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
‘교차성’은 차별을 설명하는 유용한 개념인가?
요즘 서구의 페미니스트들과 일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교차성intersectionality 개념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 교차성 개념은 1990년대를 거치면서 서구 학계에서 폭넓은 지지를 얻게 됐는데, 이제 학계뿐 아니라 사회운동가들 사이에서도 이 개념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특히 2000년대에 북미와 영국 등지에서 부상한 ‘새로운 페미니즘’에서 교차성 개념이 상당히 인기가 있다.
한국에서도 이 개념을 사용하는 지식인과 사회운동 활동가 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NGA가 교차성 개념과 급진주의 페미니즘과 에코페미니즘 등 여러 페미니즘 이론을 결합해 적녹보 페러다임을 주창해 왔다. 또,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 여러 차별 반대 운동에서 일부 활동가들이 이 개념을 사용해 차별을 설명한다.
서구의 학계와 사회운동에서 교차성 개념이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이것이 하나의 체계적 이론을 뜻하는지는 논란이 많다. 상이한 이론적 전통에 서 있는 사람들이 교차성 개념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견해를 펼치는 데서 보듯, 교차성 ‘이론’을 체계적이거나 단일한 이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교차성 개념은 흔히 차별의 경험을 기술하는 차원에서 사용된다.
그러나 여러 이론가들이 교차성 개념을 사용할 때 차별을 이해하는 특징적인 접근법이 명시적이거나 은근하게 깔려 있다. 따라서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러듯이, 교차성이 단지 현상을 기술하는 용어일 뿐이라며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얼마든지 조화될 수 있는 양 취급하는 것은 위험하다.
교차성 개념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 개념이 사회에서 배제되고 차별받는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힘을 부여한다고 말한다. 다양한 차별의 경험을 기존 사회 이론들보다 더 잘 설명해 더 효과적인 차별 반대 운동을 건설할 수 있게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교차성 개념이 마르크스주의의 이론과 실천을 발전시키는 데도 유용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교차성 개념의 뿌리
교차성이라는 용어는 미국의 페미니스트이자 법학 교수인 킴벌리 크렌쇼가 흑인 여성이 겪는 차별의 특수한 경험을 드러내기 위해 1989년에 처음 사용했다. 제너럴모터스에서 정리해고된 흑인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차별금지법 위반 소송을 제기한 사건에서 크렌쇼는 법률이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별개로 다룬다고 비판했다. 그는 차별받는 사람들의 처지를 교차로에 서 있는 상황에 비유하며 교차성 용어를 사용했다.
1 즉, 교차성은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각각 분리해 별도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차별이 동시적으로 얽혀 있다고 이해하는 접근법을 뜻했다.
이처럼 교차성 개념은 흑인 여성들의 차별 경험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제시됐다. 크렌쇼는 1991년에 쓴 논문에서 당시 페미니스트와 반인종차별주의 학자들이 흔히 받아들이던 “단일축 체계”를 거부하고 교차성 용어를 사용해 “흑인 여성 … 경험의 다층적 차원을 형성하는 젠더와 인종이 서로 교차하는 다양한 방식”을 다루려 했다.교차성 개념은 처음에는 흑인 여성들이 겪는 차별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한 방식으로 나타났지만, 그 뒤 매우 다양한 차별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로 확장돼 왔다.
그런데 서로 다른 차별이 상호작용한다는 생각을 크렌쇼가 처음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에서는 이미 19세기부터 흑인 여성 활동가들이 백인 여성들과 달리 흑인이자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의 문제를 제기해 왔다. 1970년대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인종, 계급, 젠더의 다층적 억압을 “맞물리는 억압”, “동시적 억압”, “이중 구속”, “삼중 구속” 등의 말로 표현해 왔다.
흑인 페미니즘은 여러 면에서 미국 여성운동의 특성에 대한 반발을 나타냈다. 1960년대 후반 등장한 미국의 여성운동은 백인 중간계급 페미니스트들이 주도했는데, 흑인 여성들은 그들이 관심을 두는 쟁점과 그것을 다루는 방식에 거리감을 느꼈다.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운동이 인종차별이나 계급 문제를 무시하고 있고 자신들은 여성운동에서 배제돼 있다고 여겼다. 많은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백인 중간계급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모든 여성의 경험인 양 보편화한다고 비판했다.
