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자유주의의 한계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이 글은 1990년 SWP의 맑시즘 1990의 한 워크숍에서 당시 당 중앙위원 린지 저먼이 한 발제를 최일붕이 녹취해서 개작한 것이다. 최일붕은 당시에 직접 그 포럼에 참석했다. 민주주의의 의미와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는 1989년 동유럽 혁명과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정치 논쟁의 핵심 쟁점이 됐다. 이 글은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태도를 밝혀 노동자 투쟁의 민주주의적 본질을 잘 드러내고 있다.
사회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사이에는 역사적 관계가 존재한다. 물론 사회주의 사상은 자유주의 정치사상으로부터 그냥 평탄하게 성장해 나온 것이 아니다.
17세기와 18세기에 대두한 자유주의 정치철학에 따르면, 자본가와 노동자는 동등한 존재로서 서로 대등한 입장에 있고, 각자 교환할 것을 가지고 있다. 노동자는 노동력을 갖고 있고,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줄 임금을 갖고 있다. 각자는 사회 밖에 자리 잡고 있고, 역사에서 떨어져 나온 고립된 존재로서 간주된다. 자본가의 소유는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고, 노동자는 자유로이 노동을 팔거나 무를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진다.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의 구조물을 이루는 일련의 새로운 정치적 이념들, 즉 자유, 평등, 권리, 공민권 같은 이념들이 인간 관계에 대한 이러한 그림으로부터 발전해 나왔다.
그 그림은 이상화된 그림이었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평등한’ 교환 행위는 실제로는 전혀 평등하지 않았다. 자본가의 재산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노동과 임금의 불평등한 교환을 통해, 즉 착취로부터 획득한 것이다. 자본가는 폭력 ─ 식민지 약탈, 농민을 토지로부터 쫓아내어 강제노동으로 내몰기, 노동시간 연장, 아동 노동 이용, 쥐꼬리만 한 임금의 지급 ─ 을 통해 그의 부를 획득했다.
노동자들이 ‘공정한’ 임금을 받아 낼 수 있는 방법은 다른 노동자들과 단결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추상적인 평등과 자유를 가능성으로, 정치적 요구로 여길 수 있게 되는 것은 오직 집단으로 움직일 때뿐이었다. 단결함으로써 노동자들은 고립을 떨치고 나와 사회로, 정치 생활로 들어갔다. 사회주의적 의식의 새벽은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세계관의 모순으로부터, 그리고 그것과의 적대 속에서 밝아 왔다.
자본주의적 관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된 자유주의의 허울과 그 허울이 거짓임을 드러내 주는 소름 끼치는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은 자본주의에 대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을 불렀다. 로버트 오언을 중심으로 한 운동에는 처음에, 미국 헌법이 가장 완벽한 정치적 형식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권리가 주어지기만 한다면 틀림없이 모든 부당함이 일소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이런 주장의 논거를 토마스 페인의 《인권》에서 가져왔다. 그러나 1830년대에 이르러 미국 노동자들의 참상, 특히 이주노동자의 비참함은 정치적 평등이 물질적 불평등을 없앨 것이라는 기대를 여지없이 깨뜨려 버렸다.
마르크스도 자유주의의 가장 왼쪽에서, 즉 철저한 민주주의자로서 정치적 삶을 시작했다. 그는 경제 영역을 포함한 생활의 모든 영역으로 민주주의의 원리를 확장하기 위해 분투했다. 그의 라인란트에서 법의 계급적 성격을 분별해 알게 되면서 그는 이 자유민주주의 정치에 의문을 제기했다. 당시 의회는 프러시아 국가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의 희망이었지만, 한결같이 농민의 이익을 희생시키면서 사업 하는 자들에게 유리한 법률들을 제정했다. 예컨대, 삼림 지대에서 죽은 나무를 채집하는 것은 이제 처벌받는 범법 행위가 됐다. 마찬가지로, 산딸기가 시장에 내다팔 수 있는 상품이 되자 생활이 어려운 시기에 산딸기를 채집할 수 있었던 빈민들의 전통적 권리는 금지됐다.
마르크스는 처음에 자유주의 국가를, 계급 이해관계에 의해 왜곡되긴 했어도 자유의 구현, 계몽주의 정신의 계속으로 여겼다. 양파 껍질처럼 계급 이해관계를 벗겨내면 자유주의의 정수가 발견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껍질이 벗겨진 양파처럼 자유주의 속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자유주의는 계급에 바탕을 두고 있었고, 자유주의 국가는 빈민 위에 군림하는 사업가들의 권력의 구현체였다.
