사회의 지원, 기업 복지, 국가의 사회보장, 개인소득과 불로소득 — 로 구분했는데, 각각은 서로 다른 집단들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전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세계화로 새로운 계급 지형, 즉 뚜렷이 구분되는 7개의 사회적 층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2002년 출판된 《새로운 후견주의를 넘어》에서 그는 “유연노동자”를 결정적인 집단으로 여겼는데, 7년 뒤 《세계화 이후의 노동》에서 그는 유연노동자라는 단어를 당시에 비교적 널리 쓰이던 “프레카리아트”라는 용어로 바꿔 불렀다. 가이 스탠딩은 1980년대 이래로 보편적 기본소득 지급이 새로운 “낙원 정치”를 위한 처방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15년 동안 그는 좀더 일반적인 책 3권을 출간했다. 《세계적 노동 유연성》(1999), 《새로운 온정주의를 넘어》(2002), 《세계화 이후의 노동》(2009)이 그것이다. 이 책들은 모두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데, 폴라니주의적 관점에서 전후 시대의 “법적 조절” 시대가 1975년 이후 “시장 조절” 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을 비판적으로 다룬다. 이 책들이 다루는 자료는 대부분 선진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것이다. 가이 스탠딩은 노동 안정성을 7가지 형태 — 충분한 취업 기회, 해고로부터의 보호, 숙련노동 희석그의 최신작 《프레카리아트》는 이런 주제들을 그가 “일반 독자”라고 부른 이들에게 반복해 주장하기 위해 쓴 책이다. 새로운 주장도 있는데, 새로운 계급인 “세계적 프레카리아트”가 지금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가이 스탠딩은 세계화의 동역학과 노동 “유연화”(그가 혐오하는 완곡어법)를 위한 정부의 총체적 노력이 맞물려 과거의 계급 분단선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오늘날 7계급 체제가 됐고 “프레카리아트”는 그 하반부에 자리잡고 있다고 본다. 그 위에는 엘리트(극소소의 엄청나게 부유한 세계 시민으로 수십억 달러의 부를 가지고 세계에 군림하며 어느 나라 정부에나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집단), “샐러리아트”(대기업과 정부 기관에 자리잡고, 안정적인 전일제 고용, 연금, 유급휴일을 만끽하는 집단), 좀더 소규모의 숙련 부문인 “프로피시언”(고수익 프리랜서 컨설턴트와 전문가들), 그리고 스탠딩이 특히 맹렬하게 비판하는 옛 노동계급의 잔재들이 있다. 프레카리아트 밑으로는 실업자와 “사회의 찌꺼기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회적으로 병든 부적응자들”인 최하층 계급이 있다.
스탠딩의 정의에 따르면, 자신이 바라는 경력이나 정체성을 쌓는 데 도움이 안 되는 불안정한 형태의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은 누구든 “프레카리아트”에 포함된다. 임시직이나 시간제 노동자, 하청 노동자, 콜센터의 피고용인, 각종 인턴들. 그들은 생계 수단을 빼앗겨 살아남으려면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고전적 프롤레타리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스탠딩은 단호하게 “프레카리아트는 ‘노동계급’이나 ‘프롤레타리아’의 일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노동계급을 특별히 좁게 규정하는데, “계약 기간이 길고, 안정되고, 노동시간이 정해진 일자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로, 승진이 보장되고, 노동조합 가입 대상이자 단체협약의 적용을 받고, 부모가 알 만한 직함을 갖고 있으며 이름이나 특징이 익숙한 국내기업에 고용되는” 사람들만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국에서 시행된 조사 결과를 보면, 예컨대 25~34세 사람 중 거의 3분의 2가 자신을 “노동계급”이라고 여기고, 특히 그들이 그렇게 여기는 이유는 일자리가 불안정하다는 것이었다. 스탠딩은 이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정체성 혼란이라고 무시해 버린다. 그는 과거에 만들어진 용어들은 그들의 고충을 표현하지 못한다고 여기는 듯하다. 반면 “프레카리아트”는 그들에게 결핍된 측면들을 묘사한다. 스탠딩은 노동 안정성의 7가지 형태를 다시 열거하며 “프레카리아트”는 그 모든 것을 갖지 못한다고 쓴다. “프레카리아트”는 “사회적 소득”을 구성하는 여섯 가지 요소 중에 임금 하나에만 거의 의존한다. 노동자라는 정체성도 없고, 연대를 기반으로 하는 노동자 단체에 대한 어떤 소속감도 없는 그들의 심리는 “분노, 부적응, 불안, 소외”에 의해 결정되기 쉽다는 것이다.
