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지금의 이슈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본 오늘날의 국가와 자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오늘날 국가와 자본의 관계를 명징하게 보여 준다. 대기업들과 박근혜·최순실 간의 거래는 정경유착의 오랜 관행이 현재형임을 여실히 드러냈다. 삼성 이재용은 수백억 원을 준 답례로 삼성물산이 가진 삼성전자 주식 4.1퍼센트(약 8조 원)의 통제권을 거머쥐었으니 그야말로 최대 수혜자다.
뇌물을 건넨 기업들은 저마다 특혜를 받았다. 현대차는 1백28억 원을 대가로 사내유보금 과세 8천억 원을 면제받았고, 롯데는 12월 17일 관세청 특허심사에서 면세점 사업자로 선정돼 ‘황금알을 낳는 유통업계의 거위’를 거머쥐었다. 이는 국방부가 사드를 배치할 수 있게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자사의 골프장 토지를 정부 공유지와 맞바꾼 대가이기도 했다. 하나은행은 정유라에게 외환 특혜 대출을 해 주고 최순실의 자금 세탁을 도운 대가로 외환은행과의 합병(KEB하나은행)을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별반 대가를 얻은 것이 없다고 깨끗한 척하는 대기업도(예를 들어 LG) 모두 막대한 이익을 얻기는 마찬가지다. 기업들이 미르재단에 돈을 입금한 다음 날인 2015년 10월 27일 박근혜는 국회 시정연설에서 ‘쉬운 해고와 평생 비정규직 노동개악’ 처리를 주문했다. K스포츠재단에 입금이 끝난 다음에는 기업의 세금을 줄여 주고 각종 규제를 풀어 주는 ‘기업활력제고 특별법’(일명 원샷법)을 제정했다. 또, 박근혜는 2016년 1월 18일에는 거리에 나와 전경련과 함께 사유화를 촉진하는 ‘서비스발전법’을 처리하라는 서명운동을 벌였다. 재벌들이 박근혜와 최순실에게 건넨 8백억 원으로 얻을 특혜가 약 3조 7천억 원에 이른다는 지적이 있다(정의당 부설연구소). 삼성반도체 공장 산재 피해자에게는 “1백만 원짜리 수표 5장으로 해결”하려 하고(황유미 씨 아버지), “노조도 못 하게 하더니 권력 앞에 돈 갖다 바친 재벌”(건설노조 현수막)을 단죄하라는 목소리가 높다.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는 한국 자본주의의 DNA
1 예를 들어 삼성의 이병철은 제일제당이나 제일모직 같은 옛 일본 기업을 헐값에 받아 챙겼다. 미국 원조 물자를 약간 가공해 팔아 막대한 시세차익을 남기기도 했다. 그 대가로 이승만에게 정치자금 4억 2천5백만 환을 줬다.
국가와 자본의 유착과 부정부패는 이승만 정권 때부터 시작된, 한국 자본주의의 DNA에 아로새겨져 있는 일이다. 기업들은 초기 자본금을 ‘공유재산 사유화’로 얻었다. 귀속재산(적산)과 미국 원조 물자(설탕·밀가루·시멘트)가 그것이다. 한국 자본가들은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농지, 주택, 기업을 헐값에 사들였다.박정희 정부 하에서도 정경유착은 전방위적이었다. 박정희는 각종 산업 배정을 위한 법 개정(전자공업진흥법을 제정해 삼성이 산요와 합작해 삼성전자를 설립할 수 있도록 했다), 사업 배정 특혜(경부고속도로 및 소양강 댐 건설권을 현대건설에게 줬다), 산업 할당권 부여 등을 했다. 기업들은 토지를 거의 무상으로 제공받고, 세금을 감면받았으며(소득세 50퍼센트 감면), 친기업적 노동법을 이용해 노동자들을 단속할 수 있었다. 금융 특혜도 각별했다. 박정희 정부는 국내 은행의 금리가 25~30퍼센트였을 때 기업들에게는 5~6퍼센트의 낮은 차관 금리를 제공했고(1960년대), 아예 사채를 동결(부채 탕감)해 주기까지 했다(1972년). 다음은 한국의 정경유착에 관한 브루스 커밍스의 서술이다.
