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오늘날의 제국주의와 전쟁
왜 자본주의는 전쟁을 낳는가? *
제1차세계대전이라는 대량 살육 이후에도, 20세기에는 끔찍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전쟁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논리에 내재해 있는 것이라고 샐리 캠벨은 주장한다.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20년 동안 강대국들이 평화적 공존을 약속하며 맺은 협약이 거의 100개에 달한다. 1899년 헤이그에 설치된 상설중재재판소PCA는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평화가 주는 이익을 모든 사람에게 보장할 가장 객관적인 수단을 찾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현존 무장력이 점점 더 발전하지 못하도록 제약을 가하기” 위한다고 했다. 이 기구는 평화를 사랑한다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제안으로 만들어졌는데, 그의 별명은 ‘피 칠갑을 한 니콜라이’였다.
비교적 약한 열강의 지배자[러시아 황제]가 왜 군비 경쟁을 저지하길 원했는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자신이 그 경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럽의 지배계급들을 설득해 전쟁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다소 순진한 믿음은 널리 퍼져 있었다. 무엇보다 전쟁은 인명과 재산을 너무도 크게 파괴하므로 체제의 이익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 보이니 말이다.
이런 관념의 좌파적 버전은 카를 카우츠키가 발전시킨 것이다.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한 때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적 당원이었다. 카우츠키는 전쟁으로 득을 보는 것이 자본주의의 일부 부문에 국한된다고 주장했다. 자본 수출에 의존해 이윤을 획득하므로 끊임없이 확장하는 제국을 필요로 하는 금융자본, 전쟁과 전쟁 위협에 의존해서 이윤을 획득하는 무기 제조업자들이 그들이라는 것이다.
카우츠키에 따르면, 자본가 계급 내 소수 분파인 이들이 식민지에서 나오는 원자재와 노동력을 지킬 유일한 수단은 전쟁과 제국 건설뿐이라며 나머지 다수 산업 자본가들을 이럭저럭 설득해 왔다. 그러나 사실 카우츠키가 보기로는, 여러 국민국가의 자본가들이 세계를 평화적으로 분할해 착취하기로 합의하는 것도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
카우츠키는 《제국주의와 전쟁》(1914)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현재의 전쟁이 끝난 후에는 엄청난 군비 생산 경쟁을 계속할 경제적 필요성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군비 경쟁의 지속은 기껏해야 자본가 내 극소수 집단의 이익에만 복무할 뿐이다. 여러 정부들 사이의 분쟁은 자본가들의 산업을 위협한다. 혜안을 가진 자본가들은 모두 자기 동료들에게 이렇게 외칠 것이 틀림없다. 만국의 자본가들이여, 단결하라!”
카우츠키는 평화를 원했다. 하지만 그는 자본가들 사이의 평화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제국주의는 이 체제가 고를 수 있는 여러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당시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레닌과 부하린은 카우츠키의 주장에 강하게 문제제기했다. 그 둘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제국주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 중심 주장은 레닌의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근 단계》와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경제》에 담겼다. 그들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시장을 두고 군사적 경쟁까지 벌이는 것은 평화적인 [경제적] 경쟁의 불가피한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체제는 발전할수록 다음과 같은 변화를 겪는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자본 단위가 소규모인 특징이 있었는데, 서로를 집어삼키며 기업들의 덩치가 커지고 수는 적어져 독점이 나타난다.
부하린은 이런 발전 단계에 이르면 경제가 정치에 유기적으로 융합된다고 주장했다: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는 국민국가들의 생산 규모가 너무 커져서 더는 자국의 지리적 경계 내에 머무를 수 없게 돼, 그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 이 대기업들의 이해관계는 점차 국가의 이해관계에 통합되며, 국가는 국익의 이름으로 대기업들을 정치적·군사적으로 지원한다. 국가는 군대와 무기를 육성하고, 자원을 얻고 무역로와 시장을 지키는 데 필요한 나라들을 침공하고, 세력권과 동맹을 형성한다. 국가는 이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다른 강대국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
전쟁이 끝날 때마다 강대국들 사이에는 세계의 분할에 관한 합의가 이뤄진다. 하지만 이 합의는 오래가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생산을 맹목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체제인 데다 불균등하게 발전한다. 어떤 자본주의 국가들은 다른 국가들보다 더 빠르게 성장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세계를 재편하려고 한다.
제국주의를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들 사이의 경쟁 방식”으로 본 이 분석은 제1차세계대전에 딱 들어맞았다. 1920~30년대에는 새로운 수준에서 이 분석이 입증됐다. 전례가 없을 만큼 심각해진 이 시기의 경제 위기는 각국 자본들이 국가 개입 정도를 늘리고, 보호주의를 실시하고, 폐쇄적 무역 장벽을 쌓는 데로 나아가게 했다.
나치 독일이 바로 국가 주도 경제의 극단적 사례였다. 당시 독일에서는 개별 자본가들의 필요가 국가적 자본의 필요에 종속돼 있었다. 생산은 군사적 목적에 맞춰졌다. 당시에 가로막혀 있던 주변국 시장에 침투하기 위해서였다. 제1차세계대전 때도 그랬듯, 독일 자본은 제국주의 질서의 후발 주자로서 더 발전한 강대국들과 경쟁하는 데 필요한 시장을 확보하고자 도박을 감행했다.
