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북한 핵 문제
사반세기의 북핵 문제: 제국주의 체제의 압력이 빚어낸 괴물
1 인 ‘북극성-2’를 발사했다. 북극성-2를 발사하면서 북한은 고체 연료를 사용하고 궤도형 이동식 발사대를 사용하는 등 이전보다 진전된 미사일 역량을 선보였다.
2016년 연이은 핵실험(4차·5차)에 이어, 올 2월 북한은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불과 1980년대만 해도 북한은 핵탄두를 제조하기는커녕 소련제 단거리 미사일을 수입해 분해하며 연구하기 시작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북한은 핵실험을 5차례나 진행하고 인공위성 발사까지 하는 나라로 변모해 버렸다.
이처럼 북한은 지난 사반세기 동안 끝내 핵무기 개발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는 북한이 노동자를 억압·착취하며 군사적 경쟁에 매달린다는 점에서 남한과 다를 바 없는 체제임을 가리킨다.
북한 당국은 핵무기 개발이 안전을 위한 불가피한 조처라고 강변해 왔다. “[핵실험은] 미국을 위수로 한 적대세력들의 날로 가증되는 핵위협과 공갈로부터 나라의 자주권과 민족의 생존권을 철저히 수호하며 조선반도의 평화와 지역의 안전을 믿음직하게 담보하기 위한 자위적 조치이다.” 2
그러나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는 한반도 정세에 악영향을 끼치고, 한반도 주변의 강대국들이 동맹을 강화하고 군비를 증강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됐다. 가령 지난해 1월 북한 4차 핵실험 이후, 미국은 전략 폭격기와 항공모함까지 동원해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무력 시위를 했다. 대북 제재가 강화되면서, 2016년 박근혜 정부는 남북 교류·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을 폐쇄해 버렸다. 무엇보다, 미국과 한국은 북한 핵 ‘위협’을 빌미 삼아 사드의 한국 배치를 밀어붙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반도 불안정의 더 큰 책임은 미국 제국주의에 있다. 미국은 북한을 벼랑 끝으로 몰아 위험을 키운 당사자였다. 북한 핵 문제의 성격을 이해하려면 오늘날의 제국주의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이라는 맥락 속에서 봐야 한다.
“불량국가”와 1994년 위기
냉전이 끝날 즈음, 미국 지배자들은 미국이 앞으로도 세계 헤게모니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를 불안해 했다.
1945년 미국은 세계경제 산출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강력한 경제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냉전이 끝날 무렵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중국이 선진국들보다 세 배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또, 냉전 시절 미국과의 동맹 체제 아래에서 유럽(특히, 서독)과 일본이 미국보다 훨씬 더 빨리 성장했다.
일본·서독(독일) 등이 무섭게 성장했지만, 냉전이 지속되는 한 서방 진영 내에서 경제적 경쟁이 지정학적 충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공공의 적’ 소련에 맞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미국의 헤게모니 아래 단결해 있었기 때문이다.
3 를 여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 이제 그 공공의 적이 사라져 버렸다. 냉전 종식은 “두 초강대국이 아니라 다수의 열강들이 무대를 지배하는 훨씬 더 유동적인 제국주의 간 경쟁의 시기”이제 미국은 무슨 명분으로 해외 미군 기지들을 유지하고 군사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냉전 때 성장한 다른 제국주의 강대국들한테 자신의 헤게모니가 왜 존속돼야 하는지를 무엇으로 입증해 보일 수 있을까? 미국 지배자들은 이런 물음들에 답을 내놓아야 했다.
그래서 미국은 옛 소련을 대신할 ‘적’들을 찾았다. 이라크 같은 “불량국가”가 바로 미국이 찾아낸 새로운 ‘위협’이었다. 1991년 걸프전은 미국이 자신의 세계 패권을 다른 경쟁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재천명하는 계기가 됐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은 냉전 해체 이후에도 일본을 계속 자국의 동맹 체제 아래에 묶어 두고 잠재적 경쟁자인 중국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단이 필요했다. 사실 미국은 1990년대 중반까지 일본을 의구심에 찬 눈으로 바라봤다. 냉전 기간에 너무 커버린 동맹국 일본이 냉전 해체 후 미국을 등지지 않을지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미국한테 북한은 ‘동아시아판 이라크’ 구실을 맡을 적임자로 보였을 것이다. 1991년 걸프전이 끝난 후 당시 미국 합참의장 콜린 파월은 “순찰 중인 경찰[미국]이 다음번 임무를 수행할 곳은 어디인가?” 하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나는 이제 카스트로와 김일성에게 가 볼 생각이오.”
한편 이때 북한의 핵개발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미 1970년대부터 북한 관료들은 핵발전으로 전력난을 완화시키는 길을 모색했다. 북한이 남한 박정희 정권과 비슷한 시기에 핵발전 계획에 착수한 것은 핵발전에 다른 목적이 있음도 보여 준다. 1970년대 미·중 데탕트 등의 유동적인 동아시아 정세 속에, 언제든 핵무기 개발로 전용할 수 있는 핵발전은 남북 지배자들에게 일종의 보험으로 보였을 것이다.
1980년대 들어 북한 경제가 본격적으로 구조적 위기에 봉착하면서 북한의 전력 사정은 더 나빠졌다. 설상가상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에너지 수입이 급감하는 등 사태는 악화일로였다. 북한 지배 관료들은 갈수록 핵발전소 건설에 매달리게 됐다.
영변의 핵단지를 두고 북한 바깥에서는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본격 착수했다’는 의심이 점차 제기되기 시작했다. 1989년 프랑스 상업위성의 영변 핵시설 사진이 공개됐다. 그리고 냉전 구도가 붕괴하고 1990년 소련이 남한과 수교하면서, 북한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했다. 북한 지배자들은 자신들은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지 못했는데 소련이 남한과 수교를 맺는 것을 심각한 안보 위기 상황으로 인식했다. 1990년 9월 남한과의 수교를 추진할 것임을 알리러 소련 외무장관 셰바르드나제가 평양을 찾아가자, 북한은 그에게 분노에 찬 입장을 전달했다.
한·소 수교는 한반도의 영구 분단에 대한 국제적인 적법성을 부여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소련이 남한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것은 다른 나라들이 그렇게 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것이다.
소련이 남한을 승인하게 되면 남한은 … 북한을 집어삼키기 위해 더욱 무모한 시도를 할 것이다.
소련의 남한 승인은 1961년 체결된 북·소 안보조약의 근간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북한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독자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고 정책 수립에 있어 소련과 협의할 의무에서 벗어날 것이다.
