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러시아 혁명 100주년
러시아 혁명사 저술에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올해는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다. 100년이 지났건만 러시아 혁명을 둘러싼 논쟁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한겨레〉는 구랍 31일자 특집에서 올해 기억해야 할 교훈으로 2007년의 금융 위기, 5백 년 전의 종교 개혁과 함께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꼽았다.
〈한겨레〉 특집에서 러시아 혁명 부분을 쓴 강릉원주대 이동기 교수는 러시아 혁명이 “권력욕에 불타는 볼셰비키가 우매한 대중을 선동하거나 소수의 음모를 통한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고 올바로 지적했지만, “러시아 혁명은 폭력 지배가 조직화된 시발이자 전형”이라고 주장했다. 후자의 주장은 볼셰비키의 조직적 활동과 노동자 혁명이 강제노동 수용소(굴락)와 모스크바 재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냉전 시절 서구의 학계가 받아들인 스티븐 코헨의 ‘연속성 테제’, 즉 레닌이 스탈린을 낳았다는 진부한 주장을 반복하는 것이다. 1917년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무력과 테러를 통해 국가를 독점했으며, 결국 전체주의 일당 국가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레닌이 스탈린으로 이어졌다는 식의 냉전기 교과서 버전의 주장들은 많은 문제제기를 받았다. 1960년대의 활발한 사회운동에 영향을 받은 많은 역사가들이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연구하며 이전의 역사 서술들에서 빠져 있는 노동자와 농민 대중의 행동과 영감을 재구축하려 애썼다. 국내에 번역된 도서로는 마르크 페로가 쓴 《1917년 10월 혁명: 러시아혁명의 사회사》(거름)가 대표적 사례이다. 이 새로운 사회사 연구는 논쟁적 분야인 러시아 혁명에 대한 연구에서 기존의 시각들에 철저한 수정을 가했고, 스탈린주의 역사관과 냉전적 시각 모두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기여했다. 재능 있는 역사가들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주장한 내용, 즉 1917년에 대규모 민중 반란의 정점에서 권력이 임시정부에서 소비에트로 이전됐다는 점을 뚜렷이 증명해 줬다. 알렉산더 라비노비치의 《혁명의 시간》(교양인)이나 스티브 스미스의 《러시아 혁명》 같은 러시아 혁명사 연구서들은 냉전적·전체주의적 시각에 대한 해독제 구실을 했다.
소련이 붕괴하고 소련 기록 보관소를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사료史料에 기초한 토론이 벌어지고 합리적 결론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부풀어 올랐지만, 그 기대는 대체로 물거품이 됐다. 홉스봄이 말한 것과 달리, 그 이유는 히말라야 산처럼 쌓인 문서 자료를 이제 막 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은 아니었다(홉스봄 2002). 홉스봄은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사를 쓰는 오늘날의 역사가들처럼 러시아 혁명을 쓰는 역사가들의 열정이 식을 때까지는 좋은 역사 서술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 역사가들이 역사적 사실을 대할 때 가지는 이해관계가 사라져야만 공정하고 좋은 역사 서술이 나온다는 말이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 기록 보관소는 역사가들을 200년 동안 바쁘게 만들었지만, 점점 덜 바쁘게 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물며 오늘날과의 관련성이나 유의미성이 더 큰 러시아 혁명의 경우 역사가들의 열정이 쉬 식지는 않을 것이다.
러시아 혁명을 둘러싼 여러 쟁점이 단순히 사료의 문제였다면, 러시아 혁명에 대한 표준적 해석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한 것에 근접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기밀이 해제된 사료와 분명히 모순되는 낡은 주장들이 여전히 그럴 듯하게 포장돼 제시되는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혁명사 연구에서 결정적인 약점은 사료에 대한 접근 제약이 아니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정치적 전망의 문제이고, 결국은 어느 계급 편에 설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Murphy 2007). 하워드 진은 역사를 바라볼 때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객관성(혹은 중립성)을 가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고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러시아 혁명 역사 서술을 왜곡시키는 요인
러시아 혁명 역사 서술들이 진실을 완전히 왜곡하는 방식으로 이뤄진 것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작용했다.
