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와 오늘날의 페미니즘 *
오늘날 ‘페미니즘의 국제적 부흥’이라 할 만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서구에서는 1990년대 말부터 ‘새로운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책들이 새롭게 출판됐고, 2000년대 중반부터 대학 캠퍼스에서 페미니즘 동아리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성폭력이 여성의 옷차림 탓이라는 캐나다 한 경찰관의 발언에 항의해 유럽 곳곳으로 퍼져나간 ‘슬럿워크’ 운동처럼 성차별에 대한 항의와 분노가 성장해 왔다.
페미니즘의 새로운 부흥
한국에서도 지난해부터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눈에 띄게 늘었고, 올해 그 열기가 더해가고 있다. 지난해부터 페미니즘 서적 출판과 판매가 급증했고, 특히 20~30대 여성들 사이에서 폭발적 관심을 받았다. 여성단체들에 대한 후원이 늘어나고, 대학 캠퍼스에서 페미니즘 동아리들이 새롭게 생겨나고, 페미니즘 온라인 커뮤니티들도 활기를 띠고 있다.
1 그래서 더는 차별적 처우를 용납하고 싶어하지 않는 여성들이 늘어났다.
오늘날 페미니즘이 새롭게 부흥하는 이유는 평등에 대한 드높은 기대와 여전한 차별 사이의 큰 간극에 있다. 드높은 기대의 배경에는 오늘날 여성들이 처한 물질적 조건의 변화가 있다. 한국 자본주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진출해 있고, 이미 7년 전부터 여성들의 대학진학률이 남성을 앞질렀으며, 안전한 피임법과 임신중절(낙태) 수술의 대중화로 여성들이 성을 즐기면서도 자신의 출산을 통제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됐다.2 대중문화와 대중매체에서 여성 신체에 대한 광범한 비하도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이것이 마치 여성의 자신감의 표현이자 성에 대한 개방적 태도인 양 포장되고 있다는 점이 더 문제다. 요즘 인기 있는 책 《나쁜 페미니스트》(사이행성, 2016)의 저자 록산 게이 3 는 “모든 팝음악에는 여성 비하적 가사가 등장하는데 제길, 하필 그런 노래가 너무나 중독성 있어서 나도 모르게 내 존재를 깎아내리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고 한탄한다.
그러나 이런 여성들의 기대와 자의식 성장에 비해, 차별은 놀랍도록 개선되지 않은 채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 이것을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분노스러운 통계가 2000년대 이래로 좁혀지지 않는 남녀 임금격차다. 여성 임금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은 여전히 남성의 60퍼센트가량밖에 안 된다.이런 상황에서 ‘일베’ 같은 일부 온라인 우익이 주도한 ‘역차별’론은 여성 차별의 현실을 호도해 여성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성차별은 과거지사’이고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이 더는 필요 없다’는 주장에 우리는 반대해야 마땅하다.
4 페미니즘은 여성 차별에 대한 기초적 거부를 나타내며,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와 동일한 출발선이다.
오늘날 성차별에 반대하고 차별적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여긴다. “많은 새로운 활동가들에게 페미니즘이라는 사상은 성차별에 대항하고 성 평등을 지지하는 최초의 자연스러운 정치적 표현”이 되고 있다.그런데 페미니즘은 첫 탄생 때부터 하나인 적이 없었으며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페미니즘이라고 불리는 경향 안에서는 기반과 이론 체계와 지향이 상이한 여러 페미니즘들이 경합해 왔다. 오늘날에도 성매매와 포르노 등 성 상품화를 둘러싼 태도,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국가를 대하는 태도, 계급에 대한 태도, 이슬람주의와 인종차별 문제, 트렌스젠더에 대한 태도 등 매우 다양한 쟁점들을 둘러싸고 페미니스트들이 상이한 경향으로 분화돼 첨예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런 점에서 ‘2016년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이하 조직위원회)가 자신들 고유의 페미니즘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노동자연대를 퀴어퍼레이드 부스 행사에서 배제한 것은 특정 페미니즘을 도그마로 만드는 일이자 연대를 약화시킬 수 있는 부적절한 결정이었다. 특히, 미국 대사에는 부스와 연단을 제공한 것과 대조하면 더욱 부적절했다. 미국은 다들 알다시피 한반도의 피억압 대중에게 질곡의 역사를 강요한 세계 최대 제국주의 국가다. 이 점을 보면, 조직위원회는 성소수자 해방운동의 일부인 노동자연대와 같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 계급을 가로지르는 동맹을 더 중시한 듯하다. 페미니즘이 하나가 아니라는 점에 동의하는 활동가들, 특히 계급 문제를 중시하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이나 사회주의 페미니즘 경향의 활동가들은 조직위원회의 결정에 반대를 표명하는 것이 성소수자 운동의 발전에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이처럼 페미니즘은 복수명사이고, 마르크스주의는 성차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차별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과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와 여러 페미니즘들 사이에는 여성 차별의 원인과 해방의 전략을 둘러싸고 차이점도 있다.