인구학적으로 보면, 이렇게 형성되고 있는 ‘계급’의 구성원들은 대단히 이질적이다. 스탠딩에 따르면, “프레카리아트”에는 여성이 불비례적으로 많은데, 불안정 임금노동에 진입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는 것이 그 “원인인지 아니면 결과인지”는 명확히 제시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남성의 경우 “프레카리아트화”가 지위 하락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청년들이 “프레카리아트”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데 종종 빚을 갚기 위해 이런 전망 없는 일자리로 내몰린다. 연금 삭감으로 프리카리아트로 재진입하는 노인들도 있다. 이민자들은 “세계 프레카리아트의 많은 부분”을 차지할 뿐 아니라, 시민이 되지 못한 “체류자”로서 “주된 속죄양이 될 위험에 처해” 있다. 스탠딩은 사회 재생산을 포함하는 광범한 범주의 인간 활동을 ‘일’work로, 임금을 얻기 위한 일은 ‘노동’labour으로 정의하고는, 불안정한 일자리를 얻으려면 장시간 “노동을 위한 일” — 통근, 대기, 양식 채우기, 응답하기, 자격증 획득 등 — 을 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알량한 수당을 새로 받거나 유지하려면 따라야 하는 전보다 훨씬 복잡해진 절차” 때문에 수당 청구자들은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 마음을 졸이게 된다.
결론에서는 이 “새로운 계급”이 정치적으로 어디로 이끌리는지를 다룬다. 스탠딩은 “나쁜 프레카리아트”는 정부가 돈을 퍼부어 은행가들을 구제하는 것을 보며 증오와 분노를 느끼고, 사회민주주의 황금기에 대한 향수에 오염돼 “포퓰리즘적 신新파시즘”에 이끌린다고 설명한다. 반면 “좋은 프레카리아트”는 젊고, 완전고용의 추억 따위에 젖어 있지 않으며 스탠딩 자신이 제시한 “낙원의 정치”와 비슷한 정치적 의제를 선호한다고 말한다. 즉, 보편적 기본소득, 평생 교육, 이주자들의 영주권, 협동조합과 일의 가치 복원을 디딤돌 삼아 다섯 가지 핵심 자산(경제적 안정, 시간, 공간, 지식, 금융 자본)에 대한 “보다 평등한 접근권”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 “위험한 계급”의 출현에 대처하는 정부의 현재 전략은 감시, 노동 연계 복지, 그리고 실업자와 이민자들을 악마화하기인데, 스탠딩이 보기에 이런 정책들은 불안정성을 더욱 심화시키고 이들이 극우의 선동에 이끌리도록 만들 가능성을 높인다. 중도 좌파는 지나치게 오랫동안 “노동”과 쇠퇴하는 생활방식에 관심을 기울여 왔는데 이제 그것들을 벗어 던져야 한다. “새로운 계급은 프레카리아트다. 전 세계 진보주의자들이 낙원의 정치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이들은 사회를 박살내자는 선동에 쉽게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들 중 많은 것들은 스탠딩의 기존 저작에서도 거듭 제기됐지만 “위험한 계급”이라는 부제가 가리키는 것처럼 이번 책[《프레카리아트》]에서 좀더 선정적 형태로 재포장됐다. 새롭고 유익한 분석을 기대한 독자들은 실망할 것이다. 사실과 수치들은 거의 없고 그나마도 서로 연관성이 떨어진다. 정보는 대부분 ILO의 방대한 자료은행이 아니라 영어권 매체인 〈뉴욕 타임스〉, 〈가디언〉, 〈이코노미스트〉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방법과 스타일 면에서 《프레카리아트》는 사설을 책 한 권 분량으로 쓴 것 같다. “프레카리아트”가 세계적 계급이라면서도 초점은 여전히 선진 경제에 확고히 맞춰져 있다. 스탠딩이 사례로 드는 것들은 대부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남한의 경험이다. 가끔 좀더 먼 곳의 이야기들, 특히 중국으로 벗어나기도 하지만 곧 자본주의 심장부로 돌아온다. 자본주의 심장부 지역의 사람들은 전후 시기의 생각 즉, 일과 삶이 점차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에 익숙했지만 지난 10년 사이, 특히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생활수준의 급격한 악화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프레카리아트”라는 용어는 어디서 왔을까? 