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러시아 혁명 100주년
《세계를 뒤흔든 열흘》, 《혁명의 시간》
10월 혁명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책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에 대해 그리고 아래로부터 사회주의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은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다.
우익들은 러시아 혁명을 “소수의 직업 혁명가들이 무력을 사용해 기존 정부를 무너뜨린” 사건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스탈린주의 체제의 끔찍한 억압을 거쳐 마침내 1991년의 ‘몰락’으로 막이 내렸다고 한다.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이런 주장에 대한 생생한 반박이다. 이 책의 저자인 존 리드는 10월 혁명 동안 혁명 러시아의 곳곳을 누비며 노동자와 대다수 농민 출신인 병사들이 자신의 힘으로 역사를 만드는 것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항상 볼셰비키가 있었다고 증언한다. 그래서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며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추천했다.
이 책의 흥미를 더해 주는 부분은 부르주아지, 카데츠, 멘셰비키, 사회혁명당 등 혁명에 반대하는 정치세력들의 입장도 생생하게 기록해 놓았다는 점이다. 존 리드가 미국인 기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덕분에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10월 혁명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무장 봉기 러시아 2월 혁명을 통해 임시정부가 수립됐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존 리드는 “자유주의 성향의 지방 귀족과 사업가, 교수, 편집자, 군 장교들”의 작품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소비에트의 활동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러시아 대중이 봉기”한 것으로 확신하고 러시아로 떠난다.
그가 러시아에 도착한 때는 1917년 9월이었다. 9월은 볼셰비키와 노동자들이 코르닐로프 장군의 쿠데타를 막아 낸 직후였다. 사람들은 임시정부가 코르닐로프와 한패였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현실은 모순적이었다.
3 반면 강력한 대중 운동으로 쿠데타를 저지하는 데 핵심 구실을 한 레닌은 임시정부의 수배 때문에 쫓기고 있었다.
소비에트는 자신의 혁명강령을 공개적으로 선언할 정도로 강력했고, 모든 명령은 소비에트의 허락이 있어야만 실행할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불신을 받고 있던 임시정부의 케렌스키는 동궁에서 병사들의 정치행위 중지, 특별 혁명위원회 해체 등 소비에트에 반하는 포고령을 발표하고 있었다.이런 모순된 이중권력 상태가 지속된다는 것은 반혁명 시도를 계속 허용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4 군부가 독일군에게 고의로 리가Riga를 내줬다는 의심도 있었다.
부르주아지들은 이미 다양한 방법으로 혁명을 분쇄하려 했다. 공장 폐쇄와 원재료 빼돌리기 등을 통해 산업을 마비시키고 있었고, 심지어 전쟁을 벌이고 있던 독일군에게 도움을 얻으려고도 했다. 존 리드가 부르주아지들에게 “빌헬름[독일 황제]과 볼셰비키 중 어느 쪽을 선호하는지 물었다. 열한 명 중 열 명이 빌헬름을 꼽았다.”반면 노동자와 병사 다수는 코르닐로프와 연루돼 있던 임시정부를 더 이상 믿지 않았다. 그들은 산업 통제, 토지, 평화를 실행할 수 있는 노동계급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볼셰비키를 지지했다. 빅토르 세르주는 당시 대중과 볼셰비키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발트 함대 포수들이 혁명이 위협받는 것을 걱정하며 할 일을 찾고 있을 때 길을 알려준 것은 볼셰비키 선동가들이었다. … 참호 속 병사들이 학살자를 처단하기로 결정하고 이 사실을 알리고자 했을 때 그들은 볼셰비키당 후보를 부대위원으로 선출했다. … 농민들이 이제는 스스로 움직일 때가 아니냐고 묻기 시작했을 때 “농민들이여 토지를 장악하시오!” 하고 외치며 화답한 사람은 레닌이었다. 노동자들이 자신을 억압하려는 반反혁명 음모를 알아차렸을 때 … 혁명의 필요성을 담은 구호를 제기한 것은 〈프라우다〉였다. 거리에서는 … 볼셰비키당의 포스터를 보며 외쳤다. “그래 바로 이거야!” 바로 그것이었다. 그 소리는 바로 자신들의 목소리였다.