4 (강조는 인용자)
북한과 소련의 동맹조약이 파기되면 북한은 희망하는 무기를 개발하지 않겠다는 약속에 더는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소련의 안전보장에 의지할 수 없게 된 북한의 분노와 곤란함이 모두 드러난 입장이었다. 그리고 “희망하는 무기”는 핵무기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었다. 이제 미국이 북한의 핵개발을 문제 삼았다. 1991년부터 북한 핵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란이 되기 시작했다. 미국이 보기에, 소련의 통제를 벗어난 북한의 핵개발은 위험해 보였다. 미국은 흑연감속로 등 북한의 영변 핵시설들이 모두 핵무기 개발을 위한 것이라고 의심했다. 그리고 북한 핵의 “위협”을 크게 과장해 북한을 궁지에 몰았다. 이 “위협”을 과장하는 건 미국만이 이를 다스릴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는 이점이 있었다. 핵무기 개발 의혹을 이유로 북한을 옥죄는 것은 일본 등이 핵무장 유혹에 빠지는 것을 견제하는 효과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북한이 핵발전소를 건설하면서 핵무기 개발로 바로 내달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북한 관료들은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에 합류하려고 애썼다. 냉전 구도가 무너지고 의지할 곳이 없어진 북한은 서방과의 관계 개선이 절실했다. 일본과의 수교 노력도 기울였다. 남북 대화도 진전돼,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이 채택됐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원한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미국에 보냈다. 만약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착수한다면, 그것은 “모든 것이 실패했을 때 평양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였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이 내민 손을 뿌리쳤다. 오히려 북한과 일본의 수교를 가로막았다.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의혹을 제기하고 북한에 핵 사찰을 받으라고 집요하게 요구하자, 한반도 정세는 얼어붙기 시작했다. 미국은 북한에 국제원자력기구IAEA 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하라고 압박했다.
처음에는 완강히 저항했지만, 북한은 미국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다. 1992년 1월 북한은 IAEA 안전조치협정에 서명했다. 그러자 그해 미국과 한국은 팀스피리트 훈련(키리졸브의 전신)을 취소했다. 그 후에 북한은 IAEA의 임시 사찰도 수용했고, 플루토늄 90그램과 핵시설 16곳을 IAEA에 신고했다.
7 결국 IAEA는 북한이 다량의 무기급 플루토늄과 핵시설을 신고하지 않고 은폐했다는 의혹이 있다며, 신고하지 않은 시설 2곳을 특별 사찰하겠다고 북한에 요구했다. IAEA 역사에서 전례가 없던 특별 사찰 요구였다.
그러나 북한의 IAEA 사찰 수용도 미국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없었다. 1992년 5월 IAEA는 영변 핵시설을 사찰했고, 사찰 결과 보고에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이 IAEA에 제출된 북한의 최초 보고서와 IAEA의 사찰 결과 사이에 “심각한 불일치”가 있다고 주장해 사태는 다시 악화됐다.북한은 IAEA가 특별 사찰을 요구한 시설들이 군사시설이라며 특별 사찰 요구를 거부했다. 북한은 1991년 걸프전 당시 유엔 무기사찰단이 미국의 이라크 공습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한 바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국은 이라크의 폭격 목표를 정할 때 사찰단원들이 넘겨 준 정보를 이용했었다.
북한이 사찰을 거부하자, 1993년 미국은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 약속을 파기했다. 그러자 3월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북·미 회담이 열려 그해 6월 미국의 북한 안전 보장과 북한의 NPT 탈퇴 유보에 합의하는 공동성명이 나오기도 했지만, 미국이 새로운 의혹과 요구를 제기하면서 합의는 곧 휴지 조각이 됐다.
협상이 안 되자, 1994년 6월 미국은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 제재를 논의하겠다고 나섰다. 북한은 다시 IAEA와 NPT 탈퇴 카드를 꺼냈다. 미국의 강경한 대북 압박으로 위기가 고조됐다. 이즈음 미국은 북한의 영변 핵시설을 폭격할 계획을 검토하고 있었다. 영변 핵단지를 타깃으로 해서 “외과수술적 공격”을 감행하는 안을 구체적으로 검토한 것이다. 국방장관 윌리엄 페리와 국방부 차관보 애쉬턴 카터 등이 군사적 공격을 검토해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에게 공격의 장단점을 보고했다.
9 백악관은 한반도에 병력과 무기를 증강하기로 결정했다. 병력은 2만 3천 명을 증원하고, 항공기 30~40대와 항공모함도 배치하기로 했다. 10 그러나 영변 폭격으로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일어나면, 미국의 동맹국인 남한은 물론이고 미군도 커다란 인명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국방장관 페리는 “금지선을 넘은 북한의 핵 활동을 즉각 저지하려면 영변 핵시설을 공격해야 한다”며 “3단계 작전계획”을 상정했다.끔찍한 재앙 일보직전까지 갔던 이 위기는 가까스로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로 봉합됐다. 북한이 미국의 핵심 요구를 받아들였다. 북한이 흑연감속로를 포기하는 대신, 미국은 핵무기로 전용이 어려운 경수로를 북한에 건설해 주기로 약속했다. 명백히 북한에 불리한 협정이었다. 고故 리영희 교수도 1994년 위기가 “북한의 군사적·정치적 후퇴로 끝났다”고 평가했다. 11
친민주당 성향의 이데올로그들은 1994년 6월 전前 미국 대통령 카터가 방북해 북·미 고위급회담을 재개한다는 김일성의 동의를 이끌어 낸 것이 제네바 합의라는 결정적 변화를 가져 온 계기였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당시 카터의 방북으로 국면이 완전히 전환된 것이 아니었다. 클린턴의 백악관은 카터의 방북 성과를 회의적 시각으로 바라봤다. 훗날 카터는 “백악관은, 내가 하던 일이 잘못되길 원했다”고 술회했다.그럼에도 긴 협상 끝에 제네바 합의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한 점과 더불어, 그해 7월 김일성의 죽음이 있었다. 미국은 김일성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북한이 격변에 휘말릴까 봐 걱정했다. 그럴 경우, 그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예측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대북 전쟁 위협과 제네바 합의에 이르는 과정에서 미국은 냉전 종식 후에도 동아시아에서 손 뗄 생각이 전혀 없음을 보여 줬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안정은 미국에 달려 있음을 기억하라고 동아시아의 다른 강대국들(중국, 러시아, 일본)에게 천명한 셈이었다. 미국은 패권을 지키려고 전쟁 위기도 불사하는 그런 행위를 “전쟁 억지력”, “지역적 균형자”라고 불렀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북핵 위기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기는커녕 상황을 악화하는 데 일조했다. 김영삼은 미국의 동맹국 중에 북한에 가장 적대적이었고, 심지어 미국의 대북 협상을 방해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미국 정부조차 “한반도의 골칫거리는 북한이 아니라 남한”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결국 김영삼 정부는 합의 과정에서 대화에 끼지도 못했다.
