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러시아 혁명 100주년
부자가 아니라 민중을 위한 민주주의 *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기회로 중요한 물음들을 재검토하고자 한다. 샐리 캠벨은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이 러시아 혁명을 낳았다고 주장한다.
《레닌의 무덤》의 저자이자 잡지 《뉴요커》의 편집자인 데이비드 렘니크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의 핵심 인물인 레닌이 “마치 점토 모형이라도 되는 양, 사회 공학을 통해 새로운 유형의 인간 본성과 행위를 창조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렘니크는 리처드 파이프스의 저작을 그 근거로 드는데, 파이프스는 러시아 혁명에 비판적인 우익 역사학자로 러시아 혁명을 “한 국가의 모든 생명을 거창한 계획에 종속시키려는 시도”라고 본다. 이들 모두 러시아 혁명은 레닌의 머릿속에서 나온 엄격하게 통제된 음모였고, 필연적으로 독재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통설을 의도적으로 유포한다.
그러나 1918년 레닌 자신의 말로도 이런 주장을 반박할 수 있다.
일개 정당이나 일개 개인의 의지로 혁명이 일어나거나, 또는 그자들이 부르짖는 것처럼 ‘독재자’의 의지로 혁명이 일어나고 대중 반란이 뒤따른 것이라는 주장은 가소롭기 이를 데 없는 주장입니다. 혁명의 불꽃이 타오른 이유는 오로지 러시아 민중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고통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낳은 참혹한 환경이 노동자들을 대담하고 결사적이며 용감한 한 걸음을 내디딜 것인지 아니면 굶주림으로 죽어 가며 파멸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러시아 혁명 100주년 내내 이런 주장을 반복적으로 듣게 될 것이다. 레닌과 볼셰비키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폭력적인 봉기를 이끌어, 1917년 2월에 차르 독재가 무너지면서 부상한 초기 의회 민주주의를 짓밟았다는 주장 말이다. 그러나 2월의 정치혁명을 낳은 자발적인 대중 파업의 분출부터 노동자 권력을 쟁취한 10월의 조직된 반란까지 1917년 혁명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수준으로 직접 민주주의가 펼쳐진 경험이었다.
이는 당시 러시아가 제한적인 의회적 대의민주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는 의미다. 레닌에게 혁명이란 “무한히 확장된 민주주의로, 부자들을 위한 민주주의가 아닌, 사상 최초로 가난한 자들과 민중들을 위한 민주주의”였다.
지난해 미국 대선의 기괴한 광경을 보면, 이 말이 오늘날에도 적절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민주주의란 투표 부스에 홀로 들어가서 지배계급의 대표들 중 하나를 뽑는 것을 의미한다. 트럼프의 입에 발린 소리와 달리, 트럼프는 “부자”들의 전형이다. 또한 힐러리 클린턴이 당선했다면, 그녀는 지난 28년 중 21년 간 백악관을 장악했던 두 정치 왕조 중 하나의 일원으로서 여전히 지속하는 자본주의를 대표했을 것이다.
이런 것은 자본주의의 일탈이 아니다. 한 세기 전 마침내 투표권이 더 넓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확대됐을 때 많은 사회주의자들과 노동계급 민중들이 염원했던 것과는 달리, 의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았다. 실제 권력은 여전히 자본가 계급이 쥐고 있다. [지배자들은]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굴복해 더 넓은 계층에게 투표권을 내놓기는 했지만, 권력을 내준 것은 아니었다. 랠프 밀리반드는 이렇게 적었다:
정치인들이 ‘민주주의’를 전용했다는 말은 그들이 [적어도] 민주주의로 개종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민주주의라는 ‘악령’을 내쫓으려는 시도였다. … 면밀하게 제한되고 적절하게 통제된 민주주의 조처는 용인할 수 있었고, 어떤 측면에서는 바람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한도를 넘어서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허용하지 않았다.
