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러시아 혁명 100주년
러시아 혁명과 여성해방
1백 년 전 1917년 3월 8일(러시아 구력으로는 2월 23일), 세계 여성의 날에 러시아 페트로그라드 여성 노동자들이 2월 혁명을 촉발했다.
그들은 이것을 여성들만의 투쟁으로 보지 않았다. 대표자를 선출해 지지 호소문을 들고 남성들이 있는 이웃 공장을 돌면서 파업에 동참하라고 촉구했다. 그들은 남성 노동자들과 함께 “빵을 달라”, “차르를 타도하자”, “전쟁을 중단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파업과 시위를 벌였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진압하러 온 사병들과 친교를 맺고, 상관의 명령에 불복해 발포를 멈추라고 사병들을 설득했다. 수십만 명이 파업에 들어갔고 많은 부대들이 노동자 편에 서기 시작했다. 결국 차르는 폐위됐다.
당시 러시아 여성들은 지위가 매우 낮았다. 1861년 농노제가 폐지돼 땅이 없는 농민들이 일자리를 구하려고 도시로 몰려와서 노동자가 됐다.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의 절반도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며 매일 13~14시간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해고당하지 않으려고 마지막 순간까지 임신 사실을 숨겼고 아이를 낳은 바로 다음 날에도 일을 나가곤 했다. 직장에서 성차별주의는 용인됐고, 여성은 공공연히 남편과 아버지의 소유물로 취급됐다. 농촌 지역에서는 결혼식 날 신부의 아버지가 신랑에게 아내를 다스릴 채찍을 넘겨주는 것이 관습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온갖 멸시와 천대 속에서도 1890년대 대파업과 1905년 혁명기, 1913∼14년 대규모 파업 등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1905년 혁명기에 여성 노동자들은 산전·후 휴가와 수유시간 보장, 직장 내 성희롱 금지 같은 요구들을 내세우며 투쟁했다. 1905년 혁명 기간에 여성들은 거리 곳곳에서 출산의 권리와 탁아소 같은 이슈에 관해 토론했다. 스스로를 조직하고 투쟁하면서 여성들은 천성적으로 수동적이고 후진적이라는 뿌리 깊은 편견에 맞섰다. 사회의 여성 이미지는 변하기 시작했다.
여성 노동자 수는 1차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빠르게 증가했다. 전쟁이 시작할 무렵 여성 노동자들은 전체 노동자의 3분의 1이었는데 1917년에는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차르가 폐위되고 자본가들의 임시정부와 노동자·농민들의 소비에트 체제가 공존하는 이중(이원)권력 상태가 지속됐다. 임시정부는 여성들의 삶과 고통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계속되는 전쟁과 경제 침체, 물가인상, 식량 부족 등으로 상황은 날로 악화했다. 식량을 구하려고 날마다 가게 앞에서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임시정부에 대한 불만은 높아졌고 고용주들에 맞선 투쟁은 여성 노동자들을 급진화시켰다. 혁명 과정에서 남성의 성차별적 의식도 도전받았다.
여성들은 10월 혁명으로 가는 기초를 닦았던 노동자 운동의 중요한 일부였다. 1917년 2월부터 5월에 이르는 잇따른 파업의 결과로 숙련 노동자들의 임금은 59퍼센트, 미숙련 노동자들의 임금은 1백25퍼센트가 인상됐다. 대부분 미숙련 노동자들이었던 여성들이 많은 이득을 얻었다. 5월과 6월에도 세탁소 노동자들을 비롯한 서비스 분야 여성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 모성 보호, 몸수색 중단 등을 요구하면서 투쟁했다.
볼셰비키의 구실
많은 역사가들은 2월 혁명이 순전히 자발적이었다고 평가한다. 물론 2월 혁명은 ‘계획된’ 것이 아니었지만, 혁명 과정이 오로지 대중의 자발성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트로츠키가 《러시아 혁명사》에 썼듯이, “대체로 레닌의 볼셰비키당이 교육시킨 의식적이며 훈련된 노동자들이 혁명을 지도했다.”
레닌은 일찌감치 여성 차별 문제와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에 관심을 가졌다. 레닌은 19세기 말에 자신이 몸담았던 페테르스부르크 노동계급 해방투쟁동맹에서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리플릿을 작성했고, 그의 아내이자 동지인 크룹스카야는 여성 노동자들의 처지를 고발하면서 사회주의 사회 건설로 해결할 수 있다는 글을 쓰기도 했다. 억압 문제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출발점은 언제나 피억압자들과의 연대였다. 레닌의 말을 빌면, 사회주의자들은 언제나 온갖 형태의 불의에 맞서 싸우는 “인민의 호민관”이어야 한다. 억압과 사회주의는 함께 존재할 수 없고, 전체로서 노동계급은 옛 사회를 전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다.