제네바 합의 이후, 북한은 합의 이행에 협조적이었다. 미국 국무부조차 “전체적으로 북한의 협력은 양호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이었다. 미국이 북한에 요구하는 목록은 끝이 없었다. 북한 미사일 개발과 그 수출 문제, 인권 문제, 비자금 조성 문제, 심지어 재래식 무기 감축 문제 등. 이는 북한을 완전히 발가벗길 때까지 지속될 것이었다.
그러면서 정작 미국은 자신들의 약속 이행은 계속 지연시켰다. 1996년에는 제네바 합의와 전혀 무관한 북한의 미사일 수출 문제를 꺼내 들어, 경제 제재를 풀 수 없다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
금창리의 “빈 터널”
1998년 미국은 북한을 또다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당시 동아시아는 경제 위기에 빠져 있었고, 이와 함께 인도네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독재자 수하르토가 축출되는 등 정치적 불안정성도 커지고 있었다. 게다가 1998년 5월 인도가 핵실험을 감행했는데, 이는 중국의 핵전력 증강이나 일본의 핵무장 시도를 자극할 만한 일이었다. 미국으로선 동아시아에 대한 자신의 통제력이 약해질까 봐 우려할 만한 상황이었다.
이때 미국 클린턴 정부는 다시 북한 핵무기 개발 의혹 카드를 꺼내 들었다. 미국의 패권을 재천명할 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98년 8월 미국은 별 근거도 없이 북한 금창리에 지하 핵시설이 존재한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북한에 사찰 압력을 가했다.
8월 31일 북한이 로켓을 발사해, 위기가 더욱더 고조됐다. 로켓은 1천5백 킬로미터를 날아가 일본 열도를 넘어서 떨어졌다. 당황한 일본 지배자들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미국이 대북 압박을 강화하는 가운데, 1999년 미국이 코소보 문제로 유고에 군사 개입까지 하자, 북한은 유고 다음 차례는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 긴장하게 됐다. 결국 높아진 긴장 속에 1999년 6월 서해에서 남북 경비정 간에 교전이 벌어져(제1연평해전), 많은 북한 병사들이 희생됐다.
당시 김대중 정부(1998~2003년)는 전임 김영삼 정부와는 다른 방향의 대북 정책인 햇볕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다. 평화공존과 화해·협력을 표방하며 한반도를 평화 상태로 만들고 북한의 (시장경제로의) 점진적 변화를 도모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김대중 정부는 경제를 정치에서 분리한다는 ‘정경분리’ 원칙 하에 경제 협력(정주영의 소 떼 방북, 금강산 관광 등)부터 진전시키면서 남북 대화를 추진했다. IMF 위기 이후 경제 회복이 절실했던 김대중은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돼 경제 회복에 차질을 빚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금창리 위기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를 드러냈다. 햇볕정책에는 한미동맹을 계속 중시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김대중은 한반도에 긴장을 높일 미국의 제국주의적 동아시아 정책에 근본적으로 반대하지 않고 타협했다. 한·미·일 3국의 공조로 북한을 압박한다는 미국의 구상에 협력했던 것이다. 그래서 11월 김대중은 클린턴과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주장에 동조해 북한에 의혹 규명을 위한 금창리 현장 접근을 허용하라고 요구했다.
14 그러나 1999년의 교전은 이후 서해를 피와 죽음의 바다로 만드는 일련의 남북 군사충돌의 시작이었다. 정경분리 하에 소 떼를 보내고 경제협력을 활성화했지만, 그게 남북 간 군사충돌 방지와 한반도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동쪽에서는 여행객들이 금강산을 관광하는데, 서쪽에서는 남북이 서로 총질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오히려 금창리 위기나 미사일 위기 같은 지정학적 긴장이 경제협력과 남북 협력 사업의 전진을 방해했다.
이때 김대중 정부는 자신들이 얼마든지 군사력 행사를 포함한 대북 강경책을 휘두를 수 있음을 보여 줬는데, 서해교전에서의 대응도 그 대표적 사례였다. 1999년 6월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 남북 간 교전이 벌어지는 데는, 김대중 정부가 세운 “북한의 도발 불용”이라는 원칙이 영향을 줬다. 그리고 남북 경비정들이 해상에서 대치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청와대는 “북측 함정들을 북방한계선 이북으로 밀어내기 위해 진해 해군기지로부터 대형 함정들을 증강 투입하겠다”는 국방부의 작전 구상을 승인했다. 임동원은 1차 연평해전 승리가 햇볕정책이 ‘강자의 정책’임을 국내외에 과시하는 기회가 됐다고 자평했다. 우여곡절 끝에 1999년 북한이 금창리 시설 사찰을 수용하자, 미국 대표단이 금창리 시설을 방문했다. 그러나 미국 대표단은 금창리에서 “빈 터널과 동굴을 발견한 것 말고는 어떠한 설비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후 미국은 또 다른 핵시설 예상 지역을 지목했지만, 그곳도 핵개발과는 전혀 무관한 곳으로 밝혀졌다. 당시 전직 미국 국무부 관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우리가 북한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것은 엄청나게 왜곡된 정보뿐이다.” 그러나 이때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문제 삼은 것은 미국에 한 가지 분명한 이익을 가져다 줬다. 미국이 금창리 핵시설 의혹을 제기하고, 미사일 문제를 제기한 것은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을 추진하는 데 도움이 됐다. 금창리 의혹이 제기된 후 북한이 로켓까지 발사하자, 한 공화당 의원은 백악관 관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됐으니 이제 국가미사일방어체제NMD는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는 럼스펠드 보고서가 주목을 받는 계기가 됐다. 럼스펠드가 위원장을 맡은 미국 의회의 ‘미국에 대한 탄도미사일 위협 평가 위원회’는 북한의 로켓 발사 한 달여 전에 ‘럼스펠드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 보고서는 “북한을 비롯한 불량국가들이 5년 이내에 미국 본토까지 다다를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에 성공할 것”이란 추정을 담고 있었다.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는 미국 의회가 럼스펠드 보고서를 정당화하고 MD 구축을 촉구하는 데 도움이 됐다.무엇보다 미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소동을 이용해 1999년 일본을 전역미사일방어체제TMD에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일본이 TMD를 공동 개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는 수년 동안 미국이 일본에 촉구해 온 일이었다. 그리고 냉전 해체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삐거덕거렸던 미·일 동맹이 다시 안정됐음을 의미했다. 이제 미국은 동아시아 패권 유지 문제에서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금창리 위기가 봉합되고 일본이 TMD에 참여하기로 결정하면서, 긴장은 점차 완화됐다. 그리고 이런 유화적 분위기 속에서 2000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북·미 관계도 진전됐다. 같은 해 북한 총정치국장 조명록이 워싱턴을, 미국 국무장관 올브라이트가 평양을 방문했고, 양국은 북·미 공동 코뮤니케에 합의했다.
