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지금의 이슈들
사회적 재생산 이론의 약점
1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했다. 2015년 11월 초 영국 런던에서 열린 ‘히스토리컬 머티리얼리즘(역사유물론)’ 학술대회에서 사회적 재생산 개념은 교차성 개념과 2 함께 주요 토론 쟁점이었다.
근래에 영미권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사회적 재생산 이론Social Reproduction Theory에3 2013년에 미국의 국제사회주의자조직ISO의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에는 ‘사회적 재생산 이론이란 무엇인가?’라는 기사가 실렸는데, 필자인 티티 바타차리아는 보걸 등 현대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한 사회적 재생산 이론의 주요 논지를 소개하며 그 이론의 정치적 의의를 강조했다. 4
사회적 재생산 이론에 대한 이런 관심 증가는 1983년에 첫 출판된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리스 보걸의 책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차별 ― 단일 이론을 향해》가 2013년에 재출간된 것이 주요 계기가 됐다.보걸이 제시한 사회적 재생산 이론은 자본주의에서 상품으로서 노동력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마르크스의 설명에 동의하지만, 이 노동력 자체가 자본주의 생산 외부에 있는 가족이라는 “혈연기반” 장소에서 생산되고 재생산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바타차리아도 앞의 글에서 “노동계급을 재생산하는 주요 기능들은 작업장 밖에서 이뤄진다”며 재생산 영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사회적 재생산 이론이 생산 영역과 재생산 영역에서 일어나는 투쟁을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고 주장했다.
5 당시 전지윤이 사회적 재생산 이론을 마르크스주의 여성 차별 이론을 혁신하는 이론이라고 주장했을 때 핵심 논리 하나는 가사노동이 잉여가치를 창출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쟁점은 1970년대 서구에서 일어난 가사노동 논쟁의 주요 논쟁점 중 하나로 새로운 게 아니지만 사회적 재생산 이론가들 사이에서도 견해가 다르다. 이 문제에서 전지윤은 보걸(과 바타차리아)보다는 이탈리아 자율주의 페미니스트인 실비아 페데리치의 견해와 유사하다. 6
2015년에 전지윤은 ‘노동자연대’의 여성해방론을 비판하는 글을 《진보평론》에 투고했는데, 그 때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여성 차별 이론을 혁신할 이론으로 사회적 재생산 이론을 내세우며 2013년에 쓴 바타차리아의 기사를 여러 번 인용했다.7 가사노동이 잉여가치를 창출하지는 않는다고 명료하게 썼다).
보걸과 바타차리아는 주로 여성이 가정에서 수행하는 무보수 재생산노동(‘가사노동’)이 사회의 노동력을 재생산해서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되는 데 필수적 구실을 한다고 보지만, 가정 내 무보수노동 자체가 마르크스가 말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라고 보지는 않는다(바타차리아가 2013년에 쓴 글은 이 쟁점을 다루지 않았고, 그 뒤 쓴 다른 논문에서8 , 페데리치와 달리 마르크스의 방법을 적용해 여성 차별에 관한 유물론적 분석을 발전시키려 한 보걸의 사회적 재생산 이론의 장점을 소개했다. 보걸은 사회적 재생산을 전체 노동력의 재생산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하는데, 계급사회에서 가족을 통한 노동력 재생산 과정에서 여성이 맡는 구실을 여성 억압의 물질적 기초로 보고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 가족이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방식을 설명하며 여성 차별을 분석한다.
예전에 나는 사회적 재생산 이론을 다룬 글을 두 차례 기고한 바 있는데이것은 가족을 초역사적인 ‘남성의 이익’에 의해 작동하는 것으로 보는 가부장제 이론과는 사뭇 다른 유물론적 이론이다. 그래서 보걸의 이론은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크리스 하먼과 린지 저먼이 1980년대 초에 가부장제 이론을 비판하며 가족이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서 하는 경제적·이데올로기적 구실을 설명한 분석과 여러모로 비슷하다.