개혁주의 페미니즘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페미니즘 경향은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 소속 여성단체들로 대표되는 개혁주의 페미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에서 페미니즘의 두 주요한 물결(제1물결과 제2물결)이 모두 사회를 뒤흔든 거대한 혁명(프랑스혁명 등 부르주아 혁명)과 반란(1968반란과 흑인 시민 평등권 운동) 속에서 잉태됐듯, 한국에서도 1987년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속에서 여성운동의 물결이 탄생했다.(1970년대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벌어진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 물결의 씨앗이 됐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의 주요 진보 여성단체들이 탄생했다.
당시에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강력함을 보여 줬기 때문에 사회변혁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사회의 총체적 변화가 가능하다는 자신감이 높았다. 그래서 대다수 여성운동가들도 (비록 단계혁명 전략이긴 했으나) 사회 전체의 변혁이라는 과제와 자신의 과제를 일치시키는 성향이 강했다. 가령 1988년에 열린 여성의전화 창립 5주년 기념토론회 참석자들은 “ 성폭력 해결을 위해 남성을 적으로 삼아 싸워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여성 억압의 근본적 모순 구조, 한국 사회의 제반 모순 구조에 대한 인식 속에서 그것의 변화를 위해 여성을 의식화, 조직화해야 한다” 하고 강조했다.
5 이와 더불어, 군사독재정권이 무너지고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이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완성됐다’는 인식 하에 자본주의 국가기구에 개입해 법·제도적 개선을 통한 개혁을 이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생겨났다. 개혁주의가 체계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1989~1991년 소련과 동유럽 공산당 정권들의 몰락은 이 정권들을 진정한 사회주의로 잘못 여기고 있던 당시 사회변혁 활동가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이제 이념적 지향을 잃어버린 활동가들은 대부분 사회주의적 전망 자체를 폐기했다.이런 주요 여성단체들의 ‘주류화’는 김대중·노무현 두 민주당 정부가 집권하자 한층 더 강화됐다. 이제 주요 여성단체들은 정부와의 ‘거버넌스’(협치)를 우선순위에 놓게 됐고, 진보적 여성단체 리더들이 정부에 입각하거나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는 것이 평등을 이루기 위한 주된 수단으로 자리잡았다.
개혁주의 페미니즘은 중요한 법·제도 개선을 이뤄내는 데 기여했다. 호주제 폐지, 남녀고용평등법 제정과 개정, 성폭력특별법 제정과 개정 등은 성차별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개선하고 여성들의 삶을 일부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 이런 개혁들은 여성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과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투쟁할 때 법적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경제 위기 속에서 자본가들은 그동안 여성운동이 쌓아 온 성과조차 공격했다. 개혁주의 페미니즘은 자본주의의 물질적 토대에 도전하려 하지 않는 데다가, 특히 김대중·노무현 두 민주당 정부에 맞선 효과적 도전을 건설하지 못했기에 여성 대중의 조건 후퇴에 잘 대응할 수 없었다. KTX 여승무원 노동자들이 최초의 여성 총리 한명숙에게 사태 해결을 호소하러 갔다가 경찰에 전원 연행된 일은 당시 주류 페미니즘의 딜레마를 단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다. 이런 상황에서 2000년대 동안 여성 비정규직이 증가하고, 그 전까지 계속 좁혀지던 남녀 임금격차 해소는 정체됐으며, 보육서비스는 시장화된 방식으로 늘어나고, 출산과 육아에 따른 불이익을 일생 받아야 하는 여성 대중의 처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법·제도 개선과 여성 대중의 실제 삶의 개선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생기게 됐다.