자유민주주의의 계급적 성격
민주주의는 20세기 초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격렬하게 전개된 논쟁의 주제였다. 당시 나온 주장들 가운데 많은 것이 지금의 논쟁 속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처음 독일 사민당 내에서 ‘수정주의’를 주창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를 부르주아(즉,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점진적 진화의 종결점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른슈타인의 견해로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과 마르크스를 사회주의적 결론으로 몰고 간 모순들은 실은 잘못 짚은 것이었다.
민주주의의 이념들은 …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을 위한 정의와 권리의 평등이라는 이념을 포함하며, 그러한 원리는 결국 다수의 지배로 끝난다. 그래서 각각의 모든 구체적 경우에 인민의 지배는 이 다수의 지배로 확장된다. 다수의 지배가 더 많이 채택되고 보편적 의식을 지배하면 할수록 민주주의는 의미상 만인을 위한 자유의 최고 형태와 같은 것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원리상 계급 지배의 폐지이다. 비록 계급의 폐지는 아직 아니지만 말이다.
사회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는 앞서 언급된 자유민주주의의 계급적 내용을 부정하는 입장이 근저에 깔려 있다. 만일 ‘민주주의’와 국가가 계급 이해관계를 초월해 사회 위에서 자유롭게 떠다닌다면, 노동계급 또는 그 대표자들이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깨닫게 된 것처럼, 자유주의 ─ 고립된 개인, 원자화된 노동자라는 관념에 바탕을 둔 ─ 는 자유주의가 토대로 삼는 계급 착취의 현실을 감추고 가리기 위해 자유주의 정치의 계급적 본질을 부정한다. 오직 계급 이익의 폐지에 바탕을 둔 국가만이 자신의 계급적 본질을 공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직 피착취 계급의 권력에 바탕을 둔, 그리고 그들을 지배해 온 착취계급에 맞서는 국가만이 모든 계급의 폐지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국가 ─ 자유주의 국가를 포함해 ─ 를 본질적으로 계급 지배의 도구로 보게 되면 사회주의 지향적 노동자 국가의 구실은 명백해진다. 어떤 ‘권리’들 ─ 예컨대 타인의 노동을 착취할 권리 ─ 은 폐지될 것이며, 사회의 어떤 부분에게는 투표권이 박탈될 것이다. 1917년 혁명 후 러시아 헌법은 참정권을 “사회적으로 유용한 노동의 생산에 의해 자신의 생활비를 버는” 사람들, 병사, 지체장애인 등에 한정했다. 노동을 고용하는 자, 금리생활자, 민간 상인, 승려 및 사제, 관리 및 경찰 등은 배제됐다.
1918년 제헌의회의 해산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적대 관계임을 보여 주었다. 보통선거와 평등한 투표권을 확립시킬 제헌의회의 소집은 오랫동안 러시아 야당들 ─ 볼셰비키를 포함해 ─ 의 핵심적 요구였다. 차르 절대주의 체제라는 조건 하에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체제 수립 같은 요구들은 명백히 진보적인 것이다. 1917년 2월 차르 정권의 몰락으로 자유주의 스펙트럼의 좌우 양쪽의 정당들로 이뤄진 임시정부가 수립됐고, 수백만 노동자·농민은 제헌의회의 즉각적인 소집을 기대했다.
그러나 곧 실망이 뒤따랐다. 약체였고 거듭된 위기로 비틀거려 온 임시정부가 구체적 날짜도 지정하지 않고 모호한 제스처로 자꾸 제헌의회 소집을 연기했기 때문이다. 2월혁명이 촉발한 운동의 힘에 놀란 임시정부의 정당들은 제헌의회 요구를 혁명 자체를 차단하는 데 이용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사유재산의 수용收用과 지주 토지의 몰수는 제헌의회가 소집되면 해결될 문제이므로 그때까지 기다리라면서 혁명의 열기를 식히려 했다.
10월혁명으로 비로소 제헌의회 소집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이제 형세는 역전됐다. 제헌의회 소집을 질질 끌어 왔던 정당들이 이제는 제헌의회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가 됐다. 제헌의회는 볼셰비키와 10월혁명에 반대하는 세력 전체의 구심이 됐다.
제헌의회와 소비에트는 서로 적대자로서 마주섰다. 전자가 자본주의의 지속과 차르 국가의 포용을 나타낸다면, 후자는 자본주의의 전복과 노동계급의 지배를 나타냈다. 제헌의회에서는 사회혁명당이 다수를 점했다. 도시와 군대에 기반을 두고 있는 소비에트에서는 볼셰비키가 다수파였다. 농촌지역에서도 혁명이 추진력을 얻으면서 농민은 볼셰비키 쪽으로 대거 넘어왔다.