그러나 보걸의 사회적 재생산 이론에는 장점뿐 아니라 무시할 수 없는 약점도 있다. 보걸의 이론에는 자본주의에서 착취가 일어나는 생산 영역에서의 여성의 구실이 완전히 무시되지는 않지만, 여성이 가족 내 노동력 재생산에서 하는 구실, 즉 현재와 다음 세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구실에 초점을 두면서 여성이 생산에서 하는 구실에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그래서 보걸이 제시한 여성해방의 전략은 착취와 차별 모두에 맞선 노동계급의 체제변혁적 투쟁이 아니라 계급을 초월한 여성운동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계급 착취와 여성 차별에 맞서는 투쟁이 분리되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이중체계론이라는 유산이 남아 있는 것이다.
보걸은 여성해방을 이루려면 자본주의를 변혁해야 한다고 보지만, 자본주의 착취관계에서 노동계급이 얻게 되는 잠재력이 자본주의 변혁에서 결정적 구실을 할 수 있고, 여성이 가정 밖 임금노동에 참가해 노동자가 되면서 생겨나는 힘이 여성해방에서 아주 중요하다는 점을 못 본다.
보걸의 사회적 재생산 이론에 담긴 약점은 바타차리아의 글에서는 다소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보걸의 이론은 자본주의에서 여성 차별을 설명하는 것이지만, 바타차리아는 사회적 재생산 이론을 노동계급 투쟁이 생산 영역을 넘어 ‘재생산 영역’으로 확대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논리로 자주 사용한다. 이때 재생산 영역은 가정뿐 아니라 학교·병원·요양원 등과 같은 사회복지 서비스 기관이나 그것들이 있는 지역사회를 뜻하는데, 바타차리아는 노동계급이 작업장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학교나 병원 폐쇄 등에 맞서 투쟁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노동운동이 지금 같은 경제 위기의 시기에 복지 삭감에 맞서 지역사회의 주민들(다수가 노동계급이다)과 함께 투쟁하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다. 작업장에서 임금과 노동조건을 두고 투쟁하는 것만이 계급투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복지 삭감이나 차별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는 것은 노동계급이 피억압자의 호민관 구실을 하는 것이라는 얘기도 옳다.
그런데 바타차리아의 글에서는 생산현장의 투쟁과 지역사회의 투쟁이 강조점 없이 나란히 제시되거나 때로는 후자가 더 강조되기도 하는데, 이런 서술 방식은 사회 변혁에서 생산현장에 기반을 둔 노동계급의 투쟁이 갖는 핵심적 중요성을 희석시키기 쉽다. 또, 노동계급의 투쟁이 지역 차원에서뿐 아니라 전국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필요성이 간과되기도 쉽다. 생산현장에서의 노동계급 투쟁이 사회 변혁에서 갖는 전략적 중요성을 흐리는 방식으로 사회적 재생산 이론이 사용되는 것은 캐나다 사회주의자들인 수전 퍼거슨과 데이비드 맥낼리에게서 좀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퍼거슨과 맥낼리는 사회적 재생산 개념을 보걸보다 더 광범한 의미로 사용하고 이를 교차성 개념, 특권 이론과 혼합해, 성별·인종·섹슈얼리티 등의 범주가 노동계급의 계급 ‘형성’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설명하는 이론으로 확대하고 있다. 이런 분석의 실천적 의미는 지역사회 운동의 중요성이 전략적으로 강조되는 것이다. 즉 “노동계급이 지역사회와 이웃에 기반을 두고 벌이는 투쟁(주택, 경찰의 괴롭힘, 양육, 학교에 관한)은 그들이 작업장 쟁점에서 벌이는 투쟁에 맞먹는 전략적 중요성을 갖는다.”
10 바타차리아의 2013년 글을 보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산과 (노동력) 재생산 영역의 중요성이 병렬적으로 제시돼 있다. 즉, 자본주의에서 노동력 재생산이 사회적 생산과 구조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주장하지만, 생산의 동학을 중심으로 재생산을 다루지 않는다. 또한 자본주의 생산과정에서 일어나는 착취가 체제 변혁과 그 일부로서 여성해방에 어떤 잠재력을 제공하는지 설명되지 않고, 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이중의 고통에 초점을 두고 서술돼 있다. 그래서 노동계급의 투쟁 영역을 ‘재생산 영역’으로 확대하자고 하면서, 노동계급이 생산현장에서 벌이는 투쟁이 체제 변혁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이 흐려지고 있다.