어원학적 기원은 라틴어인 “프레카리”precari에서 온 것인데 구걸, 간청, 탄원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불안함, 타인의 호의에 의존하기, 불안정, 위험에 노출되는 것과 그런 상태가 얼마나 계속될지에 대한 불확실함 등을 뜻한다. 노동자들의 이런 불안정한 처지는 이미 19세기부터 프롤레타리아화를 뜻한다고 여겨졌다. 바로 고전적 의미에서, 생계 수단인 토지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그들의 노동precaritprcaritil precariato는 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를 합친 신조어로, 2001년 G8에 항의하는 제노아 시위 직후에 만들어졌다. 노동자주의 출신의 밀라노 활동가들이 2004년 기존 노동조합들과는 따로 연 메이데이 시위에서 임시직 노동자들을 조직할 때 구호로 채택했다. 최근 그들 중 한 명의 인터뷰가 유튜브에 올라왔는데 정작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프레카리아트는 사회적 주체인가 아니면 사회적 계층, 계급, 범주, 코호트[통계적으로 특정한 인자를 공유하는 집단], 세대 변화에 관한 개념 중 하나인가? 알 게 뭐야!”
따라서 《프레카리아트》를 평가하려면 이 책의 독창적인 주장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프레카리아트”가 새로운 세계적 계급이라는 주장 말이다. 그러나 임시직이나 시간제 계약을 맺는 사람들이 하나의 계급으로 결속될 것이고, 이들은 전일제 노동자나 조직 노동자들과 이해관계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주장은 그 근거가 허약하다는 것이 너무 명백하다. 이따금 스탠딩 자신도 그 주장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듯 보일 때가 있다. 어느 곳에서 그는 프레카리아트가 매우 다양하다고 쓰고는,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형성되고 있는 계급”이 “모두”를 포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존의 계급 용어법과 거리를 두거나 그만의 별난 새로운 정의에 매달리는 동기는 그가 “정설 노동당주의”라고 지칭한 것에 대한 그의 적대감에서 비롯한다. 그 말이 흔히 개혁주의적 노동조합주의를 뜻하는 것과 달리 스탠딩에게는 “장기 고용이 보장되는 안정적 일자리”(이미 과거지사가 된 노동조건이라고 그가 업신여기는)를 중심으로 하는 “포드주의 방식”을 뜻한다.
사실 스탠딩이 묘사한 현상들은 노동 체계나 경제를 조직하는 방식으로 여겨지는 것들이지, 사회 계급 형성과 관계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방대한 목록을 만들 수 있을 만큼 고용 형태가 다양하기 마련이다. 거의 전적으로 1945년 이후 시기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스탠딩의 서술에는 역사적 깊이가 없다. 예를 들어 마르셀 반 데어 린덴의 세계 노동 불안정성에 대한 연구는 20세기 중반의 부분적 성취조차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 보여 준다. “표준 고용계약”이라는 것은 냉전 기간 동안 서구에서 노동과 자본 사이의 세력균형이 바뀐 것의 산물이었다. 본질적으로 그것을 통해 노동자들이 자본에 고분고분하게 종속됐고, 그 대가로 노동자들과 그 가족에게 정규적 일자리와 적절한 생계비를 보장했다. 가장 부유한 자본주의 나라에서조차 육체 노동자들이 잘 갖춰진 보장 제도를 누리며 살았다는 생각은 노동계급의 실제 상태에 대한 개탄스러울 정도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자본주의를 잘 길들인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를 놓고서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지만, 고용 조건과 고용계약이 정형화되는 것이, 복지국가나 그에 준하는 제도 수립으로 이어진 다른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민주화 과정과 맞물려 일시적으로나마 선진 자본주의 지역의 노동자들의 이익이 증대된 변화였음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동 “유연성”을 향한 총력 질주가 갈수록 많은 사람의 고용 조건과 사회 보장 협약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불안정성”은 서구 노동자들이 오늘날 처한 상황을 요약한 것이다.