6 하고 강조했다.
임시정부가 순순히 권력을 넘겨줄 리는 만무했기 때문에 충돌은 불가피했다. 레닌은 “우리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포기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봉기를 일으켜야 합니다. 중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봉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소비에트를 무장시켰다. 트로츠키는 그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노동자 대표단이 와서 무기가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우리는 무기고를 장악하지 못했다.’ 그러자 이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세스트로레츠스크 무기공장에 갔다왔다.’ ‘그런가? 그러면 어떻게 되었는가?’ ‘소비에트가 명령한다면 공장 노동자들이 무기를 내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소총 5천 정을 요구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바로 그날 무기를 손에 넣었다.
임시정부는 융커(사관생도) 등을 모아 봉기에 대비하고 있었다. 무장 충돌은 시간 문제였다.
10월 24일 밤, 정부가 군사혁명위원회에 대한 사법처리, 볼셰비키 신문의 폐간,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체포 등을 명령하자 군사혁명위원회는 즉각적인 봉기로 반격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무너뜨리는 봉기는 아주 ‘평화롭게’ 진행됐다. 노동자와 병사 중 어느 누구도 임시정부를 방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궁을 수비하던 융커만이 유일하게 임시정부를 방어했다. 한 병사는 자신들이 동궁을 점령하는 과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는 한 명씩 차례로, 혹은 무더기로 각기 다른 계단으로 올라갔습니다. 꼭대기까지 오르자 융커들이 우리를 붙잡아 총을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동료들이 한 명씩 끊임없이 올라오면서 어느새 우리 편이 다수가 됐습니다. 우리는 이내 몸을 돌려 융커들의 총을 빼앗았습니다.” 동궁 안에 값비싼 물건들이 있었지만, 병사들은 스스로 규율을 지키며 행동했다. “동지들! 아무것도 손대지 마시오! 아무것도 가져가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민중의 재산입니다!”
10 그들 중 많은 수가 나중에 백군에 들어가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참혹한 반격을 가하는 자들이 되었을 텐데 말이다.
병사들은 무장해제된 융커들에게도 너그러웠다. “앞으로도 민중에게 총을 겨눌 것인가”를 물었고, 융커들은 차례로 “아니오” 하고 대답한 뒤 풀려났다.존 리드가 볼 때 그날의 피해는 궁전 처마 돌림띠가 전함에서 경고로 쏜 포탄에 맞아 떨어져 나간 것뿐이었다.
이후 열린 소비에트 대회에서는 봉기에 대한 논쟁이 있었지만, 볼셰비키와 무장봉기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압도적이었다. 반혁명 세력들은 시 두마와 조국·혁명구제위원회에 모여들어 볼셰비키와 소비에트에 반대했다. 존 리드가 보기에 소비에트와 이들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소비에트 대회에는 남루한 차림의 병사들, 지저분한 노동자들과 농민들,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허리가 굽고 흉터가 남은 가난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반면에 구제위원회 회의에는 … 잘 먹고 잘 입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단 세 명의 프롤레타리아를 보았을 뿐이다.”
시 두마와 구제위원회에는 볼셰비키를 제외한 대부분의 정당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볼셰비키에게 “당신들은 이미 고립됐고, 당신들의 정부는 그 어떤 민주주의 집단의 지지도 얻지 못한 상태”라고 큰소리 쳤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그들에게 이렇게 반박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피를 거의 흘리지 않고 정부를 전복할 수 있었을까요? … 바로 이 사실이, 우리가 고립돼 있지 않았다는 놀라운 증거입니다. 정말로 고립돼 있었던 것은 임시정부, 그리고 우리를 반대하며 공격한 민주주의 정당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고립돼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서 계속 고립되고 단절돼 있을 것입니다!
볼셰비키는 노동자와 병사의 지지를 계속 획득해 가고 있었다.
존 리드는 브루노비키 장갑차 부대의 집회 목격담을 기록했다. 부대에서 집회가 열리고 각각의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병사들을 설득하기 위해 차례로 연설을 하고 있었고, 병사들은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으로 연설을 경청”했다. 마지막 연설자는 사병 출신의 볼셰비크 크릴렌코였다.
