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지금의 이슈들
신자유주의 합의는 끝나는가? *
영국 국민투표에서 브렉시트 결정이 나고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한 것이 지난 30년 동안 추진된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에 큰 타격을 입혔다. 조셉 추나라가 신자유주의 위기의 정도를 평가하며 선명한 사회주의 정치로 무장한 반자본주의 투쟁이 계속돼야 함을 주장한다. 조셉 추나라는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중앙위원이고, 국내에 소개된 저서로는 《마르크스, 자본주의의 비밀을 밝히다》(책갈피),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 왜 혁명인가》(책갈피, 공저), 《차베스와 베네수엘라 그리고 21세기의 혁명》(다함께)이 있다.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질서는 2016년에 두 차례 큰 타격을 입었다. 첫째, 브렉시트 결정으로 유럽연합에서 경제 규모가 두 번째로 컸던 영국이 탈퇴하게 됐다. 유럽연합 잔류를 압도적으로 지지했던 영국 대기업들은 아직도 한탄하고 있다. 둘째,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했다. 선거운동 때 트럼프는 자유무역에 전념한 자국의 오랜 정책을 뒤집고 대규모 경제 부양책을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전기를 쓴 로버트 스키델스키는 이 모습을 보며 “트럼프의 긍정적 잠재력”을 칭찬하고 대통령 당선자가 “현대적 형태의 케인스주의 재정 정책”을 제안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브렉시트 결정 뒤 영국 총리가 된 테레사 메이는 트럼프처럼 신자유주의 교리와 단절하는 인물이 되려는 듯하다. 보수당 당대회에서 메이가 한 연설에 ‘애덤 스미스 연구소’는 분개해 이런 제목의 글을 내보냈다. “메이는 시장이 우리 문제의 해결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애덤 스미스 연구소’가 보기로 메이의 범죄는 다음과 같다: 에너지 가격 상한제 주장, 기업 이사회에 노동자 대표 참가 주장. 2016년 11월 윌리엄 데이비스는 《런던 리뷰 오브 북스》에 기고하며 메이를 “보호적 국가”의 옹호자로 묘사했다. 보호적 국가는 가치 있어 보이는 것을 돌보기 위해 개입하는 국가를 뜻한다. 메이는 그 보호 대상에 “열심히 일하는 가족”도 포함시킨다. 그들이 충분히 애쓰고 충분히 영국적(즉, 충분히 백인)이라면 말이다.
1 지역에 새삼 관심을 가지는 것은 투철한 신념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권모술수에 더 가깝다. 무엇보다 트럼프는 부동산 업계의 거물로 부유한 인사이고, “1퍼센트” 중에서도 가장 기생충적인 인사이기 때문이다.
세계화가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신자유주의의 합의를 이런 식으로 거부하는 것에는 민족주의적 관점이 포함될 수 있다. 데이비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메이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스스로 세계의 시민이라고 여긴다면, 당신은 어느 곳의 시민도 아니다.’ 이 선언은 좌파 지식인들에게만큼이나 은행가들에게도 충격이었다.” 물론 메이가 영국 노동자들에게 새삼 관심을 가지고, 마찬가지로 트럼프가 미국의 ‘러스트 벨트’정당성의 위기
트럼프와 비슷하게 메이도 공개적으로 하는 말과 비공개적으로 하는 말이 상당히 어긋난다. 2016년 봄 메이는 골드만삭스의 비공개 모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국이 5억 명 규모 무역 블록[유럽연합을 뜻함]의 일원인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얼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영국이 유럽 안에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영국에 투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메이와 트럼프는 최근의 수십 년 동안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정당성의 위기를 겪는지를 보여 줬다. 그리고 선거에서 이기고자 하는 정치인들은 국제 자본의 필요와 어긋나는 정책을 점점 더 많이 내놓아야 한다는 점도 보여 줬다. 이런 상황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중도좌파와 중도우파 사이의 합의가 정치를 지배하던 시기 뒤에 찾아온 것이다. 미국이든 영국이든 1980년대 이후 정부는 모두 국제무역협정, 민영화, 규제 완화 등 사회의 점점 더 많은 측면을 시장의 지배에 내맡기는 것을 대체로 옹호했다.
