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러시아 혁명 100주년
1917년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대안은 있었나? *
이 글은 마이크 헤인스가 1997년에 쓴 글 ‘Was there a parliamentary alternative in Russia in 1917?’, International Socialism no.76을 요약한 것이다.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은 실수였나? 지난 80여 년 동안도 그랬지만 소련 붕괴 이후에도, 소련 체제의 희생자는 물론 소련 지지자들도 10월 혁명을 실수라고 여기는 듯하다. 스탈린주의 성향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10월 혁명이 “전쟁이 낳은 기형아”였다고 주장했고, 공산당원이었다가 변절한 또 다른 사람은 10월 혁명이 “역사적 측면에서 하나의 실수였다”고 말했다. 이런 주장은 두 가지 근거를 기초로 한다. 첫째는 레닌이 스탈린을 낳았다는 주장이다.(이른바 ‘연속성 테제’) 둘째는 1917년에는 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으므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은 둘째 문제를 주로 다룰 것이다. 필자의 기본 주장은 다음과 같다: 러시아 혁명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유혈 낭자한 전쟁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었다. 전쟁은 모든 곳에서 내부적 위기를 초래했고, 러시아에서는 급진적 해결책이 요구됐다. 자본주의의 가장 야만적인 산물인 전쟁은 러시아 사회를 양극화시켰다. 노동자들은 앞으로 나아가든지, 아니면 혼란과 반혁명에 의해 분쇄되든지 두 가지 길밖에 없었다. 러시아에서 자본주의를 전복하려 애쓴 볼셰비키는 ‘영웅적 패배자’가 되기를 거부했다. 볼셰비키의 염원이 실현되느냐 여부는 그들 자신의 활동뿐 아니라 혁명이 고립되지 않고 확산되느냐 여부에도 달려 있었다. 결국 혁명 확산의 기대는 좌절됐고, 러시아 혁명가들은 고립됐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활용하지 않은 서방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에게 그 주된 책임이 있다.
그렇다면 1917년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대안은 등장할 수 없었을까? 대중 운동의 주역이었던 노동자와 농민과 병사들의 시각, 즉 아래로부터의 관점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관점으로 러시아 혁명을 살펴보면 러시아 혁명 때 지배계급의 여러 분파들이 보인 행동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소비에트에 기반한 사회주의 연립정부에는 부르주아가 참가하지 않았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볼셰비키를 지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러시아를 지배계급에게 넘겨주려는 헛된 시도를 함으로써 지지자들을 배신했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만이 남았다고 역사가들의 관점과 달리 실제로는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 같은 좌파들의 활동과 반작용이라는 맥락에서 혁명 초기의 정책들을 살펴봐야 한다.
혁명 전의 러시아
1917년 혁명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은 세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러시아의 자본주의 발전은 자연발생적 과정이 아니었다. 차르 왕정이 강력하게 추진한 결과였다.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은 경제적·사회적·정치적·군사적 연계를 통해 러시아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형성한 관계가 심화되고 확대되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둘째,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도 불균등 결합 발전의 구조를 창출했다. 러시아 국내의 여러 지역, 여러 경제 부문, 여러 사회 영역이 서로 다른 속도로 발전했다는 면에서 발전은 불균등했다. 그 발전의 형태들이 서로서로 침투했을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변화의 불균등성을 서로 강화했다는 점에서 발전은 결합돼 있었다. 농업과 공업의 관계가 그 사례이다. 러시아 농업은 매우 후진적이어서 농기계 수요가 제한적이었다. 이런 수요 부족과 외국과의 경쟁 때문에 농기계 부문의 발전은 지체됐다. 이 때문에 농기계 제조 분야를 독점한 토착 기업은 농기계 가격을 비싸게 매겼고, 농업의 후진성이 지속되기를 바랐다. 트로츠키는 이런 상호 교류를 ‘불균등 결합 발전’이라는 유명한 개념으로 설명했다.
셋째, 제1차세계대전의 한가운데서 러시아 혁명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이 전쟁은 자본주의 체제 내 경쟁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다. 러시아도 이런 자본주의 체제의 주요 열강 중 하나였다.
이런 상황에서 차르 치하의 러시아는 발전하고 또 변화하고 있었다. 이런 발전이 없었다면 러시아에서 혁명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발전은 러시아 경제와 다른 선진 자본주의 경제 사이의 간극을 메울 정도로 충분하지는 않았다. 1870년 러시아의 1인당 소득은 영국의 34퍼센트였지만 1910년에는 32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1905년 혁명의 결과로 정치 개혁과 농업 개혁이 추진돼, 사람들이 러시아가 자유민주주의적 길로 나아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리 되지는 않았다. 한 역사가가 지적한 바처럼, “그 당시 어느 누구도 전제정이 자유화됐다고 믿지 않았다.”
1914년 이전 러시아에서 산업 부르주아의 영향력이 제한적이었음을 알 필요가 있다. 러시아 산업의 일부는 외국 자본이 소유하고 있었다. 페체르스부르크에서 근대 은행과 국가 조달에 의존한 기계 제조업은 어느 정도 차르 체제와 연결돼 있었다. 모스크바 등지의 섬유 산업에 기반을 둔 부르주아는 과거의 전통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남부의 광산업과 철강업, 남서부의 설탕 생산업에 기반을 둔 기업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전체로 보아 러시아 부르주아는 변화 과정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활력이 있지는 않았다.
자유주의 이론가이자 입헌민주당(카데트)의 지도적 정치인 파벨 밀류코프는 “러시아 자유주의의 활기 없는 신체에 붉은 피를 채우고 동시에 선진적이고 민주적 성격을 부여해 준 것은 젬스트보(1864년에 만들어진 제한된 지방자치기관)의 전문가 집단과 도시의 인텔리겐챠였다”고 지적했다. 제1차세계대전 직전 경제가 호황을 누리면서 근대 부르주아는 점점 더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그러나 부르주아들이 차르 왕정과 다투곤 했어도, 그 둘은 결국 단결했다. 그렇게 만든 압력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아래로부터의 반란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1905년 혁명이 대표 사례이다. 그래서 러시아 부르주아는 차르 체제에 맞선 투쟁을 건설하는 데서 명확한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둘째는 러시아 제국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었다. 러시아인들은 제국 전체 인구의 43퍼센트에 지나지 않았지만 러시아인 지배자들은 지구 표면적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다. 이 제국은 수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팽창한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19세기 들어 민족적 정체성이 형성되면서 러시아인 지배계급이 향유하던 권리에 맞선 도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러시아의 경제적 미래에 관심이 많은 부르주아들은 우크라이나의 농업, 바쿠의 석탄과 석유, 중앙아시아의 섬유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또, 철도와 금융적 이해관계는 경제를 더욱 통합시켰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은 난관에 봉착했다. 그들은 차르 제국의 소수민족 억압에 반대하고 심지어 소수민족의 자율권을 지지했지만, 러시아가 제국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았다.