물론, 여전히 법·제도 개선조차 부족할 뿐 아니라, 주류 진보 여성단체들이 성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데서 때때로 주도적 구실을 하기 때문에 개혁주의 페미니즘의 영향력은 여전히 크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성차별에 반대하는 몇몇 쟁점들을 둘러싸고 개혁주의 페미니즘 단체들과 함께 활동하면서도 개혁주의 페미니즘의 지난 역사를 돌아보며 그 공과功過 모두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의 새로운 지지자들
한편, 최근에 새롭게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는 새로운 층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에 대한 여전한 폄하와 무시, 광범한 성적 비하에 대한 높은 반감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이 새 세대 페미니즘 지지층은 이전 세대 여성들보다 상대적으로 집안에서 평등하게 자라났지만 사회에 나가면 여전히 차별이 난무한 현실을 맞닥뜨리며 분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다소 무정형이고, 하나로만 묶이지 않는 다양한 모색을 하고 있는 듯하다. 가령, ‘메갈리아’의 경우를 보더라도, 성소수자나 장애인 비하 발언을 둘러싸고 금세 분열이 벌어졌고, 지금은 ‘미러링’ 방식의 유효성을 두고도 의견이 갈린다. 또한, 메갈리아는 주류 페미니즘 단체들을 기꺼이 후원하고 단발적 프로젝트를 같이 할 의향도 있지만, 그들과 똑같은 방식과 목표로 활동하려고 하지는 않는 듯하다. 가령 법·제도 개혁이든 아래로부터의 투쟁이든 전략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운동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것이 체계적 조직 없이는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데, 메갈리아는 운동의 전략적 목표나 체계적 조직의 필요성에 별로 관심을 두지는 않는 듯하다. 이것은 이 운동의 개인주의적 특징과 관련 있는 듯하다.(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다루겠다.)
오늘날 새 세대 페미니즘에는 여러 요소들이 혼재돼 있고 유동적이어서 일반화하기가 어렵지만, 그럼에도 최근 강남역 살인 사건을 둘러싼 논란, 인기 있는 페미니즘 서적들, 페미니즘 커뮤니티의 인기 글 등을 살펴보면 정치적으로 공통된 특징은 있는 듯하다. 지금부터는 이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살펴보겠다.
분리주의적 정치에 대한 정서적 친화성
우선, 만연한 여성 차별에 대한 즉각적 반감 때문에 여성 차별의 책임을 남성들에게 돌리는 주장이 오늘날 젊은 페미니스트들의 정서적 공감을 받고 있다. ‘여성 차별의 원인이 남성 권력인가’ 하는 문제는 페미니즘의 고전적 쟁점일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영향력 있는 주장이므로 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강남역 살인 사건을 둘러싼 논란에서 상당수 페미니스트(와 좌파)는 공공연히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 또는 “공범”이라고 주장했고, 심지어 정희진 씨는 “잠재적”이라는 수식어조차 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페미니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남성은 모두 “남성 젠더에 내재된 가해성”이 있어서 설사 아직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잠재적 가해자라는 주장이 인기 글이다. 메갈리아에서 분화된 극단적 분리주의 성향의 페미니스트들은 이 사회에서 명백히 차별받는 집단인 남성 동성애자들까지 비하했고, 그들이 만든 온라인 커뮤니티(워마드)에 가입하려면 “모든 한국 남성들은 범죄자다”라는 문구에 동의해야만 한다. 이런 주장들은 모든 남성이 여성 차별에 책임이 있고, 거기서 모종의 크고 작은 특권을 누린다고 전제한다.
젊은 여성들은 자신들이 쉽게 자주 접하는 온라인 환경에서 여성 비하적 발언이 난무하는 현상을 경험하며 모욕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일을 겪으면서 남성이 성차별의 원인이자 해결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우선, 남성은 같은 이해관계나 연대 의식을 공유하는 동질적 집단이 아니다. 여성이 하나가 아니고 계급, 인종, 성지향 등에 따라 다르다는 주장은 오늘날 페미니즘 진영에서 널리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들조차도 남성만큼은 동질적이라고 전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여성이 그렇듯 남성도 하나가 아니다. 대다수 남성이 여성차별 관념을 가지고 있을지언정(상당수 여성들도 이런 관념을 공유한다) 폭력·살인을 저지르진 않을 뿐 아니라, 여성차별 관념을 수용하는 정도도 매우 불균등하다.
‘여성 혐오 사회’ 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베’ 따위가 한국 남성들의 인식과 삶의 태도를 대변하는 것처럼 가정하고,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도 오히려 남성들의 퇴행적 의식은 강화될 뿐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얼마 전 한 대학에서 ‘일베’ 형상의 조각상 퇴출 여론이 남녀를 막론하고 지배적이었던 것만 보더라도 ‘일베’가 대다수 남성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설사 ‘일베’ 지지자라 해도 온라인 익명 게시판에서 여성 비하적 발언을 끄적이는 것을 넘어 현실 세계에서 여성을 비하하는 언행을 하고 더 나아가 폭력이나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은 극소수다. ‘일베’에서 일부 사람들이 익명으로 반동적 글을 배설하는 것은 여성들의 부아를 치밀게 하지만, 그들의 배설 행위는 현실에서 그들이 가진 권력의 반영이 아니라 소외의 일그러진 표현인 경우가 많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는 것은 남성들의 성차별 의식이 약화되는 조건으로 작용할 수 있다. 가령 올해 4월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인의 생활시간 변화상’을 보면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여전히 남성보다 훨씬 더 길지만, 그 가운데서도 변화는 있었다. 여성이 임금노동에 참여하며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평일과 주말 모두에서 줄어들고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늘어났다. 특히, 남성이 직장에 가지 않는 주말에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눈에 띄게 늘어났고 그만큼 여성의 주말 가사노동 시간이 줄어들었다. 여성 안에서도 취업 여부와 미취학 자녀 유무에 따라 가사노동 시간은 큰 차이가 있었다. 전통적 역할(‘남자는 일, 여자는 가정’)에 대한 반대 의견은 남녀 모두에서 확연히 늘었다.