이런 비판은 여러 면에서 타당했다. 미국 여성운동은 사회주의적 좌파와 노동계급 운동이 매우 취약한 조건에서 주로 중간계급에 기반을 둔 운동으로 등장해 상당히 협소했다. 이런 협소함은 운동의 쟁점 선택이나 쟁점을 다루는 방식에도 반영됐다. 또한 백인 중간계급 페미니스트들은 인종차별 문제를 무시하는 것을 넘어 인종차별적 태도를 취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흑인 페미니즘은 모든 여성이 동일한 경험을 하며 단일한 이해관계를 갖는다는 주장을 반박했는데,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오래전부터 그런 견해에 비판적이었다. 오래전부터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성들 모두 차별받지만 차별의 경험이 계급에 따라 상당히 다르고, 차별에 맞서는 데서 여성이 모두 동일한 이해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많은 흑인 페미니스트들이 과도한 일반화한 것과는 달리, 백인 페미니스트들이 모두 인종차별과 제국주의와 계급 문제를 무시한 것은 아니다. 1960년대 후반에 등장한 여성운동에는 반전 운동과 시민 평등권 운동에 참여하던 여성이 많이 참가했다. 당시 새롭게 부상한 미국의 여성운동에는 성차별뿐 아니라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도 반대하는 급진적 활동가들이 많았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 사회운동이 전반적으로 쇠퇴하는 가운데 여성운동은 갈수록 협소해지며 정치도 보수적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미국 여성운동의 약점을 계급 기반과 정치에서 찾지 않고 백인이라는 ‘정체성’에서 찾는 것은 옳지 않다. 사실, 흑인 페미니즘도 단일하지 않다. 흑인 페미니즘의 저작을 보면, 흑인이고 여성이라는 사실이 흔히 단일한 정치를 가능케 하는 하나의 기반으로 간주되는데(대표적으로 국내에 번역 소개된 주요 흑인 페미니즘 사상가인 패트리샤 힐 콜린스가 1990년에 낸 《흑인 페미니즘 사상》이 그렇다), 실은 그렇지 않다.
3 (컴바히 강 공동체는 흑인 레즈비언으로 이뤄졌지만 레즈비언 분리주의 전략에는 반대했다. 그들은 흑인 남성들과는 연대한다고 선언했다.) 한편, 여성운동에서 흔히 사용된 ‘의식화’ 방식은 컴바히 강 공동체를 포함한 흑인 페미니스트들도 두루 사용했다.
흑인 페미니즘이 백인 여성 주도의 여성운동에 비판적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단일한 사상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급진민족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마르크스주의 등 다양하다.) 분리주의에 대해서도 흑인 페미니즘은 단일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고 핵심 인물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예컨대 국내에 책이 여러 권 번역 소개돼 있는 벨 훅스는 1970년대의 흑인 페미니스트 그룹인 ‘컴바히 강 공동체’가 백인 여성들과 분리해 별도로 흑인 여성들을 조직한다고 한 결정을 투쟁을 포기한 반동적인 움직임으로 보고 비판했다. 훅스는 흑인 페미니스트 그룹이 백인 여성들을 적극 배제하며 특별히 흑인 여성과 관련된 쟁점에 초점을 두는 경향을 우려했다.교차성 개념의 장점과 약점
교차성 개념의 기본 사상은 여성, 인종, 섹슈얼리티, 계급, 장애 등에 따른 차별이 각각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차별이 교차하면서 일어난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차별에 대한 단순한 ‘더하기’ 방법을 극복하는 것으로 얘기된다. 즉, 사람들이 겪는 차별은 각 차별의 단순 합이 아니라 서로 다른 차별이 교차하면서 서로 강화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차별받는 사람들이 겪는 경험을 묘사하는 데는 어느 정도 유용하다. 예를 들어, 모든 여성이 성적 대상화에 시달리지만, 흑인 여성들의 성은 흔히 백인 여성들보다 더 위험한 성으로 묘사된다. 여성에 대한 편견과 흑인에 대한 편견이 동시에 작용하며 흑인 여성들의 고통을 가중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차성 개념은 이런 경험을 서술하는 수준을 넘어서면 곧 한계에 부딪힌다. 서로 다른 차별이 서로 갈마든다는 현상 묘사를 넘어 차별이 왜 일어나는지, 서로 다른 차별이 왜 교차하는지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차별의 경험을 서술하는 것은 중요하다. 생생하고 풍부한 묘사는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며 현실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차별을 예리하게 드러내는 서술은 차별받는 사람들이 스스로 투쟁하도록 자신감을 줄 수 있다. 또, 사람들이 모든 차별을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겪는 경험을 이해하도록 도와 차별에 맞서는 투쟁에 연대하는 데도 보탬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차별에 맞서 효과적으로 싸우려면, 차별의 양상뿐 아니라 차별의 근원을 꼭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차별을 없앨 수 있는 전략과 차별 없는 사회의 전망을 얘기할 수 있다.