이 글에서는 최근 영미권의 몇몇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발전시키고 있는 사회적 재생산 이론의 약점을 바타차리아의 글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사회적 재생산 개념을 사용한 글들을 보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산과 노동력 재생산이 동등하게 중요하다고 보는 경우가 흔하다(어떤 사회적 재생산 이론가들은 심지어 재생산을 “사회적 생산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입구로 우선시”하기도 한다.)사회적 생산과 노동력 재생산
가족이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가족은 현재와 미래의 노동력을 재생산함으로써 자본주의에 경제적으로 이바지할 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구실도 한다. 가족 이데올로기는 이성애 관계를 특권화하고, 가족 내 노동분업을 정당화하며, 사회의 빈곤과 실업, 불평등의 문제를 개별 가족 내에서 구성원들의 헌신으로 해결하자는 생각을 고무한다.
사회적 재생산 이론이 사회적 생산과 노동력 재생산이 별개의 과정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서 구조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보는 것은 이중체계론의 약점을 넘어서는 통합적 접근법이다.
그러나 사회적 재생산 이론가들이 가족 내 무보수 재생산노동을 자본축적에서 임금노동만큼이나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분석상 옳지 않다.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 동학은 가족이 아니라 사회적 생산과정에서 이뤄지는 임금노동 착취에 있다. 가족을 임금노동 착취만큼 축적 과정에 중요하다고 보면 자본주의가 그 전 계급사회와 구별되는 역동적 체제라는 점을 설명할 수 없다. 또한 계급사회에서 가족이 계속 변화해 온 핵심 동력도 이해할 수 없다. 자본주의 이전 계급사회에서 피지배계급의 가족은 생산의 주요 단위였고, 자본주의에서처럼 생산과 노동력 재생산이 별도의 단위로 분리되지 않았다.
가족이 변화해 온 핵심 동력은 물질 생산 영역에서 일어난 변화였다. 공장제 생산이 도입되면서 생산과 노동력 재생산이 공간적으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산업혁명이 일어난 영국에서는 상품생산이 크게 팽창하면서 기존 농민이나 장인 가족이 대거 붕괴하고 새로운 노동계급의 가족이 해체 위기를 겪다 19세기 중반 이후 재구성됐다.
물론 사회적 생산과 가족 사이의 관계가 하나가 다른 하나에 영향을 끼치는 일방적 관계는 아니다. 두 영역은 상호작용하고, 가족관계도 생산에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여성이 남성보다 시간제 일자리에 더 많이 종사하는 나라들이 많은데, 이것은 여성이 가정에서 양육을 주로 담당한다는 것과 관련이 깊다.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하는 연령대에 노동시장 참여율이 떨어지는 것도 여성의 재생산 부담과 관련돼 있다.
그러나 생산과 가족 영역은 상호작용하지만, 생산 영역이 가족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친다. 여성의 출산과 양육 부담이 생산 참여에 영향을 끼친다고 해도 그것이 곧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를 완전히 가로막거나 순전히 매우 불안정한 일자리에만 참여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가 남성과 달리 매우 불안정하다고 강조하며 여성을 경제 위기 때 쉽게 퇴출될 수 있는 ‘산업예비군’으로 본다).
임신과 출산을 많이 하는 연령대에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크게 떨어지는 경향은 자본주의에서 보편적이지 않다. 선진국에서 ‘M자’ 고용 패턴(30대 여성의 고용률이 낮아지는 패턴)은 일본과 한국에만 남아 있는 현상이고 여기서도 완화되는 추세다. 여성의 임금노동 참가가 장기적으로 증가하고 생애 더 긴 시간 동안 노동하는 경향은 2차대전 이후 모든 산업국에서 일어난 변화였다. 여성이 노동계급의 일부로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더욱 늘어났기 때문이다. 심지어 경기 불황기에도 여성은 노동시장에서 퇴출되지 않았다.