첫째는 냉전이 종식된 뒤 미국이 세계 유일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정치 지형이 우경화한 것이다. 소련의 붕괴는 공산주의의 패배이자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여겨졌고,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이를 “역사의 종말”이라고 표현했다. 소련이 붕괴하던 해에 러시아 혁명에 관한 대작(The Russian Revolution, New York: Vintage Books, 1991)을 쓴 리처드 파이프스는 또 다른 책 《공산주의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레닌은 정권을 장악하는 일은 ‘깃털을 들어 올리는 것’처럼 쉬웠다고 말했다. 그 까닭은 레닌이 자신과 당의 정권 장악을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 이양하는 것인 양 위장했기 때문[이다.]” 파이프스는 러시아 혁명이 레닌이 이끈 볼셰비키의 쿠데타였고, 레닌의 전제적 지배가 스탈린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가 득세한 것은 대중 봉기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선전하는 구호 뒤에 숨어서 정권을 잡은 소수당이 위로부터 강제로 부과하여 실현된 것이었다. 이처럼 두드러진 사실이 차후 러시아의 행로를 결정하게 될 터였다.”(파이프스 2014)
옥스퍼드대학교의 세인트안토니칼리지의 러시아사 교수인 로버트 서비스도 파이프스와 별반 다르지 않다. 《레닌》의 저자인 서비스도 1930년대의 스탈린주의 체제가 레닌의 어깨 위에 서 있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레닌에 의해 창조된 국가는 70년 이상 손상되지 않고 생존했다. 그 건축물은 비록 최소한의 설계도를 따랐지만 이례적으로 급속하게 지어졌다. 1917∼19년 레닌의 지도 하에 이미 주요한 작업들은 끝이 났다. 기반이 닦였고 기둥이 세워졌으며 지붕이 올라갔다. 정치는 독점되고 중앙집권화되었다. 억압적 기구들은 확고하게 당의 통제를 받았다. 국유화와 국가 규제가 경제를 관통했다. 종교는 조직적으로 박해받았다.”
러시아 혁명 역사 서술에 혼란스러움을 가중시킨 또 다른 요인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득세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프랑스 신좌파가 추구한 염원이 실패한 산물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계급을 사회의 근본적 구분선으로 받아들이지 않던 이전의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우경화를 반영했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사회의 권력 관계를 자본주의의 계급 구조와는 별개인 것으로 이해했고, 그래서 현재와 과거 사이의 인과적 연관성을 제공하지 못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복잡한 논의로 스스로를 포장하고 있지만, 역사가들에게 새로운 방법이나 도구를 제공하지는 않았다. 포스트모더니즘 성향의 역사가들은 ‘거대 담론’을 거부하고 젠더, 종교, 인종, 성소수자, 이주민 등의 미시사微視史를 추구한다. 그런데 이런 요소들을 사회 전체의 구조 속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역사적 사건들을 일면적으로 보기 십상이다.
홉스봄이 뛰어난 연구라며 갈채를 보낸 《인민의 비극》(A People’s Tragedy: The Russian Revolution, 1891-1924, 1996, Penguin)의 저자 올랜도 파이지스를 예로 들 수 있다. 파이지스는 《속삭이는 사회》에서 스탈린 치하 소련 사회에서 일어난 완벽한 공동체를 향한 열망이 어떻게 2억 명 인민의 삶을 불신과 공포에 휩싸이게 했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사회주의 체제가 완성되면 개별 가족은 사라지고 이념적 단체와 조직이 가족을 대체할 것이라는 전제 하에 마을, 학교, 직장에서 추진된 집단적 인간 창조 실험이 그런 불신과 공포를 낳았다.