문제는 아주 간단합니다. 한편에는 케렌스키, 칼레딘, 코르닐로프, 멘셰비키, 사회혁명당, 카데츠, 두마, 장교들이 서 있고, … 다른 편에는 노동자, 병사, 수병, 빈농들이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인입니다. 위대한 러시아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것을 그들에게 다시 넘겨주겠습니까?
투표 결과는 볼셰비키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존 리드는 이런 일이 러시아의 마을, 지방, 전선, 그리고 병영에서 반복됐음을 증언한다.
화해주의자들
과거 다수의 지지를 받았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갈수록 지지자들을 잃고 있었다. 계급 갈등이 첨예해질수록 두 계급을 화해시키려 했던 그들의 입지는 좁아졌고, 결국 혁명에 반대해 부르주아지 편에 섰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정치 때문이었다. 그들은 러시아에서 혁명의 단계는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부르주아지가 권력을 잡아야 하고, 노동자 혁명은 먼 훗날에나 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르주아지와 협력하고, 부르주아지들이 권력을 잡도록 돕는 것이 그들의 일관된 행동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상황이 무르익을 때까지 권력을 잡을 권리가 없습니다. 현재와 같은 부르주아 혁명의 상황에서 민중이 권력을 장악한다면, 혁명은 결국 비극적 종말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가끔 혁명에 대해 말하지만, 행동은 항상 부르주아지와 타협했고, 부르주아지가 타협하지 않으면 굴복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평화와 토지 문제 등을 해결하라고 정부를 향해 결의안을 발표했다가 케렌스키가 항의하자 “이 결의안이 정부에 대한 비판을 의도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해명하고 물러나는 식이었다. 모스크바에서 혁명가들의 장례식에서도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타협적인 태도를 보이자 사람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에게는 도무지 아무것도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 그들은 타협하는 것이 습관이 돼 버렸어요.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우리에게 융커들과 합동장례를 치르자고 제안해 왔습니다!”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편과 노동자 편 둘 이외에 중간의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존 리드는 차르스코예 셀로 기차역에서 어느 지식인 학생이 거들먹거리며 병사 두 명을 훈계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나는 볼셰비키에 반대합니다. 볼셰비키는 우리 러시아와 우리의 자유로운 혁명을 파괴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학생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내 눈에는 간단한 문제로 보입니다. 비록 나는 제대로 교육 받지 못했지만, 세상에는 두 계급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가……”
“당신은 어리석은 공식만 되풀이하고 있군요!” 학생은 소리쳤다. “오직 두 계급이 존재하지요.” 병사는 완강한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어느 한쪽이 아니라면 다른 쪽에 속한 것이지요.…”
혁명을 거친 노동자와 병사들은 더는 굽신거리거나 굴종하지 않았다. 웨이터나 호텔의 종업원들도 자신들의 조직을 만들고 팁을 거부했다. “웨이터 일도 생계를 위한 것일 뿐입니다. 팁을 주는 것은 모욕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을 더 알기 위해 노력했다. 존 리드가 어느 전선 참호에서 만난 병사들은 야윈 얼굴과 창백한 피부, 맨발에 누더기가 된 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그를 보자 벌떡 일어나 “읽을 것 좀 가져오셨나요?” 하고 간절하게 물었다.
20 그래서 반혁명 군대가 페트로그라드를 공격했을 때, 그들은 전투에 적극 참가했다. “그 누구도 아닌 그들의 전투였고, 그들의 세상을 위한 전투였다. 지휘를 맡을 장교들도 그들이 직접 선출했다.” 21
노동자들은 혁명 러시아를 진정 자신들의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것도 가져본 적이 없는 그들은 당당히 외쳤다. “이 순간, 모든 것이 내 것입니다! 나의 페트로그라드여!”존 리드는 모스크바에서 혁명 과정에서 죽은 노동자와 병사들을 애도하는 장례식에 참석 후 이렇게 적었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신앙심 깊던 러시아인들에게 자신들을 천국으로 보내달라고 기도해 줄 성직자가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들은 그 어떤 천국보다도 밝게 빛나는, 그것을 위한 죽음을 영광으로 생각할 수 있는 나라를 지상 위에 세우려 하고 있었다.