이것은 자본 축적에서 자본가들이 생산 영역에서 임금노동을 착취해 얻는 잉여가치가 가족 내 무보수 재생산노동에서 얻는 이득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여성의 무보수 재생산노동이 자본가 계급 전체에 상당한 이득을 준다고 해서 자본가들이 여성을 전업 가정주부로 묶어 두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 이유다.
자본 축적의 논리 때문에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늘어나 오늘날 선진국에서 여성은 비농업 부문 임금노동자의 절반을 차지하고 여성이 일하는 분야도 더 다양해지고 있다. 물론 여성 차별은 여전히 심각하고 이것은 여성 노동자들의 고통을 가중시키지만, 여성이 노동계급의 일부로 착취와 차별에 맞서 투쟁하고 조직과 의식을 발전시키면서 사회 변혁의 핵심 주체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은 더욱 커졌다.
전략의 약점
자본주의 체제의 동학에서 핵심이 노동력 재생산이 아니라 생산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노동계급이 생산현장에서 벌이는 투쟁이 체제 변혁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이 사실상 부정된다.
바타차리아의 2013년 글에서 ‘재생산 영역’은 “학교가 폐교되고 있는 지역사회, 여성이 폭력을 당하고 있는 집”을 뜻하는데, 가정과 지역사회가 체제 변혁을 위한 투쟁에서 생산현장과 동등한 중요성이 있는 듯 나열된다. 바타차리아는 재생산 영역의 중요성을 보여 주는 사례로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을 들기도 했다(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이런 설명은 러시아 혁명의 동학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아니다).
바타차리아가 복지 쟁점이 계급투쟁의 영역이고 노동조합이 이런 문제에서도 싸울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한 것은 옳다. 그러나 ‘재생산 영역’(가정, 지역사회)이 작업장과 체제 변혁에서 동등한 중요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먼저, 가정에서 여성이 주로 하는 무보수 재생산노동이 자본가 계급 전체에 이롭다고 해서 가정이 자본가나 국가에 타격을 가하는 투쟁을 벌일 수 있는 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개별 가정에서 아이나 노인·환자 등을 돌보는 일이 매우 고될지라도, 착취적 사회관계에서 이뤄지는 노동은 아니다. 임금노동과 달리, 무보수 재생산노동은 개별 가정에 고립된 채 원자화된 개인으로서 하는 노동이다. 그래서 가정 내 무보수 재생산노동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노동이지만, 생산현장의 임금노동처럼 각지의 사람들을 한 곳으로 집중하게 만들고 고용주가 노동조건과 생활조건을 침해하는 데 맞서 집단적으로 투쟁하도록 만드는 잠재력을 형성하지는 않는다. 여성이 재생산노동을 거부한다면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은 아이, 노인 등 가족 성원들의 건강이지 자본가들이 아니다.
물론 여성들이 가정에서 겪는 불평등은 차별에 맞서는 운동에 동참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여성운동의 핵심 동력도 단순히 개별 가정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1960년대에 미국에서 부상한 여성운동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여성의 임금노동 참여 증가, 교육 기회 확대 등 여성들의 삶이 크게 바뀌면서 성장한 여성들의 자의식과 불평등한 현실 간의 모순과, 반전운동·공민권 운동 등 미국 사회를 뒤흔든 대규모 정치투쟁이 낳은 급진화 과정이 결합돼 등장했다.
둘째, 고립된 가정과 달리 지역사회는 때때로 비슷한 처지에 있는 지역주민들이 정부 정책이나 기업들의 행태에 불만을 품고 투쟁을 벌이는 공간이 될 수 있다. 공공서비스 축소에 반대하는 반긴축 투쟁이 그 예다. 노동조합이 이런 운동에 동참하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복지는 ‘사회적 임금’으로 현대 자본주의에서 계급투쟁의 핵심 쟁점이다. 경제 위기 때 긴축 정책이 낳는 파괴적 효과에 맞서 노동조합이 지역사회의 단체들과 협력해 긴축 반대 투쟁을 벌이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지역사회’의 구성원들 중 생산현장에 뿌리를 둔 노동자들과 그렇지 않은 피억압자들이 투쟁에서 발휘하는 힘은 결코 똑같지 않다(바타차리아가 병원, 학교와 같은 기관들과 그런 기관들이 있는 ‘지역사회’를 ‘재생산 영역’으로 부를 때,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들과 그 노동자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의존하는 이질적인 지역 주민들이 구별되지 않는다). 노동조합이 지역에서 다른 사회단체들과 반긴축 운동에 동참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운동이 강력해지려면 지역에서 벌이는 항의시위뿐 아니라 파업처럼 생산현장에서 노동자들이 힘을 보여 주는 투쟁과 결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 파업이 전국적 수준에서 일어난다면 정부의 복지 삭감 정책을 철회시킬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진다.