하지만 대중의 삶은 아무리 내밀한 영역이라 할지라도 그가 속한 사회의 구조와 운영 방식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스탈린주의 체제가 왜 평범한 개인, 가족, 이웃, 친구의 내밀한 삶까지 통제했느냐는 물음에, 서방 열강이 가하는 군사적 압박 속에서 자본 축적을 빨리 해야 하는 소련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은 채 답변할 수 있을까? 또, 이런 스탈린주의 체제가 과연 1917년 혁명의 산물이냐는 물음도 제기될 수밖에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역사가들은 별 문제의식이 없이 스탈린주의 체제를 사회주의와 등치시킬 뿐 아니라, 1930년대의 산업화도 볼셰비키 혁명의 연장선으로 여긴다.
홉스봄이 혁명 후 벌어진 내전을 다룬 방식도 이와 비슷하다. 홉스봄은 볼셰비키가 “붉은 깃발 아래에서, 그리고 오해하기 쉽긴 하지만 소비에트라는 이름으로 싸웠기 때문에” 내전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홉스봄은 내전이 왜 발생했는지는 묻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내전은 1917년 2월에 시작된 계급 전쟁의 연장이었다. 1917년 내내 러시아의 우파와 자유주의자들은 거듭해서 폭력이 대중 반란에 맞서는 그들 계급의 해결책이라고 명확하게 밝혔다.
대다수 역사 서술은 내전이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이나 1918년 1월 제헌의회 해산으로 시작됐다고 주장하며 볼셰비키의 ‘비열함’을 비난한다. 그런데 최근에 밝혀진 사실들을 보면, 1917년 10월 혁명 몇 주 뒤 미국이 소비에트 권력에 적대적인 백군 세력에게 막대한 현금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러시아에 미국의 꼭두각시 군사정권을 세우려고 유대인 차별적인 카자크인들에게 수천만 달러를 제공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미국·영국·프랑스가 백군을 지원했다는 사실에서 러시아 혁명이 타락한 시원始原을 찾는다. 미국·영국·프랑스 등이 소비에트 영토로 수십만 명의 병사를 보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이러한 병력이 반볼셰비키 세력들을 하나로 묶어 준 “핵심 세력”이었다고 묘사했다. 이 때문에 트로츠키는 백군이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창조된 용병이었다고 주장했다. 서구의 백군 지원이 끝난 뒤 내전도 빠르게 종식됐다. 그래서 홉스봄이 “러시아 혁명은 후진적이고 곧 심하게 파괴될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운명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러시아 혁명에 대한 적대적이고 왜곡된 시각에 너무 많이 양보하는 것이다.
레닌과 볼셰비키의 구실
러시아 혁명과 관련해 여전히 논쟁되는 쟁점이 여럿 있다. 그중 하나가 러시아 혁명에서 레닌과 볼셰비키가 한 구실 문제다. 러시아 혁명을 다룬 많은 저작들과 역사가들은 레닌이 개인적 권력욕과 전체주의적 열망이 있었고, 이것을 입증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존 몰리뉴에 따르면, 이런 논리는 “레너드 샤피로, 베르트램 볼페, 알프레드 메이어, 머를 세인서드,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칼 프리드리히, 케뤼 헌트, 로버트 컨퀘스트를 비롯한 냉전 시대의 수많은 학자들의 저작 속에서 발견되는 관점”이다(몰리뉴 2000, 96). 이런 주장의 가장 최신판은 라스 리의 《레닌을 재발견하다》(Lenin Rediscovered, brill, 2006)일 것이다. 라스 리는 스탈린주의로 이어지는 볼셰비키의 억압적 전통에서 첫 단계가 바로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역설이게도 조지 부시가 잘 표현했다. “1900년대 초반 어느 망명 변호사가 유럽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소책자를 내놓았다. 이 소책자에서 그는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에 착수할 자신의 계획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 세계는 이제 레닌의 말을 따르지 않는데, 이미 끔찍한 대가를 치렀기 때문이다.”(The Washington Post, 5 Sep. 2006)
사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위계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체제를 세우려는 레닌의 야심을 나타내는 선언문이 아니다. 노동자 대중의 정치적 해방이라는 목적을 위해 혁명가들이 어떤 수단을 선택할 수 있느냐를 다룬 저작이다. 그럼에도 라스 리는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1903년 분열을 두고 “사람들은 당 내에서 의젓하고 매력적인 개인들로 이루어진 분파 대 비도덕적이고 광신적인 폭력배 분파 사이에서 실질적인 분열이 이루어졌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고 썼다. 그런데 레닌과 볼셰비키를 불공정하게 험담하는 사람치고 레닌의 저작을 당시의 러시아 정세와 계급투쟁의 맥락에서 읽는 사람이 드물다.