처칠, 스탈린을 만나다
나치 독일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는 세계 재분할의 길을 닦았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기도 전인 1944년 10월, 처칠은 러시아로 가서 스탈린과 만났다. 처칠은 전후 연합군 사이의 유럽 재분할 제안을 내놓으며 종이쪽지에 다음 내용을 휘갈겨 썼다. “루마니아: 러시아가 90퍼센트, 다른 국가들이 10퍼센트. 그리스: 영국이 90퍼센트, 러시아가 10퍼센트. 유고슬라비아: 50 대 50. …” 스탈린이 이 종이에 체크 표시를 하며 합의가 이뤄졌다. 하지만 이 합의에도 불구하고 그 후 45년 동안 세계는 냉전에 휘말려 들어갔고, 강대국들이 양 진영의 하나에 속해 서로 대립하는 새 편제가 들어섰다.
러시아와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함께 연합군에 속했었지만, 이제는 서로 반대편에 섰다. 스탈린에게 [유럽 재분할 계획이 담긴] 쪽지를 전해 준 처칠이 있던 영국은 이미 국제적 위계 서열에서 원래 지위를 잃고 있었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진 미국의 원자폭탄은 일본 정권을 강하게 타격하는 것인 동시에 미국의 위세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미국의 원자폭탄 공격은 스탈린의 러시아뿐 아니라, 영국·프랑스·독일에 보내는 경고이기도 했다.
원자폭탄 폭격의 그림자는 전후 세계에 짙게 깔렸다. 전면적 핵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핵전쟁] 위협이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었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사태 때 미군은 사상 처음 ‘데프콘 2’를 발령했다. 전쟁 발생이 정말이지 경각에 놓인 순간이었다. 미국이 러시아보다 더 많은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었을지라도, 두 나라가 각각 보유한 핵무기는 서로를 지구상에서 몇 번은 지워 버리고도 남을 만큼 많았다.
1 는 의도하지 않은 미사일 발사로 전면적 핵전쟁이 일어난다는 내용이다. 〈베드포드 사건〉(1965년)은 필름에 기포가 생기는 기법을 사용해 핵잠수함이 폭발하는 것을 보여 주며 끝난다. 〈레이디 버그, 레이디 버그〉(1963년)는 우리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난 세계의 삶이 야기하는 뒤틀린 공포를 보여 준다.
이런 현실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대단했다. 당시에 나온 영화는 거의 모두 인류 절멸의 가능성이 얼마나 가깝게 느껴졌는지를 잘 보여 준다. 1965년 가 제작한 〈워 게임〉은 재래식 전쟁이 핵전쟁으로 격화된다는 내용이다. 1964년 개봉한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와 〈페일 세이프〉소외를 감지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레닌도 그렇고 그 전에 마르크스도 지적했듯이, 자본가들도 노동자들만큼이나 체제에 종속돼 있다. 개별 자본가든 국가로 대표되는 자본가 집단이든 다른 자본가들에 맞선 경쟁적 축적에 속박돼 있다. [노동자를] 착취해서 [자본을] 축적하지 않는 자본가는 다른 자본에 밀려 시장에서 퇴출될 것이다. 이 맹목적 충동이 경제 위기를 낳는다. 이 경제 위기로 어떤 자본가들은 파산하는 반면 어떤 자본가들은 득을 본다. 그러나 결국 장기적으로는 체제 전체가 정체와 사회 위기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이 끝없는 경주의 결과는 끔찍하다. 예컨대, 이런 경쟁적 축적이 기후변화 재앙을 전례 없는 속도로 악화시킨다는 것은 이제 분명한 사실이다.
자본가들 그 누구도 체제를 통제하지 못한다. 전 세계 자본가들이 뭉쳐, 카우츠키가 “초제국주의”라고 말한 것 속에서 평화적이고 합리적으로 세계를 운영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파괴적 동역학을 이해하고 자신의 태도를 변화시키려 하는 자본가들은 경쟁자들에게 밀려 도태될 것이다. 자본가들은 [경쟁적 축적이라는] 이 게임 속에 있어야 부와 권력이라는 이득을 얻는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그들의 체제에 일체감을 느끼며 그것을 문명이라 부르고, 그 체제를 지키고자 애쓴다.
그렇기에 세계적 핵전쟁은 여러 면에서 완전히 비합리적인 일이고 ‘미사일 광기’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20세기 자본주의의 발전 수준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이기도 했다. 레닌이 1917년 썼듯이, “자본가들이 세계를 분할하는 것은 그들의 개인적 사악함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현재의 [자본의] 집중 수준 탓에 이윤을 얻으려면 이 방식을 채택할 수밖에 없어 일어나는 일이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로는 무엇보다 핵전력 위협을 통해 [세계의] 분할과 재분할이 강요됐다.