햇볕정책론자들은 이 국면에서 대통령 빌 클린턴이 방북하는 등 북·미 관계가 정상화됐다면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할 적기였는데 때를 놓쳤다고 아쉬워한다. 그해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이 패배하고, 공화당 후보 조지 W 부시가 새 대통령이 되면서 그 기회를 잃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미 갈등이 그리 쉽게 해결될 일이었다면, 왜 그 이전의 많은 대화와 합의들이 매번 얼마 안 가 무용지물이 됐겠는가.
당시 클린턴 정부에게 북한 문제는 중동 문제에 견줘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 있었다. 이후에도 미국 지배자들에게 북한 문제는 우선순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언제나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요 강대국들에 대한 대외 정책에 종속된 문제였다.
유화 국면은 근본적으로 불안정하고 일시적인 것이었다. 이 지역의 불안정은 미국과 한국의 어느 당이 집권하느냐로 풀릴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열강들의 세력 균형은 고정불변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변하기 마련이다. 이에 대응해 미국이 자신의 패권을 재천명하려 애쓸수록 한반도의 일시적인 유화 국면은 언제든 새로운 긴장 국면으로 뒤집어질 수 있었다. 당장 MD로 미·일 동맹을 다지고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패권을 재확인하는 미국의 노력은 장차 중국·러시아와의 새로운 갈등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악의 축” 선언에서 2006년 핵실험까지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조지 W 부시가 승리하면서, 부시의 선거 운동을 지원한 신보수주의자들(네오콘)은 자신들의 대외정책 구상을 실행할 기회를 잡게 됐다. 신보수주의자들의 전략은 미국 자본주의가 직면한 장기적인 경제적·지정학적 위협에 대한 이해에 기초해 있었고, 그들은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이용해 세계의 경제적·정치적 권력 분포를 자국에 유리하게 변화시키려고 했다. 즉, 다른 경쟁 제국주의 국가들이 갖지 못한 우월한 군사력을 이용하면 시장 경쟁에서 잃고 있는 것을 만회하고도 남으리라 기대한 것이다.
2001년 9·11 사건을 계기로, 부시 정부는 군비 지출을 대폭 증액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감행했다. 그리고 2003년 부시 정부는 이라크 전쟁을 벌였고 이를 통해 중동 질서를 재편하는 데 군사적 역량을 쏟아부었다. 중동 재편에 성공한다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석유)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면서 부시 정부는 중국·러시아 등을 겨냥해 MD 프로그램도 급속도로 추진했다. 부시 정부는 전임 클린턴 정부가 MD 정책을 과감하게 밀어붙이지 못했다고 여겨 불만이 컸다. 그래서 부시는 러시아와 중국의 반발을 무릅쓰고 미국과 러시아 양국의 탄도미사일 요격 시스템 개발을 제한하는 탄도미사일방어ABM 조약에서 탈퇴했다. 이때 부시 정부는 북한·이란 같은 국가들의 ‘위협’을 MD 추진의 명분으로 삼았다.
동아시아에서 미국 지배자들은 중국의 경제 성장을 우려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중국의 경제 성장이 군사력 증강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지위가 흔들릴까 봐 걱정했다. 그래서 중국의 도전을 방지하고자 부시 정부는 동맹을 강화하고 전략적 유연성 도입 등 미군의 전략도 개편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중국을 공공연하게 적으로 규정해 견제할지를 놓고 미국 지배자들의 견해가 통일돼 있지 않았다. 미국 다국적기업들이 중국 정부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고, 더욱이 중국 정부가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적극 지지한 상황에서, 미국 정부가 중국을 상대로 무기를 증강하고 동맹을 다진다고 대놓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 이 점에서 북한은 부시 정부에게 매우 유용한 존재였다. 중국보다는 동아시아의 최빈국의 ‘위협’을 들먹이는 게 훨씬 더 쉬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은 한반도에 긴장을 높였다. 미국은 ‘북한 위협’을 해소하지 않고 이를 미군이 동아시아에 남아 있어야 할 명분과 동맹 관계를 강화하는 데 이용했다. 2001년 부시 정부는 모든 대북 협상을 중단시켰다. 부시는 1994년 제네바 합의를 모두 부정하고 싶어 했다. 2001년 12월 ‘핵태세검토보고서’에 북한을 핵무기 선제공격 대상으로 올려놨다. 마침내 2002년 1월 대통령 부시는 연두교서에서 이라크·이란·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정하고 “선제공격으로 정권을 교체시켜야 할 대상”이라고 선언했다. 물론 부시의 눈은 이라크와 중동 전쟁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 연설은 북한을 크게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긴장이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 그해 여름 또다시 서해교전(2차 연평해전)이 벌어져,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2002년 10월 부시는 새로운 대북 압박 카드로 ‘고농축 우라늄 계획HEU’ 의혹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명확한 근거도 공개하지 않은 채, 북한이 비밀리에 고농축 우라늄 계획으로 핵무기 개발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북한에 간 대북 특사 제임스 켈리는 북한 측에 “고농축 우라늄 계획을 폐기하라”고 “통보”했다.
20 이제 제네바 합의는 완전히 휴지조각이 됐고, 이로써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됐다.
북한은 대화를 하러 온 줄 알았던 제임스 켈리 측의 도발에 크게 반발했다. 북한 외무성 제1부상 강석주는 제임스 켈리에게 이렇게 항변했다. “미국이 핵무기로 우리를 ‘선제공격’하겠다고 위협하는 마당에 우리도 국가안보를 위한 억제력으로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 강력한 것도 가질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러나 부시 정부는 강석주의 발언을 고농축 우라늄 계획의 존재를 시인한 것이라고 단정해 버렸다.부시의 새로운 의혹 제기는 두 가지 성과를 거뒀다. 우선, 이라크 침략에 대한 의회 동의를 앞두고 ‘대량살상 무기 색출 필요성’을 환기시켰다. 그리고 그해 9월 평양에서 북·일 정상회담이 열리는 등 북한에 접근하던 일본에 미국은 대북 접근 금지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미국은 대북 압박을 다시 강화하려는 상황에서 일본이 북한에 접근하는 것을 경계했는데, 새로운 북핵 위기는 북·일 관계 개선 분위기에 찬물을 제대로 끼얹었다. 당연히 남한에도 일본과 같은 경고가 전달됐다.