당시 남성들에 맞선 모든 여성들의 단결을 추구했던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은 제1차세계대전을 지지하고 파업과 시위를 비난했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했다. 멘셰비키는 이런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과 타협한 반면, 볼셰비키는 비타협적으로 맞서 싸웠다. 1913년 겨울에 볼셰비키는 당의 일간지 〈프라우다〉에 보내온 여성 독자들의 편지가 쇄도하자 여성을 위한 신문 〈라보트니차〉(노동 여성)를 만들었다. 비록 다음 해에 전쟁이 터지면서 발행이 중단됐지만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라보트니차〉 발행 기금 마련 호소에 응답했다.
볼셰비키는 여성 노동자들의 정치의식 발전과 잠재력에 주목하면서 이들의 투쟁을 적극 지지·지원했다. 미조직 여성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끌어들였고, 사병들의 아내도 조직했다. 그들을 사회주의 운동에도 참여시켰다.
볼셰비키는 성차별에 도전하면서 여성 노동자들과 남성 노동자들의 단결을 거듭 강조했다. 예컨대, 금속 산업의 남성 공장 대표자들이 자신들은 가장이고 여성들의 임금은 보조수단이라며 여성의 일자리를 희생시켜 대량해고에 대처하자고 했을 때, 볼셰비키는 이런 성차별적 전술에 맞서 싸웠다. 불평등한 임금에 반대해 투쟁하기도 했다.
레닌은 1917년 2월 혁명으로 생겨난 소비에트에서 대중의 편견과 여성들의 자신감 부족으로 여성 대표자들이 극도로 적은 것을 보면서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 여성들의 정치 활동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로 〈라보트니차〉가 복간됐다. 〈라보트니차〉는 여성 노동자들의 광범한 관심사뿐 아니라 남성 동료들을 겨냥해 여성들이 노동운동의 본질적 일부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1860~1930년의 러시아 여성 운동을 연구한 리처드 스타이츠는 1917년에 볼셰비키가 멘셰비키보다 여성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요구에 더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의 투쟁을 돕는 데 더 많은 에너지와 자원을 쏟았다고 평가했다(McDermid & Hillyar 1999 참고).
무엇보다 볼셰비키는, 지긋지긋한 전쟁을 지속하고 7월 노동자들의 시위와 폭동을 진압한 임시정부에 맞서 싸웠다. 또 8월에 우익 장군 코르닐로프가 임시정부를 전복하려고 일으킨 쿠데타를 앞장서서 막았다. 자본가들에게 비타협적으로 반대하며 노동자들의 권력 장악을 이끈 볼셰비키의 활동은 수많은 노동자·농민들의 지지를 받았고, 마침내 10월에 소비에트는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여성 해방을 위한 급진적 조처들
10월 혁명으로 탄생한 노동자 국가는 급진적인 여성 해방 법령을 선포했다. 노동계급 혁명은 당시 어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성취한 적이 없는 여성 해방 조처들을 추진했다. 고용 평등과 동일임금, 여성들의 완전한 투표권을 보장했다. 당시 참정권이 모든 여성들에게 도입된 나라는 노르웨이와 핀란드밖에 없었다. 유급 출산휴가를 전면 도입하고, 직장 내 모유 수유와 3시간마다의 휴식을 보장했다. 이혼을 간소화했고 1920년에는 세계 최초로 낙태를 합법화했다. 간통, 근친상간, 동성애 처벌 같은 억압적 법률도 폐지했다.
이런 법적 개혁은 여성 해방을 위한 첫걸음이었다. 여성 해방을 실질화하려면 전통적 가족의 경제적 토대를 공격해야 했다. 그래서 상속권을 폐지하고 양육과 가사를 사회화하기 시작했다. 1919∼20년에 페트로그라드 인구의 90퍼센트가 공공식당을 이용했고, 모스크바 인구의 40퍼센트가 공공주택에서 생활했다. 러시아 38개 지방에 탁아소가 세워졌다.
러시아 혁명은 성에 대한 태도에서도 급진적 변화를 낳았다. 이혼의 자유가 보장되고 전통적 가족에 관한 도전이 이뤄지면서 1917~20년에 섹슈얼리티에 관한 토론과 실험이 전국적으로 이뤄졌다. 볼셰비키의 기관지 〈프라우다〉는 성에 관한 많은 기사와 편지를 싣었다. 성매매는 비범죄화됐고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났다고 해서 수 세대에 걸쳐 남녀 노동자들의 마음속에 주입된 성차별적 편견이 단번에 사라지지는 않는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은 악몽처럼 살아있는 사람의 머릿속을 짓누른다.”