협박
그뿐 아니라 유권자들이 현 상황에 도전하려는 대표자들을 뽑더라도 결국 실망하게 된다. 2015년 1월 그리스에서 급진좌파이자 반反긴축정당인 시리자가 ‘트로이카’[유럽연합·유럽중앙은행·국제통화기금]의 재정적 협박을 거부한다고 천명하면서 당선했을 때, 유럽연합이 [그리스] 민중의 뜻을 거부하지 못할 것이라고 많이들 생각했다. 그러나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부회장 이위르키 카타이넨은 [선거 결과를 따를 뜻이 없음을] 분명하게 밝히며 “우리는 정책을 투표로 결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정책을 바꾸지 않았다. 긴축정책은 그대로 강요됐고, 시리자 정부는 협박에 굴복했다.
제레미 코빈이 노동당 당수로 선출됐을 때, 익명의 고위 군 장성은 코빈이 총리가 돼 “영국의 힘을 훼손시키려 한다면”, 군부가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의회민주주의가 위협 받을 때] 이를 방어해야 하지만, 의회민주주의가 제공하는 자유는 제한적이고,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지배가 심각하게 위협받을 때 의회를 없애 버릴 것이란 점도 알아야 한다. 1973년 칠레에서 그런 일이 발생했다.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으로 세워진 정권이 칠레 자본주의를 위협하자, 군 장성 피노체트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분쇄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이탈리아와 독일의 지배계급은 파시스트 운동에 권력을 제공해 노동자 운동의 반란을 분쇄했다.
민주주의에 관한 가장 명료한 마르크스주의 저작은 1917년 레닌의 경험으로부터 나왔다. 10월 혁명의 전야에 레닌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저작 중 하나인 《국가와 혁명》을 출간했다.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국가에 관해 쓴 저작을 돌아봤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국가는 계급 지배 기관, 즉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기관이다. 또한 국가는 계급 갈등을 완화시킴으로써 계급 억압을 합법화·영속화하는 ‘질서’의 창조물이다.”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이 분석을 왜곡해, 국가가 계급 갈등을 조정 ― 심지어 극복 ―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자본주의 사회의 두 가지 기본적인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첫째, 의회에서 누가 다수가 되더라도 대개 자본주의 경제 권력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예컨대,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은행과 기업을 운영하는 자들은 투표로 선출되지 않는다. 둘째, 국가의 핵심부에는 선출되지 않는 위계화된 집단 ― 경찰, 군대, 사법부, 고위 공무원 ― 이 있고, 이 집단의 지도부가 자본가들의 이해관계를 열렬히 대변한다는 것이 거듭 입증됐다.
마르크스의 이론을 정확하게 해석하면, 피억압계급을 해방시킬 유일한 방법은 “지배계급이 만든 국가 권력 기구”를 완전히 전복하고 분쇄한 다음 더 민주적인 사회 운영 방식으로 교체하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폭탄선언
2월 혁명과 차르의 퇴위 이후, 임시정부가 수립돼 러시아를 통치했다. 처음으로 자유로운 정당 활동이 가능해졌고, 선거로 집권할 수 있는 전망이 생겼다. 2월에 거리로 나갔던 이들은 이러한 러시아 정치 체계의 진보를 찬양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대중 권력을 대변하지 않았다. 계급 지배는 여전히 존재했다. 러시아가 제1차세계대전에 여전히 참전함으로써 민중은 고통, 기아, 죽음으로 내몰렸다. 레닌은 4월에 망명을 끝내고 러시아로 돌아와서, 혁명이 더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의 “4월 테제”는 폭탄선언이었다. 레닌은 사실상 이렇게 말했다: 자화자찬은 이제 멈추고, 사회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자유민주주의적 권리로는 충분치 않다. “모든 인쇄설비가 부르주아지의 손에 있고, 부르주아 정부가 그걸 지키고 있는데, 표현의 자유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2월 혁명 과정에서 또 다른 형태의 민주주의적 기관이 생겼다. 바로 소비에트, 즉 노동자·병사평의회였다. 소비에트는 [의회보다] 훨씬 더 직접적인 형태의 민주주의적 기관으로, 아래로부터 노동자들의 요구를 즉각 반영하기 위해, 1905년 혁명 초기 노동자들이 만들었던 기관을 모델로 만들어졌다. 소비에트는 작업장, 지역사회, 도시에 기반을 뒀고, 투쟁 과정에서 의사 결정을 내리는 기관이었다. 심지어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혁명기 러시아에서 소비에트는 여전히 권력의 실질적인 중심이었다. 흔히 노동자들과 병사들은 임시정부의 명령이라도 소비에트가 승인하지 않으면 거부했다.