부시의 대북 압박 강화에 반발한 북한은 2003년 1월 NPT를 다시 탈퇴했다. 그리고 제네바 합의에 따라 동결하고 있던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압박과 위협에 대응해 북한이 본격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나서게 된 것이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해 점령했다. 북한이 보기에 이라크 전쟁의 교훈은 명백했다. 2003년 6월 북한 관리들은 북한을 방문한 미국 의회 대표단한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핵무기를 제조하는 것은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신세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얼마 안 가 대화가 재개됐다. 이라크 전쟁에 집중하기 위해 부시 정부는 북핵 문제가 더 악화하지 않게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부시 정부는 클린턴 정부 때의 북·미 양자 회담 형태는 극구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2003년 8월 남한, 북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6개국이 참석한 6자회담이 열리게 됐다.
6자회담을 여는 데 동의한 부시 정부의 의도는 협상을 통한 북핵 문제 해결이 아니었다. 부시 정부는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CVID를 고집해 협상을 어렵게 했다. 엄포를 놓았다가 북한의 반발이 있으면 양보를 할 듯한 태세를 보이고 협상장에 나와 시간을 끄는 게 부시 정부의 패턴이었다.
21 5대 1 구도는 미국이 북핵 문제의 책임을 분산시키는 데 유용해 보였다.
미국이 6자회담 같은 다자 회담 형식을 원한 데는 다른 의도도 있었다. “미국은 이번 사태를 북한과 미국 간 대립이 아닌 북한과 ‘평화를 애호하는 국제사회’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끌고 가고 싶어 했다. 그래서 2003년 초에 접어들자 미국 쪽에서 ‘북한이 핵을 개발하는 게 왜 미국만의 문제인가? 중국도 이 문제를 풀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 따라서 부시 정부가 6자회담을 통해서 노린 것은 서로 주고받는 협상을 통한 북핵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5(미·중·한·일·러) 대 1(북한)’ 구도를 만들어 북한을 압박하는 것이었다.”이라크 전쟁에 집중하느라 북한에 전면적 공세를 펼칠 수도, 그렇다고 북한의 요구를 수용할 수도 없는 미국으로선 다자 회담의 복잡한 논의 과정과 합의의 어려움을 이용해 시간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구도와 의도가 반영된 회담이 처음부터 잘 굴러갈 리가 없었다. 그리고 부시 정부의 시간 끌기를 타개하고자 북한은 점차 강도 높은 대응을 하게 됐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 정책을 계승한 노무현 정부(2003~08년)는 대화를 통한 북핵 문제 해결을 강조했다. 그리고 2005년 “동북아균형자론”을 내놓는 등 균형 외교를 표방하며 기존의 친미 일변도 외교 노선에서 변화를 추구했고, 때때로 부시 정부의 대북 정책에 공개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노무현이 말한 “평등하고 수평적인 한미관계”와 “동북아균형자”는 “미·일 등 전통적 우방과의 협력 강화”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지, 그 자체의 변화를 뜻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노무현은 전략적 유연성 합의, 평택미군기지 확장 등 한미동맹 강화에 협력했다. 물론 “평등”, “수평”, “균형” 같은 표현을 노무현 정부가 꺼낸 것만으로도 미국 지배자들이 청와대 안에 있는 “탈레반”들이 문제라고 힐난할 정도로 가 불편했지만 말이다.
노무현의 “친미적 자주”는 미국의 대북 압박 앞에서 대화와 제재 병행이라는 모순에 빠지며 일찌감치 한계를 드러냈다. 노무현 정부는 미국에 협조함으로써 북핵 문제 해결에 대한 발언력을 높이고 미국의 유연성을 이끌어 내겠다는 기본 구상을 세워 갔다. 그러다 보니 노무현 정부는 남북 관계 개선도 북핵 문제 해결 뒤로 미뤄 버렸다.
22 그래서 이종석은 2004년 노무현 정부의 자이툰 부대 파병이 “‘평화를 증진하는 파병’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고 강변한다. 23
노무현은 이런 논리로 이라크에 파병해 부시의 이라크 전쟁을 지원했다. 2003년 부시 정부가 이라크에 전투부대를 파병해 달라고 노무현 정부한테 요구하자, 노무현의 외교안보 참모인 이종석을 중심으로 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는 “이라크에 파병하는 대가로 북한 핵문제에 대한 미국의 협조를 받아낼 수 있다고 봤[다.] … 이것이 북핵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한국의 이라크 파병이 도움이 된다는 시각, 즉 ‘평화 교환론’이다.”24 노무현이 파병을 결정하자 부시는 이에 화답하듯 ‘북핵 문제 해결에 노력하겠다’고 말했지만, 그 말은 어디까지나 ‘립 서비스’ 수준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구상은 한번도 작동한 적이 없었다. 2003년 미국 국무장관 콜린 파월은 노무현 정부가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이라크 파병을 연계할 수 있음”을 듣자마자, 그 구상을 단칼에 거절했다. 미국은 노무현이 이라크 파병 여부를 북핵 문제 해결과 연결하는 것 자체에 불편한 심경을 숨기지 않았다.이라크인들을 희생시켜 한반도의 평화를 얻는다는 구상은 처음부터 매우 역겨운 구상이자 어불성설이었다. 미국이 이라크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다면, 부시는 얼마든지 그 여세를 몰아 북한에 대한 공세를 강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셋째로 많은 군대를 파병해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돕기로 한 노무현의 결정은 궁극적으로 한반도 평화에 역행하는 짓이었다. 결국, 노무현 정부의 ‘평화교환론’은 2006년 북한 핵실험을 통해 완전한 파산으로 드러났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 전념하는 사이에, 북한은 핵 기술 강화에 주력했다. 2005년 북한은 핵무기 보유 선언까지 하게 됐다. 이 때문에 열린 4차 6자회담에서는 9·19 공동성명이 발표돼 다시금 대화 국면으로 이행하는 것 같았다. 일각에서는 9·19 합의가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실현할 수 있는 중요한 성과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9·19 합의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미국은 새로운 의혹을 제기하고 대북 금융 제재를 단행해 합의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의 북한 계좌의 거래를 동결시켜 버린 것인데, 북한은 이에 크게 반발했다. 단지 BDA의 북한 자금 2천5백만 달러가 동결돼서가 아니라, 이런 조처가 북한의 국제 금융 거래 전반을 옥죄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었다. 북한의 6자회담 대표인 김계관은 이렇게 말했다. “금융은 피와 같다. 이것이 멈추면 심장이 멈춘다.”