이를테면 일본의 한 은행이 12인치 흑백 텔레비전을 만든 자금으로 당신한테 시세보다 낮은 금리로 1천만 달러를 빌려 주도록 내가 주선을 하고 은행에 대여금 상환을 보장한다. 나는 우리의 자유무역지대의 한 부지를 당신한테 떼어 주고, 당신 공장까지 이르는 도로를 건설해 주고, 우대금리로 에너지와 전기를 공급하고, 당신이 건물을 짓도록 미국의 잉여 시멘트를 챙겨 준다. 나는 시장과 기술과 유통 채널을 확보하고 있는 외국 회사를 찾아서, 당신의 텔레비전을 미국의 어느 곳에서나 심지어 식료품 가게에서도 팔 수 있게 해 준다. 나는 교육과 훈련을 받은 노동력을 정해진 가격으로 지속적으로 공급할 것을 보장하고 노동조합을 불법화하고 노동 현장에서 위험스런 결사체들이 출현할 때에는 언제나 군대를 보내 준다. 나는 당신이 몇 개의 기업과 경쟁해야 할지를 결정하며, 당신의 연간 생산 목표액을 정해 주고, 당신 모두가 성장할 수 있는 여지가 있도록 확실해 배려해 준다.1970년대에는 유가 급등으로 세계시장에 오일 달러가 남아돌자, 한국 국가 관료들은 이 돈의 흐름을 중개해서 ‘대대적인 중공업 추진 정책’을 추진하고, 조선·철강·석유화학·공작기계·자동차·전자 산업에 대규모 투자를 유도했다. 그래서 1967년부터 1978년 사이 한국의 외채는 15배가 늘었는데, 이는 저개발국 외채를 모두 합한 것의 2배 규모였다. 박정희는 전자나 철강 부문에 투자하는 기업들에게 마이너스 6.7퍼센트 금리로 돈을 빌려 줬다. 사실상 이자를 대신 납부해 준 것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표현은 매우 인상적이다. 당시 “남한은 재계에 대한 국가 지원이 풍요로운 낙원이었다.” “자본의 천국이었다.”
그 대가로 받은 뇌물은 박정희와 국가관료들이 향유했다. 외국에서 훈련받은 기술관료들을 포함한 국가 관료들이 한국 기업주들과 친인척 관계를 맺는 경우는 다반사였다. 상납과 뇌물이 끊이지 않았다. 정주영이 국가 고위 관료들에게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우병우가 살고 있는 바로 그 아파트)를 상납한 것이 그 사례다. 재벌의 각종 범죄를 묵인하는 대가로 정치자금을 챙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사카린 밀수 사건이나 재벌의 친일 부역 행위를 면죄해 준 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정경유착의 대표 사례는 ‘부실 기업 정리’ 과정에서의 특혜였다. 1980년 GDP 성장률이 마이너스 6퍼센트를 기록할 정도로 경제가 공황에 빠지자 전두환 정권은 ‘사양 산업’을 정리했다. ‘부실 기업’을 인수하는 기업에 막대한 특혜가 주어졌다. 인수 기업에 특별 자금 4천6백억 원이 저금리, 장기 상환으로 주어졌다. 원리금 상환은 유예됐다. 은행 부채도 면제됐다. 세금 면제 혜택까지 주어졌다. 이때의 특혜 규모는 9조 원이었는데, 이는 1988년 전국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성취한 임금 인상액의 1.3배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그 대가로 전두환은 박근혜가 모델로 삼았다는 일해재단을 만들었다.
노태우 정권 때는 어땠을까? 국가와 자본 간의 복잡한 혼맥도는 유명한데, 사돈지간이 된 노태우와 SK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1980년 화학섬유 기업이던 선경(현재 SK)은 자기 몸집의 5배나 되던 대한석유공사(유공)를 인수했고, 노태우와 사돈지간이 된 뒤인 1992년에는 제2이동통신사업자로 선정됐다. 선경은 특혜 시비로 불만이 확산되자 이를 자진 반납했지만, 1994년 김영삼 정권 때 사유화된 한국이동통신을 헐값에 인수했다(현재 SK텔레콤). 에너지와 통신이라는 국가기간 산업의 주요 부문을 사유화 특혜로 거머쥔 것이다.
뇌물-특혜 관계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도 사라지거나 완화되지 않았다. 박근혜 측근들의 뇌물-특혜에 견줘 그 규모가 비교적 작았을 뿐이다. 한국부동산신탁회사가 용도 변경을 허락하도록 특혜를 준 경성그룹 비리 사건(1999년), 신동아그룹 회장 부인의 옷로비 사건(1999년), 한빛은행 부정 대출 비리 사건(2000년) 등이 김대중 정부의 대표 부패 사례들이다. 국민의당의 박지원, 김대중의 아들들이 해당 사건들 때문에 수감됐었다.
노무현 정부 하에서도 부패 추문은 끊이지 않았다. 나라종금과 안희정, SK와 최도술, 러시아 유전 개발 비리, 이해찬·윤상림의 골프 로비, 썬앤문 비리 등. 노무현 대선 캠프도 ‘차떼기’로 선거자금 1백13억 원을 받았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때문에 부각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명박 정부 하에서 벌어진 자원 외교 비리, 방산 비리, BBK 주가 조작과 회계 부정 사건 등은 언젠가는 다시 쟁점이 될 것이다. 건설 비리 종합판으로 일컬어지는 엘시티 비리는 이명박 정부 관료들과 포스코 간의 끈끈한 유착 관계의 결과였다.
자본주의 붙박이장
5 드러나듯 국가가 주도해 경제성장을 한 신흥공업국 고유의 특징이라는 시각 말이다.
한국의 정경유착과 부패 추문을 국가 주도 자본주의 발전의 산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정실 자본주의’(정경유착)는 브라질이나 남아공 대통령의 부패 추문에서특수성을 예외성으로서가 아니라 “두드러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레온 트로츠키의 언급을 떠올린다면 국가 주도 자본주의 발전이 정경유착에 각별히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정경유착과 부패는 결코 신흥공업국만의 특징이 아니다.