새로운 법률들을 현실화하고 여성들의 정치 활동 참여를 고무하고자 당 내에 제노텔(여성부)을 만들었다. 레닌은 “여성의 적극적 참여가 없다면 혁명은 승리할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제노텔 창설과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내전에서 러시아 혁명을 지키는 적군赤軍을 이끈 트로츠키도 레닌과 함께 여성 노동자·농민 대회에 참가해 여성들의 활동을 격려했다.
제노텔의 초대 의장은 이네사 아르망이었고, 아르망이 죽은 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그 일을 이어받았다. 여성 볼셰비키가 제노텔 활동을 주도했지만 남성 볼셰비키도 회의 참석을 비롯해 이 과업에 참여하는 것이 당연시됐다. 제노텔은 낙후한 농촌을 포함해 러시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여성들의 새로운 권리를 알렸다. 여성 클럽을 만들고 정치 토론·워크숍을 진행했다. 여성 문맹률이 매우 높아서 문맹 퇴치 학교를 12만 5천 개 넘게 만들었고 여성 독자를 겨냥한 간행물도 많이 발행했다.
제노텔 활동가들은 내전에도 참여해 의료 지원과 통신원 역할을 맡기도 했고, 적군赤軍의 정치적 부서에서 일하기도 했다. 이들 여성에게 내전은 자유를 위한 전쟁이었고, 7만 명 이상의 여성이 참가했다. 적군에 참여한 여성들의 수는 제1차세계대전에 참가한 여성들의 수보다 많았다. 적군은 전쟁 물자 부족에도 불구하고 제노텔에 전용 열차와 철도망을 제공했다.
제노텔의 활동은 노동계급 여성들의 삶과 의식을 광범하게 변화시켰다. 1920년대 중반에는 여성 5만여 명이 ‘여성 노동자·농민 대표자대회’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들은 공공시설 건설을 조직했고, 2∼3개월의 교육 과정에 참여한 뒤 민중법원에서 판사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볼셰비키 여성 당원들도 대폭 늘어났다.
볼셰비키의 여성 해방 활동 전반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제노텔이 여성을 혁명에 동원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당의 전달벨트에 불과했다며 폄하한다. 그러나 제노텔 활동은 볼셰비키의 일방적 전달 과정이 아니었다. 많은 여성들이 낡은 억압을 끝장내는 변화를 열렬히 지지하며 제노텔 활동에 참가해 혁명을 전진시키려 했다.
혁명의 후퇴
안타깝게도 여성 해방을 향한 꿈은 지속되지 못했다. 14개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의 지원에 의한 내전과 경제 붕괴로 여성 해방의 과제는 벽에 부딪혔다. 1918년 말부터 1920년 말까지 돌림병과 굶주림, 추위로 러시아인 9백만 명이 죽었다(제1차세계대전으로 전 세계에서 죽은 사람이 4백만 명이었다).
이런 참혹한 상황에서 경제를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조처로 시장 경제의 요소를 일부 도입한 신경제정책(1921~28년)이 시행됐다. 그로 인해 실업이 증가했는데, 대부분 미숙련 노동자들이던 여성들이 심한 타격을 받았다. 공공식당·공공세탁소 등 공공시설이 급격히 쇠퇴했다.
가난한 러시아의 노동자 국가가 생존하려면 유럽, 특히 독일 혁명이 성공해 도움을 얻어야만 했다. 그러나 유럽의 혁명이 모두 패배하면서 러시아 혁명은 완전히 고립됐다.
선진 노동계급이 대부분 내전에서 목숨을 잃고 경제 붕괴로 노동계급이 사실상 해체됐다. 이런 상황에서 스탈린을 중심으로 한 관료층이 성장했다. 스탈린은 1928년 선진 자본주의 열강들을 따라잡기 위해 대대적 산업화와 강제적 농업 집산화를 추진하면서 남은 혁명의 성과를 모조리 분쇄하는 반혁명을 저질렀다. 그 뒤 러시아는 더는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바뀌었다. 서방과의 군사적 경쟁과 축적을 위해 착취가 무시무시하게 강화되면서 여성의 필요도 무시됐다.