1960년대의 급진화 속에 등장한 사회사 학자들과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속한 역사가들은 1905년과 1917년의 대중 반란, 즉 고용주와의 투쟁을 통해 힘을 기르던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고 공장위원회를 건설하며 대안 권력인 소비에트를 만든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역사가들은 다른 역사가들, 특히 자유주의 역사가들과는 달리 이런 급진화의 핵심 요소로서 볼셰비키의 구실을 낮게 평가하지 않았다. 1912년 노동자 살해에 항의해 일어난 레나 금광 투쟁부터 1916년의 정치 파업에 이르기까지 주요 노동자 투쟁에서 혁명가들은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 과정에서 오흐라나(차르 왕정의 비밀경찰)가 혁명가들을 체포해 전방으로 보내도 곧장 새로운 혁명가들이 노동운동에서 충원됐다. 경영주와 오흐라나의 가혹한 탄압은 도리어 노동자의 조직들을 더 탄탄하게 만들었다.
1 사례를 다뤘는데, 이 공장의 노동자들은 1917년 혁명 이전부터 작업장 투쟁을 겪으며 숙련도와 성에 따른 분열을 극복하고 있었다. 이 공장에서 미숙련 견습공과 여성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을 인상하라는 노동자들과 이에 반대하는 경영진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일어났다. 공장 경영진은 직장을 폐쇄하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공장 경영자들의 눈에는 최저임금을 인상하라는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가 차르 국가를 뒤흔들 수도 있는 위협으로 보였을 것이다.
케빈 머피는 러시아 혁명을 다룬 자신의 책 《혁명과 반혁명》에서 모스크바의 ‘망치와 낫’ 공장케빈 머피는 1920년대에 이 공장에서 일어난 변화를 관찰한 결과, 1921년부터 1928년까지의 신경제정책NEP 시기에 소비에트와 볼셰비키 당내 민주주의가 모두 점차 붕괴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붕괴가 미리 예정돼 있거나 필연적인 결과라고는 보지 않았다.
군사 쿠데타를 조직하고 레닌 암살을 시도한 사회혁명당의 한 당원이 1922년에 재판을 받아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 뒤로도 사회혁명당은 공장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고, 모스크바 소비에트 선거에 후보를 출마시킬 수도 있었다. 1923년 공산당(1918년 볼셰비키가 당명을 공산당으로 바꿨다) 내에서 분파 투쟁이 있었는데, 다수파든 소수파든 공장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주장하는 것이 허용됐다.
그러나 1926년이 되면 당내 민주주의는 엉터리가 됐다. 스탈린에 반대하는 공산당원들을 축출시키자는 안건으로 ‘망치와 낫’ 공장에서 투표가 실시돼, 찬성 400여 표 대 반대 2표로 안건이 통과됐다. 이것은 스탈린이 장악하고 있던 공산당 정치국의 노선에 적대적인 세력은 모두 축출될 것이라는 위협과 반대파에 대한 괴롭힘이 낳은 결과였다.