6 그러나 1990년대 옛 소련과 동유럽,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민영화 과정은 대형 부패 스캔들의 연속이었다. 신자유주의적 국가 규제 완화는 198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부패가 더욱 심화된 주요 원인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오히려 세계화는 부정부패를 세계화했다. 전 세계적으로 역외 금융 센터와 조세 회피 지역을 통한 부패 정치인이나 관료들의 돈 세탁과 재산 은닉이 글로벌 차원에서 활성화됐다.
국가 개입뿐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시장 확대도 정경유착과 부패의 동력이었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경쟁 체제가 확립되면 부패가 감소할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세계은행은 부패투명성 지수 등 다양한 지표들을 개발하기도 했다. 세계화 선도 기구들은 동아시아의 정경유착 관행이 부정부패의 뿌리라면서 시장 경쟁의 강화로 부패가 완화될 것이라고 강변했다. “일반적으로 경제의 경쟁 정도를 증대시키는 모든 개혁은 부패 행위의 유인을 감소시킬 것이다. 외국 무역에 대한 통제를 낮추고, 민간 산업에 대한 진입 장벽을 제거하고 경쟁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정책들은 모두 이와 같은 반부패 투쟁을 지지할 것이다.”독일의 대기업 지멘스 사례를 보면, 한국에 견줘 제한적이나마 노동자의 경영 참가가 보장돼 있는 독일조차 정경유착이나 부정부패에서 제외돼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지멘스는 분식 회계, 공금 횡령, 탈세, 비자금 조성, 뇌물 제공 등 부패 스캔들의 대표 사례다. 경영진이 부당하게 빼돌린 회사 공금이 1억 유로 이상이다. 총 3백32건의 프로젝트에서 4천2백83건의 뇌물 제공 사실이 드러났고, 전체 뇌물 공여액은 14억 달러로 집계됐다. 벌금과 부당 이득 환수 금액이 무려 16억 달러에 달했다. 그리스 올림픽 때에도 지멘스의 입찰 비리가 폭로됐다.
미국의 엔론 사태는 미국도 정실 자본주의(연줄 자본주의)의 예외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줬다. 대규모 회계 부정 사건을 저지른 엔론은 2001년 말 미국의 7대 기업 중 하나였고, 조지 부시 대통령과의 유착으로 유명한 기업이었다.
7 미국에서는 아예 금융가들이 의회 규제위원회장과 재경위원회장을 맡는다. 미국 상원의원의 3분의 2가 억만장자다. 재무장관이나 의회 재경위원회 위원들이 미국의 ‘경제 관료 사관학교’로 불리는, 미국의 대표적 투자은행 골드만삭스 출신자들이다. 트럼프 당선인의 재무장관 내정자 므누신은 17년 동안 골드만삭스에 몸담은 인사이다. 골드만삭스 출신 재무장관으로는 로버트 루빈(빌 클린턴 정부)과 헨리 폴슨(조시 W 부시 정부)이 있다.
한국에서는 전관예우라 불리는 국가 관료와 대기업 간부의 ‘회전문 현상’은 합법적 정경유착의 일종으로 미국에서 두드러진 현상이다. 김문성이 지적했듯이 이는 미국의 보편적인 현상이다.순진한 개혁주의자들이 지상낙원으로 여기는 북유럽의 스웨덴과 핀란드에서도 에릭손·노키아 등 대기업과 정부 간의 유착과 비리는 낯설지 않은 일다. 북유럽 나라들에는 제2차세계대전 때 독일에 군수품을 납품하며 나치에 부역한 기업주가 적지 않다.
국가와 자본이 뇌물과 특혜의 관계로 얽히고설켜 있는 까닭은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현실에서는 자본이 여러 자본들로 존재하며 서로 경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총자본’이라는 개념은 허구적이다. 여러 자본들은 노동을 향해서는 형제이지만, 서로 혈투를 벌이는 운명을 타고났다. 자본은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숙명 때문에 특별잉여가치를 얻기 위한 시장 선점과 R&D 투자에 사활을 건다. 그러려면 최고의 입지(판로 및 원료 공급에 유리한 부지와 노동력의 원활한 공급지)와 원활한 자금 조달 등이 필수적이다. 최고의 입지 확보와 금융 지원을 위해서는 국가 관료들과의 인맥이 사활적이다. 원활한 자금 조달을 위해서는 주가 상승을 꾀해야 한다. 그러려면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견해”라고도 표현한 이윤이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게 해야 한다. 기업이 재정 상태나 경영 실적을 실제보다 좋게 보이게 할 목적으로 부당한 방법으로 자산이나 이익을 부풀리는 분식회계가 자본주의 기업 경영의 관행인 까닭이다.
자본의 시초 축적 그리고 국가와 자본 그런데 국가와 자본의 부패는 국가와 자본 간의 오래된 융합의 역사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자본의 시초 축적 과정은 자본이 그 시작부터 국가라는 폭력적인 체계를 동반했음을 보여 준다. 이에 관해서는 마르크스가 《자본론》 제1권의 8편 ‘시초 축적’에서 매우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자본은 토지 약탈, 임금노동이라는 규율 확립, 국채 등의 국제 신용제도, 인두세를 비롯한 각종 세금 제도 확립 등을 필요로 했다. 공적으로 사용되던 토지가 헐값에 증여되거나 횡령으로 사유지에 병합됐다. 그 토지에서 농사 짓던 농민들은 쫓겨나 부랑자가 됐다. 그러나 그 농민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임금노동자가 되겠어’ 결심하고 공장으로 향한 것은 아니다. 체계적인 법과 제도가 생겨나 부랑자가 된 농민들에게 임금노동에 필요한 규율이 강제됐다. 부랑자로 여러 번 체포되면 태형에 처하는 법령이 제정됐다. ‘거지면허법’ 같은 법까지 만들어졌다. 즉,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이 자연스럽게 임금노동자가 된 것이 아니었다.
