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러시아 혁명 100주년
1917년 2월 혁명 ─ 잔잔한 강물이 급류로 변하다 *
1917년 2월 러시아 노동자들은 대중에게 증오받던 황제를 타도하며 대중 항쟁의 과정을 시작했다. 이 항쟁은 그 뒤 8개월 동안 이어져 국가기구를 통째로 타도하는 데로 나아갔다. 에스미 추나라가 어떻게 대중의 분노가 혁명으로 변했는지를 설명한다. 에스미 추나라는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당원이고, 국내에 출판된 책으로는 《처음 만나는 혁명가들: 마르크스, 레닌,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그람시》(책갈피)의 공저자이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오고, 수많은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경찰서가 불에 타고, 감옥 문이 열렸다. 이런 믿을 수 없는 일들이 1917년 2월에 일어나 러시아 혁명의 불을 댕겼다.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아서 랜섬은 이 일들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혁명은 잔잔한 강물 같던 정치적 사태 전개를 급류로 바꾸었다. 이 급류 속에서는 매우 사소해 보이는 행동도 즉시 효과를 냈다.”
1917년 2월에 일어난 어마어마한 사건들은 블라디미르 레닌이나 레온 트로츠키 같은 위대한 볼셰비키 지도자들, 즉 그해 말에 일어날 사건에서는 결정적 구실을 하는 사람들이 일으킨 것이 아니다. 국제 여성의 날을 맞아 파업을 벌인 여성 섬유 노동자 수백 명이 일으킨 일이다. 이 여성 노동자들은 행동을 벌이지 말라는 윗선의 명령을 무릅쓰고 주변 금속 공장들로 대표자들을 보내 다른 노동자들에게 행동하라고 촉구했다. 그날 밤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파업을 벌인 노동자는 9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 행동들이 러시아의 역사는 물론이고 세계의 역사를 바꿀 눈이 휘둥그래질 만큼 놀라운 운동을 촉발할 것이라고, 그리고 그 뒤 1백 년 동안 감탄과 비난과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당시에는 아무도 없었다.
2월 23~27일(당시 러시아력 기준, 오늘날에는 3월에 속하는 날들)에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은 파업을 이 공장에서 저 공장으로 확산시키고, 거리를 점거하고, 포악하지만 절체절명에 빠진 독재 정권의 탄압을 거듭거듭 물리쳤다. 노동자들은 가족과 함께 학생 등 청년들과 함께 항의 운동을 벌였고, 운동 규모는 계속 커졌다.
국가는 무장 경찰과 군대를 보냈지만, 노동자들은 시위대에게 총을 쏘지 말고 함께 투쟁하자고 병사들을 설득했다. 당시 경찰 보고서들은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 시위대가 “해산하라는 군대의 명령에 매우 완강히 저항했다. 시위대는 길에서 주운 돌멩이와 얼음 덩어리를 군대를 향해 던졌다.”
일부 군대가 대중의 행동을 눈감아 주고, 이내 병사들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 혁명을 지지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겨우 닷새 만에 차르 정권이 무너지고 새로운 혁명의 시기가 열렸다. 그 뒤 파업과 시위는 모스크바 등 러시아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에 동참했다.
누구도 2월 혁명을 예상하지 못했다. 레닌조차 바로 한 달 전에는 자기 생애에 혁명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2월 혁명을 촉발한 대중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는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전 수십 년 동안 러시아 노동자와 농민들은 점증하는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다. 반면 부자들은 흥청망청 살았다. 17세기부터 러시아 제국을 통치한 로마노프 왕조는 점점 더 큰 경멸을 받았다. 차르 정권은 위기에 빠져 시베리아 출신 수도사 라스푸틴의 미신적 주문에 의존했다.