전쟁에 맞선 투쟁
전쟁의 구조적 원인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떻게 반전 운동을 벌이고 어떻게 전쟁을 없앨 것인지에 대해 특수한 결론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1950~60년대 [영국에서] 핵무기 반대 대중운동이 성장했다. ‘반핵군축운동’CND이 이 운동을 이끌었다. 수십만 명이 행진, 항의 행동, 집회, 토론회에 참가했다. “핵폭탄을 금지하라”는 구호는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모두 지지할 만한 구호였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지지했다. 그러나 이 구호는 특정한 종류의 정치를 함축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핵무기를 거부하도록 광범한 사회 계층을 설득하고 정치인들에게 입법을 촉구하면 핵무기 없는 자본주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핵무기가 계급적 문제라고 주장했다. 사회주의자는 평화 운동과 반전 운동의 일부가 돼야 하고 그런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은 전쟁을 반대하지 않는 노동자들에게도 전쟁과 제국주의를 반대하자고 선동해야 한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야말로 체제 전체를 타도할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 존 맥클린이 제1차세계대전 와중에 글래스고의 클라이드사이드에서 한 일이 바로 그런 일이었다.
핵전쟁 위협은 쿠바 미사일 사태 이후부터 1980년대 초 “신 냉전” 때까지 감소했다. 물론 잘 알려져 있듯이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등 전쟁이 계속 일어났고, 중국과 러시아가 갈등을 빚거나 서유럽이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돕지 않는 등 같은 진영 내부의 긴장도 있었다. 그러나 세계의 종말이 다가온다는 느낌은 거의 사라졌다. 지배계급의 마음속에 무슨 변화가 일어나서가 아니다. 전후 경제 호황 덕분에 각 진영이 서로 크게 적대하지 않더라도 [경제적] 확장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했다. 1980년대에 재개된 군비 경쟁으로 러시아를 밀어 넣어 결국 파산시켰기 때문이다. 미국 자본주의는 자국 군대의 힘을 사용해 세계를 새로 재편하고자 했다. 미국은 러시아 제국을 패퇴시켜 러시아가 더 많은 자원(예컨대 숙련 노동력과 매우 발전된 산업이 있는 서독)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확장시켜 미국의 영향력을 더 동쪽으로 넓히고 싶어 했다. 또한 미국은 서유럽에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해 프랑스와 서독을 자기편으로 줄 세우고 싶어 했다.
하지만 러시아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시장과 자원을 방어하려면 서방에 뒤지지 않아야 했다. 심지어 새 미사일 체계를 구축하는 데 모든 자원을 쏟아붓는 바람에 자국민의 생활수준이 하락해서 국내 불안정이 커지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말이다.
냉전은 이념의 충돌이 아니었다. 세계 자본주의라는 무대에서 양대 진영이 벌인 쟁투였다. 물론 군사적 충돌은 경제적 경쟁이라는 매개를 꼭 거치지 않고도 자체의 논리에 따라 벌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경제적 토대는 항상 드러나기 마련이다. 경제적 토대가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요소이다.
냉전 이후
냉전이 끝난 뒤 새 미사일 방어 체계들이 나타났다. 예컨대 조지 W 부시의 ‘스타워즈 후속’ 계획은 지구 바깥에서 핵 공격을 할 수 있다는 구상이었다.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이 미국 정부를 운영하며 “테러와의 전쟁”에 착수했다.(네오콘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대통령 닉슨의 잘못은 핵무기 사용을 결단하지 못한 것이라고 본다.) 네오콘은 이란을 상대로 핵무기를 사용하려 한 듯한데, 전 세계에서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대중운동이 강력하게 일어나면서 저지됐다.
미국이 후원하는 중동의 정착민 국가 이스라엘은 거듭 팔레스타인을 공격했고, 우크라이나에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와 러시아가 다시 경쟁하기 시작했다. 오바마는 조지 W 부시와는 상당히 달라 보였지만 집권기 동안 수많은 전쟁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1945년 이후에 일어난 전쟁은 대체로 자본주의의 심장부가 아닌 곳에서 일어났다. 그 전쟁들에서 가장 극심하게 고통받은 사람들은 가난한 지역에 사는 수많은 보통사람들이었다. 그 이유의 하나는 자본주의의 가장 부유한 지역들(유럽·미국·동아시아)의 상호 연관성이 점점 강해진 것이었다. 대다수 자본가들은 자신이 다른 나라에 투자한 자본이 파괴되는 것을 되도록 피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제국주의 논리는 계속 작동하며 자본가들이 서로 충돌하도록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적 핵전쟁이라는 재앙이 일어나고 말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재앙을 항구적으로 막을 유일한 방법은 노동계급의 자력해방을 촉진하고자 무던히 애써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말하는 결론이다. 그리고 제1차세계대전 동안 러시아 볼셰비키가 한 실천이기도 하다. 볼셰비키는 공장의 작업대에서부터 반제국주의 운동을 건설했고 결국 제1차세계대전을 끝냈다.
자본가들의 “평화”는 모두 일시적인 것임을 레닌은 이해하고 있었다. 항구적 평화는 오로지 혁명으로만 이룰 수 있다.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