신흥 부르주아지는 노동일을 연장하고 노동자들을 자본에 종속시키기 위해 국가 권력의 다양한 강제력을 활용했다. 국가는 성과급제와 하루 노동에 대한 임금률을 확정하고 단결금지법 등의 노동악법을 제정했다. 국가는 경찰, 상비군, 관료제 유지를 위해 현금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인두세 등을 비롯한 각종 세금 제도를 만들었으며, 자본 축적을 위해 국채 제도와 국유 은행 등을 만들었다.
따라서 자본과 국가의 관계는 상인과 절대왕정의 관계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국가는 상품자본이나 화폐자본뿐 아니라, 생산자본(토지, 공장설비, 인력 등)의 이해관계에도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 자본주의 초기 상인들은 해외에서는 자유무역을, 국내에서는 보호무역 정책을 추진하면서 시세차익을 얻었지만, 제조업 다시 말해 생산자본을 위한 조처들에는 무관심했다. 그래서 고전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는 상인들이 국내 독점 가격을 유지하려고 저렴한 곡물 수입에 반대하는 게 국내 제조업(다시 말해 생산자본)의 번영에는 결코 도움되지 않는다며 불만스러워 했다. 자본주의 국가를 경제적 이권과 연동된 강제력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의 성격을 다소 몰역사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자본은 상품자본과 화폐자본뿐 아니라 생산자본으로서 존재하는데, 생산자본의 경우 그 태생부터 자본주의 국가의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자본주의 국가는 영토(토지), 산업(공장), 노동력 수급 전반(인력)이 재구성되고 창출되는 과정에서 수립된 특정한 시기의 산물이다. 이 맥락에서 크리스 하먼의 설명이 매우 중요하다. 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지리적으로 몰려 있는 생산자본, 상업자본, 화폐자본의 무리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지역의 사회적·정치적 여건을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만들려고 서로 협력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국가 형성을 추동했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의 구조들이 자본이 요구해서 만들어진 직접적인 결과라는 뜻은 아니다. 전前 자본주의 국가의 많은 요소들은 그저 분쇄되고 교체된 것이 아니라, 구질서 속에서 자라난 자본들의 필요에 맞게 재구성됐다. 그러나 그런 요소들은 또한 이전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즉 자본주의적 착취의 논리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적극 변형된다.”
봉건 과제 수행, 귀속재산 불하와 미 원조 물자 무상 증여 등은 국가의 조력 없이는 불가능했다. 물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강점기 초기에도 근대적 형태의 기업이나 금융기관 설립에 주도적 구실을 한 관료 출신자들이나 어용 상인들은 국가 권력과의 결탁을 통해 정부를 대상으로 한 영업 활동으로 시초 축적을 이뤘다. 그들은 조선 경제가 일본 제국주의 경제로 편입되는 과정에 동승함으로써 새 권력과 유착했다. 그들은 공동 창고 회사, 어음조합, 농공은행 등 금융기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같은 척식기구 설립 프로젝트에 연루됐다. 10
앞서 지적했듯이 한국 자본주의의 시초 축적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토지개혁을 통한 반反다시 말해 국가와 자본은 ‘출생의 비밀’을 공유할 정도로 유착돼 있다.
자본의 경쟁적 축적(집적과 집중 과정) 그리고 국가와 자본 자본의 경쟁적 축적 과정에서도 국가는 자본과 더욱 융합된다. 이것은 자본의 집적과 집중의 필연적 결과이다. 경쟁에서 이기는 기업은 더 작은 기업을 흡수하고 경제 권력은 갈수록 소수의 자본에 집중된다. 이 기업들이 산업 전체를 쥐락펴락한다. 그 과정에서 국가가 경제 전반에 개입한다. 경쟁적 축적이라는 자본의 숙명은 다음과 같은 국가의 구실을 필요로 한다. 첫째, 국가기구를 운영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정치 이데올로기가 무엇이든 경제가 최소한의 활력을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국가는 산업이 잘 돌아가고 기업이 활력을 유지해야 통치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국가기관장들은 자본가들의 분명하고 노골적인 메시지뿐 아니라 간접적으로 경제지표를 통해서도 자본가들의 필요를 읽어 낸다.”
그래서 국가 관료들은 때때로 개별 자본가들보다 ‘더 넓은 시야’로 투자 문제에 접근한다. 국가는 자본에게 필요한 적절한 입지, 판매를 원활하게 하는 교통, 에너지 등 기반시설 등을 제공해야 한다. 특히 항만, 공항, 도로 등 원료를 원활하게 공급하고 수송 비용을 절약하는 데 필요한 시설은 사활적이다. 따라서 자본은 토지 개발 사업을 진두지휘하는 국가기구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자본가들은 금융 사업 특혜(대출)를 받고 토지 용도 변경에 관한 고급 정보를 얻으려 하고, 입지 조건이 좋은 지역에 대규모 산업단지를 만들려 한다.