노동계급은 분명 작업장뿐 아니라 지역사회에서도 투쟁해야 하지만, 지역사회가 체제 변혁에서 작업장과 같은 전략적 지위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바타차리아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재생산 영역을 강조하는데, 여기서 작업장은 노동계급이 살아가는 여러 삶의 공간 중 하나쯤으로 취급된다.
노동계급은 작업장에서 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 노동자는 또한 자기 집에서 잠을 자고 그녀의 아이들은 공원에서 놀고 지역의 학교에 간다. 11
사회주의 프로젝트가 임금노동을 해체하는 것인 한, 임금노동과 자본 사이의 관계가 단지 일할 때뿐 아니라 온갖 무보수 방식과 모든 사회적 공간에서 지속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사회주의 프로젝트는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작업장은 단지 노동계급이 살아가는 하나의 공간인 것만은 아니다. 작업장은 자본주의에서 대다수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에 필요한 고정자본이 집중되는 곳이고, 국가와 자본가들이 노동자에게서 잉여가치를 추출하려고 집착하는 핵심 장소다. 즉, 작업장은 노동계급이 지배계급 권력의 기반인 잉여가치 생산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핵심적인 투쟁의 장이기도 하다. 생산현장의 이런 중요성을 이해한다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작업장 밖에서 일어나는 긴축 반대 운동의 성과와 활력이 노동자들의 작업장 투쟁을 고무하는 데 이용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바타차리아는 노동자들의 작업장 투쟁 수준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가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들이 작업장을 넘어서 투쟁할 것을 강조하면서 지역사회 활동을 부각하고 있다. 이런 강조는 시카고 교사노조가 노조 재건에 사용한 전술을 노조 운동의 대안적 모델로 제시하는 것과 관련돼 있는데, 시카고교사노조가 작업장 투쟁과 더 광범한 지역사회의 필요를 연결시킨 것을 중시한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작업장 투쟁이 아니라 오히려 작업장 밖에서 해 온 활동이 더 강조된다. 바타차리아는 시카고교사노조가 작업장 밖에서 해 온 투쟁들이 노조가 파업에 들어갔을 때 시카고 전역의 노동계급에게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비결로 꼽는다.
14 바타차리아의 글은 시카고 교사 노동자들이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25년 만에 파업을 벌인 그 투쟁에서 파업 노동자들이 느낀 자신감과 의식 변화, 조직의 성장 등에 대해서는 놀랍게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러나 시카고교사노조가 파업 전부터 작업장 안팎에서 투쟁한 것은 분명 고무적이지만, 2012년 시카고교사노조가 시카고 전역에서 엄청난 지지를 받으며 연대의 초점을 형성할 수 있었던 힘은 9일간의 대규모 파업(최대 4만 명이 참가한)이 결정적이었다.15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을 그 사례로 꼽은 것도 마찬가지다. 바타차리아는 두 혁명이 여성이 이끄는 식량 소요로 시작했다며 이를 재생산 영역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고 주장했다.