셋째는 러시아가 열강의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공통된 이해관계였다.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러시아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러시아가 동진하도록 하라. 러시아는 거기에서는 문명 세력이다.” 그의 바람은 러시아가 동진해 유럽에서 긴장을 완화시키고, 특히 독일이 중부 유럽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었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 발발의 원인 하나는 러시아와 독일의 갈등이었다. 즉, 러시아는 위기 형성에서 핵심 구실을 한 것이다.
유럽 전역에서 벌어진 전쟁은 러시아 부르주아들이 지배계급과 단결하게 했다. 입헌민주당 중앙위원회는 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정부의 국내 정책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조국을 지지하고 열강의 일원으로서 지위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제 그 지위가 우리의 적들에 의해 도전받고 있다. 우리는 내부 분쟁을 접어두고 차이로 인해 우리가 분열될 것이라는 기대를 우리의 적들이 결코 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전쟁을 수행할 구조를 창출할 수 없음이 드러났다. 지도적 산업 부르주아들을 포함한 자유주의자들이 이끄는 조직들이 정부가 수행하지 못하는 부분을 메웠다. 게오르기 르보프 공이 이끄는 젬스트보연맹은 상이군인을 돌보는 것을 포함해 결정적인 사회적 역할을 수행했다. 전쟁산업위원회가 자발적으로 창설돼서 산업 생산과 공급을 지원했다. 그런데 차르 정부는 이런 조직들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 했다. 1916년 말 겨울에 차르는 모스크바 젬스트보를 금지했고 전쟁산업위원회의 구실을 점진적으로 제약했으며, 12월 17일에는 두마(러시아 제국의회)조차 폐쇄됐다.
이런 조처로 야당들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정부가 개혁돼야 한다는 믿음이 커져 갔지만 오히려 정부의 조처는 민주화와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1916년 3월 파벨 밀류코프는 두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러시아에서 일어날 혁명이 우리를 패배로 이끌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러시아를 조직하는 일이 혁명을 조직하는 일이기도 하다면, 나는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러시아가 조직되지 않은 상태로 내버려 두는 편이 더 낫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사태가 악화되자 밀류코프는 이런 입장을 계속 견지할 수 없었고, 차르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
1 창립자 알렉산드르 구치코프는 그 어려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이 악과 대결하는 데 완전히 무기력하다. 우리의 투쟁 수단은 양날의 칼이다. 대중을 고무함으로써 불을 지필 수 있지만 그 불꽃의 규모를 우리는 예상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 두마 의장 로지앙코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어떤 행동도 자제하려 했다. 러시아의 군주인 차르를 제거하는 것은 깔끔한 외과수술처럼 끝날 수가 없으며 필연적으로 정치지형 전반을 재구성하게 될 것이었다.
차르 정부가 야당의 제안에 응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10월당의2월 혁명의 트라우마
1917년 2월 23일 페트로그라드의 섬유 노동자들이 일련의 파업과 시위를 벌였다. 2월 27일에는 시의 수비대 부대 하나가 시위대 편으로 넘어왔고, 3월 1일에는 수비대의 대다수가 반란에 가담했다. 이 소식이 군대 본부에 도달하자 고립에 처한 차르가 퇴위를 결정했다. 하지만 새 정부가 어떻게 그리고 어떤 임무를 가지고 등장할 것이냐는 문제가 있었다.
2월 27일 두마 의장 로지앙코는 우파의 반대를 이유로 두마의 공식 재소집을 거부하면서도, 비공식 모임을 정기적으로 개최했다. 두마 임시위원회가 만들어졌고, 그 의장은 로지앙코에서 입헌민주당의 지도자 밀류코프로 대체됐다. 당시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소비에트의 맹아도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두마 임시위원회의 주요 인사들은 입헌군주정 비슷한 정치체제를 수립하고자 했지만, 위원회 내 급진 인사들의 반대와 소비에트의 압력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소비에트 지도부는 이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여겼고 그래서 자신들이 스스로 통치할 마음이 없었지만, 로마노프 왕가는 꼭 제거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소비에트 지도부는 두마 임시위원회가 혁명에서 제기된 민주적 의견들을 더 적극적으로 펼쳐 주기를 바랐다. 그 결과 3월 1일 젬스트보연맹의 지도자 게오르기 르보프 공을 총리로 하는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여기서 흥미로운 쟁점은 2월 혁명으로 등장한 정치체제의 성격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2월 혁명이 정치적 스펙트럼을 왼쪽으로 밀어붙여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사상을 허공에 뜬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사태 전개는 자유주의자들 가장 두려워한 방식으로 흘렀다. 적기赤旗가 거리 곳곳은 물론이고 임시정부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대표들이 회합을 가지는 타우리드 궁, 케렌스키가 업무를 보는 동궁에도 걸렸다. 메이데이를 포함해 임시정부가 입법화한 휴일은 사회주의 휴일이 됐다. 2월 혁명 이후 여러 명칭이 변경됐는데, 이는 새 시대의 상징처럼 보였다. 구질서와 연루돼 있으면 비난받거나 위협받았고, 부르주아적이라는 것은 귀족적이거나 차르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당시 러시아인의 대다수가 스스로를 모종의 사회주의자로 여기고 있던 상황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를 안정시키려 애쓴 임시정부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이런 상황은 10월 혁명을 불법적 정부가 합법적 정부를 대체한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난처한 정치적 문제를 제기한다. 바로 임시정부의 합법성이 어디에 기반을 두고 있느냐는 물음이다. 임시정부가 다수 대중과 당시의 국가 기구로부터 지지를 얻었다는 것만으로는 그것의 합법성을 증명할 수 없다. 권력의 합법적 기반은 제헌의회에서 나와야 하고 제헌의회가 민주적 러시아의 새 헌법과 국가 기구를 창설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 견해였다. 하지만 제헌의회가 소집되기도 전에 등장한 임시정부는 무엇을 근거로 자신의 합법성을 주장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세 가지 답변이 있을 수 있다. 첫째 답변은 3월 2일 타우리드 궁 바깥에 서서 풀이 죽은 상태로 있던 밀류코프가 한 것이다. 당시 대중 속의 누군가가 “누가 당신을 선출했나?” 하고 묻자 그는 “우리는 러시아 혁명이 선출했다”고 답변했다. 임시정부가 혁명에 의해 선출됐다면, ‘혁명’이 그 임시정부를 제거하는 것을 무엇을 명분으로 막을 수 있을까? 이 얘기는 임시정부의 존재가 거리의 대중에게 맡겨져 있고 그래서 임시정부가 소비에트를 합법화하고 그 지도자들을 승인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둘째 답변은 임시정부의 권위가 옛 차르의 두마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에는 두 가지 난점이 있다. 첫째는 두마가 너무 협소한 기반 위에서 선출됐고 그래서 러시아 전체를 대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차르가 위기의 한가운데인 2월 27일에 두마를 정회시켰다는 점이다. 기술적으로 보면, 두마는 정회 중이었으므로 어떤 결정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기술적 문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프랑스 혁명 때 제3신분은 국왕에 저항하면서 프랑스 3부회를 국민의회로 전환시키려 1789년 여름에 영구 회기를 선언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두마와 그 지도자들은 차르의 명령에 순순히 복종했다.