크렌쇼의 교차로 비유는 차별의 근원을 이해하려 할 때는 방해가 되는데, 인종차별과 성 차별이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나와서 교차한다는 얘기는 차별의 뿌리가 각기 다르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실제로, 크렌쇼는 차별에 맞선 투쟁을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과 융합하려는 시도로 교차성 개념을 만들어 냈음을 밝혔다.) 이것은 모든 차별의 원천을 계급 사회에서 찾는 마르크스주의적 설명과 매우 다르다.
교차성 이론가들은 종종 계급을 얘기하지만, 계급을 그저 불평등의 한 양상으로만 이해할 뿐 자본주의의 착취적 사회관계로 이해하지 않는다. 계급은 여러 차별 중 하나이거나 또 다른 정체성쯤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계급사회에서 불평등을 착취적 사회관계와 연관해 이해하지 못하면 불평등이 어디서 비롯하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무엇보다 불평등을 끝낼 수 있는 사회 세력도 발견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자본의 경쟁적 축적이 핵심 동학이므로, 핵심적 사회관계는 자본과 노동의 계급관계이다. 임금노동을 착취해서 얻는 이윤을 축적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차별은 착취와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 연관을 맺으며 일어난다. 자본주의에서 차별은 단순히 개인들의 편견이나 욕망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착취적 사회관계와 이를 지탱하는 사회제도들에 물질적 기초를 두고 있다. 지배계급은 착취를 강화하고 자신들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차별을 체계적으로 부추긴다.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은 단지 고통받는 사람들의 일부인 것만이 아니라 지배계급 권력의 원천인 이윤을 생산하는 사람들이다. 바로 여기서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체제에 맞설 수 있는 힘이 나온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에서 계급은 단지 불평등의 원천이 아니라 무엇보다 불평등을 없앨 수 있는 힘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개념이다.
교차성 개념이 계급을 여러 ‘정체성’의 하나로 취급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도전할 수 있는 노동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차별을 뿌리 뽑을 수 있는 전략을 제시하지 못한다.
4 를 비판한 것은 맞다. 크렌쇼는 여성이나 인종 등 집단의 정체성을 동질적으로 보는 시각이 어떻게 그 집단 내부의 차이를 은폐하는지를 비판했는데, 이런 비판은 교차성 이론가들이 공유한다.
이쯤에서 교차성 개념이 정체성 정치의 약점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견해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교차성 이론가들이 정체성 정치그러나 교차성 개념이 정체성 정치와 완전히 단절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정체성을 고정된 것이 아니라 바뀌는 것으로 여기고, 하나의 정체성이 아니라 다수의 정체성이 서로 연결돼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본다는 점에서 그 전의 정체성 정치 개념과 다르다. 그렇지만 교차성 개념도 개인들의 경험을 사회의 계급구조와 체제 작동 방식 속에서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로 접근하는 정체성 정치의 이론적 틀을 따르고 있다.
크렌쇼를 비롯해 많은 교차성 이론가들이 정체성 정치의 이론적 기초를 이룬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포스트구조주의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런 사상들은 사회를 전체로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며 저항을 개별화한다.
물론 개인의 정체성을 고정불변의 것으로 여기는 기존의 정체성 정치보다 교차성 개념이 훨씬 더 유연하기 때문에 정체성 정치의 배타성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교차성 개념에 매력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기존 정체성 정치의 부정적 효과, 즉 차별의 위계를 설정하며 도덕주의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운동을 더욱 분열시키는 경향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은 교차성 개념을 환영한다. 지난 10년 간 서구에서 부상한 ‘새로운 페미니즘’에서 교차성 개념이 인기를 끈 것은 이런 맥락이다.
분명 이것은 정체성 정치가 사회운동을 지배하던 시기에 비해 진일보한 면이 있다. 흑인, 무슬림,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등은 사회운동에서도 종종 배척되는 경우가 있는데, 더 유연한 정체성 개념을 도입하는 것은 더 넓은 연대를 추구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교차성 개념이 포용적 정치라는 의미로 활동가들에게 환영받는 상황에는 2000년대에 부상한 반자본주의 운동이 낳은 이데올로기적 급진화가 반영돼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교차성 개념 역시 정체성 이론의 틀로 사회를 바라보기 때문에 정체성 정치의 약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정체성’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경험(물질적 조건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에 관한 주관적 인식이기 때문에, 정체성을 중심으로 차별을 이해하면 차별의 물질적 기초를 놓치고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 특권화된다. 그리 되면 개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적 태도가 핵심 문제로 부각되면서 차별의 책임을 체제와 지배계급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들에게 돌리며 운동을 분열시키거나 파편화시킬 수 있다.(바로 이것이 정체성 정치가 사회운동에서 득세할 때 생기는 문제였다.)