동일임금 대신 성과급 제도가 추진됐다. 가족의 신성함을 떠벌리면서 순결과 모성을 찬양했다. 아이를 많이 낳은 여성에게 메달을 수여하기도 했다. 낙태와 동성애는 불법화됐다. ‘성적 방종’, ‘성급하고 쉽게 하는 결혼’, ‘간통’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강력하게 벌어졌다. 제노텔은 1930년에 폐지됐고 수십 년 동안 성 평등 쟁점은 공식 논의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성 문제에 대한 콜론타이와 레닌의 의견 차이에 주목하면서 여성 해방이 좌절된 것이 혁명 전후로 남성 혁명가들을 비롯한 남성들의 무관심과 저항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1920년대와 반혁명이 일어난 후인 1930년대의 성과 가족 정책을 연속선상에서 비판한다.
그러나 1917년 혁명 당시 볼셰비키 당원의 90퍼센트는 남성이었지만 내전과 봉쇄의 엄혹한 상황에서도 급진적인 여성 해방 조치들을 취했다. 여성 해방을 혁명 뒤로 미루기는커녕 여성 해방을 위해 투쟁한 수십 년의 역사가 있다.
1920년대의 성과 가족 정책이 혁명 초기 몇 년 간의 정책보다 다소 후퇴하긴 했지만 당시 경제적 상황이 강요하는 불가피한 후퇴였지 1930년대의 의식적인 억압과는 차원이 달랐다. 소비에트 가족 정책을 조사한 몇몇 연구자들도 1930년대, 특히 1930년대 중반부터 가족 정책이 이전의 급진성을 버리고 보수적으로 바뀌었다고 평가한다.
콜론타이와 레닌의 의견 차이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 둘 다 노동자 혁명과 여성 해방의 과제가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봤다. 차이는 곤경에 처한 노동자 국가가 개인의 삶과 성적 관계를 어느 정도의 속도로 추진하고 강조점을 둘 것인가의 전술적 문제였다. 1920년대 초·중반 성의 자유와 전통적 가족 질서의 해체라는 콜론타이의 주장은 당 안팎에서 “물 한 잔 이론”(섹스는 물 한 잔 마시는 것처럼 쉬워야 한다)으로 알려졌지만, 콜론타이의 견해가 그런 단순한 성 개방주의는 아니었다. “성과 계급투쟁”이라는 글에서 콜론타이는 개인들의 성의 관계와 가족 관계에 대한 낡은 관념의 변화가 새로운 사회를 위한 투쟁 과정에서 형성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여성 해방과 성적 자유를 계급투쟁과 긴밀히 연결시켰다. 성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형성되고 갈등을 겪는지를 묘사한 대목은 오늘날 읽어 봐도 놀랍도록 현대적이고, 무엇보다 성 해방을 사회 전체의 변혁과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선구적인 견해였다.
1920년대 초 콜론타이의 정치적 영향력 저하는 성 쟁점에서 급진적 견해를 펼친 결과였다기보다 콜론타이가 이끈 노동자반대파의 주장과 강령이 당내 논쟁에서 패배한 결과였다. 노동자반대파는 내전으로 경제가 붕괴하면서 생겨난 노동자들의 불만을 반영했지만 그 분파의 강령은 경제적 난국을 해결할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1920년대에 볼셰비키가 처한 경제적·정치적·군사적 난관을 이데올로기나 의지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다. 러시아 혁명 이후 여성 해방의 최대 난관은 물질적 자원이 극도로 부족한 것이었다. 선진 자본주의에서의 노동자 혁명이 실패해 러시아 혁명이 고립되고 노동자 권력이 쇠퇴하고 무너지면서 여성 해방의 꿈도 좌절됐다.
러시아 혁명은 결국 패배했지만 짧은 기간이나마 여성 해방의 가능성을 보여 줬다. 역사상 최초로 러시아의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노동계급과 피억압자들의 해방을 위해 시도한 일들은 오늘날 착취와 차별에 맞서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준다.
오늘날 착취와 억압을 무너뜨릴 여성들의 잠재력은 더욱 커졌다. 1백 년 전 러시아보다 더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남성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며 이 사회의 부를 창조하고 있다. 이들이 정부와 사장들에 맞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운다면, 진정한 변화를 성취할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참고 문헌
로젠버그, 하니 1991, 《소련 여성과 페레스트로이카》, 한울.
정진희 엮음 2015,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여성해방론—콜론타이·체트킨·레닌·트로츠키 저작선》, 책갈피.
클리프, 토니 2008, 《여성해방과 혁명》, 책갈피.
McDermid, Jane & Hillyar, Anna 1999, Midwives of the Revolution, UCL Press.
Davis, Emma, ‘Women could feel their power’, Socialist Review, March 2017.