계급 차별과 대중의 고통은 러시아의 제1차세계대전 참전으로 더 증폭됐다. 제1차세계대전은 처음에는 애국 열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대량 살상이라는 전쟁의 현실이 분명해지면서 애국 열풍은 곧 사그라졌다. 러시아 군대는 현대식 유럽 군대들의 전쟁에 뛰어들기에는 너무 낙후했다. 러시아 군대는 여러 차례 궤멸적 패배를 당했다. 전쟁은 가뜩이나 사면초가 신세에 있던 러시아인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2백만 명이 전투 중에 사망했다. 민간인 사망자는 훨씬 더 많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포로로 잡혀 갔다.
전쟁과 혁명
러시아 병사들은 대체로 징병된 농민이었다. 그들은 땅에서 쫓겨나 음식도 장비도 군화도 제대로 보급받지 못한 채 전쟁터로 보내졌다. 장군들은 계속되는 군사적 패배와 늘어나는 탈영에 대처한다며 병사들에게 태형을 가했다. 이는 훨씬 더 큰 불만을 낳았다. 전방의 많은 병사들은 장군들이 “병사들의 피를 …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 낼 때까지 전쟁을 계속할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다고 트로츠키는 기록했다. 군대 내에서 좌파와 혁명가들의 목소리, 특히 이 제국주의 간 전쟁을 처음부터 반대한 볼셰비키의 목소리가 일반 병사들 사이에게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전쟁은 러시아 사회 곳곳에 영향을 끼쳤다. 전쟁의 대가를 가장 혹독하게 치른 사람들은 징집병 1천5백만 명과 그 가족들이었다. 농민을 징병한 것은 식량 생산의 위기도 야기했다. 전쟁 노력은 운송망의 독점화를 낳았고, 이 때문에 농촌에서 생산된 식량이 도시로 운반되지 못하는 일이 흔해졌다. 식량 부족이 흔한 일이 됐고 2월 혁명을 앞둔 시기 페트로그라드 주민들은 빵 한 덩이를 구하려고 줄을 서야 했다. 계급 간 갈등이 커지면서 1917년 1월 초에 이미 파업이 페트로그라드를 뒤흔들고 있었다.
혁명은 이런 난리판 속에서, 즉 지배계급이 위기에 빠지고 대중의 참상이 커지고 계급 간 갈등이 어느 때보다 분명해진 상황 속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그래서 혁명은 단지 경제적인 것(빵이나 임금)만이 아니라, 전쟁의 종식과 전제정의 폐지를 요구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지배계급은 혁명을 증오하는 동시에 과소평가했다. 차르는 퇴위하기 단 몇 시간 전에도 혁명가들을 “무뢰배”라고 부르며 깔봤다. 우파적 역사가들은 역사적 사건에서 대중이 벌이는 자주적 활동을 항상 낮추본다. 다른 세력에게 조종당하는 존재로 깔보거나 아예 없는 셈 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런 관점의 저서는 많지만, 러시아 혁명에 대한 수정주의적 분석은 사실 당시에 처음 나온 것이다. 그 분석은 이 놀라운 사건들을 쿠데타나 무지몽매한 무리들이 벌인 일로 치부했다.
하지만 사실 2월 혁명은 노동자 등 피억압·피착취 대중이 투쟁으로 일군 성과물을 지키려 거듭 싸움에 나서며 어떤 세력이 러시아를 통치할지를 결정하는 과정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1917년 2월 중대한 사건들이 일어나던 바로 그 순간, 노동자와 병사들은 1905년 혁명 때 나타난 직접민주주의의 기관, 즉 소비에트를 다시 만들어 냈다. 소비에트는 노동자와 병사들이 선출한 대표자들이 모이는 다당제적 평의회였다. 소비에트는 혁명 활동을 지도하며 빠르게 진정한 권력의 중심이 됐다.