셋째 답변은 임시정부가 차르에게서 합법성을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실제 상황은 이 방식으로 흘렀지만, 정치적으로 결코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입헌민주당은 이 방식이 임시정부의 합법성을 겉보기로나마 보장한다고 봤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아들의 미래를 걱정한 차르가 동생인 미하일 대공에게 선위하고 미하일 대공도 퇴위해 버렸다는 것이다. 입헌민주당의 입헌주의자들은 미하일 대공을 설득해 그의 ‘권위’를 ‘공식으로’ 임시정부에게 넘기는 것으로 했다. 이 ‘3월 3일 법’은 임시정부의 존속 동안에만 유효하다는 것이 다수의 시각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2월 혁명을 이런 입헌주의적 한계 내에 묶어 두는 것은 불가능했다. 임시정부에게 당장 필요한 일은 대중적 기반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대중적 기반을 형성하는 한 가지 방법은 아래로부터 선출된 대표자들을 정부에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각료로 임명될 수 있었다. 입헌민주당원이자 임시정부의 각료인 안드레이 싱가료프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는 혁명의 지도자들 가운데 한 명을 혁명에서 떼어 놓아야 한다. 그들 중 케렌스키가 적임자다. 그와 함께하는 것이 그가 우리에 반대하도록 하는 것보다 더 낫다.” 대중적 기반을 얻는 또 다른 방법은 개혁을 통해 신뢰를 얻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급속히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로 변모했다. 임시정부는 보통선거를 통한 제헌의회 소집을 약속하고, 인종적·종교적 차별을 폐지하고, 언론과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파업권을 인정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계급 사회였으므로 사회 내 이해관계의 충돌이 있었다. 임시정부의 강령은 사회 변혁 강령이 아니라 민주적 자유의 강령이었다. 이 강령은 잘 지켜지지 않았고 러시아는 분열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을까?
부르주아 민주주의 기반의 부재
1917년 러시아에서는 자본가 지배의 대리인인 정당들의 안정된 체계를 창출하는 일이 매우 어려웠다. 2월 혁명 초기에 나타난 파편화적 정당 구조가 그 어려움을 잘 보여 준다. 민주주의가 새로 등장할 때 여러 정당이 생겨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100 개가 넘는 정당이 난립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 정당들 중에서 전국 정당으로서 의미 있는 조직은 10여 개였다. 중도우파로는 상공업연맹, 주택소유주연맹, 입헌민주당이 있었다. 그러나 1917년에 러시아 자본가들을 대변한 정당은 입헌민주당이었다. 입헌민주당의 이데올로그들은 자당이 러시아 전체를 대변하는 초계급적 자유주의 정당임을 자처했다.
2월 혁명 이후 좌경화 속에서 10월당처럼 더 보수적인 정당은 주변화됐고, 입헌민주당이 중도우파의 본류가 됐다. 좌우파 모두 입헌민주당을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러시아의 정치적 핵심으로 여겼다.
2 그럼에도 입헌민주당의 영향력이 약해졌다고 볼 수는 없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 입헌민주당의 영향력은 더 강해졌다. 제헌의회 선거 뒤 입헌민주당은 중도우파의 확실한 대안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입헌민주당의 당원은 약 10만 명이었고, 재정 기반은 주요 정당 중 가장 탄탄했다. 더욱이 입헌민주당은 가장 잘 조직된 전국 정당이었다. 1917년 입헌민주당은 러시아 전역에 지역 조직을 갖고 있으면서 전체 선거구의 80퍼센트에서 후보를 냈다. 그러면 왜 입헌민주당의 제헌의회 선거 결과는 그토록 초라했을까?
1917년 11월에 실시된 제헌의회 선거에서 입헌민주당은 6~7퍼센트를 득표해, 전체 의원 7백3석 중 고작 17석을 차지했다.근저의 이유는 러시아 기업주와 지주들이 서구에서와는 달리 성장하는 중간계급, 토지를 가진 소농, 노동계급 내 보수적 집단으로부터 대중적 기반을 확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주는 그 가족과 관련 인물을 모두 합치더라도 극소수에 불과했고, 부농도 2백만 명이라는 신뢰할 수 없는 수치를 그대로 인정하더라도 매우 적었다. 농촌에서보다는 나았지만 도시에서도 중도우파로 이끌릴 사회집단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이에 더해, 2월 혁명의 영향으로 사회가 좌경화됐다는 요소도 작용했다. 1917년 봄에 실시된 지방선거 때 주요 대학이 모여 있는 페트로그라드의 바실레프시키 섬 선거구에서 입헌민주당은 겨우 18퍼센트를 득표했다.
1917년을 전후로 치러진 선거에서 입헌민주당의 득표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면, 혁명 이후 입헌민주당의 영향력과 위세가 크게 하락했음을 알 수 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입헌민주당은 1905년 혁명 직후 치러진 첫 두마 선거에서는 61퍼센트를 득표했지만, 1917년 5월 지방선거에서는 22퍼센트를 득표했다. 모스크바 지방선거에서 입헌민주당이 얻은 표는 10년 동안 63퍼센트에서 17퍼센트로 줄어들었다. 1917년 혁명 동안 치러진 선거에서 명백한 친자본가 정당인 입헌민주당은 의미 있는 성과를 얻지 못했다. 〈루스카야 베도모스티〉(‘러시아의 기록’)라는 기업주 신문은 1917년 7월에 그 딜레마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입헌민주당은 현재의 혁명적 상황에서는 영향력이 거의 없다.” 하지만 입헌민주당은 임시정부 주된 세력이었다. 그래서 지도적 부르주아 정당이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은 민주주의를 얼마나 제약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1917년 3월 3일 임시정부는 정부 구성과 헌법을 결정할 제헌의회를 선출하는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를 즉각 준비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실질적 준비는 늦춰졌다. 제헌의회 소집을 위한 준비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한 쪽은 입헌민주당이었다. 임시정부가 제헌의회 선거를 치르겠다고 선포한 바로 다음 날 입헌민주당의 밀류코프는 선거일이 확정되지 않도록 애쓰고 있다고 밝혔다. 입헌민주당은 두 가지 이유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선거일을 미루자고 했다. 첫째는 당의 처지 때문이었다. 1917년 여름까지도 입헌민주당은 농촌 지역에서 사회혁명당의 지지가 높은 것에 두려워했다. 둘째 이유는 제헌의회가 급진적 사회 혁명을 합법화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입헌민주당이 자당의 영향력을 확대시키고 러시아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선거 일정을 최대한 늦춰야 했다.
