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 학대의 근원 *
얼마 전 지미 새빌(영국 BBC 방송국의 대표적 진행자)이 탐욕적 성범죄를 저질렀고 BBC가 이를 은폐했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사회가 충격에 빠졌다.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남성들이 성적 약탈을 자행했다는 사실이 폭로되자 사람들은 갑작스런 분노와 공포에 휩싸인 듯하다.
지미 새빌이 BBC와 아동 보호 시설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에 역겨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BBC가 이를 은폐한 것도 마찬가지로 역겨운 일이다.
게다가 볼튼에서 성범죄자 일당이 기소당한 사건도 불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지역에서는 범죄에 취약한 여자아이들과 일부 남자아이들이 성범죄를 위해 계획적으로 길들여졌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언론은 일부러 용의자의 인종에 초점을 맞춰 오직 아시아계 남성만이 그런 역겨운 성범죄 조직을 만든다는 인상을 자아내려 했다.
최근 아동 위원회가 발표한 집단 성폭력 중간 보고서에서는 범죄에 취약한 계층의 아이들을 돌보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청소년의 행동에 대해 충격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폭로됐다. 그들은 성범죄를 피해자의 탓으로 돌렸다.
성범죄가 낯선 ‘나쁜’ 남자, 특히 낯선 아시아계 남성에 의해 발생한다는 생각이 의도적으로 조장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지미 새빌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왜 하필 내가 이런 일을 당했을까?’ 하는 자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동 성범죄가 폭로되자 낯선 사람이 아이들에게 가장 위험하다는 잘못된 관념이 강화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성범죄의 근원을 흐리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된다.
아동 성범죄는 빈곤, 열악한 주거 환경, 부모의 감정적·신체적 학대, 방치 등 수많은 종류의 학대 중 한 양상일 뿐이다. 전체 아동의 10퍼센트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학대받는 것으로 추정된다. 성범죄만 하더라도 “노출증 환자”를 마주치는 것부터 부적절한 신체 접촉, 성적 길들이기, 강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아동 성범죄 피해자의 압도적 다수가 여자아이다. 그렇다면 왜 그 피해 아동은 성범죄의 대상이 됐을까? 남성 전체, 아니면 최소한 남성 중 일정 비율은 그저 그렇게 ‘타고난’ 것인가? 그런 ‘악마’들은 그저 평생 가두는 게 최선인가? 아니면 사회가 조직되는 방식 때문에 아동 성범죄와 여성에 대한 성적·신체적 괴롭힘이 나타나는 것인가?
인간 본성은 고정불변하고 어떤 남성은 그냥 그렇게 타고난다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상식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인간 사회의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의 생활 양식은 역사적으로 매우 다양했고 고정불변하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인류 역사에서 여성과 남성의 역할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성역할은 다양했고, 계급사회 이전에는 남성이 여성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런 사회에서는 아이의 생물학적 부모뿐 아니라 집단의 모든 성인들이 아이들을 돌봤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신의 생물학적 성과는 다른 성역할을 선택할 수 있었다.
남성은 ‘공격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냥꾼’, 여성은 ‘수동적인 주부’라는 단순한 모델로 진화하는 과정은 결코 벌어지지 않았다. 인간이 협동, 평등, 상호 존중을 규범으로 하는 사회적 존재로 진화해 왔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증거는 상당히 많다.
5000년 전 계급사회가 등장하면서 그런 삶의 방식은 서서히 막을 내렸다. 대부분의 여성과 남성은 소수 지배계급에게 종속됐다. 계급사회의 발전과 함께 지배계급의 재산과 권력을 보호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도 등장했다. 여성과 아동이 지배계급 내 남성에게 종속되고 가족 안에서는 남편에게 종속되면서 여성은 자율성을 잃었다.
오늘날의 아동 학대의 근본 원인은 인간 관계가 자본주의 사회와 가족에 의해 형성된다는 데 있다. 빅토리아 시대(1837~1901년 영국에서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한 시대)에는 효율적인 생산을 위해 노동자의 건강을 유지하고 자본주의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아이들을 길러 내려는 목적으로 노동계급 가족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고 훨씬 더 다양한 가족이 존재한다.