시카고교사노조의 투쟁에 관한 바타차리아의 언급은 노동계급의 투쟁 영역으로 작업장과 작업장 밖 투쟁을 동렬에 놓는 수준이 아니라 생산현장보다 ‘재생산 영역’을 더 강조하고 있다. “노동계급 역사에서 주요 투쟁 중 일부는 생산 영역 외부에서 시작했다”며부르주아 혁명인 프랑스 혁명과 노동자 혁명인 러시아 혁명을 동렬에 놓을 수 없다는 문제는 일단 논외로 하고, 러시아 혁명이 ‘재생산 영역’에서 시작했다는 주장은 재생산을 특권화하는 이론의 틀에 역사를 꿰어 맞추는 것일 뿐이다. 러시아 혁명의 실제 동학은 이와 상당히 다르다. 좌파에게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듯이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의 도화선이 된 국제 여성의 날 시위(2월 23일)는 여성 노동자들이 주도한 투쟁이었다. 그날 여성 노동자들은 단지 빵 배급을 요구하는 거리 시위만 벌인 게 아니라 무엇보다 파업을 벌였다! 2월 23일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대중시위는 여러 공장의 여성 방직 노동자들이 빵 배급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인 뒤 거리로 나오고 비노동계급 여성들과 남성 노동자들이 합류한 것이다. 23일 아침, 여성 방직 노동자들은 선제적으로 파업에 돌입했을 뿐 아니라 연대를 호소하며 (남성인) 금속노동자들에게 대표단을 파견했고 남성 노동자들은 이에 동조했다. 그래서 “이날 남녀 모두 합쳐 약 9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했다.”
러시아 혁명의 핵심 지도자 중 한 명인 트로츠키가 쓴 《러시아 혁명사》 7장은 1917년 2월 혁명 의 진행 과정을 묘사한 뒤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혁명운동의 내적 논리를 좀더 명확하게 파악해 보자. 2월 23일 ‘여성의 날’ 깃발 아래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이 오랫동안 준비해 오고 오랫동안 참아 온 봉기가 시작됐다. 반란의 첫 단계는 파업이었다. 사흘에 걸쳐 확대된 파업은 거의 총파업으로까지 발전했다. 이것만이 대중에게 확신을 불어넣었으며, 이에 힘입어 이들은 계속 전진했다. 더욱더 공세적으로 되면서 파업은 시위와 융합됐고, 이런 과정을 통해 혁명적 대중은 군대와 맞섰다. 이로써 무장 문제가 제기되는 더 높은 수준으로 나아갔다(강조는 필자).
바타차리아의 주장은 실제 러시아 혁명의 경험과 맞지 않는다는 문제만 있지 않다. 식량을 요구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가 왜 단순히 ‘재생산 영역’의 중요성을 보여 주는 근거가 되는가? 식량 부족 문제는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 모두에서 사회의 생산적 자원을 어느 계급이 통제하는가 하는 문제가 핵심인데 말이다. 무엇보다, 전체 인구 중 산업 노동계급이 소수인 러시아에서 노동계급이 전제정을 타도하고 자본가 계급의 권력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결정적 힘은 노동계급이 대도시의 대규모 작업장에 집중돼 있다는 데서 나왔다. 즉, 재생산 영역이 아니라 생산 영역의 핵심적 중요성을 보여 준다.
‘재생산 영역’의 중요성을 과장하다 보니, 바타차리아는 프랑스 혁명 같은 부르주아 혁명과 러시아 혁명 같은 노동계급 혁명과의 결정적 차이점 하나가 대중파업에 있다는 점도 주목하지 못한다. 그러나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바로 1905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을 보며 “대중파업은 프롤레타리아의 모든 위대한 혁명 투쟁의 초기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우며 충격적인 투쟁 형태”라는 점을 간파했다. 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 발전하면 할수록 대중파업은 더욱 효과적이고 결정적인 것이 된다. 앞서 일어났던 부르주아 혁명들에서 주된 투쟁 형태였던 바리케이드 전투와 무장한 국가 권력에 맞서 일으키는 공공연한 충돌은 오늘날 혁명에서는 단지 프롤레타리아 대중 투쟁의 전 과정에서 절정이나 한 계기일 뿐이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생산 영역이 핵심적으로 중요하다고 할 때 그 의미가 곧 모든 중요한 투쟁이 언제나 작업장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신디컬리스트와 달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파업과 거리 시위를 대립시키지 않는다. 노동계급이 거리에서 국가 정책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것은 흔히 웬만한 파업보다 큰 정치적 효과를 낸다. 그러나 일상적 시기에 벌이는 개혁을 위한 다양한 투쟁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노동계급의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이 심화돼야 혁명으로 발전한다. 2000년에 작고한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창립자인 토니 클리프가 지적했듯이 “자본주의를 뛰어넘지 않는 개혁을 위한 투쟁을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을 위한 투쟁과 결합시”키는 것이 바로 대중파업이다.