차별받는다는 경험만으로 사람들이 저절로 단결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지난해 ‘메갈리아’가 게이 비하 문제로 분열한 것을 떠올려 보라.) 차별의 경험은 때때로 사람들이 정치화되고 투쟁에 나서게 하지만, 다양한 차별은 사람들을 쉽게 분열시키기도 한다. 따라서 차별 반대 운동이 이런 분열을 극복하며 강력한 운동을 건설하려면, 차별의 근원이 어디에 있고 누가 차별에서 진정한 이득을 보는지에 관한 올바른 분석이 필요하다.
그런데 교차성 이론가들은 개인들이 여러 차별을 복합적이고 동시적으로 경험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런 분석을 회피하거나 아예 잘못된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상당수 교차성 이론가들이 정체성 정치의 파편성과 분열주의를 재현할 특권 이론을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킴벌리 크렌쇼는 “가장 특권을 누리는 집단의 구성원들이 여러 부담을 지닌 사람들을 주변화시키는 데 [자기 분석의] 초점”을 둔다. 패트리샤 힐 콜린스는 “지배의 매트릭스(그물망)”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우리 각자는 우리 삶의 틀을 구성하는 복합적 억압의 체계에서 상이한 양의 불이익과 특권을 얻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콜린스는 크렌쇼와 달리 마르크스주의에 우호적이지만, 콜린스의 권력 개념은 분명 포스트구조주의적 권력 개념을 수용한 것이다. 그는 권력을 “집단의 소유물이 아니라, 특정한 지배의 매트릭스 안에서 순환하는 무형적 실체이며 다양한 위치에서 개개인들이 맺는 관계”로 설명한다.
푸코와 버틀러 등이 발전시킨 포스트구조주의 사상은 정체성 정치를 본질주의라며 거부했지만 계급 권력이라는 생각 또한 거부했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지배”와 “권력 관계”가 곳곳에 있다고 보았고, 개인들을 모두 권력을 실행하는 주체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했다.
물론 포스트구조주의 사상이 때로는 저항을 고무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그러나 모든 곳에 권력이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저항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이론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특히, 한국에도 상당히 인기 있는 버틀러는 이스라엘에 반대해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게이 퍼레이드의 상업화에 반대하는 등 분명 급진적 면모를 보여 온 반자본주의자다.
그렇지만 포스트구조주의는 사회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고 앞에서 말한 권력 개념을 받아들여, 체제에 맞서는 전반적 저항 대신 파편화된 저항을 고무한다는 약점이 있다. 노동계급 이라는 개념도 ‘본질주의’, ‘허구적 보편성’이라며 거부하는 견해는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해 보편적 인간 해방을 이룰 수 있는 주체를 찾지 못하는 난점을 만든다.
특권 이론을 수용하면 투쟁을 제대로 벌이지 못하게 된다. 미국 등지에서 아주 인기 있는 특권 이론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된다. 사람들은 모두 지배의 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개인들이 자신들이 지녔을지 모르는 특권을 ‘점검’하는 것이 된다.
이런 시각은 차별에 대한 도전을 개인의 자기 성찰로 환원해 투쟁을 회피하며 교육 등으로 해결하려는 온건한 개혁주의적 접근법을 강화하거나, 투쟁을 파편화시킬 위험이 크다. 특권 이론이나 개인적 정체성을 결정적 요인으로 여기는 이론은 모두 결국 노동계급의 분열과 파편화를 부추기게 된다. 이것은 노동계급의 해방뿐 아니라 노동계급이 아닌 차별받는 대중의 해방도 가로막는다. 역사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약화됐을 때 지배계급의 공격으로 여성, 유색인, 성소수자 등 차별받는 다수의 삶도 악화됐음을 보여 준다.
마르크스주의와 교차성 개념은 조화될 수 있는가?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교차성 개념이 차별을 더욱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유용하므로 교차성 개념을 마르크스주의적 논의를 확장하는 데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사회주의자 섀런 스미스가 지난해 출판한 책에서 흑인 페미니즘을 다루면서 이런 주장을 했다. 스미스는 교차성이 차별의 원인을 설명하는 이론이 아니라 차별의 경험을 묘사하는 개념일 뿐이라며 교차성 개념을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통합하려 한다. 그러나 앞서 봤듯이, 교차성 개념은 차별의 근원을 설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와 충돌하는 방법에 바탕을 두고 있다. 특히, 교차성 개념은 자본주의 체제 변혁에서 노동계급의 핵심적 구실을 부정해 계급투쟁적 해방 전략을 반대하는 데 이용되기 쉽다.(실제로, 전지윤이 지난해 교차성 등의 논리로 노동자연대가 주장하는 여성해방 이론을 공격했을 때 그랬다.)