타당성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1백 년 전 러시아 혁명을 다루고 있지만, 그때 얻었던 교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당하다.
첫째,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의 행동으로 가능하다는 것과 사회를 변화시키면서 그들 스스로 변한다는 것이다. 둘째, 1백 년 전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던 러시아에서조차 부르주아지들은 일말의 진보성이 없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한국의 부르주아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셋째, 부르주아지들이 반혁명적이기 때문에 부르주아지들과 동맹하려던 ‘혁명가’들은 대부분 반혁명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그럴 때조차 자신들이 부르주아지들을 이용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존 리드가 언급한 볼셰비키의 구실이다.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것은 유산 계급이나 다른 정당 지도자들과 타협해서 된 것이 아니었다. 낡은 정부 기구와 화해함으로써 된 것도 아니었다. 소수 분파의 조직적 폭력을 통해 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러시아 대중이 봉기를 각오하지 않았다면 볼셰비키는 틀림없이 실패했을 것이다. 볼셰비키가 성공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기층 민중의 거대하고도 단순한 욕구를 그들이 현실화해 줬다는 점이다. 즉, 볼셰비키는 민중과 함께 구체제를 파괴해 나갔고, 민중과 협력하면서 폐허와 연기 속에서 새로운 체제의 기초를 함께 세워 나갔던 것이다.”
러시아 혁명에 관한 책을 한 권 더 추천하면, 알렉산더 라비노비치의 《혁명의 시간》을 들고 싶다. 라비노비치는 볼셰비키에 반대해 미국으로 망명한 사람의 후손으로, 그도 처음에는 10월 혁명을 쿠데타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을 연구하면서 10월 혁명이 쿠데타가 아니라 대중들의 열망을 반영한 혁명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혁명의 시간》은 7월 때이른 봉기로 체포와 수배 상황에 처했던 볼셰비키가 불과 4개월 만에 전세를 뒤집고 혁명을 성공시켰는지를 6백 페이지가량 되는 분량의 책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책 역시 대중의 정서와 볼셰비키가 어떻게 조응하는지를 당시의 1차 사료를 중심으로 세심하게 추적한다.
특히 볼셰비키 내부에서 벌어진 수많은 논쟁들이 어떤 맥락에서 진행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어서 러시아 혁명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예를 들면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서 무장봉기 논쟁이 독일 혁명에 대한 전망, 농민의 지지 여부, 병사들의 충분한 동의 정도, 다른 ‘사회주의 정당’들과의 관계, 부르주아지의 취약성 등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논쟁이기도 했다는 점이 잘 설명돼 있다. 아쉽게도 이 책은 절판됐기 때문에 도서관이나 중고 서점에서 구해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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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 리드 2005, p7. ↩
- 로젠스톤 2007, p449. ↩
- 라비노비치 2008, pp302-303. ↩
- 리드 2005, p23. ↩
- 세르주 2011, p71. ↩
- 리드 2005, p56. ↩
- 트로츠키 2004, p127. ↩
- 리드 2005, p196. ↩
- 리드 2005, p124. ↩
- 리드 2005, p125. ↩
- 리드 2005, p144. ↩
- 리드 2005, p168. ↩
- 리드 2005, p189. ↩
- 리드 2005, p92. ↩
- 리드 2005, p86. ↩
- 리드 2005, p285. ↩
- 리드 2005, p216. ↩
- 리드 2005, p29. ↩
- 리드 2005, p31. ↩
- 리드 2005, p276. ↩
- 리드 2005, p251. ↩
- 리드 2005, p292. ↩
- 리드 2005, p324. ↩
- 2017년 7월에 《1917년 러시아 혁명 -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라는 제목으로 책갈피 출판사에서 출판됐다. ↩
참고 문헌
라비노비치, 알렉산더 2008, 《혁명의 시간》, 교양인.
로젠스톤, 로버트 2007, 《존 리드 평전》, 아고라.
리드, 존 2005, 《세계를 뒤흔든 열흘》, 책갈피.
세르주, 빅토르 2011, 《러시아 혁명의 진실》, 책갈피.
트로츠키, 레온 2004, 《러시아혁명사》 하, 풀무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