마침내 6월 14일 임시정부는 9월 17일에 제헌의회 선거를 치른다고 발표했다. 그럼에도 밀류코프 등 입헌민주당 지도자들은 선거위원회 안팎에서 이 일정을 더 늦추려 애썼다. 입헌민주당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선거를 연기해야 한다며 선거 보이코트까지 주장했다. 결국 7월의 때 이른 봉기 뒤에 선거를 더 연기시키는 데 성공했다. 결국 선거는 11월 12일 치르기로 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제헌의회 선거의 성격이 무엇이고 그 결과가 혁명에 미칠 영향이 무엇인지는 불투명했다.
전쟁
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를 해체시킨 것으로 전쟁보다 더 큰 요인은 없었다. 사회혁명당 지도자 체르노프는 제1차 전국소비에트 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쟁은 나라의 힘을 빨아먹는 거대한 펌프다. 위험이 바로 여기에 있다. 혁명이 전쟁 내내 계속될지 모르므로 전쟁이 그 무엇보다 더 위험하다.” 그렇다면 임시정부는 왜 전쟁에서 손을 떼지 않았을까?
이 질문에는 제1차세계대전에 걸린 판돈이 얼마나 컸는지, 그리고 러시아 지배계급의 주요 부문이 왜 비참한 최후에 이를 때까지 전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해야 답할 수 있다. 임시정부는 일반으로는 평화를 바랐지만 전쟁 노력을 기울이는 것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전쟁 문제에 대해서는 러시아 사회의 권력자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다. 1914년 러시아가 전쟁에 참전한 것은 열강으로서 러시아 제국의 이해관계가 직접 표현된 사건이었다.
1917년 초반에 연합국 내에서 러시아가 부차화될 조짐이 나타났다. 그래서 러시아로서는 더 큰 전쟁 노력을 기울여 연합국으로부터 신뢰를 회복해야 했다. 러시아 권력자들이 보기로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2월 혁명으로 근대적 러시아가 수립된다면 그 러시아는 ‘강력한 열강’이어야 한다. 전쟁에서 철수하면 러시아는 전쟁 결과가 어떻든 제국주의 열강 내 지위가 떨어질 것이다. 더 나쁘게는 독일이 승리해 러시아를 직접 위협할 수도 있다. 러시아가 빠진 채 연합국이 승리하더라도 러시아의 지위는 하락할 것이므로 장기적으로 많은 난관이 닥쳐 올 것이다.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압박은 군대로부터도 왔다. 주요 장교들은 제국의 이상을 위해 헌신하고 있었다. 1917년 4월 장교연맹 대회는 다음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자유 러시아는 국민의 경제적 복지를 보장해 줄 지중해로의 자유로운 접근에서 거부당하면 안 된다. 지중해로의 접근 자유를 온전히 보장받을 경우에만 전반적 무장 해제로 나아가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러시아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군사적으로 통제해야 한다.” 장군들은 전쟁을 계속하기를 바랐다. ‘6월 공세’ 때 최고사령관이었던 미하일 알렉세예프는 공격만이 군대의 사기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전쟁에서의 철수나 실질적 종전이 가지는 사회적 함의도 있었다. 군 장성들은 평화가 사회를 분열시킬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외무장관직을 사임하기 전에 밀류코프는 “여기서 모든 것을 어느 정도 통합시키고 있는 것은 전쟁이다. 전쟁이 없으면 모든 것이 붕괴할 것이다” 하고 말했다. 그리고 전쟁에서 이기리라는 낙관론도 있었다. 특히 입헌민주당의 핵심 인물들이 낙관론적 견해를 보였다.
이런 내부적 요소 외에도, 러시아가 연합국들의 전쟁 노력과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는 외부적 요인도 있었다. 연합국들은 2월 혁명을 환영했다. 러시아가 전쟁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 있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타임》은 “전쟁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혁명을 추진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러시아가 완전한 승리도 없이 먼저 평화 얘기를 꺼낸 것은 연합국들에게 실망감을 줬다. 러시아가 전쟁에서 중요한 구실을 해야 한다는 연합국의 요구 뒤에는 제국주의적 거래상 러시아가 해야 할 책무가 있었다. 1917년 9월 연합국 대표와 대사들은 러시아가 전쟁에서 발을 빼면 러시아에 제공된 채권과 차관도 영향을 받을 것이라며 전쟁 노력을 계속하라고 임시정부를 압박했다.
하지만 소비에트로부터 오는 압력 때문에 임시정부는 일반으로는 평화를 바라는 듯한 모양새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임시정부는 평화를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신뢰를 주지 못했고,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추구할 수 있다고 보지도 않았다. 임시정부의 각료들은 러시아가 전쟁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임시정부 내 좌파인 케렌스키도 마찬가지였다.
경제 권력을 둘러싼 투쟁
러시아를 거대 제국 열강으로서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배계급이 경제 권력을 계속 통제해야 하고, 그래서 결정적 전투는 토지와 산업을 누가 통제할 것이냐를 두고 벌어졌다. 특히 토지와 관련해서는 이미 1917년 봄에 거대한 양극화가 일어났다. 대중운동을 대표한 전국 농민 소비에트 대회가 5월 초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 참석한 1천1백15명의 대의원 중 볼셰비키 대의원 14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사회혁명당 소속이었다. 이 대회는 “토지의 사적 소유를 영원히 폐지하고, 고용 노동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토지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지주 토지의 몰수만큼 농민들의 열망을 만족시키는 것도 없었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즉각적인 어려움은 토지 재분배가 전쟁 노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두 가지 문제가 더 있었다. 첫째는 지주들이 토지 재분배에 호의적일 수 없다는 문제였고, 둘째는 금융체계의 많은 영역이 토지를 담보로 한 것이어서 토지 몰수가 경제의 안정성을 위협할 수 있다는 문제였다. 임시정부는 제헌의회가 구성돼 관련 결정을 내리고 적절한 과정을 거친다면 원칙상 토지 재분배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런데 토지 몰수 요구가 전국 곳곳에서 들끓는 상황에서 토지 몰수에 따른 금융 불안정 문제는 대두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의 지주들이 1917년 내내 혁명을 반대했다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대지주들은 압력단체를 조직했다. 전국지주연맹은 2월 혁명 직후에는 지주들의 이익을 방어하는 조직체가 됐고, 입헌민주당에 입당해 농촌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저항했다. 제헌의회가 구성될 때까지 토지 매매를 금지하자는 법안이 5월 25일에 발표됐다. 전국지주연맹은 이 법안이 사적 소유권을 침해한다며, 토지 매매에 기반을 둔 금융시장의 안정성을 해칠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 결과 이 법안은 폐기됐고, 많은 농민들은 실망했다.