13 후술하겠지만, 이와 같은 산업 정책들은 개별 자본들과 국가 관료들 사이의 동맹을 강화시키기도 하고, 여러 동맹들 사이의 갈등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국가는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산업을 육성·지원하고 승산이 없어 보이는 산업이나 기업을 구조조정 대상으로 삼는다. 물론 그 계획을 자기 뜻대로 완수하는 데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경제가 불황에 빠지면 실패 확률은 더 높다. 사실 박근혜의 ‘창조경제’는 1990년대 영국에서 잠시 인기를 끌었다가 흐지부지된 문화·미디어·스포츠 관련 산업 융성 정책에서 따온 것이다.둘째, 산업의 활력을 위해 국가는 숙련 노동인구와 고급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 특허 기술을 가진 각종 국공립 연구소와 지적재산권 관리도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국가가 산학협력이라는 이름 하에 비교적 낮은 임금과 위험한 실험 환경을 감수하는 대학의 연구소들을 잘 관리해야 한다. 교육부가 대학들에 요구해 미래, 창조, 융합(때때로 라이프) 같은 핵심어가 들어가는 단과대를 설립하고 학과를 구조조정해 기업들에 필요한 인력과 기술을 맞춤형으로 제공하려 애쓰는 까닭이다. 노동자들이 아무리 지치고 피곤해도 내일도 내년에도 공장과 사무실로 출근하게 하고, 다음 세대 노동자를 무리 없이 창출하려면, 자본주의 국가는 최소한의 보건·의료와 교육 체계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OECD 국가 통계에서 보건·의료 및 교육 부문에 대한 지출이 상승하는 까닭이다. 이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사회복지 지출 비중은 GDP의 10.4퍼센트로 OECD 평균(21.6퍼센트)의 절반 수준이지만, 해마다 꾸준히 늘기는 했다.
그러나 박근혜의 노동개악 법안들에서 드러나듯이, 불황기에 국가는 값싸고 유순한 노동력을 제공해야 한다. 셋째, 국가는 화폐를 관리한다. 국가는 통화 발행과 외환 확보, 주가와 금리 등 유동성을 관리한다. 환율과 기준금리를 개별 자본이 결정할 수는 없다. 특히 수출 대기업이 고환율과 낮은 금리로 자금 확보력을 배가할 수 있는 만큼, 국가는 수출 대기업에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
16 관세라는 영역은 현대 자본주의에서 매우 중요한 영역이다. 미국과 중국이 갈등을 빚는 중요한 쟁점이기도 하다.
넷째, 국가는 원활한 시장 판로 개척, 상업 관계에 대한 법적 규제, 유통업체 인허가, 국제 통상 절차 조정 등을 관할한다. 아무리 재벌이라고 해도 한 나라를 대표해 다른 나라의 외교통상부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할 수는 없다. 부하린이 일찍이 《세계경제와 제국주의》에서 지적했듯이, 자본주의 국가는 자국 수출 기업들을 위해 관세 협정을 유리하게 맺으려 하고 수입에 대해서는 국내 기업 보호를 명목으로 일정한 관세를 매긴다.17 ‘공정한 수사 및 법 체계’라는 ‘중립성’이나 ‘독립성’은 기만이다. 사법기관들은 때로는 지배계급 내부에서 경쟁 분파를 제거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그 본연의 임무는 계급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국가는 단지 행정부 수반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뿐 아니라 그 휘하의 국가 기구들, 검찰, 경찰, 감옥, 군대 등 선출되지 않는 기구들까지 모두 가리키는 것이다.
다섯째, 임명된 각종 공공기관장을 비롯해 상명하달식 관료제가 없으면 국가 기구는 운영될 수 없다. 근본적으로 행정부·사법부·입법부의 삼권분립은 허상이다.국가의 힘이 막강하다는 것을 최근에도 확인할 수 있다. 전 청와대 민정수석 김영한의 비망록은 국정원과 청와대가 막강 권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생생한 증거다. 청와대는 검찰·법원뿐 아니라 대한변협 등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민변이 정부 관련 사건을 수임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박근혜가 탄핵 위기에 놓인 그 순간에도 한 달 동안 약 22명의 공공기관장을 임명한 것에서도 드러나듯, 국가는 재정 지원, 주요 전략 기업의 사장 임명권, 국세청·검찰·국정원 등을 통한 압박 등을 통해 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단을 갖고 있다.
여섯째, 위와 같은 비민주적 기구들로 이뤄진 국가 또한 세계 무대에서 다른 국가와 경쟁한다. 이 치열한 경쟁에서는 무장력이 사활적이다. 국가를 운영하는 자들에게는 군사력을 포함해 거대한 관료 국가 기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국가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심각한 경제 위기를 배경으로 보호무역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는 만큼 자본은 국가의 무장력에 기대서라도 해외 시장 판로가 원활하게 확보되기를 바란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굴리엘모 카르케디는 유로화가 기축통화가 되지 못하는 이유를 언급하면서, 기축통화가 힘을 가지려면 군사력이 반드시 떠받쳐 줘야 한다고 지적한다. 떨어지는 경제력을 국가의 무장력 활용으로 만회하려는 전략은 21세기 이후 미국 지배층의 세계 재패 전략 중 하나였다.