혁명으로 차르가 타도됐음에도 소비에트는 권력을 직접 잡을 만큼 강력하지는 않았다. 소비에트는 공식 권력을 임시정부에 넘기기로 표결로 결정했다. 임시정부는 압도적으로 자본가 계급 인사들로 구성됐다. 자본가 계급은 혁명에서 겁쟁이이자 배신자의 구실을 했다. 자본가 계급은 옛 정권의 몰락이 확실해지고 나서야 옛 정권에 대한 지지를 거둬들였다. 이제 자본가 계급은 혁명을 지지한다는 말을 했지만, 그 목적은 혁명의 전진을 제약해 사회를 완전히 바꾸는 데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이처럼 2월 혁명은 대담함과 용기를 보였지만 권력을 자본가들에게 넘겨 줬고, 그래서 대중 행동의 폭발을 일으킨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었다. 지긋지긋한 전쟁, 식량 부족, 공장의 열악한 조건, 가난한 농민들의 토지 소유 등의 문제 말이다.
미국인 저널리스트 존 리드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유산계급은 정치 혁명만을 원했다. 차르에게서 권력을 이양받아 자신들이 차지하는 혁명 말이다. … 다른 한편, 대중은 공업과 농업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원했다.”
이중(이원)권력
왜 혁명을 이끈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지 않았을까? 레닌은 두 가지 요인이 있다고 봤다. 혁명 세력의 경험이 일천하다는 점, 소비에트 내 농민의 영향력이 과도하다는 점이 그것이었다. 혁명은 아직 초기 단계였고, 자본가 계급은 결코 신뢰할 수 없는 세력이라는 점이나 노동자 권력만이 전쟁을 중단시키며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 대다수 노동자와 혁명가들에게는 아직 분명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혁명에서 가장 잘 조직된 부문이었고 산업의 심장부에 있는 집단적 계급으로서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소비에트 안에서는 병사 대의원들이 노동자 대의원보다 훨씬 더 많았다. 앞에서 말했듯이 병사들은 대체로 농민 출신자들이었고 노동자들에 견줘 계급 간 갈등을 통한 단련을 덜 받았다. 이런 계급적 위치 때문에 병사들의 전망은 노동자들의 전망과 달랐다.
2월 혁명에 동참한 좌파 정당들의 문제도 있다. 그 정당들은 모두 권력을 자본가들에게 넘겨야 한다고 전제하는 이론을 갖고 있었다. 멘셰비키와 볼셰비키를 비롯한 모든 정당은 이 점을 근거로 러시아가 서유럽을 따라, 우선 자본주의적 발전의 시기를 맞이하는 혁명을 이루고 나서야 노동자 혁명을 꿈꿀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2월에 일어난 사건들은 1917년의 러시아 자본가들이 혁명적 계급이 아니었음을 보여 줬다. 또한 그 사건들은 노동자들이 수는 적지만 경제적·사회적 힘은 엄청나게 크고, 따라서 급진적인 새 사회를 위한 초석을 놓을 수 있음을 보여 줬다. 하지만 레닌이 러시아로 귀국하기 전까지 혁명 초기에는 혁명을 더 밀어붙여 노동자와 병사가 모든 권력을 손에 쥐어야 한다고 본 활동가는 극소수였다.
이런 한계가 있었음에도, 2월 혁명을 일으킨 노동자와 병사들이 혁명을 추동한 문제들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소비에트는 여전히 민주적 조직과 논쟁의 중심이었다. 2월 이후 러시아에는 사실상 두 가지 권력 중심이 존재했다. 기이하게도 임시정부와 소비에트가 한 건물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이 (계급 구성과 의제가 서로 다른) 이중(이원)권력 상황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해서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밀쳐 내고 나아가야 했다.
노동자의 다수가 스스로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여기고 자본가들을 믿지 못할 세력으로 인식하는 데로 나아가는 데는 몇 달 동안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 과정은, 볼셰비키 당(과 특히 레닌)의 의식적 개입에 힘입어 결국 앞서 말한 모순을 해소하고 혁명을 밀어붙이며 10월에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극적인 시기를 거치며 2월에는 소비에트에서 소수였던 볼셰비키가 10월에는 다수가 되고, 봉기를 이끌었다.