사회혁명당 지도자 빅토르 체르노프가 농업부 장관이 됐을 때 전국지주연맹은 계속해서 그에게 압박을 가했다. 8월 초 지주들의 압력은 거세졌는데, 이것은 8월 말에 일어난 코르닐로프 쿠데타에 힘이 됐다. 전국지주연맹은 법원을 이용해 농민들을 저지하고자 했다. 이런 행동은 농민들과 갈등을 빚었다. 농민들의 폭력 사건은 1917년 5~6월에는 11건이었지만, 7~8월에는 39건으로 늘어났고, 9~10월에는 1백5건의 농민 군사 행동이 있었다. 지주에 대한 농민의 적대감은 빠르게 증대했고, 9월에는 절정에 이르렀다. 결국 임시정부와 지방정부 모두 농민들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산업을 통제할 것이냐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러시아가 존속할 수 있느냐 없는냐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즉,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에 그쳐야 한다면 이미 생겨난 공장위원회와 소비에트는 어떤 권리를 갖게 되며 또 미래에는 어떻게 될 것이냐가 쟁점이었다.
산업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지위 변화에 따라 태도를 바꿨다. 2월 혁명 직후 산업계의 주도권은 섬유업자이자 모스크바 주식거래소의 부의장이었던 알렉산드르 코노발로프에게 넘어갔다. 그는 유럽의 현대식 기업과 노동 관행을 도입하고자 했고, 이 때문에 차르 정부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2월 혁명이 터지자, 그와 생각이 같은 기업주들이 결정적 영향력을 갖게 됐다. 또 다른 기업가 랴부신스키는 임시정부를 ‘우리의 정부’라고 불렀다. 코노발로프와 랴부신스키는 1917년 3~4월 임시정부와 기업주들 사이의 밀월 기간에는 노동조합을 허용하고, 8시간 노동일을 받아들이고, 물가 인상을 고려해 임금을 대폭 인상하고, 노동쟁의를 다룰 중재기구를 설립하는 등 노동관계를 재구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봤다. 다른 기업주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임시정부가 관여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긴 했지만 노동 분야에서 상당한 진전이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계급 갈등이 점점 증대하자 사태가 바뀌었다. 기업주들도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조직을 형성해 사태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다. 1917년 여름이 되자 기업주들은 임시정부, 그 안의 사회주의자 장관들, 그리고 무엇보다 노동자들을 대할 때 비관주의, 의심, 비타협적 태도를 뚜렷하게 드러냈다. 기업주들이 볼 때 사태 전개가 경제적 안정성, 이윤, 자기 기업의의 존립을 위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7년 내내 경제 위기가 심화됐다. 임시정부가 전쟁 자금을 조달하려 애썼지만 세금을 인상하거나 차관을 끌어오는 것이 힘들게 되면서 물가가 치솟았다. 산업 생산도 전쟁으로 압박을 받았다. 농민들이 곡물 판매를 거부하면서 공산품 수요가 줄고, 이것이 공산품 생산을 줄이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최고 가격을 정하거나 곡물을 징발하더라도 어려움이 경감되지 않았다. 1917년 6월의 산업 상황은 재앙적이었다. 식량 공급을 담당하던 장관은 8월에 “러시아에 기아라는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웠다”고 고백했다.
노동자들의 기대치가 높아지면서 사태는 더 악화됐고,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기업주들은 이 정부가 ‘우리의 정부’ 맞는가 하며 의심했다. 노동자 파업도 문제였다. 노동자 파업은 2월 혁명 직후 잠시 잠잠해졌다가 4월부터 7월까지 증대했고, 그 뒤 다시 줄어들었지만 8월 말 코르닐로프 쿠데타를 앞두고 다시 증가했다. 쿠데타 실패 이후 9월에는 다시 줄었지만 9월말부터 10월 초까지 다시 증가했다.
2월 혁명 초기 공장위원회는 노동자들이 공장을 감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것은 산업의 혼란을 막기 위해 공장위원회가 생산을 감독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사태가 악화되면서 공장위원회의 요구는 생산 ‘감독’을 넘어서 ‘통제’에 가까워졌다. 기업주 처지에서는 공장위원회와 급진화된 노동자들의 요구가 자신들의 특권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였다. 전국상공인연맹의 지도자 랴부신스키와 모스크바 공장소유주협회의 지도자 율리 구존은 7월 이후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노동자 계급과의 대결을 천명했다.
기업주 가운데 가장 ‘진보적’이었던 집단의 이런 입장 변화에는 2월 혁명의 결과에 대한 실망과 경제 위기의 심화가 영향을 끼쳤다. 연료와 원자재 부족으로 특히 모스크바의 섬유 공장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 3월에서 7월 사이에 모스크바에서만 공장 1백33곳이 문을 닫았는데, 이 공장들은 평균 5백3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었다. 8~9월에는 금속 산업이 타격을 입었고, 문을 닫는 공장도 점점 대공장으로 확대됐다. 일부 기업주들이 코르닐로프 편으로 기울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상황 때문이었다. 그런데 코르닐로프 쿠데타가 실패한 뒤에조차 기업주들은 생산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 벌여 나갔다.
코르닐로프 쿠데타
1917년 여름 입헌민주당의 지도자 밀류코프는 위기에 처한 러시아 사회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근본적으로 ‘레닌이냐 코르닐로프냐’라고 지적했다. 코르닐로프의 쿠데타가 성공했더라면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의 핵심 부문은 코르닐로프 뒤에서 그의 충성스런 지지자로서 전열을 가다듬었을 것이다. 하지만 코르닐로프 쿠데타 기도는 결과적으로 재앙이었다. 임시정부, 군사령부, 부르주아 정당 모두 대중적 저항에 직면했고, 쿠데타 시도에 대한 대중적 반대 덕분에 좌파가 전국적으로 부상했다. 이런 분위기의 최대 수혜자는 바로 볼셰비키였다.
쿠데타 시도는 두 가지 논리의 결과물이었다. 첫째, 군대 내에서 규율을 확립하고 정부로 하여금 군부를 지지하도록 하려는 장교동맹의 의도가 있었다. 케렌스키는 총리가 되면서 코르닐로프를 남서부 전선의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이어서 러시아 군대의 거듭된 패전과 군대의 기강 해이를 문제 삼아 최고사령관 브루실로프를 해임하고 코르닐로프를 그 자리에 앉혔다. 즉, 코르닐로프가 부상한 데에는 임시정부의 정치적 판단도 작용하고 있었다.