결국 북한은 2006년 탄도미사일을 발사했고, 10월 1차 핵실험까지 강행했다. 북한은 미국이 이라크에 발목이 잡혀 있는 상황을 이용해 강도 높은 반작용을 한 것이다. 북한의 1차 핵실험은 부시 정부의 대북 정책이 총체적으로 실패했음을 보여 줬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실험을 할 때마다 미국은 유엔 제재를 강화해 왔다. 노무현 정부는 이에 협력했고, 유엔 제재 수준을 뛰어넘어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을 이유로 대북 인도적 지원을 중단하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도 대북 상호주의 문제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이라크 전쟁의 깊은 수렁에 빠져 들고 있었다. 이라크 수렁에 헤어나지 못하는 부시 정부는 핵실험을 감행한 북한을 상대로 호통을 치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미국의 힘이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고, 이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통제력이 약화했음을 의미했다. 이라크 전쟁에 협력해야 한반도 평화에 도움이 된다는 노무현 정부의 생각과 달리, 북한 핵무기가 미국의 후퇴를 강제하는 수단이라는 진보 일각의 생각과 달리, 미국이 이라크에서 실패한 게 한반도 긴장을 더 높이지 않고 미국을 대화에 나서게 강제한 셈이었다.
그 뒤 부시 정부는 2007년 2·13 합의, 10·3 합의를 거쳐 상황을 봉합할 수밖에 없었다. 부시 정부는 결국 돌고 돌아 그토록 부정해 온 제네바 합의와 유사한 합의 틀에 동의해야 했다. 애초에 문제 삼았던 고농축 우라늄 문제는 합의에 포함되지도 못했다. 그만큼 미국은 한반도에 힘을 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오바마의 “아시아 재균형”과 전략적 인내
2008년 민주당 후보 오바마가 미국 대선에서 승리하자, 한반도 평화와 남북 화해를 바라는 사람들은 미국의 새 정부에 기대를 걸었다. 이런 기대에 부응하는 듯, 오바마는 취임사에서 불량국가들을 향해 “당신이 주먹을 펴면 우리도 손을 내밀 것이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오바마는 이라크 전쟁의 실패라는 “대재앙”과 경제 위기 속에 미국 패권을 지켜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패권을 강화하려는 부시 정부의 도박이었는데, 결국 이 도박의 실패는 미국을 깊은 수렁에 빠뜨렸다. 미국의 패권은 타격을 입었고, 그새 다른 국가와 자본들은 미국의 약점을 이용해 자신의 지위를 강화할 수 있었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중국은 영향력 확대의 기회를 잡았다. 2008년 경제 위기는 미국의 패권을 더욱 약화시켰다. 미국은 경제 위기의 진원지인 반면, 중국은 경제 위기에서 빨리 탈출하면서 다른 나라 경제도 함께 회복시켰다. 세계경제에서 중국 경제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고, 그만큼 미국과의 격차는 줄어들었다.
중국의 성장이 매우 도드라지는 상황을 맞자, 미국 지배자들은 자국의 패권 유지를 위해 중국의 경제적·정치적 부상에 적극 대처하려 했다. 특히 오바마 정부는 미국이 계속 중동 전쟁의 수렁에 빠져 있어서는 경쟁자로 떠오른 중국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고, 세계 패권을 유지하는 것도 어렵다고 여겼다.
그래서 중동에 과잉 투여돼 있던 역량을 조정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부상에 대응하려 했다. 오바마 정부는 중국의 부상에 경계심을 품게 된 중국의 주변 국가들에 접근하고, 일본을 계속 미국의 지정학적 영향력 하에 묶어 두며, 동아시아 역내 국가들이 중국 주도의 동아시아 공동체에 끌리지 않도록 이간질하고 견제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미국은 패배의 상처를 안고 유럽과 중동 문제까지 신경 쓰면서 어쩔 수 없이 아시아로 중심축을 이동해야 했지만, 미국의 새 정책은 동아시아에서 불안정 수준을 높이기에 충분했다.
오바마는 전임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북한 ‘위협’을 자신의 동아시아 정책에 이용했다. 이미 6자회담은 핵시설 신고 검증 문제가 합의가 안 된 후 더는 열리지 않고 있었다. 오바마는 자신의 대북 정책을 “전략적 인내”라고 불렀는데, 이는 황당하게도 ‘문제 해결을 위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를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번드레하게 포장한 셈이었다. 오바마 정부한테 북핵 문제는 우선 순위가 아니었다. 오바마가 보기에도 미국의 통제를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기존 동맹을 강화하고 중국을 겨냥한 군사 행동을 정당화하는 데 북한 ‘위협’을 이용하는 게 더 효과적이었다. 2011년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미국 국무부 문건에도 “최근 북한의 도발은 미·일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며 “이를 통해 동맹의 기반을 강화하고 지역 안정성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즉, 오바마도 북한 핵 문제를 ‘활용’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오바마의 외면과 대북 압박에 자극을 받은 북한은 자신들이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 주고 핵과 미사일을 지렛대 삼아 미국을 다시 협상 테이블로 불러들이고 싶었다. 2009년 오바마 정부가 북한이 인공위성을 발사했단 이유로 경제 제재를 강화하자, 북한은 영변에 우라늄 농축 시설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1년 핵 전문가 지그프리드 헤커한테 이 시설을 보여 줬다. “부시의 핵폭탄”에 이어 “오바마의 우라늄 농축 시설”이었다.
이런 상황이 2009~10년 서해 NLL에서 또다시 연이은 군사적 충돌과 사건들이 벌어지는 배경이 됐다. 2009년 11월 대청도 앞 수역에서 남북 간 교전이 벌어졌다(대청해전). 그리고 2010년 3월 천안함이 침몰했고, 그해 11월 연평도 상호 포격 사태까지 있었다.
남북이 서해상에서 이렇게 연달아 충돌한 데는 이명박의 대북 강경 노선도 한몫했다. 그는 철저한 상호주의를 표방하며 정경분리 원칙을 폐기하고 인도적 지원이나 남북 교류의 전제 조건으로 ‘선先 북핵 폐기’를 내세웠다.
27 (미국이 벼르던 핵항모의 서해 진출은 결국 연평도 포격 사태 직후에 실현됐다.)
일각에서는 서해상의 위기를 계기로 이명박 정부가 새 대북 정책을 모색하던 오바마 정부를 대북 강경 노선으로 끌고 들어갔다고 본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는 이명박에 이용된 게 아니라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 사태를 적극적으로 자국의 전략적 이익을 관철시킬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2010년 여름 오바마는 서해로 핵항공모함을 투입하려 했다. 누가 봐도 중국을 겨냥한 것이었는데, 중국의 근해인 서해까지 핵항모가 진출한다는 소식에 중국이 크게 반발했다. 어느 새 서해는 미국과 중국이 힘겨루기를 하는 바다로 변모해 버린 것이다.그리고 미국은 천안함 사건을 이용해 주일미군의 후텐마 기지를 오키나와 현 밖으로 이전하려던 당시 일본 하토야마 정부의 시도도 좌절시킬 수 있었다.