스탠딩은 일곱 가지 형태의 이것, 여덟 가지의 저것 하는 식으로 목록을 열거하기 좋아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인과관계는 물론이고 연대기적 순서조차 제대로 보여 주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서방에서 불안정 노동이 확장됐음을 보여 주는 사례로 열거한 요인들은 충분히 익숙한 것들이다. 새로 산업화하는 국가가 가하는 경쟁 압력, 신자유주의 정책 입안자들이 “낭비적인” 공공 지출 삭감과 노동 유연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정치적 승리를 거둔 것, 전통적으로 미조직된 단기 계약 서비스 일자리와 “3차” 부문이 확대된 것, 중국·인도와 옛 동구권 국가들이 세계 시장에 진입하면서 세계 노동인구 공급이 세 곱절이나 늘어난 것. 이런 맥락에서 선진 경제에서 비정규/불안정 노동의 확대를 향한 질주는 노동 비용을 줄이기 위한 노골적 전략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스탠딩은 이런 개괄적인 서술만 제시할 뿐 개별 국민 경제에 대한 세부적 분석의 필요성은 모조리 무시한다. 그 나라의 고유한 산업과 고용의 역사 등에 대한 비교는 불안정화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진정으로 확장시켜 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미국, 독일, 일본 등지의 선진 경제 내에서조차 제조업의 재배치는 서로 다른 속도와 형태로 이뤄졌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3차산업의 확장도 뚜렷이 구별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대처와 [미국] 레이건이 시작한 “유연성” 압력이 영국을 제외한 유럽 대륙에서 미치기까지는 적어도 10여 년이 걸렸다.
북미와 서유럽 그리고 일본의 사례를 무작위로 선택해 “프레카리아트”론을 나머지 세계 전체로 일반화하거나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이런 근시안 탓에 스탠딩의 분석은 크게 뒤틀린다. 그는 새로운 “세계적” 계급을 발견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적으로 번영한 일부 지역만을 들여다 본 것이었다. 훨씬 더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있는 세계 노동인구의 훨씬 큰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의 조건이 더 나빠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더 추락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스탠딩은 이런 빈털터리 대중을 “프레카리아트”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려면 자신의 해결책이 왜 이런 대중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지 설명해야 한다. 스탠딩은 자신의 서술에 숫자를 넣기를 수줍어하지만 불안정성이 광대하게 놓여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기는 어렵지 않다. ILO가 2013년 발표한 《국제 고용 보고》에 따르면 “취약한 노동”의 단 3퍼센트(전 세계 15억 3천9백만 명 중에 4천7백만 명)만이 미국과 유럽을 포함한 선진국에 있다. 반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2억 4천7백만 명, 동아시아에 4억 5백만 명, 남아시아에 4억 9천만 명이 있다.
스탠딩은 성인 인구의 4분의 1가량이 “프레카리아트”일 것으로 계산하지만 이것도 그의 시야가 얼마나 협소한지를 보여 준다. 인도의 노동인구 5억 명 중 90퍼센트 이상이 비정형 경제에서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다. 이곳뿐 아니라 남반구 전역에서 대부분의 성인 남녀뿐 아니라 아이와 노인도 노동력을 쥐어짜이고 있다. 생존하려면 가족 구성원이 모두 기회가 될 때마다 가계에 기여하는 게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거대한 산업예비군을 이루면서 과잉 고용이나 불완전 고용에 자주 시달린다. 게다가 이 광범한 비정형 경제들에서는 “일”, “노동자”, “노동력”이라는 용어가 뜻하는 바가 저마다 다르다. 이 거대한 불안정 인구 내에도 층위가 존재한다. 비정형성은 다계급적 현상이고, 저마다 여러 층위의 착취에 따라 구조화된다. 그 모두가 자본에 지배당하는 것은 의심할 수 없지만 그 양상은 저마다 다르다. 그들 사이에서도 층위 별로 상황에 대처하는 행동 방식과 회복력에서 차이가 난다. 어떤 계층은 다른 계층보다 적응력이 더 뛰어나다. 그들을 어떤 계급으로 규정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그들이 복합적인 노동인구라는 점만큼은 명백하다.