둘째 논리는 계급투쟁의 논리였다.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는 자본주의를 확고히 방어하는 문제로 지배계급의 여러 분파들을 통합시켰다. 7월의 때 이른 봉기가 패배하며 페트로그라드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었다. 케렌스키에게 총리 자리를 물려준 르보프 공은 “남서부 전선에서 독일을 깨부수는 것보다 대對 레닌 전선에서 승리하는 것이 러시아에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이것은 케렌스키를 총리로 해 수립된 제2차 임시정부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입헌민주당의 밀류코프는 “제2차 임시정부 내각이 사회주의자들에게 약간 기울어 있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확고한 신봉자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회 고위층의 정서가 모든 형태의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적대적으로 바뀌면서 일련의 조처가 뒤따랐다. 7월 8일에는 군대의 규율이 강화됐고, 7월 12일에는 사형제가 도입됐으며, 7월 16일에는 정부 각료와 장군들의 연석회의가 열렸다. 농촌에서는 사적 소유에 대한 공격을 조장하는 행위가 불법임이 공표됐고, 7월 8일에 정부는 농민들의 토지 장악을 용납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부르주아지들은 어떻게 전진할 것인지를 두고 분열돼 있었다. 예를 들어 페트로그라드에서 바쿠의 유전지대까지 사업을 확장한 기업가 바실리 자보이코는 기업주들과 군부 사이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했다. 러시아경제부흥협회를 설립한 알렉세이 푸틸로프도 이와 관련돼 있었다. 이들의 초기 목적은 혁명을 제약하는 보수적 입장을 선전하고 제헌의회에 출마할 우파 후보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혁명이 진행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전국상공인연맹은 모스크바에서 모임을 갖고 군부와의 접촉을 강화하기로 했다. 모스크바에 기반을 둔 기업가들은 혁명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페트로그라드의 기업주들은 더 적극적이었다. 차르 정부와의 밀접한 연계 속에서 발전한 이 자본가 분파는 2월 혁명 이후 지지할 만한 군부 내 인사를 물색했고, 코르닐로프에게서 전진할 길을 찾았다.
8월 내내 긴장이 고조됐다. 8월 14일에는 카잔의 화약공장과 탄약고에서 화재가 발생해 사흘 동안 폭발이 이어지고 총알 수백만 개와 총기 수만 정이 소실됐다. 8월 20일에는 리가가 독일에 점령됐다. 이런 소식을 접한 장교연맹은 임시정부가 “더는 러시아의 수반으로 있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8월 25일 코르닐로프는 임시정부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자신을 따르던 기병 제3군단을 전방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이동시켰다.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를 비판하면서 추락하던 자신의 신뢰를 회복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혁명을 구할 결정적 순간에 그는 코르닐로프에게 기울었다.
코르닐로프 쿠데타 이후
혁명적 위기의 시기는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사회의 분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첨예한 계급 갈등이 지속되고, 각 계급은 정치적 선택에 직면한다. 2월에서 8월 사이에 벌어진 일들은 지배계급의 이해관계가 대중운동의 이해관계와 충돌했고,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해결책으로 제시될 가능성이 없었음을 보여 줬다. 코르닐로프 쿠데타는 이런 난관에 대한 지배계급 분파들의 대응이었다.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주도권이 좌파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사회를 양분한 근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9월과 10월에 압력이 고조되면서 가장 중요한 권력 문제에 관해 각 정당들은 정치적 대응을 촉구받고 있었다.
그런데 러시아 혁명을 다룬 많은 저작들이 대중운동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지만 그 과정에서 정당들이 내린 정치적 판단과 선택에 대해서는 건너뛰거나 평가절하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인데, 정당들의 정치적 강점과 약점, 정책과 조직의 장단점이 위기 상황 때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1917년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대안이 왜 실패했는지를 알려면 그해 가을 각 정당의 정치적 선택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위기의 심화
코르닐로프 쿠데타 직후 입헌민주당 소속 각료들이 불신을 받고 사임하면서 제2차 임시정부는 무너졌다. 케렌스키는 제3차 임시정부를 구성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부르주아지와 입헌민주당이 신뢰할 수 없는 파트너라는 점이 여전히 문제였다. 계급 세력 관계가 왼쪽으로 기울긴 했어도 민주주의, 전쟁, 토지와 공장에 대한 통제권 등을 둘러싼 갈등은 여전했고, 러시아 사회의 분열도 여전했다.
케렌스키는 9월 1일에 5명의 각료로 총재정부를 구성해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총재정부는 ‘러시아 공화국’을 선포하고 두마를 공식 해산하는 등 형식적으로는 양보했지만 군대 내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반혁명인민투쟁위원회 등 코르닐로프 쿠데타 동안 세워진 특별혁명위원회를 모두 해체하라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케렌스키의 이런 행보는 좌우파 모두에게 지지를 얻지 못했다. 입헌민주당은 그에게 그런 권한이 없다며 분노했다. 결국 9월 25일 케렌스키는 다시 입헌민주당과 타협파 사회주의 정당들의 협조를 얻어 제3차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한편 케렌스키 정부는 타슈켄트에 계엄령을 선포함으로써 좌경화된 농민들을 짓밟았다. 10월이 되면서 케렌스키는 볼셰비키의 봉기를 진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어 정면대결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9월 14~22일 전국민주협의회가 개최됐는데, 급진화의 영향력으로 사회혁명당을 포함한 사회주의 세력이 다수를 차지했다. 하지만 민주협의회는 부르주아와의, 특히 입헌민주당과의 연립정부 구성 문제를 놓고 마비됐다. 민주협의회가 폐회하기 전에 예비의회(또는 러시아임시협의회)라고 불리는 기구가 만들어졌다. 케렌스키는 제헌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예비의회가 최고의 국가 권력체가 될까 봐 이 기구를 인정하지 않았다. 입헌민주당도 러시아가 아직은 법적으로 공화정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이 명칭 사용에 반대했다.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를 따라 예비의회를 거부했다.
정치 영역에서뿐 아니라 경제 영역에서도 대결이 더욱 분명해졌다. 기업주들은 계급으로서 생존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다. 생산을 유지하기 힘들어 해고된 노동자와, 고용주가 도망가면서 해고된 노동자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지도부는 분명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 제4차 공장위원회 대회에서 한 노동자는 “우리는 더는 경제적 붕괴를 기다리는 대기실에 앉아 있지 않겠다. 우리는 붕괴의 바로 그 영역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임시정부의 대응은 좌충우돌 그 자체였다. 어느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다른 문제가 악화되는 식이었다. 곡물 가격 인상은 거대 곡물상들에게는 유리한 조처였지만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불공정한 조처였다. 또, 대중 운동의 영향으로 이런 혼란을 아래로부터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산업 생산 영역에서 노동자 통제 조직화 움직임이 일어났다. 자본가 계급보다 노동계급이 공장을 중단 없이 적절히 운영하기를 더 원했다. 다수 대중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윤과 특권에만 관심 있는 기업주의 자의적 의지보다는 노동자 통제가 더 나은 방안이었다. 그래서 노동자 통제는 노동자 대중 자신의 이익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고, 혁명적 군인들뿐 아니라 혁명적 농민들도 지지했다. 정치 영역에서 이것은 임시정부와의 타협을 종료하고 새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볼셰비키의 대응
1917년 볼셰비키가 운 좋게 권력을 장악했다는 비난은 너무나 진부한 주장이다. 1914년부터 1917년까지 위기의 성격과 그 대응에 관해 볼셰비키당 내에서 벌어진 토론과 논쟁을 살펴보면 왜 그런지를 알 수 있다. 볼셰비키당은 이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좌파의 어느 정당보다 더 유연했다.