사회혁명당은 충격 속에서 좌와 우로 분열됐고, 다수파인 좌파는 이제 볼셰비키를 지지했다. 제헌의회의 반볼셰비키 다수파는 이제 순전히 형식적인 것일 뿐, 농촌의 현실 운동을 대표하지 못하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러시아 안팎에서 반혁명 세력에게 희망의 불빛으로 남아 있었다. 제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대표자들의 투표는 6백67개 소비에트 가운데 5백5개 소비에트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전하는 것에 찬성한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트로츠키가 “세계사의 모든 의회 가운데 가장 민주적인 것”이라고 부른 것(소비에트, 즉 노동자 평의회)이 제헌의회를 해산시킨 것이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제도로부터 성장해 나온 것이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타도하고 대체한 것이다.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개혁주의 측의 반대
많은 이들이 공포에 휩싸였다. 독일 사민당의 카우츠키는 그의 저서 《민주주의냐 독재냐》에서 제헌의회 해산을 개탄했다. 그는 노동계급이 정치 의식과 조직화 측면에서 충분히 성숙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체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는 사회주의가 점진적인 수단을 통해 도달될 것이라는 생각이 근저에 깔려 있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카우츠키의 집착은 노동자들이 그들 자신의 투쟁을 통해서는 그들의 관념을 변화시킬 수 없고 사회주의적 의식에 도달할 수도 없다는 그의 신념에서 비롯한 것이다. 카우츠키에게는 친(親)중간계급 지식인들이 그 과정의 결정적인 요소 ─ 그러나 볼셰비키는 배척한 요소 ─ 였다.
학식 있는 계급들의 중요성을 볼셰비키는 처음에는 인식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처음에 그들은 병사, 농민 도시 근로자 등의 맹목적 열정을 부추기는 데 힘썼으므로 유식한 계급의 대중은 처음부터 볼셰비키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 권력을 잡은 러시아 노동자들은 카우츠키가 노동계급을 ‘가르치는’ 데 필요하다고 주장한 그 어느 민주주의보다도 더 철저히 민주적인 형태의 자치를 확립했다. 레닌은 카우츠키의 주장에 격노해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오직 소비에트 러시아만이 프롤레타리아트와 러시아 국민의 대다수인 전체 근로대중에게 그 어느 부르주아 민주공화국에서도 전례 없고 불가능하며 생각할 수도 없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제공했다. 그것은 예컨대 관저와 대저택을 부르주아지로부터 탈취함으로써(이것 없는 집회의 자유란 순전한 위선이다), 인쇄소와 인쇄 종이를 자본가로부터 빼앗음으로써(이것 없는 언론의 자유란 국민의 다수인 근로대중에게는 거짓이다), 그리고 가장 민주적인 부르주아 의회보다도 천 배나 더 민주적인 소비에트 조직으로 부르주아 의회주의를 대체함으로써 그렇게 한 것이다.
선출된 대표자들은 즉각 소환될 수 있어야 하고, 대표자들의 봉급은 평균적 노동자 임금 수준으로 제한돼야 한다는 것이 노동자 민주주의의 원칙이었다. 소비에트 체제에서의 통제는 아래로부터 이뤄졌고, 각급 소비에트들은 노동계급과 농민의 조직에 기반을 두었다. 대표자들은 직장, 부대, 촌락을 대표했다. 보통선거가 유산 계급의 이해관계를 덮어 감추는 데 이용되는 제헌의회와는 달리 소비에트의 계급적 성격은 감추어지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방향타 없는 운동의 지도권을 거머쥐기 위해 1917년 10월 어디에서나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의 영향력은 1917년 혁명적 시기의 몇 달 사이에 공장의 작업장에서 어렵게 쟁취된 것이다. 노동계급 혁명의 조건 하에서 노동자 민주주의의 기관을 통하지 않고 지도권에 이르는 다른 길은 없었다.
이러한 ‘직접 민주주의’는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 생활에 노동자·농민의 대대적 참여를 가능케 했다. 1917년에서 1927년 사이에 8백70만 농민이 촌락 소비에트에서, 그리고 80만 노동자가 도시 소비에트에서 활동했다. 9백만 명이 농촌의 군·현·주 소비에트 대회에 선출됐고, 70만 명이 이들 기관의 집행위원회에 선출됐다.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가 작정하고 공격한 것은 바로 이 직접 민주주의의 원리였다. 비슷한 주장들이 오늘날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다. “그 같은 조직이 계급투쟁의 전개 과정 속에서는 적합할지 모르지만, 기술적으로 정교하고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요구되는 어려운 결정들을 해낼 수는 없다 … 불가피하게 그러한 ‘직접 민주주의’는 기술 및 행정 전문가들에 의해 운영되는 ‘대의제 민주주의’에 자리를 내놓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흔히 개진되는 상투적 주장이다.