반대파 침묵시키기는 공장의 공산당 조직을 노동 규율 강화 추진 기구로 전환시키려는 시도와 동시에 이뤄졌다. 하지만 스탈린의 노선에 반대한 세력은 공산당에서보다는 노동조합에서 더 오래 살아남았다. 1926년 ‘망치와 낫’ 공장의 노조협의회에서 한 노동자는 “자동차 부문에서 기업 통합 행정 체계가 확립되면서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비용 절감이 이뤄지고 있다”고 항의했다.
1917년 혁명과 스탈린주의 체제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고 보는 역사가들에게 신경제정책 시기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는 중요한 쟁점이다. 케빈 머피는 ‘망치와 낫 공장’ 사례를 통해, 노동자들이 1917년에 품었던 이상이 점점 부상하던 스탈린의 권력과 충돌했음을 잘 보여 줬다.
신경제정책 시기에만 해도 ‘망치와 낫’ 공장 노동자들은 제1차 5개년계획이 강제로 추진된 1928년 이후와는 완전히 달리 매우 활기 있고 적극적이었다. 노동자들의 삶도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신경제정책 시기에는 공산당 내 반대파도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종교 활동도 할 수 있었다. 대다수 여성 노동자들은 여성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가해 자신들의 불만을 털어놓고 행동을 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공장의 노동조합에 적극 참가했을 뿐 아니라 대표자들이 조합원의 관심사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래서 1924년에서 1925년 사이 이 공장에는 1만 3천 건의 고충 사항이 제출되고 대부분 노동자들에게 유리하게 해결됐다. 이때만 해도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힘을 나타내는 조직으로 여겨졌다. 1925년에도 노조 조직은 강력해서 공장 감독관(나중에 경영자가 된다)은 공장의 실질적 권한이 노동조합에 있었다고 보고했다(Murphy 2005, chapter 3).
쾬커도 당시 인쇄 노동자의 활동을 연구하며 노동조합 조직이 강력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쾬커에 따르면, 신경제정책 시기 인쇄 노동자들은 감독자, 규율, 임금 지불 방식, 노동 과정에 대한 협의 등 네 영역에서 통제권을 장악하고 있었다(Koenker 2005). 이런 모습은 자본주의 사회나 1928년 이후 소련 사회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내전 이후 경제적 어려움이 심각했지만 1926년에는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내전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간단히 말해 소련 문서 보관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증거들을 보면, 신경제정책 시기의 정책은 대체로 경제성장의 효율성보다는 노동자 생활조건 향상을 중시했다. 다이엔1928년에 시작된 제1차 5개년계획 동안 많은 것이 뒤집혔다. 노동자들은 훨씬 더 긴 노동시간을 강요당했지만 실질임금은 반으로 줄었다. 그 전까지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방어한 공장위원회가 생산성 향상 추진 기구로 전환됐다. 이런 추세에 반대하는 세력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농촌에서도 강력한 저항이 있었다. 농업 집산화를 연구한 린 비올라는 농업 집산화에 대한 저항이 만만치 않았음을 지적했다. 1930년 한 해에만도 집산화에 맞서 일어난 대규모 저항이 1만 3천7백54건이었고, 여기에 농민 2백50만 명이 참가했다(Viola 1996).
강제노동 수용소 연구로 퓰리처상을 받은 앤 애플바움은 1927년 말에만 해도 감옥에 수감된 수형자가 30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애플바움 2004). 더욱이 정치수는 1925년까지는 특별한 지위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1930년대가 되면 정치수의 지위는 일반수들보다 더 낮아졌다. 스탈린주의 처벌 제도가 1930년대 동안, 특히 1929년과 1941년 사이에 만들어지고 강화됐다.