레닌, 트로츠키, 부하린 등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제국주의 체제 속에서 세계가 점점 통합되고 있으며 각국의 자율적 발전 능력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점증하는 힘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경제적 경쟁 속에서 나타나는 군사적 경쟁(때로는 전쟁)을 대비해야 했다. 이것은 사회주의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두 가지 경향을 창출했다. 하나는 점점 더 커지는 국가 통제였는데, 부하린은 이를 국가자본주의라 불렀다. 다른 하나는 계속된 통합 덕분에 러시아 같은 국가의 노동자들도 전면적 혁명 과정을 추진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그것의 일부를 연속혁명이라고 불렀다. 전쟁은 이 경향들을 가속화했다.
러시아 사회가 직면한 위기는 날마다 반란을 일으키는 농민·병사들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투쟁적인 노동계급을 창출했다. 또한 이 위기는 공장위원회와 소비에트라는 민주적 구조물을 창출했다. 이런 기회를 잡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했다. 위기가 전례 없는 속도와 규모로 진행돼, 혁명이 성공하든지, 차르 제국이 완전히 붕괴하든지, 제2의 코르닐로프 쿠데타가 일어나 볼셰비키 등 소비에트 내 여러 정당을 일소해 버리든지 결판이 나야 했다. 그래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가 권력을 잡지 않으면 역사가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입장이 자동으로 채택된 것은 아니었다. 볼셰비키는 다른 어느 좌파 정당들보다 더 날카롭게 내부 논쟁을 벌였다. 볼셰비키당은 1917년 4월에도, 7월에도, 9~10월에도, 10월 혁명 뒤로도 각각의 쟁점으로 내부 논쟁을 벌였다. 이런 논쟁의 역사는 스탈린이 등극해 억누를 때까지 계속됐다. 스탈린주의 역사가나 서구의 우파 역사가들이 묘사한 것과 달리 레닌은 결코 볼셰비키를 지배하지 않았다. 볼셰비키당은 대중운동에 초점을 맞추며 날카롭고 진지한 토론과 논쟁을 정력적으로 펼치는 전통을 유지한 덕분에 명확한 입장을 제시하며 사태 전개에서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었다. 그 경쟁자들과 비교하면 볼셰비키의 강점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정치적 실패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볼셰비키의 주장을 심도 있게 반박하지 못했다는 점은 참 놀랍다. 사실 그들은 전쟁 이전에 하던 주장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했다. 그래도 그들은 혁명에 반대하는 부르주아와는 함께할 수 없다고도 주장했다. 한편, 그들은 볼셰비키가 포함된 사회주의 연립정부를 구성한자는 의견에도 반대했다. 그러면 부르주아가 소외되고 연립정부를 ‘극단주의자들’의 수중에 내맡길 위험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들은 사회주의 우파(케렌스키를 포함시키든 그렇지 않든 간에)와의 연합을 위한 절충안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 입장은 이론적으로나 현실에서 작동할 수 없는 것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사회혁명당이나 멘셰비키 지도자들이 권력 장악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런 입장을 갖게 됐다는 설명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용기가 아니라 정치였다.
멘셰비키 이론가인 단과 마르토프 등은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에 그쳐야 한다는 사상과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사상 사이에서 동요했다.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자승자박의 모습이었다.
입헌민주당이 이 모순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밀류코프는 좌파가 정말로 부르주아적 단계를 넘어서지 않는 혁명을 바란다면, 2월 혁명 직후 멘셰비키인 수하노프가 주장했던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하노프의 주장인즉, 부르주아가 혁명의 선두에 서서 부르주아적 과제를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멘셰비키는 부르주아 없는 부르주아 혁명, 부르주아의 반대를 무릅쓴 부르주아 혁명, 사회주의자 연합이 끌고 가는 부르주아 혁명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자기 계급의 이익을 방어하고 대중운동을 억누르고 반혁명적 장군들을 염두에 두는 부르주아와의 동맹은 어떻게 가능할까? 대중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무책임한 정부를 어떻게 지지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에 직면해 멘셰비키는 심각한 이론적 혼란에 빠졌다. 멘셰비키는 부르주아들이 실패하면서 사태의 주도권이 사회주의자들이 이끄는 혁명적 민주주의 세력에게로 넘어갔는데, 이 세력이 ‘혁명적’ 프티부르주아의 지원을 받아 부르주아 혁명을 수행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의 문제는 상황이 바뀌었는데도 분석은 바뀌지 않다는 점이었다. 9월 말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입헌민주당을 제외한 민주적 연립정부를 지지해, 그 결과 케렌스키가 제3차 임시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정부에는 입헌민주당도 포함됐다. 좌파의 압력을 받은 사회혁명당 지도자 체르노프는 사회혁명당 중앙위원회가 이 정부 구성안을 승인한 것에 격렬하게 항의했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이런 정치적 약점과 비일관성 때문에 지지가 떨어졌고, 1917년 여름과 가을 볼셰비키의 지지는 급속히 커졌다. 중소 도시에서 치러는 선거에서는 볼셰비키가 아직 큰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페트로그라드나 모스크바 같은 대도시에서 볼셰비키는 주요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의 소비에트와 공장위원회들에서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지지가 줄어든 것은 선거 결과에서 잘 드러났다. 공장위원회와 소비에트에서 나타난 추세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볼셰비키로의 이동이 두드러졌다. 둘째,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지지 감소는 그 정당들이 지지자들의 바람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셋째, 중도우파가 약화되면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소속 대의원이 늘어났고, 그 결과 세력 균형이 왼쪽으로 기울었다. 제2차 소비에트 대회 이후 사회혁명당 좌파는 독립적인 정당을 결성했다. 이런 사실들 뒤에는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분열하고 약화돼 가는 복잡한 과정이 있었다. 혁명적 분출 속에서 볼셰비키당은 스스로를 재조직하며 혁명으로 나아갔다면,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그 반대로 움직였다. 두 정당은 분열을 겪으며 반혁명 쪽으로 나아갔다.
권력 문제
9월 25일 제3차 임시정부가 수립됐을 때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페트로그라드 노동자와 병사들이 새 정부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밝히는 결의안을 즉시 통과시켰다. “혁명적 민주 세력 전체가 새 정부 구성에 관한 소식을 ‘사퇴하라!’는 단일한 요구로 맞이할 것이다. … 진정한 민주주의가 내는 일치된 목소리에 기대어 전국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대회가 참된 혁명 정부를 세울 것이다.” 이 예상은 맞았다. 제2차 소비에트 대회가 소집됐을 때 권력 문제에 관한 대의원들의 견해 분포는 다음과 같았다. 전체 6백70명 중 5백5명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지지했고, 단지 79명만이 부르주아지와의 연립정부를 지지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 505명 |
‘모든 권력을 민주주의로’ | 86명 |
입헌민주당을 제외한 민주적 연립정부 | 21명 |
입헌민주당을 포함한 민주적 연립정부 | 58명 |
그러므로 10월에 임시정부가 계속 주저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는 상황에서 볼셰비키가 결정적 구실을 하지 않았더라도 권력을 장악하려는 아래로부터의 움직임은 일어났을 것이다. 예를 들어 봉기를 주도한 소비에트 군사혁명위원회는 볼셰비키가 주도했지만, 80명의 위원 중 볼셰비키가 아닌 위원 27명도 매우 전투적인 입장이었다.