직접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두 번째 주장은 직접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적 계획의 우선순위와 양립할 수 없는 협소한 부문주의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직접 일터를 통제하면서 그들은 얼마나 생산할 것인가, 공장 문을 닫을 것인가, 아니면 어떤 산업부문이 생산을 계속할 것인가 등등의 문제들을 놓고 불가피하게 국가의 결정과 충돌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들은 흔히 옛 소련의 관료적 ‘계획경제’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러한 주장들은 노동자 통제의 개념 자체를 완전히 잘못 짚고 있다. 국가자본주의 하에서는 서방과의 군사적 경쟁 압력이 생산의 우선순위를 결정했다. 그리하여 ‘계획’이란 실은 소련 등 동구권의 노동자들이 아무런 통제도 할 수 없는 세계 자본주의 경쟁의 혼돈이 강요한 결과일 뿐이다. 물론 노동자 통제가 더 넓은 사회적 필요와 잠재적으로 충돌하는 데서 비롯한 문제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혁명의 진행 중에 볼셰비키가 구체적으로 대면했던 문제이다.
1917년 2월에서 10월까지 노동자들에 의한 공장 통제권의 장악은 혁명 과정의 관건이었다. 많은 공장 소유주와 경영자가 도망가서, 노동자 자신들이 생산을 가동시키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해서 노동자들이 다시 생산을 운영하면서 계급의식과 정치적 자신감을 발전시켰다. 공장위원회의 수는 1917년 5~6월 이후 극적으로 증가했다. 공장위원회 운동은 경제에 대한 자본주의적 통제가 파편화된 상황 속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전복 직후에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과제가 의제가 되면 공장위원회 운동의 원심력은 더한층의 진보를 가로막을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볼셰비키의 대응은 그 운동을 못하게 말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였다. 레닌은 노동자 통제의 원리를 모든 유형의 조직에 확장시키는 것을 주장했다.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는 볼셰비키 혁명 후 제2차 전全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혁명의 목표로서 다시 확인됐다. 그러나 개별 지방의 희망을 무시할 수도 있을 전 국가적 계획의 도입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대답은 전 국가적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책임을 질 국가 기관들에 노동자들을 되도록 폭넓게 참여시키는 것이다. 모순이 해결되는 것은 직접 민주주의의 확장 ─ 그것의 제한이 아니라 ─ 을 통해서일 것이다.
민주주의 투쟁과 사회주의
그렇다면, 사회주의자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촛불운동 같은 민주주의 투쟁들에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그 투쟁들은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가져오지 않는다며 기각해야 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부패나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간혹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지지가 대중 동원을 위한 구심점이 되는 경우들이 있다. 이때 민주주의의 방어는 그저 전술적 방편의 문제만은 아니다. 노동자들이 민주주의 투쟁을 할 때 요구의 중심으로 부각되는 것은 그저 의회와 헌법재판소라는 형식적 제도가 아니라 평등, 자유, 정의, 권리라는 이념들이다.
노동자들이 민주주의적 요구들을 위해 투쟁할 때 그들은 국가와 마주치게 되고 운동의 지배적 사상은 시험대에 올려진다. 민주주의의 여러 추상적 이념들이 계급적 성격을 띠기 시작하면서 때로 자유주의적 틀을 넘어서게 된다.
사회주의는 가르치듯이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며, 그것의 정수는 사회주의적 언사를 사용하는 데 있지 않다. 사회주의의 정수는 인간들의 행동이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20세기의 격동적 사건들 속에서 역동적인 힘이었다. 특히, 노동자위원회들 ─ 예컨대 폴란드 등지 노동자들의 대중 파업에서 나타난 것들 ─ 이 보여 준 근본적으로 민주적인 성격을 보게 된다. 파업 노동자들은 정규적으로 위원장을 교체하고, 위원장의 배신에 직면하면 즉각 작업장 조직들이 선출한 파업위원회가 파업 투쟁을 이어나갔다.
스탈린주의 체제들에서 노동자들이 사회주의적 의식으로 쉽사리 넘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 과정은 길고 복잡할 것이다. 당분간 사람들은 아나키즘, 신디컬리즘,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민중주의 사상에 더 많이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러나 경제 위기의 첨예함, 그리고 이런 사상들이 진정한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없음으로 말미암아 그것들의 영향력은 불안정하고 동요할 것이다.
계급 이해관계의 충돌이 대단히 첨예하고, 노동운동 내의 모순이 매우 응축되어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앞으로 격렬한 투쟁으로 표출될 수도 있다. 더구나 여러 나라들에서 ‘민주주의’가 노동자들의 세계관 속에서 점점 더 계급적 성격을 띠게 됨에 따라 민주주의는 진정한 사회주의의 부활에서 역동적인 이데올로기적 요인이 될 것이다.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