지금까지 설명했듯이 국가와 자본은 태생부터 지금까지 체계적으로 서로 기대는 관계를 구축했다. 이를 두고 크리스 하먼은 ‘구조적 상호의존 관계’라고 불렀다.
현대 자본주의 하의 국가와 자본
마르크스주의자들 내에서도 국가를 단지 자본의 도구로, “자본가 계급의 집행위원회”일 뿐인 것으로 보는 시각이 꽤나 있다. 그러나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대 자본주의 하에서 권력은 결코 시장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물론 권위주의 정권 때처럼 국가 권력이 대기업을 턱으로 부리는 일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지만 말이다. 현대 자본주의 하에서 국가는 기업들에게 권력을 넘겨야 할 정도로 약화되기는커녕 더 큰 구실을 요구받는다. 그래서 ‘삼성공화국’이니 ‘재벌공화국’이니 하는 말은 부지불식간에 국가 권력을 ‘5년짜리 임시직’이나 행정부 수반으로 축소시켜 보며, 국가가 시장의 요구를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존재일 뿐인 것으로 이해할 위험이 있다. 흔히 국가를 단지 상부구조로 취급하는 경우가 빈번하지만, 현대 자본주의에서 국가는 갈수록 경제의 매우 중요한 기능을 차지해 간다.
국가를 자본과 동일시하는 견해도 일면적이다. “박근혜는 국민 마음 속에서 이미 탄핵됐기 때문에 박근혜 즉각 퇴진이나 황교안 사퇴보다는 재벌 공격 요구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좌파 일각의 주장은 “자본에 대한 반대가 곧 국가에 대한 반대”라고 보는 노동자주의적 경향과도 맥을 같이 한다. 앞서 지적했듯이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고용한 노동자들의 도전이나 다른 자본과의 경쟁, 다른 국가의 압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국가를 필요로 한다. 동시에 억압적 국가 기구들 역시 자본가 계급의 일부다. 국유기업의 경영진, 검경 고위직, 사법부 고위직, 공공기관장들, 군장성들은 여러 결정을 내릴 권한이 있다. 다시 말해 자본과 국가의 관계는 단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수동적으로 대변하는 관계가 아니다. 서로 다투기도 하고,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서로의 이해관계를 수렴시키는, 체계적으로 서로에게 의존하는 관계다. 박근혜 퇴진이나 황교안 사퇴 요구를 자본과 융합돼 있는 국가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조명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국가는 자본들의 시초 축적과 경쟁적 축적에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하고 원활하게 조정하는, 상부구조이자 토대이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 하에서 국가는 토대의 일부다. 현대 자본주의 하에서 국가의 구실은 국가 재정 규모에서 잘 드러난다. 한국 정부의 국유 재산 규모는 9백12조 원이다. 국가가 보유한 유가증권 규모는 1백54조 원이다. 정부가 지분의 100퍼센트를 소유한 산업은행이 최대 지분을 갖고 있는 자회사가 2백88곳이다. 한국 정부의 1년 예산이 4백조 원인데, 어느 재벌도 이만한 돈을 운용할 수 없다. 2015년 기준 GDP 대비 정부지출의 규모는, 미국·영국·일본 등이 약 40퍼센트, 프랑스·독일·스웨덴이 약 50퍼센트이다. 한국은 이보다는 적지만, 그래도 중앙정부 지출과 지방정부 지출을 합치면 30퍼센트를 넘는다.
경제 위기 시기의 국가와 자본, 그 실천적 함의
물론 국가와 자본 사이에는 긴장도 있다. 자본이 국가의 뜻을 거슬러 자본 도피나 탈세 등의 행동을 할 수도 있다. 반대로 국가가 자본들의 뜻을 거슬러 행동할 수도 있다. 20세기 역사를 보면, 독일의 나치, 아르헨티나의 페론, 이집트의 나세르, 시리아와 이라크의 바트당 등 정부가 자국 영토 내에 있는 주요 자본가 집단과 갈등을 빚거나 심지어 그들의 재산을 몰수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국가와 자본이 서로 엇나가는 것은 특정한 한계 내에서이다. 자본은 본사가 위치해 있는 국가의 이해관계를 거슬러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갈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삼정전자는 중국 시안 지역 34만 평 부지에 낸드 플래쉬 메모리 공장을 설립하려는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에서 박근혜의 덕을 봤다. 중국의 시진핑이 일명 ‘산시 스피드’陝西速度’라는 이름 하에 보통 1년씩 걸리는 관련 행정 절차를 88일 안에 끝내도록 적극 지원했다. 삼성이라는 세계적 대기업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행보이기도 했겠지만, 한중FTA 체결이나 박근혜의 중국 방문 등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 밖에도 관세, 통관 절차, 환율 정책 등은 국가 권력의 소관 사항이다.