불안정 노동이 남반구에서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이들이 주요 제국주의 열강인 것이 우연은 아니다)에서 고용이 정형화되는 것은 19세기 말 이래로 자본과 노동 사이의 세력균형이 서서히 달라진 것을 반영한 현상이고, 프롤레타리아의 생활 조건과 노동조건이 더 나아질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그 결과, 세계 경제의 주변 지역에서는 더욱 강도 높은 착취와 억압을 낳았다. 탈식민 자본주의가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로 뻗어나갈 무렵 노동[력]은 더는 희소한 상품이 아니었고 고용주들은 이를 확보하느라 힘들게 협상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한 세기 전 서구 나라들이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을 때 벌어졌던 일과 달랐던 것이다. 식민 지배에 의해 저발전 상태에 있던 나라들의 대부분 지역에서 노동계급의 작은 부분만이 산업화로 득을 봤다. 마침내 빈곤과 종속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탈출도 오래가지 않음이 드러났다. 노동법이 기어이 도입된 곳에서도 그 실행은 가증스러울 정도였다. 실행 책임을 맡은 정부 기구들은 부여받은 권한을 이용해 “보호받는” 노동력에게 지급돼야 할 몫을 빼돌렸다. 비정형 부문에서 정형 부문으로의 이행을 통해 얻게 될 것이라고 기대를 모았던 이익은 이권을 추구하는 관료와 정치인들의 주머니로 사라져 버렸고, “비정형성”은 사회 전체에 침투해서 고용에서뿐 아니라 정부와 정치에서도 흔하게 나타났다. 교외의 배후지에 살던 영세 농민과 무토지 농민은 과잉인구를 형성하며, 그들이 더 나은 미래를 찾아 도시로 왔을 때 영구적인 저임금의 비정형 부문 노동자가 됐다. 남반구의 도시 상태에 대한 인류학적 현장조사를 하던 연구자들이 이 부문을 “발견”한 것은 1970년대 초였다. [그런데도] 20년이나 지난 뒤 국제적 정책 결정자들은 경제 성장 문제의 해법이 고용을 더 불안정하게 만들고 보호장치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부르짖었다. 1995년 세계은행의 연례 보고서는 “메인 곳 없이 유연한” 노동자를 늘리는 것이 왜 기업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이해관계에도 부합하는지를 공들여 설명했다. 유연화를 권장하면 질 좋은 고용이 더 많이 생길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 결과는 고용 없는 성장과 늘어난 자본의 이윤이었다.
요컨대, 비정형·불안정 노동은 단일하지 않고 이질적이며 전혀 일률적이고 않다. 이로부터 이끌어내야 할 정치적 교훈은, 스탠딩이 하려는 것처럼 노동인구를 다양한 부분으로 나눈 뒤 취약성의 크고 작음에 따라 서열을 매길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공통점을 강조하는 전략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서로 싸우게 할 것이 아니라, 조직 노동자들과 비정형 부문 노동자들이 동맹을 맺게 해야 한다. 세계 노동시장이 포화되고, 유급 일자리는 부족한 상황에서 산업예비군에 속한 이들이 서로 협력하는 대신, 새로운 일자리를 두고 상대방을 경쟁자로 여기는 유혹에 빠져 서로 싸우는 것이야말로 더 위험한 일이다. 계급적 동질성에 기초해 조직되지 않으면 민족이나 신분, 인종, 종교에 충성하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여기기 쉽다. 이런 비극적 결과가 인도에서 벌어진 바 있다. 아메다바드 섬유 공장이 폐쇄되고 노동자 15만 명이 쫓겨나 비정형 경제로 내몰렸다. 그 때문에 삶의 질이 악화되는 충격이 사회에 나타났고, 결국 집단학살로 이어졌다. 국가와 힌두 민족주의의 공모 하에 소수집단인 무슬림을 길거리에서 학살한 것이다. 간신히 탈출한 사람들은 다양한 이웃이 섞여 살던 지역을 떠나 게토로 피난할 수밖에 없었다. 고용의 비정형화로 사회적 관계가 갈기갈기 찢기는 일의 주된 책임은 자본에게 있지만 자본은 결코 그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 시장 근본주의와 종교적 근본주의 사이에서는 강력한 상관관계를 찾을 수 있다. 위험한 계급 내지는 멸종위기에 처한 노동 종種이라고? 그들이 위험한 계급이라면 누구에게 위험하다는 것인가? 스탠딩은 “유연화” 시도가 단지 노동[력] 비용을 줄일 뿐 아니라 노동자들이 집단적 행동에 나설 능력을 현저하게 약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무시한다. 노동계급 내 다양한 부문 사이에 인위적인 차이를 고착화하는 것으로는 이를 극복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