그러나 이런 합의에 대항한 반격도 성장해 왔다. 그런 반격은 2007~2008년 경제 위기 전부터 있었지만 위기 이후 더 가속됐다.
브렉시트 결정과 트럼프의 당선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신망 있는 사회주의자라면 트럼프의 당선에 대해서는 호의적으로 주장할 것이 없겠지만, 브렉시트를 놓고는 급진좌파들의 의견이 갈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눈에 확 띄는 공통점도 있다. 영국에서는 유럽연합 잔류파가 패배했고 미국에서는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이 패배했다는 점이다. 비록 일부 좌파는 유럽연합 잔류와 클린턴을 지지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지만, 수많은 노동계급 사람들의 눈에 유럽연합 잔류파와 클린턴은 지긋지긋한 신자유주의의 연속을 표상했다.
영국 노동당의 다이앤 애보트가 지적했듯이, 브렉시트는 “영국 정치 엘리트에 맞선 반항의 함성”이었다. 유럽연합이 보통사람들에게 이득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부자와 권력자의 말을 수많은 사람들은 더는 참고 들어 줄 수가 없었다. 미국 대선 결과는 트럼프의 부상이라기보다는 클린턴의 몰락이 낳은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옳게 봤듯이, 클린턴은 기업의 이익을 수호할 든든한 파수꾼이었다. 오바마에 견줘 클린턴의 득표는 부자들 사이에서는 늘었고 미국 자본주의 탓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폭락했다.
정치 양극화
중도의 위기는 계속해서 정치 양극화를 일으킬 것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파시스트 마린 르펜이 올해 4월 대선에서 2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독일에서는 이민을 반대하는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중도좌파와 중도우파를 아우르는 현 연립정부에 맞서 12퍼센트의 지지율을 받고 있다.
하지만 정치 양극화는 좌파적 대안도 창출한다. 미국의 버니 샌더스는 구름처럼 몰려든 열성적 지지자들 앞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급진적 반대 의견을 표현했다.(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지 않은 뒤로는 클린턴을 지지하자고 했지만 말이다.) 영국에서는 제러미 코빈이 노동당 대표로 재선돼 지도력을 굳혔다. 그러나 (오른쪽 방향이든 왼쪽 방향이든) 신자유주의 교리와 단절하는 것만으로 주류정치의 위기를 부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앞으로 트럼프가 어떤 경제 정책을 펼칠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그러나 그가 기업과 부자들에 매기는 세금을 삭감할 계획을 관철한다면, 그것은 신자유주의에 환멸을 느끼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지 못할 것이다. 또, 역사를 보건대 장기적으로 경제를 성장시키지도 못할 것이다. 자기 소유 호텔에서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지 못하게 싸운 트럼프가 조직 노동자들의 대변자가 될 것 같지도 않다. 트럼프는 1조 달러 규모의 사회기반시설 확충 계획을 야심 차게 내놓았지만, 마르크스주의 블로거 마이클 로버츠는 이것을 “허풍”이라고 지적한다. “이 계획은 대부분 공공 투자가 아니다. 투자의 대가로 혜택을 받을 민간 기업들이 자금을 댈 것이다.”
보호주의를 채택하고 금리를 올리겠다는 등 그의 다른 정책은 다른 나라 정부와의, 또 미국 자본주의와 세계 자본주의를 쥐락펴락하는 기업들과의 큰 긴장을 낳을 것이다. 트럼프가 자기 생각을 고집해 추진하면 세계경제가 회복하기보다는 타격을 입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브렉시트 결정 뒤에 영국 보수당은 국가재정 적자를 감축하겠다던 전 재무장관 조지 오스본의 목표를 포기했다. 그러나 메이가 긴축의 효과를 되돌리고 복지 재원을 늘릴 것이라는 징후는 없다. 게다가 보수당이 기업들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릴 것 같지도 않다. 이미 메이는 영국에서 자동차 생산을 철수하지 말라고 요청하며 닛산의 최고경영자를 비공개로 만나 뭔가를 약속을 해 줬다.(물론 모든 기업에게 이런 백지수표를 줄 것 같지는 않다.) 브렉시트 결정 뒤로도 보수당은 영국 경제에 대한 일종의 몽상을 꾸고 있다. 영국을 금융 산업에서의 강점을 이용해 전 세계와 무관세 교역을 하는 신자유주의적 천국으로 보는 것이다.