러시아 내 소수민족의 지위도 크게 변화했다. 1917년 혁명의 여파로 러시아는 소수민족의 권리를 세계에서 가장 적극 보장한 나라가 됐다. 러시아의 혁명 정부는 제국주의 질서에 맞서 민족 해방을 옹호했으며,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유보 없이 옹호했다. 1918년 공산당으로 당명을 바꾼 볼셰비키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한국과 중국에서 벌어진 민족 해방 운동(예를 들면 한국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에 지지를 보냈다.
러시아 혁명이 전 세계에 미친 영향은 1917년 당시 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가 잘 표현했다. “유럽 전체가 혁명의 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전 유럽이 혁명적 상황에 직면했다. 물론 아쉽게도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혁명이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전 세계 어디에서든 혁명적 투쟁이 벌어질 때마다 러시아 혁명의 의미와 그 과정에서 레닌이 한 구실을 둘러싼 관심과 논의가 뜨겁게 벌어진다. 이런 점에서 러시아 혁명을 둘러싼 쟁점은 판돈이 클 수밖에 없다. 바로 이 때문에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주의를 연결시키려고 애쓰는 역사가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러시아 혁명을 제대로 다룬 뛰어난 저작들도 많다. 이런 저작들은 냉전적 관점과 스탈린주의적 시각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러시아 혁명에 대한 적대감에 굴복하지 않을 자원을 제공한다. 우리는 이런 연구 성과에 기반해서 출발할 수 있다. 아래의 책들은 그중 일부다.
2 러시아 혁명을 다룬 최고의 저작은 트로츠키가 쓴 《러시아혁명사》(풀무질)다. 빅토르 세르주가 쓴 《러시아 혁명의 진실》(책갈피)은 소비에트 권력이 탄생한 뒤 1년 동안 밟은 궤적을 다룬 중요한 책이다. 토니 클리프가 쓴 《레닌 평전》 4부작(책갈피)과 최일붕이 쓴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책갈피)은 레닌의 혁명 정당이 러시아 혁명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어떤 구실을 했는지 이해하는 데 특히 유용하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쉬운 입문서로는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책갈피)과 알렉산더 라비노비치의 《혁명의 시간》(교양인)이 있다.주
참고 문헌
라비노비치, 알렉산더 2008, 《혁명의 시간》, 교양인.
리드, 존 2005, 《세계를 뒤흔든 열흘》, 책갈피.
몰리뉴, 존 2000, ‘레닌에 대하여 쓰지 않는 방법’ 《레닌에 대해 말하지 않기》, 사이먼 클락 외 지음, 이후.
서비스, 로버트 2001, 《레닌》, 시학사.
세르주, 빅토르 2011, 《러시아 혁명의 진실》, 책갈피
스미스, 스티브 2007, 《러시아혁명》, 박종철출판사.
애플바움, 앤 2004, 《굴락》, 도서출판 드림박스.
최일붕 2007,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 책갈피.
클리프, 토니 2009-2013, 《레닌 평전》, 책갈피.
트로츠키, 레온 2003-4, 《러시아혁명사》, 풀무질.
파이지스, 올랜도 2013, 《속삭이는 사회》, 교양인.
파이프스, 리처드 2014, 《공산주의의 역사》, 을유문화사.
페로, 마르크 1983, 《1917년 10월 혁명: 러시아혁명의 사회사》, 거름출판사.
홉스봄, 에릭 2002, ‘우리는 러시아 혁명사를 쓸 수 있을까’ 《역사론》, 민음사.
Koenker, Diane 2005, Republic of Labor: Russian Printers and Soviet Socialism, 1918-1930. Cornell University Press.
Murphy, Kevin 2005, Revolution and Counterrevolution: Class Struggle in a Moscow Metal Factory, Berghahn Books.
Murphy, Kevin 2007, ‘Can we write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Historical Materialism 15. Brill.
Viola, Lynne 1996, Peasant Rebels under Stalin: Collectivisation and the Culture of Peasant Resistance, Oxford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