그런데, 2월에 볼셰비키는 어디에 있었을까? 레닌을 포함한 많은 당원들은 해외로 망명을 가 있었다. 10월에는 혁명의 핵심 지도자 중 한 명이 되는 트로츠키도 해외에 있었다. 트로츠키는 1917년 7월에야 볼셰비키 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그 외 많은 볼셰비키 당원들은 감옥이나 노동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볼셰비키 당의 페트로그라드 지도자들은 2월 혁명의 초기 며칠 동안 체포돼 있었다.
볼셰비키는 다른 좌파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2월 혁명에서는 별 구실을 하지 못했다. 볼셰비키는 노동계급이 일으킨 반란에 어안이 벙벙했다. 반란이 일어난 지 사흘째 되는 날에 볼셰비키가 마침내 처음으로 전단을 발행해 총파업을 호소했는데, 페트로그라드의 대중 파업은 이미 무장 봉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자생성과 지도
하지만, 그에 앞선 수년 동안 볼셰비키가 벌인 선동과 혁명적 활동은 2월 혁명에 영향을 끼쳤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걸작 《러시아혁명사》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 많은 사람들이 2월 혁명의 자생성을 얘기하지만, 사실은 과거 투쟁의 교훈을 간직하고, 다른 사람들을 지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주장하고, 사건들을 해석하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역량을 갖춘 노동자와 병사들이 2월 혁명을 이끈 것이라고 말이다.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들 유기적 지도자들은 “대부분 레닌의 정당에게 교육받은 의식적이고 투쟁적인 노동자들이었다.”
물론 오늘날의 세계는 1917년 2월의 러시아와 상당히 달라 보인다. 적어도 유럽에는 독재적 군주도 없고 3년에 걸쳐 일어난 산업화된 대규모 전쟁도 없고 식량 폭동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계급으로 첨예하게 분할되고 위기와 불안정을 특징으로 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100년 전 러시아의 경험에서 배울 것이 많이 있다. 첫째, 대중 투쟁의 놀라울 정도로 신속한 회복력과 창의성이다. 둘째, 노동자들은 집단적으로 저항할 힘만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민주적이고 공정한 사회의 토대를 놓을 힘이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 혁명이라는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난 것을 보면, 역사가 예측 가능한 점진적 진보의 산물인 것이 아니라, 충돌, 투쟁, 후퇴, 쏠림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2월 혁명은 존 리드의 말을 빌리면, 러시아를 “중세에서 20세기로 도약하게 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혁명적이든 그렇지 않든 투쟁은 혁명가들이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예고 없이 흔히 예기치 못하게 일어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투쟁은 어떻게 전진할 것인지, 누구를 신뢰해야 하는지, 어떤 전술을 사용해야 하는지, 어떤 요구를 추구해야 하는지를 둘러싼 논쟁을 일으킨다. 혁명적 당으로 조직돼 있고 노동계급에 뿌리 내린 사회주의자들은 그런 논쟁에 뛰어들어 예컨대 이민자가 아니라 지배자들을 비난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투쟁이 전진하도록 애쓸 수 있다. 그러면서 그 기회를 이용해 우리가 직면한 더 넓은 문제들을 제기할 수 있다.
투쟁은 일어나고야 만다. 이 세계가 불평등하고 착취적이고 억압적이라는 사실 자체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투쟁이 어떻게 끝나고 어디로 이끌릴지는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다. 100년 전 혁명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들은 자본주의가 낳는 파괴와 절망을 제거하는 지름길은 없음을 보여 준다.
더 읽을 거리
존 리드, 《세계를 뒤흔든 열흘》, 책갈피.
토니 클리프, 《레닌 평전 2: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책갈피.
MARX21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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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sme Choonara, From the slow river into a rapid, Socialist Review(February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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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존 리드, 《세계를 뒤흔든 열흘》, 책갈피.
토니 클리프, 《레닌 평전 2: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책갈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