흔한 오해와 달리, 사회 변혁에서 노동계급의 전략적 중요성을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차별을 노동계급만이 겪는 것으로 보거나 경제적 착취 문제로 환원하지 않는다. 이 점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드러난다. 자본주의를 전복해 착취와 차별 모두를 끝장낼 수 있는 혁명적 투쟁을 벌일 잠재력이 있는 핵심 세력이 노동계급이라는 주장과 그에 부정적인 이론적 개념을 절충하는 것은 기회주의적인 것이다. 유행하는 사상에 맞춰 전략적 강조점을 흐리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새로운 세대의 활동가들과 연관 맺는 효과적 방식이 아니라 운동의 꽁무니를 좇는 것일 뿐이다.
스탈린주의나 기계적 유물론의 유산 때문에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오해가 상당히 널리 퍼져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편견을 가진 사람들과도 개방적으로 대화해야 한다. 그러나 핵심적 주장을 얼버무리는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 불필요한 이론적 후퇴는 마르크스주의와 차별 반대 운동 모두의 발전에 해롭다.
주
- Crenshaw 1991. ↩
- 1960년대 후반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에 반발하며 등장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초기에는 급진적 성격을 띠었으나 갈수록 개인들의 관계에 관심을 집중하며 분리주의를 강하게 발전시켰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노동계급 운동에 뿌리가 없었고 1970년대 중반 지배계급이 사회운동 전반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자 갈수록 우경화했다. ↩
- Hooks 1982, pp150~151. ↩
- 1980~1990년대 서구 페미니즘에서는 배타적인 정체성 정치가 지배했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에 정체성 정치가 득세했다. 정체성 정치란 여러 차별받는 집단들이 자신들의 특수한 정체성에 근거해 투쟁할 것을 주장하는 전략을 뜻한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이나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이 단일한 속성에 근거한 정체성을 공유한다고 간주한다. 정체성 정치는 차별받는 사람들이 차별에 맞서 저항에 나서는 자연스러운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개인들이 겪는 차별의 주관적 경험을 핵심 문제로 격상시키기 때문에 그 논리 안에는 파편화와 도덕주의적 분리를 촉진할 위험이 있다. 이것은 사회운동이 특정한 정체성으로 파편화되고 때때로 운동 내에서 누가 더 차별받는가 하는 도덕주의적 논리로 운동의 분열을 더욱 촉진할 수 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사회운동이 퇴조하고 1980년대 들어 레이건의 집권으로 정치·이데올로기 지형이 우경화한 미국에서 극단적인 분열주의 양상이 많이 나타났다. ↩
- 개인들의 차별적 태도는 당연히 도전받아야 하지만, 집단적 투쟁을 벌이면서 토론과 논쟁을 통해 후진적 생각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의 태도 변화를 투쟁 참가의 선결 조건처럼 여기는 관점은 문제가 있다. ↩
- 콜린스 2009, p447. ↩
- 새 책은 여러 장점이 있지만 과거 스미스가 내 놓은 분석과 비교해 보면, 이론적 후퇴가 뚜렷하다. 교차성과 관련해서는 흑인 페미니즘에 무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게 두드러진다(포스트구조주의에는 비판적이지만 말이다). 이런 태도는 위험하다. 흑인 페미니즘이 기존 자유주의 페미니즘이나 급진주의 페미니즘보다 한결 낫긴 해도, 마르크스주의적 분석과는 상당히 다르고 전략 문제에서는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
- 《진보평론》 65호(2015.9)에 실린 전지윤과 내 글을 참조하시오. ↩
참고 문헌
오어, 주디스 2016,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 책갈피.
콜린스, 패트리샤 힐 2009, 《흑인 페미니즘 사상》, 여성문화이론연구소.
Choonara, Esme & Prasad, Yuri 2014, ‘What’s wrong with privilege theory?’, International socialism 142.
Crenshaw, Kimberlé 1991, ‘Mapping the Margins: Intersectionality, Identity Politics and Violence Against Women of Color’, Stanford Law Review Volume 43 (July).
Hooks, Bell 1982, Ain’t I A Woman: Black Women and Feminism, Pluto Press.
Smith, Sharon 2015, Women and Socialism: Class, Race, and Capital, Haymarket Boo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