무엇보다 남성들 사이에는 엄청난 계급 격차가 존재한다. 자본가·국가관료 남성 노동계급 남성의 삶은 하늘과 땅 차이이고, 그들이 모두 ‘남성 권력’이라고 부를 만한 권력을 똑같이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본가 계급 남성은 남녀 노동자들의 생사를 쥐고 흔들 실질적 권력이 있지만, 노동계급 남성은 사회의 모든 중요한 결정권과 통제력에서 소외돼 있다.
많은 사람들은 남성들 내의 계급 격차에도 불구하고 남성 노동자들도 여성 차별에서 득을 보지 않느냐고 반론할 수 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차별에서 진정으로 막대한 득을 보는 것은 노동계급 남성이 아니라 자본가 계급과 자본주의 국가다. 이런 주장은 노동계급 내 불평등이 없다거나 남녀 불평등을 방치하자는 주장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육아의 무거운 짐이 여전히 여성의 어깨 위에 놓여 있고, 심지어 맞벌이일 때조차도 그렇고, 이것이 여성 삶의 모든 부분에 차별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실에 누구보다 반대한다. 따라서 진정한 쟁점은 차별이 진정 누구에게 득이고, 차별에 맞서 싸울 이해관계는 또 누구에게 있느냐는 점이다.
겉보기로 볼 때, 남성이 여성 차별에서 이득을 얻는다는 말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말했듯 “만약 사물의 현상과 본질이 같다면 과학이 더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가사와 육아의 불평등한 분담을 보면, 남성 노동자가 약간 득을 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가족 내에서 여성과 남성 개인들 사이의 관계만이 아니라, 우리의 눈을 들어 자본주의 체제 전체의 구조와 작동 방식 속에서 가족이 하는 구실과 가족 안에서 구성원 개인들이 하는 구실이 무엇인지를 보자고 제안한다. 그래야 진정한 수혜자가 누구인지가 비로소 드러난다.
자본가 계급과 자본주의 국가의 눈으로 볼 때 적절한 교육받고 건강한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것(노동력 재생산)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이들은 그 부담은 최소화하려 한다. 그래서 개별 노동자 가족, 특히 여성에게 노동력 재생산의 주된 부담을 전가해 왔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이 하는 주된 구실이 노동력 재생산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노동계급 가족 내에서 여성이 무보수로 하는 육아는 남성 노동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가 계급을 위한 것이다. 노동력 재생산의 주된 부담이 개별 가족에게 전가된 상황에서는 여성 노동자가 가사와 육아로 고통받는 다른 한편에서 남성 노동자들은 주된 생계 부양자로서 책임 때문에 흔히 여성 노동자보다 더 장시간 일하고 직장을 더 멀리 다니는 고통을 감수하도록 내몰린다. 그래서 많은 남성 노동자들이 인기 텔레비전 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나오는 아버지들처럼 자기 아이들과 함께 오붓한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지만, 그것은 그림의 떡인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 체제는 노동계급의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파괴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가사노동의 평등한 분담을 지지한다. 하지만 개인 관계와 개인적인 해결책에만 주목한다면 한계가 크다. 더 확실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육아와 가사의 사회화라는 대안이다. 이 대안을 추구하는 데서 여성과 남성 노동계급은 이해관계를 전혀 달리하지 않는다. 이 대안의 실현은 자본주의 체제의 이윤 논리에 강력히 도전해야 가능한 것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는 남녀 노동계급의 투쟁이 반드시 필요하다. 즉, 남 대 여의 투쟁이 아니라 노동계급 대 자본가계급의 투쟁이 필요한 것이다.
6 이는 (비록 임금격차가 여전히 존재할지라도) 임금을 둘러싼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적어도 상충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준다. 오히려 남성 노동자들은 자신의 아내나 딸들이 비정규직과 저임금으로 고통받으면 가족의 전체 생계비가 떨어져 더 큰 압박을 받는다. 노동계급 가족의 구성원들은 서로의 몫이 줄길 바라는 적대적 이해관계가 아닌 것이다.