그러나 오늘날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양성 부부이든 동성 부부이든 한부모 엄마이든(또는 드물게는 한부모 아빠이든) 간에 아이들은 [가족을 벗어난] 더 넓은 사회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그 사회는 계급·성·인종 간 불평등으로 갈기갈기 찢어져 있다. 여성은 대부분 일과 가정이라는 이중의 굴레를 진다. 그러나 가족 내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은 나이가 어린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거의 모든 물건을 파는 데 여성의 몸을 이용하는 시장 논리에 따라 자라난다.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속한 계급에 따라 어디에 살지, 어떤 교육을 받을지, 삶에서 어떤 기회가 주어질지가 결정된다. 또한 시장은 가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무엇을 먹고 마실지, 무엇을 입을지, 심지어는 자신의 몸이 어떻게 보이고 냄새가 날지까지도 결정한다. ‘시장’은 어디에나 있다. 그 결과 사람의 성조차 자신에게서 소외돼 사람들을 괴롭히고 지배하는 외부의 힘이 된다.
인간은 성적 존재다. 성은 인간 본성의 하나다. 사랑, 애정, 즐거움에 대한 욕구는 성적 관계를 통해 표출된다.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성적 관계를 가족 내의 일로만 제약한다. 이 폐쇄적 세계에서 사람들은 견디기 힘든 압박을 일상적으로 받는다.
존중, 배려, 개방성을 갖춘 성적 관계는 계급 간의 착취와 억압, [엄격한] 성별 구분, 핵가족을 기초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규칙을 거스른다. 성은 어디에나 있는 듯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모두가 각자 고립돼 있어서 성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기 어렵다. 아이들에게 혼자서나 다른 또래와 함께 자신의 성을 탐구하도록 공공연히 장려하는 일은 아주 드물다. 여자아이들은 점점 더 일찍 성적으로 성숙해지지만 아이들의 성은 사실상 부정된다. 그래서 여자아이들은 성범죄에 특히 쉽게 노출된다.
성에 대한 태도 또한 사회의 성별 구분 정도에 따라 형성된다. 젊은 여성과 남성 간의 접촉이 적을수록 남녀 간 성역할은 정반대인 것으로 여겨지기 쉽다. 그러면 남성과 여성이 서로 성적 관계를 맺는 것도 훨씬 어려워진다. 이성과 얘기하고 어울려 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이성과 성적 관계에 대해 상의하는 법을 배우겠는가? 모두가 이성애만을 보고 듣는 사회에서 어떻게 동성과 [성적] 관계 맺는 법을 배우겠는가?
성 상품화가 심해질수록 ‘야한 문화’가 만연해져 여성의 몸은 남성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유포된다. 가족이 구성원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할수록 가장 취약한 어린 여자아이가 범죄의 대상이 되기 쉽다. 대부분의 경우, 피해자 아이가 알고 있는 남성이 범죄를 저지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런 남성은 아마 학대를 당한 적이 있거나 고아원에서 자라 진정한 사랑과 애정을 받지 못하며 자랐을 수도 있다. 그들은 성적으로 소외됐다고 느끼고 동료 인간들과 관계 맺는 법을 배우지 못해 상처받은 사람일 것이다. 그들이 아는 관계라고는 폭력적인 관계가 전부일 것이다. 여성을 깎아내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에서 이런 성향은 더욱 강화된다.
아이들이 어떤 일로 고통받는지 잘 들어야 하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 말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그러나 아동 폭력을 영영 끝장내는 방법은 인간 관계를 통째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육체적·정신적·성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회를 창조해야 한다. 그 사회에서는 평등과 존중이 기본이 되고, 아이들은 또래나 어른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회가 선사시대에 존재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용기를 얻어야 하고, 모든 썩은 것과 억압적인 것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자극을 받아야 한다. 아이들은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누릴 권리가 있다.
MARX21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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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heila McGregor, ‘The roots of child abuse’, Socialist Review, Jan 2013(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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