혁명의 성공에서 관건은 노동계급의 이런 혁명적 분출과 함께, 혁명적 정당이 노동계급의 투쟁을 자본주의의 합법적 틀 내로 한정하려는 노동운동의 보수적 관료들과 온갖 기회주의자들에 맞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투쟁을 하며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을 자본주의적 국가를 타도하고 노동계급의 권력기관을 수립하는 데로까지 이끌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혁명적 투쟁기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런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비혁명적 시기부터 노동계급 운동에 뿌리 내리는 작업을 끈질기게 해야 한다. 이 과정은 분명 매우 힘들지만, 자본주의를 변혁하려는 혁명가들이라면 노동계급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곳, 즉 생산현장에 기반을 둔 노동자들의 투쟁과 조직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생산현장의 노동계급 조직과 투쟁에 뿌리내리는 과정은 단지 작업장 투쟁의 중요성만 일면적으로 강조하는 방식을 뜻하지 않는다. 노동계급이 벌이는 모든 부분적 투쟁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노동계급 전체의 관점에서 계급의 자신감을 북돋고 부문을 뛰어넘는 계급적 단결을 고무하는 주장과 투쟁 전술을 제시하려 애쓴다. 특히, 차별은 노동계급을 분열시켜 계급 전체의 힘을 약화시키므로 차별에 맞서는 것은 노동계급의 단결을 이루는 데서 필수적이다.
노동운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정치적 개입은 다른 피억압집단들의 투쟁을 강화하는 것과도 연결된다. 노동계급의 경제적·정치적 투쟁이 강력해질수록 피억압자들이 투쟁하기에 좋은 조건이 형성된다. 물론 피억압자들은 스스로 투쟁할 수 있지만, 자본가들의 이윤에 타격을 가할 능력이 없는 피억압집단들은 노동계급과 같은 강력한 힘을 갖고 있지 않다. 이것은 피억압자들의 운동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억압자들의 운동이 노동계급의 투쟁과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가장 효과적이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궁극적으로 피억압자들은 노동계급의 혁명을 지지하며 함께 투쟁할 때 자신의 해방을 성취할 수 있다. 이런 전략에 바탕을 두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피억압자들의 투쟁이 노동계급의 투쟁과 연결될 수 있도록 차별을 계급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정치적 주장과 투쟁 전술을 제시해야 한다.
주
- 사회재생산 이론으로도 번역된다. Social reproduction 개념은 사용하는 필자마다 그리고 맥락에 따라 의미의 차이가 있는데, 사회체제의 재생산을 뜻하거나 또는 사회적 생산과 구별해 노동력 재생산을 가리키기도 한다. 필자가 이전에 쓴 글에서는 Social reproduction theory를 사회재생산 이론으로 썼으나, 노동력 재생산이 어떻게 이뤄지는가에 초점을 둔 이론이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 이번에는 사회적 재생산 이론으로 번역을 바꿨다. 재생산 개념이 논자들마다 다르고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방식도 차이가 있어서 하나의 통일된 이론으로 볼 수는 없지만, 노동력 재생산이 생산 영역 밖에서 일어난다는 데 주목하며 그 사회적 기능을 강조하는 것이 공통점으로 보인다. ↩
- 교차성 개념이 부상한 맥락과 그 개념의 장점과 약점에 대해서는 《마르크스21》 16호에 실린 필자의 글을 참조하라. ↩
- 한국에는 보걸의 이 책은 번역돼 있지 않다. 대신 실비아 페데리치 같은 자율주의 경향의 페미니스트들(‘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을 넓게 분류하는 사람들은 이들도 여기에 포함시킨다)이 사회적 재생산 개념을 사용해 자본주의에서 여성 차별을 설명하는 책들이 번역돼 있다. 그런데 페데리치의 《혁명의 영점》에서 재생산 개념은 단지 가사노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자급 농업으로 확장해 상당히 광의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 책은 197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쓴 여러 논문을 묶은 것인데, 1970~80년대의 글에서는 재생산이 가사노동에 초점이 가 있지만 그 뒤에 쓴 글에서는 시초축적 논의와 함께 재생산 개념이 확대되고 있다. ↩
- Bhattacharya 2013. ↩
- 전지윤 2015. ↩