이제 노동시장에서의 차별을 살펴 보자. 여성의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은 남녀 자본가에게는 분명 이득을 안겨 준다. 하지만 남성 노동자들이 그로부터 득을 보는지는 의심스럽다. 1998~2008년 한국 남녀 임금노동자의 임금 추이를 실증적으로 조사해 보면, 동반 등락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물론 자본주의 노동시장의 경쟁과 지배계급의 이간질 때문에 일부 노동자는 차별을 방치함으로써 잠시 득을 볼 수 있다. 최근의 사례를 하나만 들자면, 철도공사에서 도입된 신입사원 성과연봉제가 있다. 정부는 철도 노동자들이 잘 조직돼 있어 한꺼번에 성과연봉제를 도입하면 큰 반발에 직면할 거라는 점을 알고, 그 대신 아직 힘이 없는 신입 사원들을 대상으로 먼저 성과연봉제를 도입했다. 기존에 입사한 노동자의 소수는 당장 자기에게 닥친 일이 아니므로 만만찮게 투쟁해야 할 필요를 강하게 느끼지 않았을 수 있다.(물론, 철도노조의 경험 많은 노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성과연봉제가 야금야금 도입되는 것을 방치하면, 나중에는 사측이 전체 노동자를 대상으로 도입하는 것이 더 쉬워질 것이다. 신입사원들과 기존 입사자들이 서로 소원해질 수도 있고, 노조의 투쟁력이 약화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노동운동에서 여럿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계급 분열은 언제나 노동자들 전체에게 해롭다. 남성 노동자 개개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상관없이 그렇다. 객관적 계급 이익으로 볼 때,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 차별에 반대하는 게 이득인 것이다.
특권 이론
한편, 오늘날의 페미니즘에서 유행하는 특권이론은 여성으로서 받는 차별 경험을 남성들은 겪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남성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일련의 특권이라고 주장한다. 사실상 남성으로 태어난 것 자체로 특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남성들이 자기가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인식하지 않는 것 자체가 “차별의 엔진”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특정 차별의 경험을 공유하지 않는다고 해서 곧 그 차별을 유지하는 것에 이해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여성 차별로부터 진정한 수혜를 얻는 것은 자본가 계급이고, 이 때문에 여성 차별적 제도와 사회 구조, 이데올로기를 체계적으로 유지할 이해관계가 있는 것도 자본가 계급이다.
특권 이론은 실천적 결론에서도 난점이 있다. 특권 이론에 따르면, 결국 남성들이 해야 할 일은 자신의 “특권” 목록을 점검해 자신이 여성보다 나은 처지에 있음을 반성하며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남성이 여성 차별에 공감한다는 면에서, ‘요즘 세상에 웬 여성 차별?’이라는 ‘일베’식의 반동적 태도보다는 낫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여성 차별 반대 투쟁에 미치는 효과를 보면, 심각한 문제가 있다. 결국 남성 노동자들은 존재 자체로 여성 차별에 책임이 있고, 그 책임을 조금이라도 면하려면 ‘특권’을 억눌러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남성 노동자들이 누리는 임금, 사내 복지, 일자리, 노동조건 등을 악화시키는 방식으로 격차를 해소하는 게 아니라, 여성과 남성 노동자 모두가 더 나은 삶과 노동 조건을 누리기 위해서 투쟁해야 한다. 즉, 하향평준화가 아니라 상향평준화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특권 이론은 결국 여성 차별을 체계적으로 유지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과녁을 겨누는 것이 아니라, 남성 개개인에게 과녁을 맞추게 된다. 그만큼 체제의 책임은 흐려지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남성 노동자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자신이 여성보다 특권을 얼마나 더 누리고 있는지를 반성하는 것이지, 같은 이해관계에 기초해 여성과 함께 싸우는 것이 아니게 된다. 결국 특권 이론은 그 취지와 정반대로 지배자들이 부추기는 보수적 인식, 즉 ‘남성 노동자는 여성 차별에서 특혜를 누리니까 차별에 동참하거나 차별을 방치하는 것이 남성 노동자의 이익에 맞다’는 허위 의식에 도전하기 어렵게 된다.