국가도 조세 수입이나 다른 국가에 맞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결국은 자본 축적의 지속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자본주의 하에서 투자 결정은 자본가들이 하는데, 그 결정에 따라 실업이나 경제 성장의 정도 등이 큰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좌파가 집권해 기존의 국가 기구를 그대로 인수할 경우, 결국 자본 축적을 도와야 하는 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부패 고리가 형성되고 정경유착 관계가 형성된다. 브라질의 노동자당이나 남아공의 공산당과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경험이 잘 보여 주고 있다.
자본주의 국가는 좌파가 인수받아 재활용할 수 있는 기제가 아니다. 국가는 자본의 이해관계를 적극적으로 보전하는 그 역할 때문에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요컨대, 국가와 자본은 때때로 엇나가기도 하지만 구조적 상호의존적 관계로 융합된다.
자본은 서로 경쟁한다. 그래서 각각의 자본은 다른 자본보다 우위에 서거나 자신의 이윤을 안정적으로 보장받기 위해 다양한 연줄과 인맥을 만들어 국가 관료와 유착한다. 이명박 정부는 포스코·대우조선해양·롯데와 친했고, 김대중 정부는 현대와 친했고, 박근혜 정부는 여러 기업과 두루 친하면서도 삼성과 유독 가까웠다. 국민연금 수천억 원을 희생시켜서라도 이재용의 경영 승계를 보장한 것에서 보듯이 말이다. 김영한 비망록을 보면, 청와대는 삼성그룹의 승계 과정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했다.
그러나 경제가 잘 돌아가지 못할 때에는 자본들 사이에는 물론이고, 국가와 자본들 사이에, 각각의 자본과 연결된 국가 관료들 사이에 균열이 심상치 않게 일어난다. 구조조정을 둘러싼 갈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현대 자본주의는 산업 구조조정이 성공하기 힘들게 만드는 환경을 제공한다. 산업들 간의 연관관계 때문에 특정 산업에 대한 구조조정은 다른 산업마저도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 구조조정에 따른 손실을 어떻게 배분하고 처리할 것이냐를 놓고도 지배층은 심각한 분열에 휩싸이곤 한다. 조선·해운업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두 업종에 대규모 자금을 지원해 온 KDB산업은행과 한국수출입은행의 손실을 그대로 두고 봐야 하느냐 아니냐를 놓고 심각한 이견이 표출됐다.
기업 구조조정도 용두사미로 끝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개별 기업과 유착돼 있는 정치인들이나 국가 관료들의 반대에 부딪히곤 하기 때문이다. 기업 부실의 책임과 부담을 국책은행과 대주주들이 분담할 것인지 말 것인지, 분담한다면 어떻게 나눌 것인지를 놓고 분열이 깊어지곤 했다. 김대중 정부 때 산업 구조조정이나 기업 구조조정이 말잔치로 끝나고 흐지부지된 것도 그 때문이다. 결국 구조조정은 위기에 아무 책임 없는 노동자들에 대한 인력 구조조정으로 귀결돼 왔다.
구조조정은 국가와 자본 간의 갈등, 그리고 국가 기구 내의 갈등을 지속적으로 유발한다. 각각의 자본들이 서로 국가 기구 내 상이한 세력에 줄을 대므로, 자본 간의 경쟁이 국가 기구 내의 갈등으로 표출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2014년 12월 말에 “친이와 친박이 싸워서 서로 폭로하면 공멸할 수 있다”고 경고했는데, 박근혜는 2015년 3월 이완종 신임 총리를 내세워 ‘부패와의 전쟁’이라는 미명 하에 자원외교·비리·방산비리 등을 물고 늘어졌다. 그 뒤 〈조선일보〉는 ‘그런 친박 너희들은 부패의 온상 아니냐’면서 최순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상호 폭로의 계기는 대우조선해양 구조조정이었다. “촛불은 바람 불면 꺼진다”고 말한 새누리당 김진태가 〈조선일보〉 간부들과 대우조선해양 경영진들의 외유 사진을 폭로하면서 폭로전이 시작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구조조정의 대상·속도·방식을 둘러싼 견해 차이와 갈등은 자본들 사이, 국가 기구 내에 스며 있는 다양한 분파들 사이의 갈등으로 번진다.