2월부터 10월까지의 혼란 속에서 최초의 자유로운 지방의회 선거가 5월과 6월에 실시됐다. 약 40퍼센트가 투표하지 않았다. 역사가 마르크 페로는 이런 결과가 사람들이 소비에트의 더 직접적인 민주주의를 임시정부의 대의 민주주의보다 선호했음을 보여 주는 결과라고 주장한다: “더 나은 통치나 통치 형태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누가 통치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됐다. 모든 권력 위임 논의는 혹독하게 비판 받았고, 어떤 권위도 용납되지 않았다.”
러시아 혁명을 목도한 이들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해에 사람들에게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 증언했다. 미국인 기자 존 리드는 자신의 책 《세상을 뒤흔든 열흘》에서 이렇게 적었다. “모든 길모퉁이는 공개연단이 됐다. 기차와 시내 전차 곳곳에서 항상 즉흥적인 토론이 분출했다.” 대중의 정치 토론은 의회의 어떤 토론보다 더 뛰어났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볼셰비키든, 사회혁명당이든, 아나키스트든, 누가 어떤 내용으로 하건 연설이 시작되기만 하면, 푸틸로프 공장에서 4만 명의 노동자들이 몰려나와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혁명적 투쟁은 평생토록 천대 받고 차별 받으며 착취 당하는 이들 안에 있는 무언가를 끌어냈다. 그리고 그 결과 훨씬 더 큰 변화의 가능성이 열렸다. 국가와 계급 지배의 문제만 해결할 수 있었다면 말이다.
볼셰비키 비판자들은 불길해 보이는 문구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들먹이며, 혁명의 비민주적인 성격을 경고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의미하는 것은 정반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이전 자본주의 독재자들에 대한 압도 다수의 지배를 뜻한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압도 다수 대중을 위한 민주주의이자 다수 대중의 물리력을 통한 착취자과 억압자에 대한 억압, 즉 그들을 민주주의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착취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궁극적으로 계급 자체를 폐지할 사회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임시 단계라고 생각했다. 계급과 착취가 뿌리뽑히면, 국가는 “시들어 죽게” 될 것이라 보았다. 레닌은 또한 이렇게 썼다. “국가가 존재하는 한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가 존재한다면, 국가는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이와 같은 레닌의 견해는 실현되지 못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혁명은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국외 열강들은 러시아를 침략했다. 이로 인한 내전으로 1917년에 만들어진 초기의 민주적 기관들이 파괴됐고, 결국 1920년대 후반에는 스탈린이 이끈 반혁명이 있었다.
레닌이 말한 변화는 스탈린주의 독재와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왜냐하면 레닌이 말한 변화는 노동자들의 자력 해방에 뿌리를 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와 가난한 농민들이 가진 저항의 힘을 아직 보지 못했다. 권력이 프롤레타리아의 손에 들어올 때, 빈곤에 시달리며 자본주의의 노예로 살던 수천만 대중이 경험을 통해 국가 권력이 피억압 계급의 수중에 넘어왔음을 깨닫게 될 때 그들의 힘이 만개할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지난해 한국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퇴진시키기 위해 행진한 수백만 명에게서 볼 수 있다. 또한 6년 전 이집트에서 무바라크를 무너뜨린 민중에게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에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 다수의 민주적 투쟁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의 출발을 볼 수 있다.
MARX21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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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ally Campbell, Democracy for the people, not for the money-bags, Socialist Review (January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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