특권 이론은 결국 남성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행위를 하도록 스스로 억누를 수 있는 절제력과 자비심에 여성 해방이 달려 있다고 보는 셈이다. 그래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남성들의 특권을 깨우쳐 주기 위해 설득하거나, 이런 주장에 의문을 가진 사람들에게 야단치는 데 큰 관심을 가진다. 물론, 남성들이 성차별적 언행을 한다면 도전해야 한다. 또, 설득도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설득의 방향이다. 남성 노동자들에게 자기 이해관계와 충돌할지라도 여성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 노동자들이 자기 계급이익을 잘 지키기 위해서라도 여성 차별에 맞서 투쟁하는 게 이득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교차성 개념
7 교차성 개념은 미국의 흑인 페미니즘에 기원이 있고 오늘날 서구 페미니즘에서 널리 수용되는 개념인데, 한국에서도 핵심 취지에 공감하는 페미니스트가 많다.
오늘날 페미니즘에서 각광받는 또 다른 개념은 교차성intersectionality 개념이다.교차성 개념은 사람들이 상이한 여러 억압의 영향을 중첩적으로 받는 현상을 묘사하는 개념이다. 이는 다양한 억압의 구체적 경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여성, 이민자, 성소수자, 탈북자 등이 겪는 억압의 경험은 각각 다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이런 경험들을 섬세하게 고려하며 그들이 직면한 억압의 실상이 무엇인지 이해하려 애써야 한다. 교차성 개념의 기원이 된 흑인 페미니즘 이론가들은 기존의 미국 주류 페미니즘이 백인 중간계급 여성 중심적이고 흑인 여성의 경험을 무시한다고 비판했다. 이것은 일리 있는 통찰이다.
최근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페미니즘 서적 중 하나인 《나쁜 페미니스트》는 교차성 개념을 잘 나타내고 있다. 페미니즘 입문서로 꾸준히 많이 팔리는 책인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도 교차성 개념에 친화적인 부분이 있다. 여성은 하나가 아니고, 그 내에 복합적인 차별을 받는 다양한 집단들이 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그러나 정희진은 또 다른 글에서는 분리주의 페미니즘에 입각한 주장을 한다. 그래서 일관되지 않고 모순이 심하다.)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NGA가 주장하는 적녹보 연대(마르크스주의-생태주의-페미니즘의 연대)도 교차성 개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1970년대 서구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정체성 정치는 자신이 겪는 차별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에 따라 차별에 대해 말할 자격이 생긴다고 여길 정도로 파편화 성향이 강했다. 이것은 차별에 맞서는 운동을 차별의 종류만큼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오늘날 서구에서 교차성 개념을 지지하는 그룹들은 다양한 차별의 경험을 존중하고, 차별받는 사람들 사이의 연대를 비교적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여성의 경험을 성별 하나로만 환원하려는, 파편화된 정체성 정치보다는 분명 진일보한 것이다.
그러나 교차성 개념은 약점도 있다. 교차성은 복합적 차별의 경험을 묘사하거나, 여성이 경험과 요구가 동일한 단일 범주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는 유용할 수 있다. 그러나 차별의 근원을 분석하나 차별에 도전할 방법을 모색하는 데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교차성 개념은 차별이 서로 다른 별개의 근원들에서 나와 마치 교차로에서 만나듯이 한 개인 안에서 교차한다고 본다. 흑인 페미니스트인 패트리샤 힐 콜린스는 “지배의 그물망”이라는 용어로 교차성 개념을 설명했다. “우리 각자는 우리 삶의 틀을 구성하는 복합적 억압의 체계에서 상이한 양의 불이익과 특권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차성 개념과 특권 이론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주장은 결국 차별의 근원, 즉 차별의 물질적 토대를 설명할 수 없는 약점이 있다. 대신 차별에 대한 개인들의 태도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개인 관계나 차별의 경험은 차별의 산물이지 원인이 아니다. 차별의 출처는 하나다. 바로 계급 사회, 자본주의다.