10월 24~25일 페트로그라드에서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은 매우 쉬웠다.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의 마지막 법무장관인 파벨 말랸토비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권력이 그것을 조직한 사람들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면, 그 권력이 필요할까?”
러시아 혁명을 다룬 역사서들은 많은 경우 10월 혁명 부분을 1917년 10월 25일 밤 레닌이 제2차 소비에트 대회장에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하며 끝낸다. 그러나 혁명은 과정이다. 혁명은 10월 24~25일 페트로그라드에서 종료되지 않았다. 그 뒤 몇 달 동안 이어졌고, 러시아 밖으로도 확산됐다.
1918년 봄 혁명 정부는 진격해 오는 독일군을 저지하려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했지만, 몇 달 뒤 내전이 시작됐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보여 주는 동역학을 분석할 때도 그렇지만 혁명의 공고화 과정을 분석할 때도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정책을 눈여겨봐야 한다.
러시아에서 혁명의 공고화는 세 가지 반혁명적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페트로그라드 외곽에 있는 군대 내 반대파, 페트로그라드 내에 있는 장교들의 위협, 혁명 정부의 국가 기구 장악을 저지하기 위해 고안된 화이트칼라 피고용인들의 파업이 그것들이다. 게다가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혁명에 반대하는 자들(입헌민주당 포함)과 함께 조국·혁명구제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의 좌파는 소비에트 내 좌파와 가까웠지만 위원회 내 중도파와 우파는 혁명에 반대해 투쟁할 준비를 하는 자들과 접촉했다. 철도노조 지도자들이 혁명을 지지할지 말지를 두고 모호한 태도를 보여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이때 레닌이나 트로츠키 등 볼셰비키의 어느 누구도 볼셰비키로만 구성된 정부가 등장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심지어 고립을 두려워한 일부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11월 초반에 잠시 당을 나오기도 했다.
사실 조국·혁명구제위원회는 10월 24일에 너무나 분명했던 정치 권력 문제를 두고 갖가지 분열을 재생산했다. 야당은 혁명에 반대하는 부르주아 세력과 단결해야 할까? 볼셰비키와 부르주아 모두에 반대하는 ‘사회주의 야당’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임시정부(와 케렌스키)를 방어해야 할까? 아니면 볼셰비키도 아니고 옛 임시정부도 아닌 새 정부를 기대해야 할까?
조국·혁명구제위원회 주변으로 몰려든 좌파들은 볼셰비키가 권력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반혁명의 길을 열었다고 주장했다. 철도노조 지도부의 행동으로 이 문제가 절정에 이르렀다. 철도노조 지도부는 파업을 벌이겠다고 위협하며 볼셰비키, 사회혁명당 좌파, 멘셰비키, 사회혁명당 지도부, 조국·혁명구제위원회 주변에 몰려든 기타 세력들이 협상을 통해 새 연립정부를 구성하라고 촉구했다.
철도노조의 압력 속에서 논의는 사회혁명당 지도자인 체르노프를 총리로 하고, 우파 사회주의자들, 레닌과 트로츠키를 배제한 볼셰비키로 이뤄진 연립정부의 가능성을 검토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중도우파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방안은 볼셰비키를 분열시켜 그 영향력을 반감시킬 수 있다는 면에서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격렬히 반대했다. 그렇지만 사회혁명당 우파와 멘셰비키 우파는 타협은 있을 수 없고 혁명을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멘셰비키인 단은 “우리의 전술 때문에 볼셰비키가 이미 분열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이에 대해 레닌과 트로츠키는 어떤 연립정부라 할지라도 이미 벌어진 권력의 이동을 인정해야 하고 볼셰비키가 주도적 구실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권력이 허공에 떠 있는 것도 아니고, 경쟁하는 정당들 사이에 있는 것도 아니고, 소비에트에 있다고 지적했다. 또 자신들이 정부에 포함되는 것은 개인적 이유가 아니라 중요한 사태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므로 배제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연립정부 구성 논의는 중단됐다. 볼셰비키 지도부가 사회주의 연립정부 구성에 반대해서가 아니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의미 있는 논의할 태세가 돼 있지 않았고, 또 분열도 했기 때문이다. 단기적으로 이 논의는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탈당했던 일부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다시 돌아와 당내 분열이 종식됐고, 사회혁명당 내 좌파가 분열해 나와 볼셰비키와 함께 새로운 혁명적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이 혁명적 연립정부는 1918년 봄에 다른 문제로 분열하기 전까지 첫 몇 개월 동안 혁명을 이어 나갔다.
사회혁명당의 우파와 멘셰비키는 11월에 선출될 제헌의회에 기대를 걸며, 혁명과 부르주아 사이를 중재할 제3의 세력을 형성하려 했다. 하지만 10월 혁명 때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제헌의회와 소비에트는 그 기반으로 보건대 서로 보완하는 관계가 아니라 경쟁하며 적대하는 관계였다. 10월 혁명 이후 세력 균형이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좌파 쪽으로 기울었지만 거대한 농민 표 덕분에 제헌의회 선거에서는 사회혁명당이 다수를 차지했다.
사회혁명당 지도자들은 이를 이용해 사태를 안정시킬 생각만 하고, 당내 좌파가 분열해 나가고 농민들이 급진화하고 있던 상황을 무시했다. 그러나 대중은 사회혁명당 지도자들과 달리 평화, 토지 분배, 노동자에게로 권력 이전, 여러 소수민족의 자결 등을 원했다. 제헌의회가 또 다른 정부의 기반이 된다면, 대다수 사람들의 열망은 무시될 터였다. 그래서 부하린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혁명 때에는 필름이 더 빨리 돌고 여러 기구와 정당들의 구실이 변한다. 한때 혁명의 진전을 상징한 제헌의회가 이제는 그 반대의 것을 상징하게 됐다.”
1917~21년에 볼셰비키는 여러 실수를 저질렀지만, 서구의 혁명적 좌파가 놓친 기회만큼은 잘 붙잡았다. 서구에서도 혁명적 위기가 일어났지만 제대로 대응한 혁명적 좌파는 없었다. 그래서 혁명적 위기가 봉합됐다.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가 내전에서 겨우 승리했지만 매우 취약해졌고, 노동계급도 파괴됐고, 혁명도 고립됐다. 국제 혁명의 실패와 고립 때문에 스탈린이 부상할 수 있었다. 서구에서도 혁명적 기회의 유실 때문에 1922년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권력을 장악하고, 1933년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집권했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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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Mike Haynes, Was there a parliamentary alternative in russia in 1917?, International Socialism no.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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