미국에서든 영국에서든 신자유주의에서 부분적으로만 이탈하는 것은 지금까지 축적된 큰 불만을 해소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정치인들이 자기 지지층을 지키려 애쓰며 인종차별과 민족주의를 더 활용하고, 그러면서 훨씬 더 우파적인 세력에게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좌파는 어떤가? 영국에서는 코빈이,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성향의 인물들이 부상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꽤 오랫동안 금기어이던 ‘사회주의’가 이제는 주류 정치권에서도 회자되는 낱말이 됐다. 하지만 계속되는 위기 속에서 좌파에게는 어려움도 있다. 두 가지가 뚜렷해 보인다. 첫째, 엄밀히 말해 근본 문제는 신자유주의 자체가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낳은 조건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1970년대에 체제를 위기로 몰아넣은 전후의 장기적 수익성 하락이 낳은 산물이다.
수익성 하락
지난 40년 동안 펼쳐진 신자유주의적 공격, 지난 거의 10년 동안 펼쳐진 긴축은 이 수익성 하락 추세를 뒤집지 못했다. 개혁주의 정치인 대다수가 내놓은 케인스주의적 처방도 상황을 바꾸지 못했다. 과거의 위기 때도 최근의 위기 때도 여러 버전의 케인스주의적 정책이 시도됐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대표 사례가 일본 정부의 ‘아베노믹스’이다.
경제를 부양하려면 자본가들에게서든 노동자들에게서든 돈을 끌어와야 하는데, 자본가에게서 돈을 끌어오면 수익성을 더 한층 악화시킬 것이고 노동자들에게서 돈을 끌어오는 것은 진보적이지 않다. 이 두 방법이 아니라면 어디선가 돈을 빌려 와야 하는데, 그러면 금융 불안정이 더 커질 것이다. 경제 위기라는 조건은 좌파적 개혁주의 정치인들의 명성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그들이 권력에 다가갈수록 그들을 빠르고 혹독한 시험대에 올려 놓을 것이다. 그 사례가 그리스의 시리자 정부이다. 시리자는 긴축을 끝내겠다고 약속하며 당선했지만 결국 긴축을 시행하며 노동자들을 공격하고 있다.
둘째 문제는 비록 더 급진적인 해법을 시도하더라도 자본 측의 결연한 반발에 부딪힐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좌파 정부가 선출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전투적 투쟁을 벌여야 개혁을 지체시키고 뒤집으려는 자본가들의 시도를 극복할 수 있다.
그런 투쟁의 중심에는, 자본의 필요에 스스로를 속박하지 않는 혁명적 정치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투쟁은 원리상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문제제기를 하는 투쟁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사회주의자들은 트럼프의 승리나 보수당의 계속된 공격에 낙담하기보다는 다음의 세 가지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첫째, 신자유주의, 긴축, ‘평상시’ 정치가 아닌 급진적 대안 문제를 제기할 좌파[적 개혁주의]의 부상을 지지해야 한다. 영국에서라면 무엇보다 코빈의 노동당에 이끌리는 사람들에게 연대를 나타내며 그들과의 공동 행동에 기꺼이 나서야 한다.
둘째, 그런 세력을 포함하는 광범한 운동을 건설해 우파로부터 밀려오는 인종차별의 물결을 저지해야 한다. 영국에서라면 ‘인종차별에 맞서자’Stand Up To Racism와 3월 18일로 예정된 인종차별 반대 시위를 건설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셋째, 그런 운동 속에 있으면서, 자본이 복잡하게 꼬아 놓은 경제적 정치적 실타래를 끊어 낼 수 있고 사회주의 건설에 헌신하는 혁명적 정치를 참을성 있게 주장해야 한다. 자본주의가 야기한 질병은 자본주의의 수단으로 치유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도전해 그것을 타도해야 한다.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