교차성 개념은 계급을 단지 다양한 차별의 하나로 취급한다. 그러나 계급은 그저 n분의 1을 차지하는 여러 차별의 하나가 아니다. 차별은 계급을 가로질러 나타나지만, 계급에 따라 차별의 정도는 천양지차이고, 무엇보다 계급이 차별의 근원이라는 점 때문에 차별에 맞서 싸우려면 계급 문제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
무엇보다 계급은 차별에 맞설 능력을 나타낸다는 점이 중요하다. 노동계급은 독특한 피착취 집단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노동계급에 주목하는 것은 그들이 가장 불쌍하거나 의식이 가장 높아서가 아니다. 노동자는 자신의 생존을 자본가에게 의존하지만, 자본가도 이윤 생산을 노동자에게 의존한다. 자본주의의 존재 이유인 이윤에 타격을 입히는 힘을 발휘할 능력이 있는 세력은 노동계급뿐이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대규모 사회적 분업 과정 속에서 집단적으로 일한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조건을 지키려면 동료들과 함께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투쟁해야만 한다. 노동자들의 이런 존재 방식은 계급이 왜 서로 다른 차별을 받는 사람들의 단결의 토대가 되는지를 설명해 준다. 노동계급의 구성원들은 각자 상이한 차별을 겪지만, 동시에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같은 관계(여기에는 이해관계도 포함된다)를 맺고, 또 함께 계급 사회를 폐지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
개인의 정치학
오늘날 페미니즘에서 널리 수용되는 정치를 살펴보면, 방법론 상 개인주의가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남성과 여성의 개인 관계에 주목하고, 여성 개인이 삶 속에서 남성과 맞서 싸우는 것을 중시하며, 개인이 받은 차별의 경험을 말하는 것 자체를 실천의 종착점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현대 페미니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상은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 푸코의 권력 이론이다. 그에 따르면 “권력은 도처에 있다.” 권력은 지배계급의 수중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남성 개개인이 여성 개개인에게 권력을 행사하고, 이성애자가 동성애자에게 권력을 행사하며, 성인이 아동에게 권력을 행사하고, 비장애인이 장애인에게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개인들은 모두 서로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관계를 맺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권력 개념을 이렇게 느슨하게 보면, 권력의 진정한 의미가 희석된다. 즉, 정말로 사람들의 삶과 노동조건을 좌지우지하고 차별의 동력을 제공하는 집단이 누구인지를 흐리게 되는 것이다.
이와 달리, 마르크스주의는 여성 차별을 개개인의 미시적 관계로 축소(이것이 ‘환원’의 참뜻이다)하지 않고, 사회를 전체적으로 분석하며 그 안에서 개인들이 어떤 구실을 하고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주목한다. 그래야 개인 관계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파편화된 개인의 삶 속에서 남성과 맞서 싸우는 게 아니라, 차별을 낳는 토대인 자본주의 체제에 집단적 방식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때 여성은 단지 피해자이거나 약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강조한다. 강남역 살인 사건 직후 차별 경험 말하기 대회를 주도했던 분리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활동을 통해 “여성은 모두 피해자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는 점을 중시했다. 하지만 두려움과 공포심, 약자와 피해자로서의 ‘정체성’ 자각하기만으로는 투쟁에 나서기 어렵다. 정반대로 자신감을 갖고 잠재력을 자각하는 것이 투쟁의 원천이다. 그리고 오늘날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그런 능력과 힘이 있다. 그 힘은 오늘날 자본주의가 여성의 노동 없이는 굴러갈 수 없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여성 혐오 사회’라는 담론과 달리,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여성들을 배척해서 운영되는 게 아니라 여성들의 노동에 의존해서, 그들을 사회의 중요한 일부로 끌어들임으로써 굴러가고 있다. 전 세계 노동인구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어도 40퍼센트이고, 성인 여성의 적어도 55퍼센트가 임금 노동에 종사한다(세계은행). 한국에서도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여성 임금노동자는 8백40만 명가량 된다. 이것은 전체 임금노동자의 44퍼센트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여성과 남성 노동계급은 같은 이해관계와 같은 잠재력을 공유하면서 연대 의식을 느낄 수 있다.
한편, 차별 경험 말하기는 차별에 맞서 싸우는 좋은 출발점이다. 필자 역시 처음에 그렇게 시작했다. 차별은 우리가 참고 넘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맞서야 할 부당한 일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이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은 필수다. 그런데 차별의 경험을 말하고 듣기만 계속하다 보면 이런 물음이 생긴다: “그럼 당신도 당하고 나도 당한 차별에 맞서 우리는 뭘 해야 할까?”, “남성들 개개인의 의식이 죄다 문제라면, 사회는 바뀔 수 있는 걸까?” 개개인이 겪는 차별의 경험은 각자가 가진 거울과도 같다. 그것은 현실을 일부 비춰주지만, 각자의 거울은 사회 전체의 구조와 형상을 종합적으로 보여 주지는 못한다.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의 저자인 주디스 오어는 ‘맑시즘 2016’에서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마사 지메네스의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인적 경험 그 자체는 신빙성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변증법적으로 봤을 때 대립물들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대립물들의 총합이냐면, 개인적 경험이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독특하고 통찰력을 보여 주고 숨겨진 것을 드러내 보이는 힘도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철저하게 사회적인 것이면서도 사회의 파편만을 보여 주며 사회 전체를 가리는 효과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의 차별 경험을 묘사하고 말하고 듣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 근원이 무엇이며, 어떻게 차별을 끝장낼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차별을 끝장내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를 실현시킬 힘이 어디에 있느냐는 문제를 결코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의 유효성 세계 자본주의의 불황이 장기화하고 경제 위기의 고통을 전가하는 긴축 정책에 대한 반감의 표현으로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서구에서는 여성해방에 관한 유물론적 설명이 각광받고 있다. 