- 원래 페데리치를 몰랐던 전지윤은 《진보평론》에 같이 실린 내 반론을 보고 난 뒤 페데리치의 책을 읽어 보니 문제의식에 공감이 많이 갔다고 자신의 블로그에 썼다. 가사노동이 잉여가치를 창출한다는 주장을 여기서 재반박하지는 않겠다. 다만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 운동을 비판한 것이 여성 차별에 공감하지 않는 태도라는 주장만 다루겠다. 1970년대에 일어난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 운동은 가사노동이 여성의 일이라는 고정관념을 강화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여성운동 내에서도 호응이 적었을 뿐 아니라, 페데리치 등 이 운동을 벌인 이탈리아 자율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보육센터나 공동주방과 같은 국가서비스를 통한 “가사노동의 사회화” 요구에도 반대했다(최근 번역돼 나온 케이시 윅스의 책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동녘)에 인용돼 있다). 자본주의 국가에 개혁을 요구하는 것을 곧 국가에 포섭되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런 초좌파적 태도 때문에 그들의 운동은 애초에 노동계급 여성이 참가하는 대중운동으로 발전할 소지가 없었다. 그랬던 페데리치가 1983년에 쓴 글에서 1970년대에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 운동을 무시했기 때문에 1970년대 초반부터 진행된 복지수당 축소에 제대로 싸울 수 없게 됐다고 아전인수격 주장을 하고 있다(페데리치 2011, pp111-112 참조). ↩
- Bhattacharya 2015. ↩
- 정진희 2015, 2016. ↩
- Ferguson & McNally 2014. ↩
- 윅스 2016, p354. 윅스는 이런 관점을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분석이라고 썼는데, 모든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가 이런 견해는 아니다. 자율주의 경향의 페미니스트들이 이런 시각을 갖고 있다. ↩
- Bhattacharya 2013. ↩
- Bhattacharya 2015. ↩
- Bhattacharya 2015. ↩
- 세웰 2012. ↩
- Bhattacharya 2013. ↩
- Trotsky 1932. ↩
- Trotsky 1932. ↩
- 클리프 2014. ↩
- 클리프 2014. ↩
참고 문헌
세웰, 데이비드 2012, “미국 교사 파업의 승리: 시카고 교사 ― 어마어마한 지지가 있었어요”, 〈레프트21〉 89호.
오어, 주디스 2016,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 책갈피.
윅스, 케이시 2016,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동녘.
전지윤 2015,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 — 모순의 교차와 투쟁의 결합’, 《진보평론》 65호.
정진희 2015,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 사이의 최근 쟁점들’, 《진보평론》 65호.
정진희 2016, ‘사회재생산 이론과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 〈노동자 연대〉 169호.
클리프, 토니 2014. ‘혁명적 상황에서 대중파업의 동역학과 효과’, 〈레프트21〉 120호.
페데리치, 실비아 2011, 《혁명의 영점》, 갈무리.
하먼, 크리스 2016, ‘여성해방과 계급투쟁’, 《크리스 하먼 선집》, 책갈피.
Bhattacharya, Tithi, 2013, ‘what is social reproduction theory?’, http://socialistworker.org/2013/09/10/what-is-social-reproduction-theory.
Bhattacharya, Tithi, 2015, ‘How Not To Skip Class: Social Reproduction of Labor and the Global Working Class’. https://viewpointmag.com/2015/10/31/how-not-to-skip-class-social-reproduction-of-labor-and-the-global-working-class/
Ferguson, Susan & McNally, David 2014, ‘Precarious migrants: gender, race and the Social reproduction of a global working class’, Socialist Register 2015, The Merlin Press.
Trotsky, Leon 1932,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www.marxists.org/archive/trotsky/1930/hrr/ch07.htm.
Vogel, Lise 2013, Marxism and the Oppression of Women – Toward a Unitary Theory, Haymark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