이 갈등이 부패 비리 폭로전으로 이어질 경우 대중의 분노는 폭발할 수 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위기의 대가를 왜 우리가 치러야 하는가? 구조조정의 피해를 왜 노동자들이 져야 하는가? 근본적인 의문이 생겨나게 된다. 부패 비리 폭로는 흔히 후진적 대중도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만든다. 이는 인력 구조조정에 대한 회의와 반발심을 자극한다.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투쟁이 승리할 수 있는 정세와 환경을 적극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투사들은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부패 문제는 단지 민주주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와 자본의 그 뿌리 깊은 관계를 이해한다면 말이다. 경제 위기는 모순과 균열을 더 부채질하고 지배계급 내의 쟁투를 더 날카롭게 할 것이다. 좌파가 저들의 분열과 위기를 활용해 퇴진 운동이 계급 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기여해야 할 때다. 국가와 자본 관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시각은 오늘날 혁명적 좌파가 사태 변화에 영향을 미치려는 데서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주
- 절반의 가격으로, 그것도 15년 무이자 장기 분할로 불하받았다. ↩
- 커밍스 2001, pp444-445. ↩
- 커밍스 2001, p446. ↩
- 삼성(이병철), 현대(정주영), LG(구인회) 등 주요 자본가들이 친일 부역을 통한 부정 축재자 목록에 이름을 올렸지만, 박정희는 부정 축재자가 공장을 건설해 그 주식으로 벌과금을 납부하도록 하는 ‘부정축재환수절차법’을 제정해 면죄부를 줬다. ↩
- 브라질 동부 사우바도르 시의 건축물 고도 제한을 완화하는 데 압력을 넣은 사건으로 브라질 대통령이 탄핵됐다. 남아공·아랍에미리트 등지에서 광산업·군수산업·철도산업 등에 개입한 인도계 재벌 굽타 일가는 남아공 주마 대통령과의 연줄로 국가기간 산업 계약을 체결했다. ↩
- Worldbank 1997, p105. ↩
- 김문성 2016, p12. ↩
- 마르크스 2015, pp977-1062. ↩
- 하먼 2015. ↩
- 한국 자본주의의 시초 축적에 관한 논의는 이 글의 주요 주제는 아니므로 더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다. 다만 이에 관한 논의에서 오미일 2015의 연구는 참고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
- 이는 국가 관료의 계급적 성격과 국가 지출의 모순적 성격을 설명한 하먼 2012의 1장, 그리고 자본과 국가의 관계를 불균등 결합 발전론과 다수 국가 간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조명한 캘리니코스 2011을 바탕으로 서술한 것임을 밝힌다. ↩
- 최일붕 2015. ↩
- 박근혜의 ‘창조경제’는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김어진 2015를 참고할 수 있다. ↩
- 보건복지부 통계. ↩
- 이명박 정권 하에서 강만수 재정경제부 장관이 의도적인 고환율 정책을 구사한 까닭이다.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직후 원자재 가격이 급등한 상황에서 수입 물가가 급등해 ‘장바구니 물가’가 살인적으로 오를지라도 수출 대기업의 이윤을 늘릴 수 있다면 상관없다는 게 이명박 정권 경제 정책의 요지 아니었던가. 낮은 금리도 노동자들을 위한 정책이 아니었다. 저금리 정책으로 돈을 주식시장으로 유도했고 주가 상승으로 기업의 이윤이 보전됐다. ↩
- 부하린은 제국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국가의 관세 정책은 자본가들만 살찌우고 국내 대중 소비자들에게는 내핍을 강요할 뿐이라고 지적한다. ↩
-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이야말로 소위 3권 분립이라는 허구성을 극복한 최고의 정치 형태임을 역설하면서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중립성’이나 ‘독립성’에 관해 일침을 놓은 바 있다. “사이비 독립성의 가면은 법관들이 역대 모든 정부에 대해서 충성을 맹세한 다음 다시 그것을 파기하곤 했던 자신들의 비굴한 복종을 은폐하는 데 기여했다.” 마르크스 1990, p344.(필자가 원문에 맞게 번역을 수정함) ↩
- 박근혜가 탄핵소추되자마자 황교안은 “기울어져 가던 박근혜 정책(국정 역사교과서, 사드 배치, 성과주의)를 기다렸다는 듯” 추진했다. 황교안 체제가 밀어붙인 결과, 금융위원회가 강행을 지시해 8개 시중은행이 성과연봉제 도입을 결정했다. 그래서 《신동아》 2017년 신년호에서는 “황교안을 범보수 후보로 띄워 보려는 시나리오가 가동”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허만섭·송국건 2017. ↩
- 국가와 자본 관계에 대한 비변증법적 인식에 대한 설명과 비판은 최일붕 2015를 참고하시오. ↩
참고 문헌
김문성 2016,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퇴진 운동’, 《마르크스21》 17호(2016년 겨울).
김어진 2015, ‘창조경제의 정치경제학: 창조경제 담론의 기원’, 《세계화와 한국의 축적체제 변화》, 정성진 등, 한울.
마르크스, 카를 2015, 《자본론 Ⅰ(하)》, 비봉출판사.
마르크스, 칼 1990, 《프랑스 내전 3부작》, 소나무.
보건복지부, 《연도별 예산 자료 2006-2015년》
http://www.index.go.kr/potal/main/EachDtlPageDetail.do?idx_cd=1404
오미일 2015,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 민영휘에서 안희제까지 부산에서 평양까지》, 푸른역사.
최일붕 2015,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란 무엇인가?’, 《자본주의 국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 책갈피.
캘리니코스, 알렉스 2011, 《제국주의와 국제 정치경제》, 책갈피.
커밍스, 브루스 2001,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하먼, 크리스 2012, 《좀비 자본주의》, 책갈피.
하먼, 크리스 2015, ‘오늘날 국가와 가본주의’, 《자본주의 국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 책갈피.
허만섭·송국건 2017, ‘”봉황 자리에서 일하시길 앙망” 〈총리실 민정팀〉, “사람 앞날 알 수 없지” 〈黃〉─ ‘황교안 汎보수 후보 시나리오’ 가동?’, 《신동아》(2017년 1월).
World Bank 1997, World Development Report: The State in a Changing World, Oxford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