오바마는 북한 ‘위협’을 부풀려 동아시아 지역 MD를 구축하고 한·미·일 삼각 동맹을 강화하는 데도 이용했다. 예컨대, 2013년 북한이 3차 핵실험을 하자 미국은 이를 명분 삼아 사드를 괌에 전진 배치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16년 북한의 4차 핵실험과 로켓 발사를 계기로 사드 배치 합의 등 한국의 MD 참여에 급진전을 이뤘다. 한동안 중국과의 경제적 관계를 의식하던 박근혜도 한미동맹 강화에 확실히 무게중심을 두면서 사태 악화에 일조했다.
이 때문에 한반도는 반복적으로 긴장이 높아져 왔다. 오바마는 북한의 여러 진지한 대화 제안들을 묵살하기 일쑤였다. 결국 오바마 임기 8년 동안 북한은 네 차례나 핵실험을 감행하기에 이르렀고, 핵과 미사일 능력을 계속 강화해 왔다. 그리고 최근 사드 배치 소동에서 드러나듯이, 한반도를 둘러싼 제국주의 간 갈등이 더 악화했다.
북한의 핵개발은 불가피했는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대북 압박과 제재에 일관되고 단호하게 반대한다.
그럼에도 한 가지 물음은 던져야 한다. 과연 북한에게 핵무기 개발 외에 다른 선택은 없었는가?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자위적 조처로서 불가피한 것이었을까?
북한 국가가 노동자 국가이거나 적어도 북한 정권이 북한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는 모종의 좌파적 정권이었다면, 그 국가와 지도자들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맞선 국제 노동계급과 민중의 저항을 고무하고 그들의 연대를 호소하려고 노력하는 게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제국주의에 맞서 싸울 가장 확실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미국의 제국주의적 압박에 직면한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권이 바로 전 세계 반자본주의 운동과 반전 운동의 지지와 연대를 호소한 바 있다.
그러나 북한은 이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북한 지배 관료들은 국내에서 노동계급을 무진장 착취하고 억압하고 있고 이 때문에 북한 안팎에서 악명과 혐오감만 높여 왔다. 그러므로 대외적으로 노동계급의 아래로부터의 저항과 연대를 호소할 만한 권위가 김정은을 비롯한 북한 지배 관료들에게는 조금치도 없다. 설사 대외적으로 연대를 호소할 수 있더라도, 이는 자칫 국내에서 노동계급의 저항을 부추길 위험도 있었다.
따라서 북한 지배자들은 제국주의의 압박에 맞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선택할 수가 없었다. 대신에, 비효과적인 방식(핵무기 개발)을 선택한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북한 국가의 성격이 무엇인지 명확히 보여 주는 증거인 까닭이다.
북한은 핵무기 개발로 제국주의의 압력에 저항할 자위적 수단을 갖추려 한다. 적어도 미국의 동맹국인 남한·일본, 또는 괌(미군의 서태평양 거점)을 핵미사일로 타격할 수 있음을 미국에 보여 주려는 것이다. 그리고 언뜻 보기에 모순돼 보이지만, 핵무기 개발을 대미 협상의 지렛대로도 삼고자 한다.
그러나 북한은 핵무기 개발로 이런 목표를 성취할 수 없으며,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 저항을 건설하는 것도 방해하고 있다. 가령 2015년 12월 박근혜의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높아지는 와중에 북한은 2016년 1월 4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2017년 2월 북한은 하필 수도 서울에 75만 명이 모인 정권 퇴진 촛불 시위 직후에 북극성-2를 발사했다. 북한 지배 관료들은 자국의 외교적 이익 극대화만을 보지 아래로부터의 운동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일은 남한의 노동자 운동을 분열시키거나 혼란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지난 사반세기의 경험을 보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한반도의 평화를 담보하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았다. 세계경제의 불균등성 때문에 북한 같은 중간 규모 국가가 미국 같은 초강대국에 맞서 자체의 군사력을 증대해 자위한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 따르는 일이다. 애당초 요르단 규모의 경제력을 가진 북한이 미국을 상대할 만한 핵무기와 미사일 프로그램을 가동·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이를 부분적으로라도 구현하려면 국내 가용 자원의 막대한 부분을 군사 부문에 쏟아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부 모순도 커지고 그만큼 북한 노동계급은 착취와 빈곤 증대 등 엄청난 희생을 강요받는다.
후퇴를 강제하지도 못하고 한반도 평화 체제 실현을 위한 수단도 되지 못한다. 그 반대로, 위험만 키운다. 북한의 미사일이 아니었다면 1999년 미국이 일본을 MD에 끌어들이는 건 더 어려웠을 것이다. 북한의 4차, 5차 핵실험은 미국이 중국을 겨냥한 한·미·일 MD에 한국을 끌어들이는 데 유용한 기회였다. 그리고 한일 ‘위안부’ 합의도, 한일군사협정 체결도 모두 북한의 핵무기 ‘위협’이 명분이었다.
북한이 핵무기를 수십 기 보유했다 한들 이 상황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진보 일각에서 주장하듯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미국 제국주의의김정은은 ‘핵무력·경제 병진노선’을 선언하며 핵무력의 증대가 재래식 군비에 대한 투자를 줄여 줄 수 있고 그로 인해 생긴 여력을 경제 발전에 쓸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귀결될 공산이 크다. 북한이 핵무력을 증대할수록 미국과 그 주변 동맹국들의 제재와 압력도 커질 테니 말이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불가피하다는 일각의 주장과 달리, 철저한 평화주의자들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평화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반대한다. 핵무기 자체가 전쟁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꿀 만한 성질의 문제이고, 따라서 인류를 “절멸주의”의 위험으로 모는 모든 핵무기에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핵무기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이 주장은 진보 일각의 핵무기 변호론보다는 나은 측면이 있다.