제국주의·전쟁·인종차별·긴축·민영화 등의 문제를 놓고 여성들의 견해가 갈려, 단지 성별로만 이런 문제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런 맥락에서 리즈 보겔, 미셸 바렛 같은 사회주의 또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의 책이 서구에서 재출간되고, 지난해 독일에서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의 학술대회가 젊은 여성들의 뜨거운 관심과 참가 속에 진행됐다. 〈노동자 연대〉가 보도했듯이, 이 학술대회의 목적은 여성 차별 문제에서 계급의 중요성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일부 급진 좌파 단체들은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을 결합, 더 정확히는 절충하지만) 개혁주의 페미니즘의 한계를 비판하며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주장과 실천을 해 왔고, 여성 억압을 낳는 사회 구조와 이에 맞선 여성 노동자 투쟁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도 해 왔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 지지자들은 노동계급의 단결과 투쟁을 통한 여성 해방 전략을 발전시키는 데서 서로 협력할 부분이 있다. 그 과정에서 개혁주의·분리주의 페미니즘과의 공통점은 밝히면서도, 운동의 발전을 위해 차이점에 대해서는 논쟁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새 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여성 차별의 근원에 대해 고민하고 체제에 맞선 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토론해야 한다. 실천에서 입증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럴 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차별을 거부한다는 공통점에서 출발해야 하고, 차별의 경험을 무시하듯이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특히 남성들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경험 나열하기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과 차별의 경험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다른 문제다. 또한, 각각의 페미니즘에 대해 토론할 때는 장단점과 공과를 균형 있게 얘기해야 한다. 특정 페미니즘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그 페미니즘의 문제의식과 고민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소통적 대화가 가능할 것이다. 페미니즘은 하나가 아니므로 페미니즘들마다 또는 페미니스트들마다 문제의식과 특징이 상이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이를 위해 페미니즘 문헌을 많이 읽기를 권유한다.
여성 차별이 자연스럽지도, 정당하지도, 감내해야 할 숙명 같은 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새 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차별의 폭로, 묘사, 위로에서 한발 더 나아가 차별의 근원에 도전해 뿌리 뽑고자 하길 바란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 과정에서 좋은 조력자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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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필자가 노동자연대가 주최한 ‘맑시즘 2016’의 같은 주제 워크숍에서 발표한 것을 조금 손본 것이다.
↩
- 다만 한국에서는 극히 제한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낙태가 여전히 불법이다. 이 때문에 낙태 시술이 음성화돼 낙태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공격에 취약하다. 이명박 정부 당시 프로라이프의사회의 낙태 단속 캠페인에 정부가 호응하자 낙태 비용이 치솟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일부 여성들은 기소돼 처벌을 받기도 한다. 우리가 낙태 합법화를 쟁취해야 하는 까닭이다. ↩
- 김유선 2014. ↩
- 록산 게이는 미국의 흑인 페미니스트이다. 미국 퍼듀대학교 교수이자, 소설가, <가디언>의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
- 오어 2016a, p18. ↩
- 노동자연대가 속한 국제사회주의 경향은 소련이나 동유럽, 중국, 북한은 ‘아래로부터 노동자 권력’이라는 사회주의의 핵심 특징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고 자본주의 국가의 한 변형태(국가자본주의)일 뿐이라고 분석했다. 따라서 소련과 동유럽 붕괴 후에도 혼란과 사기저하에 빠지지 않고 사회변혁적 전망을 일관되게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국가자본주의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클리프 2011을 참고하시오. ↩
-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최미진 2015를 참고하시오. ↩
-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분석은 본지에 실린 정진희의 글 ‘“ 교차성 ” 은 차별을 설명하는 유용한 개념인가? ’ 를 참고하시오. ↩
- 오어 2016b. ↩
- 맥그리거 2016. ↩
참고 문헌
김유선 2014, ‘여성 비정규직 실태와 정책 과제’, 2014년 8월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맥그리거, 실라 2016,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과 계급 문제’, <노동자 연대> 178호.
오어, 주디스 2016a,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 책갈피.
오어, 주디스 2016b, ‘맑시즘2016 주디스오어 연설① 마르크스주의는 차별을 설명할 수 있는가?’, <노동자 연대> 178호.
최미진 2015, ‘15년째 변함없는 남녀 임금 격차 ― 왜 이다지도 불평등한가?’, <노동자 연대> 157호.
클리프, 토니 2011,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 국가자본주의론의 분석》, 책갈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