28 실제로 절멸주의의 관점에서 유럽의 ‘핵무장 해제 운동CND’을 주도했던 신좌파 지식인 E P 톰슨은 핵폭탄이 계급 문제와 관계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관점으로는 전쟁과 제국주의의 위협을 없애는 데서 노동계급 투쟁이 갖는 핵심적 구실을 놓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몇 가지 약점이 있다. 우선, “절멸주의”를 강조하다 보면 공멸을 우려하는 모든 합리적 대중은 계급을 초월해 단결할 수 있다는 특정한 종류의 정치로 연결되기 쉽다. 즉, “핵무기를 거부하도록 광범한 사회 계층을 설득하고 정치인들에게 입법을 촉구하면 핵무기 없는 자본주의가 가능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또한 북한이 핵실험을 거듭하고 이게 남한의 민중 운동에 부정적 영향을 주다 보니, ‘한반도 비핵화’를 운동의 요구로 채택하자는 데 동의할 뿐아니라 사드 배치 반대 운동에서도 “사드 반대! 핵무기 반대!”를 구호 내지 요구로 채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반도 불안정의 구체적 맥락에서 “[모든] 핵무기 반대”라는 구호는 미·소가 핵무기 경쟁을 하던 냉전 때와 달리 ‘미국과 북한의 핵무기들이 대등하게 문제다’라는 대칭적 양비론에 뒷문을 열어 줄 수 있다.
사반세기의 교훈
25년 전만 해도, 북한은 핵무기도 중거리 미사일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북한은 핵실험을 거듭 실시하고 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 능력이 있는 국가로 변모해 있다. 전후 맥락을 잘 모른다면, 북한의 핵·로켓·군사 도발이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주범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오늘날 한반도 주변에서 세계 1위·2위·3위의 경제 대국들과 핵무기 강국(미·중·일·러)이 대립하고 군비 경쟁을 벌이는 현실에 견줘 보면, 북한의 ‘도발’은 사뭇 달리 보일 것이다. 그리고 지난 사반세기의 경험을 돌아본다면, 북핵 문제는 결국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과 북한 ‘악마화’가 낳은 괴물이라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상황 때문에, 북한 지배 관료들은 포위됐다는 의식에 사로잡히게 됐다.
미국의 북한 ‘악마화’는 결국 점증하는 제국주의 간 경쟁에서 우위를 유지하려는 미국의 패권 전략과 맞물려 있었다. 미국은 언제나 북핵 문제를 그 자체의 해결을 넘어 동북아에서 자국의 영향력과 주도권을 유지·향상시키는 문제와 연계해 생각했다. 그리고 이 점에서는 주변의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중국·러시아·일본)도 마찬가지다. 즉, 오늘날 한반도의 불안정과 북핵 문제는 제국주의 세계 체제의 문제이다.
그런데 그동안 진보진영의 주된 대응은 6자회담이나 북·미 대화 같은 국가 간 협상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협상을 재개해 한반도 평화협정과 비핵화를 병행 추진하는 게 현 불안정 상황에 대한 대안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하지만 지난 사반세기의 경험을 보면, 국가 간 협상으로 한반도 불안정을 해결하고 항구적 평화 체제를 수립하자는 전략은 거듭 좌절돼 왔다. 기존 제국주의 체제가 온존해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제적·지정학적 경쟁이 지속되는 한, 국가 간 대화로는 현실이 근본에서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한반도가 제국주의 체제와 항구적으로 “평화 공존”하는 것은 실현되기 어려운 공상이다.
그래서 1993~94년에 고조된 한반도 긴장과 전쟁 위기 앞에서 기본합의서와 비핵화선언은 아무 구실도 하지 못했다. 2005년 9·19 합의는 미국의 독자 금융 제재 실시와 북한의 핵실험을 막지 못했다.
게다가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6자회담 참가국들의 갈등은 커져 왔다. 미국은 자신이 주도하는 제도화된 협력 구조 속에 역내의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이 따르기를 바라지만, 이는 갈수록 어려운 일이 되고 있다. 중국은 많은 경우 독자적 이해관계를 추구하는데, 북한 문제도 그중 하나다.
이런 상황에서 북·미 대화든 6자회담이든 모종의 대화가 시작되더라도, 그것은 결국 새로운 긴장 국면 이전의 막간극에 그칠 공산이 크다.
제국주의는 주요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경쟁하는 체제이고, 자본주의 동역학을 바탕으로 한다.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의 새로운 심장부이자 점증하는 제국주의 경쟁의 한복판에 살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국가 간 협상이나 중국 같은 또 다른 제국주의 국가에 대한 잘못된 환상에 기대지 않은 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제국주의에 가장 효과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노동계급의 혁명적 운동을 건설하기 위한 발판을 놓아야 한다.
주
-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은 사거리가 3천~5천5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탄도미사일을 가리킨다. ↩
- 2016년 1월 6일 북한 4차 핵실험 당시 북한 <조선중앙통신>의 보도 전문. ↩
- 캘리니코스 1993. ↩
- 오버도퍼·칼린 2014, pp331-332. ↩
- 이때나 지금이나 미국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 그 자체보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 특히 일본의 핵무장 염원을 자극할 것을 우려해 왔다. 전 외교통상부 장관 송민순은 자신의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창작과비평사, 2016)에서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경험을 기록했다. “2006년 10월 북한이 1차 핵실험을 한 직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하노이 APEC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인 반응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북한의 핵실험에 대한 대응책을 거론하기 전에 먼저 일본의 핵무장 주장이 왜 급속히 대두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면서 어깨를 들썩였다”(p33). 부시는 북한의 핵실험보다 그것이 일본의 핵무장 의욕을 자극할 수 있음을 더 우려했던 것이다. ↩
- 페퍼 2005, p89. ↩
- 임동원 2015, p188. ↩
- 안문석 2016, p216. ↩
- 임동원 2015, p307. ↩
- 안문석 2016, p216. ↩
- 리영희 2006. ↩
- 페퍼 2005, pp90-91. ↩
- 김하영 2002, p92. ↩
- 임동원 2015, pp342-347. ↩
- 페퍼 2005, pp153-154. ↩
- 오버도퍼·칼린 2014, p600. ↩
- 그러나 18년이 넘은 2017년 3월 현재, 북한을 비롯한 불량국가들 중에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에 성공한 국가는 없다. ↩
- 하먼 2009, pp107-115. ↩
- 김하영 2007. ↩
- 당시 고농축 우라늄 계획의 진위 여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물론 2011년 11월 북한은 핵 전문가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 일행에게 영변에 설치한 우라늄농축시설을 공개한다. 그러나 2009년 4월 IAEA의 영변 핵시설 사찰 때는 지그프리드 헤커가 본 시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후에 건설된 시설인 것이다. 따라서 북한이 현재 우라늄농축시설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로는 2002년에도 북한에 고농축 우라늄 계획이 존재했다는 확신을 주지는 못한다. ↩
- 이종석 2014, p257. ↩
- 김종대 2010, p101. ↩
- 이종석 2014, p242. ↩
- 김종대 2010, pp102-105. ↩
- 송민순 2016, p205. ↩
- 김하영 2013. ↩
- 김종대 2013, pp258-268. ↩
- 캠벨 2017.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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